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망매
고종석 지음 / 문학동네 / 1997년 5월
평점 :
품절


미리 밝히는 바, 나는 고종석교의 신도다.
무슨 이유로 이런 음험한 소리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내 맘,이라고 말하리라.
여하간 그는, 그의 소설, [제망매] 일부분을 흉내 내자면, 일천구백구십오년 이후, 나에게 세상사를 조근조근, 또박또박, 치우침 없이, 일러준 스승이었고, 부스럼 일고 생채기 난 마음을 다독여 주는 은혜로운 분이었다. 그러니 물고기 몇 마리와 빵 몇 조각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다소 판타지 영화같은 사건은 보여주시지 않았으나, 그의 메세지는, 그의 글을 읽고 그를 흉내내며 폼을 잡았던 나에게, 별다른 매력은 눈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던 나에게, 선배들과 동기들의 관심을 쏠리게 하는 밑천이 되었으니, 이것이 인간의 의한 인간의 구원아니겠는가. 모든 것이 그의 덕이며, 그의 은총은 그렇게 깊었다.

따라서 나는 그의 글을 거의 빼놓지 않고 다 읽었다. 책이건 신문이건 매체를 가리지 않고, 그의 글에 담긴 뜻을 알아 듣던 못 알아 듣던 그건 중요한게 아닌지라, 그저 신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묵묵히 수행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일천구백구십칠년에 구입한 그의 소설 [제망매]를 무려 십년이나 묵혔다 비로소 꺼내 들었다.
나는 왜, 어찌하여, 그의 소설을 읽지 않았던 것일까. 발가락을 까닥거리며 곰곰히 숙고한 결과, 나는 그의 글이 소설과 어울리지 않을 거라는, 미덥지 않은 편견 비슷한 것이 있었고, 말 그대로 편견이었던 생각은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나는 혹시라도 그에게 실망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발상이었다. 그럼 이제 새삼 그 두려움이 사라진 것일까. 아니다. 첫 장을 젖힐 때 까지도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다만 배짱이 좀 붙었을 뿐이다. '네 생각대로 해, 그게 답이야' 정도!

[제망매]는 내 불안을 냅다 걷어냈다고 하기에는 부족했지만, 그렇다고 불안해질 이유도 없었다. 특히, 단편 [사십세]는 내게 특별하기까지 했다. 그 속내를 밝힐 수는 없지만, 그가 나를 들여다 볼 수 있으면 뭔 말인지 알 것이다. 아마 그는 뭔 말인지 알 것이다.
몸이 튼튼해지려면 음식을 가려 먹지 말아야 한다. 옳은 말이다. 글도 마찬가지이다, 라고 하려니 좀 거슬리는 부분이 있지만 이번 경우라면 옳은 말이다.   

소설 [재망매]는 인문학적 소양과 재기 넘치는 문장들이 빛을 발하는, 세상을 향한 그의 안쓰러운 애정이 마구 드러나는, 어떤 부분에서는 에밀 시오랑이 몽실몽실 떠오르는, 찾기 쉽지 않은 소설이다. 그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소설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따라서 나는, 일천구백구십오년 이후로 꾸준히 이어온 신앙을 앞으로도 굳게 지킬 것이다. 당분간, 쫌 오래, 나는 고종석교를 배교하지 않을 듯 싶다. 경험한 바에 의하면 배교는 아프고 또 힘들다. 사족이지만 나는 그것을 김훈에게서 배웠다.

(아끼는 후배가 고종석에게 반했다고 한다. 일천구백구십오년 생각이 났다. 아련했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웽스북스 2009-12-11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고종석 신간 나와요
고종석의 여자들~

굿바이 2009-12-11 15:55   좋아요 0 | URL
오호~
고종석의 여자둘~

2009-12-11 15: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11 1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11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동우 2009-12-12 0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고종석.
(후니마미님 댁에선가) 귀에는 익으나 한번도 글을 접하지 못한 사람.
에밀 시오랑이 그렇더니.
아, 내 과문과 모자람이 이와 같습니다.

굿바이님이 신선한 존숭의 대상을 발견한 시점.
내 일천구백구십오년이라면 그야말로 타성과 비겁함에 절어 절어 헉헉대던 시절.
그 또한 여일하여, 단념할건 단념함ㄴ서 살기로. ㅎㅎ

젊은 시절 흠취하였던 구절(멜라르메의 아포리즘이었던가요?)도 있었건만.
"모든 책을 읽었노라. 육체는 슬프다."
흐음.


