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그해. 숫자로 기억하지 않고 그저 그해라 기억하는 유일한 그해. 양희은 여사는 '내 나이 마흔살에는'을 불렀다. 절묘한 암시였을까. 그러나 그해 나는 넋 나간 대학생이었고, 마흔살이라는 나이가 상형문자처럼 읽히던 때였다. 뭐 그럴 수 있었다. 사랑에 빠져 있었으니까. 어찌되었건 기억하건데 노래는 '봄이 지나도 다시 봄, 여름 지나도 또 여름'으로 시작했다. 도대체 이렇게 맹물같은 노래라니. 봄이 지나도 다시 봄이라니, 여름 지나도 또 여름이라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있겠냐. 나는 우주의 봄을 살고 있는데 말이지. 곧 우주의 여름이 올 것이고 그 이후는 그냥 우주일 뿐이데. 우주. 알 수도 없고 알 수 있는 밀도와 사이즈도 아니고. 에라이 그냥 나는 우주의 봄이야, 뭐 이렇게 넋이 나가 있었다. 연분홍 치마를 입고 바람부는 언덕에 오르지 않아서 그저 다행인 시절이었다.

 

'봄이 지나도 다시 봄, 여름 지나도 또 여름'이라는 사실을 나는 언제 아차차 소리를 내며 알았을까. 첫사랑을 곰국처럼 달게 우려먹기 시작하던 때였을까. 이제는 하도 자주 우려 맹물처럼 말간 그 기억들을 말이다. 언제였을까. '오늘이 내일과 별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김훈보다 먼저 알았을까 늦게 알았을까. 언제였을까. 그런데 김훈은 왜 불쑥불쑥 중요했을까. 꽃을 피게 하는 힘이 천연덕스럽게 꽃을 몰아간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울었던가, 웃었던가. 그나저나 이런 것들이 뭐 그리 중요한가. 그러니까 나는 다시 살 집을 구하기 위해 누군가의 기억과 냄새가 떠도는 집들에 발을 들여놓아야 하고, 내가 기거하던 집에 부동산중개소 사장과 나처럼 집을 구하는 젊은 부부가 오고, 뭐 이런 어수선한 날 이런 것들이 여전히 중요한가. 차라리 부동산 시세를 보는 게 옳은가.

 

눈을 감고

 

박 준

 

눈을 감고 앓다보면

오래전 살다 온 추운 집이

 

이불 속에 함께 들어와

떨고 있는 듯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날에는

길을 걷다 멈출 때가 많고

 

저는 한 번 잃었던

길의 걸음을 기억해서

다음에도 길을 잃는 버릇이 있습니다

 

눈을 감고 앞으로 만날

악연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미시령이나 구룡령, 큰이새령 같은

높은 고개들의 이름을 소리내보거나

 

역(驛)을 가진 도시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두면

얼마 못 가 그 수첩을 잃어버릴 거라는

이상한 예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넣어 하나하나 반찬을 물으면

함께 밥을 먹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손을 빗처럼 말아 머리를 빗고

좁은 길을 나서면

 

어지로운 저녁들이

제가 모르는 기척들을

 

오래된 동네의 창마다

새겨넣고 있었습니다

 

몇 시간 전 다녀간 젊은 부부는 집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그럴 것이다. 저녁녘의 한강을 마주하고 서서 다른 생각이 들겠는가. 나 역시 그러했으니 그들도 그러하리라. 그래도 나처럼 삶이 액자이고 저녁 노을이 그림일 수는 없으니 물을 건 물어야지. 선한 눈매의 예쁜 새댁이 묻는다. 춥지 않나요. 내가 대답할 틈도 없이 부동산중개소 사장이 대답한다. 그럼요. 안추워요. 그럴 리가. 나는 새댁을 빤히 보고 말한다. 춥습니다. 올 겨울 추웠습니다. 그렇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결국은 견딜만 했습니다. 새댁은 웃는다. 부동산사장도 후렴처럼 웃는다. 그대는 왜 웃소,라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내 나이 마흔살에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병아리같은 새댁이 또 묻는다. 여름에는 시원한가요. 그럼요. 바람이 달아요. 사실이다. 이 집을 통과하는 바람은 달다. 그렇게 바람을 맞으며 달을 보던 여름 밤 종종 깊이 잠들곤 했었다. 약도 없이. 칭얼거리지도 않고.

