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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1
최정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최정우의 <사유의 악보>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알 수 없다. 또한 나는 이 책을 꼼꼼히 정성스레 읽었음에도 서평을 쓸 수 있을까 포기해야 했을까. 또한 알 수 없다. 그러나 오직 하나. 내가 이 책의 서평을 쓰는 이유는 루소의 말을 빌려 "때로는 던진 조각이 바로 목표물에 맞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 의도는 반드시 그 목표에 도달한다"는 의심스러운 위로(물론 원문의 조각은 '악의'를 의미하지만)를 믿고, 그래서 뭐든 될 대로 되더라,라는 낙관을 믿고, 더 나아가 서평은 저자와 내가 나눈 대화를 기록하는 것이라는 자위에 기댔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글을 다 쓰기 전에 내가 던진 의도가 부메랑이 되어 자폭할 것임을 안다.

달려라 하니_서곡을 듣는다.

불가능, 폭력, 리셋, 조바꿈, 도돌이표, 오역, 초월, 정밀독해, 불확실한, 불편한, 비평적 농담, 분열, 파국, 중독, 유서. 서곡과 목차를 훑으며 잡아 둔 단어들이다. 저자는

     
  "이 모든 글들은 어쩌면 오히려 소위 '인문학적 사유'나 '철학적 깊이'의 저 진부하고도 암묵적인 강요에 대한 강한 의문, 곧 우리에게 사유해야 한다고 강요하는...자들의 저 역겨운 교훈과 무의식적 이데올로기 그 자체를 어떻게 사유하고 전복해야 하는가 하는 극단적이고 실천적인 질문으로부터 탄생한 기형과 잡종의 것들이다"   
     
라고 쓰면서 
     
  "이데올로기가 바로 그 이데올로기에 대한 해명과 폭로로써만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 우리 세대가 지닌....불안과 우울증에 대한 저 깊은 무감각은 그것의 직접적 원인으로 생각되는 것들을 파악하고 제시한다고 해서 절대 깨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여기 모인 글들은 모두 그러한 증폭과 심화, 때로는 어떤 '악화'를 위해서, 심지어 어떤 '폭발'을 위해서 작성된 것들이다"  
     
라며 <사유의 악보>의 서곡을 힘있게 연주한다. 서곡은 감동적이다. 품위의 그늘 따위를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발랄하고 집요하게 달려라, 달려라 하니처럼 달리되 결승점에서 멈추지 말고 냅다 쭉 가봐라, 경기의 룰 따위는 신경쓰지 말고, 이세상 끝까지, 끝이 시작점이 될 수도 있지만 달려라 하니야, 이렇게 독려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일단 달린다.    

달리는 하니_13개의 악장을 듣는다, 따라한다, 혹은 변주한다.  

     
  "신비하지 않은가, 때로는 가장 익숙한 것이 또한 가장 낯설게 날을 세우며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이 질문(들)은 아마도 '형식주의'에 대한 물음의 형태가 아니라, 더 적확하게는, 물음에 대한 '형식' 그 자체가 될 것이다" (5악장, 테제들의 역사를 위한 현악사중주_166)   
     
이 문장을 만나는 순간 본능적으로 나는 사유의 악보, 제 5악장을 쏘아본다. 그리고,
가장 익숙한 것이 가장 낯설게 날을 세우며 다가오는 순간, 익숙한 것의 날이 내 무능의 몸통을 깊숙히 찌르는 이 감각, 그래서 이 통증(들)은 아마도 '쪽팔림'을 가장하기 위한 어깃장의 형태가 아니라, 더 적확하게는, 불가능과 동거해야 한다는 '신비' 그 자체가 될 것이다,라고 혼잣말을 가장한 대화를 시도한다.
 
폭력, 저자는 소설 <부서진 사월>로 1악장을 시작한다. <부서진 사월>을 읽지 못한 나는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를 떠올린다. <부서진 사월>속에 형이 흘린 피를 회수해야 하는 아우가 있다면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속에는 아버지가 흘린 피를 회수해야 하는 아들이 있다. 이 작품들은 누군가 피를 흘리면 반드시 회수한다,는 상호주의의 원형을 보여준다. '상호주의' 명분 중의 명분이며 뒤끝없는 계산법의 으뜸이라고 발화하고 싶지만 그것이 폭력이라는 단어를 지시하는 순간 복잡해진다. 왜 복잡한가? 폭력의 상호주의는 무엇이 문제인가? 아니 폭력이란 무엇이며 그것의 시원은 어디인가? 그것이 문제라면 폭력은 어떻게 극복되어야 하는가? 누가 어떻게 무엇을 희생하고 용서하는가? 나는 신경증환자처럼 1악장을 또 쏘아본다. 그리고, 
나는 원효가 마셨다는 물 한 바가지를 마시지 않고도 내 복잡한 심중의 밑바닥을 본다. 머리를 다 비워낼 요량으로 생각을 게워내도 소용없음을. 나는 벤야민과 바타유를 최정우를 그리고 폭력의 아포리아를 끝내 온전히 해석할 수 없고 더는 어떤 생각도 적확히 밀어부치지 못했다. 그저 다만 어떤 '폭력'을 행사해야 하는지에 대한, '비폭력'의 미학 안에서 눈뜨기에 대한, '반폭력'의 불가능성을 직시함에 대한, 더 나아가 세계를 해석할 수 없다는 불가능과 동거해야 한다,는 감각만이 미친듯이 증폭하고 있소,라고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4악장 문학적 분류법을 위한 야구 이야기,를 듣는다.

     
  "푸코가 잘 보여주었듯, 새로운 분류법으로 인해 탄생하는 것은 곧 새로운 인식론이며 새로운 담론의 체계일 터. 그렇다면 이사만루와 무타무주 사이의 골이 가리키는 새로운 담론의 체계란 어떤 것일까(그런데 그것은 과연 '존재'하는가)?"(4악장,문학적 분류법을 위한 야구 이야기_144)   
     
낯선 질문과 마주하는 순간. '정지'한다. 정지는 이내 자연스럽고 고통스럽게 사유로 이어지고 내 머리속의 어떤 공 하나가 어떤 담장을 넘는다. 혹은 넘는다고 착각한다. 물론 이 질문에 나는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었지만, 그러므로 '실패'는 반복을 태생적으로 내제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실패'이후에 오는 '완성'은 실재로 내가 시도했던 그 무엇의 결과물이 아닌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이래서 '절멸'이 그리고 '복음'이 쌍을 이루어 세상을 떠돌고 있었군요,라고 나는 이미 놀랄 것도 없는 생각 한 자락을 끌어안는다.

이렇게 쓰니 <사유의 악보>가 독자를 미치게하거나 푸념하게 하는 책으로 비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어느 대목은 어찌나 즐거운지 로시니의 오페라를 듣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살짝 들려 드리면 이렇다.