굿바이 2009-12-14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일천구백구십오년에 대학교 3학년이었는데, 그때는 정말 지금 생각하면 창피해서 말을 못하겠어요. 뜨겁다 못해 폭발 직전. 알맹이도 없는, 그저 무지몽매, 쌩쑈에 가까운 날들이었어요. 물론, 그 시절 홍역을 앓지 않았다면 여전히 저는 천둥벌거숭이로 살지도 모르지만 말이죠.
"모든 책을 읽었노라. 육체는 슬프다."라는 말, 참 가슴 아프네요. 개입할 수 없는 현실, 개입할 수 없고 바꿀 수도 없는 현실에서 책을 다 읽어 무엇하겠나 싶습니다.

다이조부 2010-09-18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종석 애독자(?)인데 반갑네요.~ ^^

p양 이라는 주변분 이야기 쓰러지게 재미있네요.

굿바이 2010-09-20 11:18   좋아요 0 | URL
고종석 애독자를 이리 만나네요^^

반갑습니다. 매버릭꾸랑님!

다이조부 2010-09-20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에 소개한 책 저도 가지고 있어요~

한 ㅅ ㅣ절 좋아하던 이성 친구 줄려고 꼬옥 쥐고 있었는데

그 자식이 얼큰하게 취해서 못 건네줘서 아직도 방 안 어딘가에 짱 박여 있어요 ㅎㅎ
 
쌀 (반양장)
쑤퉁 지음, 김은신 옮김 / 아고라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작가는 언제나 자신의 체험을 말한다.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야기를 온전히 상상력으로 그려 내는 존경할 만한 작가가 왜 없겠느냐 마는, 적어도 대다수의 작가는 개인적인 체험을 질료 삼아 글을 뽑아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책 표지에 실린 작가의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와 마주 앉아 대화할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진다면 좋겠지만, 아쉬운 대로 그의 사진을 통해 그를 들여다 보고 싶었다. 어딘지 몽환적인 분위기, 도시적인 외모, 예술가다운 섬세함 그런 느낌들이 그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그의 어느 부분에서 흘러 나온 것일까? 독자와 부딪치는 장면마다 부싯돌처럼 섬쩍지근한 불꽃이 튀는 맵찬 글의 맹아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책을 덮고 나는 도시 이해할 수 없는 쑤퉁이 더욱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쌀"은 내게 그런 소설이었다.
저리고, 맵고, 쓴 그래서 소리를 내어 따라 읽다 보면 입안이 얼얼한 그런 이야기 말이다.
주인공인 우룽은 홍수에 모든 것을 잃은 고향 펑양수를 떠나 와장가로 흘러든다. 와장가라는 도시에서 그가 처음 느낀 소회는, 온기없이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공포이며, 생존을 위해서라면 짐승처럼, 단지 살기위해서만 생각해고 행동해야 한다는 절망감이었다.  

주인공이 대홍기 쌀집, 도시 문명으로 상질될 수 있는 곳에 발을 들여 놓은 이후 온갖 멸시를 당할 때마다, 발가락을 잃고, 눈을 잃을 때마다 점점 아귀처럼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문명을 택한다는 것, 근대화의 환상을 갖는다는 것이 무방비한 인간에게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필요 이상의 것들을 향한 욕망, 도시에 들어선 이상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과잉된 욕망은 심지어 열다섯 쯔윈의 옷마저 벗겨 버리니 말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점점 피폐해져 가는 농촌, 사람과 돈으로 넘쳐나는 도시. 그렇지만 도시의 부유함과 현란함은 지독히 냄새나는 것들 위에 세워진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누구도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손에 넣을 수 없음을, 작가는 아바오와 뤼대감의 죽음과 우룽의 문드러지는 육신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책의 제목이자 끊임없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쌀"은 근대화, 도시화, 산업화에 밀려난 모든 것들의 다른 이름이었다. 우룽이 떠나온 고향 펑양수가 곧 쌀이며, 떠나왔지만 그럼에도 평생을 놓치지 않으려 한 것이 또한 쌀이며, 타락한 육체를 정화하는 것 역시 쌀이며, 몸 속으로 매일 집어넣지 않으면 안되는 것 역시 쌀인 것이었다. "산처럼 쌓여 있는 쌀이 은은한 달빛속에서 희미하게 흰빛을 뿜어내고 있었다."(112쪽)면 그 맞은편에는 와장가가 있었고, 우룽과 대홍기 쌀집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니 "쌀"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악취가 풍기고, 악랄하며, 인정사정 보지 않는것들 뿐이다. 즉, "쌀"이 문명 이전의 것이라면, 쌀을 가둔 "쌀집"은 문명의 상징이고, 대홍기 쌀집과 와장가의 사람들은 결국 문명이 낳은 사생아들인 것이다.

