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착용 필수, 사람 접촉 금지.”

아파트 정문에 걸린 플래카드 문구다. 여러 달 동안 내가 사는 지역에는 코로나 발생률이 현저히 낮았다. 하지만 지난 일주일간 코로나 확진자 수가 70명 가까이 나와 지역인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수도권에서는  코로나 바이러스 재확산을 막기 위해 거리두기 2.5단계에 들어갔다. 3단계가 시행되면 소비와 생산에 큰 충격이 예상되기에 이번에 코로나 확산세가 꺾이길 기대한다. 철학자 지젝은 바이러스가 우리 삶을 뒤흔든 지금, “엄청난 양의 고통은 물론 대불황보다 더 심한 경제 혼란에 빠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코로나 위기가 기존의 불의의 구조를 바로 세울 기회가 될 수 있을까?

 

    

 

 

 

지젝은 코로나 바이러스 전파를 막기 위해 국가가 강력히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감염병 확산 초기에 한국 정부는 확진자의 동선을 추적하고 공개했다. 유럽에서는 이를 국민의 자유 침해라 보고 비판했다. 하지만 타 국가에 비해 코로나 확진자 수가 확연하게 증가하지 않자 K방역의 모델을 도입하고자 각국에서 문의가 잇달았다. 지젝은 전 세계적으로 감염병이 퍼져있는 상황을 주시하며 “시장 메커니즘이 혼란과 기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며 국가 주도의 공산주의 조치들이 실행되고 있는 예를 든다. 영국은 철도를 한시적으로 국유화하고 미국은 정부가 민간 부문에 비상시 의료장비들의 생산을 장려하는 국방물자조달법을 발표하였다.

 

 

그는 또한  팬데믹 상황이 인류가 만들고 유지해온 시스템의 자기 모순이 확연하게 드러난 정치적 사건이라고 말한다. 지금의 위기 상황이 지구적 자본주의 경제, 성장률과 이윤 가능성에 목메는 경제를 통째로 뒤엎을 기회다. 이제 우리가 누려야 할 보건의료와 기본 욕구를 충족할 충분한 음식을 제공 받으며, 모두가 능력에 맞게 사회에 기여할 시스템에 대해 고민해 봐야하지 않을까. “누구나 능력에 따라 일하고 누구나 필요에 따라 얻는다.”라는 마르크스의 이념을 이은 새로운 코뮤니즘을 발명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는 초반기인 올해 4월에 이 책이 나왔다. 코로나 상황에 대한 전망과 진단을 이야기하기엔 이른 시기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이 책은 지금도, 앞으로도 유효할 것이다. 특히 지젝이 전하는 “재난 자본주의의 해독제로 쓰일 재난 공산주의 전망”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국가가 주도하여 마스크, 진단키트, 산소 호흡기 같은 의료장비, 생명과 생존에 관련된 물품의 생산과 공급을 책임지는 일은 감염병이 종식될 때까지 전 지구적으로 필요한 사안이 아닐까.

 

 

우리가 야만적 자본주의의 길을 갈 것인지, 새로운 공산주의를 발명할 것인지, 지젝은 우리에게 선택지를 제시한다. 차별과 자본의 탐욕이 더 팽배해져 약자들을 희생시키고 노동자들을 더 가난으로 몰리게 할 것인지, 아니면 국가가 보건의료를 견고히 하고 기본욕구에 해당하는 음식을 제공하고 각자의 능력에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을 새로이 구축하는 코뮤니즘을 택할 것인지. 다수를 위한 선택은 자명해 보인다. 

 

 

지젝은 국가간의 실질적인 협력과 자원을 공유함으로 지금의 팬데믹 상황의 종식을 앞당길 수 있다고 전망했다. 지난 6월말 미국은 중증 코로나 치료에 효과를 보인 렘데시비르를 9월 생산분까지 모두 구매하고 가장 유망한 백신 8개 후보를 지원하고 개발이 완료되면 미국인들에게 우선 보급한다는 계획을 전했다. 더욱 야만적인 자본주의가 득세할지, 감염병의 종식을 위해 국가 간의 협업과 연대를 이어갈 것인지. 우리는 인류사의 전환기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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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오역을 바로 잡아 놓은

로쟈님의 글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링크 걸어봅니다.

