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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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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이 과연 가족 이데올로기를 비판한 것일까요? 이 책의 표지에 소개하기로는 이 소설은 가족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그러한 이해는 이 소설에 대한 심각한 오해입니다. 오히려 저는 이 소설이 겨냥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이데올로기적인 삶 일반이라고 생각해요. 이 점을 해명하고 저 나름대로의 독해를 제시하는 것이 이 글의 주된 목적입니다.

 

벤이라는 존재를 가족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아마도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점은 바로 벤이라는 존재의 비현실성일 것입니다. 그런 아이는 전문가인 브래트 박사도 이전에는 본 적이 없는 특이한 존재이죠. 그런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로 가족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은 그리 설득력 있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이데올로기에도 벤과 같은 특이한 괴물들을 가정할 수 있거든요. 헤리엇과 데이비드가 거리를 두는 ’68 이데올로기의 경우, 그것을 철저히 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존재, 예컨데 성교로 전염되는 괴물과 같은 바이러스를 상정할 수가 있죠. (더군다나 이미 HIV라는 현실의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 책을 이데올로기 그리고 괴물에 관한 이야기로 독해했습니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이 건축하고자 한 상징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세계가 이야기의 한 축이고 그것을 붕괴시키는 벤이라는 괴물의 침입, 곧 실재의 침입이 또 하나의 축이죠. (여기서 상징적, 실재적이라는 단어는 라캉적인 의미입니다.) 사실 처음부터 데이비드와 해리엇이 구축하고자 했던 세계는 삐그덕거렸습니다. 혼외 정사를 거부하고, 산아 제한이나 약물도 거부하는 세계 안에서 행복을 구현하려고 했지만, 데이비드는 그것을 위해 시작부터 자신이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친부의 재정지원을 얻어야만 했지요. 마찬가지로 해리엇은 자신들의 계획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친모 도로시의 도움을 얻어야만 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순결함을 더럽히는일종의 대체 보충이라고 할까요? 이러한 대체 보충의 예는 어느 이데올로기에서나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컨데 단일민족임을 자부하고 외국인을 배척하는 순혈주의적 민족주의의 태도는 사실은 순혈주의의 불가능성을, 한민족이란  여러 인종의 혼종이라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 아닐까요?

 

결국 이러저러한 곤경을 헤쳐나가 그들은 4번째 아이까지 낳는데 성공했습니다. 고풍스러운 저택을 장만했고, 절기가 되면 친척들과 친구들의 가족들이 모여 단란한 담소를 나누죠. 그렇지만 그들의 모습에는 어쩐지 불안함이 내비쳐집니다. 아이들의 교육 문제 (그리고 그에 따르는 재정 문제)가 있으며, 가족들 간의 담소 속에 담겨있는 날선 비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아기를 안고서 자신들의 만들어나갈 행복한 미래를 생각하며 미소를 짓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들의 세계에 벤이 던져집니다. 벤의 출생은 처음부터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급작스러운 출현이지요. 벤이라는 괴물과 함께 그들의 세계는 비틀거리기 시작합니다. 애시당초 그들의 가치관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마저 벌어집니다. 바로 아기를 유기하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라도 부부는 자신들의 세계를 지켜내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 행위 자체야말로 해리엇에게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모순이었고, 그 자체로 증상을 만들어냅니다. 결국 벤은 회귀하여 그들의 세계를 해체해버리고 말죠.