쑤퉁은 이 소설에서 인간의 욕망을 살과 뼈를 발라내듯 집요하게 그리고 가감없이 보여준다. 그것이 독자에 따라 흥미로울 수도 있고 곤혹스러울 수도 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생동감 넘치고 사실적인 문체는 책을 읽는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하는 훌륭한 장치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또한, 독서를 하는 동안 나 역시 비릿하고도 선선한 쌀냄새가 그리웠다. 우룽처럼 배가 고픈 적이 없는 나에게도 쌀에 대한 원초적인 향수가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쌀"이라는 소설은 부지불식간에 머리카락 빠지 듯 내안에서 빠져나가는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소설이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내 영혼에 새겨진 상처들이 흰쌀처럼 가볍고 희어져 어두운 밤하늘에 둥실 떠오르기를 나도 소망한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우 2009-12-10 0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로서는 도저히 따를수 없는 굿바이님(책읽는 부족민들 거의)의 독서편력.
쑤퉁, 그저 마음 속에 이름만 담아둡니다.

굿바이 2009-12-11 15:04   좋아요 0 | URL
초등학교 다니는 조카가 저에게 독서편력이라고 하면, 물론 우리 조카는 아직 편력이라는 말을 모르겠지만, 그나마 이해가 될까, 동우님이 그리 말씀하시면 민망할 뿐입니다.^^


후니마미 2009-12-10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몇 주 전 쌀의 인류학 이라는, 일본작가가 쓴 책을 읽다 덮었는데
문학으로서 같은 맥락을 더듬었을 것이란 생각이 드네요
웬디님의 방에서도 보고 온 책 제목입니다.
이혼지침서 라는 책에서 쑤퉁의 이름을 익혔는데
꽤 심각한 일을 꽤 가볍게 이야기해 버리는 재주랄까
문체에 그런 힘이 있다고 느껴졌었어요.

근대화의 물살이 너무나 빠르다 보니
지난 것들,, 빠져나가는 것들에 대해 성찰할 틈도 없이 보내곤 하는데
저도 이제부터 잡아 자세히 보려고 하는 것들이
쌀과 같은 것, 우리의 삶이었으나 변하고 말아 원형을 잃은 것들에 관한 것입니다
막연히 그렇습니다
앞으로 보려고 하는 게 그렇다 보니, 소설 제목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곧 사서 일게 될 듯 하군요

굿바이 2009-12-11 15:09   좋아요 0 | URL
쑤퉁 작품을 몇 권 봤는데, [제왕의 생애], [쌀], [눈물] 다 좋았습니다. 독자를 살살 다루지는 않지만, 작가가 인간을 보는 시선이 저는 좋습니다. 개념적으로 보지 않거든요. 당위같은 것들로 부터 자유로운 작가입니다. 철저하게 실존을 다루는 작가거든요. 흔치 않은 작가입니다.

웽스북스 2009-12-28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언니언니 이주의 리뷰에요. 한턱쏘세요.
(만원받았을텐데 막 쏘래 ㅋㅋㅋㅋㅋ)
 
존 리드 평전 - 사랑과 열정 그리고 혁명의 투혼
로버트 A. 로젠스톤 지음, 정병선 옮김 / 아고라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존 리드(John Reed, 1887.10.22~1920.10.19)는 영화를 통해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의 유명한 저널리스트다. 또한 더 잘 알려진 것처럼 러시아 혁명을 기록한「세계를 뒤흔든 열흘」이라는 르포르타주를 작성한 혁명가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기 전 상상속의 그는 이미 뜨거운 사내, 강철같은 사내였다. 그래서였을까, 이 책은 유난히 오래 읽혔다. 왜냐하면 상상 속의 리드를 지우는 일과,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리드를 받아들이는 일이 수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뮤지컬처럼 부풀려진, 낭만적이며 이기적인,존 리드를 만나는 과정은 조금 난감했지만 그가 패터슨에서 '세계산업노동자동맹(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의 헤이우드와 교류하며 노동운동에 참여하는 모습을 마주하게 되는 대목은, 그에 대한 나의 상상을 충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물론 그곳에서도 그의 객관성을 잃은 시선, 뜨거움이라고 상찬하기에는 부적절한 그의 열정이 적잖이 불편했지만, 리드가 투쟁의 현장에서 빈곤의 추악함과 잔혹한 불평등을 목도하고 노동자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또 그것을 실천하는 모습은 그의 진정을 느끼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패터슨에서 자본주의의 '도구주의'와 맞서며 인간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은 향후 그의 반전운동으로도 자연스레 연결되는 것 같았다. 물론 나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는 말을 쓰면서도 자꾸 마음이 쓰인다. 그럼에도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변명도 구차하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리드는 유럽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 전쟁에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본가들뿐이다. 이것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다.” 라며 궁색한 일상이 되어버린 전쟁을 노골적으로 규탄한다. 또한 소모적이고 가혹한 전장에 참전하려는 의뭉한 미국의 움직임에도 거세게 항의한다. 그는 자본가들과 정치가들의 야심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차린 사람이었다. 전쟁은 무고한 젊은이들을 선동하고 죽음으로 내모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애국자(?)들의 깜짝 파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이는 지금의 국제정세와도 무관하지 않다.

