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서재' 운영자 다윗입니다. 블로그에서 정치에 대해 얘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책 블로거로서 정치적 발언을 자제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이곳은 책과 작가에 대한 담론을 형성하고 토론하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이웃들에게 꼭 당부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 몇 자 적고자 합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서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도 아닙니다. 성숙한 시민의 책임과 의식에 관한 것입니다.

   내일은 제 20대 국회의원 선거일입니다. 각 당의 공천과정에서 국민들은 우리정치의 온갖 추함과 후진성을 목도했습니다. 제 주변을 둘러보면 많은 사람들의 실망과 분노를 어렵지 않게 확인하게 됩니다. 대개 극한 분노는 비아냥으로 치환됩니다. 투표를 안 한다고 선언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해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국민의 소중한 권리이며 의무인 투표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국민으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지도 않으면서 '헬조선'이라 외치고 위정자를 비판하며 국가권력을 조소하는 것은 결코 건강한 모습이 아닙니다. 자유와 책임이 하나의 셋트이듯이 권리와 의무도 한 셋트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선거를 하지 않는 행위도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유이자 권리라고 말합니다. 일견 맞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옹호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우리나라의 어두운 현실이 있습니다. 한국의 투표율은 상당히 낮습니다. 낮아도 너무 낮습니다. 대한민국은 투표 안 하는 민주공화국입니다. 선진국이 투표율이 낮다구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은 5세 때부터 실전에 가깝게 투표를 가르칩니다. 그리고 각자가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에 대해 토론하고 논쟁합니다. 1인당 GDP 5만 불의 북유럽 복지국가 스웨덴의 지난 국회의원 투표율은 85,8%였습니다. 스웨덴은 의무투표제를 시행하지도 않는 나라입니다.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떤가요. 2000년부터 2009년까지 10년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평균 투표율은 71.4%였습니다. 2010년 5월 유엔 공인 ‘민주주의·선거 지원 국제기구’(IDEA)가 발표한 수치입니다. 이 조사에서 한국은 56.9%의 투표율로 최하위권인 26위에 머물렀습니다. 한국보다 투표율이 낮은 나라는 멕시코(56.1%), 슬로바키아(55.0%), 폴란드(50.5%), 스위스(46.8%) 뿐입니다. 투표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호주(94.8%), 벨기에(91.4%), 덴마크(86.1%) 등입니다. 미국이나 일본도 68.9%와 62.6%도 한국보다 높았습니다. 요컨대 선진국일수록 투표율은 높습니다. 투표 안 하는 게 자랑이 아니란 말입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완전함을 선택하는 제도가 아닙니다. 각 개인으로부터 발현된 개별성 가운데 가장 나은 것을 지향하며 찾아가는 제도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소수를 주목하고 패자를 위로하는 제도입니다. 인간사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인간의 지식과 이성은 불완전하고 인간이 만든 제도와 시스템은 오류와 한계를 갖습니다. 그렇기에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차선이 아니면 차악을 선택하고자 하는 실시간적 고민이 유권자에게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현재완료가 아닌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항상 생각하고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뽑는가'는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투표하기 전에 한 가지 선행되어야 할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각하기'입니다. 아무런 생각없이 1번을 찍거나 자동반사적으로 2번을 찍거나 하는 등의 관습적·수구적·비사유적 투표행위는 올바른 주권행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행동과 결정을 할 때 반드시 '생각하기'라는 인간 유일의 숭고한 차원을 관통해야 합니다. 자신이 가진 지식, 경험, 양심, 신앙, 비전, 사상, 이념, 철학 등을 총동원하여 깊이 고민하고 사유하며 자기만의 최고의 선택을 추출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선행된 선택이라면 1번이든 2번이든 몇 번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생각하지 않는 건 죄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그의 저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진실과 거짓 등을 제대로 보려하지 않은 채 구조적이고 편견적인 무지에 빠져 있는 인간의 양심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철학적 기제로 비판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대량학살을 주도했던 나치스 친위대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열린 전범재판에서 그는 "자신은 단지 공무원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칸트의 정언명령을 인용하면서까지 자신의 무죄를 변론했습니다. 이러한 아이히만의 모습에서 아렌트는 악의 기운을 엿봅니다. 아렌트는 결국 자신의 명저를 통해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 어떤 구조로 악을 평범화하고 비속화하는지를 신랄하게 고발합니다. 아렌트의 선언은 20세기 가장 시원하고 냉철하고 위대한 고발로 인류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자들의 '악의 비속성'으로 인해 어두웠고 암울한 터널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사유'는 권리가 아닌 의무입니다. 인간의 도리입니다. '생각하기'는 인간 품격의 바로미터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인간으로 태어난 존귀한 존재입니다. 보다 행복한 개인, 보다 화목한 가정, 보다 나은 사회는 끊임없이 사유하고 용단하는 개인의 책임있는 선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투표하십시오. 그리고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십시오. 그리고 또 생각하십시오. 행동은 그 다음입니다. 이 끊임없는 개인의 사유과정 속에 우리 정치의 밝은 미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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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깨우는 33한 책
송복.복거일 엮음 / 백년동안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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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소개하는 책을 좋아한다. 좋은 책은 많이 소개되고 널리 알려져야 한다. 인간의 수명은 세계의 모든 책을 읽을 만한 능력을 담지 못한다. 인간은 유한하고 책은 무한하다. 인생은 짧고 독서는 길다. 좋은 책을 골라 인간의 유한성 안에서 녹여내야 한다. 반드시 책을 골라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를 깨우는 33한 책>은 여러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자신만의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자유주의 입문서 33권을 소개한 책이다. 송복 교수와 복거일 작가가 33편의 리뷰를 엮었고 그외 많은 지식인들이 공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자유를 바라지만, 자유주의가 싫은 당신이 진짜 자유와 가짜 자유를 구별하는 법을 배우는 이 시대 최고의 자유주의 입문서'라는 부제는 매력적이다. 각 저자마다 다른 개성과 문체로 안내하는 총 33편의 책들을 소개받는 건 독자로서 큰 기쁨이다.

