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김지수 지음, 이어령 / 열림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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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교수가 별세한지 3주가 되어 간다. 아직도 고인의 숨결이 우리 주변 곳곳에 생동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고인이 남긴 족적이 너무 거대해서 타계 후 더 고인을 갈망하고 우러르는 것 같다. 출판계가 특히 그러한데 고인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저작이 계속해서 출간되고 있다. 고인의 유작들이 역주행을 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고 이어령 교수는 독보적인 다작 저술가로서 60년 동안 130여권의 저작을 남겼다. 이중 생전 마지막 인터뷰집인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은 전 서점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있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은 인터뷰어이자 작가인 김지수가 암 투병 중인 고 이어령 교수를 매주 화요일마다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담은 인터뷰집이다. 책 속에는 죽음을 앞둔 한 거대 지성의 묵직한 사유와 철학이 오롯이 드러나 있다. 돈, 행복, 생명, 과학, 사랑, 죽음 등 인간의 가장 고밀하고 웅숭깊은 주제들을 총망라하여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암 투명의 끝자락에서 불과 죽음을 얼마 안 남긴 사람이 맞나 할 정도로 인터뷰는 대범하고 역동적이며 열정적이다.

제목 그대로 죽음 직전의 '마지막 수업'인데 고 이어령 교수의 지적 생명력은 죽음이 아닌 삶을 향해 활활 타오르는 것 같다. 힘이 있고 박력이 있다. 육체는 늙고 변하며 병들 수 있지만 정신은 늙지 않는다는 걸 본인 스스로 증명하려는 것처럼 책 곳곳에 지성의 바다가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며 독자를 압도한다. 한 번 말을 하기 시작하면 그칠 줄 모르는 고인 특유의 수다스러움이 이 책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인터뷰어 김지수는 이러한 고인의 박학다식함과 지적 열정에 경도되고 압도된다.

눈에 띄는 건 인터뷰어 김지수의 탁월한 리액션이다. 아무리 훌륭한 지성을 만났다 하더라도 인터뷰어의 실력이 형편없으면 좋은 대담이 이루어질 수 없다. 말만 잘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인터뷰이를 감당할 만한 지력과 실력이 인터뷰어에게는 꼭 필요하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사이의 지적·인격적 관계 형성, 적절한 호흡과 피드백, 공수를 오가는 건강한 긴장감 등이 훌륭한 인터뷰를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저자 김지수의 인터뷰 실력은 수준급이다. 집필 과정에서 어느 정도 편집을 거쳤겠지만 실시간 대담에서 예상치 못한 걸쭉한 사유를 끄집어낼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인터뷰어 김지수의 공이다.

책 전반에 걸친 총체적인 주제는 바로 '죽음'이다.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뒤 그 어떤 항암 치료도 하지 않고 마지막 때를 기다리며 꾸준히 지적 활동에 매진하는 고인의 모습은 죽음의 달관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인이 천착한 죽음은 추상적이지 않은 구체적이고 명확한 것이다. 딸과 손주를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내며 죽음의 실전을 겹으로 체험했다. 고인에게 죽음은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동시에 시작이고 생명이었다. 죽음은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엄마는 밥이고 품이고 생명"이며 "죽음이 또 하나의 생명이다. 어머니 곁, 원래 있던 모태로의 귀환이다"라고 말한 고인의 가르침이 바로 이 지점을 웅숭깊게 웅변한다.

고인은 자기 인생 88년 통찰의 결론이 '눈물 한 방울'임을 고백한다. 핏방울과 땀방울도 아닌 눈물 한 방울이 필요하다고 일갈한다. 핏방울과 땀방울은 너무 흔하며 서로 박 터지게 싸우는 특성 때문에 결국 피눈물밖에 남지 않는다고 말한다. 결국 피와 땀을 붙여주는 건 눈물이어야 한다는 걸 고인은 강조한다. 이 대목을 읽는 순간 무언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눈물은 나약한 것, 비본질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피와 땀이야말로 고도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본질적 힘이라 인식했다. 하지만 고인은 88년 통찰의 결과로 "가장 약할 때 가장 강한 것이 나오는 법"임을 일깨운다. 소름이 돋으면서 새 세상을 만난 듯한 전회와 같은 깨달음이다. 책에서 내가 가장 굵게 하이라이트 한 부분이다.

