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바다 미슐레의 자연사 1
쥘 미슐레 지음, 정진국 옮김 / 새물결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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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어떤 책은 밑줄을 그을 수가 없다. 책 그 자체가 이미 작가가 그어놓은 거대한 밑줄이기 때문이다. 다만 밑줄을 들키지 않는 작가의 노련함과 배려에 감탄할 뿐이다. 이 책 <바다>가 그렇다. 온통 푸른 밑줄이다.   

저자 쥘 미슐레는 프랑스 태생의 역사학자이자 문필가다. 그가 이 책을 집필한 1850년대는 요동치는 사회였다. 종교가 쇠락하고 이성과 과학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며, 시대는 인간이라는 개인을 발견하게 되지만, 조명을 받기 시작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자연과의 관계를 다시 설정한다. 모든 것의 중심에 인간을 세우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신비의 영역이었던 자연을 개척과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결과는 설명이 필요없게 되었다. 여하간, 저자는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잠시 접고 [바다]와 [바다와 더불어 사는 생명체]와 [바다와 더불어 존재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역사학사적인 고증과 문필가적인 감성으로 풀어낸다.  

책은 크게 1부 바다를 바라보며, 2부 바다의 기원, 3부 바다의 정복, 4부 바다의 르네상스로 구분되어 있다. 먼저 저자는 [바다]를 이렇게 묘사한다.  
"세상의 큰 운명인 굶주림은 육지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바다에서 굶주림은 예방되므로 있는지조차 모른다. 식량을 찾는 어떤 움직임도 없다. 삶은 마치 꿈처럼 떠다닌다. 그런 힘을 무엇에 쓸까? 힘의 소진은 불가능하다. 그 힘은 사랑을 위해 비축한다.....이것이 바다다. 바다는 지구의 거대한 암컷이다. 지칠 줄 모르는 욕망으로, 영원한 수태로 새끼를 낳는다. 절대로 끝이란 없다." 

"이 신성한 작업을 지켜보자. 바닷물 한 줌을 쥐어보자. 거기에서 원시의 창조가 다시 시작된다.....이렇게 나타나는 물방울은 식물성의 실일까? 그것은 어떤 존재라고 하기 어려운 가벼운 솜털 같다. 이미 예민하고 사랑스러운 솜털이다."
 

그는 바다에 서식하는 단세포 생물의 느릿한 움직임부터 어느 날 갑자기 들끓는 폭풍과 해일을 그리고 적도의 숨막히는 고요까지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는다. 해와 달의 움직임에 따라 부푸는 바다라는 거대한 암컷을 샅샅히 훑으며 생명이 태어나기 전 이미 그들을 사랑한 생명의 신을 노래한다. 이제 이 푸른 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명체 [고래]를 생명의 신이 얼마나 가학적으로 사랑했는지 묘사하고 있는 저자의 글들을 살펴볼까 한다.

"움직이는 불덩어리 같은 이 애인들은 일순간 몸을 치켜세우고, 노트르담의 탑처럼, 너무 짧은 팔에 끙끙대면서, 서로 부둥켜안으려 기를 쓴다. 그들은 그 거대한 체중으로 다시 밑으로 떨어진다."

"자연의 창조력이 처음으로 시적인 상상을 발휘해 내놓은 놈 같다. 우선 숭고함을 겨냥했지만, 그 뒤에 가능한 수준으로 복귀했다. 지속 가능한, 즉 생존 가능한 수준으로. 크기와 힘에서 모두 감탄할 이 짐승은 피는 뜨겁고 젖은 따뜻하며 선의에 넘친다. 오로지 생존 수단만 부족하다."   

"멋지게 10미터 높이로 뿜어올리는 물기둥과 분수구멍은 바로 유치하고 야성적인 기관이라는 표시이자 증거다. 힘껏 공중으로 분수를 쏴올리면서 그 '숨 가쁜 통풍기'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오 자연이여, 왜 나를 노예로 만드셨나이까?" 

이 아름답고 힘찬 더불어 선량한 생명체를 지면으로 옳겨온 저자를, 또한 저자의 글들을 도무지 아끼지 않을 수가 없다. 이어서 저자는 바다를 정복한 인간의 역사와 바다를 두고 싸웠던 전쟁의 역사, 뒤를 이어 바다를 끼고 꽃피웠던 아름다운 문화들을 소개한다. 참으로 바다에 관한 모든 것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바다의 정복편에서 저자는 허기진 인간은 무섭다,고 썼다. 그리고, 과거의 영웅들이 숭고한 것은 무지한 데다 그 맹목적인 용기와 절망적인 결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은 그렇게 바다의 길을 찾고,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고, 심지어 둥근 지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태풍을 제압할 수는 없었지만, 무지는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웅들이 밟았던 땅에 살고 있었던 원주민들의 삶은 영혼 대신 돈을 긁어모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피폐해질 수 밖에 없었다. 원주민들의 존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 뒤에 일들은 입에 담기도 민망할 뿐이다. 인간이 인간을 이렇게 다루는데, 동물은 또 어찌했겠는가. 학살하고 또 학살하고, 죽이기 위해 죽인 고래와 바다코끼리와 해표와 수많은 물고기들. 이제는 사라졌거나 사라질 위험에 놓여있다. 어느 여름 대륙을 강타했던 폭풍과 해일이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는 모든 생명체의 절규가 아니었는지 모를 일이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그런 책이 있다. 어느 시간, 어느 장소, 어느 페이지를 들춰보아도 고마운 책. 위로가 되는 책. 울렁거리게 하는 책. 쥘 미슐레의 <바다>가 그렇다. 바다가 요동치는 것 처럼 마음이 요동치고, 바다가 고요한 것 처럼 마음도 고요해진다.