   이 책은 제작년에 출간된 <나는 왜 자유주의자가 되었나>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나는 왜 자유주의자가 되었나>가 여러 공저자의 자유주의로의 여정을 담은 책이라면 <나를 깨우는 33한 책>은 저자 자신이 자유주의자가 되는데 큰 보탬을 준 책들을 소개한 책이다. 그렇기에 두 책 공히 공저자가 서로 겹치며 엇비슷한 내용을 공유하기도 한다. 두 권을 같이 읽으면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국내 자유주의 지식인의 현재적 계보를 훑는데도 도움이 된다.

   자유주의 입문서를 표방한 책이기 때문에 여러 자유주의 고전들이 눈에 띈다. 하이에크의 <치명적 자만>과 <노예의 길>, 바스티아의 <법>,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와 <자본주의와 자유>,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 오웰의 <1984> 등은 전체주의의 악마성을 고발한 자유주의의 명저로 꼽히는 책들이다. 각 공저자는 본인이 소개하는 책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고 어떤 메시지를 담았는지 각자의 입장과 방식으로 리뷰한다. 각기 다른 시각과 개성으로 책을 소개하기 때문에 그 다양성을 맛보는 건 이 책을 읽는 가장 큰 백미다.

   소개된 책 중에서 눈에 띄는 책들을 몇 권 소개한다. 이영훈 교수의 <대한민국역사>는 해방 이후부터 1987년까지의 역사를 다룬 현대사 책으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빛과 그림자를 균형있게 수록한 명저이다.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전체주의 비판의 교과서로 불리는 불멸의 저작이며,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의 저작들도 경제적 자유주의의 올곧은 가치를 설파한 명저로 꼽힌다. 오웰의 <1984>는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이며 다쿠오의 <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도 스미스 경제학을 일반인 수준에서 읽는데 가장 적확한 책으로 꼽힌다. 주옥같은 책들의 리스트를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의 자유주의 향연으로 점철될 수 밖에 없는 책의 존재적 한계는 특정사상의 어느 일면만을 다루는 오류를 포함한다. 집필 사정상 공저자 대부분이 우파 경제학자와 교수인 점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자유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찬양에만 일관한 점은 아쉽다.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에 대한 도전이 어느때보다 맹렬한 시점에서 이에 대한 문제점과 그림자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부재한 점은 씁쓸하다. 한국의 자유주의는 소위 미국식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와 맥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어느 한 사상의 일면만 부각한 한계를 제외하고는 이 책의 매력은 꽤 유효하다. 선술했듯이 주옥같은 명저들을 소개받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책임을 다했다. 자유주의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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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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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베스트셀러를 집었다. 일본 철학자 겸 작가인 기시미 이치로가 쓴 『미움받을 용기』는 올 한 해 국내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책이다. 이 책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서점에서 동시에 최장기 베스트셀러 기록을 경신하며 지금도 1위에 올라 있다. 주변에서 이 책에 대한 내 호오를 묻는 질문들이 적지 않이 쏟아졌다. 신념적으로 자기계발서를 멀리해온 나에게 이 책은 이러한 주변의 화려한 요소를 배경으로 들어왔다.