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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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일종의 반골기질인지 몰라도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작품은 의도적으로 피했던 것 같다.
그래서 북카페에서 여러 사람이 추천하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주제 사라마구'라는 작가와 그에게 걸린 노벨문학상
이라는 감투의 무게 때문에 쉽게 들지 못했던 책이었는데 나름의 용기를 얻어서 책을 들었다. 

첫장을 읽으면서부터 당황하게 되었다. 문장부호라고는 ,(쉼표)와 .(마침표) 뿐이고 분명히 대화를 하는 상황임에도 따옴표 하나 없으니 그 당혹감이란... 그래서 첫 느낑은 과연 내가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였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지금 책을 내려놓은 순간까지 단 일순간의 지루함도 용납하지 않는 책의 매력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정말 매력적인 책.

작가의 가정은 아주 단순하다. '만약 세상의 모두가 동시에 눈이 멀게 된다면... 오직 한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그 단순한 가정을 바탕으로 작가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성에 의해 강요되는 도덕이나 질서,혹은 윤리의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나약한 것인지를 이야기 한다. 눈으로 보면서 몸으로 익히게 되는 관습 혹은 습관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독성이 강한지를 이야기 한다. 윤리의식이라는 틀에 갇혀 있는 인간 본연의 폭력성에 대해 고발한다.

아주 작은, 단지 눈이 멀었다는 가정으로 인해 인간이 만든 문명이란 얼마나 불필요한 것인지 이야기 한다. 남의 불행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인간들이 자신들에게 닥친 불행에 대해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과연 있는 것인지 말한다. 

눈 먼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도 두 눈이 멀쩡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것, 아니 우리가 보고 있다고 믿는 것들을 과연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들의 뒤에 그 문명들을 문명이게 만드는 인간이 있음을 보고 있는가?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에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리의 도덕이나 윤리의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들에 대해 과연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인가? 그 사건들이 다만 자신이 살고있는 나라에서는 벌어지는 일이 아니기에 그저 눈을 감아버리는 것은 아닌가? 과연 우리는 올바르게 보고 있는가? 

역사를 통해 수없이 반복되게 보아왔던 폭력의 생성과 폭력 앞에 무릎꿇는 인간의 비겁함, 그리고 어느 누군가의 용기로 인해 시작되는 투쟁과 그결과 얻어지는 자유라는 대가가 수용소라는 공간에서 다시 반복되는 것을 보면서 과연 인간은 선함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인지 악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인간의 관계라는 것도 심지어 가족이라는 최고의 관계마저도 부정되어 버리는 현실에 고개를 돌리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이 책이 인간의 나약함과 무기력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최악의 절망 속에서도 공동체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희망을 이야기하는 집단을 보여준다.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여자를 등장시켜서 우리가 진정 보지 못하고 있는 인간의 본성을 목격하도록 하면서 그 반성의 결과로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무한한 희생을 베풀고 그 과정에서 인간성 회복의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결말은 그래서 눈물나게 고맙다. 

왜 눈이 멀었는지 이야기 하지 않는다. 왜 그 여자만 눈이 멀지 않았는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눈이 멀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눈 먼 사람들. 그들이 바로 지금의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문장부호 하나 없이 단락의 구분도 없이 쉼없이 몰아치는 문체 속에서 독자는 끝없는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다. 어쩌면 작가는 문장부호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어떤 감정도 독자에게 강요하기 싫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누가 이야기하는 것인지 물어보는 것인지 대답하는 것인지 구별하기 힘든 문장속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분리하다 보면 어느새 작가의 의도를 따라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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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메르 VS. 베르메르
우광훈 지음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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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미술에는 전혀 문외한인 나. 규레이터들이나 미술평론가들이 말하는 미적기준, 걸작의 이유 등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는 나. 그저 밀레의 그림을 보면 마음의 평안을 느낄 수 있고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 혼돈의 시대의 방황하는 이성을 느낄 수 있다는 정도. 그래서 어떤 그림이 좋고 나쁜지 전혀 판단할 수 없는 나이기에 책의 처음을 장식하는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들을 보면서도 햇볕이 따스하게 스며든 편안한 기분을 느끼며 책을 읽어 나갔다.  

