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잘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모래알 고금'을 읽고-


  나는 마해송 선생님이 ;바위나리와 아기별','성난수염','떡배단배'를 쓴 동화 작가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나라 10대 작가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마해송 선생님 작품들을 구체적으로 읽어보았다. 마해송 선생님에 대해 토론을 하기 전에 방정환 선생님 작품을 읽고 토론을 했었는데 마해송 선생님이 쓰신 동화들은 방정환 선생님과 다른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방정환 선생님이 쓰신 동화들은 동심천사주의라는 비판을 받지만 아이들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런데 마해송 선생님의 작품은 아이가 자신 앞에 놓인 어려움을 스스로 해결해 나가는 모습이 아니라 절대자인 천주님께 의지해서 어려움을 해결해 나간다. ‘모래알 고금’도 마찬가지다.

 

  형인 갑성이는 공부를 잘하고 약삭빨라 아버지와 어머니께 늘 칭찬을 받고 대우를 받지만 을성이는 미련하다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밥만 축내는  돼지라고 가족들에게 멸시를 받으며 지낸다. 그러다가 집에 불이 나자 더 이상 아버지 얼굴을 볼 용기가 안나 집을 나갔는데 뜻하지 않게 소매치기단들의 소굴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우연히 천주님의 도움으로 성당으로 도망을 가 가족들과 재회를 하게 되고 사실은 아버지가 을성이를 미워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처음에는 제법 탄탄한 구조를 가지고 진행이 되길래 어린이 책이 관심이 맣은 사람들이 왜 ‘모래알 고금’을 읽어보라고 권했는지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뒷부분으로 갈 수록 앞 뒤 이야기 흐름이 억지로 끼어 맞춘 듯한 인상을 풍기기 시작했다. 썩 괜찮은 책은 아니다. 그렇게 을성이를 미워하던 아버지가 납득할 수 있는 계기가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을성이에게 친절해진 것도, 우연히 천주님의 도움으로 소매치기단을 빠져나오게 한 것도 억지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덮고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작가가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게 아니었던가 싶다. 공부라는 잣대로 좋은 아이 나쁜 아이로 편가르기를 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 동화를 읽는 아이들에게는 ‘나 말고도 나처럼 공부못한다고 가족들에게 구박당하는 아이가 있었구나. 그리고 부모님이 나를 구박해도 사실은 미워서 그런 것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할머니와 메주’라는 책에 나오는 용성이라는 아이와 그 형이 생각났다. 동생 용성이는 못하는 것이 없는 아주 똑똑한 형을 둔 덕분에 집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아이취급을 받는. 그래서 학교에서도 늘 소심하고 자신 없는 모습이어서 친구들에게도 따돌림을 받는 아이. 학교에서 동생을 만나도 못 본 척하고 용성이가 자신의 동생임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인간적인 매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용성이의 형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늘 훌륭한 아이라고 칭찬 받는다

  

  공부 못하는 용성이는 나쁜 아이라고 늘 꾸중만 받고, 공부 잘하는 용성이의 형은 항상 칭찬만 받아야 되는 좋은 아이인가?

  우리 나라 교육정책을 보면 용성이 형 같은 아이, 갑성이 같은 아이가 자라 우리 나라를 이끌어 갈 위치에 설 가능성이 많아지는데.... 공부 못한다고 자신의 동생도 부끄러워 하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이 아이들이 이 나라를 이끌어 갈 지도자가 된다면......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를 가지고 좋은 아이, 나쁜 아이를 가르는 어른들이 있다면 난 주저 없이 ‘할머니와 메주’와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이 세상을 다양한 사람들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가려면 공부는 좀 못하더라도 가슴이 따뜻한 아이가 꼭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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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빠가 돌아왔다’만 읽고 -


‘오빠가 돌아왔다’에 총 8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그런데 ‘오빠가 돌아왔다’만 복사를 해서 읽었다. 되바라진 중학교 1학년 여학생 입을 빌려 표현된 김영하씨의 유쾌한 상상력과 유머감각, 허를 찌르는 아이러니와 날렵한 글솜씨가 아주 재미있다.


  중학교 1학년인 영악하고 되바라진 여학생(관찰자 입장에서 서술해 나가는 주인공), 전문 고발꾼에 술만 먹으면 가족 패는 것이 취미인 아버지, 그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지 못해 집을 나가 함바집을 하는 엄마, 맞고 자라다가 복수할 힘이 생기자 아빠를 작신작신 패고 가출했다가 4년만에 돌아온 오빠, 그 오빠가 데리고 온 열예닐곱살 된 동거녀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다. 등장인물들만 보면 완전 삼류소설감이다. 그런데 작가의 재치있는 글솜씨가 이 소설을 문제작으로 끌어올렸다.

