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을 못하는 것도 병이라면 병이다. 그래서 얻은 것도 있고 잃은 것도 있으니 대충 넘어가자 싶기도 하지만 손익계산서로 따지자면 손해가 막급하다. 심중에 담아 둔 억울함까지 곁들이면 어디 소송이라도 해야지 싶다. 그래도 나홀로 소송에 이길 자신도 없고, 알아 줄 사람도 없으니 또 그렇게 진하게 한 번 눈흘기고 말 것을 괜시리 혼자 투덜거린다. 

어찌어찌 결혼을 앞둔 친구 때문에 또 저찌저찌 그간 연락이 소원했던 사람들과 만나야 하는 매우 피곤한 상황에서 축의금 선이자라 생각하고 밥값이나 던져주고 자리를 떳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뭔 예우랍시고 두 시간이나 그 자리를 지켰는지 모를 일이다. 이럴 때 보면 가끔 나는 미친 것 같다. 이하 생략하고.. 기운 빠진 선배들의 넋두리를 들으며 이제야 저 마음이 올곧이 이해가 되는구나 싶어 입 다물고 그냥 밥이나 먹어주고 있었는데, 시종일관 이명박보다 더 막나가는 후배가 까불어 주신다. 보이는 것이 없나? 아니면 나도 저랬나? 불편하다 못해 울화가 치밀어 뭐라 한 마디 쏘아줄까 싶어 몸가짐을 단정히 하는데, 이심전심인지 친한 K선배는 나랑 눈만 맞으면 웃어주신다. 뭐래? 나도 저랬다는 거래? 아니면 냅두라는 거래? 아니면 죽이라는 거래? 찬찬히 보니 냅두라는 싸인이다.

그래, 네가 얼마나 잘나가는지 들어나 주자는 마음으로 나는 집중의 집중, 완전 수험생 모드로 후배의 토크쇼를 경청하였다. 다 듣고 나니, 아~ 이럴 때 나의 명민하고 사랑스런 조카, 귀연이를 데려왔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우리 귀연이가 한 방 날려줬을텐데. 귀연이의 천역덕스러운 너스레를 상상하니 미친년 밥 많이 먹고  배부를 때 처럼 웃음이 나왔다. 캬캬캬캬캬~ 그래, 알겠다. 이야기를 다 듣고 즐거운 상상까지 마친 나는 이제 어쩌나 싶어 K선배를 쳐다보았더니 입만 뻥긋거린다. "차나 마시러 가자"  

근처 찻집으로 자리를 옮긴 나는 K선배에게 물었다."왜 말리신대요?" 선배가 말한다. "안말렸으면 네가 훈계라도 하게? 내가 봐서는 너는 상대가 안되겠더라."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다. 나는 상대가 안된다. 우선 나는 그 후배처럼 잘나지 못했으니 내가 뭐라하면 다 열등감이고, 또 후배가 보기에 어느 날 부터 나는 삽질이나 하고 다니는 사람처럼 보일 터이니 장외인간으로 몰릴 것이다. 변방에서 북이나 치는 내가 아무리 핏대를 올린 들 한물간 선배의 신파극이라 치부할 것이고, 그러면 돌아올 것은 냉소뿐일 터. 잘했다. 나는 후배 일은 다 잊어버리기로 하고 K선배에게 다시 물었다. "사는 건 좀 어때요?" K선배는 대답 대신 웃었다. 이런! 웃지 말지..... 선배가 웃으니까 내가 할 말이 없잖수. 나도 겁나는 게 뭔지 이제 알아가고 있는데 선배가 웃으니까 진짜 사는 일이 겁나잖수. 뭐래? 이렇게 하는 거 공정하지 않잖수. 예전처럼 큰소리라도 좀 치지. 