한달음에 책의 막장을 덮었다. 고 이어령 교수와 동시대를 산 것이 영광스럽다. 정치, 종교, 나이, 성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시대가 급변하고 있다. 'MZ세대'가 난리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대세가 되었다. 기준과 질서가 모호해졌다. 물론 새로운 조류와 스타일을 거부하지 않는다. 하지만 해 아래 새것은 없다. 우리가 새것이라 하는 것 대부분이 옛것의 토대 위에 만들어졌다. 꼰대 같은 소리일지 몰라도 진실이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은 옛것의 새것스러움을 거대한 지성의 향연 위에 녹여낸 명저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이 빛나는 대화를 지성에 목마른 모든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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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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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단점이 적지 않이 존재한다. 단점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 마는 치명적인 단점이 몇 개 있다고 느낀다. 그중 내 의도와 달리 상대를 무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공격적인 언행으로 상대방을 깔아뭉갠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언가에 몰두해 있을 때 타인의 질문이나 접근에 무반응·무감각하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스킨십이 좋아 착착 감기는 둘째 딸이 상처가 많은 편이다. 아빠에게 다가와 노크했을 때 내가 아무 반응 없이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며 엄마에게 다가가는 둘째 딸의 모습이 눈에 자주 아른거린다.

이런 경험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지성으로 평가받는 고 이어령 선생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그 부채감 때문에 펜을 든 에세이가 있다.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는 고 이어령 선생이 당시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딸 이민아 목사를 그리워하며 쓴 눈물의 에세이다. "오래전 서재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지 못했다"라는 고백으로 시작하는 이 에세이는 한 시대를 풍미한 거대 지성이 딸을 먼저 떠나보내며 쓴 회한의 고백록이다. 시대와 입장은 다르지만 두 딸을 키우고 있는 나에게 큰 영감과 울림을 준 책이다.

이 책이 감동적인 건 딸을 먼저 떠나보낸 아빠가 시간을 거슬러 참회와 그리움의 메시지를 진솔히 고백한 데 있다. 책 곳곳에 딸과의 추억을 아련히 기억하고 소환하는 현실 아빠의 그리움이 애절하게 녹아 있다. 딸의 꿈, 신앙, 첫사랑, 결혼, 이혼, 상처, 회복, 죽음 등의 테마를 그리움의 관점에서 기술한다. 실제 시점과 글 쓰는 시점 사이에 긴 시간의 세례로 깎아지며 형성된 해석과 깨달음이 저자의 애잔한 글을 추출하고 수식한다. 딸 잃은 아빠의 그리움과 거대한 지성의 양립이 저자의 명품 문장을 통해 따뜻하고 묵직한 한 권의 편지글이 되었다.

부모에게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다는 건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이다. 언어는 그 고통을 오롯이 담아내지 못한다. 저자와 저자의 딸 모두 자식을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냈다. 즉 저자는 딸과 손주를 먼저 보낸 것이다. 그 충격과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 책에는 살아생전에 딸의 마음을 다 받아주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아빠의 절절한 그리움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뒷부분에는 딸 이민아 목사와 아내 강인숙 교수의 편지를 담았다. 말미에는 딸 이민아 목사가 죽기 직전에 인터뷰한 <조선일보 why> 기사를 실었다. 저자(아빠)의 마음과 대비하여 딸의 생각과 견해도 살포시 추가함으로써 일방적인 편지글이 아닌 아빠와 딸이 주고받는 대화의 형식으로 편집했다.

