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대통령 링컨 (반양장)
전광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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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로 가공된 이야기. 이건 링컨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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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만의 휴식 - 마음의 평안과 자유를 얻은
이무석 지음 / 비전과리더십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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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일까? 난 이 책을 읽으면서 양가적인 생각이 들었다. 우선 이 책은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인격은 무의식이 지배한다. 무의식 속의 마음 속의 아이가 바로 우리의 성격을 규정하고, 이 마음 속의 아이는 어릴 적 부모와의 유대 관계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그러니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가장 내면적인 인격은 바로 타율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마도 우리에게 자유란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행동을 규정하는 인격, 인성이 모두 유아시절의 우연한 사건들에 의하여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성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정신분석이론이 옳다고 한다면 과연 인간의 도덕성이란 무엇일까? 정신분석이론에 따르면 도덕성의 토대가 되는 우리의 양심은 사실은 가족간 관계의 우연한 사건들을 통하여 형성된 초자아. 만약 어떤 사람이 양심이 전두환이나 조두순처럼 매우 무디더라도 우리는 그를 비난할 수 없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은 그의 탓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의 틀로 비추어보면 그는 치료의 대상이지 처벌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이 책은 동시에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고, 스스로의 가치를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 바로 자유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내가 궁금한 것은 그렇다면 과연 스스로의 가치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어떤 것도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진 것은 없다. 인간에게는 매우 값비싼 다이아몬드도 침팬지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어떤 것이 가치가 있다는 것은 관계들 속에서의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가 어떠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과연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채 인간이 즉자적으로 스스로에게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까? 이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종교적인 신앙 가짐으로써, 배우자에게 인정받음으로써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켜 자신을 해방할 수 있다고 하며 여러가지 사례들을 모범적인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즉자적인 가치란 없다는 것을 방증하는 사례들이 아닐까? 초반부에서 사례로 든 휴씨의 경우, ‘상대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비난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이야기하지만 과연 정말 그 말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인간은 누군가의 평가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있다. 대학 교수는 자신의 학문성에 대한 샛병아리 학생의 악평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전념하는 학문의 대가가 자신을 혹평한다면 견디기 힘들 것이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줄 누군가의 평가와 인정을 필요로 한다. -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금지된다’ -

 

행복은 과연 마음먹기에 달려 있을까? 이 책의 표지에 실린 중앙일보 주필의 서평에 따르면 그러한 것 같다. - 사회, 제도, 사람들에게서 우리의 불행의 원인을 찾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다. 이것을 변하게 하려는 것은 무용하다. 바뀔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인류의 역사다. 내가 마음을 달리 먹는다면 부당한 현실도 다르게 보일 것이다. – 이것은 한국 사회에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긍정의 힘과 유사한 주장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사회 변혁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우파적인 주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스웨덴이나 덴마크와 같은 기본적인 물질적 복지가 이루어진 국가에서 구성원이 느끼는 행복은 신자유주의적 무한 경쟁이 강요되는 한국 사회의 구성원이 느끼는 행복과는 높은 수준차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구성원 대부분에게 뒤처지는 것은 곧 낙오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저자가 말하는 여유와 휴식이란 분명 공허한 감이 있다. 나는 이 책에서 등장하는 분석 사례들이 대부분 성공한 중산층 이상의 인물들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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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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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이 과연 가족 이데올로기를 비판한 것일까요? 이 책의 표지에 소개하기로는 이 소설은 가족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그러한 이해는 이 소설에 대한 심각한 오해입니다. 오히려 저는 이 소설이 겨냥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이데올로기적인 삶 일반이라고 생각해요. 이 점을 해명하고 저 나름대로의 독해를 제시하는 것이 이 글의 주된 목적입니다.

 

벤이라는 존재를 가족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아마도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점은 바로 벤이라는 존재의 비현실성일 것입니다. 그런 아이는 전문가인 브래트 박사도 이전에는 본 적이 없는 특이한 존재이죠. 그런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로 가족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은 그리 설득력 있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이데올로기에도 벤과 같은 특이한 괴물들을 가정할 수 있거든요. 헤리엇과 데이비드가 거리를 두는 ’68 이데올로기의 경우, 그것을 철저히 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존재, 예컨데 성교로 전염되는 괴물과 같은 바이러스를 상정할 수가 있죠. (더군다나 이미 HIV라는 현실의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 책을 이데올로기 그리고 괴물에 관한 이야기로 독해했습니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이 건축하고자 한 상징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세계가 이야기의 한 축이고 그것을 붕괴시키는 벤이라는 괴물의 침입, 곧 실재의 침입이 또 하나의 축이죠. (여기서 상징적, 실재적이라는 단어는 라캉적인 의미입니다.) 사실 처음부터 데이비드와 해리엇이 구축하고자 했던 세계는 삐그덕거렸습니다. 혼외 정사를 거부하고, 산아 제한이나 약물도 거부하는 세계 안에서 행복을 구현하려고 했지만, 데이비드는 그것을 위해 시작부터 자신이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친부의 재정지원을 얻어야만 했지요. 마찬가지로 해리엇은 자신들의 계획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친모 도로시의 도움을 얻어야만 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순결함을 더럽히는일종의 대체 보충이라고 할까요? 이러한 대체 보충의 예는 어느 이데올로기에서나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컨데 단일민족임을 자부하고 외국인을 배척하는 순혈주의적 민족주의의 태도는 사실은 순혈주의의 불가능성을, 한민족이란  여러 인종의 혼종이라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 아닐까요?