이제 <바다>에 수장된 심정은 언어로써 언어의 바깥을 나갈 수 없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책을 덮고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먹먹할 뿐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실재한다면 이럴까, 마음으로 마음을 넘어설 수 없는 막막함. 마음을 전달하려고 발화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잠시 하얗게 부푸는 물거품에 불과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초라함. 추태를 부릴 수 없음에 두근거리기만 하는 민망함. 몰려드는 무력감에 좌초된 독자는 허영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 곳, 욕망이 끓어오를 틈을 주지 않는 곳, 그렇다고 금욕도 절욕도 아닌 곳, 해석이 아닌 사실이 존재하는 곳, 영원히 검푸른 바다를 두고 고래처럼 솟구쳐 오른다. 오 자연이여, 왜 나를 바보로 만드셨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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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2-23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님은 <바다>를 감명 깊게 읽으셨군요. 저는 전반부에 저자가 바다를 바라보면서
느겼던 것을 기록한 부분만 좋았던거 같습니다.

굿바이 2010-12-23 09:20   좋아요 0 | URL
책이 쓰여진 시대를 감안하면, 혹은 그런 걸 생각하지 않아도, 개인적으로 즐거운 독서였습니다. 개인의 감수성과 취향은 얼마든 다양할 수 있고, 또 그런 다양함을 지켜보는 것도 즐거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2010-12-23 0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3 0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3 1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3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3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7 0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잘잘라 2010-12-24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로 30분 달리면 푸른 동해바다를 볼 수 있는 데 사는 메리포핀스예요.
안녕하세요? 알라딘서재달인 링크 따라 와봤어요.
주황색 날개 달린 연미복 신사가, 바다를 배경으로 인사를 건네주시네요.
연장 마니아, 라는 한마디가 관심을 끌구요. 굿바이라는 닉네임은.. 좀 뜻밖이네요. 하이 또는 하와유, 굿모닝, 이런 닉네임에 비해서는요.
반갑습니다. 굿바이님! 메리 크리스마스!!!

굿바이 2010-12-27 00:04   좋아요 0 | URL
이제야 댓글 봤습니다.
메리포핀스님, 성탄은 잘 보내셨는지요?

굿바이라는 닉네임이 좀...^^ 메리포핀스라는 이름은 발음도 그렇고, 동화적이고 예쁘네요. 여튼 이렇게 인사나눌 수 있어 반갑습니다. 좋은 밤 보내세요.
 
<나는 왜 쓰는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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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실린 <문학 예방>이라는 에세이의 한 대목은 이렇다.
"아주 낮은 수준이 아닌 이상, 문학은 경험을 기록함으로써 동시대 사람들의 관점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시도다......그는 자기가 뜻하는 바를 더욱 명료하게 하기 위해 진실을 비틀고 풍자할 수는 있어도, 자기 마음의 풍경을 곡해할 수는 없다." 

작가의 글이 작가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가정하면, 오웰은 녹록하지 않은 경험으로 얻은 마음의 풍경을 어떤 목적으로도 곡해하지 않는 용기를 지닌 작가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오웰도 <작가와 리바이어던>이라는 에세이에서 지적한 바 있지만, 문단의 지식인들이 글을 쓰며 의식하는 이들은 대중이 아니다. 오히려 작가들이 속해있는 그룹, 시쳇말로 업계 종사들일 것이다. 그러니 그들을 향한 두려움을 접고, 동시대 사람들의 관점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그의 책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한 해답의 반은 얻은 셈이다.  

그러나, 작가의 글이 작가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한계에 봉착한 독자로서 고백하자면, 그의 글이 사실이 아닌 어떤 풍경에만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에세이 <작가와 리바이어던>에서 그의 말을 빌려오자면, 
"그렇다면 작가는 정파 우두머리들의 지시를 거부할 뿐 아니라 정치에 '대해'쓰는 것도 삼가야 한다는 뜻인가? 이 역시 결코 그렇지 않다. 원한다면 아무리 서투르더라도 정치적인 글을 써서는 안 될 이유가 없다. 다만 한 개인으로서, 외부자로서, 기껏해야 정규군의 측면에 있는 환영받지 못하는 게릴라로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글을 쓰되 다만 외부자로서, 기껏해야 환영받지 못하는 게릴라로서의 위치를 주문하는 작가의 말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불편하다. 그것은 그가 강조한 두려움 없는 글쓰기, 마음의 풍경을 곡해하지 않는 글쓰기에 오히려 흠집을 남기는 일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가 딛고 있는 땅을 살피는 일이 힘겹고 심지어 불가능에 가깝다 할지라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응시할 수 있을 때, 응시를 통해 깨달은 곤란한 진실들과 마주볼 수 있을 때, 그리고 그것을 발화할 수 있을 때, 적어도 작가가 말한 정치적인 글쓰기에 힘 혹은 진정성이 실린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글이야말로 사후적 해석에만 머무르지 않는 글이 되리라 믿는다.  