     
  "신이 존재한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기독교에 비해, 없는데도 마치 '있는 듯이'제사를 올리는 저 공자의 유물론은, 그래서 얼마나 우월한가....그래서 저들은 신에게 아무것도 따질 수 없는 반면, 나는 어제 제사 내내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 변변찮은 영력을 지닌 조상님을 이것저것 따지고 대들 수 있었던 것이다(조상이 돌본다고?)" (7악장, 불가능한 대화를 위한 자동번역기_261)  
     
라든지
     
  "이상하게도 필요란 언제나 적당함이라든지 중간쯤이라든지 하는 것을 전혀 모른다. 언제나 필요는 그 이상을 필요로 한다. 필요는 그래서 무엇을 채우는 것이라기보다는 항상 비어 있는 곳을 찾아내고 만들어낸다....어쩌면 이를 두고 필요의 일반이론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요는 나로 하여금 욕망의 충족보다는 욕망의 결핍을 알게 해준다, 뼈아프게.(정신은 뼈다)." (7악장, 불가능한 대화를 위한 자동번역기_269)  
     
유쾌하지 않은가. 익숙한 것들의 전복.

여전히 달리는 하니_종곡, 입이 없는 것에 귀를 귀울여라, 그리고 뭐든 활용하라.

모든 악장에 대해 하나하나 공들여 대답하고 싶었고, 저자의 질문을 뒤집어 보고자 노력했다.
8악장 초월의 유물론, 변성의 무신론,은 박상률의 문학을 다시 한 번 읽고 하나하나 짚어보고 싶었고, 10악장 불확실한 광장에서 나눈 불편한 우정, 역시 승산은 없지만 거론된 작가들의 이야기와 여전히 떠돌고 있는 문학의 '순정성'에 대해 시간을 들여 다시 생각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들을 이 공간에 다 옮기는 것은 무리한 일이고, 어쩌면 죄다 '오답'만을 표기한 답안지를 들고 있는 그런 막막함과 쪽팔림을 경험하게 되는 일일 수도 있다. 실은 더 부끄러울 일도 없지만 그래도 나는 늘 내가 창피하고 창피하다는 사실이 또 창피하다.
 
여튼, 이제 종곡을 듣는다. 혹은 읽는다. 내가 내 생각들을 이렇게 딱 꼬집어 쓸 수 없는 사람이었는지 매번 호들갑을 떨며 놀라지면 역시나 또 놀란다. 그럼에도 종곡에서 얻은 어떤 한 문장이 있다면 그리고 마땅치는 않지만 굳이 애를 쓰며 표현한다면 그것은 '몰락'에의 권유, 흥건하지만 침묵하고 있는 여전히 뜨거운 피,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잠시 신형철의 어떤 글들이 떠오르기도 했고, 김영민의 어떤 독한 문장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여튼 나는 '몰락'혹은 '절멸'의 어떤 상태와 그것을 대해는 태도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유는 개인적인 것이라 접는다.
좌우지간에 이 한 권의 뜬금없고 독한 책은 너무 많은 것들을 '조근조근' '잘근잘근' 생각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함께(나는 '중독'이라고 쓰여있는 글자들을 '함께'라고 읽었다) 보자고 꼬시는 것 같았다. 그 유혹에 화답하기로 작정은 하였으나 언제 체념이라는 놈이 역습할 지는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동시에'맹인직문'이라는 말이 있듯이 어쩌면 나는 어떤 문을 그것도 정문을 통과할지도 모른다는 맥락없는 희망을 품는다. 알면 다치고 모르면 썩겠지만, 그 중간에 어떤 샛길이 있지 않을까. 이사만루와 무타무주 사이의 공처럼. 팽팽한 긴장의 샛길. 뭐 그런.  

사족1 : 저자의 어떤 문장들은 시인의 것이었다. 옮기고 싶지만 아까워 싫다.
사족2 : 이것은 서평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글이지만 더는 쓸 수 없다. 나는 늘 실패하니까.
사족3 : 책 274쪽의 포스터, 불온삐라를 보면 즉시 신고합시다!를 본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삐라뿌리듯이 뿌릴 것이다. 삐라를 줍는 긴장과 즐거움을 아니까. 실제로 나는 5살에 송추에서 삐라를 한 바가지 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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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치 2011-05-03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으, 저에겐 왠지 무시무시한 책이에요 ;; 인용하신 문장들로만 봐도 도저히 한국어로 사유한 것 같지가 않아서 ...

굿바이 2011-05-04 14:25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그럴리가요 저도 읽었는데요~
한국어로 사유하지 않은 것 같다,는 말씀 무슨 의미인지 대충은 알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한 번 읽어보셔요. 제가 읽은 책을 보내드릴 수도 있는데, 워낙 밑줄이 많아서... 읽고 싶으시면 말씀하세요. 삐라 뿌리듯이 선물해 드릴께요.

람혼 2011-05-05 09:52   좋아요 0 | URL
또치님, 반갑습니다! ^^ 안 그래도 '한국어'와 관련된 이런저런 불평들(?)을 듣곤 하는데요, 이에 관해 제 입장을 말씀드리자면, 제가 특히 제 책 5악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저는 '순수한 한국어'란 없다는, 따라서 더 일반적으로는 '순수한 국어'란 없다는 기본적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고유의' 한국어라고 알고 있는 것 역시 넓은 의미에서의 '번역', 곧 언어들 사이의 어떤 '이행'을 통해 성립된 것이고 이는 현재 여러 나라들의 '국어'들 또한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고로 '순수한 한국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국민국가가 존재할 수 있기 위한 환상의 장치라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이 자체가 나쁜 것은 물론 아니지만, 여기에는 사유할 거리가 대단히 많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제 책이 "한국어로 사유한 것 같지" 않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아마도 제 책 자체가 그러한 '한국어'의 환상에 도전하고 시비를 걸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 문체도 그러하고요.

