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식에 대하여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8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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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냄새로 기억하는 사람이다. 기억의 어디쯤을 뒤지면 냄새들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영상이 따라오는 식이다. 삼십년 전에 살았던 우리 집의 녹슨 대문도 덧칠했던 페인트 냄새가 먼저 떠오른다. 덧칠한 페인트가 노란색이었다는 사실은 그 다음이다. 모든 기억이 그렇게 퇴적되어 있다. 그러니 첫사랑의 목덜미에서 번지던 견과류 냄새를 아직도 붙잡고 있는 것은 특별한 감정이 남아서가 아니다. 그저 생체 메커니즘일 뿐.

 

나처럼 시각보다 다른 감각이 발달된 사람들을 간혹 만난다. 반갑다. 억측일 수 있지만 그도 보이는 것 보다 더 많은 걸 혹은 다른 걸 보거나 느낄 수 있겠구나 하고 짐작할 때가 있다. 그래서 세상을 혹은 타인을 혹은 나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겠구나, 그런 마음들이 앞설 때가 있다. 그러니 반갑다. 그러나 이해는 완곡한 오해일 뿐이다. 나는 '그' 혹은 '내'가 감지하는 세상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느껴지는 것이 헛것일 수도 있고. 혹은 보이는 것이 진짜일 수도 있는 일이고. 그렇지만 여튼 반갑다. 완곡한 이해는 이렇게 달다. 그리고 그렇게 만난 작가가 이승우다.

파동을 이해하는 사람. 그래서 세상을 타인을 소리로 가늠할 줄 아는 사람.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물어볼 수도 없고 물어볼 필요도 없는, 중요하지도 않고 중요할 필요도 없는 이승우에 대한 나만의 이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나만의 오해.

 

「일식에 대하여」는 정신질환을 앓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숙명처럼 여기고 사는 어머니를 도망친 주인공이 도피한 곳에서 다시 실성한 듯한 어느 노인을 만나고 그 노인을 통해 아버지와 심리적으로 화해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주인공은 진정제를 먹고 잠만 자는, 주인공의 여자를 덮치려고 한 미친 아버지를 도려내고 그 아버지를 숙명으로 인식한 어머니로부터 공간적으로 도망쳤지만

여직원에게서 건네받은 전화기 속에서 어머니는 끊임없이 울상을 짓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목소리에 배어 있는 그 깊고 사무치는 비애가 전염성을 지녔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일까.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 목소리에, 그 목소리가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쓸쓸함에 노출되어왔는지. 그리하여 그것이 나의 목소리와 몸짓, 표정이나 사고방식, 심지어 그것들을 원격조종하는 의식과 무의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어머니는, 그런 의미에서 당신이 참으로 위험한 보균자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p.65)

목소리는 좀처럼 주인공을 놔주지 않는다. 전화기를 통해서라도 그의 귀에 끊임없이 닿는다.

게다가 어떤 규칙적인 비명덕분에 아버지로부터 도망친 주인공은 어떤 아들로부터 유폐된 노인을 만난다.

오늘 아침도 그 고함 소리가 나를 깨웠다. 새벽마다 뭐라고 정확하게 표기하기 곤란한 그 섬뜩한 고함 소리는 메아리를 거느리고 내 잠든 하숙방 창문을 넘어 들어왔다. 처음에는 주위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하숙을 정하기 훨씬 전부터 새벽 공기를 오염시키고 있었을 그 소리에서 내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하게 된 것은 새벽마다 단 한 번도 거르지 않는 그 규칙성과 함께 그 소리가 들릴 때 함께 전해지는, 이루 형언하기 힘든 기묘한 기분 때문이었다. (p.19)

소리는 물체의 진동이다. 물체의 진동이 내 귀에 몰려와 닿는 셈이다. 예고없이 몰려와 귓속을 파고드는 타인의 소리, 타인의 진동은 때에 따라 혹은 자주 절박하고 위협적이다. 그것은 소리이기 전에 이미 타자의 몸이고 타자의 마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들을 통해 주인공은 버릴 수도 없고 버려질 수도 없는 관계를 깨닫는다. 관계는, 징글맞은 일이고 살아 있는 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삶이 알뜰하게 징글징글한 것이고.