 

-우리는 왜 늘 피로한가

https://blog.aladin.co.kr/mramor/11811535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우는가

https://blog.aladin.co.kr/mramor/11808528 

-지젝과 팬데믹 패닉

https://blog.aladin.co.kr/mramor/11807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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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사랑은 순백의 백설탕 색과 어울릴까. 아니면 세월의 흔적이 녹아든 흑설탕 색이 제격일까. 아무렴 어떠한가, 둘 다 “천진한 달콤한" 맛인 걸. <흑설탕 캔디>는 화자인 ‘나’가 할머니의 유품인 일기장을 읽으면서 할머니의 이야기를 복원한다. 60대 후반인 할머니는 주재원인 아들을 따라 손주를 돌봐주러 프랑스로 떠난다. 젊은 시절 피아노를 연주했던 할머니는 ‘쇼팽’의 나라 프랑스를 동경해왔다. 프랑스어를 배우기가 쉽지 않아 할머니는 대화할 사람이 없어 외로운 나날을 살아간다. 손주를 기다리며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 청소를 하고 아이들과 한국 드라마 비디오 빌려 시청하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어느 날, 할머니는 일층에 사는 브뤼니에씨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을 듣게 된다. 젊은 시절 피아노를 연주했던 할머니는 피아노를 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브뤼니에씨와 서로 말이 안 통했기에 공원 벤치에서 만난 두 사람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베토벤”이름만 교환하고 나란히 앉아 있을 뿐. 할머니는 한불, 불한사전을 들고 브뤼니에씨 집에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피아노 앞에 앉는다.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할머니는 과거 사랑했던 유부남 음악 교사를 떠올린다. 슈만과 클라라, 윤심덕과 김우진의 연인 이야기를 들으며 특별한 인생이 펼쳐질 것만 같았던 젊은 시절을 회상한다.

 

 

할머니는 브뤼니에씨를 만나고 나서부터 화장을 하기 시작한다. 할아버지와 음악을 같이 듣고 사전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테이블 위에 각설탕 탑을 진지하게 쌓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할머니는 언어가 아닌 서로가 지금껏 살아온 세월을 헤아리며 교감을 느낀다. “그와의 사이에 무언가, 공감이라든지 이해, 생의 가장자리로 떠밀려온 사람들 사이의 연약한 연대나 우정 같은 것이 존재한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놓인 각설탕 탑을 함께 쌓으며 어린 아이들처럼 기뻐한다. 각설탕을 쌓는 브뤼니에 씨의 팔에 검버섯이 피어있지만 한국 남자와는 달리 은빛털이 뒤덮혀 있는 것을 보며, 그는 끝내 할머니를, 할머니는 끝내 그를 알지 못하리라는 사실에, 할머니는 ”가슴 안쪽에서 통증“을 느낀다. 늙어가는 건 몸일 뿐, 욕망이나 갈망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보며 삶에 대한 갈망과 기대를 갖는다.

 

 

하지만 할머니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작별인사로 대명사 두 개와 동사 한 개의 말을 남겼다. 화자인 ‘나’는 요리조리 3개의 단어를 배열해 본다. 할머니가 브뤼니에를 향해 느꼈던 연민, 갈망은 할머니만의 이름,"난설"로 남게 된다. 브뤼니에씨를 만나면서 할머니는 그와 모든 걸 함께 할 수 없는 걸 알았지만 황홀한 사랑의 참맛을 느꼈다.

 

 

백수린은 단편집 <여름의 빌라>에서 소녀, 여학생, 엄마, 그리고 할머니를 등장시켜 각 나이에 여성이 느꼈을 갈등, 욕망을 우리 사회와 타지에서 그려낸다. 어린 소녀를 남기고 도망친 엄마를 이해하고, 수유기의 여인이 젊은 발레리노에게 성적 충동을 느끼고, 가난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독일부부와의 시선차이를 받아들이며 등장인물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아간다.  작은 세계를 벗어나 타인의 세계로 들어가는 8편의 이야기는 고요하면서도 생생하다. 그래서 우리의 기억 속 ' 누군가'를 불러낸다.  그 여름날, 나를 반짝이게 만들었던  그 사람을. 