반딧불이 2011-05-03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쓰셨군요. ㅋㅋ

굿바이 2011-05-04 14:26   좋아요 0 | URL
네 ㅜ.ㅜ
반딧불이님의 글도 무척 기대가 됩니다^^

람혼 2011-05-04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스스로는 시인의 영혼으로 쓰고 싶다고 생각하여 쓴 문장들이 있었는데, 그 점을 알아봐주시고 느껴주시니 어떻게 감사와 공감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야말로 늘 어떤 실패가 예정된 오답의 길을 간다는 느낌을 갖고 있는데, 아마도 바로 이 점이 제가 계속 중독의 이중적 의미를 권유하고 또한 항상 어떤 몰락의 오솔길을 권유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들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므로 이렇듯 깊은 감정이입과 선연한 동병상련을 느끼게 해주는 소중한 글을 만났을 때, 저는 어쩌면 오히려 묘하고 짠한 어떤 연대의식을 느끼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깊고 섬세하게 읽어주셔서, 그리고 그 결을 따라 새롭게 또 다른 사유의 길을 내주셔서, 깊이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렇지만 너무 하십니다'라는 태그에서는 실로 오랜만에 파안대소했습니다.^^

또치 2011-05-04 12:29   좋아요 0 | URL
허걱;; 저자가 보고 계신데 난 바보 인증을 했어 ㅠㅠ
저는 람혼님 책은 까막눈이라 못 읽지만 레나타 수어사이드 음악은 무척 좋아합니다. <단식광대>랑 <경성연가> 자주 흥얼거려요. 음반 기다린 지 오래됐습니다. 내시면 제가 석 장 삽니다. (다른 분 서재에서 막 생떼..)

굿바이 2011-05-04 14:36   좋아요 0 | URL
람혼님 제가 웃겨드린 거 맞나요? 이거 좀 신나는데요~^^

우선, 책 정말 잘 읽었습니다. 제가 아는 것이 짧아 그 재미와 울림을 고스란히 느낄 수 없음이 아쉽고 민망하고 그랬습니다. 물론 그렇기에 자극을 받을 수 있고 조금이라도 더 알아가려고 애쓰겠지만 언제나 후회스럽네요. 무지는 나의 힘,이라고 떠들 일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어떤 문장들은 시처럼 울림이 컸습니다. 물론 음악을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감성의 섬세한 결을 갖고 있으리라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이러시면 안되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열등감에 폭발할 지경이었습니다. ㅜ.ㅜ
여튼, 앞으로도 건필하시고 좋은 음악도 많이 들려주시길 바랍니다.
또치님이 음반 기다리고 있습니다. :)

람혼 2011-05-05 09:55   좋아요 0 | URL
또치님: '바보 인증'이라뇨, 무슨 말씀을... 관심 가져주셔서 얼마나 감사한데요.^^ Renata Suicide의 음악을 좋아해주셔서 너무 반갑고 감사합니다. <단식광대>와 <경성연가>를 좋아하신다니, 제게 너무 큰 기쁨이고 영광입니다. 조만간 단독 공연을 한 번 할 텐데, 그때 찾아주신다면 너무 반갑고 즐거울 것 같습니다.^^ 앨범은 준비 중에 약간의 난항을 겪고 있는데, 아마도 올해 안에는 발매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봅니다.^^

람혼 2011-05-05 10:02   좋아요 0 | URL
굿바이님: '이해할 수 없음'이 일종의 서론이자 결론으로 제시되는 리뷰들도 아주 가끔 보면서 저자로서 일종의 작은 절망을 경험하곤 했는데요, 반대로 굿바이님처럼 섬세하고도 창조적으로 읽어주신 리뷰들을 보면서 정말 큰 힘을 얻게 됩니다. 제게 다음 글을 쓸 수 있는 커다란 원동력을 주셨습니다. 이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저는 책 뒤에 숨지 않고 계속 이렇게 '등장'해서 제 책에 서려(?) 있는 난해함의 요소들을 많은 분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해소하고 싶은, 아니 어쩌면 더욱 심화시키거나 증폭시키고 싶은, 심지어 악화(?)시키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제게 그 심화, 증폭, 악화란 아마도 독이 약이 되는 변성의 과정일 것입니다. 그 변성의 대화와 이야기들이 제게 소중한 이유입니다. 우리의 이 대화와 이야기들이 삐라처럼 창궐하기를, 함께 기원합니다! ^^

쉽싸리 2011-05-04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데요.(순전히 질투심때문에 좀처럼 추천을 하지 않는 저이지만 클릭합니다. ^^)

맹인직문의 겸손을 말씀하셨지만 '정문'을 돌파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아니, 벌써 돌파하신거 아닌지 싶습니다.
여러가지 화두(치고는 좀 많지만)를 던져준 람혼님 덕분에 이 봄이 더 풍요로워 진것 같습니다.

삐라는 주워서 어찌케 하셨어요?

굿바이 2011-05-04 14:44   좋아요 0 | URL
좋다고 말씀해 주시니 정말 좋은데요 :)

정말 람혼님 덕분에 이 봄이 한결 풍성해진 느낌입니다.

송추에 몇 개월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 근처에 산이 있었습니다. 여튼 그 산 정상에 군부대도 있었던 것 같아요. 삐라를 줍다가 산에서 길을 잃었는데 다행히 군인 아저씨들을 만났답니다. 무지하게 서럽게 울면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삐라를 줍다 길을 잃은 저를 집까지 데려다 주세요'라고 했습죠~ 제가 주운 삐라 한 바가지와 저를 동시에 바라보며 어이없어하던 군인아저씨들의 모습이 잊혀지질 않네요. ㅋㅋㅋㅋㅜ.ㅜ

람혼 2011-05-05 10:03   좋아요 0 | URL
하하하, "조국과 민족을 위해"! ^^ 굿바이님의 유머 감각은 정말 발군입니다! 또 다시 크게 웃었어요.^^

웽스북스 2011-05-12 01:27   좋아요 0 | URL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삐라를 ㅋㅋㅋ 아 언니, 진짜 그랬어요?
그 애국소녀가 어쩌다 이렇게.... (응?)

ㅋㅋㅋㅋ 암튼 완전 웃겨요 ㅋㅋㅋ

꽃도둑 2011-05-04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쪽 좀 팔아도 되겠습니다...^^
람혼님도 쪽 팔고 다니시는데....굿바이 님도 같이.....ㅎㅎ(오해는 마세요..얼굴을 알려라 뭐 그런, 그럴 자격이 된다는 말입니다)
글 좋은데요. 서슬퍼런 칼로 아주 토막토막을 내셨군요. 난 그럴 엄두도 못내었지요.
그냥 퍼런 숲만을 보고 말았지요...아주 퍼렇고 구석구석 누리딩딩한! ㅡ.ㅡ

굿바이 2011-05-04 14:51   좋아요 0 | URL
퍼렇고 구석구석 누리딩딩한! ㅎㅎㅎㅎㅎㅎ 꽃도둑님 표현에 졸음이 쏙 가시게 웃었습니다.