음.. 여튼 이번 만큼은 선배의 눈빛을 거절하지 않고 후배에게 싫은 소리 안하기를 참 잘했다 싶다. 그래, 하던 대로 하고 살던 대로 살자. 이것도 나고 저것도 난데 새삼 뭘 고쳐서 얼마나 배부르게 살겠다고. 뭐래? 다 선배 때문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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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9-09-28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글 올라와서 반가운 마음에 몇 자 적습니다. :)
그런데, 쌍메질이란 무슨 뜻인지 글을 다 읽고도 몰라서 여쭙고 싶어요.

굿바이 2009-09-29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치니님.
아...쌍메질이란, [두 사람이 차례대로 번갈아 치는 메질]입니다. 연장을 만들거나 떡 반죽을 만들 때 보면 두 명이 번갈아 메질을 하잖아요, 그런 것을 쌍메질이라고 합니다.
좀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후배에게 한 대, 선배에게 한 대 맞은 격이라서 그냥 쌍메질이라고 했습니다.^^

후니마미 2009-10-05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래도 선배님이 의젓하시고 속이 깊으신 모양이에요
아아 부글부글 거리는 증상
이제 저는 그런 걸 소화불량이라 칭하고
조용히 돌아와 소화제나 먹기로 작정했습니다
소화 안 되는 상황에서 쏘아 붙일 말을 아무리 생각해도
상대도 안 될 제 말과 제 상황과 이런 거 저런 거
그러다 보니, 입 다물고 있기가 제 몸습관인 것 같은데
실은, 돌아와 쭁알쭁알 옆지기에게만 쏟아 부을 때
제 트림이 참 좋지 않구나 싶어집니다
조카 귀연이와 같은 핵심어 발견하기가 잘 안 되는
저 자신을 탓해봐야 이제 어쩌지도 못하구요

고생 하셨네요.
그 후배가 많이 많이 앞으로 나갔어요?
ㅎㅎ

굿바이 2009-10-06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니마미님, 말도 마세요. 그 후배 정신줄을 놓은 것 같았답니다^^

아~ 토끼에게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소화제 먹기로는 제가 전국 1%안에 들어갈 겁니다.
주중 3회 이상 체하거든요. 약국에서 시판되는 소화제를 비롯해 절판된 소화제. 해외에서
입소문난 효소제품, 사혈침 등 이쪽으로는 뭐 꽉 잡고 있습니다.ㅋㅋㅋ
(자랑도 아닌데 혼자 신났어요)


 
객수산록
김원우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6월
평점 :
품절


「그 단정한 문체, 그 무류(無謬)의 사실증언벽, 그 해박한 박람강기의 적절한 현시성, 더불어 그 항목별 관지(關知)의 연쇄를 마냥 즐길 수 있음은 앎의 광대무변에 스스로를 유폐시켜 몰아의 경지를 누림에 다름아니었다.」-객수산록 p.281  

그래서였을까, 작가의 다섯 편의 중편은 모두 시대정신(한국의 근대화와 물질만능주의를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다면)이라는 씨줄과 현실세계의 반푼이들을 날줄 삼아 아주 촘촘히 짜낸 결이 고운 한 편의 직물같았다. 또한 그 직물 위에 그려넣은 무늬들이 참담할 정도로 세밀하고 사실적이라서, 직공의 손재주에 탄복하다가 이내 목덜미 어디쯤이 서늘해지고 목구멍이 칼칼해졌다. 무엇엔가 떠밀려 살아온 자들의 헛헛한 심정과 핑계있는 억지는 말로해서 알아지는 일도 아니고 말로 한다고 변할 일도 아니지만, 급기야 점입가경의 기괴함으로 구질구질해진 시절과 타협할 의지가 없는 작가는 뭐라도 하지 않고서는 유유자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쓸 수 밖에.