리드의 행보를 따라가다 마지막에 만난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은 내게 몇 가지 의문을 남겨준 채 끝나버렸다. 그것은 리드의 삶이 너무 일찍 막을 내린 탓일 것이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다. 그래서 그가 좀 더 살아있었다면, 혁명의 추이를 지켜보고, 거기에 개입된 인간들의 어쩔 수 없이 던접스러운 인간성을 확인했다면, 레닌과 카오츠키 다음에 등장할 스탈린에 대해, 그리고 러시아 혁명에 대해 좀 더 객관적이고 독특한 해석을 내놓지 않았을까 싶다. 왜냐하면 리드가 뜨겁게 환호했던 러시아 혁명 그리고 그의 벗 레닌은 인터내셔널의 슬로건 아래 '국가주의적 전체주의'를 실현한 마르크스의 사생아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판단으로는 말이다.

한 위대한 인간의 삶을 되짚는 일은 단순히 그를 거들떠보는 행위를 넘어선다.
그것은 특정한 개인에게 말을 건네는 것에서 시작하여 독자가 처한 현실을 더듬는 일로 치닫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 리드, 그를 읽는 것은 한 세기를 뛰어넘어 21세기를 부유하는 나를 돌아보는 일이며,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 ‘인간은 기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에 대답하는 소극적인, 그렇지만 고통스러운 행위였다. 그가 처했던 20세기와 달리 현재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혁명은 이미 퇴물이 되어버렸고 자본주의는 폭발해버렸다. 하여 착취, 전쟁, 절대빈곤으로 내몰린 사람들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나불거리는 일은 죄악에 가까운 일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이렇듯 욕지기가 치미는 현실에서 ‘인간은 기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라는 나의 물음은 공허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내가 그를 만나는 과정에서 느낀 다행스러움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실은 인간 자체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 개념적으로 그러할 것이다,라고 존재하는 인간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 그러니까 선하기도 악하기도 하다, 그러니까 타이밍만 허락하면 선할 수도 있다라는 신뢰의 회복이었다. 그의 삶에서 엿본 열려있는 사고체계와 신념, 그리고 신념의 중심에 인간을 세우는 행위는 이미 자본과 상품이 신이 되어버린 이 시절에 우리가 되찾아야 할 그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진실로 혁명적인 태도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열정적인 사내를 내려놓지만 내 안의 혁명, 풀리지 않은 숙제들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우 2009-12-10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금 그 설렘은 사라졌지만 한때 설레게 하였던 이름 블세비키 존리드.
지적욕구를 만족시키는 것과 로망의 감동은 반드시 배리하는 것만은 아니지만. 하하

'인간은 기대할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이가'라는 굿바이님의 자문.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겠어요? 하하 싱거운 대답올시다.

굿바이 2009-12-11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싱거운 대답 아니세요.^^
포스트모더니즘이 대두될 수 밖에 없었던, 20세기 이전의 사고체계 중 해체가 필요했던 것들이 분명히 있었죠. 계몽이라던가 이성에 대한 신뢰라던가 뭐 이런 것들이 정치논리로 활용되어 낳은 비극이 하나 둘이 아니니까요. 저도 근대를 극복하고 '인간은 기대할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 고민해 보겠습니다.
 