이제야 다른 분들 글을 읽습니다. 집에 일이 좀 있어서 서평도 늦어졌구요.
여튼 마지막 책까지 즐거웠습니다. 그나저나 다른 이유로도 충분히 쪽팔려서 더는 팔아먹을 얼굴도 없습니다. 엉엉~

람혼 2011-05-05 10:04   좋아요 0 | URL
꽃도둑님 말씀대로, 제겐 이렇게 함께 '쪽을 파는' 일이 정말 즐겁고 소중합니다.^^ 모두, 너무 섬세하고 세심하게 잘 읽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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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리영희 평전>을 가장 달가워하지 않을 사람을 꼽으라면 박씨 일가도 아닐 것이며, 요란한 기소장을 썼던 D검사도 아닐 것이다. 아마 리영희선생 자신일 것이다. 물론 선생은 이 책을 무척 기다리셨다고 했으나, 이 책이 그저 시대가치를 등에 업고 여전히 그것들을 자양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들먹이는 무슨 호적부쯤이 된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는 이 책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내 억측일 수도 있으나 나는 그리 믿는다.  

그가 정신적, 육체적 피로를 토로하며 한 시대의 전면에서 물러섰을 때,

"내가 할 일은 다 했고, 남은 역할은 내가 변치 않고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있어 주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라고 그의 책 <대화>에서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 하나로도 가슴 벅찼지만, 저항하고 고발하는 지식인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두렵고 서운하였다. 욕심이었고 파렴치한 생각이었지만 이 시절에도 계속 스승은 살아서 작동해주길 바랬다. 강준만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장기집권'을 원했다. 그러나, 2010년 겨울 시끄러운 세상속에는 선생의 부음 소식도 끼어 있었다. 마음이 헝크러지는 날들이었다.    

리영희선생에게 있어 '생각한다'라는 말과 대비되는 말은 '우상'이었다. 선생이 평생을 혼자 치열하게 싸워온 것도 그것이었다. 리영희선생이 '우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종교의식에서 쓰이는 숭배되는 어떤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숭배하는 그 무엇에 대해 생각할 수 없음, 말 할 수 없음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체로 이런 것들은 그것이 전통의 이름을 달고 있건, 종교의 이름을 붙이고 있건, 정치적으로 처벌되는 무엇이건, 사회안에서 암묵적으로 동의한 관행이건, 나름의 체제를 만들고 폭력적인 방법(여기서 폭력이란 타인에게 자신의 혹은 사회적 취향을 강요하거나 굴종할 수 밖에 없는 처지를 깨닫게하는 과정까지 포함한다)을 동원해 사유를 금기시한다. 그리 생각하면 우리는 여전히 '우상'과 '헛것'이 판치는 아수라판을 살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고병권씨는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전제나 토대에 입각해서 추론하는 일이 아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우상을 파괴한다는 것은 사유의 전제까지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라고 정의했다. 나는 여기서 리영희선생의 스승됨을 본다. 그로부터 의식을 각성당한 한 지식인은 스승의 역사적 기억을 자양분으로 이렇게 반듯하게 세상을 향해 그리고 그의 학생들에게 말할 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리영희선생의 힘이라고 믿는다. 단순히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과할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 용기가 되어주는 선생, 세상에 그런 선생은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책과 그의 말과 그의 행동을 보며 부르르 떨고, 울고, 악을 쓸 수 있었던 그들이 나는 내심 부럽다. 물론, 그 시절을 내게 살아내라고 했으면 나는 어떠했을지 말하지 않아도 내가 더 잘 안다. 나는 무뇌충으로 살았거나, 술주정뱅이가 되었을 것이다.  

여튼 내가 대학에 다니던 무렵, 우리는 무작정 출처도 정확하지 않은 쎈 것들을 읽었고, 쎈 것들을 말하는 것이 뭔가 더 알고 더 나아간다고 생각했었다. 심지어 왼쪽에 모여있는 사람들끼리 '입으로만 싸우는'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는 했다. 얼굴을 들기 민망한 시절을 산 셈이다. 그리고 그 결과 밑둥없이 부유하는 그래서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는 어른이 되어, 그저 산 목숨 하나를 지키기 위해 생계라는 슬로건 아래에서 눈을 감기 바빴고, 우상에 절하고 침바르는 일을 알아서 하느라 바빴다. 그러면서 입은 여전히 살아 있어 늘 봄이 오지 않음을 투덜거렸다. 어쩌면 아예 봄이 올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고. 

"다소는 외람되고 조금은 자화자찬격인 평가지만 1980년대에는 나의 글과 책이 거의 무용지물이 되었다. 60~70년대에 나의 글들이 지녔던 일정한 의미와 역할은 거의 지양되고 초극되었다. 얼마나 반가운 발전인가! 이를테면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의 역할을 했다는 셈일까? 그렇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냐!"

리영희선생이 <30년 집필의 회상>에 남긴 글 일부다. 물론 이 글은 6월 항쟁의 과정에서 각성된 민중,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모든 영광을 그들에게 돌린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의 청년들은 그 바탕에 선생의 글이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2011년의 우리는 반가운 발전이라는 말을 과연 들을 수 있는 처지에 놓인 것일까. 

최장집교수가 그의 책<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서 밝혔듯이, 한국사회는 질적으로 민주화 이후 더 퇴보한 것 같다. 질적으로 물러섰다라는 말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지 그것을 통계적으로 들이밀 수는 없지만, 민주화 이전의 사회적 패권이 민주화 이후 또 다른 소수에게 옮겨 갔음을 짐작할 수 있는 예들은 차고 넘친다. 게다가 그들은 훨씬 명민해졌다. 이런 시절 선생의 퇴장은 일견 더 한 꼴을 보지 않으셔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이제는 어찌해야 합니까,라는 혼자말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는 양심도 없이 등대가 서있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면서 또 양심도 없이 모든 유적지가 그러하듯이 나는 그 자리가 그저 관광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을 갖는다. 역사적 기억으로서, 교훈의 자리로서, 각성의 불빛으로서, 전략을 끌어낼 수 있는 성지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너무 견고하고 높기만 했던 선생, 어디선가 멀고 먼 나라에서 온 것만 같던 선생님, 편히 쉬십시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어느 순간 선생마저도 의심해보자고 달려들 수 있도록 깨어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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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1-03-02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 님은 매일 이렇게 각성하고 반성하고 깨어 있고자 애쓰는데, 휴 얼굴이 갑자기 화닥화닥. 저도 어서 정신 차려야겠어요.

굿바이 2011-03-02 15:42   좋아요 0 | URL
어어어엉엉 ㅜㅜ
얼마나 사람이 모질라면 이러겠어요, 맨날 반성문 쓰는 사람 중에 뭘 잘하는 사람이 있을라구요. 그래도 다른 건 몰라도, 몰려다니면서 남들 괴롭히고 조롱하는 사람으로는 안살거예요. :)

잘잘라 2011-03-02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영희 선생님을 생각하는 님의 그 각별한 마음에 끼어들 이유도, 여지도 없지만, 이 말은 꼭 하고 가야겠어요. 참 멋진 리뷰예요!