 

실재는 언어화 될 수 없는 무엇이라고 정의되지요. 모든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상징적 세계는 그것이 설명할 수 없는 실재를 대면하는 순간 비틀거리기 시작합니다. 벤이 바로 그러한 경우입니다. 부부는 벤을 신이 보낸 존재, 또는 우연한 돌연변이 등으로 설명하고자 애쓰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실재란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상태로 우리의 세계가 변화될 때까지 고집스럽게 세계의 바깥, 그리고 속에 박혀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 역시 다양한 병리적 증상들을 겪고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증상은 무엇인가가 억압될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억압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우리의 세계는 과연 그것을 말할 수가, 언어화할 수가 있을까요? 제가 이 책을 읽으며 떠올리게 된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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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1-11-02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리뷰입니다^^

자꾸때리다 2011-11-02 23:3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2011-11-04 0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꾸때리다 2011-11-04 22:30   좋아요 0 | URL
아이유를 모르시나요? 당연히 저 아니죠. 저는 남자입니다.ㅋㅋㅋ

2011-11-04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안티조선 운동사 - 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역사
한윤형 지음 / 텍스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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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가가 예언자의 역할을 하던 때가 있었다. 진정한 역사가는 역사의 참된 흐름을 읽고 역사가 나아갈 바/ 나아가야 할 바를 예언해야 한다고 규정되곤 했다. 근대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 중에 하나였던 마르크스는 그러한 의미에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로 여겨졌다. 물론 이제는 더 이상 대문자 역사를 믿지 않는 시대가 되었으므로 역사가는 이렇게 규정되지 않는다. 지금은 조금 상황이 달라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르크스는 좌파에게서조차 거짓 예언자로 몰리기까지 했을 정도다. 그렇다면 이 파편화된 시대에서 역사가의 역할은 무엇일까. 실패한 운동으로서의 안티 조선이라는 키워드로 지난 십여년의 역사를 읽어내려는 한윤형의 시도를 읽으면서 나는 이런 물음을 떠올렸다.

 

2) 87년의 민주화 운동이 삼당합당을 기점으로 그 동력을 상실한 후에 김영삼 정권의 등장과 언론의 권력화는 안티 조선 운동의 등장 배경이 되었다. 언론 권력의 피해자인 최장집이 주장하는 것처럼 언론 개혁은 민주주의의 정립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다. 수십년 전에는 군사정권이 타도의 목표였다면 지난 십여년은 조선일보로 상징되는 기득권 언론이 그 목표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목표마저 변하게 되었다. 삼성으로 상징되는 자본 권력이 사회의 전방위를 장악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언론마저 그들의 부스러기를 주워먹는 개가 되었다. (한윤형은 조선일보가 삼성의 하수인이 아니라고 했지만 조선일보는 결정적인 순간에 삼성에 순응할 수 밖에 없다.)  이제는 안티 삼성을 해야한다는 목소리가 외쳐지고 있다. 그런데 과연 삼성의 이씨 가문이 사라지면 사회는 나아질까? 물론 내가 삼성을 비판해야 하는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사회를 망치고 있는 진정한 실체를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과거에는 이 나라에 1인 1표만 정립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87년이 지나고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친 이후에도 이 희망은 정당하다고 볼 수 있을까?

  

3) 많은 이들이 생각하듯이 민주주의가 올바르게 지탱되기 위해서는 공론장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는 공론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공론장의 역할을 자임하는 언론들은 이미 그 역할을 배반한지 오래다. 이런 현실에 대한 경험적 증거들은 이 책에도 무수히 기록되어 있다. 이런 현실에서 각하와 같은 분들이 소통을 이야기하는 것은 기만에 불과할 것이다. '이 미친 세상'이라고 노래한 어느 밴드의 곡이 금지곡이 된 것처럼 미친 현실을 미쳤다고 말할 수 없는 곳이 한국 사회다. 나 역시 의과대학이라는 기형적 공간에서 소통 불가능이라는 현실에 절망해왔다. 나는 한윤형의 책이 그 닫혀버린 공론장을 비집어 열어낼 수 있는 자그마한 망치와 정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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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eytonight 2011-03-29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뻘댓글 죄송한데...자꾸때리다에서 빵터졌어요 ㅠㅠ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 -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에 대한 반론
마이클 샌델 지음, 강명신 옮김 / 동녘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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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윤리를 말하는 것보다 윤리의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앞서지 않을까? 윤리란 인간의 윤리이기 때문에 인간을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그 양태가 변화하며 그 생명이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고대와 중세, 근대 그리고 현대의 윤리적 입장들이 커다란 변화를 겪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샌델의 윤리적 입장은 어떤가? 나는 이 짤막한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비판적인 의문을 품게 되었다.