 

꾀병

 

박 준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

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

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

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

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

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

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

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부동산중개소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후에 다녀간 부부가 계약을 하고 싶단다. 이사를 가겠다는 말을 하고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다. 묘하다. 이사를 가겠다고 마음을 굳힌 것도 이야기를 꺼낸 것도 나인데 내가 제일 서운하다니. 이건 또 뭘까나. 그냥 해 본 소리였나. 계속 살고 싶었었나. 그래도 할 수 없는 일. 그나저나 이제 집을 구해야 할 순서인데 까마득하구나. 양희은여사는 마흔살에 알고 있었다. '우린 언제나 모든 것을 떠난 뒤에야' 안다는 사실을. 양희은여사가 알고 있던 사실을 페데르코 가르시아 로르카도 알고 있었다. '포플러나무들은 시들지만 우리한테 바람을 남겨 놓는다'고 말했으니. 분하다. 나만 빼고 저들은 다 알고 있었다니. 마흔으로 흘러들기 4년 전, 나는 이집에서 협박에 가까운 기도와 원색적인 뉘우침으로 밤과 낮을 보냈다. 그럼에도 어리석음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어쩌냐. 그런 것을. 그렇지만 그 어리석음이 결국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어주'기도 했었고, 한철 머물던 자리에 물결무늬를 남기기도 한다. 또 오는 봄은 가고 오는 봄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나는 아직 마흔이 아니고.

 

마음 한철

 

박 준

 

미인은 통영에 가자마자

새로 머리를 했다

 

귀밑을 타고 내려온 머리가

미인의 입술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내색은 안 했지만

나는 오랜만에 동백을 보았고

미인은 처음 동백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 여기서 한 일 년 살다 갈까?"

절벽에서 바다를 보던 미인의 말을

 

나는 "여기가 동양의 나폴리래" 하는

싱거운 말로 받아냈다

 

불어오는 바람이

미인의 맑은 눈을 시리게 했다

 

통영의 절벽은

산의 영정(影幀)과

많이 닮아 있었다

 

미인이 절벽 쪽으로

한 발 더 나아가며

내 손을 꼭 잡았고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미인의 손을 꼭 잡았다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3-03-14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집도 서운할게다. 그 집도 자신의 전부를 네게 쥐여주고, 그것을 온통 받아들일 줄 알았던 네가 그리울게다. 그럴꺼야..

좋은 집을 만나길 나도 기도할께..한철의 기간이 얼마이든 (이 참에 평생 머물 좋은 집과 조우할 수도 있을테니), 그 또 다른 한철 동안, 너와 서로 나눌 수 있는 집이 구해지길 기도한다. ~~

이 새벽, 네 마음이 스산하겠으나,
<이건 오롯이 나의 생각이지만 >바람이, 혹은 물결무늬가 남았으니 되었지.. 싶다..

때로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어쩌면 진짜는 아닌 것 같아서..

굿바이 2013-03-14 22:06   좋아요 0 | URL
이렇게 고마운 위로를 넙죽 받네! 염치가 참...
사는 일도 한철일텐데 뭐한다고 이렇게 고단한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잘 지내니? 감기 조심하고 뭐든 잘 먹고.
푹 쉬자. 내일도 살아야하니까.



웽스북스 2013-03-14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는 원래 '집'을 구하는 건 능력자잖아요. 여행에서만 통하는 게 아닐거에요.
그래도, 아쉽네요. 언니 집에서 밤의 한강을 보던 건 무척 좋았는데.

굿바이 2013-03-14 22:09   좋아요 0 | URL
그러게. 그 능력이라도 남아있어야 할 것인데!
다음에는 집을 지을까봐.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 집 지으면 하숙도 하고^^

흰그늘 2013-03-14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글이 좋아요^^

토지를 읽다가 통영의 옛사진을 본적이 있었는데.. '마음 한철'을 읽으니 문득 생각이 나네요
절벽에서 바다를 보던 미인과 토지의 임명희가 마음이 절벽이었을때 서 있었던 통영의 그 바닷가.. 개인적으론 임명희가 서있었던 그 바닷가가 더 와닿았드랫어요^^

집도, 바람도.. 누군가의 기억과 냄새는 어디에든 있는가 봐요?..