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이라는 부제를 단 『미움받을 용기』는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의 심리학을 이야기 형식으로 소개하는 책이다. 책 속의 '청년'과 '철학자'는 저자의 메시지를 전하는 단 두 명의 화자다. 청년이 묻고 철학자가 답하는 식으로 구성된 이야기 구조는 독자에게 친근함을 준다. 삶의 저변에서 힘든 싸움을 하는 어느 청년이 아들러 심리학의 전도사인 한 철학자를 만나 여러 인생의 가치에 대해 토론하고 배우는 내용이 이 책의 기본 얼개다.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간단하고 명확하다. 아들러 심리학의 견해에서 기존 프로이트 학문의 보편적 속성을 재단한다. 심리학계의 정론으로 보편화된 프로이트의 "원인론'은 인간의 삶을 과거에 예속시키기 때문에 올바르지 않다고 비판한다. 반면 아들러의 '목적론'은 오직 현재에 충실한 개념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의 삶을 추동케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에 대한 타자의 평가에 구속되지 않는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하다고 설파한다.

   저자는 책 속 철학자의 목소리를 빌어 개인이 사회적인 존재로 살고자 할 때 직면할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 그것이 곧 인생의 과제임을 제시한다. 철학자가 인생의 과제를 극복하기 위한 행동목표로 '자립할 것'과 '사회와 조화를 이룰 것'을 강조하는 대목은 되새길 만하다.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 제목이
마치 외부의 사회적 관계와는 무관한 '절대적 나'로서의 삶을 촉구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세계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위험한 책은 아니다.

   그렇다고해서 이 책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좋은 책으로 평가하기는 힘들다. 내용은 좋은데 A4용지 두세 장이면 설명할 것을 지나치게 길게 써놓았다. 독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대화 형식의 구도를 취한 건 나쁘지 않다. 하지만 청년과 철학자 둘만의 대화에 사실성이 결락되는 측면이 있다. 이에 작위적이란 느낌이 몰입을 방해한다. 근래에 자존감이 깍인 채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조아리는 젊은 친구들에게는 따뜻하게 들릴 수 있으나 인간 삶 보편적 가치를 담아내지는 못한다.

   설득의 부재로 인해 단선적 주문에 머무는 전달력도 아쉽다. 공동체 정신이 곧 행복이고 타인이 나를 어떻게 취급하든지 대가 없이 공동체에 기여하고 복무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는 중국 전국시대의 묵자의 가르침과 같이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이상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맹자는 묵자 사상을 두고 듣기에는 좋은 소리로 들리나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니 세상의 질서가 없어지고 실질적인 사랑은 도태될 것이라며 경계한 것이다. 이상세계에 대한 당위를 모호한 선언으로 희석하여 디테일의 결핍을 초래한 현실인식은 과잉된 자아만 부추기는 꼴이다. 이러한 현실도피적 경향은 이 책이 심리학의 탈을 쓴 자계서라는 비판을 받는 가장 적확한 논거다.

   이 책에 대한 소원한 평가는 평소 자계서를 멀리해온 내 태도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이 책을 감수한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책의 첫 장을 여는 '감수 및 추천의 말'에서 "어설프게 위로하고 빤한 인생과 꿈을 이야기하는 자기계발서는 질색"이라며 이 책은 그런 부류와는 구분된다고 추천사를 남겼다. 동의할 수 없다. 이 책도 자기계발서의 구조적 모순에 자유롭지 못하다. 교묘한 선동, 저자만의 기준, 무의미한 합리주의, 뜬구름잡는 달콤한 소리 등으로 인간의 행복을 이상세계에 대한 잠시성(暫時性, transiency)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넣는다는 점에서 여느 자계서와 본질의 차이는 없다는 게 내 총평이다.

