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에서 영성으로 - 2017 신판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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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읽은 책을 다시 집어 든 건 순전히 저자 이어령 때문이다. 최근 모 신문에 게재된 그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암 투병 중인 건 알았지만 그사이 너무 초췌해진 그의 외연에서 예전의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저 사람이 과연 내가 아는 이어령 전 문화체육부 장관이 맞나 하는 생각이 강렬했다. 힘 있고 열정적인 지성 활동으로 동분서주했던 그의 과거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하지만 인터뷰 내용을 훑으며 외연은 많이 초췌해졌지만 영혼만큼은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음을 느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그를 여전히 귀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그 직감의 연장선상에서 그가 종교적 회심 후 쓴 참회론적 메시지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다시 잡았다.

서평을 쓰기 전 이 책을 에세이로 구분할지 기독교 서적으로 구분할지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개인 이어령의 회심기이기도 하지만 딸과 자신 사이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이 큰 뼈대를 이루고 있다. 결국 개인 이어령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책 전반에 흐르는, 여기까지 이끄신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이라는 관점에서 기독교 서적으로 구분하여 서평을 남기기로 했다.

그렇다. 『지성에서 영성으로』는 기독교 서적이다. 우리 시대가 가장 존경하는 지식인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 석좌교수가 거대한 지성에서 거룩한 영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고백하는 책이다. 띠지에 적힌 문구처럼 "시대의 지성이 전하는 영성에 대한 참회론적 메시지"이다. 과거에 굳게 닫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어떤 계기로 열리고 그로 인해 어떻게 변화되었으며 결국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저자 자신의 현존을 좇는 이야기다. 책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내면을 여는 한 지식인의 진솔한 자기 부정과 신앙고백이 오롯이 담겨 있다.

저자는 자기 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장면으로 일본에서 세례 받은 사건을 꼽는다. 관련 일화의 전후 맥락과 그 뒷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당시 지식인 이어령 전 장관이 세례 받는다는 소식은 국내 대부분의 언론에서 대서특필로 보도했다. 한국의 대표적 지성인이 인본주의적 성과를 뛰어넘어 영성의 세계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주변의 엄청난 궁금증에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고 책 제목대로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전하는 전도자적 삶을 사는데 앞장서 왔다.

워낙 글재주가 뛰어나기에 책 곳곳에 감미롭고 촉촉하며 탁월한 문장들이 독자의 가슴을 사로잡는다. 문학평론으로 시작해 에세이, 소설, 드라마, 시나리오, 심지어 올림픽 개폐회식 대본까지 쓴 그였다. 어떤 부분에서는 시로, 어떤 내용에서는 철학적 탐구로, 어떤 대목에서는 드라마틱한 표현으로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내러티브를 펼친다. <시편>을 쓴 다윗 같기도 하고 『고백록』의 저자 성 아우구스티누스와도 엇비슷하다. 저자가 세상의 지식과 학문이 아닌 기독교 신앙을 다룬 첫 번째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신앙서적보다 진솔하고 감동적이다.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저자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끌기 위해 평생을 기도해온 딸의 이야기다. 딸 이민아 목사에게 자신이 존경하는 아버지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현실은 상당히 괴로운 숙제였을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믿지 않는 가족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더욱이 아버지(저자)는 한국에서 가장 지성 있는 인물로 존경받는 소위 세상 지식의 거대한 기둥이다. 거꾸로 저자의 입장에서는 미국에서 검사라는 직업을 가졌던, 지성을 사랑하던 딸이 어찌하여 하나님을 믿게 됐고, 봉사하는 삶을 살게 됐는지가 궁금했을 것이다. 환언하자면 이 책은 부녀간의 엇갈린 스탠스에서 기독교 영성이라는 존재론적 합치를 이루어가는 아름다운 과정에 관한 고백록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책은 기독교 서적이다. 그러나 꼭 기독교인만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 비기독교인도 조금 넉넉하게 시야를 넓히면 거북하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분명한 기독교 신앙 이야기지만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저자의 해박한 지식이 담담한 문체 속에 녹아들어 가 비신앙인이나 이웃 종교인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또한 아버지를 향한 딸의 오롯한 존경과 사랑, 동시에 딸을 향한 아버지의 웅숭깊은 애정을 이 나라 최고 지성의 글발로 만날 수 있다. 바로 이점이 기독교 서적을 뛰어넘어 이 책을 한 권의 보편 에세이로 읽을 수 있는 동력이다. 그렇기에 출간된 지 오래되었지만 신자든 비신자든 무난하게 추천할 수 있겠다.