언제나 그러하듯, 모든 어긋남은 어떤 의도로부터 시작된 것이리라. 그러하기에 작가의 글과 내 마음이 어긋나는 자리에서 나는 작가의 의도를 짐작해 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어긋나려고 한다. 그것은 작가의 시절과 또 다른 시절, 21세기의 무람없는 냉소주의자들의 행태가 눈에 밟혔던 까닭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에 대한 별쭝맞은 트집을 잡는 것도 잠시다. 참으로 잠시다. 

"전체주의는 신앙의 시대보다는 정신분열의 시대를 약속한다." 는 문장은 오웰의 통찰력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내 마음대로 선정한 조지 오웰의 경이로운 성찰이자, 전체주의에 대한 이 시대 최고의 폭로다. 이 문장은 오웰의 <1984>로 이어져 전체주의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구성원 자신들을 기만하는지 보여주는 모태가 되는 문장이기도 하다.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한 작가의 남은 답변이 있다면 감히 이 한 문장으로 충분하리라 본다.  

누군가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어느 여인을 두고 매혹적이라 했다. 일견 맞는 말이다. 선택과 유기를 두고 망설이는 일은 성가신 일임에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맞는 상황이라면, 망설임은 필요한 시간이고,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나름대로 현명하고 예의바른 태도의 여인을 가르켜 매혹적이라고 발화한 것이라면 나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이 있다. 유기할 것을 들고 애매함을 보이는 것은 매혹적일 수 없다. 그것은 그저 간교한 행동일 뿐이다. 더 나아가 선택할 것을 들고 애매함을 보이는 것 역시 매혹적일 수 없다. 그저 어리석을 뿐이다. 따라서,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를 두고 보인 잠시나마 어정쩡했던 태도는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어리석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그의 글을 곁에 두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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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8 1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9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10-11-08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 대단한 리뷰에요. 오웰이 이걸 읽었더라면!
안 그래도 사려고 한 책인데 꼭 사야겠네요.

굿바이 2010-11-09 09:58   좋아요 0 | URL
책에 밑줄이 많아서, 보내드린다고 하기도 참 그렇고....
저는 개인적으로 좋았어요, 어느 대목은 고종석씨가 보이기도 하고^^

cyrus 2010-11-08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 대단한 리뷰에요. 오웰이 이걸 읽었더라면! 2
오웰은 작가이기 전에 인간이기에 수많은 에세이를 쓰다보면
자신의 문학적 초심과는 어긋나는 방향으로 내용을 쓸 수도 있고,
시대가 변화됨에 따라 자신이 지향하고 있는 문학관이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오웰의 글을 비판하는 내용, 잘 읽었습니다.
안 그래도 다시 읽으려고 한 책인데 꼭 다시 읽어야겠네요.

굿바이 2010-11-09 09:57   좋아요 0 | URL
이런 과찬을 연달아 듣다니, 민망해서...이를 어쩐답니까 ㅜ.ㅜ

비판이라고 하기에는 허접하고, 뭐랄까, 애증이랄까요~
곁에 두고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특히 스페인 내전과 관련된 부분은 다른 책들을 좀 찾아볼까 싶기도 하구요.

꽃도둑 2010-11-10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 님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참으로 밀도 있게 쓰셨어요. 근데 읽다가 <작가와 리바이어던>의 인용구에서 잠시 멈추게 되네요.
오웰은 다른 작가에 대해 자신의 소견을 밝힌 글에서 '반드시 작가의 실제 얼굴이 아니라 그 작가가 가져야만 하는 얼굴을 보게 된다' 라고 했습니다. 오웰은 정치적 글쓰기는 작가가 가져야할 자세이자 시대적 의무라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다만 한 개인으로서, 외부자로서, 기껏해야 정규군의 측면에 있는 환영받지 못하는 게릴라로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는 정규군의 입맛에 맞추어진 혹은 정치에 대해 함구하는 것이 아닌 아무리 서투르더라도 자신이 원한다면 글쓰기는 게릴라가 갖는 저항정신, 의협심,자유와 평등에 대한 의지로의 글쓰기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말이죠... 그리하여 그건 두려움 없는 글쓰기에서 몸을 빼는 행위가 아닌 걸로 읽혀지기도 하는데...정작 오웰 자신도 환영받지 못한 글을 써서 출판을 거부당한 적이 많았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말을 그렇게 이해하게 되는군요...^^ 다른 분들의 의견은 어떤지....궁금하네요,