샌델의 핵심 논변은 인간의 삶이란 ‘선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타인의 조작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논변이 종교의 영역으로 한정 지을 수 없다고 강변한다. 이러한 생각은 ‘세속적’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주장에 의문이 든다. 이러한 생각은 ‘통념적’인 것은 될 수 있어도 ‘탈 종교적’이라는 의미에서 ‘세속적’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꼭 신이 아니더라도 자연이 인간에게 삶을 준 이상 생명에 대한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샌델은 생각하지만 자연이란 그저 물질과 에너지의 집합체라고 생각하는 다니엘 데넷과 같은 자연주의적 다윈주의자에게 그런 입장은 자연을 신격화하는 우상 숭배로 여겨질 것이다.

샌델은 우생학을 반대한다. 그것을 본질상 타인의 조작을 허용하지 않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질문이 역으로 가능하다. -인간은 과연 자유로운 존재인가? - 인간이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라는 서구 자유주의 철학의 기본 가정은 존 그레이가 지적하듯이 기독교 전통에서 기원한 것이다. 오히려 벤자민 리벳의 고전적인 연구처럼 현대 과학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인간이 자기결정적인 주체라는 인식은 언어가 만들어낸 효과이라는 것이 현대 구조주의 사상의 주된 요점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유전자 조작은 인간의 자유를 도전하지 않는다. 애당초 자유는 없기 때문이다.

인류는 다른 동물에 대해서는 거리낌없이 우생학적 수단을 사용한다. 인류는 자신의 필요를 위해 가축들을 품종 개량하는데 수많은 노력을 투자하며 그것을 당연시한다. 그러나 인간을 ‘품종 개량’하는 것은 죄악시한다. 과연 무엇이 다른가? 샌델의 책은 그러한 시도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한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열망에 찬 저술이다. 그러나 다윈이 알려준 사실은 인간 역시 다른 동물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나 감성에서 인간의 (타 동물 종에 대한) 우월성의 기반을 찾으려는 시도는 스티븐 제이 굴드가 설득력 있게 논구하듯이 다윈주의의 함축과 충돌할 수 밖에 없다.

결국 문제는 인간관이다. 샌델이 전제하고 있는 인간관은 근대 서구 휴머니즘의 인간관이다. 서구 근대 휴머니즘의 인간관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고귀한 존재다. 자유로우며 이성을 지녔으며 따라서 다른 동물에 비해 본질적으로 우월하다.’ 존 그레이가 지적하듯이 이러한 입장은 기독교의 잔재 속에서 형성된 유사 종교일 뿐이다. 니체나 다윈, 프로이트 등이 그려내는 인간 상은 이런 입장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나 역시 우생학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전자 조작을 통해 후손을 만들어내는 것에 대해 불쾌감을 느끼고 있다. 샌델 역시 이러한 불쾌감의 근거를 분석하려는 마음에서 이 책의 저술을 기획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나는 유전자 조작을 반대하는 샌델의 논변에 상당한 결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느끼는 불쾌감의 정당함을 논증하려는 시도는 올바른 근거 위에 서있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책에 담긴 논변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이보다 더 넓게, 그리고 더 깊게 사유하는 지적 모험을 시작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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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옹호하다 - 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 비판
테리 이글턴 지음, 강주헌 옮김 / 모멘토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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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기독교가 아닌 근대 이후의 주류 신학계가 행한 기독교 해석의 옹호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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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규칙과 사적 언어
솔 크립키 지음, 남기창 옮김 / 철학과현실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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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감탄이 나오는 책이다. 비트겐슈타인 사상의 주요한 주제를 구석구석 상세하고 심도 깊게 풀어나가는 책이다. 또한 매우 명료하다. 비트겐슈타인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다른 철학자를 해석하는 것 또한 매우 독창적인 작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준 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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