서평을 정리하자. 저자는 작년 연말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대재앙을 겪고 있는 전 인류를 향해 "역사적으로 항상 대 역병이 지나가고 나면 이전보다 나은 번영이 이뤄졌다"면서 "이 팬데믹 패러독스의 마지막 희망은 기독교"라고 밝힌 바 있다. 세상과 대중을 향해 서슴없이 하나님을 외치는 저자의 기백이 멋지다. 저자는 수년째 암 투병 중이다. 저자가 지성을 넘어서 만난 하나님이 그의 말년을 축복하며 존귀하게 사용하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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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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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는 신간 『클라라와 태양』으로 처음 만났다. 그가 일본계 영국 작가이며 부커상과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소설을 읽은 뒤에서야 알았다. 그의 소설은 지루하지 않았고 가볍지 않았으며 재미없지 않았다. 문학의 기능이 교훈과 재미라는 양대 축에 있다는 걸 주지한다면 대중성의 최전선에 위치한 소설이란 장르는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 교훈은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이다. 유능한 작가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교훈을 선물했다. 이 기준에서 가즈오 이시구로는 가장 근접해 있는 작가다. 이에 그의 대표작들을 역주행해 보기로 했다. 『남아 있는 나날』은 그렇게 내 손에 들어왔다.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은 『나를 보내지 마』와 함께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대표작이다. 소설은 재미있고 잔잔하며 교훈적이다. 마지막 장을 덮은 뒤 전해오는 울림이 상당하다. 인물과 서사, 주제와 메시지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다. 시점이 과거 현재를 수시로 오가지만 산만하지 않고 인물들의 절제된 감정이 독자에게 오롯이 전달된다. 이야기 곳곳에 묘한 긴장감이 계속해서 흐르는데 적절한 호흡으로 소설의 막장까지 독자를 흡입력 있게 안내한다. 작가의 탁월한 내공은 앤서니 홉킨스와 엠마 톰슨 주연이 열연한 영화로까지 제작되는 힘을 만들어냈다.

작품 속 일인칭 화자 스티븐스는 영국의 저명한 대저택 달링턴 홀의 집안일을 돌보는 집사이다. 최고의 집사였던 아버지를 존경하며 아버지처럼 훌륭한 집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35년간 주인 달링턴 경을 성심성의껏 모셔온 스티븐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최고의 집사는 최고의 주인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믿는 그에게 달링턴 경이 국제 외교의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충심을 다해 돕고 보좌한다.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떠나가는 사랑을 붙잡을 여유도 없을 정도로 오직 집사의 일에 집중하고 매달린다. 그러나 평생을 바쳐 일한 집사의 일이 뿌듯하지만 달링턴 경이 나치 협력자로 이용당한 여러 정황이 드러나면서 회의가 생긴다.

평생 집사 일에 여념이 없었던 스티븐스에게 과거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생긴다. 저택의 새로운 미국인 주인의 권유로 포드 자동차를 몰고 장거리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소설은 스티븐스가 6일 동안 여행하면서 추억하는 과거의 회상과 현재의 여행 시점을 교차시킨다. 오래전 자신과 함께 일한 여인 켄턴 양의 편지를 받고 여행길에 그녀를 만날 기대에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막상 오랜만에 그녀를 만났지만 표면상 서로 간 달라진 건 없다. 소설의 말미 켄턴 양과 헤어진 후 우연찮게 만난 한 노인의 말이 스티븐스의 마음을 일렁이게 한다.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죽 뻗고 즐길 수 있어요."