역사 미셀러니 사전 - 동서양을 넘나드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앤털 패러디 지음, 강미경 옮김 / 보누스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듣는 모든 말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견해일 뿐이며
우리가 보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아우렐리우스


정조(正祖)시대에 문체반정이라는 사건이 있었다.
이는 한문의 문체를 순정고문(醇正古文)으로 되돌린다는 의미로 소품, 소설, 고증학처럼 고문과 다른 이질적인 언표들을 ‘바른 곳으로 되돌린다’ 라는 취지가 담겨있다. 조선 역대 왕들 중 가장 지적인 왕이라고 지목될 정조가 이와 같은 정책을 표명한대는 당파간의 미묘한 정치게임의 논리도 숨어 있겠지만, 더 나아가 문체가 갖는 중요성 즉, 한 시대의 사유체계이자 지식인들을 옥죌 수 있는 도구라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중세적 사유체계를 벗어 날 수 있었던 소품과 소설들이 규제되고, 조선 후기 문학은 일정부분 퇴보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역사 미셀러니 사전]을 읽으며 불현듯 문체반정이 생각난 이유는 저자의 집필 동기에 있다. 저자는 머리말에 “나는 내가 동의하지 않거나,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거나, 또는 지루하다고 느끼는 내용은 모두 생략했다.” 라고 밝히며 “이 방법론들은 흥미와 관심유발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내용만 다룬다.”라고 적고 있다. 나는 '과연 역사서가 작가의 의지에 따라 마음대로 재단되어도 무방한가'라는 의문과 '21세기에 역사서는 새로운 형식의 문체들로 바뀌어야 하는가'라는 명제에 선뜻 답을 내리지 못하고 정조와 연암 박지원을 떠올리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무수히 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자연사, 문화사, 생활사, 과학사라는 소단원으로 묶어 작가가 의도한 것처럼 거의 모든 것들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거의’ 다. ‘거의’ 는 말 그대로 ‘어느 한도에 매우 가까운 정도’다. 따라서 이것은 어느 한도에 매우 가깝기는 하나 그 한도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한도의 어디까지가 매우 가까운 정도인지도 모호하다. 하여, 우리의 영리한 작가는 ‘nearly’라는 단어를 통해 이 책 한 권에 쏟아질 수 있는 비난을 교묘히 비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과연 그럴까. 큰 어려움 없이 책을 읽어 나가던 도중 책의 머리말에서 느꼈던 당혹감을 다시 확인해야 하는 부분이 나타났다. 다름아닌 책 105쪽의 인쇄술에 대한 설명이다. 작가인 엔털 패러디가 쓴 글을 보자. “700년경 목판 인쇄술이 일본에서 개발되었다. 이 기술은 한국에서 개발된 활판 인쇄술과 같은 형식이었다. 1450년대 에는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활판 인쇄술을 개발했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위의 문장을 읽어 보면 목판 인쇄술은 일본, 활판 인쇄술은 독일이 최초인 것처럼 읽히기 쉽다. 내 눈에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읽힌다. 그럼 사실은 어떻게 다른가!

첫째, 이것은 1337년에 간행되어 실물이 전하는 금속 활자본 “직지” 를 언급하지 않아 여전히 금속 활자는 서양에서 먼저 발명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둘째, 일본의 “백만탑 다라니경”보다 20년을 앞서는 우리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을 언급하지 않아 목판 인쇄술 역시 일본에서 먼저 시작된 것처럼 읽힌다.
물론, 혹자는 내 의견이 신경증이며 열등감이라고 말하거나 빗나간 애국심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난히 책에 대한 관심이 많고 글을 쓰고 싶은 사람으로서 자국의 인쇄술에 대한 역사적 자부심에 흠집이 나는 것 같은 기분은 피할 길이 없었다.

여기서 나는 작가가 머리말에서 밝힌 의도를 다시 되짚을 수 밖에 없다.
“나는 내가 동의하지 않거나,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거나, 또는 지루하다고 느끼는 내용은 모두 생략했다.” 라는 부분이다. 내가 보기에 인쇄술과 관련한 우리의 유물은 그가 동의 할 수 없거나, 마음에 들지 않거나, 지루하기 때문에 생략한 것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책에는 이 밖에도 빠져나간 것들이 많아 원래의 모습을 제대로 상상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 책의 기술방식에 박수칠 수 없으며, 작가의 말처럼 앞으로의 역사서는 미셀러니와 패러디의 형태로 발전할 것이라는 말에도 동의할 수 없다. 이 책에 대해서 만큼은 나는 정조의 문체반정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작가가 취한 태도는 연암 박지원의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한 부분을 문제 삼아 전체를 다 잘못이라고 말 하는 것 역시 일반화의 오류다. 하여 이 책 일부의 미흡한 점을 들어 전체를 깍아내릴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작가는 자신의 책에 일정부분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기는 책은 더욱 그렇다. 여타의 유용한 정보들이 있음에도 내가 이 책을 경계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아우렐리우스의 이 말로 이 책의 서평을 갈음할까 한다.

“우리가 듣는 모든 말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견해일 뿐이며, 우리가 보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우 2009-12-08 0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도저히 따라갈수 없는 책읽는 부족민들의 지적욕구와 독서편력.

