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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남긴 책 한권

언론인 이용마 기자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50세. 팔순 노모와 열 살 된 쌍둥이 그리고 아내가 남겨졌다. 이용마 기자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영화 <공범자들> 에서였다. 공영방송이 몰락하게 된 주범과 언론의 공정성을 찾고자 하는 내용 속 영화 중간, MBC파업노조에 참여했던 그가 카메라에 잡혔다. 해고된 그는 복막 중피중 판정을 받아 투병생활을 하고 있었다. 과거 노조현장에서 풍채 좋은 얼굴로 마이크를 잡았던 그와는 다르게 요양 중에 있던 그는 수척했다. 하지만 눈빛은 빛났다. 1년을 전후해 사망하고 길어야 5년을 살 수 있다는 희귀병을 선고받은 그에게 마음에 걸린 것은 아빠 없이 자라갈 아이들이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아빠가 그들의 곁에서 들려줄 이야기를 그는 미리 쓰고 있었다.

저자는 공직자가 되고 싶어 정치학과에 들어갔다. 1987년, 그는 공부만 할 수 없었다. 대학생들에게 군대가기전 입소해 휴전선 부근 군부대에 입소해 훈련을 시키는 전방입소 거부 투쟁, 전두환, 이순자 체포결사대 활동, 남북통일 운동 등. 그는 학생운동에 끊임없이 참여하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한다. 군사정권하에서 공무원이 된다면 권력의 하수인밖에 되지 않겠느냐 반문하며 그는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알기 위해 공부를 해나간다. 맑스와 사회주의, 해방 전후사.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 관한 모임을 결성하고 정치학과에서 조차 한국 현대사를 배우지 않는 데에 비판한다. 대학 졸업할 때, 그에게 생긴 꿈은 “우리 사회를 더욱 자유롭고 평등하게 만드는 것, 그러면서도 인간미가 넘치는 사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사회 초년생의 꿈은 너무 이상적였을까? MBC 수습기자로 경찰서에 드나들면서 그는 경찰위에 군림하는 출입기자, 조직 내 최고 인사권 자리에 특정 대학출신이 오르면 주요 직책을 장악하는 일, 그리고 보수와 진보로 나뉘는 파벌주의에 행태를 겪으며 저항한다. 그가 말하는 좋은 언론은 사회적 다수와 약자를 중심으로 해야하고 소수 권력자에 대해서는 엄격한 시작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저자는 삼성의 불법상속, 재전축 사업 관련한 삼성물산의 회피적 수사 등 삼성비판 기사를 기회가 되면 썼다. 삼성에 불리한 기사를 쓰면 광고를 주지 않기에 언론사들을 삼성기사화를 꺼렸다. 삼성관련 기사를 쓰면 회사 선배들, 주변의 아는 사람들로부터 다양한 전화가 온다. 뉴스의 꼭지에 잡혔던 뉴스는 다음날 아침 6시~6시 반에 시청률이 1~2퍼센트 그칠 데 내보내진다. 그는 삼성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기도 하다.

이명박 절친인 김재철 사장이 임명되자 낙하산 투입과 퇴진 요구 파업에 들어갔다. 그 사이 시사프로그램이 사라지고 한미 FTA 반대 시위도 삭제 등 편파적인 방송으로 변질되어 2012년 1월부터 노조는 170일간 파업에 돌입한다. 노조 위원장 해고와 다수의 해고설에도 저자는 다들 꺼려하는 노조에 또 가입한다. “내가 노조에 가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나의 삶이 나았을까? 내가 노조에 가지 않았다면 우리의 역사가 조금이라도 달라졌을까?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더욱 힘들어하지는 않았을까? 결국 우리 모두는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하는 대리인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저자는 적폐청산의 출발을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으로 보았다. 검찰과 언론이 제대로 된 역할을 못하는 이유는 그 인사권을 정치권력 즉 대통령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인사권을 국민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권이 공영방송 임원진 선임과정에서 손을 떼야지 언론의 공정성을 확보되기에 말이다. 그는 현행 정치제도에서 대의제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으나 국민이 직접 뽑을 수는 없어도 추첨을 통해 뽑힌 국민 대표에게 투표권을 주는 국민대리인단 제도를 제안한다.