아버지는, 아들에게는 죽은 시간이 벗어던진 허물에 불과하다. 버거운 짐이고, 이 방의 구조가 시사하는 대로 혹과 같은 존재다. 보기 흉하고 거추장스럽지만 혹은 또한 자신의 피부-자신의 삶의 일부여서 함부로 제거하거나 도려내거나 할 수 없다. 나와 상관없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이 아버지들이 끔찍한 이유이다. 아버지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때때로 아주 잠깐, 혼신의 힘을 다해 그를 가릴 수 있을 뿐이다. 아들은 어김없이 패배하고 언제나 진다. 아들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런 존재다.....(p.78)

일식, 달이 태양을 가리는 순간. 빛이 가려지는 일시적인 현상을 소리로 들을 수 있다면 어떤 소리일 지 간혹 궁금했었다. 가려지는 태양이 아니라 태양을 가리는 달의 움직임이 그 움직임이 만드는 소리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데 알 것도 같다. 그 순간 어떤 소리가 들릴 지. 그 후 어떻게 고요할 지. 「일식에 대하여」를 읽는 동안 나는 일식을 소리로 경험했다. 또 다른 어떤 감각이 열린 셈이다. 세상을 소리로 기억하고 판단하는 사람이 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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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8-23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일 먼저 이 글을 발견해서 기뻐요. 일단 기뻐하고 읽기 시작!

비로그인 2012-08-23 16:43   좋아요 0 | URL
파동을 이해하는 사람. 세상과 타인의 소리를 짐작할 수 있는 사람. 문득 제 감각에 대하여 의구심이 들었어요. 나는 무엇으로 이 세상을 짐작하고 있는 것일까. 아직은 그것을 깨닫기에는 무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굿바이 2012-08-23 18:42   좋아요 0 | URL
무디다뇨. 그럴리가요.
저는 늘 짐작만 합니다. 대체로 실패하구요. 또 그래도 할 수 없구요.

그나저나 EBS다큐영화제는 잘 보고 계신가요?
좋은 작품도 많고 흥미로운 작품도 많아서 저는 잘 보고 있습니다 ^______^

다락방 2012-08-23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고 땡투하고 장바구니에 넣었습니다. 이 책을 읽게될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두근거려요. 굿바이님의 리뷰인데, 그게 세상에, 이승우의 글에 대한 것이라뇨! 이런건 그냥 지나칠 수 없는거니까요.

이런 느낌을 이해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굿바이님이 이승우의 소설에 별을 다섯을 주셔서 무척 기뻐요!!

굿바이 2012-08-23 18:45   좋아요 0 | URL
이승우작가 좋아하시죠?
다락방님이 이승우작가의 <칼>이라는 작품에 대해 썼던 글 저도 잘 읽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허접한 글에 땡투라니요!!!!!!
이런건 지나칠 수 없는데, 언제 고기라도...사드려야겠어요 ^______^

웽스북스 2012-08-24 13:50   좋아요 0 | URL
저도 땡투할래요
(누가보면 언니가 고기도 안사주는줄 알겠다 ㅋㅋㅋ)

굿바이 2012-08-28 18:08   좋아요 0 | URL
고기 사줄께!!!!! 많이 사줄께!!!!!!!!

비로그인 2012-08-23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삶이 알뜰하게 징글징글한 것이고..."


리뷰 전체 글, 한 자 한자 너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가을이구나 ..
이제 여름은 가고 가을이 왔어..
아침 저녁의 바람은 그걸 뼈속 깊이 각인시키기라도 할 요량인지.. 나는 벌써 두꺼운 이불을 새로 꺼냈다.


가을이 오고 ..
나는 네 글이 그립고.. 그래서 이 밤 .. 잠을 깨우며 너의 글을 읽었다..
써주어 고맙다고..
이런 글을 써주어 고맙다고 ..
옆에 있으면 향 좋은 커피라도 사주고 싶은 밤이다..


굿바이 2012-08-24 10:14   좋아요 0 | URL
나도 두꺼운 이불을 꺼내 껴안고 잤어 ^^
덕분에 오랜만에 푹 자기도 했고.

오다가다 보자. 커피도 마시고, 술도 마시고, 밥도 먹고, 노래도 부르고, 욕도 하고, 한강도 뛰고.

꽃도둑 2012-08-27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백하건대...저는 이승우를 몰랐습니다.ㅡ.ㅡ
아,,왜 이제야 알았을까요?..문장이 가슴을 칩니다. 아니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입니다.
저도 생투입니다~^^

굿바이 2012-08-28 18:08   좋아요 0 | URL
몰라도 사는데 아무 문제없습니다 ^____^
그렇지만 알면 좋을 수도 있어요.
그나저나 생투,좋은데요, 생투! 뭔가 생활투쟁처럼 들려요~!

흰 그늘 2012-09-04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이 괜찮았나 봐요?!..

저는 장편은 읽어본적이 없고 단편을 몇 편 읽어 보았는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명과 사명을 생각하고 있었을때라 그랬는지 '사령'이 괜찮더라구요
눈을뜸과 감음의 경계를 넘어가는것 같았거던요.. 정장을 입고 모진 바람이불고 흙먼지가 날리던 길을 걸어 더이상 지도에는 없는 마을로 가는 모습이 지금도 선연하네요 혹시 읽어 보셨나요? 굿바이님의 마음엔 '그 마을'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을지 불현듯 궁금해지더라구요^^

..'그의 광야' 또한 참.. 좋았었드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