굿바이 2010-11-10 11:09   좋아요 0 | URL
꽃도둑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지배세력의 혹은 다수의 입맛에 맞는 글을 피하기 위해, [한 개인, 외부자, 게릴라]라는 표현을 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렇지만, 외부자나 게릴라가 항상 의협심이나 자유,평등에 대한 가치를 존중한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것이 또 저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오웰의 표현이, 작가의 의지와 무관하게, 실존이라는 무게를 감당하지 않으면서 그저 냉소로 일관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그런 알리바이가 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기우였습니다.
물론, 순전히 개인적인 기우였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좋은 의견 남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꽃도둑 2010-11-12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자신이 처한 사회적, 정치적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나봐요. 또한 한계라는 것에서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그것을 직시하는가 회피하는가 하는가 두 종류의 사람은 분명 존재하는 거구요. 오웰의 글쓰기는 직시하는 쪽이었다고 봐요, (물론 직시라고 해서 옳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오웰 또한 모순적인 면을 드러낸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었고 일관성 없는 논리로 글을 쓴 적도 있었음은 한 인간이 가진 한계라고 봐야겠죠... 그는 소련이 보여준 독재적 사회주의가 아닌 민중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사회주의를 꿈꾸게 되는 가장 이상주의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것에서 보자면 대오에서 벗어나 세상의 흐름을 바로보고자 노력하고 실천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당의 입맛에 맞추는 글쓰기가 아닌 그는 끊임없이 당을 비판하며 자신이 하고픈 말을 하는 작가였음에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거기에 초점을 맟추어서 글을 읽은거구요...ㅎㅎ 사실 굿바이 님 글에 반론을 제기 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해보자는 뜻이었지요,..

굿바이 2010-11-12 23:55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이 책에 대해 그리고 작가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드려요^^

동우 2010-11-16 0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美님 댁에서 만난 조지 오웰이 그렇더니 굿바이님 댁에서 만나는 조지 오웰.
나 곧 새겨 읽어야 할 조지 오웰...

굿바이 2010-11-16 11:06   좋아요 0 | URL
동우님의 오웰은 또 어떨지 궁금해요. 저는 따라갈 수 없는 사유의 깊이로 오웰을 이야기해 주세요^^
 
미크로메가스.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0
볼테르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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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수의 노래였는지, 시인의 글이었는지, 혹은 드라마 대사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라는 말이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 그저 무슨 위로가 마땅하지 않을 때, 가벼이 등 토닥이며 쓰기에 썩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아무런 고민없이 내뱉었던 무책임한 그말이 참으로 아무짝에도 쓸모없음을 알았을 때는 내 자신 [아플 만큼 아프고도 여전히 그만그만한 상태]로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다.  
무엇이든 이미지로 존재하는 것들은 일단 의심하고 볼일이다.

여튼,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인 볼테르의 작품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를 읽으며, 저 문구가 떠올랐던 이유는 주인공 캉디드의 스승인 낙관주의자 팡글로스의 놀라운 언술때문이었다. 
"특별한 불행들이 일반적인 선을 만듭니다. 그러니 특별한 불행이 많으면 많을수록 모든 것은 더욱더 선이 되는 것입니다."
어머나! 요즘 유행하는 순위 프로그램처럼 [인생 역정 누가누가 제일인가] 경합이라도 벌이는 것 같은 주인공들의 상황앞에서도 끊임없이 [최선의 세계]를 운운하는 철학자라니, 또 그것을 무슨 진리로 받들어 [스승이 말씀하시길, 세상은 최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하더이다]라고 읖조리는 주인공을 어찌할 수 있을까. 또 한 번 어머나! 

그러나 이 철학 꽁트는 이 대목이 매우 중요하다. 무엇이 그렇게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만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 대략 그렇게 [생각]으로 존재하는 것을 떠드는 사람은 한 번 의심해야 한다는 것, 또한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더 나아가 생각으로 밀고나간 [믿음]은 헛것이자 공포라는 것.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어떤 게 더 최악의 상황인지 모르겠군요. 검둥이 해적들한테 백번 겁탈당하는 것, 한쪽 엉덩이를 잘리는 것, 불가리아인에게 몽둥이 찜질을 당하는 것, 종교 화형식에서 죽도록 매 맞은 다음 교수형당하는 것, 교수형당한 후에 다시 해부당하는 것, 그리고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것" 이라는 상황속에 모든 주인공들을 한 번씩 담근 후 묻는다. 
"낙관주의가 뭔데요?" 
주인공의 입을 빌려 볼테르는 말한다.
"아아! 그건 나쁠 때도 모든 것이 최선이라고 우기는 광기야!" 
즉, 이미지로 존재하는 것들이 실재한다고 생각하고 또한 믿는 것은 광기다.  

이 철학 꽁트를 더 재미있게 이해하기 위해서 라이프니치의 낙관주의를, 루소를, 더 나아가 종교전쟁을 그리고 18세기 유럽의 기괴한 역사를 알면 더욱 흥미진진하겠지만, 그런 것들을 하나도 몰라도 찾을 수 있는 재미는 너무 많다. 예를 들면, [주인공이 발견한 최선의 세상 3곳]이라던가, [몰락한 여섯 왕들과의 식사] 라던가, [알고도 당하는 사기는 무엇무엇이더라]던가, [사랑이라는 기막힌 환상은 누구를 위해 뻥을 치나]등. 그 재미는 여러 곳에 포진하고 있다. 모든 세계문학전집이 라면냄비 받침으로 존재하려고 인쇄되는 것은 아니다. 고전이 왜 고전인지 무릎을 치게 하는 작품도 간혹 있다. 이 책이 그렇다.