재벌 위주의 경제정책에서 벗어나고 국민의 참여를 늘리는 방향으로 언론의 개혁을 바랐던 그.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웠던 그가 말한다.˝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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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
알렉상드르 타로 지음, 백선희 옮김 / 풍월당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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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개의 알약과 여행 가방

피아노 독주회는 숭고하다. 조명이 꺼지고 온 정신을 가다듬고 무대에 나타난 피아니스트.무대 아래 관객들도 숨을 죽인다. 피아노의 모든 음을 놓치지 않으려는 침묵과 집중의 시간. 하지만 이내 피아노 연주에 이끌려 꿈꾼다. 피아니스트가 조절하는 음의 깊이와 길이는 우리를 전율케 하기도 하고 울게 하기도 한다. 길 잃은 개별은 맘껏 그림을 그려 나간다.

프랑스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로 타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대에서 살아야만 했다. 스무 살 때부터 지난 30년간 살롱, 카페, 클럽, 작은 음악 홀 오라는 곳에는 어디든지 갔다. 이제는 무대가 커졌다. 6천석이 꽉 찬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 물위에 떠 있는 암스테르담의 프린센그라호트 콘서트 홀, 분장실에서 나오면 흰 고래들이 머리를 내미는게 보이는 캐나다의 단풍나무 공연장에서 선다.

타로는 극장, 호텔 그리고 비행기 안에서 산다. 일 년에 손꼽을 만큼 들르는 프랑스 파리의 집에는 서로 크기가 다른 8개의 여행 가방이 항상 대기 중이다. 공연일정에 따라 가방을 선택하고 악보와 수백 개의 알약을 담는다. 배, 코, 목, 허리, 머리, 근육 그리고 예민한 피아니스트를 달래주고 잠재우는,강한 효력을 내는 알약도 포함된다.

그의 집에는 피아노가 없다. 대신 친구들 집 열쇠 꾸러미를 가지고 수십 채의 집을 들락거리며 피아노 연습을 한다. 그는 서로 다른 집의 벽들이 들려주는 분위기를 느끼며 내면의 자극을 받는다. 24시간 곁에 없는 피아노를 만나면 그는 달려든다. “강요된 격리는 욕구불만을 낳고 욕망을 돋운다. 그래서 재회는 크게 기뻐할 일이 된다. 나는 피아노를 다시 만나면 탐욕스레 덤벼들고, 우리는 미친 사람들처럼 함께 작업한다.”

어느 날 피아니스트의 기억에 공백이 생겼다. 그는 장 프랑세의 협주곡의 1악장 녹음을 하다가 같은 지점, 같은 박자에 번번이 멈춘다. 여러 번 시도를 해서 겨우 녹음을 마쳤지만 그날 이후 그는 악보를 기억하지 못했던 순간의 기억이 자꾸 그를 두렵게 했다. 스물여덟 살 때 콩쿠르에서 또 한 번 기억의 공백을 겪은 후 그는 피아노 연주 때마다 사형대를 가는 심정으로 무대에 올랐다. 고심 끝에 그는 기억력으로 연주하는 콘서트를 그만둔다. 대신 페이지 터너를 선택한다. 피아노 연주자로는 드물게 그는 페이지 터너와 함께 독주회를 연다. 무대에 자유롭게 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의 전화기에는 이름과 도시, 각 항구마다 페이지 터너의 이름이 있다. “나의 소중한 도우미들이여, 그대들이 없다면 나는 하찮은 존재입니다.”