무엇보다 이 책의 탁월함은 저자의 고밀한 인문학적 통찰이 편지글 곳곳에 배어 있다는 점이다. 셰익스피어, 니체, 사르트르, 보부아르, 데카르트, 볼테르 등 인류 지성사를 수놓은 사상의 거장들이 한 토막씩 소개된다. 지식인의 고매한 지적 자랑처럼 읽히지 않고 딸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의 수식어로 위치하기에 적확하고 아름답다. 특히 이런 지적인 대화를 딸과 나눌 수 있다는 점이 아름다웠다. 나도 책 관련 파워블로거로서 내 평생의 걸작 『안나 카레니나』나 『전쟁과 평화』와 같은 작품을 딸과 함께 읽고 토론하고 싶은 로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내 로망의 정점을 찍게 해준 것이 이 책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이 책은 저자의 또 다른 베스트셀러 『지성에서 영성으로』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두 책의 집필 목적이 모두 저자의 딸인 이민아 목사와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저자가 개신교 신앙을 갖게 된 소식은 국내 지성계에 커다란 뉴스였다. 일본에서의 세례식은 국내외 전 매스컴의 주목을 받을 정도였다. 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부정해온 저자가 결국 신을 받아들인 계기가 바로 딸 이민아 목사의 실명 위기 때문이다. 딸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그럼 당신을 믿겠노라고. 저자는 평생 자신이 부정해온 하나님께 기도했다. 결국 기적같이 딸은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저자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다.

책의 막장을 덮은 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시대를 풍미한 거대한 지성조차도 물질적 풍요를 채워주는 것이 자식 키움의 우선이라고 잘못 생각했었다는 사실에 살짝 놀랐다. 한편 위안도 되었다. 그만큼 삶과 사랑은 쉽지 않은 방정식이다. 본질의 선상에서 사랑은 언어, 관심, 미소 등의 일상의 작은 것들에 의해 발현된다. 사십 대 중반의 나이에 영업차장의 직급을 감당하며 회사일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나에게 두 딸의 속삭임은 얼마나 큰 시그널로 다가오고 있을까. 저자의 위로 메시지가 내 눈을 적시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오늘 밤 두 딸을 재우면서 항상 해주는 기도를 마칠 때쯤 반드시 '굿나잇 키스'를 건네야겠다. 딸을 가진 아빠들에게 일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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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영의 화해 (리커버) - 상처받은 내면의 ‘나’와 마주하는 용기
오은영 지음 / 코리아닷컴(Korea.com)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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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자에 한국인의 지적 수준과 인간적 품격을 몇 단계 도약시키는 데 공헌한 3대 선생님이 있다. 오은영, 백종원, 강형욱이 그들이다. 동시대 한국인은 그들의 지혜와 노력에 빚지고 있다. 오은영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백종원은 음식에 관한 맛과 철학을, 강형욱은 인간과 반려동물 간의 관계를 연구하고 가르쳐왔다. 그들은 세 분야에서 전에는 생각지 못하고 무시해온 것에 대해 강도 높은 일갈로 세상을 바꿔나가고 있다. 세 사람 모두 탁월한 선생님이지만 나는 단연 오은영의 공을 우선으로 꼽고 싶다. 음식과 동물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먼저 인간 됨이 더 우선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름지기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한다. 음식과 반려동물은 그다음이다. 인간이 인간 같지 않다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하더라도 아무리 반려견을 잘 돌본다 하더라도 공허나 허위일 뿐이다.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답게 살다가 인간답게 죽어야 한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점은 어떤 인간이든 죽어서 무언가를 남긴다는 것이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 유산을 결정하는 기초적이고 결정적인 만남은 바로 부모와 자식 사이다.

불과 수 십 년 전만 해도 육아에 관한 세밀한 지침서가 없었다. 먹고사는 문제가 바쁘고 고달팠기에 자녀를 이렇게 키우고 저렇게 훈육한다 하는 전범의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했다. 물론 우리 선배 세대는 정말 자식을 사랑했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 안 사랑하겠는가. 단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다. 부모의 역할이 물질적인 것의 충족, 즉 부양권에만 국한된 것으로 여긴 것이다. 하지만 정작 아이에게 소중한 것은 물질이 아닌 정신의 영역에 속해 있다. 아이에게 하는 말, 표정, 태도, 기준, 일관, 공의 등이 아이를 인간으로 만드는 중추였다. 오은영의 공이 이 지점에 있다.

과히 오은영의 시대를 살고 있다. 오은영이 대단한 건 기존에 없던 이론을 새롭게 창시했거나 무슨 위대한 가르침을 전달해서가 아니다. 그녀가 위대한 건 "자녀의 문제는 부모의 문제다"라는, 이미 서구 교육학에서 완벽히 정리된 사실을 이 나라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전달하여 대중화시킨 데 있다. 미국을 위시한 서구 선진국들은 이미 인간 교육의 본질이 사회가 아닌 가정에 있음을 간파했다. 한 사람의 내적 기질과 성격은 만 3세 이전까지 부모로부터 받은 것들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 영향력은 과히 압도적이라는 것을 오랜 경험의 축적과 연구의 결과로 발견해낸 것이다. 이후 서구사회는 인간교육의 방점을 사회에서 가정으로 턴하기 시작했다.