책은 베르메르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브리엘 이벤스'의 일대기를 보여준다. 역시 내게는 전혀 지식이 없는 인물이기에 네이버를 이리저리 해매고 다녔으나 정보는 거의 없다. 그러다 결국 알아낸 것이 그는 작가의 상상이 만든 인물이며 '반 메헤렌'이라는 인물을 모델로 했다는 사실. 그에 대한 정보는 참 많았는데 그의 위작사건과 재판의 진행과정은 책과 거의 동일했다. 다만 그의 일생이 책과 같았는지는 알 수 없다. 궁금하다면 네이버 지식검색을 강추 !! 

가브리엘의 위작이 가능했던 건 하나의 이슈에 부화뇌동하는 미술계의 문제점과 미술을 예술이 아닌 부와 명예의 상징, 재산의 또 다른 형태로 바라보는 그 시대 자본가들의 행태가 함께 빚어낸 시대적 환경 때문이다. 가브리엘의 재판과정에서도 국가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소위 '마녀사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언론이라는 매체의 잘못된 호도가 어떤 결과를 이끌어 내는 지 잘 보여주고 있다. 매국노에서 국가적 영웅으로 순식간에 변하는 모습을 보면 집단적 히스테리가 만드는 거대한 군중심리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 인터넷도 없고 방송의 힘도 강하지 않았던 그 시대의 모습이 어쩌면 이리도 지금의 모습과 닮아 있는지... 오늘도 어딘가에서 익명성을 담보로 악풀과 비방을 일삼고 어느 한 사람을 마녀사냥으로 몰아세우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일약 스타로 만들어버리는 소위 네티즌이라는 사람들이 한번쯤은 경계로 삼아 읽어봐야 할 책이 아닌가 한다. 

한국 작가가 우리의 역사가 아닌 서양의 역사, 그것도 일반인에게 생소한 미술사학을 가지고 소설을 썼다. 제목만 보고 분명 외국작가의 작품이라 생각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소설이 나왔다는게 너무도 기쁘다. 언제나 한국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한국사람들의 이야기만 쓰던 우리 문학의 지평이 우광훈이라는 작가의 실험적 시도로 인해 세계로 넓혀지는 느낌이다. 그의 시도에 박수를 보낸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힘도 뛰어나다. 실화를 소재로 했음에도 가상인물들을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마치 책속의 인물들이 실존인물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의 성공에 함께 기뻐하고 그의 좌절에 함께 슬퍼하며 그의 고집에 안타까운 시선을 던지며 그의 분노에 공감하지는 못하나 불쌍함을 느끼는 나 자신을 보면서 작가의 능력이 뛰어남을 인정한다. 다음 작품도 반드시 읽어보고 싶다. 기대가 되는 작가이다. 

가브리엘 이벤스의 일대기이기에 그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가 책에 대한 나의 서평이 될 것 같다. 그러나 그 판단이 쉽지 않다. 겉으로 드러난 가브리엘 이벤스 -즉, 반 메헤렌-은 최고의 기술을 가진 최고의 사기꾼에 불과하지만 작가가 창조한 가브리엘 이벤스는 일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래서 두가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호적인 시선 - 그가 시대의 광기에 휩쓸려 사실주의와 고전주의가 종말을 고하는 1940년대가 아닌 베르메르와 동시대에 태어났다면 지금의 우리는 베르메르가 아닌 그의 이름을 외우지 않았을까? 하늘이 그에게 천재의 재능을 주었으나 시대의 불행까지 함께 주었으니 신은 그래서 공평한 것인지? 시대의 흐름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만의 심미관을 고집하는 그의 모습은 일면 어리석고 답답해 보이지만 예술가의 자리는 그런 뚝심과 고집과 인내가 필요하다고 본다면 변화에 대한 그의 대처는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그런 고집을 버리고 세상과 타협을 시도했을 때 그는 좌절했고 방황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이 그가 세상에 대한 분노를 가지게 했다면 그의 분노 또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마지막 법정에서 그가 완벽한 위작을 재현할 때 나 또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우호적인 시선으로 본다면 그는 시대를 잘못타고 태어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불행한 천재이다.

