삶에 있어서 절실한 것, 절절한 것은 거의 대부분 환상처럼 보인다.그것이 환상처럼 보이는 것은 그것이 삶의 밋밋함과 대립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절실한 것이 이뤄지는 순간은 너무나 짧고 아름답기때문에 밋밋한 삶 속에서 지속되기 힘들다, 아니 지속되지 못한다.그것은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환상의 빛과도 같다. 

도스토옙스키의<도박사>의 주인공에게 있어 그 절실한 것은 도박에서의 성공인데,그것은 언제나 짧다. 그래서 그 성공은 환상적으로 보이는데, 그는그것을 오래 지속하려 한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미치광이 도박꾼취급을 한다. 그러나 그가 견딜 수 없는 것이 삶의 밋밋함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절실하기 때문에, 도박할 때 육체는 떨리고 마음은 급해진다. 일상인들은 그 순간을 환상으로 돌리고 삶의 밋밋함 으로 곧 되돌아온다.그돌아오는 속도가 빠르고 정확할수록 그는 잘 적응한 일상인이 된다. 된다니! 그는 잘 적응한, 성공한 일상인이다. 그는 일상 속에 되돌아와 중얼거린다:저놈은 돌았어.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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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 생각으로는, 자기의 욕망이 무엇에 대한 욕망인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욕망인지가 분명하면,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면, 무엇을 왜욕망하는지를 우선 알아야 한다. 그 앎에 대한 욕망은 남의 글을읽게 만든다. 

남의 이야기나 감정 토로는 하나의 전범으로 그에게작용하여, 그는 거기에 저항하거나 순응하게 된다. 저항할 때 전범은 희화되어 패러디의 대상이 되며, 순응할 때 전범은 우상화되어숭배의 대상이 된다. 

나는 누구처럼 되겠다가 아니면, 내가 왜 그렇게 돼가 된다. 그 마음가짐은 그의 이름 붙이기 힘든 욕망을 달래고, 거기에 일시적인 이름을 붙이게 한다. 왜 일시적인가 하면, 전범은 수도 없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구조는 그렇게 많지 않겠지만,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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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 여성작가 편 - 세계문학의 흐름으로 읽는 한국소설 10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이현우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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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좋다”라고 말할 수 있는 판단 기준은 뭘까.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와 반전, 밑줄 긋고 싶은 대화와 생생한 묘사. 그리고 소설 속 등장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했다면, 어느 정도 좋은 소설을 읽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인 감상과 취향은 잠시 옆에 두자. 한 권의 소설을 역사 속 시간대에 놓고 본다면, 소설의 가치를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로쟈의 한국문학수업>의 저자 이현우는 25년 가까이 세계문학과 한국문학을 강의를 해왔다. 이 책은 대중들과 현장에서 강의를 하며 체득한 저자만의 소설을 읽는 안목이 담긴 책이다. 저자는 세계문학이라는 큰 범주 안에서 한국문학 속에 근대적 인물과 서사가 과연 담겨 있는지 묻는다. 1960년대 소설가 강신재를 시작으로 2010년대 황정은까지. 저자는 ‘장편소설’이라는 기준점을 잡아, 작가들의 생애와 작품을 연결지어 소설의 의의와 한계를 짚어 나간다.


근대소설이 되는 조건 중 하나는 부르주아 계층을 잘 다루고 있는가에 있다. 1960년대 대표 소설 중 하나인 <김약국의 딸들>은 충돌하는 계층 간의 이야기보다는 가족 안에서의 서사에 머물러 있다. 근대 소설의 주인공이 그리려면 작가는 돈과 사랑, 돈과 의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실상을 보여주고 비판해야 할 지점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박경리는 자신이 돈을 밝히는 인물을 싫어하기에 다양한 군상을 실감나게 묘사하는데 실패했다. 저자는 작가가 자신의 세계와 소설의 창작 방법론이 충돌할 때는 창작방법론을 우위에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컨대, 발자크는 왕당파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소설에서 현실 묘사를 탁월하게 하여 리얼리즘을 잘 살렸다.