아우렐리우스가 하였다는 이 말은 매우 가슴을 칩니다.
"우리가 듣는 모든 말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견해일 뿐이며, 우리가 보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작금의 사회 곳곳.
중구난방 범람하는 소리소리들은 사상(Thought)의 폼을 잡고 있더라도 죄 의견(Opinion)일 뿐이지요.
하나의 의견에 존재를 걸어야 하는 비극.
현대라는 것. 시스템이라는 것..흐음


굿바이 2009-12-08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매우 난처한 상황에 놓일 때가 많습니다.
그게 뭐냐면, 진리란 존재하는가? 뭐 그런거죠. 모든 비극의 시작이 '진리'라는 것이 존재한다,라고 가정을 세우고 막 달려드는 자세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니까, 뭔가 있긴 있냐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우렐리우스의 말도 일정 부분 한계를, 물론 제가 딛고 넘어야 할 한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달마처럼 동쪽으로 쭉 가보던가 해야지, 요즘은 마음이 참 산만합니다.

언제,기회가 있으시면 지혜를 좀 나눠주세요^^
 
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경숙 작가는 소설의 첫 문장을 쓰는 일, 그리고 소설을 어떤 형식으로 풀어나갈지를 고민하는 일이 작가의 집필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자 힘든 작업이었노라고 어느 문학 잡지에 밝혔다. 그래서인지 신경숙 작가 소설 첫 문장의 대부분은 그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힘이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첫 문장도, 짐작하건데 신경숙 작가처럼, 혹은 그보다 더 안쓰럽게 써내려간 문장이 아닐까 싶었다. [긴터널]이라는 단어가, [밤의 밑바닥]이라는 단어가, [하얘졌다]는 단어가 그리고 이 단어들을 연결한 문장이 오랜 수행의 결과물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작가의 글을 미문이라 말하는 독자들의 평가가 도를 지나친 호들갑은 아니었구나 싶었다. 그러면서 나는 또 간간이 김훈 작가를, 그의 책 [현의 노래]를 떠올렸다. 물론 김훈 작가가 제 육신에 연결된 연필로 제 몸을 갈 듯 써내려간 독하게 간결하여 아름다운 문장과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써내려간 심하게 절제되어 아름다운 문장은, 미문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판이하게 다른 미감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리고 굳이 어느 한 편을 편들라고 한다면 김훈 작가의 문장에 손을 들 것이다. 나는 그렇게, 인정하기 싫지만 서사적인 사람이다. 

눈의 고장을 찾은 한 사내, 시마무라가 느끼는 각기 다른 두 여인을 향한 연민은,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결이 고운 눈과 달리 매우 성긴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나는 이제 사랑을 두고, 누가 누구를 더 연모하는지 따지는 일이 맥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썩 유쾌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짖던 풍월이 있으니 "가도 아주 가지는 안노라시던 그런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앉아서 하염없이 그 무엇을 생각합니다" 라는 시 속 화자의 넋두리가 곱게만 들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너무나 인간적인, 전적으로 내 기준에서 인간적인, 주인공을 욕하자니 입이 아프고, 그저 주인공의 띄엄띄엄한 감정을 모르지 않을 터인데, 신발까지 숨겨 가며 밤낮으로 시마무라의 방을 드나드는 고마코의 연정을 나무라자니 이 뭐랄까, 고마코의 철없는 행실이 욕망의 대상을 향한 것인지, 욕망 자체를 향한 것인지 판단할 수 없으니, 딱히 그녀를 희생양으로 이름 붙이는 일도 어쭙잖다. 그러니 그저, 욕망 자체를 즐겨라 그러면 그나마 다행이지 않겠는가 싶었다. 이쯤되면 작가인들 혹은 난들 어쩌겠는가. 사랑하는 감정 그 자체를 사랑하겠어요, 라고 볼 붉히는 어린 처자를 두고.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눈 쌓인 그래서 밤도 하얘지는 풍경보다, 요코가 역장을 향해 내지르던 목소리가 더 밟혔다. 뭔가 멀리서 부르는 소리, 그것이 심리적인 거리이든 실제적인 거리이든 상관없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대상을 향해 발화하는 소리가 계속 나를 붙들었다. 상대가 제대로 알아들었을지, 또한 그 상대가 무엇을 알아들을 수 있는 준비가 된 존재인지, 더 나아가 그것이 대상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주체를 향한 것인지 자꾸 궁금해졌다. 그러면서 요코가 역장을 향해 동생을 부탁한다는 사뭇 괴이한 외침에 어느 영화에서 봤던 여주인공의 "오겡끼데스까"라는 대사가 묘하게 중첩되었다. 어쩌면 시마무라도, 고마코도, 요코도 그저 서로 멀리 서서 서로를, 서로라고 오해하는 무엇을 불렀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침묵은 아니지만 침묵과 별 다를 것 없는 소리들을 길게 혹은 짧게, 무엇이든 파묻을 수 있는 눈의 고장에서, 내지른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정녕 사랑은 사람의 일인지라 알 수 없는 것이고, 또 쓸쓸한 일이라는 것을 작가는 힘을 뺀 척, 모르는 척, 그저 비경을 그리는 척 들려주고 있었구나 싶으니 그의 명성이 거져 얻어 진 것은 아니었구나 싶다. 

