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기를 점검하러 온 젊은 청년이 2011년 탁상용 달력을 내민다. 봉투에 싸여 있는 달력은 크기로 보아 올해의 그것과 똑같아 보인다. 올해와 똑같을지도 모를 한 해가 오고 있다는 사실이, 정녕 그것이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난감하기만 하다.  

생각하니, 매일 술을 마신다. 정확한 기억만을 더듬어도 2주째다. 2주 동안 숙취해소 음료를 세 번 마셨고, 두통약을 거르지 않았다. 그리고 어제는 급기야 정종을 두 병 마시고, 맥주로 입가심을 하는 기염을 토했다. 걸어오는 길, 배는 출렁거렸지만, 하나도 춥지 않았다. 아직은 술값을 치를 돈과 카드가 남아 있음에 감사했다. 이렇게 거르지않고 운동을 했으면, 아침에 바지 앞단추가 떨어지는 일은 막을 수 있었겠다. 실과 바늘을 찾는데 적어도 1시간을 쏟았는데, 결국 회장님에게 빌렸다. 난처하기만 하다.  

이십대에도 멀리했던 술을 이제와 퍼마시는 까닭이 무엇인지, 바지 단추가 떨어지고 나니 궁금해졌다. 무엇인지 정확히 꼬집어 낼 수는 없지만, 안다고 해도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어떤 이미지 하나가 떠오르는 것은 막을 길이 없었다. 아버지_ 84년, 늦은 겨울 밤, 알콜솜처럼 젖은 입김. 풀어진 머플러, 바람에 얻어맞은 머리카락, 식어서 축축해진 호빵, 그리고 당신의 난감한 웃음_ 떠오르는 이미지에 따귀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얼얼하기만 하다. 

백석의 시집을 꺼내들고 차가워진 커피 한 사발을 들이킨다. 오늘은 살아내야 하니까. 저녁까지 끝내야 할 보고서는 마무리해야 하니까,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두통약이 아니라, 백석이다.  

 

적경寂境

신 살구를 잘도 먹드니 눈 오는 아츰 
나어린 아해는 첫아들을 낳았다 

인가 멀은 산중에
까치는 배나무에서 즞는다 

컴컴한 부엌에서는 늙은 홀아비의 시아부지가 미역국을 끓인다 
그 마을의 외따른 집에서도 산국을 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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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2010-12-02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당신의 몸이, 목숨이 당신것만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자신을 소홀히 할 권리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을, 그러나 그것을 지키지 못할 만큼 힘든 친구님!
그러나, 그럼에도
살아주시길! 부디 잘 살아내주시길 !

굿바이 2010-12-03 11:33   좋아요 0 | URL
뉘신지 알 것 같소. 고맙소, 매우매우, 딥플리딥플리하게, 고맙소.

연말이고, 날도 추운데, 12월 중순쯤에 얼굴이나 봅시다.
추운 날, 밥은 먹고 다니는지, 밥값 없으면 언제든 문자로 계좌번호 찍으시오. 안녕~

향편 2010-12-02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두번재 단락을 읽으면서 어.. 잘못왔나? 하고는 서재를 이리저리 살폈어요. 2주째 술이라니, 여기는 굿바이님 서재인데, 이상하잖아요.ㅎㅎ
2주째 술먹는 페이퍼는 차좋아가 써야죠. 서재에는 일상의 별일을 쓰곤 하니까 제가 2주내내 술을 마시면 쓸만하지만, 굿바이님이 2주째 술이라니...... 이건 일상의 별일 수준이 아닌데요. 술을 왜그리 많이 마셔요~~~

백석과 함께 금주를...ㅎㅎ

굿바이 2010-12-03 11:38   좋아요 0 | URL
그렇군, 그간 나름 이미지 깔끔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려나요? ㅋㅋㅋㅋ

잘 모르겠는데 말이지, 술이 좋은 건 딱 하나 있는 것 같아. 나에게 좀 너그러워진다는 것. 내게 자비를 베푸는 그 누구가 없어, 스스로 자비를 베푸는 형국이니, 몸은 축나고, 배는 나오지만, 또 그렇게 서럽지도 않더라는~
그러나, 춘삼월 꽃노래도 한때라고, 다시 정상으로 복귀해야지, 백석과 함께!