밥준.. 저는 어디에 머무를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밥을 지어주는 곳에 머물러야지요^^

한철과 전부.. 그리고 마음..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되어질 것 같은걸요..

굿바이 2013-03-14 22:13   좋아요 0 | URL
아~! 통영~! 통영,이라는 말만 들어도 저는 좋습니다.
<토지>를 읽은 게 10년은 더 된 것 같아요.
기억이 나기도 가물가물한 것들도 있구요.

'한철'과 '전부'는 제게는 같은 단어에요.
그래서 늘 이렇게 사는 지도 모르겠지만요^^
 

마음이 떠도는 날에 줄줄줄 흘렸던 말과 마음을 한 곳에 모으면 그곳이 지옥이겠다 싶다. 잠은 안오고 골고루 뒤척이는 밤에는 줄줄이 딸려나오는 상한 말과 마음들. 지옥은 내가 만들고 내가 짊어져야 하는 것이지 강 건너 먼 곳이 아니었다. 만들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후회는 늦고 너무 거대해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그러니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후회에 쓴다. 그 무게에 눌려 꿈에서도 후회하는 내가 나를 지켜보는 식이다. 

 

겨울의 중심

 

무릎이 앙상해질 때

창문 밖에서

배고픈 택시들 질주하는 소리 들릴 때

겨울은 중심으로 응집된다

 

오른쪽 눈이 침침해졌다

비밀의 농도가 조금 옅어졌다

 

말없이 지구를 굴리던 사바나 코끼리가

잠시 한 숨 쉬는 사이

무릎이 해진 바지를 입고

아침부터 책상까지

5시부터 음악까지

서성이고 싶다

 

박연준의 시를 읽고 시의 중심을 향해 다가가면 실제에서는 불가한 일이겠으나 어느 과거에서는 가능했을 시인과 내가 동거했던 자리들이 보인다.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시인과의 동거. 나와 당신도 있었던 자리. 마음이 옮겨다니던 자리. 금이 간 자리.

 

빨간 구름

 

안녕, 나를 해독해보렴

일그러진 벽돌 같은 남자를 사랑하고 싶었어

으깨지는 가루를 분처럼 바르고

네 얼굴을 다 사용하고 싶었어

 

나는 조로(早老)하고 싶었으나

왜 자꾸 새로운 이빨이 돋아나는지

 

기억은 빨갛게 멍울 잡히고

네 외로움에 금이 갔나봐

 

펄펄 흩날리는 키스들아

나를 해독해보렴

 

번지고 싶었고 스며들고 싶었다. 간절했다. 그럼에도 때가 되면 돋아나는 것들. 그것들 때문에 내가 나였지만, 내가 나일 수 밖에 없음에 무릎이 해지는 날들. 내 머리 위에도  빨간 구름 낮게 낮게 떠다니고 상한 말과 마음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줄 흘렀다. 방법도 출구도 없었다. 그런데 거기 당신도 있었다. 있었던 것 같다.

 

겨울의 고도(高度)

 

빨간 코트가 잘 어울렸으면 좋겠다

얼굴 위로 자꾸만 음영이 드리워지는데

나를 덮은 우주의 그림자가

나무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겨울의 갈라진 살결, 그 가느다란 틈에

나는 끼워져 있다

 

앙상한 얼굴의 낯선 사내가

가끔 주먹으로 두드려보는

나는 겨울이 앓는 문둥병,

눈썹이 빠지고 코가 주저앉은 채로 휘파람 분다

 

애인은 내내 화두였다

전화는 오래도록 먹통이었고

바람이 유난히 보채는 날에는

거리를 배회하는 젊은 여자들 오목한 허리선에

베이고 싶었다

 

입 열면 허연 입김

겨울에 피어나는 그을음처럼, 아득히 퍼지고

나는 겨울의 고도를 생각하며

자주 떨었다

 

명망있는 평론가는 박연준의 시집에 쥘 미슐레의 말을 옮겨 왔다. "어찌하여 이 땅 위에는 다만 혼자서 절망에 빠져 있는 한 여인이 있는 것일까?" 옮겨 적은 문장에서 안쓰러움이 묻어난다. 다른 의도가 있었다 해도 읽어낼 재간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그러나 누구보다 그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불온하고 천진하게 시를 쓰는 시인은 결코 그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입을 열면 허밍처럼 시가 흐르는 사람은 결코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문학이 삶을 부축하는 모습을 종종 목격한 그가 모를 일이 없다.