마지막으로 같이 책을 읽으시는 분들이 눈 내리는 고장의 풍경을 어여삐 여기시는 것 같아, 사족이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천승세 작가의 [혜자의 눈꽃]이라는 작품에 묘사된 눈 내리는 밤을 여기에 옮겨 적는다. 앞서 밝혔지만 나는 서사적인, 그래서 적잖이 촌스러운 미감을 갖고 있는 터라 이 대목이 그리 좋았다. " 어느 날 밤이었다. 솔가지가 보채이도록 바람결이 드셌다. 설화의 무더기가 땅으로 내리는지 간간이 퍽 퍼억대며 봉창이 울렸다. 먼 산 속의 수목들이 쌓이는 눈을 못 이겨 가지를 찢는 모양이었다. 생지 부러지는 소리도 어쩌다가 바람결에 섞여 왔다." 


댓글(10) 먼댓글(2)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설국-글로 그린 그림
    from 바느질하는 오후 2009-11-29 21:01 
    ▣책읽는 부족 독후감 * 샛별님의 독후감 http://blog.daum.net/gniang/16150206 *웬디님의 독후감 http://blog.aladdin.co.kr/wendy99/3221771 *동우님의 독후감 1- http://blog.daum.net/hun0207/13291011 2-...
  2. 설국 - 여행지 로맨스
    from moratorium life 2009-11-30 07:08 
    설국(세계문학전집 61) 저자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 유숙자 옮김 출판사 민음사 펴냄 | 2009.01.20 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요코미쓰 리이치 등과 감각적이고 주관적으로 재창조된 새로운 현실 묘사를 시...
 
 
동우 2009-11-26 0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설국의 미문에서 김훈을 떠올리는 굿바이님의 문학적 내공은 글을 써 본 사람만의 옛롭지 않은것. 말씀듣고 생각컨대 김훈의 문체에도 깃든 허무의 느낌. 그 미감은 다를지언정. 아름다운 문장을 이토록 생각하는 사람이 스스로 서사적이라니. 하하. 그러나 굿바이님 시마무라와 구마코와 요오코는 서사적으로 접근하여서는 아니될.. 이 소설의 매력.흐음. 천승세도 저와 같은 문장을 썼군요, 그 분 소설 읽은지가 하도 오래 되어서.. 옛날 작가들 원고지의 한칸 한칸 메워 나갈때 한올한올 문장에 기울이는 정성은 디지털 휘발성의 요즘 글쓰기와는 달랐겠지요. 천승세는 아마 박화성의 아들이었지요?

굿바이 2009-11-27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화성 작가의 기념관이 목포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이것 저것 보고 다녔는데도 어째서 저는 천승세가 박화성 작가의 아들이라는 것을 몰랐을까요? 아마 박화성 작가가 일본에서 처음으로 영문학을 공부한 여성이었다는 것과 이광수 작가가 등단을 권유했다는 것 그리고 박화성 작가의 작품만 들여다 보느라 왠지 대어를 놓친 듯한 기분입니다. 선생님 때문에 중요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렇죠, 아름다운 문장에 매몰되는 주제에, 스스로 서사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는 뻔뻔함을 선생님께 들켰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꿈꾸는 것들은 비유적으로 거의 만주벌판을 말 달리셨다고 말씀하시는 우리 아버님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삶이 참....힘듭니다^^

후니마미 2009-11-29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천승세 작가의 문장은 김훈의 그것처럼 연필로 꾹꾹 눌러가며 느낌을 제대로 표현하려 애쓴 게 분명합니다. 여러 번 읽어 봅니다.