 

"예상치 못했던 일이 주는 즐거움. 계획이 어그러진 순간에만 찾아오는 특별한 기쁨. 다 잃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어느새 한여름의 유성처럼 떨어져 내리던 행복의 찰나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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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20-08-24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아프네요. 길고 먼 ...... 환상처럼

청공 2020-08-31 02:49   좋아요 0 | URL
답이 늦었네요 ㅠ 할머니의 시선이 마음 아프게 했지만요, 작가는 이야기를 따스하게 이어나가서 미소 한가득 지으며 읽었어요^^
 

브뤼니에 씨가 건넸다는 그 말에 대해서 할머니는 대명사 두 개와 동사 한 개라고만 적어놨으므로 그 안에 감춰진 말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당신을 기다릴게요. Je vous attendrai 일수도 있고
그리울 거예요.Vous me manquerez 일수도 있고
내가 상상하는 것처럼사랑해요.Je vous aime 일수도 있지만
그 말이 진짜로 무엇이었는지 나로서는 영영 알 길이 없다. - P203

우리는 안고 있어도 왜 이렇게 고독한 것일까 - P233

뭘 먹을 때마다 음식물을 바지춤에 흘리기 일쑤고 이따금씩 도무지 영문 모를 행동을 하는 이 불가해한 남자. 각설탕을 쌓는제 브뤼니에 씨의 팔, 할머니처럼 검버섯이 피어 있지만 한국 남자의 것과 달리 은빛 털로 뒤덮여 있는 그의 팔을 바라보는데, 브뤼니에 씨를 할머니는 영원히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이, 그 역시 할머니에 대해서 끝내 알지 못하리라는 사실이 실감났고 그러자 놀랍게도 가슴 안쪽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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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책의 미래는 일대 혁신의 새로운 불이 겨지지 않는 한, 어둡게 계속될 것이다. 혁신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그러다 뜻밖에도 전혀 새롭지 않은 방향에서 나타난다. 해답은 간단하다. 재미를 회복하면 된다.지식사회에서의 설득력을 지닌 재미. 문학의 재미 회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본격문학과 통속, 혹은 대중 문학의 구별이라는 아날로그적 전통으로부터 탈피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수적이다. - P18

 세계문학은 반드시 해외 진출을 통해서 새롭게 획득되는 그 어떤 것이라기보다 우리 문학의쇄신과 문학인들의 자세 설정으로 그 자리에서 탄생한다는 점을 나는힘주어 말하고 싶다. 그 요체가 바로 민족문학 내려놓기다. 민족문학의 지나친 강조는 자칫 세계문학과의 사이에 벽을 오히려 만들기 쉽다.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 이제 한국인의 냄새 대신 인간의 냄새가담긴 시와 소설, 드라마가 나와야 한다.  - P51

실제로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비밀, 어둠입니다. 그 속에신이 살고 있습니다. 이는 바람직한 일인데, 왜냐하면 이처럼 보호해주는 어둠이 없다면 우리는 신을 극복해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폐위시키는 것이죠. 그래서 신은 어둠 속에 숨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그를 직접 치고 들어갈 수 없으므로 신성을 둘러싸고 있는 어둠을 공격합니다. (카프카와의 대화)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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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잘 자, 라는 말을 잘 가,라는 말로

나는 착각하지 않았을까. 어떤 사랑이 살 때

할 수 없었던 말을 이제야 한다.

잘, 이라는 말을 밤하늘의 별로 숨겨놓고 싶다.

그렇게 으스러지게 안아서 사라진 너는 내 손톱 속 정어리의 비늘 같은 초승달로 숨어 있다.

잘, 자 혹은 잘, 가.“ (허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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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폭우로 인해 서울-광주간 열차 운행이 중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잠자리에 들었다. 전남 동부권은 괜찮겠지.

오늘은 한 달에 한번, 문학 선생님께서 서울에서 순천으로 강의를 하러 오시는 날이다. 오전 10시 즈음, 기차가 익산역에서 멈췄다. 서울에서 순천까지 중간지점에서 선생님의 발이 묶였다.

전주 지역 하천이 범람하여 선로 침수. 

익산-여수 간 열차운행중단.

아, 제가 얼마나 많이 기다렸던 강의인데요, 선생님, 얼른 익산버스터미널로 가셔서 버스 타고 오세요, 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이 폭우에 위험한 일이다. 어쩔 수 없이 선생님은 서울로 되돌아가셔야 했다.

 

타고 온 기차가 그대로 방향을 틀어 서울로 향했을까.

아니면, 다른 플랫폼으로 이동해 상행선 열차를 기다리셨을까.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기차에 몸을 실으셨을 텐데.

젖은 신발로, 길 위에서 긴 시간을 보냈을 선생님을 생각하니 하루 종일 마음이 쓰였다. 선생님께 너무 고단한 하루가 아니었길 바랄뿐이다. 선생님, 푹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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