다시 돌아와 나는 어쩐담. 목발없이 서야 하는 나는 어쩐담.

후회하는 일 대신 다른 일을 하며 시간을 통과할 수 있었으면 그게 뭐였을까, 시를 쓰고 싶지 않았을까. 이런 시. 하품.

 

하품

 

마음이라는 게 아주 작게 접으면

접힐 수도 있는 것인데

자꾸 활짝 피고 싶은 꿈을 어떻게 한다?

 

창문에서 맞은편 담벼락까지

허밍으로 날아가는 라일락 꽃잎

 

도착하지 않기로.

그저 날아가다 사라지기로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꽃도둑 2013-01-19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님아~ 어찌하여 마음을 이리도 헤집어 놓는가요?...
다른 거 눈에 들어오지 않는 요즘..시가 위로가 되네요...^^
이 시집 퍼 갑니다...암 말 마쇼~~

굿바이 2013-01-21 10:17   좋아요 0 | URL
주소라도 알면 보내드릴텐데요.
부담스럽지 않으시면 주소 알려주셔도 됩니다.
그나저나 서울은 비같은 눈인지 눈같은 비인지 뭔가 한주먹씩 쏟아집니다.

뽈쥐의 독서일기 2015-02-06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자주 사는 편인데.. 시집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까요? 굿바이님 서재 죽- 둘러보니 좋은 시집이 참 많네요. 말의 울림이라는 게 이렇게 큰 줄 몰랐어요.
그러고 보니 시집 리뷰 쓰시는 분은 내공이 상당하신 분이 참 많네요. 글을 주저리 주저리 쓰는 습관이 있는 저는... 소설책만 너무 많이 읽었나봐요. 절제의 미를 좀 배워야 겠는걸요.
제목도 희안한 이 책은 장바구니에 쏙! 자주 놀러올게요^^
 

밤이 길다. 달력을 보니 동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 그리고 내일, 밤은 더 길고 춥겠다.

책이라도 눈에 들어오면 좋겠는데, 잠을 좀 잤으면 좋겠는데, 모를 일이다.

 

우리는 우주적으로 하찮은 존재다. 공간에서는 한 점에 불과하고 시간에서는 한 찰나에 불과한, 헤아릴 길 없이 미미한 존재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에게만큼은 중요해질 수 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우리 서로에게만은 말이다.

- 「무신예찬」, 피터싱어, 마이클 셔머, 그렉 이건 외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을 저 문장에 얹는다.

그리고, 문은 닫혔으나 넝쿨은 문을 타고 담을 넘는다고, 사람의 일은 모르겠으나 내가 본 넝쿨은 그렇더라고 전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동지에는 따뜻한 팥죽이라도 한 그릇 넘겼으면 좋겠노라고 전하고 싶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카에게서 문자를 받았다.

"이렇게 눈이 내린 다음 날은 다른 세상이 열린 것 같아요. 햇빛이랑 눈이랑 함께 반짝여요. 이모 잘있죠?" 초등학교 5학년이 참 멜랑꼴리하다. 낯설고 신기하다. 조카가 말한 다른 세상을 잠시 내다 본다. 그래 어딘지 다르기도 하다. 어제와 다르기도 하고 내가 살던 세상과 다르기도 하고. 여튼 조카의 문자때문에 나는 잠시 쉰다. 일 년에 두어 번 마실까 말까 한 인스턴트 커피도 한 잔 타서 말이지. 좋네. 적당히 달고. 대충 쓰고. 원래 이랬나. 좋네. 합정동 사거리에서 새벽 무렵 마셨던 인스턴트 커피도 좋았는데. 그때도 오늘 같았나. 아니다. 그때는 여름이었다.