다섯 편의 중편에는 비슷비슷한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대학교수, 작가, 바람난 아내 혹은 남편들...어찌보면 등장인물들의 폭이 좁다 싶지만 사람 마음 쓰는 일이 다 거기서 거기임을, 프렉탈 현상이 브로컬리에만 존재하는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도 수긍이 간다. 물론 등장인물을 채색하는 그의 미감이, 뭐랄까 권위적인 구석이 있으면서도 짐짓 모르쇠를 잡는 듯해 마뜩짢은 것도 사실이다. 사실 글쓴이의 미감이 작품으로의 몰입을 종종 방해했지만, 그저 불편하다고 할 수 밖에 전체적인 완결성을 보면 책잡을 일은 아닌 듯 싶다. 문장의 강단으로 보나 담백한 감성으로 보나 더러 눈에 띄는 괴팍함으로보나, 이맛도 저맛도 아닌 실험적인 음식 앞에서 난감했던 기억이 있던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읽는 이를 조금 괴롭히는 권위적인 미감이야 눈 감아 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뿔사! 이렇게 쓰고 보니 어찌 김원우와 김훈은 닮았다.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데 현실이라는 외피를 도외시한 주체는 거의 퇴행성 정신장애일 뿐이며, 그렇다고 해서 편의주의적 현실 추수주의자는 주체성의 일정한 미달이라는 결격 사유만으로도 일찌감치 스스로 옷을 벗는 게 타당하다」-모기발순 p.412 

돌아보면 지천에 널린 군상이다. 어느 쪽이거나 때로는 두 쪽 모두 다 이거나. 물론 그렇게라도 해야 살 수 있지 않냐고 따지고도 싶지만 실상 그렇지도 않다. 매우 다양한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 쳐도 세상에 '모 아니면 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쉽지는 않겠으나 덜어 낼 것들을 좀 덜어내고 정신을 차리면 어려울 일도 아니다. 작가도 아마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거다. 풍토가 그렇다고 스스로를 위무하고 무신경해지다 보면 자발적으로 무능해짐과 동시에 통렬하게 후회할 일만 남게 된다는 것을. 

「무력감, 귀찮음, 상실감, 허전함, 박탈감, 게으름, 낭패감, 맥빠짐, 실족감, 엉거주춤, 구속감, 옥죄임, 의무감, 안달복달, 언어가 부족한게 아니라 심기가 언제라도 만화경처럼 희번덕거린다 」-무병신음기 p.124

어찌 알았는지 요즘의 내 심중을 가을햇살 아래 무말랭이 말리듯 쫙 펼쳐 놓았다. 수분이 빠지고 꼬들꼬들해지니 볼품은 없지만 윤곽은 확실해진다. 글쓴이의 냉소와 통찰력이 여간 거슬린다. 몹쓸! 그렇지만 어찌 모르겠는가, 그것이 글쓴이의 점잖은 비명임을. 

어느 덧 신체적 무병에도 신음소리가 절로 나는, 가을이다. 김원우의 소설은 가을에 읽어야 제맛이라고 다소 맹문이같은 사족을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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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시대]라는 여성그룹이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들이 누구며 무신 노래를 불렀는지 알게 된 것은 최근이다. 아이돌 그룹에 관심도 없고 각 기획사에서 융단폭격처럼 쏟아내는 아이돌 그룹이 양적으로 많다보니 자연히 모를 수 밖에. 물론 공급과잉으로 볼거리가 많아졌다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그들의 음원들을 들어보면 과연?

여튼 아이돌 그룹에 관한 내 잡음은 여기서 줄이고 [소녀시대]가 부른 [소원을 말해봐]와 [허경영]의 [콜미]를 들으며 나는 계속 고인이 된 두 전직 대통령과 2009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교차해 씁쓸하고 한편 절망적이었다. 물론 어디에 저런 신인류(인간과 요정사이의 인류)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예쁜 처자들의 상큼 발랄한 노래와 어디서 저런 특인류(인간과 조커사이의 인류)가 생존했었던가 싶은 어르신의 황당하고 감동적인 노래를 두고 무슨 뼈다귀 뜯다 치아 벌어지는 소리냐 싶겠지만 그건 내맘이다. 더 이상 부를 이름도 더는 간절할 무엇도 없어지고 나니 45kg도 나가지 않을 소녀들이 소원을 말하면 들어준다 하고, 외계에서 오신 어르신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라 하는 시절이 된 것이다. 이를 두고 어찌 절망적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너무 서사적인가 혹은 억지스러운가, 어림도 없다. 이 정도의 억지는 억지도 아니고 이 정도의 서사성으로는 옆 집 개도 안짖는다. 또한 조선생이 들으면 진노할 일이다. 물론 그러던가 말던가이지만.