 

결국 이러저러한 곤경을 헤쳐나가 그들은 4번째 아이까지 낳는데 성공했습니다. 고풍스러운 저택을 장만했고, 절기가 되면 친척들과 친구들의 가족들이 모여 단란한 담소를 나누죠. 그렇지만 그들의 모습에는 어쩐지 불안함이 내비쳐집니다. 아이들의 교육 문제 (그리고 그에 따르는 재정 문제)가 있으며, 가족들 간의 담소 속에 담겨있는 날선 비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아기를 안고서 자신들의 만들어나갈 행복한 미래를 생각하며 미소를 짓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들의 세계에 벤이 던져집니다. 벤의 출생은 처음부터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급작스러운 출현이지요. 벤이라는 괴물과 함께 그들의 세계는 비틀거리기 시작합니다. 애시당초 그들의 가치관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마저 벌어집니다. 바로 아기를 유기하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라도 부부는 자신들의 세계를 지켜내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 행위 자체야말로 해리엇에게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모순이었고, 그 자체로 증상을 만들어냅니다. 결국 벤은 회귀하여 그들의 세계를 해체해버리고 말죠.

 

실재는 언어화 될 수 없는 무엇이라고 정의되지요. 모든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상징적 세계는 그것이 설명할 수 없는 실재를 대면하는 순간 비틀거리기 시작합니다. 벤이 바로 그러한 경우입니다. 부부는 벤을 신이 보낸 존재, 또는 우연한 돌연변이 등으로 설명하고자 애쓰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실재란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상태로 우리의 세계가 변화될 때까지 고집스럽게 세계의 바깥, 그리고 속에 박혀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 역시 다양한 병리적 증상들을 겪고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증상은 무엇인가가 억압될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억압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우리의 세계는 과연 그것을 말할 수가, 언어화할 수가 있을까요? 제가 이 책을 읽으며 떠올리게 된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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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1-11-02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리뷰입니다^^

자꾸때리다 2011-11-02 23:3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2011-11-04 0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꾸때리다 2011-11-04 22:30   좋아요 0 | URL
아이유를 모르시나요? 당연히 저 아니죠. 저는 남자입니다.ㅋㅋㅋ

2011-11-04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안티조선 운동사 - 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역사
한윤형 지음 / 텍스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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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가가 예언자의 역할을 하던 때가 있었다. 진정한 역사가는 역사의 참된 흐름을 읽고 역사가 나아갈 바/ 나아가야 할 바를 예언해야 한다고 규정되곤 했다. 근대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 중에 하나였던 마르크스는 그러한 의미에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로 여겨졌다. 물론 이제는 더 이상 대문자 역사를 믿지 않는 시대가 되었으므로 역사가는 이렇게 규정되지 않는다. 지금은 조금 상황이 달라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르크스는 좌파에게서조차 거짓 예언자로 몰리기까지 했을 정도다. 그렇다면 이 파편화된 시대에서 역사가의 역할은 무엇일까. 실패한 운동으로서의 안티 조선이라는 키워드로 지난 십여년의 역사를 읽어내려는 한윤형의 시도를 읽으면서 나는 이런 물음을 떠올렸다.

 

2) 87년의 민주화 운동이 삼당합당을 기점으로 그 동력을 상실한 후에 김영삼 정권의 등장과 언론의 권력화는 안티 조선 운동의 등장 배경이 되었다. 언론 권력의 피해자인 최장집이 주장하는 것처럼 언론 개혁은 민주주의의 정립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다. 수십년 전에는 군사정권이 타도의 목표였다면 지난 십여년은 조선일보로 상징되는 기득권 언론이 그 목표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목표마저 변하게 되었다. 삼성으로 상징되는 자본 권력이 사회의 전방위를 장악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언론마저 그들의 부스러기를 주워먹는 개가 되었다. (한윤형은 조선일보가 삼성의 하수인이 아니라고 했지만 조선일보는 결정적인 순간에 삼성에 순응할 수 밖에 없다.)  이제는 안티 삼성을 해야한다는 목소리가 외쳐지고 있다. 그런데 과연 삼성의 이씨 가문이 사라지면 사회는 나아질까? 물론 내가 삼성을 비판해야 하는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사회를 망치고 있는 진정한 실체를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과거에는 이 나라에 1인 1표만 정립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87년이 지나고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친 이후에도 이 희망은 정당하다고 볼 수 있을까?