21세기, 낙관도 비관도 모두 조롱의 대상이 되는 시절을 사는, 한 발 더 나아가 [비아냥이 최선의 세계]를 만드는 초석이라도 되는 듯 행동하는 시절을 살고 있는 내가, 암울한 시절을 살아낸 사상가의 작품을 앞에 두고, 책을 읽는 내내 낄낄거렸다. 그저 낄낄거렸다.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해 느끼는 허무함에 대한 또다른 조롱일 것이다. 역시나 내 한심함은 강에 유람선 띄우려는 이들과 견주어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과 시스템을 조롱]하는 역사적 사명을 띄고 나는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허무와 냉소로 좋은 시절을 다 보낼 일이 아니다. 진득하니 끈기있게 때로는 오기스럽게 무엇이든 찾아야 할 것이다. 이미 알고 있고 때로는 모른 척 하기도 하지만, 찾는 것은 [공부]일 것이고, [공부]의 목적은 [행동]일 것이다. 책의 마지막 "하지만 우리의 정원은 우리가 가꾸어야 합니다."라는 어딘지 세련되지 못한 주인공의 발언이 오늘 나를 깨운다. 또다른 계몽이자 볼테르의 재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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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9 1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0 0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향편 2010-10-19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아! 그건 나쁠 때도 모든 것이 최선이라고 우기는 광기야!"
젠장 저는 낙관주의자였나 봅니다. 젠장.. 허무주의인줄 알았는데

나 미친건가??음 고민 좀...

굿바이 2010-10-20 00:11   좋아요 0 | URL
향편은 허무주의랑 안어울려. 나도 좀 그런 구석이 있는데, 본인도 힘빠지지만 곁에 있는 사람도 맥빠지게 하는 것 같더라구.
이왕이면 우리 모두 그저 좋은 사람, 뭐 그런 거 하자.

근데, 나도 뭔소린지...나도 미친건가? ^^ 아니다. 미치겠다. 좀^^

웽스북스 2010-10-19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이렇게 끌리는 리뷰라니! :)

굿바이 2010-10-20 00:11   좋아요 0 | URL
오홋.이렇게 끌리는 댓글이라니! :)

치니 2010-10-19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이렇게 끌리는 리뷰라니! 2 :)

굿바이 2010-10-20 00:12   좋아요 0 | URL
오홋. 이렇게 끌리는 댓글이라니! 2 :)

2010-10-19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0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風流男兒 2010-10-19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속 다른 창 갔다가 다시 와서 보고 그러고 있는 이 모습은 무엇인가효-

굿바이 2010-10-20 00:15   좋아요 0 | URL
알것도 같은 모습인데, 사실은 나도 계속 다른 곳을 왔다갔다 하다가, 잠깐 멍~해 있다가, 이 모습은 무엇인가효- (따라하니 재미있고, 나름 의미심장하고,정말 유익해요^^)

동우 2010-10-20 0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특별한 불행들이 일반적인 선을 만듭니다. 그러니 특별한 불행이 많으면 많을수록 모든 것은 더욱더 선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善을 線으로 읽는 나의 무지는 비아냥의 시대를 사는 나의 비관주의..
굿바이님.
무슨 이데올로기, 이를테면 '주의'가 붙은 것들은 일종의 광기가 내포된 집단성이 있는듯 합니다.
진정한 계몽이란 집단의 생각이 아닌, 개별의 인식과 개별의 행동 운운..
나는 굿바이님의 볼테르를 읽으면서 나의 무식을 낄낄거리고 있답니다. ㅎㅎㅎ
무슨 심오한 생각 있는척 얼버무리기. 하하핳
책부족, 다음에는 소설뿐 아니라 이런 종류의 책들도 선정합시다그려.

굿바이 2010-10-20 22:28   좋아요 0 | URL
개별의 인식과 개별의 행동. 이것 참 힘들지요. 정말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뭔가 집단을 이룬다는 것은 이미 '광기'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가끔은 정녕, 가볍고 유쾌하고 어딘가 휘둘리지도 매몰되지도 않는 그런 개인으로서 존재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단독자로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이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 관계가 주는 달콤함이 또 얼마나 많은지요.
세속이란 늘, 고단하고 구차한 것 같습니다.

멜라니아 2010-10-20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내 얼굴에 앉은 먼지로 맑음 없는 하루.
나는 또 왜 이 굴레 속에 들어와 버렸나 한심하고 있는데
굿바이님 행동을 말씀하시는군요

멋진 리뷰, 다른 말 모두 잊어도 행동이란 말을
새삼스레 받아들어 보는 것은
제 몸에 대한, 움직이지 않고 사념만 하고 마는 제 몸에 대한
실망 때문일 것입니다
그 실망 또한 마음만으로 그치고 더 나가지 못하고 있고.
제주 날씨는 흐립니다

동우 2010-10-20 19:2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몸을 움직이지 않고 사념으로 그치는 생각들.
어디 멜라니아님뿐이리오.
그러나 멜라니아님, 실망하지 맙시다.
사유가 있기전 행동이 앞서는 것보다, 무기력할지언정 우리는 천박하지는 않습니다. 하하 아전인수.