어찌 되었건, 절망적이지만, 신인류는 내게 소원을 말하라 하고, 특인류는 내게 그의 이름을 부르라 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그 어떤 종교적 비유도 해석도 하지 않겠다. 왜냐, 못한다. 왜냐, 아는게 없다. 쑥스럽지만 그것이 현실이니 나는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낯짝 두껍게 밝힌다. 또한, 암울했던 시절 백범 김구선생님도 세 가지 소원을 말씀하셨다. 이 땅의 큰 어른이셨던 선생님이 세 가지 소원을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서 나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내 소원을 세가지로 압축했다. 의심하지 않는 자 크게 망할것이다, 라는 격언도 있더라마는 의심하는 자 구원받지 못하리라는 말씀도 있으니 상황에 따라 그때 그때 선택하면 될 일이다. 어째 그렇게 일관성이 없냐고 꾸짖으신다면 그건 뭘 한참 모르시고 하는 말씀이다. 나는 매우 일관적이다. 바람보다 빨랑 드러눕고 바람 지나가도 한참 드러누워있다가 오호 역풍이 크다 싶으면 언능 일어난다. 이 보다 더 일관적일 수 있겠는가. 하여 이번에 나는 의심없음을 선택하고 세 가지 소원을 정했노라. 왜냐, 그것만이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길이요, 빛이요, 아편임을 내 오감이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소녀들 앞에서 소원을 말하리라.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부르리라.                       

언니, 제 소원은 ..................이예요, 허.경.영! 

언니, 제 소원은 ..................이예요, 허.경.영! 

언니, 제 소원은 ..................이예요, 허.경.영! 

어라! 소원이 보이지 않는다고, 이게 무슨 장난질이냐며 양은 밥상 걷어차듯 마우스 뒤집는 분도 계시겠지만 어찌 안보인다고 하는가 그리고 남의 소원은 봐서 또 뭣에 쓰겠는가. 그래도 사기다 싶으면 고소하면 되고, 그래도 분이 안풀리면 병원 가면 되고. 그저 생각대로 하면 된다. 여튼 이미 북망산으로 떠나신 두 전직 대통령의 뜻을 받들겠다고 분연히 일어나실 분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이 분들이야 말로 진짜로 대국민 소원 발표를 해야 할 사람들이다. 누구의 이름으로 뭉치고 누구의 이름을 부르며 대중에게 호소할지 모르겠으나, 그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그리고 리메이크에 리메이크로 괴이해진 음원을 틀기 전에, 진정 본인들의 소원을 말해야 할 것이다.  

니들 소원을 말해봐! 참모가 써 준 거 말고 진짜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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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니마미 2009-08-29 0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기 허경영은 대통령 나왔던 그 사람이에요?
소녀시대는 들어봤고, 하지만 눈에도 귀에도 걸리지 않는 존재라
내 이미 늙었구나 한탄스럽게 만들었던 팀이었구 기억에 남는 얼굴은 더욱 없으니..

콜미, 소원을 말해봐 이게 모두 노래에요?
제가 너무 낡았나요? ㅎㅎ

굿바이 2009-08-31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낡았다뇨?^^

저도 요즘 나오는 아이돌 그룹 하나도 모릅니다. 오다가다 들리는 음악은 들었을지언정
누가 누군지 알 수 가 있어야죠.
일단 허경영은 그분이 맞습니다. 그 분이 음반을 내신거 같은데 "콜미"가 노래 제목이랍니다.포털싸이트 들어가서 제목을 입력하시면 쉽게 들을 수 있을 거예요. 듣다가 졸도하십니다^^
그리고 소녀시대라는 그룹의 "소원을 말해봐"라는 곡이 있는데 한 번 들어보세요. 팀원이 하도 많아 그들을 구분하는 일은 힘들지만 여튼 노래는 쉽습니다.
 