비판적인 시선 - 그에게는 하늘이 준 재능이 있었다. 또한 자신의 재능을 시대에 맞출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미술학교가 그 기회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기회를 스스로 버렸고 결국 평생 시대와의 불화에 시달려야 했다. 그것이 예술가의 기질이라 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에게 두번째 기회가 온 것은 파리에서의 성공이다. 그 성공은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묵묵히 버텨낸 그에게 준 선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성공에서 너무도 사악한 면만 취하게 된다. 성공의 달콤한 열매이다. 너무도 유혹적인 성공의 매력에 그는 세상과 타협을 시도하지만 그가 시도하는 타협은 예술적 동기에 의한 타협이 아니라 성공에 대한 세속적 동기에 대한 타협이었기에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그런 모습을 경계하고 충고하던 유일한 사랑마저 버린 그. 결국 그 모든 일들은 자신의 책임임을 무시한 채 세상에 대한 분노만 키우다 결국 하늘이 준 재능을 어이없게 소모해 버린 희대의 사기꾼. 비판적 시선으로 본다면 그는 죄질이 아주 나쁜 사기꾼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도 어느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여전히 내 안에서 싸우고 있는 두가지의 시선. 결국 난 두가지 모두를 나의 생각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어느 한가지 시선으로 보기에 작가가 창조한 가브리엘이라는 인물이 안쓰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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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해줘
기욤 뮈소 지음, 윤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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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영화나 프랑스 소설은 너무 심각하다. 예술적 가치는 뛰어날지 모르지만 재미면에서는 '정말 아니올시다'이다. 그런데 젊은 프랑스 작가 하나가 서점가에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기욤 뮈소'. 나에겐 생소한 작가인데 정말 궁금했다. 그래서 그의 책을 3권 사서 처음 읽은 책이 바로 '구해줘'.  

그런데 이 책. 정말 프랑스 소설인가? 작가는 분명 프랑스 작가지만 이야기는 미국의 이야기다. 미국의 뉴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프랑스 작가가 썼다. 그럼 이건 미국소설인가? 프랑스 소설인가? 책을 다 읽고난 지금의 느낌은 이 책은 철저히 미국소설이다. 

한편의 헐리웃 영화를 보고 난 것과 비슷한 느낌의 소설. 영상세대에 맞는다는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생판 모르는 남녀가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고 행복할 것만 같던 그들에게 얘기치 못한 사건이 터지고 그 사건이 다른 사건과 연결되고 약간은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등장하고.... 말 그대로 우리가 익히 보아 온 헐리웃 영화의 공식을 그대로 따른다. 그래서 좀 식상하다. 그러나 식상하다고 한 구석으로 던져 버릴 수 없는 재미가 있다. 책을 놓는 순간까지 다음 내용이 궁금해지고 두 사람의 운명이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 속에 담은 메세지는 가볍지 않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해 보이지만 각각의 상처를 안고 사는 두 남녀가 우연히 만남 누군가에게 한눈에 반하고 그 감정은 단순한 애정을 넘어서 서로의 상처를 치유할 유일한 희망으로 다가온다. 그러니까 그들은 서로에게 '구해줘'를 외치고 있다. 입으로는 '사랑해'를 말하지만 그 속에는 '구해줘'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에 줄리에트는 모든 위험을 무릎쓰고 비행기에서 내린 것이고 샘은 줄리에트를 위해 그렇게 미친듯이 뛰어다닌 것이다. 그들의 행동은 단순히 사랑으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이고 서로에 대한 '구원'이었기에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구하게 되는 것이고 이는 그들을 위한 해피엔딩이 아니라 어쩜 그들과 너무나도 닮아있는 우리 모두를 위한 '구원'의 해피엔딩일 것이다. 