오은영의 『화해』는 가정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이자 작가인 저자 자신이 실제 상담한 내용을 모아 책으로 출간했다. 과거 한국일보에 연재된 내용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한 것인데 최근 여러 방송과 미디어에서 그녀가 전하는 내용의 초본집과 같다고 보면 되겠다. 수많은 실제 사례를 풀어내면서 오랜 기간 동안 인간의 내적 상처에 관심을 가져온 저자의 의학적·사회적 연구의 적용, 실제적인 개선 효과 등이 상세히 기술되었다. 여러 사례를 소개하는 저자의 설명에서 의사로서의 전문적인 역량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동시에 포착된다.

책에는 수많은 내담자들의 사연이 나온다. '나'로 기술되고 있는 내담자들은 각기 다른 상처와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들이 공유하는 동인이 있다. 바로 가정의 상처다. 부모, 자식, 남편, 아내의 위치에서 가지각색의 사연과 이유로 '나'가 된 내담자들의 상처는 한결같이 깊고 치명적이다. 영혼까지 파고드는 '나'의 상처와 억압은 정상 인간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저주와 같다. 안타까운 것은 가정에서 받은 상처는 외부에서 치유되기 정말 힘들다는 점이다. 마치 지하 암흑세계로 잡아당기는 사탄의 중력과 같다. 쉽지 않고 치명적이지만 그래도 그것을 벗어나야 함을 저자는 일관되게 강조하며 치유한다.

책 내용 중 깊게 공감한 대목이 있다.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돈이나 명예나 학력이 아니라 결국 따뜻한 기억, 행복했던 추억뿐이라는 걸 일깨운 부분이다. 이는 인간의 삶이 이런 추억과 기억에 의지해 살아간다는 걸 알려준다. 이 대목에서 아주 오래전 기억이 호출됐다. 초등학교 저학년 즈음으로 기억한다. 낮잠을 자다가 눈을 떴는데 아빠와 엄마가 동시에 나를 사랑스러운 미소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생생히 기억나는지 모른다. 그리고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정확한 시기는 모호하지만 당시 그 장면만은 완벽한 캡처로 남아 내 기억에 아로새겨졌다. 우울하고 일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그때의 기억을 소환하며 고비를 넘겼다. 저자의 말대로 결국 우리 인간은 이런 에피소드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책의 막장을 덮은 후 제목 '화해'의 의미를 고찰했다. 저자 오은영이 제시한 화해란 타자와 세계와의 관계가 아닌 나 자신과의 화해를 의미한 것이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진심으로 타인과 우주에 다가가지 못한다. 나와 화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상처의 시작과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다. 환언하자면 나(의 상처)를 극복해야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참 나'가 된다. 즉 오은영의 『화해』는 '상처받은 내면의 나와 마주하는 용기'라는 부제를 여러 내담자들의 사례를 통해 입체적으로 통찰하는 '나를 찾는 교과서'다. 내가 그토록 자기계발서를 비판하면서도 자기계발서에 살짝 걸쳐 있는 이 책을 탐독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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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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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은 입소문을 탄다. 유명한 작가(저자)나 메이저 출판사의 책이 아니더라도, 어마어마한 광고 세례를 퍼부은 책이 아니더라도 잘 쓰인 글은 필히 독자의 마음을 타고 전도되고 확산된다. 때와 대상에 따라 다를 수는 있지만 양서는 언젠가는 적당한 시기에 필요한 사람의 손에 놓인다. 내가 그간 많은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공식이다.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도 그 공식을 증명하는 책 중 한 권이다. 현재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있다.