가시장미 2010-12-03 0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처음뵈어요. ^^ 가시장미라고 합니다.
이웃의 글인줄 알았는데,즐겨찾기 등록이 안 되어 있더군요.
지금쯤 보고서 다 마감하시고, 편안하게 주무시고 계시겠네요.
힘든 하루 잘 마무리 하시고, 재충전하셔서 내일은 상쾌하게 시작하시길 바래요.
내일만 지나면 주말이잖아요. 으흐

사실 이 글에 이런 댓글을 남기는 게 실례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님의 글이 제 마음을 움직여, 글을 남기지 않을 수가 없네요.
모르는 사람의 글이 가끔은 더 진실하게 느껴질 때가 있으니깐요.
저의 마음도 님에게 진실로 다가가 응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누구나 각자가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가 있고, 아픔이 있다는 걸 알지만...
가끔은 그 정도가 모든 사람에게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이길 바라곤해요.
그 바람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모두가 그렇게 살아간다는 게 위안이
될 때도 있지만, 딱 그만큼만 힘들어 할 수 있다는 게 더 큰 위안이 될 것 같아서요.

그럼, 앞으로 종종 또 뵈어요.
편안한 주말 되시길..

굿바이 2010-12-03 11:4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새벽에 바람이 세찼죠? 제가 사는 곳은 한강근처라 바람이 부는 날에는 잠들기가 쉽지 않답니다^^

이렇게 따뜻한 마음, 넙죽 받습니다. 뭔가 받아보면 또 누군가에게 줄 수도 있는 것이라는, 그런 식상한 이유를 들이대면서, 가시장미님이 보내주신 진정을 오롯이 챙깁니다.

오늘은 금요일, 무엇이든 행복한 날 보내시길 바랍니다.

토깽이민정 2010-12-03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걱정

내가 있을때는 술잔도 잘 받지도 않더니 눈오는 겨울
굿바이 언니가 술을 마신다

태평양 건너 저 멀리서
민정이는 컴퓨터를 보며 혀를 찬다

컴컴한 부엌에서 형부가 언니의 술국을 끓인다 (끓이고 계실까?)
바다건너 또 한 부엌에서도 북어국을 끓인다

언니!!!
술 고만 자시고
커피도 줄이시고
차를 드시어요!

웽스북스 2010-12-04 01:25   좋아요 0 | URL
태평양 건너 저 멀리서
컴퓨터 보며 혀를 차는 민정언니를
웬디는 상상한다

언니의 웃음소리가 귀에 울리는 새벽이에요 :)

굿바이 2010-12-06 09:55   좋아요 0 | URL
진짜 민정이 웃음소리가 들려 ^^

이 풍진세상을 살다보면 말이다......ㅋㅋㅋ
여튼 다 네가 서울에 없어서 빚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암만!

꽃도둑 2010-12-03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제목이 재밌네요..'늘 제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나는 지난 밤에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따!!!!! 왜?왜?왜 그랬어요?...

굿바이 2010-12-06 09:56   좋아요 0 | URL
뜨앗! 제가 지난 밤 저지른 추태를 알고 계십니까?

누구시오????? ㅎㅎㅎ

2010-12-03 1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06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동우 2010-12-06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구바이님.
백석에는 커피를 마시지만, 굿바이님의 세밑 84년도 아버님에는 술말고 다른 걸 마시시기를.
부군께 미역국을 끓여 달라시던가... ㅎㅎㅎ
웃지만 굿바이님의 백석은 시큰합니다.

굿바이 2010-12-06 09:48   좋아요 0 | URL
동우님, 마음도 몸도 산만해서 연락도 못드렸습니다.
이렇게 사람 노릇을 하면서 사는게 어려운 일인줄 몰랐습니다.