그들(?-아직도 인정하지 못하는 절대자들)이 그레이스를 환생시킨 목적이 진정 줄리에트였는지 아직도 알지 못하겠다. 어쩌면 줄리에트가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고 그레이스를 환생시킨 목적은 그녀의 주디와 주디에 의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녀가 환생하지 않았다면 주디는 끔찍한 사고의 주범이자 희생양이 되었을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일 것인데 그레이스의 환생으로 인해 구원을 받을 수 있었기에 그레이스의 진정한 임무는 그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신의 섭리라면 나도 할말은 없다. 

개인적으로 신의 존재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에는 불가사의한 일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래서 그레이스의 존재가 거부감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비현실적이라는 것은 분명 지적해야 겠지만.... 단 하나의 비현실적인 캐릭터로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는 작가의 재주가 놀랍고 눈을 뗄 수 없게 전개해 나가는 힘이 책안에 가득하다. 이 작가도 일단은 마음에 든다. 

'운명론'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사람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 어린 시절엔 정말로 말도 안되는 생각이라고, 요즘같은 과학의 시대에 무슨 되지도 않는 생각이냐고 무시해 버리고 살았는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요즘은 생각이 바뀌고 있다. 나는 절대로 아버지처럼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하고 아버지의 모습에 반대로만 행동했는데 결국은 내가 아버지의 나이에 아버지와 다른 듯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아는 그리고 알았던 많은 사람들 또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거나 내곁을 떠나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이 삶에 얼마나 애정과 열정을 들였는지 잘 아는 내가 보기에 그들이 처한 상황들은 너무나 억울하니까 말이다.  

어쩌면 운명은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바뀔 수 없는 것, 변할 수 없는 것. 그게 분명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결과가 그렇게 된다해도 손놓고 따라가기엔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뭔가 싸워보고 손을 들어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난 오늘도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다. 자신의 여자를, 자신의 구원을 지키기 위해 목숨마저 아끼지 않는 샘 갤러웨이처럼.... 

P.S : 솔직히 30대 후반 아저씨가 읽기엔 좀 그렇다. 아마도 20대 초반의 아가씨들이라면 열광할 만한 소설이다. 그래서 아마도 베스트셀러가 되었겠지만... ^^

P.S 2 : 우리나라에만 있을 줄 알았던 '저승사자'의 개념이 프랑스 작가에게서 나온다니 참 신기하다. 우리시대의 저승사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강풀의 '아파트'에 나오는 저승사자가 생각난다. 서로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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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A
비카스 스와루프 지음, 강주헌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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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체포되었다. 퀴즈쇼에서 우승한 대가로.' 첫 문장에 이끌려 주문한 책이다. 생소한 인도소설이고 전문작가가 아닌 외교관이 쓴 것이라 하니 약간의 고민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기우.  

첫 문장의 내용대로 퀴즈쇼에 우승한 대가로 체포된 18살 빈민 웨이터의 인생이야기가 내용이다. 그의 삶에는 인도의 치부가 그대로 드러난다. 참혹한 빈민가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고통은 전혀 딴나라 이야기라도 되는 듯 화려함으로 넘쳐나는 부자들의 삶, 그리고 돈과 뇌물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비리투성이의 관료들의 모습까지. 차마 부끄러워 말하지 못할 치부들이 주인공의 삶과 함께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한 나라의 외교관이라는 작가가 자국의 치부를 이렇게 드러낼 수 있다니... 이게 과연 칭찬할 일인지 욕해야 될런지. 그 역시 비리에 얼룩진 관료인 것은 아닌지... 그러나 한편으로는 최고의 엘리트인 그가 최하층 빈민의 삶을 그렇게 꿰뚫고 있다는게 인도의 힘이란 생각도 든다. 인도의 잠재력일지도 모른다.  