이 소설은 크게 세 가지 주제에서 나에게 농밀한 울림을 주었다. 주인공 스티븐스가 끊임없이 질문한 주제는,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품격'에 관한 것인데 스티븐스의 철학은 명징하다. '위대한 집사'란 주인에 대한 절대적 믿음, 복종, 이를 넘어선 헌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준에서 자신은 최선을 다했고 완벽했음을 자부한다. 또한 주인 달링턴 경이 순수한 나머지 나치 정권에 이용당한 사실에 대해서도 자기 영역 바깥에 있는 일음을 강조하며 개인의 죄의식과는 거리를 둔다. 위대함과 품격의 본질적 의미를 묻는 지점인데 이 부분에서 작가는 독자에게 답변을 강요하거나 선악의 가치판단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일과 직업에 있어 '위대함'과 '품격'이란 항시 뜨거운 주제다. 스티븐스가 제기한 질문을 현재의 나에게 그대로 치환해 보자. 위대한 영업사원이란 무엇인가. 전문적 역량과 탁월한 실적을 통해 회사와 대표에게 큰 영업이익을 안겨주는 것일까. 뜨거운 동료애를 발휘함으로써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우선하는 걸까. 훌륭한 조율자로서 부서와 개인 사이의 소통의 다리를 잘 연결해 주는 것일까. 물론 가장 좋은 건 이 모든 역량을 다 갖춘 것이겠지만 경쟁이 있는 곳, 특히 숫자로 실적을 다투는 곳은 감히 불가능한 얘기라 할 수 있다. 위대함과 품격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회사와 학교를 위시하여 실력과 전문성을 겨루는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 음미해 봐야 할 주제임은 틀림없다.

또 하나는 스티븐스와 켄턴 사이의 이뤄지지 못한 사랑의 절절함이다. 소설에서는 단 한 번도 서로에 대한 호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말과 행동이 나오지 않는다. 에두른 심리묘사와 정황적 상상을 통해 스티븐스와 켄턴 사이의 사랑의 기류를 살포시 포착할 뿐이다. 가장 극적으로 갈등이 해소된다고 볼 수 있는 마지막의 둘의 재회에서도 후회나 그리움에 관한 직접적인 묘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참인지 거짓인지 모를 듯 묵묵하게 전하는 켄턴 자신의 결혼생활의 고백 은 애절하다 못해 서글프기까지 하다. 결국 둘은 '마지막 말'을 하지 않은(못한) 채 헤어진다. 사랑했지만 자신의 위대한 책무에 복무함으로써 들여다보지 못했고 거꾸로 그것을 알기에 다가서지 못했던 둘의 사랑은 애잔하고 서글프며 가혹하다. 독자에게 눈물을 강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서사 하나만으로 감정을 자극하는 기술이 과히 노벨상 작가답다.

마지막 주제는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의 대비다. 소설은 여행의 현재 시점과 과거 회상의 교차 구조로 이루어졌다. 현재에서 과거를 반추하는 흐름이다. 자신의 선택과 최선에 후회 없이 살아왔다고 믿는 주인공에게 우연의 어느 노인과의 대화는 정작 잊고 있던 것을 알게 해주었다. 자기 자신에게 미래 또한 남아있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까지 어떻게 산 것과는 무관하게 앞으로도 상당히 많은 '남아 있는 나날'이 존재한 것이다.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있고 현재는 총알같이 지나가고 미래는 머뭇거리며 온다"는 말이 있다. 총알같이 지나가는 현재에서 영원히 정지해있는 과거의 회상에만 빠져 있는 주인공 스티븐스에게 머뭇거리면서 다가오는 미래가 있다는 깨달음은 그뿐 아니라 정신없이 살아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만 잠시 잊고 있는 지혜이다.

자연스럽게 내 삶과 나이로 감상을 옮겨가고자 한다. 어느덧 내 나이 사십 대 중반이다. 평균적인 기준에서 대략 반평생 정도를 산 것 같다. 불혹은 남자에게 가장 도전적이고 전회적인 연령대로 불린다. 한 남자로서 가장 빛나고 역동적인 황금기이다. 반면 과거와 미래를 동시 천착하며 깊은 존재론적 번민에 빠지는 극한의 걱정기이기도 하다. 빛나지만 남루하고 두렵지만 역동적인 나이 대다. 나이가 더할수록 시간의 속도는 더욱 빠르게 흐른다는 사실에 숙연해진다. 나는 과연 좋은 남편이고 아빠일까. 훌륭한 아들일까. 위대한 직원일까.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남은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에게 남아 있는 나날은 어떻게 펼쳐질까. 여러 진지한 사유가 머릿속을 주유한다. 이토록 인생의 심연을 깊게 탐색하게 한 것만으로도 이 소설의 가치는 충분하다.