제목이 흥미롭다. 마치 시집 제목 같다. 과학 에세이로 분류되는 이 책의 위치를 감안하면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무얼지 궁금했다. 이 모호한 호기심이 책의 첫 장을 여는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달음에 달려 읽었다. 책의 막장을 덮었을 때 생각보다 충격이 컸다.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내게 닥친 충격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다루진 않겠다. 하지만 제목이 무언가의 시적 표현이나 상징을 내포한 게 아니라 문장 그대로를 의미한 것이라는 사실에 직면할 때쯤 독자는 예상치 못한 반전과 씁쓸한 충격에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저자 룰루 밀러의 영혼의 에세이다. 저자의 지적 열정과 호기심, 고뇌와 좌절, 깨달음과 희망의 이야기가 논픽션으로 적나라하게 쓰였다. 사실은 사실대로, 주장은 주장대로, 회고는 회고대로 저자는 자유롭게 시점과 문체를 바꿔가며 단단하고 다채로운 에세이 한 권을 만들어냈다. 독자는 책장을 넘기면서 주요한 대목을 넘을 때마다 혼란함을 겪는다. 이야기 흐름에 큰 전환이 이루어지고 메시지의 전달 방식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을 때쯤이면 전체적 맥락에서 각 대목의 변화와 전환이 저자가 의도한 네러티브적 장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저자는 스탠퍼드 대학의 초대 총장이자 어류학자였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동경한다. 이에 데이비드의 자서전을 탐독하기 시작한다. 과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저자는 19세기까지 발견된 물고기의 1/5 이상의 이름을 명명한 데이비드의 업적에 크게 도전받는다. 생물학자로서 명성을 떨치던 데이비드에게 1907년 발생한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은 엄청난 위기였다. 지진 때문에 데이비드가 세계 곳곳에서 수집한 어류 표본이 든 수백 개의 유리병들이 바닥에 내팽개쳐 파괴되었다. 하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고 물고기 하나를 집어 들고 바늘에 실을 꿰어 물고기의 목살에 이름표를 꿰매기 시작했다. 엄청난 시련에 좌절하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위기를 돌파하는 데이비드의 모습은 삶의 실타래를 풀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는 저자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그의 족적을 계속해서 추적하게 만든다.

책의 중반부까지는 한 어류학자를 존경한 저자의 동경기 혹은 그것을 통해 삶의 긍정을 깨우치는 자기계발서처럼 읽힌다. 하지만 중반부터 저자가 그토록 동경해 마지않던 데이비드의 삶에 악랄한 모순이 있다는 점을 발견하면서 책의 내용과 분위기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흘러간다. 이야기의 흐름이 완전히 뒤집혀 피의자의 범죄를 추적하는 수사 기록,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역사 기록, 과학의 한 분야를 설명하는 교양 서술, 심각한 사회 문제를 고발하는 르포, 여러 경험을 통해 걸쭉한 사유를 이끌어낸 저자의 성장 기록 등이 펼쳐지며 책이 얘기하려는 본 주제를 도출해낸다. 세상 모든 존재는 서로 완벽히 다르며 그렇기에 개별적으로 모두 중요하고 의미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 책을 추천한 유명한 모 유튜버는 "보수적인 입장의 크리스천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책"으로 평가했다. 저자가 지독한 무신론자이고 다윈의 추종자이며 성(性)적으로는 양성애자라는 것을 감안한 코멘트였을 것이다. 책 곳곳에 다윈의 진화론을 절대 진리로 전제하고 보는 저자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주목한 이유가 있다. 명명과 범주라는 잣대로 존재와 세계에 선을 긋고 다양성을 재단하는 행위는 잘못된 것임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다양성의 존중이야말로 인류가 지켜야 할 보편의 가치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아직도 여기저기 수없이 많은 선을 그으며 살아가고 있다. 정치·종교적인 것은 물론 단순한 사적 개성에 이르기까지. 고백하자면 나도 그랬다.