굿바이 2011-03-04 10:42   좋아요 0 | URL
참 멋진 날이죠! 날은 여전히 찬데, 하늘을 참 맑네요.
부스러기같은 글인데 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흰그늘 2011-03-02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서적이나, 사회과학서적이나, 철학서등을 잘알지도 못하고, 읽어보지고 않은 저로서는
뭐라.. 할말이없이 그저.. 부끄럽고.. 송구스럽습니다.

저는 그냥, 단지.. 노래들이 좋았었어요.. 김지하씨의 '시'를 노래한 '새'가 좋았고,
'타는목마름으로'가 좋았고, '그날이오면'과 '함께가자 우리이길을' 등과 같은 민중가요들을 들으며.. 그시절들을 어렴풋 생각했었어요.. 풋풋했던 90년대에는 조국과 청춘의 '나의소망' 을 듣는데.. 정말. 아프더라구요..

하여..
늘.. 너무 감정적이고, 감상적이지는 않았나 싶어요 어두운 극장에서만 아파하고 울고, 웃고
그랬던것은 아니었나 싶어서요.. 이제라도.. 정신의 빛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음을 알며 보지못했던 많은 부분들을 잘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굿바이 2011-03-04 10:48   좋아요 0 | URL
어쩌면 그냥, 단지 좋아할 수 있는 것들, 애정의 경지라는 것이 있다면 그런 마음이 최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민중가요라는 것을 들으며,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을 들여다 보기도 하고, 그 세상속에서 아파하기도 하고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때는 뭘 몰라도 너무 몰랐는데 말이죠.

오늘 유난히 하늘이 좋네요. 흰그늘길님도 맑은 하늘아래서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동우 2011-03-05 0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굿바이님.
내가 그나마 쎈것들을 접한건 겨우 마흔쯤이었습니다.
마흔도 멀었을 굿바이님은 이미 쎈 생각들 그 너머 것들 쎄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시는데..

굿바이 2011-03-07 11:24   좋아요 0 | URL
동우님! 부산의 봄은 어떤까요?
태어난 곳이 그곳이라 그런지, 마음이 허하면 그렇게 부산이 아른거립니다.
고향을 마음에 두는 사람은 좀 모자란 사람이라고 유명하신 분들이 말씀하던데, 모자란 사람이라 그런지 저는 유년기의 기억이 묻혀있는 곳들을 쉽게 떨칠 수가 없네요.

동우님에게 쎈(?)것들은 무엇이었을까요? 감히 가늠도 안됩니다 :)
 
<반자본발전사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반자본 발전사전 - 자본주의의 세계화 흐름을 뒤집는 19가지 개념
볼프강 작스 외 지음, 이희재 옮김 / 아카이브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리뷰를 작성하기 위해 제목을 고민하다가, 언젠가 홍세화선생님께서 술자리에서 흘렸던 말씀이 떠올랐다. "이성으로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서 낙관할 수 있다" 아마 그즈음 나는 이성도 아닌 감성으로 세상을 비관하고, 주위에 침을 뱉고, 속으로 악을 쓰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쪽팔리고 한심하지만, 공부도 사유도 그 끝을 가보지 못한 나는 어디에도 쓸모없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여하간, 그 시절 내 최대 낙관은 어서 빨리 종말로 가세, 정도 였다.

그리 긴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지만, 다시 이 책<反 자본발전사전>을 읽으며 그 때의 어리석음을 복기했던 것은 내가 얼마나 치열하게 공부하지 않는 인간이었으며 더 나아가 여전히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것을 주장할 때, 혹은 내 신념이 무엇이다,라고 말할 때 그것을 설명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없는지, 혹은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발화했던 부분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생활우파에 속했던 것은 아닌지 점검했어야 했는데 늘 나는 게을렀다. 심지어 비관적이었고.  

책은 19가지의 개념으로 나뉘어져 있다. 개념 하나하나가 내게는 매우 유용했고, 어떤 호소는 애틋했다. 책의 첫 장은 [발전, 두 개로 나뉜 세계]라는 개념으로 글을 풀고 있는데, 그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말이 가슴을 친다.  

"문명의 수준을 생산의 수준과 동일시하고 하나로 융합된 것이 발전이다. 트루먼의 연설 이래로 세계 20억 인구는 저발전인이 되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온갖 다양성을 잃어버리고 남들의 현실로 자기를 비추는 뒤집힌 거울로 일그러졌다." 

우리 사회도 70년대 이후 경제적 가치는 모든 사회적 존재의 형식이 지닌 가치들을 폄하하거나 부끄러워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경제적 가치를 실현할 수 없었던 존재들을 무기력한 개인으로 몰아세우곤 했다. 그 결과물에 대해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발전이라는 논리앞에서 무차별하게 얻어맞은 것들을 떠올리면 치근이 욱씬거린다. 물론, 여전히 상황은 진행 중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두들겨 맞는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저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라는 말로 스스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죄인이기에, 우리 모두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 것이 그저 나만의 곡해일 수도 있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발전과 경제적 가치라는 헛것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두들겨 맞아야만 우리 모두 죄인이었다는 고백이 살아서 작동할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쉽게 그리고 자주 죄인임을 고백하기만 했던 나를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하다.

세 번째 개념으로 소개된 [평등, 발전이 약속하는 먼 미래]를 좀 더 들여다 보자.  

"빈곤층의 가난은 부유층의 풍요를 만들고, 빈곤층의 굴욕은 부유층의 자부심을 낳고, 빈곤층의 의존성은 부유층의 자립성을 낳는다. 따라잡기를 통한 평등은 현실의 불평등을 조직하고 합리화하는 신화에 불과하다."

평등과 관련해 소개된 레인즈버러의 정의는 이렇다. "나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못사는 사람도 가장 잘 사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살아야 할 삶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레인즈버러의 발언은 사람은 살아야 할 삶이 있다는 똑같은 실존적 과제에 직면한 존재라서 평등하다는 것이다. 즉 다른 개념들이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따라서 공동체의 재화가 분배되는 과정에 있어 똑같이 살아야 할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공동체가 어떻게 이해하고 분배하느냐에 따라 공동체에 속한 각 개인의 삶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이 모든 것들을 균일하게 배분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더 나아가 불평등의 문제 특히 빈곤의 문제는 위의 인용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것을 발전이라는 신화에 묻어가는 형태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사회적 상상력을 동원해 빈곤이 아닌 과잉의 문화를 바꾸자,라는 지점에 방점을 찍는 것이 훨씬 빠른 그리고 효과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가치관을 들이밀어야 가능해지는 것인지는 지금부터 끊임없이 고민하고 공부해야 할 대목이겠다. 