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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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110페이지 4번째 줄. [당신은 그렇소?]라는 물음에, 그 물음이 무엇이었는지와 무관하게, 나는 [그렇소]라고 답했다. 그렇다고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라고 말하는 주인공을 흉내낸 것은 아니다. 어느덧 나는 불편해진 모든 것들에 대해 단답형으로 그것도 부정적인 뉘앙스를 한껏 풍기며 대꾸해 주시는 시니컬한 귀차니즘 환자가 된 셈이다. 그러니 누가 뭘 물어본들 적어도 대답 만큼은 주인공 스트릭랜드 만큼 아무렇지도 않게 툭~뱉어놓을 지경에 이른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좀 더 서사적으로 표현하자면 살기 위해 나의 달을 수장시킨 셈이다. 

그러니 달을 잃은 나는, 작가가 보여주려 한 고갱의 삶 혹은 유사 고갱의 모습에 이제는 도통 집중할 수가 없었다. 분명 20년 전쯤에는 그 뜨거움에 덩달아 뜨거워졌고 흡사 스트로브와 같은 자세로 스트릭랜드의 삶에 자발적 헌신 내지는 뜨거운 찬사를 보냈고 더 나아가 특정한 행위들을 비난하기 보다 무엇이 그를 말 달리게 하는지 그 내면을 들여다 보고자 했었는데 그 꺼지지 않는 무모한 열정과 인내 그리고 호기심은 다 어디로 가고 이제는 그저 나를 불편하게 하는 모든 것들에 [안녕~]을 고하니 참으로 세월이 약인지 독인지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의 주인공이 천재 화가였는지 아니면 그저 난해하거나 괴이한 화가였는지와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위해 철저하게 이기적일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고맙다. 물론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그 모든 예술적 위업이 달성되었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누가 누구에게 빚지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스트릭랜드의 천진한 이기심을 탓하는 것은 [뭐 묻은 뭐가 뭐 묻은 뭐에게]흘리는 눈흘김이 아니겠는가. 

나의 달은 어느 강 속에 잠겼지만 그 빛을 다 잃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순도 높은 예술적 욕망에 사로잡힌 그들 앞에서 여전히 조금은 서성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단언컨데 그들을 사랑할 수는 없다. 첫째는 귀찮고 둘째는 다시 강 속에 빠진 달을 잡으려 허둥대다 어느 오라비처럼 유명을 달리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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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니마미 2009-07-30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굿바이님 드디어 마감날 하루 앞두고 원고 접수 해주셨습니다
짝짝짝...
바쁜 일 겹칠 때 이런 거 겹치면 애초 가졌던 기대와 즐거움도 사라지게 마련이거늘
그래도 올려주셨네요. 책읽는 부족들, 글이면 글, 매너면 매너 부족함을 찾을 수가 없어요

대개의 공통된 의견이 스트릭랜드의 달이 예전과 달리 느껴진다는 거였는데..
저는 어느 분 독후감의 댓글에도 썼지만
오히려 스트릭랜드처럼 살 수 없었고
그렇게 모든 걸 버릴 만큼 내부에서 올라오는 정열이 없는 자신을 들여다 보니까
이제야말로 스트릭랜드에게 눈흘기는 게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신을 돌아봐도 볼 거 없고
앞으로 기대할 것도 없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까
어, 어쩌면 나도 이렇게 살고 싶었던 때가 있었지
하는 생각이 철없던 때의 낭만으로 여겨지는 건 아닐까요?
살아보니 알겠거든요
이 몸의 달은 그리 높이 뜨지도 밝지도 않고
늘 구름낀 하늘 저 편에서 빛 한 번 제대로 못 내는 것 같아서요.

부족들 중 맨 처음의 독후감도 박수 받지만
마지막 독후감이기에 다시 한 번 박수 크게 쳐 드립니다.