  

3) 많은 이들이 생각하듯이 민주주의가 올바르게 지탱되기 위해서는 공론장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는 공론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공론장의 역할을 자임하는 언론들은 이미 그 역할을 배반한지 오래다. 이런 현실에 대한 경험적 증거들은 이 책에도 무수히 기록되어 있다. 이런 현실에서 각하와 같은 분들이 소통을 이야기하는 것은 기만에 불과할 것이다. '이 미친 세상'이라고 노래한 어느 밴드의 곡이 금지곡이 된 것처럼 미친 현실을 미쳤다고 말할 수 없는 곳이 한국 사회다. 나 역시 의과대학이라는 기형적 공간에서 소통 불가능이라는 현실에 절망해왔다. 나는 한윤형의 책이 그 닫혀버린 공론장을 비집어 열어낼 수 있는 자그마한 망치와 정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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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eytonight 2011-03-29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뻘댓글 죄송한데...자꾸때리다에서 빵터졌어요 ㅠㅠ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 -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에 대한 반론
마이클 샌델 지음, 강명신 옮김 / 동녘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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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윤리를 말하는 것보다 윤리의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앞서지 않을까? 윤리란 인간의 윤리이기 때문에 인간을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그 양태가 변화하며 그 생명이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고대와 중세, 근대 그리고 현대의 윤리적 입장들이 커다란 변화를 겪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샌델의 윤리적 입장은 어떤가? 나는 이 짤막한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비판적인 의문을 품게 되었다.

샌델의 핵심 논변은 인간의 삶이란 ‘선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타인의 조작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논변이 종교의 영역으로 한정 지을 수 없다고 강변한다. 이러한 생각은 ‘세속적’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주장에 의문이 든다. 이러한 생각은 ‘통념적’인 것은 될 수 있어도 ‘탈 종교적’이라는 의미에서 ‘세속적’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꼭 신이 아니더라도 자연이 인간에게 삶을 준 이상 생명에 대한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샌델은 생각하지만 자연이란 그저 물질과 에너지의 집합체라고 생각하는 다니엘 데넷과 같은 자연주의적 다윈주의자에게 그런 입장은 자연을 신격화하는 우상 숭배로 여겨질 것이다.

샌델은 우생학을 반대한다. 그것을 본질상 타인의 조작을 허용하지 않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질문이 역으로 가능하다. -인간은 과연 자유로운 존재인가? - 인간이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라는 서구 자유주의 철학의 기본 가정은 존 그레이가 지적하듯이 기독교 전통에서 기원한 것이다. 오히려 벤자민 리벳의 고전적인 연구처럼 현대 과학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인간이 자기결정적인 주체라는 인식은 언어가 만들어낸 효과이라는 것이 현대 구조주의 사상의 주된 요점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유전자 조작은 인간의 자유를 도전하지 않는다. 애당초 자유는 없기 때문이다.

인류는 다른 동물에 대해서는 거리낌없이 우생학적 수단을 사용한다. 인류는 자신의 필요를 위해 가축들을 품종 개량하는데 수많은 노력을 투자하며 그것을 당연시한다. 그러나 인간을 ‘품종 개량’하는 것은 죄악시한다. 과연 무엇이 다른가? 샌델의 책은 그러한 시도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한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열망에 찬 저술이다. 그러나 다윈이 알려준 사실은 인간 역시 다른 동물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나 감성에서 인간의 (타 동물 종에 대한) 우월성의 기반을 찾으려는 시도는 스티븐 제이 굴드가 설득력 있게 논구하듯이 다윈주의의 함축과 충돌할 수 밖에 없다.

결국 문제는 인간관이다. 샌델이 전제하고 있는 인간관은 근대 서구 휴머니즘의 인간관이다. 서구 근대 휴머니즘의 인간관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고귀한 존재다. 자유로우며 이성을 지녔으며 따라서 다른 동물에 비해 본질적으로 우월하다.’ 존 그레이가 지적하듯이 이러한 입장은 기독교의 잔재 속에서 형성된 유사 종교일 뿐이다. 니체나 다윈, 프로이트 등이 그려내는 인간 상은 이런 입장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나 역시 우생학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전자 조작을 통해 후손을 만들어내는 것에 대해 불쾌감을 느끼고 있다. 샌델 역시 이러한 불쾌감의 근거를 분석하려는 마음에서 이 책의 저술을 기획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나는 유전자 조작을 반대하는 샌델의 논변에 상당한 결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느끼는 불쾌감의 정당함을 논증하려는 시도는 올바른 근거 위에 서있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책에 담긴 논변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이보다 더 넓게, 그리고 더 깊게 사유하는 지적 모험을 시작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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