가을 내내 참말로 정신없었다. 가을은 말 그대로 산과 들에서 나고 자라는 거의 모든 먹을거리가 수확되는 계절이었다. 일손이 필요한 곳, 경기도,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를 돌았다. 몸에 익은 일이 아니니 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했다. 그래도 일이 너무 안되는 날이면 시를 노래처럼 불렀다. 좋다고들 하셨다. 다들 막걸리를 술술 넘겼다. 누구의 시냐고 물어보기도 했고 다른 시를 더 불러달라고 하기도 했다. 품팔이를 해도 뭔가 옵션이 있어야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좋은 요령을 얻은 셈이다. 물론 차라리 그냥 유행가를 부르라고 요청하는 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할 수 있는 것만 했다. 앞으로도 할 수 있는 것만 하겠다. 나름 다짐이다.

여튼 지난 가을 때론 고되고 때론 짠하고 때론 먹먹했던 품팔이도 끝났다. 그리고 '백석'에서 시작해 '진은영'으로 이어졌던 노래도 끝났다. 마지막으로 노래처럼 읊었던 시를 옮긴다.

 

멸치의 아이러니

 

진은영

 

멸치가 싫다

그것은 작고 비리고 시시하게 반짝인다

 

시를 쓰면서

멸치가 더 싫어졌다

안 먹겠다

절대 안 먹겠다

 

고집을 꺾으려고

어머니는 도시락 가득 고추장멸치볶음을 싸주셨다

그것은 밥과 몇개의 유순한 계란말이 사이에 칸으로 막

혀 있었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항상 흩어져 있다

 

시인의 순결한 양식

그 흰 쌀밥에서 나는 숭고한 몸짓으로 붉은 멸치를 하나

하나 골라내곤 했다

시민의 순결한 양식

그 붉은 쌀밥에서 나는 결연한 젓가락질로 하얘진 멸치

를 골라내곤 했다

 

대학에 입학하자 나는 거룩하고 순수한 음식에 대해

밥상머리에서 몇달간 떠들기 시작했다

문학과 정치, 영혼과 노동, 해방에 대하여, 뛰어넘을 수

없는 반찬 칸과 같은 생물들에 대하여

잠자코 듣고만 계시던 어머니 결국 한 말씀 하셨습니다

"멸치도 안 먹는 년이 무슨 노동해방이냐"

 

그 말이 듣기 싫어 나는 멸치를 먹었다

멸치가 싫다, 기분상으로, 구조적으로

그것은 작고 비리고 문득, 반짝이지만 결코 폼 잡을 수 없

는 것

 

왜 멸치는 숭고한 맛이 아닌가

왜 멸치볶음은 죽어서도 살아 있는가

이론상으로는, 가닿을 수 없다는 반찬 칸을 뛰어넘어 언

제나 내 밥알을 물들이는가

왜 흔들리면서 뒤섞이는가

 

총체적으로 폼을 잡을 수 없다는 것

그 머나먼 폼

왜 이토록 숭고한 생선인가, 숭가한 젓가락질의 미학을

넘어서 숭고한가

멸치여, 그대여, 아예 도시락 뚜껑을 넘어 흩어져준다면,

밥알과 함께 쏟아져만 준다면

그 신비의 알리바이로 나는 영원토록 굶을 수 있었겠네

 

두 눈 속에 갇힌 사시(斜視)의 맑은 눈빛으로

다른 쪽의 눈동자를 그립게 흘겨보는 고독한 천사처럼

 

이 시를 어떻게 노래처럼 불렀는지 돌이켜보면 섬뜩하지만 박수도 받았고 술도 받았다. 그랬으면 됐다. 그렇게 가을을 보내고 어제는 눈이 내리고 오늘은 다른 세상이다. 이론상으로는 가닿을 수 없는 다른 세상이 열린 것 같다. 그래서인지 또 눈이 내린다. 그러니 내일이면 또 다른 세상이 열릴 것이고 당분간 나는 다른 세상을 살 것이다. 다행이다. 숭고할 것 없는 다른 세상도, 멜랑꼴리한 조카가 내 곁에 있는 것도.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웽스북스 2012-12-06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시 인상적이었는데, 언니의 가을을 함께 마감한 시였군요!