박슴도치 2009-07-30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굿바이님 안녕하세요. 이제서야 안부를 남기네요.
실은 모임 참여하고 RSS 리더에 부족민들 블로그 저장하면서 두세번씩은 들렸는데
이제서야 안부를 남기니 궁색한 손끝이 부끄럽습니다.

세상의 맛을 조금 본 사람들에게는 스트릭랜드가 곱게 보이지 않는가봅니다.
저는 광기로 치부해버린 그 예술혼(?)이 십년 이십년이 흘른 뒤에는 어떻게 재평가 할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이제 여름다운 날씨가 찾아오니 변덕이 다시 발동하여 선선했던 어제가 그립습니다.
늦은 시간이지만 잠시 쉬며 더운 날씨에 지친 심신에게 휴식이라는 포상은 어떠신지요?

편안한 밤 보내세요.

굿바이 2009-07-31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니마미님

꼴찌하고 박수 받기는 초등학교 달리기 시합 이후로 처음입니다^^
그래도 좋다고 웃고 있습니다.

책을 덮고도 여전히 불편한 마음이 남는 것은 저 역시 저를 위해서만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솔직하지도 못하니 불편하고 또 불편합니다.

굿바이 2009-07-31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슴도치님

그렇죠. 곱게 보이지는 않죠. 그런데도 여전히 뭔가 부럽기는 하단 말입니다.
여전히 쓸데없고 근거없는 피해의식들이 제게 남아 있나 봅니다.

워낙 추운거 싫어 하는 사람인데도 오늘은 좀 덥다 싶습니다.
저녁에 맥주나 마셔볼까 합니다^^

민정 2009-07-31 23:0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언니 나두 맥주 한잔~

웽스북스 2009-08-01 10:20   좋아요 0 | URL
어제 그 행운은 제가 잡았지롱요 ㅋㅋ

민정 2009-07-31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에게는 있었는지 있었을는지도 모르는 미미한 달의 존재이므로 일단 모른척 해두고,
언니가 묻어버린, 아니면 강에 빠트린 그 달이 어쩐지 새삼스럽게 아쉬워져서 입맛만 쩝쩝.

그렇지만 또다시 생각하면 지상세계에 언니가 있어서 만나게 된 것이니
그또한 나에게는 좋은 일... ㅎㅎㅎ

나는 이래도 저래도 좋으니 그냥 맥주나 한 잔 얻어먹고 즐기렵니다~

심샛별 2009-08-01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올라오는 독후감을 읽을 때마다 책을 새로 꺼내서 읽고 싶어지는 건 왜일까요?
굿바이님의 달을 보고 갑니다.

굿바이 2009-08-02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정! 한국에 오면 맥주는 "짝"으로 사줄 수 있으니 걱정마시오^^
물론 그때까지 내가 강변에 살면 안주로 한강의 야경도 제공할 수 있소.
그러니 오시오^^
참으로 보고싶소~


굿바이 2009-08-02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샛별님!
이번 민음사 책 읽기가 저도 신납니다. 아마 다음 책도 예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재미들이 쏠쏠할 것 같고, 다른 분들의 리뷰도 흥미로우리라 짐작됩니다.


동우 2009-08-05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굿바이님의 저 진솔한 고백.
옛'나'의 달에 대한 달뜸의 헛됨에 고개를 주억거리시면서 또한 '달'에의 열정이 아쉬운..
하하, 굿바이님.
그러합니다. 이 시절 뉘라 달 잡으려 강에 뛰어 들겠어요.
그러나 굿바이님 강물에 비친 달그림자 선명하고 아름답습니다.

굿바이 2009-08-10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왠지 동우님은 강에 뛰어 들었던 분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나저나 오늘 서울 하늘 죽입니다!