설국의 묘미는 아마 누군들 그렇겠지만 첫 문장에 있는 것 같습니다
눈의 나라로 밤의 밑바닥까지 하애지는 그 나라로 가서
세상의 일을 잊고 싶은 것, 세상에 지친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꿈꾸는 일이 아닐까요?
그래서 독자인 저도 그 눈의 나라로 들어가자마자
일체의 논리를 버리고 싶었습니다
이 남자 왜 이래? 따위?
이 글을 쓰던 때의 일본, 그 시기의 일본 남성이라면 제국주의의 이상에
정신이 없던 그때. 동아시아 어쩌구 저쩌구 하는 이데올로기에서
이렇게도 잘 벗어나서 전혀 그런 시간 조차도 그런 공간이었다는 것도
모를 이런 글쓰기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싶은... 그런 삐딱선이 모조리 사라져버린 것.
눈 때문이었습니다
ㅎㅎ

서사 없는 문학이 가끔은 무척이나 화가 나다가도
또 간사한 독자인 저는 이런 문학, 역사와 사회를 전혀 모르쇠하고
사랑이나 허무 에 관해 쓴 글이 마구 마구 그리워집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아름다운 문장에 폭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마치, 시마무라에게 빠진 고마코처럼,눈 나라의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문장이 마음에 들면 앞 뒤를 안 재고 빠져드는 간사한 독자입니다 저는. ㅎㅎ


저는 설국에서 풍경만을 봤는데
굿바이님은 요코가 역장님을 부르는 소리에서부터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허무한 울림을 읽어 내셨군요 탁월한 읽기...

김훈의 문장, 천승세의 문장도 문장이지만
굿바이님의 문장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전에 언젠가 살짝 엿본 굿바이님의 글에서
문학에 대한 열망 또는 문학에 대한 기대가
여전하다는 느낌을 가졌더랬는데
그래서 한국에 사는 한 여자로서 우리 모두 공지영은 될 수 없지만
독후감 모임에 끌려 우리끼리 노는 장을 마련한 게 아닐까요?
둘러 보니 아줌다 되어서 이렇게 노는 여자도 몇 없더군요 ㅎㅎ
30대에 비해서 지나치게 저자신에게 관대해진 저는
책읽는 부족원이라도 되어 살아가는 것을 흐믓해 하고 있답니다

굿바이 2009-11-30 11:24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것들에 쏠리는 마음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학에 대한 열망은 턱도 없는 제 욕심을 자양분으로 더 잘 자랐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그것도 다 지난 일이지만 말입니다. 지금은 좋은 글, 좋은 작가를 읽는 재미가 더 쏠쏠하고 그저 주위에 능력있는 친구들을 보면 막 응원해 주고 싶고 합니다.

웽스북스 2009-11-29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요코의 목소리에 대한 묘사가 유난했죠. 도대체 어떤 목소리일까, 궁금해하면서, 상상하면서 그렇게 읽었던 것 같아요.
2. 전 만으로 20대라 그런지 아직도 개여울을 즐겨 부릅니다. ㅎㅎ
3. 저 금각사 안갔다왔어요~

굿바이 2009-11-30 11:29   좋아요 0 | URL
1. 그렇지? 너무 궁금했어, 그 느낌이, 떨림이, 그런데 너무 궁금하니까 심지어 [은하철도 999]의 메텔양 목소리까지 겹치면서, 이건 무슨 음모가 분명하다고 혼자 키득키득 거렸어.

2. 서른 중반을 넘은 나 역시 개여울을 매우 즐겨 부르기는 하지. 그렇지만 이게 좀 달라지기는 했어. 힘 조절이 좀 된다고 할까?ㅋㅋㅋ

3. 너무 잘했다고 막 신나하고 있어. 금각사는 같이 보자.

후니마미 2009-12-10 15:1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굿바이님, 서른 중반
눈치챘고요. ㅋㅋㅋ

저는 마흔 중반 올해로 끝나고
한달 후면 40대 후반이 됩니다. ㅠㅠ

도치 2009-11-30 0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상하게 시마무라에게만 관심이 묶여있어서 풍경의 묘사나 여인들의 속내도
읽어내지 못하고 말았네요. 몇몇 장면에서 언젠가 본 인상 깊었던 일본애니메이션의
여러장면들이 겹치기도 했습니다만 역시 여행자 시마무라에게서 시선을 돌릴 수 없
었습니다. 여러 부족원들의 독후감을 통해서 새로 읽는 기쁨은 참 뿌듯합니다.

굿바이 2009-11-30 11:47   좋아요 0 | URL
시마무라를 여행자 시마무라,라고 말씀하시는 대목에서 도치님의 생각이 얼뜻 엿보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여인들의 속내가 보이질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그걸 알아서 뭣 하겠습니까? 그런걸 아느니 김장 배추를 소금에 절이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

도치 2009-11-30 13:4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방랑자보다는 여행자가 제가 생각했던 느낌에 부합하는 표현같았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읽으면 또 새롭게 다가오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