연말이라 바쁘시겠습니다. 그래도 건강관리 잘 하시고, 무탈한 12월 보내시길 바랍니다.

cyrus 2010-12-06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정본 백석 시집' 을 읽고 있는게 굿바이님의 리뷰를 보니
더 반갑네요. 저도 굿바이님이 소개하신 '적경' 이라는 시가 무척 좋더라고요.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고향 마을의 정겨움이라고 해야되나요,,
백석의 시에는 마을 사람들의 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은거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굿바이 2010-12-06 13:26   좋아요 0 | URL
언제 꺼내봐도 참 좋은 시집입니다.
백석이 살았던 시절의 풍경들이 이제는 참으로 옛일이 되었지만
시인이 사랑했던 쓸쓸하고, 가난하고, 높은 것들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좀 앞뒤가 안맞지만, 구조적(?)으로 안맞는 것이라고 우기면서, 겨울은 오고, 아침부터 황석어찌개가 먹고 싶었던 것이었다. 배워둘 것을...그러나, 그때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뭘 가르쳐 준다고 알았겠는가 싶다. 물론 할머니는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까지 살아계셨지만, 누비이불 만드는 일, 옷감에 물들이는 일, 고추장 굴비 만드는 일, 동치미 담그는 일, 박대 조리는 일, 시루떡 찌는 일, 텃밭 가꾸는 일들을 배우지 않았다.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이렇게 어느 날 뒷목을 잡으며 아쉬워 할 줄 내 어찌 알았겠는가. 어리석어라 굿바이.  

하루하루 폐인처럼 살아가는, 살림이라고는 고작 청소와 빨래가 전부인 양 행세하는 하루하루가 참으로 낭패로구나, 낭패,라는 자괴감이 몰려들어 얼굴을 들 수 없음에, 뭐랄까, 할머니 제게 힘을 주세요,를 주술사처럼 중얼거리다가 우연히 한 권의 책을 발견했으니.....그러나, 이 얼마나 또 쌩뚱맞은지. 바다 건너 할머니들의 이야기인지라. 그러나, 그저, 뭐랄까, 뭐든 timeless skill 이라면 뭐 바다를 건너던 산을 넘던 내게 힘을 주리라는 생각으로 덥썩 주문을 하였다는. 어리석어서 또 거시기하게 짠한 굿바이.  

 

 

 

 

 

 

결론부터 말하면, 엄청난 지식을 얻을 수 있거나, 여기에 소개된 생활의 지혜를 다 실천할 수는 없지만, 그러니까, 내 삶을 내가 가꿔보자는 의지는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작아 보이지만 결단코 작을 수 없는 소득이었다. 심지어 이 책을 읽다 벌떡 일어나, 대추와 생강을 잘 씻고, 심지어 생강을 잘 저며 차를 끓였으니, 작은 실천은 이미 시작된 셈. 할머니 이렇게 제게 힘을 주시는군요. 오, 나의 할머니.  

책의 한 대목을 옮겨보자면, 좀 더 정확히 긁어오자면, 아래와 같다.  
Nowadays, many of us “outsource” basic tasks. Food is instant, ready-made, and processed with unhealthy additives. Dry cleaners press shirts, delivery guys bring pizza, gardeners tend flowers, and, yes, tailors sew on those pesky buttons. But life can be much simpler, sweeter, and richer–and a lot more fun, too! As your grandmother might say, now is not the time to be careless with your money, and it actually pays to learn how to do things yourself!

Practical and empowering, How to Sew a Button collects the treasured wisdom of nanas, bubbies, and grandmas from all across the country–as well as modern-day experts–and shares more than one hundred step-by-step essential tips for cooking, cleaning, gardening, and entertaining, including how to

• polish your image by shining your own shoes
• grow your own vegetables (and stash your bounty for the winter)
• sweeten your day by making your own jam
• use baking soda and vinegar to clean your house without toxic chemicals
• feel beautiful by perfecting your posture
• roll your own piecrust and find a slice of heaven
• fold a fitted sheet to crisp perfection
• waltz without stepping on any toes
 

본디 무기력하였지만, 할 수 있는 일조차 할 수 없는 일로 만드는 놀라운 기술을 보유할 필요까지는 없다 싶어서, 실은 이번 주에 김장을 하기로 했고, 이번에는 엄마가 보조를 하고 내가 메인 역할을 하기로 한 지라, 정말 어디 오다가다 산신령이던, 어디쯤의 요정이건 잡아다 놓고 힘을 달라고 할 처지라서, 이런 책도 반갑더라는 것이었다. 