   얼마전에 교회 후배가 나에게 자기계발서에 대한 비판적인 주관을 일반화하지 말라고 조언한 적이 있다. 사람마다 책을 고르는 기호는 다른 것이며 혹자는 계발서 한 권으로 유의미한 삶의 긍정을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틀린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접근은 독서의 질을 하향평준화로 몰아가는 기제다. 모든 가치기준에 자신만의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고 다양성의 환원으로만 후퇴하는 방식은 비평의 영역에서 가장 비겁하고 치졸한 짓이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읽어야 할 책은 많다. 꼭 읽어야 할 책을 고르고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남은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책읽기의 밀도 차원에서 『미움받을 용기』는 그리 추천할 만한 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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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리학, 지식권력의 탄생 - 조선시대 문묘 종사 논쟁 읽기 지식전람회 35
김용헌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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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다. 건국이념이 성리학이었고 518년 동안의 지배사상으로서 단 한 번도 공격을 받지 않았다. 조선의 집권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은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만들려는 꿈과 의지가 가득했다. 정도전이 그랬고 조광조가 그랬다. 그렇기에 조선시대를 심도있게 탐구하기 위해서는 성리학에 대한 기본 이해는 꼭 필요하다.

   『조선 성리학, 지식권력의 탄생』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계보를 훑고 있는 책이다. 책의 부제는 '조선시대 문묘종사 논쟁 읽기'다. '문묘(文廟)'란 공자를 받드는 사당을 말하고 '종사(從祀)'란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다. 즉 문묘종사란 공자와 함께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다. 문묘의 중앙에 공자가 있고 그의 학통을 이어받은 인자·증자·자사·맹자 등 4성(四聖)을 배치한 후 수제자들인 십철(十哲)과 주희·주돈이·정호·정이 등 송나라 6현(六賢)을 좌우로 배열했다. 여기에 함께 종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리학 국가 조선에서 공자와 같이 종사된다는 건 엄청난 영예이다.

   저자 김용헌 교수는 중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문묘종사의 논쟁사를 통사적으로 기술한다. 주지하다시피 고려 충신 정몽주는 조선건국을 반대하여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했다. 정작 정몽주를 복권시킨 건 태종 이방원 본인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정몽주를 조선 성리학의 시조로 삼는 것에 대해 당시 사대부들은 이견이 없었던 듯하다. 결국 정몽주는 조선 최초로 중종 대에 문묘에 종사된다. 이후 선조 대에 대대적으로 집권한 사림세력은 '오현종사운동'을 펼치며 문묘종사에 대한 논쟁을 이어갔다. 그 결과 광해군 대에 김굉필·정여창·이언적·조광조·이황을 문묘에 종사하게 된다.

   조식과 이황의 라이벌 구도,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 이황과 이이 철학의 차이 등등. 흥미로운 주제가 책의 후반부를 장식한다. 사단칠정 논쟁의 의미와 주기론과 주리론의 차이는 한국철학사에서 가장 흥미롭지만 난해한 주제로 꼽힌다. '사색당파', '예송논쟁'과 같이 조선사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하면서도 머리속에는 쉽게 정리되지 않는 테마인 것이다. 거침없이 서술한 저자의 요약은 명료하고 깔끔하다. 저자는 퇴계 학파와 율곡 학파의 차이를 기술하는 것으로 책의 말미를 갈무리한다.

   선술했듯이 이 책은 조선사를 성리학의 계보로써 관통한다. 문묘종사에 대한 사대부들의 논쟁을 중심으로 조선사를 훑고 있다. 그렇기에 기초적인 조선왕조사의 흐름을 개괄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읽어내는데 벅찰 수 있다. 성리학에 관한 기본 이해가 전제되면 더욱 쉽게 탐독할 수 있다. 내용 자체는 어렵지 않으나 문묘종사라는 줄기만으로 기술한 책이기 때문에 어느정도의 지적 맥락은 확보하고 읽는 게 풍요로울 것이다. 서평의 구조적 관점에서 책의 말미를 급하게 끝맺는 분위기는 아쉽다.