대략 10년 전의 일로 기억한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밀양의 어느 깊은 산속으로 회사 워크숍을 갔다. 회의를 마치고 산장 야외에서 저녁 회식 자리였다. 술이 어느 정도 취한 영업부 막내 사원이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과장님은 어떤 사안과 가치에 대해 항상 선을 그어놓고 접근하십니다." 그때는 "무슨 개소리야" 하고 넘겼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수록 그 녀석의 얘기가 내 삶 속에서 자주 복기되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다. 나에게는 법칙과 기준이 너무 많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식은 가지각색일 텐데 내 신앙과 신념을 잣대로 선 긋기 하는 태도가 내 언행 속에 크게 존재해 있었다. 나만의 선악의 가치판단이 심했다. 그래서인지 타인과 세계를 좁게 보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많이 나이브 해졌지만 아직도 그 잔존함에 자유롭지 못함은 미완의 숙제로 남아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은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개인적으로 힐링 서적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힐링 서적이든 종국적으로 자기계발서와 매한가지라는 독서의 경험적 축적 때문이다. 이 책도 과학 에세이의 형식을 빌리긴 했지만 메시지 측면에서는 분명한 힐링 서적이다. 저자 자신이 닥친 삶의 위기에서 한두 세대 이전의 과학자 평전에서 답을 찾겠다는 설정 자체가 작위적인 면도 없지 않다. 어떻게 보면 모든 메시지가 저자 개인을 위한 변명이자 수식어로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의 탁월함은 저자의 작위성과는 별개로 내용의 정교한 구성과 저자의 문장력이 진부한 메시지를 압도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있다. 술술 읽히는 매끄러운 번역은 덤이다. 에세이란 장르에서 스토리텔링이 얼마나 중요한 지 이 책은 정점의 수준에서 독자에게 보여준다.

서평을 정리하자. 서두에 언급한 대로 좋은 책은 반드시 입소문을 타고 독자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된다. 저자가 국내에 잘 알려진 유명 작가가 아니고 출판사에서 대대적 홍보행사를 한 것도 아님에도 이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유다. 환언해서 평가하자면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목이 풍기는 기묘한 호기심만큼이나 매혹적인 에세이다.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메시지를 음미하며 여유 있게 지평을 넓혀 읽으면 충분히 감동할 수 있을 것이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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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약을 모른다 - 교양으로 읽는 마약 세계사
오후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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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으로 OTT 서비스가 인기다. 넷플릭스, 디즈니 플러스, 쿠팡 플레이 등 국내외 OTT 사업자들의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국내 소비자는 즐거운 선택의 숙제에 빠져 있다. 더욱이 최근 국내에서 제작된 넷플릭스 드라마의 인기가 녹록지 않다. <킹덤>, <오징어 게임>, <마이네임>, <지옥> 등 한국 드라마는 넷플릭스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 시청자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평소 드라마를 즐겨 보지 않던 나도 넷플릭스에 수록된 다양한 해외 드라마의 목록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중 가장 인상적으로 본 드라마가 남미 마약의 역사를 다룬 <나르코스> 시리즈다. 세계 최대의 마약 제국을 건설한 콜롬비아의 마약왕 에스코바르의 일대기를 다룬 실화다. 엄청 재미있다.

미국에서 제작된 수많은 범죄 영화와 드라마가 마약을 소재로 한다. 마약 청정국으로 불리는 한국적 관점에서 마약은 딴 나라 이야기가 아니냐 할 수 있겠지만 미국을 위시한 소위 선진국 클럽에 속한 대부분의 국가는 마약에 제법 크게 노출되어 있다. 마피아, 삼합회, 야쿠자 등 세계 최대 규모의 범죄조직과 연관되어 있고 지하세계에서 유통하는 물동량도 어마어마하여 이를 모르면 미국 범죄 영화나 드라마를 이해하는데 수월치가 않다. 이에 현대사 공부도 할 겸 교양 수준 정도의 마약 관련 책을 찾았다.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는 그렇게 내 손에 들어왔다.

'2019 세종도서 교양 부문 우수작'이라는 홍보문구를 책 표지 전면에 배치한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는 마약의 역사와 종류를 알려주는 책이다. 학술도서나 전문서적이 아닌 대중교양서다. 전문적이지는 않지만 마약에 관한 개괄적 내용을 잘 정리했다. 저자 오후는 마약 전문가가 아니다. 기자나 작가로 세계 많은 곳을 여행하며 이것저것을 보고 공부하는 걸 취미로 삼는 사람이다. 유튜브 방송을 통해 개인적으로 학습하고 메모한 내용을 정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바로 이러한 저자의 비전문성이 이 책의 강점이다. 학술적이지 않고 가르치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지인과 소주 한 잔 먹으며 나누는 얘기처럼 쉽고 친근한 문체로 마약에 관해 들려준다. 그래서 더 흡입력 있게 읽힌다.