내가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다른 경로였는데, 알라딘에서도 구매할 수 있어 반가웠더라는, 그런데, 책 표지 그림이 실제 표지와 알라딘에 올려진 것이 다르고, 저자 정보도 잘못된 것 같아, 스마트폰도 없고, 디카도 없는 내가, 주위 사람에게 비웃음을 사며 사진 몇 장을 찍어 올리는 바. 수정이 가능하시면 수정하셔도 될 듯 합니다. 램프의 요정님~! 아이쿠나, 이 페이퍼를 읽을 리 만무하시겠구나. 그렇지만 당신의 능력을 믿어요, 램프의 요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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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流男兒 2010-11-25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홍! 표지 인상적인데요!!

굿바이 2010-11-25 16:32   좋아요 0 | URL
표지가 참 말랑말랑 달콤추르릅한데, 안쪽의 삽화는 약간 성인용 버전이랄까^^

2010-11-25 1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5 16: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10-11-25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상냥하고 애교있게 잘못된 정보 수정을 요청하시니,
알라딘은 굿바이님을 껴안아주고 싶겄어요. 아흐.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책 사도 제대로 실천 안할 거 같은 예감이 들어 보관함에 넣을까 말까 망설이고 있어요 ㅠ)

굿바이 2010-11-25 16:39   좋아요 0 | URL
치니님의 센스라면, 이런 책은 필요없을 것 같아요. 진심으로다가!!!^^

상냥하고 애교있게, 막 오늘의 행동수칙으로 삼고 싶어요. 그러나, 주위에 그럴 사람이 없다는 거, 얼굴만 봐도 신경질이 난다는 거, 핑계로 핫쵸코 마셨는데 젠장할 별로 안달아요 ㅜ.ㅜ

조가비 2010-11-25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렇게 영어로 말하는 할머니 말도 알아들을 수 있다니!
놀랍고 놀랄 따름
울리살람 영어는 돋보기 써도 안 보이지랍.

굿바이님, 제가 누구에요?
블로그 메일 주소 안 쓰고 갈 건데
제 댓글로만 제가 누구인지 알아맞추어 보시압^^

굿바이를 좋아하는 살람

굿바이 2010-11-29 11:02   좋아요 0 | URL
앗! 알겠습니다. 누구인지^^

잘 지내시죠?
저는 주말에 김장하러 목포에 다녀왔습니다.
처음 김치를 만들었는데, 완전 실패입니다ㅜ.ㅜ
내년을 기약하며, 노동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과, 얼빠진 김치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참으로 서러운 월요일입니다.

향편 2010-12-02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왜 영어책을 읽으세요!!ㅋㅋ

껍데기는 제 마음에도 들지만 영어라니......

굿바이 2010-12-03 11:44   좋아요 0 | URL
매우 후회하고 있소!!!!!!! 껍데기는 가라,를 외치고 있소!!!!!!!^^

동우 2010-12-06 0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원문 긁어 오시지만 마시고, 우리말로 덧들려 주셨으면.
무식한 채로 몇단어 들여다 보니 내게도 제법 유용한 할머니의 말씀일듯 한데.
 

P와 나는 더이상 사랑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정녕 언제일지 모르지만, 언젠가 우리의 기억이 시가 되려면 우리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가을이 물러나는 자리, 겨울이 어느 자작나무숲을 돌아 사이렌을 울리며 우리를 덮치는 날이 그리 멀지 않음을 느꼈을 때, 우리는 사랑을, 아니 지나간 과오를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었다. 올려다 본 하늘은 높고 시렸고, 그 순간 우리가 붙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시가 되지 못한 이야기들을 받치고 있는 가슴에 쥐가 나는 날에는 무엇이라도 해야 했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에 더는 머리에 꽃을 꽂은 소녀들이 뛰어다니지 않지만, 우리가 그렇게 미치고 싶었던 날들에는 우리를 포함한 모두가 머리에 꽃을 꽂았다고 나는 말했고, P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었다고, 그랬었다고 너도 나도 오롯이 기억하고 있다고 희게 웃었다.   