제주날씨도 흐리군요.
한반도 전체가 오늘은 흐린가 봅니다.
흐린 부산날씨, 내 기분도 별로 가볍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날씨따위에 좌우되는 기분이라는 것도 가끔은 좀 경멸하기도 합시다그려. 하하하하

굿바이 2010-10-20 22:33   좋아요 0 | URL
멜라미아님, 제주의 날씨가 흐렸군요. 서울 하늘만 바라보느라 작은 땅 여기저기를 잘 모르고 지내게 됩니다.

생각을 바꾸는 일도 어렵다고들 하지만, 몸이 바뀌는 일은 그것보다 몇 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내 몸에 좋은 습관이 베고 좋은 행동으로 이어지는 일, 그것이 공부의 목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동우님도 기분이 별로 가볍지 않으시다고 하니, 음...내일은 공기 중에 웃음바이러스라도 좀 살포해야 할 것 같습니다^^


2012-12-05 1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동무론 - 인문연대의 미래형식
김영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회적 생존을 위한 관계 맺기에서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복식부기해 보면 손실이 더 크다. 개인적인 성향의 문제도 있겠지만, 돌이켜 보면 생산적인 관계는 극히 드물었다. 그럼에도, 어리석음이 고질병인, 더 나아가 그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아둔함마저 겸비한 나는 여전히 "세속의 어둠을 배경으로 외로이 빛나다가 때로는 다른 별들과 합쳐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는 별자리"(진중권) 가 되는 그런 관계를 꿈꾼다.

물론, 2008년 '별자리 연대'를 꿈꾸며 시작한 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열정을 이해관계적으로 분배하고 조율하라'(A. 허쉬만)는 빌어먹을 조언을 무시한 결과였고, '호의와 호감'이 '신뢰'를 호출할 것이라고 혼자 그냥 그렇게 믿었던 탓이다. 결국 모두 내 탓인 셈이다. 그럼에도 생존을 위해 여전히 관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기에, 결국 명민함이라 착각한 평범한 자기방어와 냉소만 키워왔다. 그런 내 미련함에 찬물을 끼얹어 다시 정신을 차리게 한 이가 있으니 바로 김영민이다. 그러니 그의 글은 두고두고 쓰고 두고두니 달다.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김영민의 <동무론>은 정신적으로 여전히 유아인 그래서 늘 관계 맺기에서 칭얼거리는 이들에게 벼락과도 같은 책이다. 친구, 연인이라는 이름의 타자와의 관계에서 [사적 호의]와 [사회적 신뢰]를 혼동하는 [세속]의 한 특징을 일갈하는 그는, 호의와 신뢰를 준별하는 태도를 기르라고 조언한다.  

"대부분의 호의가 어떤 식이든 넓은 의미의 이기심과 연루해 있다는 사실은 거의 분명하고 또 피할 수도 없어 보인다." (p.30), "세속이 슬픈 이유는 악(惡) 때문이 아니다....슬픔은 적들의 횡포 탓이라기보다 오히려 친구들의 선의와 그 무모함이, 연인들의 호의와 그 어리석음에, 가족들의 애착과 그 타성에 얹혀 생긴다." (p.265) 라는 그의 말은 그늘 한 점 없는 광장으로 우리를 끌고 나온다. 공사가 사통하고, 모든 관계의 그믈망이 어느 20대 청년들의 88만원짜리 일자리마저 싸그리 포획하는 시절을 우리는 견디고 있다. 분노와 열패감이 태풍처럼 무자비하게 우리들을 강타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 자신의 소소한(?) 연정은 포기할 수 없는 이 일상은 또 얼마나 슬픈 지옥인지.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연대란, 좋은 [동무]란 무엇인가?  "좋은 '동무'란, 사사화된 정리의 늪 속으로, 그 한 패거리의 움직임 속으로, 축축하고 뜨겁게 저락하는 '친구'를 불러세우는 일견 메마르고 '서늘한' 행위속에서 (부사적으로) 자생"(p.211) 하는 것이며,   

"그것은 같은 관습에 몸을 의탁하는 짓으로써 상식과 도덕의 알리바이를 내세우지 않는 관계, 이념과 진보를 빌미로 같은 언어와 사정(私情) 아래 집결하지 않는 관계"(p.217) 라고 그는 동무의 의미를 정리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한 치도 틀린 것이 없는 그의 지론은 기어이 멀다. 그것은 기어이 닿을 수 없는 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며 강기슭에 주저 앉은(?) 김훈의 마음과 같은 것일까. 나 역시 기어이 닿을 수 없는 관계를 동무,라고 부른다며 세속의 오늘을 붙들고 주저 앉고 싶은 심정이기에 말이다.