완벽한 연주를 갈망하는 피아니스트의 대가는 혹독했다. 철저한 고독 그리고 증폭하는 긴장과 두려움을 끊임없이 다스려야 하니까. 수년 전 타로의 내한 공연 때 나는 무대 뒤에서 그를 기다렸다. 무사히 무대를 마치기를, 관객들의 호응이 좋기를 바랐다. 더 크고 더 많은 관객이 올 수 있는 장소를 섭외하지 못했기에 나는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다시 한국에 찾아온다면 오롯이 그가 이끄는 연주에 손을 잡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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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 여든 앞에 글과 그림을 배운 순천 할머니들의 그림일기
권정자 외 지음 / 남해의봄날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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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이 되어 꽃길이 열렸다. 글을 배우고 그림을 그리면서 말이다.

스무 명의 순천 할머니들은 버스를 타고 서울 전시 ‘그려보니 솔찬히 좋구만’을

시작으로 전국 동네 책방 나들이 다니신다.

내년 4월에는 미국 도시에서 순회전시도 계획 중이다.

할머니들은 어떤 꿈을 꾸고 계실까?

 

글을 쓸 수 있게 되어, 이제야 80년 세월을 토로한다. 스무 명 할머니들의 첫 문장은 서러움이다. 딸로 태어나 오빠만 공부할 수 있었다. “나는 공부가 하고 싶었습니다. 밥할 때도 부지깽이를 시커멓게 태워서 내 이름하고 1부터 100까지를 썼습니다. 내가 아는 글자는 모두 그것뿐이었습니다.”

 

으레껏 한글을 배우는 우리에게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일인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 “종이를 주면서 생년월일을 쓰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때 생년월일이 뭔지도 몰라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모두가 놀래서 나를 다 쳐다봤습니다. 나는 너무 창피해서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그리고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습니다.” 면사무소나 은행에서 용지가 날아와도 무슨 내용인지 몰라 답답하셨다. 글을 모를 때는 남한테 물어보기 부끄러워 버스를 놓친 적도 많으셨다.

 

하라면 해야 하는 결혼였다. “나는 그 사람이 맘에 안 들었습니다. 그런데 구멍 뚫린 양말 사이로 보이는 하얀 엄지발가락이 갑자기 멋있어 보이고 맘이 갔습니다.” 신랑은 돈이 없어 남의 집 닭장을 얻어 신혼 방을 만들었다. “나는 속았다는 생각에 살아야 할지 고민이 돼서 밤마다 뒷산에 가서 울었습니다.” 가난했기에 집안일을 하고 식당일을 하고 나이드니 허리수술 하고. 이제 여든이 되니 글을 배울 기회가 생긴 것이다. 


내친김에 그림도 같이 그리면 어떨까요? 2017년 순천그림책도서관은 김중석 그림책 작가에게 할머니들을 위한 그림일기 수업을 제안한다. 작가는 일산에서 순천까지 왕복 여섯 시간이 넘는 길을 매주 다니게 되었다.

 

그림일기 속 할머니들은 역사 현장에도 계셨다. 한국 전쟁 때 14살 소녀는 마음을 졸여야 했다. “작은집 식구와 우리를 냇가로 끌고 가서 작은 아버지를 총으로 쐈습니다. 작은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우리들은 무서워 벌벌 떨었습니다.” 또 다른 소녀는 열한 살 때 피난을 가다 죽은 동생을 어디다 두고 갈 수가 없어서 하루 종일 업고 다녔다.

 

글을 배우니 그림일기 제목이 달라졌다. ‘넓어진 마음’, ‘살맛나는 세상’, ‘최고의 행복’,‘배움이 준 선물’,‘짜릿한 행복’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제 혼자 은행 일을 보신다. 비밀통장도 만들고 노래교실에서도 자신 있게 마이크를 잡으며 자막보고 노래를 부르신다. “핸드폰 문자도 배우니까 병원에 있는 남편한테 예쁜 꽃도 찍어 보내고 힘내라고 문자도 보냅니다.“

 

스무 명 할머니들의 인생사가 담긴 그림일기는 슬프고도 따스하다. 정성스럽게 써내려간 글과 그림이 80년의 어두운 세월을 환하게 만들었다. 이제 할머니들은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고, 손주들 그림책도 읽어주시고, 앞으로 글을 더 많이 배워 동네 이장도 되고 싶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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