1990년대는 ‘후일담 문학’의 시대였다. 1980년대 시대적 경험을 한 작가들이 30대가 되어 자신의 20대를 돌아보는 이야기가 소설의 바탕이었다. 당대 작가들은 1970년과 1980년을 작품 안에 어떻게 그려냈을까. 은희경은 <새의 선물>에서 1992년도에 열두 살 진희가 1969년을 돌아보는 액자구성의 이야기이다. 소설에는 1970년과 1980년 두 시대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이를 두고 저자는 은희경이 두 시대의 사회적 문제를 은폐하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설정이라고 비판한다. 그래서 <새의 선물>은 성장소설이 아닌 성장 거부 소설로 해석한다.


19세기 러시아 인텔리겐차들의 혁명운동과 1980년대 한국에서 군부독재를 타도하고자 했던 대학생의 운동은 유사점이 있다. 공지영 소설에는 1980년 20대에 꿈꾸던 세상이 현실이 되지 않았던 점에 대해 자괴감과 좌절감이 담겨 있다. 하지만 저자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서 공지영이 차별과 억압을 그리기는 했지만 사회에서 원인을 찾기보다는, 개인의 감성이 주가 되는 위안의 서사를 그렸다는 점을 한계로 지적한다. 동시에 공지영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은 작가이기에 소설을 통해 대중에게 진지한 문제의식을 던지길 희망했다.


근대적 주체는 박완서의 소설에서 탄생한다. 근대소설은 중산층을 잘 그려내야 한다. 박완서는 속물적 중산층을 잘 관찰했던 작가였다. 저자는 박완서가 윤리적 판단에 대해 이분법적이지 않기에, 도덕적이지 않는 인간을 잘 그리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평했다. 중산층에 흡수되지 않고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박완서를 두고 “몸은 물속에 있지만 고개는 들고 있는 것”에 비유한다. "작가가 이 세계에 동화되지 않고 '이물감'을 가지고 있는 것, 이것이 근대 문학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다."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은 저자의 주관적인 견해가 돋보이는 책이다. 저자는 '근대장편소설'이라는 기준을 세우고 지난 50년간 한국여성작가들이 써온 대표작을 각 시대별로 나누어 평가대에 올렸다. 근대 장편 소설이 되기 위해서는 숙명론과 자살로 이어지는 퇴행적인 인물상으로는 안 된다. 또한 자본사회에 살고있는 현실사회에 맞게 작가는 중산층, 상류층의 실상을 잘 해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장편 소설 속에 당대의 사회현실을 잘 담아내야 한다.


저자는 소설가들의 생애와 일화를 세세히 들려주며 작가의 성격이나 트라우마가 어떻게 작품에 반영되어 있는지 세심히 살핀다. 작가와 작품을 연결해서 서술하고 있기에 소설을 다소 심도있게 읽는데에 도움이 된다. 베스트셀러, 한국의 등단문화, 대중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고집하는 작가들을 향해 쓴 소리도 아끼지 않는다. 자, 이제 소설을 읽는 시야가 한층 넓어졌다.  당신은 이 책에 나온 작가들의 작품을 책장에서 다시 꺼내 읽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저자가 이미 이 책에서 작품의 의의와 한계를 제시해 놓았기에 다른 한국소설들을 찾으러 나설 것이다. 소설을 더 깊게 읽을 수 있는 비밀병기를 손에 들고 말이다.


 


소설가는 대개는 독자를 보고 쓰는 것, 자가가 독자와 같이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해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라는 관심이 소설을 쓰게 하는 것이다. - P170

현실과 이상 또는 예술 사이의 간극은 규모의 차이가 있을망정 보통 사람들도 경험하는 일반적인 문제다.
독자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는 작가가 제기하는 이런 문제들이 자신에게도 똑같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자기 이야기로 읽을 수 있어서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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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따뜻해져서 다시 달리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수영장이 문을 닫아 작년 10월부터 시작한 달리기. 나는 천천히 약 20분 정도 뛰고 있지만, 아침 달리기를 나가보면 아파트 둘레길, 6.4 km를 달리고 있는 이들을 만난다. 팔과 다리의 최소 움직임으로 바람을 가르는 그들의 가뿐한 몸. 군살 없는 장딴지 근육은 하루아침에 자리 잡은 것이 아니리라. 고른 숨을 내쉬며 전방에 고정된 그들의 시선은 잡념이 없고 평화로워 보인다. 무아지경에 이른 것일까.

