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즐거움은 사소한 것에 있었다. 이제는 사소한 것 말고 무엇을 기획하는 것도 결정하는 것도 어찌나 버거운지, 그저 사소한 것에서 발견하는 즐거움에 곧장 열광해버리곤 한다. 생각이 끼어들면 이 사소한 즐거움도 비눗방울처럼 팡팡 터져버리니. 짧은 시간 두리번거림 없이 몰입해야 한다. 그래서              탑밴드를 본다.

탑밴드를 보는 일은 소년의 눈(내게 소년은 김도균이고, 누군가에게 소년은 신대철이다)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얻는 일이고, 내 안의 어떤 소녀가 이어폰에 의지해 건넜던 세월을 추억해 내는 일이고, 돈 안 되는 일에 매달려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을 보며 돈 안 되는 일에 매달렸던 시간을 위무받는 일이고, 더 나아가 아직은 내게 남아있는 음악적 감수성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러니 나는 토요일 밤이면 배란다 문을 활짝 열어 한강의 밤 기운을 거실에 가득 들이고, 맥주 한 캔을 끼고 탑밴드를 본다. 샤워도 했으니 나는 신난다.               여튼 이 즐거운 행위에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몇 몇의 여인네가 토요일, 내게 왔다. 그들도 나와 같은 마음인지 알 수 없지만, 사실을 확인하는 것도 귀찮아서 그만두었지만, 여튼 왔다. 일찍도 왔다.

그러나 저녁을 먹고 탑밴드가 시작하기 전 어떤 드라마를 보게 된 것이               모든 것을 우끼고 서글프고 처연하며 쪽팔리게 만들었다. 그래도 어쩌랴 그렇게 또 즐거웠음을. 여튼 정말 오랜만에 보는 드라마는 신기하기도 했다. 저렇게 예쁘게 생긴 영장류를 처음 보는 것 처럼 우리는 드라마를 보았다. 물론 처음에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각본을 씹어보려고 했었다.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 도 없이 주인공의 눈 속으로 주인공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주인공의 입술 끝으로 스며들었다. 어이없게도. 무방비로.               그만큼 우리는 외로웠던 것 같다. 숨길 수 없었다. 이런 시간에는.

김이 말했다. 도대체 말이 되느냐고, 어디에 저런 사장이, 변호사가, 실장이, 카페 주인이 존재하느냐고, 아니 어디에 저렇게 몸도 마음도 멀쩡한 사내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느냐고, 어떻게 바카스가 필요한 일상에서 늘 머리카락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으로 저렇게 골목에서 혹은 카페에서 각을 잡고 서 있을 수 있느냐고.               김의 목소리는 분노라기보다 흐느낌에 가까웠다. 아무도 웃을 수 없었다. 격하게 슬퍼졌으니까. 저 우아한 웃음, 경쾌한 걸음, 습관처럼 굳어진 자신감, 쨍한 유머. 아ㅡ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 영장류의 무리를 어디서도 본 적이 없으니까. 가끔 몸만 멀쩡한 무리는 보았지만 마음도 멀쩡한 저런 무리는 본 적이 없었으니까.               박은 말했다. 그런 무리를 어디서 만났다 한들 무슨 소용이었겠냐고, 드라마 속의 그녀처럼 말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고, 웃을 수 없고, 사랑스러울 수 없었는데, 다 무슨 소용이었겠냐고. 더 중요한 건 그녀와 같은 다리가 없고 팔이 없고 아름다운 턱이 없는데 다 무슨 소용이었겠냐고.              나는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듯 그렇게 부인하고 싶었다. 아니다. 과거의 어느 한 때, 나는 쨍하고 빛났다. 뭐 이렇게. 그러나 베드로의 흉내를 낼 수는 없었다. 그 시절을 함께 살아낸 그녀들을 곁에 두고 거짓을 말할 수는 없으니. 아ㅡ짧고 비루했던 청춘이여. 너는 어찌 그리 흘러갔던가.

