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0년 동안 일본의 논단에서는 ‘소통‘이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소통에 미치는 효과만 논의된 면이 있습니다.그러나 다소 냉정히 생각하면 인터넷의 본질이 소통의 확대인 것은 분명 아닙니다. (소통의 정의를 확대한다면 달라지겠지만)

인터넷이라는 미디어와 이에 부수하는 다양한 서비스의 혁신은 오히려 서로 소통한 적도, 만난 적도 없고, 서로 관심도 없는, 어쩌면서로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들을 단편적인 데이터만을 지렛대삼아 멋대로 연결해 집합적으로 처리하는, 그리고 그 결과를 통해 일정 정도 사람들의 행동까지 바꾸고 마는 측면에 있습니다.

- P202

루소의 철학과 인터넷 사용자(그것도 사교성이 없는 인터넷 사용자)의 감성을 연결 지으려는 시도입니다. 독자에 따라서는 아무리 그래도 일반적인 루소의 이미지, 산을 거닐고 식물을 사랑하며 싱그러운 청춘을 그려내던 문학자 이미지와 너무 동떨어졌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는 ‘자연‘의 어감과 인터넷의 어감이서 느끼는 거리감에 기인한 단순한 착각이 아닐까 합니다. 루소의 저작을 조금만 읽으면 알 수 있듯이 그는 자연을 사랑한 문호라는 표현으로 만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루소는 자기도취적이고 피해 망상적이며 쉽게 상처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고백』을 읽으면 알 수 있듯이 그는 요샛말로 오타쿠나 중2병이 딱 맞는 상식에서 벗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루소이기에 지금 인터넷에서 보이는 광경과 친화성 있는 겁니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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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평론을 쓰는 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에 가담하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이 자기기만은 적지 않은 저술가들에게 일종의 윤리로 여겨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세계는 확연히 단편화, 파편화되었고 이제 어떤 작품, 어떤 사건을 읽어냄으로써 전체성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는 이제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상태를 긍정하면서 오타쿠와같은 분석에 매몰하면 그야말로 파편화는 가속화될 뿐이다. 따라서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작품이나 사건에서 억지로 시대성을 끄집어내고, 이를 통해 전체성에 접근할 수 있는 척하는 것이 지금 언론인들의 책무가 아니겠는가.

즉, 이제 우리는 평론이나 비평이 쓸모없음을 알고 있기에,
의도적으로 그것이 쓸모없지 않은 척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평론이나 비평마저 하지 않게 되면 사회는 정말로 산산조각이나버릴 테니까.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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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에서 태어나, 한 번도 나무를 본 적이 없었을 세 살배기 아이,후르비넥. 야수 같은 가공할 권력으로부터 추방당한 인간 세계로 들어오기 위해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한 인간으로서 투쟁했던 후르비넥,
그 조그만 팔에도 아우슈비츠의 문신이 새겨져 있던, 이름 없는 후르비넥, 1945년 3월 초, 후르비넥은 자유롭지만 진정 구원받지는 못한 채 죽었다. 그에 대한 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이렇게 나의 말을 통해 증언한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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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선생의 신간 알림이 또 울리다니!이번엔 영화감독 켄 로치다.영화 소개와 함께 그 배경이 된 스페인 혁명,아일랜드 전쟁, 그리고 오웰, 윌리엄 모리스,E.H.카 등 켄로치가 영향받은 인물이 그려진다. ˝그의 영화는 정치 권력이나 자본 권력이 서민을 착취하는 이 세상에서, 반세기 이상, 비주류의 이의신청 수단으로 기여해왔다.˝책 이름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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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따뜻해져서 다시 달리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수영장이 문을 닫아 작년 10월부터 시작한 달리기. 나는 천천히 약 20분 정도 뛰고 있지만, 아침 달리기를 나가보면 아파트 둘레길, 6.4 km를 달리고 있는 이들을 만난다. 팔과 다리의 최소 움직임으로 바람을 가르는 그들의 가뿐한 몸. 군살 없는 장딴지 근육은 하루아침에 자리 잡은 것이 아니리라. 고른 숨을 내쉬며 전방에 고정된 그들의 시선은 잡념이 없고 평화로워 보인다. 무아지경에 이른 것일까.

    

 

 

서른세 살에 장거리 달리기를 시작한 하루키는 매일 10 km를 달린다. 뉴욕, 보스턴, 호놀룰루 마라톤 등 전 세계 주요 마라톤 대회에 모두 참가했고 최근 몇 년까지도 풀코스 마라톤을 3시간 안으로 완주하고 있다. 그는 100 km 울트라 마라톤 대회에도 참가하여 11시간 42분을 달리기도 하였다. 하루키는 왜 달릴까. 당연한 대답이겠지만, 장편 소설을 꾸준히 쓰기 위해서다. 글쓰기 체력을 다지기 위해 달리기를 한다. 그는 소설을 쓸때 필요한 집중력과 지속력이 달리기를 통한 근육 훈련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마라톤 선수들이 매번 경기를 거듭하면서 자신의 목표를 조금씩 높혀 가듯이, 하루키 역시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작품이 도달했는가 아닌가를 매번 판단한다.

    

 

이론이나 도식보다는 실제 눈앞에서 만져지는 것을 믿는 하루키. 그는 몸으로 직접 경험하는 것을 신뢰한다. 마라톤이란 살아있는 인간이 스스로 결승점을 두 다리로 직접 통과하는 행위이기에 진실하다. 하루키는 매일 계속해서 달릴 수 있는 것은 의지보다는 달리기가 단지 그의 성격에 맞을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하루키의 의지는 강했다. 마라톤이나 트라이애슬론에서 끝까지 완주하고자 했다. 100킬로 울트라 마라톤에서는 극심한 근육통증에 시달렸지만 하루키는 아무리 아파도 다른 사람들처럼 걸을 수 없다며 느리더라도 끝까지 달린다.

    

 

시시각각 변하는 여러 도시의 계절 풍경, 오리지널 마라톤 코스인 마라톤-아테네 달리기, 앞지르는 포니테일 머리모양을 한 하버드 신입생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달리기가 단조로운 직진만이 아니란 걸 알게 된다. 굴곡진 일생 마라톤이다. 마라톤 선수들이 대회를 준비하며 매일 뛰고 있다면, 하루키는 장편 소설을 쓰기 위해 달리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달린다’고 고백하는 하루키. 하지만  그는 달리면서 모든 풍경을 눈에 담아 기록하고 있었다. 끝까지 걷지 않았던 소설가. 달렸던 하루키.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쓰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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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14 00: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청공님 댓글 썼는데 북플이 먹어버림 ㅜ.ㅜ 이책 너무 좋죠. 매년 읽어도 좋음 읽으면서 하루키옹 오래오래 살기를 ㅎㅎ 청공님 2021년 신축년 복 많이˘◡˘

청공 2021-02-14 19:53   좋아요 1 | URL
저는 하루키 팬은 아니지만요...하루키의 솔직, 진지, 통찰력있는 일화가 많아 이 책 좋았어요. 특히 저는 포니테일 부분이 넘 인상적여서 여러 번 읽었네요.
scott님,이따가 클래식음악 글 읽으러갈게요. 오늘은 어떤 작곡가일까 궁금궁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