노벨문학상 심사위원회 측은 "이시구로는 초기작에서 이미 가장 깊이 다루는 주제 '기억, 시간, 자기 기만'을 드러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의 글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든 조심스럽고 절제된 방식으로 표현한다"고 평가했다. 그렇다. 이시구로의 소설이 무거운 주제를 관통하면서도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독자의 내면에 침잠할 수 있는 건 독자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민하고 성찰하되 사유의 종국은 실존 독자의 몫으로 넘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스티븐스가 '위대한 집사'였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오직 독자의 평가로 남아 있다. 나(독자) 자신의 '남아 있는 나날'에 대한 평가와 해석에 관해서도 말이다. 나이를 먹어가며 두고두고 읽어야 하는 소설이다. 위대한 책 더미에 한 권을 더 얹을 수 있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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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1-15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 좋아합니다. 안소니 홉킨스가 주연한 영화도 좋았어요. 이시구로 작품 중 클라라와 태양은 아직인데 읽어봐야겠어요. 다윗 님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

다윗 2021-11-15 16:11   좋아요 1 | URL
알라딘은 거의 댓글이 달리지 않았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ㅋㅋ 영화는 하도 오래전에 봐서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엠마 톰슨의 미모가 빛났던 것 외에는...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찾아봐야겠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지음 / 사계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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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나 자신이 무섭다. 바뀌어도 이렇게 바뀔 수 있나, 생각한다. 과거의 나는 가부장제 보수 꼴통 기독교인이었다. 보수적이고 기독교인이라는 건 전과 변함없지만 남성우월주의라는 허례의식을 벗어던진 건 대단한 발전이다. 최근에는 여성에 관한 처우와 권익에 관심이 많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나 스스로 페미니스트가 되었다고 느낄 정도다. 여하튼 과거에 비해 전회와 같은 변화가 일어난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오래전부터 나를 알아온 주변 지인들은 이런 내 모습에 한결같이 놀라고 있다.

나의 변화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겠다. 그중 가장 강력하고 결정적인 원인이 있다. 결혼해서 두 딸을 키우면서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삶의 목적과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었다. 양육을 통해 기존 습관 속에 배어 있는 내 오류와 한계를 직시하게 됐다. 과거에는 애들이 싫었다. 엄마한테 사탕 달라고 떼쓰는 애들,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뛰어노는 애들, 밥 먹을 때 흘리면서 먹는 애들 등등 아이들은 내겐 밥맛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과한 공상에 빠지기도 했다. 장충체육관에 6세 미만 아이 1,000명 채워놓고 1대 1,000으로 싸워본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본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일이다.

두 딸은 내 변화의 근본 동인이다. 두 아이를 통해 삶의 지혜를 배울 때가 많다. 가끔 아이들은 생각지 못한 시선과 행동으로 우매하고 불성실한 어른이 기꺼이 보지 못한 삶의 고결한 통찰을 알려준다. 특히 아이들의 언어는 솔직하고 직선적인 편인데 불필요한 수사나 과장이 없어 진실을 선연하게 드러낸다. 아이의 언어는 단순하지만 정의롭고 투박하지만 진실하다. 유소년이 갖는 명랑함과 생명력은 다른 세대에서는 흉내 내기 힘든 신적 에너지와 같은 것이다. 어린아이를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이고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라고 묘사한 니체의 말은 이 대목에서 일견 옳다.