    

 

 

서른세 살에 장거리 달리기를 시작한 하루키는 매일 10 km를 달린다. 뉴욕, 보스턴, 호놀룰루 마라톤 등 전 세계 주요 마라톤 대회에 모두 참가했고 최근 몇 년까지도 풀코스 마라톤을 3시간 안으로 완주하고 있다. 그는 100 km 울트라 마라톤 대회에도 참가하여 11시간 42분을 달리기도 하였다. 하루키는 왜 달릴까. 당연한 대답이겠지만, 장편 소설을 꾸준히 쓰기 위해서다. 글쓰기 체력을 다지기 위해 달리기를 한다. 그는 소설을 쓸때 필요한 집중력과 지속력이 달리기를 통한 근육 훈련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마라톤 선수들이 매번 경기를 거듭하면서 자신의 목표를 조금씩 높혀 가듯이, 하루키 역시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작품이 도달했는가 아닌가를 매번 판단한다.

    

 

이론이나 도식보다는 실제 눈앞에서 만져지는 것을 믿는 하루키. 그는 몸으로 직접 경험하는 것을 신뢰한다. 마라톤이란 살아있는 인간이 스스로 결승점을 두 다리로 직접 통과하는 행위이기에 진실하다. 하루키는 매일 계속해서 달릴 수 있는 것은 의지보다는 달리기가 단지 그의 성격에 맞을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하루키의 의지는 강했다. 마라톤이나 트라이애슬론에서 끝까지 완주하고자 했다. 100킬로 울트라 마라톤에서는 극심한 근육통증에 시달렸지만 하루키는 아무리 아파도 다른 사람들처럼 걸을 수 없다며 느리더라도 끝까지 달린다.

    

 

시시각각 변하는 여러 도시의 계절 풍경, 오리지널 마라톤 코스인 마라톤-아테네 달리기, 앞지르는 포니테일 머리모양을 한 하버드 신입생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달리기가 단조로운 직진만이 아니란 걸 알게 된다. 굴곡진 일생 마라톤이다. 마라톤 선수들이 대회를 준비하며 매일 뛰고 있다면, 하루키는 장편 소설을 쓰기 위해 달리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달린다’고 고백하는 하루키. 하지만  그는 달리면서 모든 풍경을 눈에 담아 기록하고 있었다. 끝까지 걷지 않았던 소설가. 달렸던 하루키.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쓰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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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14 00: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청공님 댓글 썼는데 북플이 먹어버림 ㅜ.ㅜ 이책 너무 좋죠. 매년 읽어도 좋음 읽으면서 하루키옹 오래오래 살기를 ㅎㅎ 청공님 2021년 신축년 복 많이˘◡˘

청공 2021-02-14 19:53   좋아요 1 | URL
저는 하루키 팬은 아니지만요...하루키의 솔직, 진지, 통찰력있는 일화가 많아 이 책 좋았어요. 특히 저는 포니테일 부분이 넘 인상적여서 여러 번 읽었네요.
scott님,이따가 클래식음악 글 읽으러갈게요. 오늘은 어떤 작곡가일까 궁금궁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나 자신에 관해 말한다면, 나는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매일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 자연스럽게, 육체적으로, 그리고 실무적으로, 얼마만큼, 어디까지 나 자신을 엄격하게 몰아붙이면 좋을 것인가? 얼마만큼의 휴양이 정당하고 어디서부터가지나친 휴식이 되는가? 어디까지가 타당한 일관성이고 어디서부터가 편협함이 되는가? 얼마만큼 외부의 풍경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고, 얼마만큼 내부에 깊이 집중하면 좋은가? 얼마만큼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고, 얼마만큼 자신을 의심하면 좋은가?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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