책은 주인공의 삶을 통해 아무리 어려운 삶을 살고 아무리 괴롭게 하루하루 잠이든다해도 그렇게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언제가 자신에게 커다란 행운이 될 것이라는 메세지를 보내고 있다. 또한 힘들도 괴로운 생활속에서도 정직을 신조로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보답을 주는 것이 삶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책의 내용처럼 어쩌면 우리 인생의 답은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하루하루, 또한 우리가 지나온 하루하루의 시간이 아닐까 한다.  

주인공의 기구한 삶에 가슴이 아프고 다음에 그의 삶이 궁금해서 끝까지 책을 놓을 수 없다. 마지막 뒤통수를 때리는 가벼운 반전이 있어서 더욱 좋았다. 결국 권선징악의 내용이기에 기분좋게 책을 놓을 수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르지 않고 문제의 순서에 따라 흘러가는 주인공의 삶을 시간의 순서대로 다시 끼워 맞추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인도라는 나라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는 나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재미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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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8 0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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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라는 나라를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지라  아무리 유명해도 일본소설은 일부러 피하는 경향이 있는 내가 이 책을 선택한 건 순전히 북카페 회원들의 평가 때문이다. 어쩌면 그런 편견을 한번은 깨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작용했을 수도 있다. 암튼 결과적으로 보면 이 선택은 정말 탁월했다.  

 '링'이나 '검은집' 처럼 조금은 엽기적인 일본소설만 보아왔던 내게 일본 추리소설을 색다른 느낌이었다. 특히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이 작가는 첫장부터 추리소설의 기본을 깨버리고 있으니 더욱 그럴 수 밖에. 범인을 끝까지 숨기고 추리해 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처음부터 범인을 알려주고 추리를 이끌어 가는 형식의 파괴는 신선하게 느껴진다. 마치 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P≠NP'라는 질문을 하는 형식이다. 즉, 내가 처음에 본 사건에 대해 나의 추리를 세우는 것이 쉬운가? 아니면 등장인물들의 추리를 검증하는 것이 쉬운가? 하는 문제이다.  

 분명 나는 처음부터 사건을 알고 있다고 믿었고 그렇기에 형사들이나 유가와의 추리가 어긋나고 있다고 믿으며 책을 읽어나갔는데 마지막에 가면 나도 그들도 결국은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 되고 말았다. 작가의 트릭에 보기좋게 넘어가 버린 것이다. 정말 허무하게.... 중간에 조금의 의심이라도 있었다면 반항이라도 해 보겠는데 너무 완변하고 깨끗하게 당하고 마니 그저 멍한 상태일 뿐.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사랑의 의미란 대체...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이렇게까지 지독할 수 있을 지. 내가 그런 정도의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면 과연 사랑하는 이를 위해 이런 계획을, 이렇게 처절하고 지독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니겠지. 마눌님이 들으면 서운해 할 지 몰라도 이렇게까지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제목에서부터 용의자 X의 헌신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이야기가 거의 끝날때까지 그의 노력은 단순한 헌신 정도로 이해할 수 있지만 마지막 반전을 지나고 보면 용의자 X의 헌신은 그냥 '헌신'이 될 수 없는, 나로서는 상상도 안되는 그 무엇이 되고 만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옮긴이의 말대로 내가 아무 의미없이 하는 행동이 함께 살아가는 그 누구에게는 지독한 의미를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나의 의미없는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무엇이 될 수 있다는 경고도 함께 해주고 있다. 이런 장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은 그래서 '슬픈'추리소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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