<동무론>은 책의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인문연대의 미래형식으로서의 동무,를 군더더기 없이, 그러나 온몸으로 압통을 느끼게 사방에서 조여온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봐 한 마디 거들자면, 그가 말하는 동무나 연대는 그저 약소자끼리의 연대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약소자라는 사실 그 자체 때문에 연대하려는 것은 유력자의 사회구성체 형식과 그 메커니즘을 답습하려는 권력의지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p.373)고 지적하고 있다. 

비트게인슈타인의 말처럼, 앎이 아니라 의심이 사유인 것을 인지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안다고 믿었던, 좋은 관계라 믿었던 모든 관계들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일로부터 이 슬픈 세속을 헤쳐 나가야 한다. 그것은 "호의가 에고이즘과 사통하고 선의가 나르시시즘의 미끼로 전락하는 그 속절없는 무능 속에" 포획당하지 않고 사회적 신뢰를 다시 취할 수 있는 기회이자 시작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책의 첫 장부터 나를 붙들어 세웠던 그의 글로 이 책에 보내는 감사를 마무리한다.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상처는 예감되지만, 그 상처의 길을 막을 수 없다는 게 인간의 운명이다. 마치, 어두운 방 안에서 깨달은 것을 밝은 길 위에서 놓치듯, 말이다. 구조와 패턴의 인과성은 환하게 보이더라도, 개인의 이치를 설명하는 인과율은 어디에도 없는 것. 아, 개인은 영원히 어리석다. 실은, 너를 만나는 일이 재난인 줄 알고 만난다. 그리고 그 재난이 어떤 종류의 반복인 사실도 환하게 안다. 정작 내가 모르는 것은, 그 재난을 회피할 정도로 내가 내게 행복을 허락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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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심장 2010-09-09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을 보니, 굉장한 책인것 같네요~ 그런데, 저 그림은 누구 작품인가요? 쫌 궁금해서리^^

굿바이 2010-09-09 22:20   좋아요 0 | URL
읽어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물론 어떤 책을 좋아하시는지 잘 모르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게 권하고 싶습니다.
그림은 무명 작가(물론 이름이 있기는 하지만^^)의 작품입니다. 누군가의 그림을 흉내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저 저는 좋아서 잠시 올려놓았습니다.

2010-09-09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9 2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10-09-09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독하기 무척 힘든 책이었습니다, 제게는. 강의까지 들었는데두요!
굿바이님 리뷰를 읽으니 더 이해가 잘 되는 거 같아요. :)

굿바이 2010-09-09 22:25   좋아요 0 | URL
강의도 들으셨어요? 우와~ 부럽습니다. 짝짝짝!

김영민의 책을 찬찬히 다 읽어볼까 합니다. 뭐랄까, 진짜 어른을 만난 느낌이랄까요^^

멜라니아 2010-09-10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는 굿바이님에게 호의와 호감을 갖고 있고
한 번 만난 후에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친구라고 철석같이
친구표를 딱 붙여 두었는데

의심해야겠다! ㅋㅋ

굿바이 2010-09-11 01:05   좋아요 0 | URL
이를 어쩐답니까요!!!ㅋㅋㅋㅋ

뭐든 잘 하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신뢰에 답하겠습니다. 기회를...기회를...한 번 더 주십시오!!!!! 헤헤

pjy 2010-09-11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무님페이페에서 본 '지인'이 생각났습니다~ ㅋㅋㅋ http://blog.aladin.co.kr/704638105/4095450

지인 知人 acquaintance 명
돈을 빌릴 정도의 안면은 있어도 이쪽에서 꿔줄 정도는 아닌 사람. 상대방이 가난하고 하찮을 때는 고작 얼굴이나 아는 정도라고 말하고, 돈푼이나 있고 유명할 때는 절친하다고 말하게 되는 우정의 정도.

굿바이 2010-09-12 23:42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누군가 저를 말할 때, 얼굴이나 아는 정도라고 하겠군요. T.T

동우 2010-09-12 0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굿바이님 섭렵하시는 모든 책을 향하여 덤벼 들수는 없지만 이 책은 확 덤벼들고 싶습니다.

굿바이 2010-09-12 23:42   좋아요 0 | URL
읽고 싶으시면 말씀하세요. 제가 보내드릴께요.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 시민을 위한 민주주의 특강
도정일.박원순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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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탐(小貪)해서 대실(大失)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어리석게 굴었다. 달성하지 못한 최종 목표에 대한 미련보다 취할 수 없었던 작은 욕망이 더 절절했다. 이렇게 앎과 삶은 불일치한다. 적어도 내 일상은 그렇다. 어쩌면 민주화를 앞당긴 이들의 실수가 이 대목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욕망을 우습게 생각했던 것 말이다. 최종 목표를 달성했다고 착각했기에, 개인들의 작은 욕망은 무시해 버렸던 것. 그러나 나도 우리도 어리석기에 개인적인 작은 욕망들이 얼마나 절절한가. 결과적으로 그 절절함이 우리를 철저히 망가뜨렸다. 욕망하는 대상에게 힘을 실어 주는 행위를 하게 한 것이다.  