김소영의 에세이 『어린이라는 세계』는 독서교실 교사로 일하는 저자 자신의 어린이 세계 관찰기다. 일상에서 목도한 어린이의 탁월성을 세밀하게 탐구하고 해설했다. 저자가 살펴본 어린이의 세계는 수준 높고 아름답다. 흔히 유치하다고 무시해버리는 어린이들의 말과 행동을 교육자적 입장에서 높은 통찰력으로 천착했다. 어린이의 세계는 하나도 버릴 것 없는 배움과 가르침의 시공간이다. 시간의 여유를 갖고 시야를 넓혀서 보면 어른들이 도전받고 배워야 할 온갖 신기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 맥락을 살피는 저자의 관찰력과 통찰력이 흥미롭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어린이의 품위'를 다룬 장이다. 저자가 지방 소도시에 여행을 갔다가 오래된 서점에서 목격한 일인데 내용은 이렇다.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이가 아빠와 실랑이 끝에 색칠공부로 추정되는 책을 들고 계산대에 섰다. 아빠가 계산을 하기 위해 책을 달라고 하는데도 어린이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다.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와중에 서점 주인이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한 말이 압권이다. "따로 계산해 드릴까요?"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상황은 금세 정리됐다. 계산이 끝난 후 주인은 다음 말도 잊지 않는다. "따로 담아 드릴까요?" 해당 사연을 읽은 후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또 하나 눈에 띈 부분은 어른과 아이의 공간 인식의 차이를 설명한 장이다. 눈높이를 맞춘다는 취지로 아이 옆에서 무릎 꿇고 사물을 바라보려는 시도를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대부분 어색함을 느꼈을 것이다.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 저자는 그림책 작가 안노 미쓰마사의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에서 소개한 원근감의 차이로 설명한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두 눈 사이가 좁기 때문에 '비교하기 어려운 지점'이 어른보다 더 가까이 있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범위가 더 좁다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 어린 시절 살던 곳에 가 보면 동네가 '좁아' 보이는 것 역시 공간 감각의 차이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 내용은 평소 어린이의 산만하고 돌발적인 행동의 원인을 일부분 이해시켜 준다. 통제 불능이어서가 아니라 감각이 다른 탓도 있다는 것이다. 어린이가 실제 느끼는 시공간의 크기를 저자의 설명에 대입해 생각해보니 자연스럽게 고개가 주억거리게 된다.

최근 아동학대를 위시하여 어린이 관련한 좋지 않은 뉴스가 많이 들린다. 일부 어른들의 폭력성과 무관심으로 인해 죄 없는 아이들의 심신이 파괴당한다. 하지만 난 아동학대의 기준을 지금보다 훨씬 높여서 세워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비단 물리적 폭력이 아니더라도 언어폭력과 무관심도 아이들의 영혼을 파괴하는 명징한 학대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어른의 소유물이 아니며 작고 하찮은 존재도 아니다. 어린이라는 세계는 기존의 오해와는 달리 똑똑하고 정결하며 품격 있다. 나의 두 딸이 나를 변화시키고 나에게 선한 영향력을 계속해서 부어주는 것처럼 말이다. 이 위대한 깨달음의 감격 위에 에세이 『어린이라는 세계』가 놓여 있다. 어린이를 키우는 엄마·아빠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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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
사샤 세이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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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국제선 비행기를 처음 탔을 때의 일이다. 이륙하고 불과 몇 초 지나지 않았는데 비행기는 순식간에 구름 위에 닿았다. 지면은 한참 멀어졌고 건물은 조그맣게 보였다. 사람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지상 모든 것이 작게 변한 것 같았다. 아니 세상 자체가 소인국이 된 듯했다. 문득 생각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저렇게 작은 존재들인데 뭐 그리 급하다고 발버둥 치며 살고 왜 그리 서로 미워하며 살아가는지를. 누가 더 많이 갖고 덜 갖고 하는 것에 우쭐대며 살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비행기 창밖을 보며 깊은 상념에 빠졌던 기억이 아직도 선연하다.

