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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 여든 앞에 글과 그림을 배운 순천 할머니들의 그림일기
권정자 외 지음 / 남해의봄날 / 2019년 2월
평점 :
여든이 되어 꽃길이 열렸다. 글을 배우고 그림을 그리면서 말이다.
스무 명의 순천 할머니들은 버스를 타고 서울 전시 ‘그려보니 솔찬히 좋구만’을
시작으로 전국 동네 책방 나들이 다니신다.
내년 4월에는 미국 도시에서 순회전시도 계획 중이다.
할머니들은 어떤 꿈을 꾸고 계실까?
글을 쓸 수 있게 되어, 이제야 80년 세월을 토로한다. 스무 명 할머니들의 첫 문장은 서러움이다. 딸로 태어나 오빠만 공부할 수 있었다. “나는 공부가 하고 싶었습니다. 밥할 때도 부지깽이를 시커멓게 태워서 내 이름하고 1부터 100까지를 썼습니다. 내가 아는 글자는 모두 그것뿐이었습니다.”
으레껏 한글을 배우는 우리에게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일인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 “종이를 주면서 생년월일을 쓰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때 생년월일이 뭔지도 몰라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모두가 놀래서 나를 다 쳐다봤습니다. 나는 너무 창피해서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그리고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습니다.” 면사무소나 은행에서 용지가 날아와도 무슨 내용인지 몰라 답답하셨다. 글을 모를 때는 남한테 물어보기 부끄러워 버스를 놓친 적도 많으셨다.
하라면 해야 하는 결혼였다. “나는 그 사람이 맘에 안 들었습니다. 그런데 구멍 뚫린 양말 사이로 보이는 하얀 엄지발가락이 갑자기 멋있어 보이고 맘이 갔습니다.” 신랑은 돈이 없어 남의 집 닭장을 얻어 신혼 방을 만들었다. “나는 속았다는 생각에 살아야 할지 고민이 돼서 밤마다 뒷산에 가서 울었습니다.” 가난했기에 집안일을 하고 식당일을 하고 나이드니 허리수술 하고. 이제 여든이 되니 글을 배울 기회가 생긴 것이다.
내친김에 그림도 같이 그리면 어떨까요? 2017년 순천그림책도서관은 김중석 그림책 작가에게 할머니들을 위한 그림일기 수업을 제안한다. 작가는 일산에서 순천까지 왕복 여섯 시간이 넘는 길을 매주 다니게 되었다.
그림일기 속 할머니들은 역사 현장에도 계셨다. 한국 전쟁 때 14살 소녀는 마음을 졸여야 했다. “작은집 식구와 우리를 냇가로 끌고 가서 작은 아버지를 총으로 쐈습니다. 작은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우리들은 무서워 벌벌 떨었습니다.” 또 다른 소녀는 열한 살 때 피난을 가다 죽은 동생을 어디다 두고 갈 수가 없어서 하루 종일 업고 다녔다.
글을 배우니 그림일기 제목이 달라졌다. ‘넓어진 마음’, ‘살맛나는 세상’, ‘최고의 행복’,‘배움이 준 선물’,‘짜릿한 행복’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제 혼자 은행 일을 보신다. 비밀통장도 만들고 노래교실에서도 자신 있게 마이크를 잡으며 자막보고 노래를 부르신다. “핸드폰 문자도 배우니까 병원에 있는 남편한테 예쁜 꽃도 찍어 보내고 힘내라고 문자도 보냅니다.“
스무 명 할머니들의 인생사가 담긴 그림일기는 슬프고도 따스하다. 정성스럽게 써내려간 글과 그림이 80년의 어두운 세월을 환하게 만들었다. 이제 할머니들은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고, 손주들 그림책도 읽어주시고, 앞으로 글을 더 많이 배워 동네 이장도 되고 싶으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