   21세기 자유민주주의와 고도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 성리학적 관점에서 세상을 본다는 건 불가할 뿐만 아니라 고리타분하다. 나 또한 조선의 패망원인을 교조화된 성리학 체제에 매몰되어 종국적으로 애민(愛民) 없는 세상을 만든 조선 집권세력의 무능에서 찾는다. 사실 조선왕조의 붕당사와 후기의 패망과정은 성리학에 대한 이해 없이는 풍성하게 수용하기 힘든 측면이 없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유교 성리학은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 개괄해야 할 숙명적 과제이다. 이런 차원에서 『조선 성리학, 지식권력의 탄생』은 조선 성리학사를 조망하는데 보탬이 될 책이다. 조선사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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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교과서 문제로 나라가 시끄럽다. 박근혜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층인 37%정도가 국정화에 찬성하고 있다. 반대는 절반을 넘어섰다. 시간이 갈수록 무응답층의 비중이 반대쪽으로 돌아서고 있다. 국정화 문제는 최근 우리사회의 가장 큰 이슈였다. 그렇기에 공중파를 비롯한 여러 채널에서 열띤 토론이 진행 중이다. 그중 13일 방송된 JTBC <밤샘토론>은 단연 눈에 띄었다. 국정화 반대 패널로 출연한 유시민의 활약이 타 패널들을 압도하며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어냈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토론을 시청하며 "내공있는 지식인의 '말'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봤다.

   학창시절을 떠올려보자. 어느 학년이나 유독 잘 가르치는 교사가 있고 유난히 못 가르치는 교사가 있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강의는 말로 하는 것이다. 명강의로 학생을 압도하는 교수가 있는 반면 강의 내내 졸음과 지루함을 유발시키는 교수도 있다. 중요한 건 가르치는 자의 학벌과 이력이 '잘 가르침'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개인의 학벌과 지력이 높다고 해서 잘 가르치는 건 아니다. 말을 잘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능력이다.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서 누구나 말을 잘하지는 않는다. 물론 똑똑한 사람이 말 잘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적 콘덴츠를 갖춘 건 맞다. 하지만 그것이 '말 잘함'의 하드웨어적 시스템까지 규정하지는 못한다. 달변에는 여러 스타일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듣는 이의 동의와 공감을 이끌어내는 역량은 필수적인 요소로 고려된다. 자기 혼자 허공에 대고 지껄이는 행위를 말 잘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화자와 페이퍼 사이의 교류는 말 잘함의 학습과정에 불과하다. 말을 잘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자신의 내면 속에 있는 감정과 정보를 외부로 잘 표출해내는 능력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이 오롯하게 형성될 수 있는 역량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페이퍼에 기록된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는 1차원적 행위를 참된 지식인의 역할로 보는 것 같다. 입시와 학벌 위주의 사고방식에 경도되어 있는 한국의 사정을 고려했을 때 그 동인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지식인의 역할은 공부가 아니다. 지식인의 참된 역할은 자기 내면에 'input'된 지식과 정보를 정갈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소매화하여 바깥(대중)으로 'output'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output'된 지식과 정보를 타자가 어떤 긍정으로 'input'하는가에 따라 지식인의 자질과 역량은 결정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내공있는 지식인의 원형이 도출된다.

   아무리 고매한 지식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타자에게 전달되어 생동하지 않는 한 그것은 죽은 정보에 불과하다. 예컨대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유가 무엇인가. 공산주의자들은 페이퍼에 기록된 지식과 정보만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오만한 착각에 함몰됐다. 인간 이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은 공산주의자들의 사상적 기초다. 그들은 '시장(market)'으로 불리는 인간 내면 속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지식과 정보의 교류 혹은 부딪힘의 장을 철저히 무시했다. 인간들 사이에 발생하는 다양한 부딪힘의 점증과정은 인간 내면에 체화된 지식으로 남는다. 페이퍼적 지식은 그것을 담지 못한다. 그렇기에 힘이 없다. 참된 지식은 반드시 사람들 사이를 휘젓고 날아다닌다.