해외여행을 다녀와서 중국 장가계나 미국 그랜드캐니언을 거론하며 거대한 규모에 압도되었음을 회자하는 경우가 있다. 해외 관광명소는 정말 크다. 국내에서는 보기 어려운 거대한 스케일을 감상하고 있으면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의 처지가 얼마나 소소한지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세계와 비교하면 장가계나 그랜드캐니언도 작은 언덕에 불과하다. 기준을 우주로 확대해보는 것이다. 지구적 관점에서는 클지 몰라도 우주적 관점에서는 작다. 규모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작다. 지구 밖으로 나가면 압도적으로 큰 세계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지구는 작은 행성이다. 태양계의 한 식구인 목성은 지구보다 1,300배가 크다. 태양을 제외하고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 '알파센타우리'는 지구에서 4.4광년이나 떨어져 있다. 지구에 있는 모래알보다 5~10배가 넘는 별들이 우주에 있다. 우주의 지름은 대략 950억 광년 거리로 추정된다. 그것도 관찰 가능한 우주에 한해서 그렇다. 지구가 속한 은하와 가장 가깝다는 안드로메다은하만 해도 250만 광년 떨어져 있다. 인간이 발견한 것 중에 우주 공간 전역에 수백억에서 수조 개의 태양을 거느린 은하계가 2조 개가량이나 있다. 어디 감히 스케일을 말하는가. 지구와 인간은 작아도 너무 작다.

20세기의 저명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딸 사샤 세이건이 처음으로 쓴 책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는 삶과 사랑과 우주를 다룬 에세이다. 유명한 과학자를 아버지로 둔 딸의 이야기이면서도 인간 세계를 면밀히 탐구한 인문학 산문집이다. 칼 세이건과 작가 앤 드루얀의 딸인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우주적 시각과 과학적 통찰로 삶과 인간을 들여다보는 법을 체득했다. 과학자의 딸답게 증명되지 않는 것을 거부하고 의심하는 회의론자가 되었다. 저자에게 사실이란 과학적으로 발견되고 입증된 것이어야 했다. 그렇기에 저자는 유대인이면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이자 불가지론자이다. 책 곳곳에 회의론자이자 불가지론자인 저자의 입장과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저자는 많은 주제를 다룬다. 딸을 출산했을 때를 회고하며 '태어남'에 관한 폭넓은 천착을 시도한다. 신을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종교적 의식이 주는 유용함을 긍정한다. 우주의 탄생과 외계인의 존재 등의 흥미로운 과학적 담론을 끄집어내기도 한다. 종교적 시각을 벗어난 과학자의 입장에서 죄와 오류의 문제를 다룬다. 성장과 어른의 철학적 의미를 탐색하고 결혼 제도와 섹스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설파한다. 역사와 신화의 흥미로운 토막들을 소개하고 이를 과학적 접근으로 재해석한다. 인간의 가장 큰 화두인 삶과 죽음의 문제를 통찰하기도 한다. 저자는 해박한 지식으로 여러 주제를 넘나들며 깊이 있는 탐색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과학적 사고와 국문학 전공의 유려한 글발이 돋보인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저자의 자기 주관이 굉장히 강력하다는 걸 느끼게 된다. 가령 결혼 제도, 여성 인권, 성소수자, 섹스 관념 등 여러 민감한 이슈에 관한 개인적 소신과 철학이 뚜렷하게 서 있다. 글의 논조가 흔들림 없이 일관적이다. 평소 자기만의 기준과 가치관을 명확히 세워놓은 듯하다. 이는 오롯한 자존감 없이는 불가능한 것인데 부모로부터 받은 것인지 오랜 공부의 힘인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작가로서는 훌륭한 장점이라는 점이다. 가끔 문학이든 비문학이든 저자(작가)가 자신감 없이 마치 독자의 눈치를 살피며 써 내려가는 듯한 글귀를 만날 때면 적지 않은 짜증이 밀려온다. 명확하고 단정적으로 자신의 견해와 철학을 전달하는 작가적 자신감이 멋지다.

저자는 책 서두에 부모님으로부터 "현상을 비판적으로 보되 삶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지 말라"는 가르침을 배웠다고 고백한다. 인간과 세계를 과학적·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되 삶 자체만은 따뜻한 시선으로 살펴야 한다는 것을 부모로부터 배우며 자란 것이다. 그래서인지 저자의 시선은 의외로 우주가 아닌 자기 주변에 머물러 있다. 저자의 부모들이 지구의 바깥 우주를 바라보며 깊이 있는 사고를 펼쳤다면 저자는 그 시선을 가족과 삶으로 돌린다. 일상 속 작은 의식들이 얼마나 삶의 순수한 기쁨을 일깨우는지를 담담하고 미려한 문체로 들려준다.