그렇게 술도 아닌 뜨거운 차를 나누며 P는 내게 말했다. 그시절 나는 네가 무서웠노라, 네가 쌓아가는 그 무엇이 무서웠노라고. 

나는 P에게 말했다. 그시절 나는 진저리나게 추웠고, 불을 지피면 살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래서 장작더미를 내 키보다 높이 쌓았고, 키보다 높이 쌓다보니 하늘을 가렸다고, 그러나 정작 나는 성냥이 없었노라고, 성냥 없이 벌벌 떨며 장작을 쌓았노라고, 그저 장작만 쌓았노라고, 그러니, 내가 쌓은 것은 장작이 아니라 무덤이었노라고. 그리고, 

나는 성냥, 성냥, 성냥이, 사랑인 줄 알았노라고. 

단풍 하나 물들이지 못하는 내가 미쳐서 날뛰기만 했던 날들이 이제는 부끄러워, 이제는 부끄러워 정작 찾은 성냥을 분질러버렸다고 나는 울었고, P는 그렇게라도 살아줘서 고마웠노라고 했다. 가끔은 내 장작더미를 뒤에서 받치고 있었노라고, 불타지 않는 장작더미를 그렇게 받치고 있었노라고 했다.

고백이 떠도는 시절, 우리의 고백은 그 무엇 축에도 끼지 못하겠지만, 너는 나였고, 나는 너였고, 우리는 무수히 많은 우리였다는 고백들이 은행나무 아래로 흩어졌다. 거름도 되지 못할 고백이기에 아스팔트 위로 떨어져 나뒹굴어도 딱히 서럽지 않았다. 

더는 누구의 비명도 채집하지 않음을 고백하는 오늘, 그대, 그리고 또 그대들, 내품에 안겨 사랑이 성냥인줄 알았던 그시절, 그시절 못다했던 꿈 나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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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 2010-11-15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읽다보니, [담]이 생각나 장작더미 너머로 성냥 대신 꽃 한 송이 던져 봅니다.
꽃 한 송이에 장작이 무너지기도 하지 않을까 싶어서...

굿바이 2010-11-15 19:32   좋아요 0 | URL
고마운 마음, 잘 받을께. 염치없지만 잘 받을께^^

風流男兒 2010-11-15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지만, 제가 만약 그 장작을 보고있었더라면 분명 어디서든 성냥을 찾아서 누나 옆에 두었을 거에요 아주 몰래 말이죠.

굿바이 2010-11-15 19:35   좋아요 0 | URL
음...자나깨나 불조심!! 설마속에 화재있고, 조심속에 화재없다!!ㅋㅋㅋ

동우 2010-11-16 0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굿바이님의 글을 읽고서 유제하의 노래를 들으니.
노래의 저 진부함이라니.

굿바이님.
글만 남겨 놓으세요.

굿바이 2010-11-16 11:08   좋아요 0 | URL
이런 말씀, 매번 받기만해서 너무 염치없습니다. 잘지내시죠? 변덕스러운 계절 항상 건강하세요.

도란도란 2010-11-18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굿바이님!^^ 알찬 서재 잘 구경하고갑니다
저는 이음출판사에서 나왔어요~
저희가 이번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를 연일 차지하여 화제가 되고있는 도서
<모터사이클 필로소피> 한국판 출판 기념으로 서평단을 모집하고있거든요^^
책을 사랑하시는 굿바이님께서 참여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리플 남기고가네요
저희 블로그에 방문해주세요~! :)

굿바이 2010-11-22 11:28   좋아요 0 | URL
먼저 허접한 글들 읽어주시고, 또 이렇게 좋은 제안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모터사이클 필로소피>는 개인적으로 관심있는 책이었습니다. 서평단은 다른 분들이 더 훌륭하게 하실 것 같아서 신청하지는 않지만, 책은 기회가 되면 사보려고 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책 많이 출판하시길 바랍니다.
건승하십시오!
 