  그런데 가출했던 오빠가 ‘돌아오면서’ 흩어졌던 가족들이 한 집안에 모여살게 된다. 집 나갔던 엄마가 오빠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성욕을 참지 못해 딸의 교복을 훔쳐다가 밤새 성욕을 해결하던 아빠는 엄마가 돌아오자 뒤로 나자빠지는 척 하다가 밤이 이슥해 지자 방에서 쿵덕거리고 집을 나가기 전 여동생의 팬티를 훔쳐다가 성욕을 해결하던 오빠도 동거녀와 쿵덕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오랜만에 사람 사는 집 같다. 다음 날, 엄마에 의해 야유회가 강행되고 가족들은 처음으로 강가로 야유회도 간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길가에 있는 스티커 사진기 앞에서 티격태격하며 가족 사진을 찍는다.

  강가로 놀러갔을 때 경선(중 1여학생 주인공)이 엄마께 이렇게 묻는 장면이 나온다

  “엄마, 그럼 아빠랑 재결합하는 거야?”

  “너희들이 불쌍해서 함께 살지만 재결합은 안한다.....”


  작가가 비뚤어진 가족상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려고 한 것은 무엇일까?

  ‘진정한 의미의 가족은 없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어느 분이 썼던 칼럼 내용 중에 ‘가족이 해체되고 있다’고 걱정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진정한 가족의 의미가 뭔지 새삼스런 의문이 든다. 이 책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다면 그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어떤 목적에 의해 결합된 가족일지라도 제각각 흩어져 등돌리고 사는 가족보다 어슬프게나마 이렇게 함께 사는 것이 그래도 낫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테니. 

 

이 소설을 각색 해 보니 A430매 정도의 분량이 나온다. 주제를 약간 비틀어 각색을 했다. 진정한 의미의 가족은 아닐지라도 가족은 가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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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빠가 돌아왔다’(김영하 단펴소설)를 읽게 되기까지

                                  -시나리오 각색할 작품을 고르다가-


   영상 문학 과제 중에 소설 한 편을 읽고 단편 시나리오 한 편을 완성해 오는 과제가 있었다. 처음에는 각 개인에게 한 편씩 할당된 과제였는데 학생들 불만이 많자 교수님이 몇 명의 아이들을 묶어서 한편을 완성을 해 오라고 했다

  처음 이 과제가 나왔을 때 나는 시나리오를 써 오라는 말을 못들었다. 그냥 소설 한편을 읽고 그 소설을 영화로 만든다면 장면 분할을 어떻게 할 것인지, 왜 그 소설을 영화로 만들것인지, 주제는 ... 뭐 그런 것만 하라는 이야기로 들었다.

  교수님이 시나리오 써 오라고 할 때 뭔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날 도서관에 책을 빌리려 갔다가 같은 과목을 듣고 있던 과 아이 둘을 만났는데 그 아이들이 이러는 것이다

  “언니, 시나리오 어떻게 하실 건데요. 분량이 장난 아닌데.”

  “시나리오? 뭔 시나리오?”

  “영상 문학론 교수님 시나리오 한편 써 오라고 하셨잖아요. 그것도 1시간 30분짜리로. 그러 면 아마  A4 90매 정도 될건데. 그걸 한사람이 어떻게 하라는 건지......”

  “뭐?.... 세상에”

  그 말을 듣는 순간 앞 날이 아득해 졌다. 안 그래도 초보 교수 티를 낸다 했더만 수업도 제대로 하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은 시나리오를 써 오라고 하다니. 이렇게 궁시렁거리다가 ‘그렇지만 하라면 해야지 뭐’ 했는데  다음 주 수업을 하러 갔더니 한 애가 이런다

  “언니, 시나리오 공부한 사람들도 네댓명에 30분짜리 단편 영화 정도의 시나리오 1편 제출한대요.그런데 시나리오 공부도 안한 우리한테 장편에 그것도 한 사람당 한 편을 각색하라는 게 말이돼요? 그 교수... 아니예요? 과제 조정해 달라고 얘기할 건데 언니 좀 거들어 주세요.”

  ‘당근이지.’

  “어~그래 잘됐다. 안 그래도 걱정이었는데.”


  강의 시간, 교수님이 어쩌구저쩌구 하고 대충 강의가 끝나가고 있는데 부탁했던 그 아이가 아무 말이 없다. 그래서 슬쩍 쳐다봤더니 과제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그런데 교수님도 자기가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이번 학기부터 교수가 바뀌었다는데 아무래도 강의는 이번이 처음인듯 학생들과 상호작용이 안된다. 그래서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다. 나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좀 안됐다 싶어 나름대로 맞춰보려 애쓰지만 나도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자꾸 들고 있다. 도무지 학생들 입장을 고려를 할 줄 모른다. )조정을 한단다. 그래서 4명이 30분짜리 단편 시나리오를 완성해서 내기로 했다. A4 22매에서 30매 정도. 그 대신 각자 자신이 각색하고 싶은 소설 한편씩을 선정해 오기로 했다.