   오래전 마르크스는 지식인의 임무를 해석에서 변혁의 차원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지식인이 가진 지식과 정보가 자기 안에 고착된 상태로 정지해 있어서는 안 된다. 또한 바깥으로 내보내는 방식이 조악하고 경박해서 종국적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태에 직면해서도 안 된다. 꾸준한 학습과 자기관리, 현실 문제에 대한 객관적 인식, 대중여론의 분석과 수렴, 극단과 거리를 두는 중용적 자세, 세련된 말과 글 등은 내공있는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요소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은 필수조건이다.

   나는 아무런 교훈과 의미를 담지 않은 쓰레기 같은 배설물을 토해내는 우리시대의 많은 지식인들의 모습에 자주 분노한다. 얼핏 봐서는 정의를 위해 울부짖는 모양새지만 진지하게 그들의 분출물들을 천착해보면 치졸한 허위와 졸렬한 가식으로 가득 차 있다. 대개 실력 없는 사람이 태도도 꼴불견이다. 물론 공부는 많이 했다. 서울대를 나왔고 외국에서 공부했으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머릿속 지식은 녹록지 않다. 그러나 말하는 방법을 모르거나 말 할 능력이 부재하다. 즉 'output'의 역량이 보잘것없기에 그 공백을 단순적 말장난으로 감추는 것이다. 그런 싸구려 수사를 지식인의 위트와 재치로 바라보는 혹자들의 '박애주의'가 안쓰럽다.

   이런 배경에서 유시민이라는 지식인의 존재는 한국사회에서 보물과 같은 것이다. 과거 "옳은 말도 싸가지 없게 한다"는 비아냥이 그를 따라다니곤 했다. 그러나 최근 그의 언행에서 그런 모습을 찾기는 쉽지 않다. 국회의원과 장관을 지낸 국정경험과 그간의 겪은 아픈 상처들이 그를 태도까지 겸비한 완벽한 논객으로 성숙시킨 에너지였을 것이다. 당대에 유시민과 붙어서 말로 이길 논객은 없어 보인다. 나와는 인간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과 정치·사상적 이념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그가 선택한 정치적 결단과 정책적 입장도 대부분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지식을 소매단계로 끌어올려 대중에게 적확하게 전달하는 능력 만큼은 항상 최고의 수준에서 나를 고무하며 설레게 했다. 보수에 유시민과 같은 논객이 없다는 건 서글프다.

   유시민의 말은 수정없이 그대로 옮겨놓으면 책이 될 정도로 정교하다. 그는 구어의 한계인 주술관계의 오류도 범하지 않는다. 말의 마지막을 얼버무리지 않고 정확한 서술어로 끝맺는다. 또한 자신의 'text'에 'context'를 그대로 담아낸다. 즉 말이 맥락이요 맥락이 곧 말이 된다. 그래서 논점을 흐리지 않고 항상 고밀한 논리의 수준을 유지해낸다. 표정과 어휘의 적확성도 뛰어나다. 부드럽게 말해야 할 때는 부드럽다. 힘주어 말해야 할 때는 억양을 높이며 제스처를 부가시킨다. 미리 준비하지 않은 실시간의 감각적 교정으로 감성과 이성의 조화된 언변을 토해낸다. 최고의 경지에 오른 달변가의 모습인 것이다. 응당 지식인의 말빨은 이래야 한다.
 
   글을 정리하자. 지식인이라면 유시민처럼 말해야 한다. "나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 따위를 띠고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그야말로 멋진 웅변이었다. 선술했듯이 말이라는 건 내 안의 감정과 정보를 꺼내 나를 뚫고 타자에게 전달하는 과정이다. 말을 잘 한다는 건 그 과정이 세련되고 정갈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말 잘할 권리'가 있다. 한나 아렌트가 역설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 타인의 입장에서 말하고 생각하지 못한 무능과 결핍의 산물이었음을 상기하자. 유시민의 사자후가 돋보인 토론을 보며 참된 지식인의 아우라와 말 잘함의 본질에 대해 궁구해봤다.

 

 


[사진출처 :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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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5-11-18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7%는 한일합방을 한다해도 찬성하지 않을까요 ㅠㅜ

다윗 2015-11-18 19:5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