네 번째 개념으로 [도움, 세련된 간섭]편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구원에 미친 사람들 때문에 살아가는 데 숨이 막힌다. 모두가 모두의 삶을 고치겠다고 나선다. 세상의 길거리와 병원에는 개혁가가 흘러넘친다. 사회는 구원자들이 우글거리는 지옥이 되었다." 

봉사자들의 자기위안과 자기과시를 몽땅 빼고 이야기하자고 하면 할 말이 없다고 했던 것 같다. 타인의 뱃속까지 검열하기에는 늘 피곤했다.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고 도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그들을 기꺼이 링크해줬다.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지만 일단 사람부터 살리고 보자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내 입장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무엇인가에 쫓기듯 행동하다 보니 중요한 것을 놓쳤다. 그것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서있는 지점, 즉 기만적인 사회적 조건이었다. 어쩌면 나는 내심 그것들을 긍정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착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모든 도움이 자구를 위한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이것 역시 발전이라는 개념안에 갇혀있다면 그저 세련된 형태의 간섭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것이 한 개인의 문제이건 사회의 문제이건 발전이라는 것을 미리 염두해 둔다면 이미 도움이라는 것을 불신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이 부분만큼은 특별히 명민한 두뇌와 뜨거운 가슴을 소유한 그대들의 전복적 상상력이 필요한 대목이겠다. 나는 정녕 모르겠으니. 

책에 소개된 자본주의의 세계화 흐름을 뒤집는 19개의 개념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전부 소개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지만 그것은 이 책을 참으로 욕보이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공부도 짧고 의지도 박약하고 글도 만신창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꼭 하고 싶은 말은 읽어보시라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익히 알고 있거나 사유한 것들일 수도 있으나, 이제 막 움트는 청춘들에게는 한 번쯤 권하고 싶은 책이다. 청춘이 아니더라도 오늘과 다른 내일을 꿈꾸는 그대들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마지막으로 열 여섯번째 개념으로 소개된 [사회주의, 오해와 오류의 역사]라는 편에 실린 한 구절을 적는다. 

"사회주의 전통은 자본주의에 갇힌 상상력을 벗어나게 해주었으나 점차 수많은 개념상의 어려움과 의미 전달의 어려움, 역사적 하중을 견디지 못하는 상투어가 되었다."  

이 문장을 옮기는 것은 자본주의적 발전을 줄기차게 공격했던 사회주의가 어찌 몰락할 수 밖에 없었는지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그것의 해답은 자본주의적 특징이었던 사회적 환원주의의 덫에 갇힐 수 밖에 없었던 사회주의자들의 한계, 즉 하나의 사회적 패권을 또 하나의 사회적 패권으로 바꾸는 수준에 머물렀던 개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또 하나는 사회적 다양성이라는 주제를 제대로 짚어내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서구식 자본주의에 맞서 싸울 사람들이나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상상하는 사람들이 간과해서는 안될 지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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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02-28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평가단 리뷰를 몰아서 읽을 수 있는 월말이라 좋다는 생각을 했어요. 님의 리뷰를 읽으면서요.

[인문/사회] 분야는 책을 읽기도 어려울것 같고 리뷰를 쓰기는 더욱 그렇겠고 해서 평가단 지원 생각조차 못해봤어요. 그런데 사실 오늘 이 책에 대한 평가단의 리뷰를 읽으면서 '후아.. 인문사회분야 책은 책도 읽기 어렵더니 리뷰 읽기도 만만챦네' 그랬거든요.

그런데 님의 리뷰를 읽고는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처음으로, 이 책을 읽어보고싶다는 생각이 드는 리뷰예요. 감사드려요. 좋은 리뷰 써주셔서..

굿바이 2011-03-02 09:59   좋아요 0 | URL
책은 읽어보셔도 될 듯 싶어요 :)
그리고 좋은 말씀 제가 더 감사드리구요~

다음에 한 번 [인문/사회] 신간평가단 지원해 보세요. 저는 신간평가단 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이 제가 좋아하는 책만 읽지 않고, 다른 분들이 추천해주시는 책을 볼 수 있다는 점이었어요, 결과적으로 좋은 경험이었구요. 그러니, 메리포핀스님도 한 번 도전해 보세요.

꽃도둑 2011-02-28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굿바이 님 리뷰 마이 아주 마이~ 기다렸어요. 왜 안올라오지 하고 걱정했더랬어요.
무슨 일이 생긴걸까?...하고.
반갑네요...^^ 별 다섯 개 따서 오느라고 늦었군요...
문장 사이사이 굿바이님의 한숨 소리가 새어나오니 이 어인 일?...
자신에 대해 너무 심하게 반성한 건 아닌지.... 이성으로 비관해도 의지로서 낙관하실거죠?..ㅎㅎ
이번 저는 이 책에서 평등이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동질성이라는 걸 새삼! 절실하게 깨닫고는 소름끼쳤지요...ㅡ.ㅡ

굿바이 2011-03-02 10:02   좋아요 0 | URL
실은 좀 아팠습니다. 감기 바이러스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으며 날이면 날마다 코를 푸느라 도통 뭘 할 수가 없어서, 은혜로운 신간평가단 담당자님께 리뷰연기를 요청하고 이제야 올립니다.

제 한숨 소리가 들리시나요? 이렇게 쉽게 들켜서야 ;)
꽃도둑님의 리뷰를 얼른 읽으러~~ 갑니다요~~^^

2011-02-28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02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빵가게재습격 2011-02-28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처음 인사드리네요.^^)

굿바이 2011-03-02 10:0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허접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반딧불이 2011-02-28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이렇게 반성과 성찰로 이어져야 하는데 마감에 쫓겨 내용요약에 그친 것이 부끄러워지는 리뷰, 감사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굿바이 2011-03-02 10:08   좋아요 0 | URL
다른 분들에 비하면 늘 부족한 글인데, 이렇게 좋은 말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번 달에 리뷰가 좀 늦어졌습니다. 이제야 다른 분들 글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반딧불이님의 글도 빨리 보고 싶네요. 지금 갑니다. 슝~

치니 2011-03-01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관심 팍팍 가는 내용에 옮긴이도 이희재 선생이라니! 꼭 봐야겠습니다.

굿바이 2011-03-02 10:11   좋아요 0 | URL
그렇죠, 역시 번역자를 알아보시는~! 책을 읽기 편했어요. 어떤 문구나 단어는 좀 교체했으면 좋겠다 싶었지만, 꽤 많은 분량의 책을 술술 읽게 만드는 힘이 있었어요. 좋은 번역가는 역시 다르더이다~:)

흰그늘 2011-03-02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술을 마시던 예전을 떠올려보면, 그 무언가에 대한 낙관은 술에 취해버린양 몽롱해지고,
아슴프레하듯 얘기들은 들려오는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고 눈마저 서서히 감겨오는데..
비틀거리기까지하고.. 토해내고.. 그렇더라구요.. 적어도.. 저는..