후니마미 2009-09-27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9월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명절 리듬을 타야 하니
장에 가서 이것 저것 먹을 거리도 사야 하고
선물도 사야 하는 저희로서는 맘부터 서둘러지는 시간이 되었네요

그런데도 추장인고로, 9월 마감에 앞서 독후감 올리시라
피켓 들고 나타났습니다
굿바이님께서는 이번 9월에 어떠셨는지?
책 읽을 시간이 하나도 없어서 넙치는 읽다가 말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이번 달의 주제는 넙치를 잡아먹자 쪽이니까
그리고 그 잡아 먹는 방법이 뼈까지 오드득 잘 씹어서 먹자가 아니고
요걸 회를 쳐봐 구워봐 는 칼 든 자의 오만과
뭐 이렇게 생긴 것을 고기라고 이름을 달았냐 라는 등
독자로서의 자만심과 독자로서의 권력을 마음껏 부려보는 쪽에서
잡아 먹자 이니까
맛없어서 못 먹었다 이런 단 한 줄의 독후감도 촌철살인의 문장이 되는 바

** 알아서 하셔요***
 
그녀의 눈물 사용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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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교(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교주 박민규가 이르길 천운영의 소설은 [정말이지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이란다. 그리고 또 그 이유를 [당신이 운좋게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있다면 잘.알.겠.지 이런 내 마음]이라 한다. 그러니까 나 혼자 만이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를 알고 싶소,정도 되겠다. 그래, 그런 책이 나도 있긴 있었다. 그러니까 [잘.알.겠.다 네 마음]

"소설은 울분을 토해 내는 것이 아니야. 냉정해져. 질척대지 말고. 자기연민 같은 건 버려. 자기변명도."(162p) 그래서였을까. 천운영의 작품들은 질척이지 않았다. 그녀의 글에서 설핏 엿보이는 어설픔은 있었지만 욕망의 고갱이를 진지하게 탐색하면서도 쓸데없이 무엇인가 조작하려는 조바심이 없다는 점에서 그녀의 소설은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냉정함을 잃지 않으면서 순도높은 욕망의 풍경을 완성시킨 셈이다. 칭찬하면서도 질투가 나는 대목이다.

작가의 작품들을 따라가면서 나는 점점 그녀가 궁금해졌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그녀의 욕망과 상처들이 궁금했다. 질 나쁜 행동이라 뻔히 알면서도 나의 관음증은 그녀의 작품 속에 녹아난 그것들을 찾으려고 시종일관 분주했다. 그리고 사실임을 확인할 수 없지만 나는 어느 지점에선가 그것, 소름 돋게 내것과 닮아 있는 생채기와 마주할 수 있었다. 눈물로는 어림도, 그러나 무엇으로라도 울어야 하는, 나는 [그녀의 눈물사용법]을 알 것만 같았다.   

다른 단편들도 그렇지만 특히 [노래하는 꽃마차]라는 단편은 봄이 오면 제 몸을 미친듯이 긁어 피꽃을 피우는 한 여자의 과거와 현재를 노래처럼 들려주는데 여자의 과거를 따라가며 여자가 겪은 치욕을 되살리는 작가의 문장이 참 아프고 그래서 참 아름다웠다. 

욕망을 그리고 상처를 먹이를 하지 않는 글쟁이가 있을까 생각하니 없겠다,싶다. 다 아문 상처건 덜 아문 상처건 왜곡된 욕망이건 그걸 다시 들추고 쑤셔대야 하는 일이 글쟁이의 운명이라면 처량하고 딱한 밥벌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억압된 충동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이 그것을 배설하는 일이라면 글쟁이야 말로 되려 허구헌날 쾌변의 기쁨을 누리는 자들이 아닐까 싶다. 울고 웃고 장단 맞추고 노래하고. 

작가는 지면을 빌려 [나는 어쩔 수 없이 나다. 그런 '내가 소설을 쓴다']라고 적고 있다. [어쩔 수 없다]라는 말, 작가가 어떤 의미로 사용하였는지와 무관하게 나와 작가를 깊게 연결해 주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쓰는 작가의 글들이 욕망과 상처를 온전히 굴절한 풍경이기를 바란다. 처음으로 돌아가 박민규의 흉내를 내보자. [정말이지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당신이 운나쁘게 그녀와 같은 욕망과 상처를 숨기고 있다면 잘.알.겠.지 이런 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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