나는 ‘우상의 눈물’ 한 명은 ‘오빠가 돌아왔다’ 한명은 ‘친구’ 한명은... 그런데 ‘오빠가 돌아왔다’를 하고 싶다는 아이가 책을 가지고 왔다. 내용이 참 재미있겠다. 그래서 각색하기로 한 작품은 ‘오빠가 돌아왔다.’ 각자 읽고 시나리오 쓸 부분을 나누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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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꿈꾸며 살고 있는 가?

-『마당을 나온 암탉』을 읽고


   양계장 안에 사는 잎싹은 열렬히 소망하는 존재다.

   ‘단 한번만이라도 알을 품을 수 있다면, 그래서 병아리의 탄생을 볼 수 있다면          …….’ 

  암탉으로 태어났으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바램이지만 양계장 안에 갇혀 사는 난용종 암탉이 품기에는 이상이 너무 높다. 잎싹이 소망을 이루려면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을 지 눈에 선하다. 그러나 아카시아나무 잎사귀가 부러워서 ‘잎싹’이라는 이름을 저혼자 지어 가질 만큼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잎싹이니 결국은 자신의 소망을 이뤄 낼 것이다.

 

  잎싹이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양계장을 나와 마당으로 가야한다.  ‘마당’으로 가는 길은 고난의 연속이지만 잎싹은 기꺼이 간다. 먹이를 거부하고 알 낳기를 거부하면서 야위어 가다가 폐계 판정을 받아 죽은 닭들의 구덩이에 내던져 지고, 족제비의 밥이 될뻔한 위기도 겪지만 기어이 그토록 소망하는 ‘마당’으로 들어선다.

  그런데 참으로 기막힌 일이 벌어진다. 잎싹의 몸은 알을 만들어 낼 수 없을 만큼 피폐졌고(알을 품어 병아리를 까고 싶은 소망 하나로 마당까지 왔는데 알을 만들어 낼 수 없다니!), 마당 식구들은 잎싹을 받아주지 않는다. ‘마당’이 이 세상 전부인 줄 알고 자신의 소망을 이룰 곳으로 알았던 잎싹에게 죽음을 무릎쓴 댓가치고는 너무나 허망하고 혹독한 시련이다.

 

  어느 책에서 읽었던 ‘하는 일 마다 실패를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다면 언젠가 자신이 꿈을 이룰 수 있다’ 는 말이 생각난다. 현실적인 한계 앞에서 그렇게 쉽사리 물러날 소망이라면 잎싹은 애초부터 소망을 품지도 않았을 것이다. 잎싹은 기막힌 현실 앞에 좌절하고 분노하지만 무릎을 꿇지는 않는다. ‘마당’을 나온 것이다. 이 제목이 ‘양계장을 나온 암탉’ 아니라 ‘마당을 나온 암탉’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마당’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던 잎싹은 그 ‘마당’을 나온 후에야 자신이 우물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당’을 나오니 더 넓은 세상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넓은 세상은 ‘마당’ 처럼 자신을 보호해줄 울타리가 없는 수많은 위험에 도사리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마당을 나온 후에야 자신의 소망을 이룬 잎싹. 자기가 낳지는 않았지만 족제비의 밥이 될뻔한 청둥오리의 알을 끝까지 품어 까고, 그 아기를 몸을 던져 끝까지 지켜낸다. 그리고 자신의 몸뚱이는 ‘마지막으로 낳았던 알처럼 느껴졌던’ 새끼족제비들의 먹이로 기꺼이 내어놓는다.

 

  잎싹이 살아간 삶이 양계장 닭장 속 닭들 눈에는 참으로 무모하게 비춰졌을 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다간 잎싹은 행복한 삶을 살다 갔다고 생각한다.  잎싹은 또 다른 ‘나’이므로.

 

  나는 참 철이 늦게 들었다. 막연히 바깥세상을 동경하던 잎싹이 아카시아꽃이 피고지는 것을 보면서 ‘잎사귀처럼 뭔가를 하고 싶었’던 마음을 품었듯이 나는 내가 평생을 하고 싶은 일을 그렇게 찾았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집 맏이 답게 20대는 사는게  바빴다. 소망따위는 품지도 않았다, 또래 친구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일찍부터 찾아서 목표를 향해 가고 있을 때 나는 목표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 가게 일을 도우며 틈틈이 동네 아이들을 모아 공부를 가르치면서 내가 평생을 해도 지치지 않고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뒤늦게 알았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원대한 꿈을 꾸던 친구들이 꿈을 접고 결혼하고 애기낳고 남편 그늘에 안주하기 시작할 때 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가기 위해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잎싹이 안전한 양계장을 나와 수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자신의 소망을 이뤘듯이 나도 내 가슴 속에 품은 소망을 하나하나 이뤄 갈 것이다

  ‘내가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으며, 나는 무엇을 꿈꾸며 살고 있는 가?’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화두였다. 살아가면서 내가 품을 소망의 고삐가 느슨해질 때마다 잎싹을 떠올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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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라겐 2005-06-11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참 좋지요...어른을 위한 동화인것 같아요...아이들 보다 어른이 봐야할 책이라고 생각해요...