그럼에도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다시 한 번 그 어리석음을 돌아보는 마음이 있고, 고쳐보고자 하는 의지가 유효하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민주주의를 말하려고 하는 이 책의 저자들과 내가 오늘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낡은 것은 사라졌는데,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은 상태"를 [위기]라고 그람시는 말했다. 위기에 관한 명쾌한 정의다. 2010년의 한국은 정치, 경제, 교육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위기의식이 팽배해있다. 이 책에 언급된 12명의 살아있는 지식인들처럼 조목조목 그 위기를 진단할 수는 없다고 치더라도, 우리는 즉자적으로 느낀다. 그런데 좀 다른 의미의 위기가 아닌가 싶다. "낡은 것이 좀 사라지는가 싶었는데, 오히려 더 낡은 것으로 회기하려는 상태!" 따라서, 지금 이 시점에서 민주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은 이 현상을 깊이 받아들일 필요가 있겠다. 2010년의 한국은 왜 더 낡은 것으로 회기하려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말이다.  

지금,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열거하기에 너무 많다. 그것을 대표하는 무엇을 꼽으라면,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대결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대목 박명림교수의 지적은 날카롭고 옳다. 그는 공공성이 실종되고 국가가 사사화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공공성이 실종된다는 것은 권력이 일부에게 독점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신분이 부활함을 의미한다.  

현재 한국사회의 신분은 돈에 의해, 학벌에 의해 재편되고 있다. 사라졌던 문중이 현대식으로 부활하는 셈이다. 아버지가 기거하는 아파트의 이름으로 혹은 학벌의 이름으로. 이제 수도 서울의 어디에서 태어나고 자라는가, 어떤 사교육을 받고 어느 대학을 나오는가에 따라 밥벌이가 달라지고, 그들 다음 세대의 운명도 달라진다. 일부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렇듯 먹고사는 문제가 공공의 영역에서 해결되지 못하는데 어찌 하겠는가. 새로운 신분제로, 좀 더 상위 신분으로 편입하는 수 밖에. 이렇게 되면 모든 판단이 멈춘다. 단지 자본이 필요하다는 생각, 자본이라면, 경험상으로 토건이라도 해야 한다는 혹은 경제 대통령이 필요하다는 신앙에 가까운 맹종만이 남는다. 그 이익이 누구에게 돌아갈 지는 모른다. 그저 욕망만 남는다. 개인간의 이익 충돌을 막을 수 있는 장치로 공공의 영역, 즉 국가라는 형태가 필요했던 것인데, 공공의 영역이 과두화된 이상,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욕망하고, 속고, 주변으로 내몰리는, 악순환만이 우리 앞을 완강히 버틸 뿐이다. 이런 사회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망한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책에 소개된 지식인들은 각기 다른 분야에서 민주주의의 빠른 후퇴를 말하고 있다. 개별적으로 다른 그림이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목소리다. 그 하나의 목소리를 도정일교수의 물음으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 더 나은 세계란 누구를 위한 더 나은 세계인가?" "나는 누구의 이익을 위해 지금 이 결정을 내리는가?" 이 두 가지 질문은 사적인 그리고 공적인 영역에서, 무엇인가의 시비를 가리고, 선택하고, 옹호해야 할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명확한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주입되는 모든 가치를 의심할 때, 그것에 맞서야 할 때, 이 물음을 기억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퇴행하는 사회를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대답해야 한다. 그것은 더 낡은 것으로 회기하려는 의도를 가진 자들과 맞서는 일, 그들의 실체를 까발리는 일, 정보화 시대의 리듬으로 현실을 대처하는 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옳은 방식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일 것이다. 먹고사는,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민주주의는 필요하다. 최소한의 것들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우리는 연대하고 행동해야 한다. 한홍구교수의 말처럼 "가만히 있으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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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9 1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9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9 2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동우 2010-07-07 0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가만있자... 이 글.
다음 답글 답니다, 기다리쇼, 굿바이님!

굿바이 2010-07-07 14:20   좋아요 0 | URL
꺄아! 겁나요, 동우님!

Tomek 2010-07-09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진자들의 욕망에 맞서는 일반인들은 살아가기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그래서 가진자들은 돈줄만으로는 모자라는지, 이제는 시간마저 통제하려고 하고요. 몸이 피곤하면 모든 것이 귀찮아지듯, 자연스레 정치와 제도에 관심이 옅어지는 것을 기대해서 이런 게 아닐런지. 국민이 백성이 되어가는 게 지금 한국 사회인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두 눈 부릅뜨고 지켜야지요. 국민으로 살아가기 참 만만치 않은 것 같아요! ^^

굿바이 2010-07-09 12:56   좋아요 0 | URL
그렇죠. 기득권자들의 욕망에 대항한다는 것이 참 만만하지 않습니다. 어지러운 소식들이 도처에 널부러져 있고, 새로운 독재의 냄새가 여기저기서 풍깁니다. 그런데도 뭐랄까 이것들과 맞설 무엇이 보이지 않아 더 난감한 시절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적어도, 그들에게 만만하게 보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두 눈 부릅뜨고 지켜야죠, 가만히 있으면 안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