서른을 앞둔 어느 날, '룸바'를 배우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의지가 불끈 솟았다. 황군을 꼬드겨 역삼동에 있던 댄스홀을 찾았다. 댄스교사의 설명이 시작됨과 동시에 나는 그곳을 나왔어야 했다. 이유인즉 힐을 신을 수 없다는 것. 5센티 정도의 힐을 신고 서있을 수도 없는 내가 춤을 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무슨 얼빵신이 강림하셨는지, 아니면 이사도라신이 내리신 건지 나는 선생님에게 물었다. "맨발로 춤을 출 수는 없나요?"
황당하셨겠지만 그 예쁜 등을 더 곧추세우는 일로 일단 마음을 가라앉힌 선생님은 내게 말했다. "신체적인 장애가 있다고 춤을 배울 수 없는 건 아니에요. 맨발은 위험하니까 발레슈즈를 신고 배워보는 건 어떨까요?" 아~ 그러니까 나는 신체장애 판정을 댄스홀에서 받은 셈이었다.  

여튼, 선생님은 내게 더 큰 장애가 있음을 그때는 몰랐으리라. 나는 몸치였다. 
그리하여 황군과 나는 토요일이면 두려움과 설레임을 반반씩 섞어 댄스홀에 갔고, 나올 때는 자괴감과 피로를 얻어 돌아왔다. 처음에는 처음이니까, 좀 시간이 지나면서는 그럴 수 있으니까, 더 시간이 흘러서는 뭐 선수하려는 것도 아닌데, 마지막에는 때려치워!가 됐지만, 지금도 그 시절의 일을 복기하면 유쾌하기만 하다. 그때 춤은 제대로 출 수 없었지만 춤곡(서양 고전 음악에서 춤곡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은 참 많이 들었었고, 음악을 귀가 아니라 온 몸으로 듣는 방법을 터득했으니 말이다. 깨달음을 멀고도 가깝다.  

 

 

 

 

 

 

 

  

그리고, 오랜만에 춤과 관련된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 [춤의 유혹]은 라틴댄스에서 왈츠 그리고 궁정댄스에 이르기까지 흔히 사교춤이라 불리는 커플댄스를 소개하는 책이다. 물론 방법론은 아니고, 춤의 역사적 배경이라든지, 그 시절 사람들의 욕망이라든지, 그러니까 춤의 미시사 정도라고 보면 무리가 없겠다. 이 책의 형식이 교본이었다면 오히려 내게는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니, 나는 이 책에 스텝 밟는 과정을 도식화한 발바닥 그림이 실려있지 않음에 감사했다.    

이 책에는 보기만 해도 설레고, 상상하면 더 끔찍하게 황홀한 여러 춤이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신대륙의 노예로 끌려간 흑인들의 춤인 산테리아와 캉동블레,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파생된 삼바, 살사, 탱고, 집시들의 춤에서 흘러나온 플라멩코 등은 단순한 여흥으로서의 춤을 넘어선다. 이 춤들은 박해받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사회적인 언어로서의 힘을 가질 수 없었을 때 할 수 있었던 최소한의 몸부림이 실려있다. 몸으로라도 표현해야만 하는 절박함과, 반복되는 고통속에서도 살아남아야 하는 오기들의 총합, 그리고 그 탈출구로서의 춤.
책을 읽는 동안 가슴 어디쯤이 무거웠던 까닭은, 여전히 어디선가 탕탕거리는 그들의 발구름이 존재할 것 같아서였고, 끝없이 반복될 것 같은 힘을 가진 자들의 영원한 타락이 눈에 밟혀서였다.  