다솜 2005-06-12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제법 오래전부터 이 책을 중 1 아이들에게 읽히고 토론을 하곤 했는데 이번에 과제 제출할 곳이 있어 다시 차근차근 읽었어요.읽을 수록 좋은 책이네요
 

  

내 가슴에 별이 되어 뜬 동시

『너의 가슴에 별 하나 빠뜨렸네』읽고-


  제목을 보니 이 책을 엮은 분들의 소망을 알겠다. 서문에 밝힌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곳에 어떤 모습으로든 크고 작은 의미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 책에 실린 동시들’이 아이들과 어른의 가슴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로 남아주기를 희망한 것이다. 읽어보니 글쓴이의 바람대로 어둔 밤길에 가로등 불이 하나 둘 켜지듯 메마른 가슴에도 별이 하나둘 뜬다

  이 책에 실린 동시들 하나하나가 제각각의 가치와 재미가 느껴진다

  이정석 시인이 쓴 ‘어린이’를 읽어본다

  

   -어린이-


  바다로 나가려고

  몸살하는

  바구니에 담아 놓은 꽃게들

 

  아이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더 넓은 세계로 나가기 위해 쉼없이 세상을 기웃거린다. 바다로 나가고 싶어 몸살하는 바구니에 담긴 꽃게랑 꼭 닮았다. 바닷가에서 나고 자라 수없이 꽃게를 잡아 바구니에 담았어도 그저 꽃게는 꽃게일 뿐이었는데, 창의적인 눈으로 사물을 바라볼 때 이렇게 빗대어 표현될 수 있다니! 놀랍다. 바구니에 담긴 꽃게의 움직임을 보고 어린이의 본능을 이렇게 잘 표현한 시인의 눈이 예사롭지 않다.


   이정환 시인이 쓴 ‘길도 잠잔단다’라는 시를 읽어보니 내 어릴적이 생각난다. 내가 나고 자란 고향 마을에는 전기가 늦게 들어왔다. 지금은 관광지가 되어 밤낮없이 불빛이 번쩍이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야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다. 그래서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엄마가 가까운 도시로 볼일을 보러 나갔다가 늦어지면 호롱불을 들고 큰댁 번답 머리로 마중을 나갔다. 불빛이 보이는 마을을 연신 뒤돌아 보며 새까만 밤길을 동생 손을 잡고 걸어가면 두런두런 말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길도 사람도 보이질 않았다. 그 땐 어두운 길이 참 무서웠었다. 저녁이 되면 낮 동안 고단했을 길도 어둠에 안겨 잠을 자야 내일을 시작할 수 있는데. 살다가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이 닥처와 눈 앞이 캄캄해 질 때면 ‘지금은 내일을 시작하기 위해 잠을 자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 절망도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짧은 동시 한 편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수많은 전등이 밤 길을 밝히고 있는 지금에도.


 손동연 시인이 쓴 ‘소와 염소’라는 시도 참 재미있다. 이 시를 읽고 나서 내가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에게 1연을 읽어주고 물었다.

  “그러자 아기 염소가 뭐랬게?”

  아이 하나가

  “젊은 게 까불지마 수염도 안 났으면서”이렇게 말했단다.

   손동연 시인이 염소의 입장에서 대답한 말을 읽어주니 아이들은 깔깔깔 웃는다 ‘소와 염소의 다툼이 정겹다.

 

 이 책에 실린 동시들을 읽기 전에 차례를 쭉 훑어보다 놀란 것이 있다. 윤동주와 박목월, 정지용 시인의 동시가 실려 있었던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쓴 동시를 읽어보니 아이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넣을 것이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에 겨울이 되어 주먹 두 개를 넣었더니 갑북해졌다’는 생각이 참 맑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이분들이 쓴 시를 읽어보면 맑고 순수한 마음이 느껴졌는데 이 책에 실린 동시를 읽어보니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알겠다. 가슴 속에  동심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학 작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인지 나는 기성 시인들이 쓴 시가 난해하다.  그런데 복잡한 기교를 부리지 않는 동시를 읽으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 진다. 내가 이 동시를 읽고 느낀 감동을 영상 문화에 익숙해져 순간적인 재미나 즐거움에 길들고 있는 아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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