정말 마음껏 씹어 주겠다고 시작한 우리의 드라마 시청은 참패로 끝났다. 그럴 수 밖에 없지. 더는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감미로운, 심장 어디 쯤을 살살 간지르는, 혼자서도 까르르 웃을 수 밖에 없는 저 멋진 남자의 고백을 듣고 있노라니 다들 브라운관을 데이비드 카퍼필드처럼 파고들어 주인공 여자의 입술 언저리에 머물렀다. 탄식에 가까운 소리. 뽀뽀라도 해라, 이것들아ㅡ               우리는 함께 탑밴드를 보지 않았다. 다들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나는 안다. 그녀들도 알고. 우리는 추억의 어디 쯤으로 빨리 떠나고 싶었다. 방해받지 않고. 정녕 그 시절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뭐 어떤 기억의 줄거리라도 하나 잡아 미역처럼 부풀리고 싶었다. 그래. 그게 범죄도 아닌데. 정녕 그런 적이 없었다 하더라도 누군가 함부로 내게 던진 마음 한 조각을 기어이 찾아내리라. 찾아내서 뭘 어찌 할 수는 없지만 일단 찾아내리라. 그리고 혼자 낄낄. 여럿이 모이면 거짓말 조금 보태서 더 낄낄거릴 것이다.               혼자 남아 건성으로 탑밴드를 보면서 나는 꼼꼼히 머리 속을 뒤졌다. 그리고 진짜 웃었다. 없구나, 없어. 아ㅡ맑고 맑은 흠없는 청춘이여.  

 

청춘 1

 

권혁웅

 

그대 다시는 그 눈밭을 걸어가지 못하리라

그대가 낸 길을 눈들이 서둘러 덮어버렸으니

붕대도 거즈도 없이

돌아갈 길을 지그시 눌러버렸으니

 

여러 번 읽는다. 위로일 수 없는 먼 나라의 언어들을. 그 언어들을 내 것으로 믿고 싶어하는 마음을. 여러 번 소리내어 읽는다. 그리고 서둘러 덮는다. 그 언어들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붕대도 거즈도 없이 지그시 눌렀다. 거짓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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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2-06-25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살아가면서 얻는 즐거움이나 행복이나 알고 보면 사소한 일상이나 사물에서 우연히 발견할 때가 있죠 ^^

굿바이 2012-06-25 22:54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요~@_@
그나저나 저 모자 쓴 신사는 제 꿈에도 종종 등장하는데 도통 그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요. 누굴까요...음....

웽스북스 2012-06-26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언니를 좋아한 걸 한순간도 후회한 적이 없어요. 이 글이 좋아서 읽고 또 읽었어요 ^-^ 다가올 어느 여름밤엔 언니집에서 함께 맥주를 홀짝이며 탑밴드를 봐요. 신사의 품격 같은 거 보지 않게끔 제가 밤택시를 타고라도 열한시에 맞춰갈게요.

저는 신대철 소년이 더 좋아요. 헤헤 (하트) --> 아직도 맥북으로 하트 입력하는 법을 몰라요 ㅠㅠ

굿바이 2012-06-28 10:25   좋아요 0 | URL
그대를 만난 일이 내게는 아주 드문 행운이고 축복이라네 ^_____^
조만간 꼭 같이 보세!!!!!!

Alicia 2012-06-26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웬디언니처럼 이 글이 좋아서 오후내내 읽고 또 읽었어요. 헤헤^^

굿바이 2012-06-28 10:26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감사 또 감사해요~!

Transfer Cards 2012-06-26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수 블로그 게시물 ..
공유 주셔서 감사합니다! ^ ^

굿바이 2012-06-28 10:28   좋아요 0 | URL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꽃도둑 2012-06-27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슬퍼져요,,,,ㅡ.ㅡ
아련한 그 무엇을 건드리다니..
전 드라마든 뭐든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한 달 평균 2~3시간인데..
어느날! 문득! 느닷없이 털썩 주저앉았는데 글쎄 '신사의 품격'을 하지 뭡니까
처음 봤어요...낄낄대며 보고 또 보고 연속 3회를 봤나봐요,
케이블에서 연속으로 내보냈는데 그 멋진 네 넘 보는 걸 그만 둘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 새벽 2시까지 보고,,그 다음날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출근을 했지요.
드라마에 완전 낚인거죠~
근데 웃은 기억밖에 없는데 굿바이님 글은 슬퍼요...

굿바이 2012-06-28 10:28   좋아요 0 | URL
이게 뭐랄까 '중년의 탈을 쓴 소년'들을 볼 수 있어서 더 재미있는 것 같아요.
저 역시 철들지 못하는 영혼이라 어떤 대목 격하게 공감했어요.
어쩔까요? 한 번 낚였는데 계속 낚일까요? ^___^

꽃도둑 2012-06-28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낚일 때도 없는데...
그까이꺼~~ 함 낚여보죠 뭐...^^

風流男兒 2012-07-02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여기도 이제 스팸댓글이 달리는 건가요. 저 밑에 뭐지 또 이상한 거 눌렀다가 ㅋㅋ 웬 이상한 사이트에 드갔다 왔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