책 전체에 흐르는 고요한 기저가 있다. 바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다. 거의 모든 장마다 아버지에 관한 얘기가 나오는데 이는 저자가 얼마나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저자에게 아버지는 끊임없이 그리운 대상이다. 아버지의 언어, 지성, 가르침, 인격, 태도 등 그 모든 것이 저자에게 흘러내렸다. 저자는 아버지를 많이 사랑했다. 주변 다른 사람들처럼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다. 아버지라는 존재를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더욱이 저자의 아버지는 위대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었다. 『코스모스』를 쓴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란 존재에 구속되지 않았다. 짓눌리지 않았다. 완전히 독립된 자아로 만개했다. 그것이 읽는 독자로 하여금 감동을 자아낸다.

책을 읽으며 두 가지 도전이 생겼다. 하나는 칼 세이건의 명저 『코스모스』를 제대로 읽고 싶어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도 딸에게 '코스모스'와 같은 거대한 지적·정신적 유산을 물려주고 싶은 것이다. 전자는 쉽다. 이미 두꺼운 개정판을 질렀다. 올여름에 천천히 탐독할 계획이다. 후자가 문제다. 아버지로서 거대한 영혼의 자산을 딸에게 물려준다는 건 과히 기적 같은 일이다. 쉽지 않다. 노력하겠다.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하겠다. 글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겠다. 훗날 이 블로그도 딸에게 물려줄 위대한 유산의 목록 중 하나일 것이다. 말과 행동, 성실과 정직, 도덕과 신앙 등 딸아이에게 흘러내릴 모든 것들을 살피고 가다듬겠다. 그래서 칼 세이건처럼 딸이 그리워하는 아빠의 표본이 되겠다. 이 비전을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서평을 정리하자. 책 제목은 진실이다. 우리는 정말 작은 존재들이다. 위대하면서도 한낱 작은 존재다. 이 책은 이 명제에 관한 과학적·개인적·인문학적 통찰이다. 칼 세이건의 유일한 소설 『콘택트』의 명언을 소개로 서평을 끝맺음 한다. "우리와 같이 자그마한 생명체는 오로지 사랑을 통해서만 우주의 광대함을 견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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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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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재미있을 수도 있고, 뭔가를 가르치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게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가 느낌을 나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야기가 국경과 여러 차이를 넘어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공유하는 것에 호소한다는 사실입니다." - 가즈오 이시구로,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 중

이것이 노벨상 작가의 포스인가. 그렇다. '이야기'는 독자와 느낌을 나누어야 한다. 공감할 수 없는 소설은 죽은 소설이다. 소설은 공감을 통해 언어와 국경을 넘고 성별과 문화를 넘는다. 그럼으로써 이야기는 작가의 것이 아닌 진정한 독자의 것으로 전이되고 확장된다. 이 위대한 소유권의 이전은 사르트르가 '소설적 자유(romanesque liberte)'라는 멋들어진 말로 포장한 이래 문학에 대한 현대 비평의 정설이 되었다. 서두에 인용한 이시구로의 노벨상 연설 한 토막은 소설이란 문학 장르에 존재하는 '작가'와 '독자'와 '허구' 사이의 복잡다단한 함수성을 적확하고 시원하게 포괄하는 명문장이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국경과 여러 차이를 넘어 인간으로서 공유하는 것에 호소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학의 두 가지 기능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문학의 기능이 교훈과 재미라는 양대 축에 있다는 걸 인정한다면 대중성의 최전선에 위치한 소설이란 장르는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 한국문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궁핍했다. 문학은 무언가 젠 척해야 하고 무거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한국의 지난한 현대사와 맞물려 고리타분한 이야기만을 양산해왔던 게 사실이다. 물론 최근 다양한 주제와 기법으로 한국소설의 폭과 박력이 넓어지고 확장된 건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멀다. 그런 차원에서 다양한 우주의 폭을 보여주는 해외소설의 역동은 참고할 만하다. 여하튼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 교훈과 감동은 그다음이다.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신간 『클라라와 태양』은 쉽고 재미있고 무게 있는 소설의 전형을 보여준다. 쉽고 간결하며 군더더기 없다. 감동적이고 묵직하다. 소설의 주인공 클라라는 인간이 아닌 로봇이다. 실제 인간과 비슷한 외형을 갖춘 '인공지능 친구(Artificial Friend · AF)'라는 형태의 로봇인데 클라라는 그 구형 버전이다. 로봇 매장 쇼윈도에 진열된 클라라는 비록 최신형은 아니지만 다른 AF와 달리 인간의 감정에 관심이 많고 감수성이 풍부하다. 어느 날 야위고 걸음걸이가 불편한 조시라는 소녀가 나타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둘은 서로에 끌린다. 조시는 꼭 클라라를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한다. 클라라는 다른 아이의 간택까지 거부하며 조시를 기다린다. 오랜 기다림 끝에 조시는 약속대로 다시 나타나 클라라를 선택해 집으로 데려온다.