한데.. 비관적일수록 어떤날의 비관은 때로는 섬뜩하리만치 확고한 하나의 신념처럼 정신이 맑아지며 우리나라가 불렀던 '처음의 마음' 의 노래소리처럼 의지마저도 꿈틀꿈틀 거리더라구요.. 박경리 선생님의 '양극' 이라는 '시'를 마음에 담았던 날이 있었는데 오늘은 불현듯
'두더지같이 땅을 파며 창공의 비상을 본다' 던 그분의 말씀이 떠오르네요..

굿바이 2011-03-04 10:51   좋아요 0 | URL
박경리작가가 떠나고 그 분의 글들을 조금씩 다시 열어보니 제가 그간 보지 못했던 것들이 있었어요. 어떤 시간들을 어떤 굴곡들을 살아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그런 글들이 거기 있었는데, 이제야 그것들이 보입니다.
박경리작가의 시는 읽어본 적이 없었는데, 한 번 읽어보려고 합니다. 적어주신 글이 참 좋네요.

동우 2011-03-05 0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늙은 보수꾼 나는 고작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順자본을 뇌까립니다.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지배한다'는 명제.

하하 굿바이님.
무식한 답글 용납합시사..

굿바이 2011-03-07 15:29   좋아요 0 | URL
보수가 동우님같은 분들에게 붙는 수식어라면 저도 보수로 전향합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 정말 몸으로 체득했던 시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아브람 노엄 촘스키.미셸 푸코 지음,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미술시간, 정물화를 그린다. 쟁반 위의 과일 몇 개, 똑같은 것을 보고 스케치를 시작했고, 색을 입혔다. 수업시간이 끝날 무렵 확인한 바에 의하면 50명의 그림은 달랐다. 같은 것을 혹은 비슷한 것을 바라보는데, 어찌 그들의 그림은 다른 것일까? 그들은 보이는 것을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린 것을 보기 때문을 아닐까.  
촘스키와 푸코의 토론을 지면으로 확인하면서 비슷한 의문이 생겼다. 두 학자는 '인간성'에 대한 이해가 왜 다른가? 억지스러울지 모르나 50명의 그림이 조금씩 혹은 제각각이었던 것과 같은 이유에서일까? 그렇다면, 두 분의 어르신은 보이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발화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네덜란드, 1971년 촘스키와 푸코의 대담, '인간성'에 대한 논쟁을 시작으로 언어와 정치의 관계, 담론분석에 있어 권력의 역할이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오간다. 팔은 안으로 굽을 때 자연스럽다고 했던가. 내 마음대로 안으로 굽는 팔에 해당하는 푸코의 입장에 훨씬 많은 밑줄을 긋는다. 예를 들면 이런 주장이다.
"진리는 권력과 무관하다거나 권력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혁파하는 것입니다. 그 기능과 역사가 의심스러운 신화에 따르면, 진리는 자유로운 영혼에 대한 보답이고, 오래 견딘 고독의 자식이고,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는 데 성공한 사람들의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진리는 이 세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합적인 형태의 제약에 따라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의 주기적인 효과를 유도합니다. 각 사회는 진리의 체계가 있고, 진리의 '일반 정치학'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 사회가 받아들여 진리로서 기능을 발휘하게 만드는 담론 유형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푸코는 우리가 왜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는지에 관해 지대한 관심을 둔 셈이다. 요즘 세간에 유행하는 '정의'의 개념에 대해 내 안으로 굽는 팔인 푸코는 다시 이렇게 주장한다.
"제가 보기에 정의라는 개념은 특정 정치, 경제 권력의 지배 수단으로서 혹은 그러한 권력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여러 다른 유형의 사회에서 발명 유통된 개념입니다." 
소쉬르가 언어를 기호라고 했을 때, 내가 소쉬르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래서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임의적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정의'의 정의로 가장 알맞은 것이라고 나 역시 합의하고 싶어진다. 그것도 알아서 열광적으로.

여튼, 이 주장에 관해 촘스키는
"저는 인간성의 내부에 뭔가 절대적 기반이 있다고 봅니다. 물론, 당신이 그 근거를 내놓으라고 한다면 저로서는 곤란해질 겁니다. 구체적으로 그려낼 수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아무튼 '진정한' 정의 관념이 인간성의 바탕에 까려 있다고 보는 겁니다." 라고 응수한다. 이렇게 두 어르신의 입장 차이를 놓고 보는 일은 한 번도 제대로 궁리해보지 못한 논제들을 끙끙거리며 생각해야 한다는 귀찮음을 동반하지만 그럼에도 흥미롭다. 잠시 내 성향이 의심스러운 대목이지만 말이다.
여하튼 촘스키는 뭔가 인간성에 바탕을 둔 정의로운 사회를 진단한다면, 푸코는 철저히 현실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따라서 촘스키를 관념론과 연결지을 수 있다면, 푸코는 경험론에 줄을 댈 수 있겠다.  

이쯤되면 무엇을 말하든 두 어르신은 흥미진진하게 대립각을 세우겠지만, '인간성'과 '사회의 진보'라는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방점을 찍고 있는 두 어르신 덕분에 독자는 위의 주제들을 입체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셈이다. 고마울 따름이다.
선행학습이 없다면 쉽게 읽힐 책이 아닐 수도 있다.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혹여 이 책을 읽으실 분들 중에 나와 같이 선행학습이 부재하다면, 책의 1장부터 읽지 말고 2장부터 6장까지 촘스키와 푸코가 각각 주장한 내용을 먼저 읽고, 마지막으로 1장을 읽으면 훨씬 수월하게 읽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는 처음부터 읽었다. 몰랐으니까. 무지는 나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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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7 1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27 13: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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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7 20: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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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8 10: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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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8 15: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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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1-01-27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무지는 나의 힘이다 라는 말에 한 표 던집니다.
무지하면 원래 막 우기면서! 막가파로 밀고 나가는 용감한 쪽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소크라테스(?) 그쪽에 발을 담그고 있거나... 둘중에 하난데....흠,,,굿바이님은 어느쪽인지 알수가 없단 말야요..ㅡ.ㅡ
사실 저도 무지가 힘인데....^^

굿바이 2011-01-27 13:44   좋아요 0 | URL
ㅋㅋ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둘 다 입니다~~

이거 무슨 조직이라도 결성할까요?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할 것 같은 :)

흰그늘 2011-01-27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 한해는 책을 거의 읽지 못할것만 같은 저로선 읽어보고 싶은 책들에 대한 글들을 보는 것으로 나마 나름 위안을 가져 봅니다. 살아가다 보니 그렇더라구요 어떤 무엇은 그 무언가에 의해 더더욱 확고해져 가기도 하고, 그 무언가는 어떤 무엇에 의해 전복되어져 버리기도 하던걸요..