귀연이는 똑똑하기만 한 게 아니었군요! 점점 크면서 언니를 닮는 것 같아요. 고기 많이 먹는 것만 빼고! ㅎㅎ 오늘은 눈이 참 예쁘게 내리네요. 올 겨울은 부디 좀더 관대하길!

굿바이 2012-12-07 10:30   좋아요 0 | URL
나를 닮으면 큰일이지!!!!ㅋㅋㅋ
어찌되었건 참 사랑스러운 녀석이야.

風流男兒 2012-12-06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을 어루만지다 그새 가을이 가버렸네요! ㅠ 이제 시작된 농한기에는, 만나요 누나 ㅎㅎ

굿바이 2012-12-07 10:30   좋아요 0 | URL
농한기가 시작되었으니 어서 보세~!

치니 2012-12-07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품팔이 하시면서 어르신들 앞에서 시를 읊어드리는 굿바이 님, 으아아아아, 정말 사랑스러워요. 저라도 막걸리 펑펑 따라 드렸을 듯. 참 멋진 양반.

굿바이 2012-12-07 10:32   좋아요 0 | URL
히히. 칭찬이죠? 신나요!!!
할 줄 아는게 없어서 그냥 시라도 읊었어요. 이거라도 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요~

꽃도둑 2012-12-11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님, 멋져요~~~ 전국팔도(?)를 다니면서 뭘 하신지는 대충 알겠는데,,,
갑자기 느닷없게....아니 어울리지 않게...아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아니,,몰라요 몰라요...아무튼 여튼 멋진 사람인 것 같아요..^^

굿바이 2012-12-17 10:48   좋아요 0 | URL
멋지긴요. 후져요. 그것도 매우 후져요 ㅠㅠ
 

               금산을 찾은 건 태풍이 오리라는 소식 때문이었고 그래서 그해 여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벌써 십오 년이 흘렀다. 그때는 뭐가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간절했는지 무슨 성지순례처럼 보리암으로 향했다. 가방에는 시집 열 권, 무려 열 권이 들어 있었다. 소설이었으면 얼마나 무거웠을까. 지금 생각하면 가져간 시집들도 참! 김수영도 있었고, 이성복도 있었고, 기형도도 있었고, 백석도 있었고, 오탁번도 있었고.... 맞다. 송창식 1집도 있었다. 참으로 다양하고 어지러웠으니 여튼 그때는 그렇게 화끈거렸다. 지금은 돈을 준다고 해도 못할 짓이다. 

 

               다시 찾은 보리암은, 모르겠더라. 길도 낯설고 처음 온 곳처럼 모르겠더라. 지나간 것은 그렇구나 싶었다. 길도 모르겠으니 그냥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가면 되었다. 아니다. 자동차가 산을 오른 셈이다. 보리암 아래 주차장에 차를 맡기고 조금 올라가니 보리암이 보였다. 수능을 기원하는 프랭카드가 보였다. 갑자기 내려가고 싶었다. 물론 참았다. 보리암에서 한참을 앉아 있다가 금산 정상으로 향했다. 기억 속의 봉화대가 그대로 있었다. 봉화대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산은 태풍이 오기 전이라 고요했다. 뭔가 큰 일을 준비하는 듯한 엄숙함과 떨림이 있었다. 그해 여름에 보았던 편백나무도 그대로 있었다. 고개를 조금 들면 바다가 보이고 더 들면 하늘이 보였다. 현실감이 떨어질 정도로 눈부신 빛이 하늘과 바다와 산과 편백나무를 피어나게 했다. 태풍이 오기 전에만 볼 수 있는 바다고 산이다. 어떤 것도 눈에 들이지 않고 오직 그것들만 보았다. 간혹 새 한 마리가 울었다. 나도 입을 동그랗게 말아 비슷한 소리를 냈다. 새는 대답하지 않았다. 머쓱했다. 그리고 몰래 가져간 시집을 꺼냈다. 심지어 읽었다. 시절이 스치고 계절이 스치고 몸과 몸이 스치고 나와 그대가 스친다. 그렇게 많은 것들이 스쳤다. 시집 한 권을 그리고 시 한 편을 읽는 동안.