그럼에도, 보란 듯이, 모든 살육의 기억들은 축제로 거듭나있다.
그렇다고 축제가 말 그대로 축제인 시절에 암울한 과거를 들이대며 같이 울어보자, 이 축제들의 의미를 바로 세우자고 목소리를 높인다면 어쩌면 그것 역시 폭력일 것이다. 살을 부비고, 타인을 끌어안고, 플로어를 빙빙 도는 즐거움과 위안, 그 한없이 가벼운 유희를 뺏을 권리 또한 누구에게도 없을 것이다. 브라질에서, 쿠바에서, 스페인에서, 오스트리아에서 열리는 축제들은 그 기원이 어찌되었건, 또 그 안에서 벌어지는 입에 담지 못할 폐해들이 무엇이건, 나같은 소시민에게는 꿈에 그리는 일탈이다. 염치없지만 속세는 그렇다고 그래서 나 또한 그렇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어디 먼 이국땅까지 원정을 갈 수는 없지만, 이 밤, 금요일의 이 밤, 누구 나와 함께 춤이나 추실라우? 쉘 위 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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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1-17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서툴더라도 열심히 배우시면, 멋진 룸바를 추는 굿바이님이 되실거라고 믿습니다.^^
이사도라신에서 살짝 웃었습니다.ㅎㅎ

굿바이 2010-11-21 23:39   좋아요 0 | URL
이런 위로와 격려는 언제나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룸바는 포기했습니다. 엉엉~
 
인문/사회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10월의 경험으로 나는 또 한 번 부담없는 마음으로 신간평가단 분들과 함께 읽을지도 모를 책을 골라본다. 밝은 눈이 있어 좋은 책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날 일은 앞으로도 없어 보인다. 그저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주목할 수 밖에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다섯 권의 책을 더듬어 보자면  

   

 인문학자 8명의 글이 담긴 책이다. 이 책은 대충 그 목록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전통이라는, 만들어진 담론, 특히 잘못된 담론을 짚어보고 그것들을 해체하거나 성찰함으로써 현재의 모습과 나아갈 방향을 궁리해보고자 한 노력의 결과물로 보인다. 주제도 그러하거니와 믿을 수 있는 저자들이 눈에 띄어 더욱 관심이 가는 책이다. 

 

 

 

 내게는 어쩔 수 없고, 떨쳐낼 수 없는 것이기도한, 바다,이야기다. 19세기에 쓰여진 책은 바다의 설화를 담고 있다. 역사가의 눈과 마음으로 쓰여진 해양문학의 고전이 이 시절 또 어찌 읽힐 수 있을지.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라캉은 말했다. 그러니 어쩌면 신도 욕망할 가치가 있는 기표일 수 있다. 그러니 신을 위한 변론은 세계적인 종교학자이자 종교비평가인 저자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아도 충분히 뜨거울 것이라 짐작된다. 누구에게나 상실과 결여는 존재하니까, 그것이 신이라고 해도. 물론 인격화된 신이라면 말이다. 

 

 

  

  

 

 습지 보호 구역으로 지정된 10개 갯벌과 저자가 특별히 아끼는 갯벌 7곳을 추가해 갯벌을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을 생태기행문으로 읽어도 무방하겠으나, 나는 갯벌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을 읽어낼 수 있었음 좋겠다. 그것을 읽고 싶다는 마음은 타인이 살아가는 자리를 지워내려 애쓰는 사람들을 향한, 언제나 너무 힘없는 분노일 것이다. 

 

  저자에 대한 사전정보가 없었다. 단편적으로 학술지에 실렸던 글을 읽었던 것도 같은데 기억은 늘 정확하지 않다. 여하간 미셸 푸코, 메를로퐁티, 시몬 드 보부아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월리엄 제임스, 그리고 존 듀이의 몸에 대한 관점을 짚었다고 하니, 궁금함과 기대가200%다. 그녀의 뒤태가 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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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1-07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두번째이지만, 정말 신간도서 5권을 소개하려고 하면,,,
너무 읽고 싶은 책들도 많고, 막상 소개 정보가 부족하여
딱히 설명해야할 것도 없어서,, 어려운거 같습니다.

굿바이 2010-11-08 17:28   좋아요 0 | URL
쉬운 일이 하나도 없네요^^

저는 그저 제가 관심있는 책들만 올려놓는 것 같습니다. cyrus님의 주목신간은 다양해서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