소설 속 1인칭 화자 클라라는 인간이 아닌 소설 주인공으로는 문학사에서 손에 꼽을 만한 매력을 가진 존재다. 앞서 언급한 대로 클라라는 구형 로봇이다. 최신형에 비해 기계적인 기능이 떨어지고 부족한 것들이 있다. 그래서인지 클라라의 불완전한 인식 구조와 감정 상태가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 교차된다. 하지만 자신을 선택해 준 조시에 대한 마음만은 일편단심이다. 클라라의 불완전한 기작도 조시와 진심 어린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발전해가고 안정되어 간다. 긍정적인 미래를 의심하지 않고 조시에 대한 희생과 헌신에 자신의 전 존재를 투영하는 클라라의 열정이 웅숭깊다. 클라라와 조시가 서로 간의 관계를 발전시키며 우정과 신뢰를 쌓아가는 모습은 참으로 정갈하고 아름답다.

소설의 제목을 생각한다. '태양'은 클라라에게 신적인 존재로 은유된다. 상식적으로 '로봇-신(神)' 사이의 관계 설정이 어색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태양은 에너지의 근원과 신앙을 동시에 대변(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태양은 클라라의 기계적 힘을 작동시키는 동력의 원천이자 자양분이다. 클라라는 조시의 건강을 회복시킬 수 있는 힘이 태양에 있다고 믿고 강력한 태양빛을 조시에게 비출 것을 갈망하고 계획한다. 과학의 산물인 AF가 태양빛에 의한 치유라는 비과학적 기제에 경도된 아이로니컬한 설정이지만 클라라의 '믿음'은 한없이 순수하고 한결같아 마치 영혼의 숨결이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클라라의 열심과 수고는 소설의 마지막 이야기의 극적 반전을 만들어내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소설의 탁월함은 독자를 가르치려 하지 않는 점에 있다. 작가는 과학 발전과 윤리 사이의 긴장, 즉 빅데이터, 유전공학, 인공지능 그리고 이들이 불러올 윤리·도덕적 문제를 나열하지 않는다. 그저 클라라의 시선에 비친 인간 세계의 일상성과 남루함을 사색할 뿐이다. 인간 로봇이라는 타자(他者)적 관점이 관찰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은 현실보다 더 실재와 같아 불편하기까지 하다. 인간이란 종족은 먹이사슬의 최상단에 위치해 있지만 동시에 오류와 한계로 가득 찬 불완전한 존재다. 특별하지만 완벽하지 않고 가능성이 넘치지만 자주 실수하는 종족이다. 이런 인간의 양면성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탐색하는 로봇 클라라의 시선이 농밀하다. 지적하거나 꾸짖지 않고 그저 바라볼 뿐이다. 그래서 더 와닿는다.

소설의 막장을 덮은 후 오랫동안 묘한 기분에 정지해 있었다. 로봇 클라라의 매력은 많은 사유의 실타래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인간은 특별한가. 인간성의 미래에 희망이 있을까. 인간 됨의 본질은 무엇일까. 여러 질문이 샘솟는다. 인간성, 과학, 사랑, 상실, 종교, 죽음, 망각(기억) 등 다양한 주제를 관통하며 여러 생각을 갖게 하는 소설이다. 쉽고 아름다운 우화이면서 행간은 넓고 질문은 깊다. 가끔 어떤 책들은 아이와 함께 읽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싶은 충동을 주곤 한다. 『클라라와 태양』은 딱 그런 소설이다. 초등 4학년인 첫째 딸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여운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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