 

               영원은 모든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중얼거리며 내려오는 길. 내 앞을 킬힐 신은 처자가 천천히 걷는다. 천천히 걷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다린다는 것일진데 저 처자는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궁금했다. 또한 온 몸의 무게를 저 구두가, 무려 11센티가 감당하고 있다니 놀랍고 처연했다. 정녕 푹풍이 오고 있구나 싶었다. 문득 그 처자 불러 세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사람은 본디 외로운 존재라오!" 아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15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단 한 마디의 말도 생각하지 못한 거지요!"라고.

 

통영

 

박정대

 

한 구절도 생각하지 못했어

유행가만 중얼거리다가

너에게 보낼 한 구절도 생각하지 못했어

담배를 피우며 가볍디 가벼운

내 1밀리그램의 영혼을 생각했을 뿐이야

밤이 깊고 새벽이 오고 아침이 될 때까지

너는 어느 길 위에서

지친 별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거니

 

통영이라는 곳의 어둠

지금 이곳에서 나는 고요히 네 생각을 해

그런데 삶은 아무리 생각해도 여전히 진행 중이고

난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전히 행진 중이었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나는 여기까지 걸어온

거야

내가 가는 길의 지도 위에 네가 없었다면

소라 방등 켠 객줏집 토방에서

너를 껴안고 오래도록

사랑을 나눌 수도 있었을 텐데

 

통영이라는 곳의 깊은 밤

내 담배 연기는 내 영혼에 부딪혀 부서지고

별들의 숨소리는 통영 앞바다에 와 부서지는데

이곳을 지나 난바다에 가서 죽는 바람들

이곳을 지나 너의 부드러운 혀 속으로 가서 죽는

나의 딱딱한 추억들

항구를 떠난 갈매기들도

이제는 잠에서 깨어

너의 편지를 물고 돌아오는데

 

통영이라는 곳의 아침

나는, 천희(千姬)라는 여자와 천 마리의 시와

밤새도록의 파도 소리와 새벽별과

너의 숨소리를 오래도록 생각다가

한때 내 영혼의 통제사가 오래 머물던 곳

통영이라는 곳에서

끝내 너에게 보낼

단 한 마디의 말도 생각하지 못한 거야

 

통,영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꼬 2012-08-28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님. 창 밖에서 바람이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 글을, 이 시를 읽었어요. 오래 전 통영에서 본 아주 새카만 밤이 떠오르네요. 저의 조그마한 온기를 보냅니다.

웽스북스 2012-08-28 22:36   좋아요 0 | URL
오늘은 네꼬님 글도 보고 굿바이언니 글도 보고. 계탔네 계탔어. 덩실덩실.

굿바이 2012-08-29 12:17   좋아요 0 | URL
네꼬님! 저는 뭘 보낼까요?
결이 고운 바람을 보냅니다~!

웬디양! 잘 잤나요? ^^

2012-08-28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29 1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진 2012-08-28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님, 남해라는 글에 냉큼 찾아왔습니다.
절이든 보리암이든 무엇이든 모두... 뭐랄까 속세(?) 실속(?)만 따지는 거 같아서 뭔가 안타까워요. 그냥 남해 이야기에 찾아왔다구요. 헤헤헤헤 ㅎㅎ

굿바이 2012-08-29 12:2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소이진님~!

보리암은 좀 아쉬웠지만 또 그런 모습들이 사람들의 삶과 닮아있는 건 아닌지 싶었습니다. 삶과 닮아있어서 짜증스럽기도 하지만 또 짠하기도 하구요.
그나저나 태풍 피해는 없으셨나요?

이진 2012-08-29 21:29   좋아요 0 | URL
남해는 태풍 거의 끝자락에 위치해서 태풍 피해가 그나마 없었어요. 바람이 한나절동안 강하게 불긴 했지만 농작물이나 주택들에 피해 줄만한 정도는 아니었구요. 굿바이님은 괜찮으셨죠?

2012-08-30 1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31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03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