위의 글만을 읽어보는 이 순간의 저는 '인간성의 내부에 뭔가 절대적 기반이 있다고 봅니다
물론.. 이하생략.. 촘스키 어르신의 이 부분에 그냥 마음이 가네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내일이면 어떻게 변할지는 또.. 모를 일입니다..^^

굿바이 2011-01-27 13:4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흰그늘님!

그렇죠, 살다보면 어떤 것들은 윤곽이 뚜렷해지기도, 흐릿해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촘스키씨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이해하지 못한 저의 무지가 원인이겠지만, '인간성의 내부에 뭔가 절대적 기반이 있다'라고 생각해 보니, 도리어 제가 너무 한심해서 뭐랄까 그저 주변의 탓이오, 네 탓이오, 뭐 이렇게 믿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푸코의 주장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구요.
저 역시 변덕이 워낙 심한지라, 내일이면 또 어찌 변할 지 모릅니다 :)

블리 2011-02-01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언니랑 얘기할 때 가끔 느껴지던 투명한 튕김,그건 바로 푸코와 촘스키의 차이었나봐요.
전 도덕을 배우던 학창시절부터 칸트의 관념론쪽이었거든요. 그냥 절로 끌려버리니, 원.
그래도 언니가 밉지는 않아요-ㅋㅋ 저도 미워라 하진 마세용~

굿바이 2011-02-02 22:15   좋아요 0 | URL
미워하지 않아서 무안영광입니다 ;) 저도 그대가 밉지않습니다 :)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27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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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려준 것인지, 누구에게 그냥 줘버렸는지 알 수 없지만, 이응준의 책을 다시 샀고, 다시 읽는다. 어쩌면 놓쳤을 수도 있고, 지금에서야 혼자 오해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아득하게 앉아 이응준의 책을 읽고 있었을 한강을 떠올려본다. 이 책에 수록된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이라는 단편이 허망한 추리의 근거라면 근거다.   

책을 옆에 두고 조카에게서 얻은 주사위를 만지작거리다 굴린다. 가늠할 수는 없지만 납득되는 숫자가 허공을 향한다. 다시 던진다. 역시나 그럴 수 있는 숫자가 내 앞에 놓인다. 반복할 수록 우연이 필연적인 숫자들의 조합으로 엮여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사람들의 조합도 그러할 수 있을까. 우연이지만 필연적인 조합. 이응준을 한강을 그리고 나를 우연이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조합으로 묶는다면, 그 필연에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아마도 '실재하며 작동중인 쓸쓸한 것들의 조합' 이 되지 않을까.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두고 힘빠지는 이야기를 얼마나 오래 했는지 이제 기억도 멀다. 단지 써야하기에 쓰는 것,이라 말하며 서둘러 자리를 떴고, 써야한다는 그 말의 울림이 그저 먹먹해 집에 오면 으레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곤 했다. 무엇인가 써야함에도 어떤 단어도 이어갈 수 없는 막막함. 치부와 상처가 활자로 떠돌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 같은 근거없는 두려움이 도시의 불빛처럼 밤에도 잠을 막아섰다. 그럼에도 겁쟁이가 숨어들 공간이 있을 수 없는 것 처럼 '실재하며 작동중인 쓸쓸한 것들의 조합' 들은 매번 활자로 떠돌며 나를 찾아낸다. 떠돌아야 한다고, 가벼이 떠돌아야만 한다고 최면을 건다. 서로가 서로에게. 살아야 한다는 말 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말이다.  

"음지는 양지를 탐하여 흉내낼 때 가장 어둡고 축축해 보이는 법이니까. 너는 온갖 세상사에 얽혀 있는 듯 행동하곤 했지만, 실은 언제나 너 홀로 자신에게 골똘했을 뿐이었다. 나는 곧 너를 완전히 이해하겠다는 희망을 포기하였고, 그 대신 너의 전체적인 존재감을 얻어낼 수 있었다. 더불어 네가 어째서 나에게 느닷없이 손을 내밀었던가도 깨달았다. 너는 내가 너처럼 병들었다는 사실을 동물적으로 간파했던 것이다. 그림자 같은 그림자에게 드리우길 원한다. 그거였다."<Lemon Tree 中>

작가가 그려낸 인물들은 타자를 염두한다기 보다 독백으로 일관하고, 흘러가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시간은 어디 쯤에서 단절되어 있다. 줄거리를 기억하기에는 모호한 추억들로 채워진 사람들이다. 책은 각각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기 다른 인물들이 출몰하지만, 한 명의 주인공이 다른 공간을 오고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책은 몇 편의 단편속에 묘사되었던 푸른 안개속을 더듬는 듯 하다. 물가의 새벽을 체험한 사람들이라면 알 수 있는, 시리고 명징한 그렇지만 힘이 빠진 안개속을 허위허위 내저으며 걷는 기분이다. 물리적으로 큰 힘이 아님에도 진을 빼고야 마는 그런 경험. 삶이 반드시 기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어느 주인공처럼 삶이 반드시 기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자의 지친 새벽같은 소설이 바로 이응준의 소설이며, '실재하며 작동중인 쓸쓸함'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소설이 바로 이 책이다.

"엉뚱한 얘긴지 모르겠지만, 기실 우리네 삶은 수채화가 아닌 유화가 아닐까. 성숙한 인간이라면 우선 세상의 바탕을 마땅히 고통스럽고, 슬프고, 쓸쓸하고, 외로운 곧 어둠의 색으로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대신 살아가는 동안 내내 점차 희망이나 보람 같은 것들을 대변할 만한 밝은 색깔들을 스스로 찾아내어 그 비관적인 인식 위에 덧칠하며 제 평생의 아름다운 그림 한 장을 완성시킬 것!" <내 가슴으로 혜성이 날아들던 날 밤의 이야기 中> 

이 푸르고 외로운 별에서 내가 태어난 순간, 나는 앞으로 얼마가 될 지 알 수 없지만, 이곳에서 숨쉬는 한 춥고 쓸쓸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고 울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를 바라보던 내 부모의 눈은, 너를 만나 다시 뭔가 잘해보리라는 마음이 들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부터 우리는 외로웠으리라. 그렇게 우리의 쓸쓸함은 무성해졌으리라. 그러나 세상에 알려진 죄와 알려지지 않은 죄를 모두 저지르고 난 오늘, 어느 문지방에서 돌아보니, 문득 그 모든 것들도 '추억의 속도로 걸어가고'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전히 뒷모습은 보이지만, 꼭 그 날의 새벽처럼, 푸른 안개속으로, 무성하고자 했던 욕심들과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두려움마저 멀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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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9 16: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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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0 11: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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