앞서 언급한 대로 아직까지 대한민국은 마약 청정국으로 분류된다. 마약거래가 아예 없지는 않지만 타 선진국에 비해 유통되는 양이 상대적으로 적은 탓이다. 술·담배에는 관대한 데 비해 유독 마약에 대해서는 상당히 엄격하고 보수적인 한국적 정서가 작용된 탓도 있다. 가령 국내에서 불법인 대마초는 네덜란드에서는 합법이다. 대마초 정도는 미국이나 네덜란드에서는 즐거움을 위한 기호로 논란 없이 사용된다. 저자는 마약과 관련해 나라(문화)마다 정서와 수용의 온도가 다름을 밝힌다. 물론 저자가 마약 찬양론자는 아니다. 해외 사례를 두루 살피면서 국내 사례에 국한되어 있는 한국 대중의 마약 관련 정보를 국제적으로 탐색해 보는 것이다.

저자가 정리한 마약 정보는 흥미롭고 체계적이다. 마약은 제조 방식에 따라 대마, 아편, 코카인 같은 천연마약과 필로폰, LSD, 엑스터지 등 합성마약으로 나뉜다. 이 중 합성마약은 대부분 일반 약을 만드는 과정에서 발명돼 흥미로움을 더한다. 또 천연마약 중 코카인은 약효의 지속시간이 짧고 각성 효과가 크다는 점을 이용해 일부 화이트칼라들이 업무 중 농도를 약하게 해 복용하기도 한다. 국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필로폰은 과거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에서 감기약을 만들다 발명된 약품이다. 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게 대량으로 투여됐지만 종전 이후 일본에서 마약으로 분류되며 투약과 생산 모두 금지됐다. 이에 우리나라가 중간 생산기지로 부상해 일본에서 소비되지 않은 물량이 범죄 조직의 루트를 타고 국내 곳곳에 퍼지게 됐다.

마약은 인류와 친밀한 관계였다.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그림, 토기를 보면 양귀비, 대마, 코카, 환각 버섯 등을 사용한 자료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히포크라테스도 아편을 고통의 구원자라 부르며 '명약과 독약의 차이는 복용 비율에 의존한다'고 했듯이 가치중립적으로 마약을 바라보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신성한 존재로까지 보아서 그리스 로마 신화에도 신이 등장할 때 양귀비가 함께 있기도 한다. 이런 마약이 인류와 거리를 두게 된 이유는 기독교 때문이다. 덕인지 탓인지 모르겠으되 기독교는 술과 마약을 강력히 금지시켰다. 그 여파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외 마약과 관련한 여러 정보를 저자는 특유의 해학적 문체로 흥미롭게 기술한다.

저자의 논지에 한 가지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기독교를 바라보는 저자의 부정적 시선이 그것이다. 저자는 책 곳곳에서 은밀한 방식으로 기독교를 조롱하고 비하한다. 종교가 마약보다 나을 것 없다는 주장을 농담 식으로 내비친다. 종교도 마약의 한 분야이며ㅡ물론 농담이라고 선을 그었지만ㅡ차라리 마약을 하는 게 낫다는 투로 비아냥댄다. 마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희화화하는 것 같다. 특히 기독교를 가부장제에 함몰된, 여성 혐오가 가득한 종교로 규정한 부분은 기독교에 대한 저자의 비뚤어진 시각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기독교 역사의 일부를 떼어내 마치 인권을 유린하고 여성을 핍박하는 종교인 양 주장하는 저자의 논지는 책 전체 맥락에서 어색하고 어설프다. 아쉽다.

간간이 보이는 저자의 편견스러운 종교관을 제외하고는 크게 무리 없는 교양서다. 최근에는 국내에서 마약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와 사회 전반에 큰 파장을 미치고 있다. 더 이상 마약 청정국이라는 닉네임을 붙이기 힘든 대한민국의 현실을 고려할 때 마약 정보를 다각도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긴요하다. 마약의 세계적인 규모와 생산량, 여파와 영향력을 감안하면 교양 수준에서 한 번쯤 정리해놓는 것도 좋을 듯하다. 가볍게 일독 정도 하면 넷플릭스에 수록된 다양한 범죄물을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딱 그 수준에서 권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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