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 (합본) 신 :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
김용규 지음 / IVP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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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다 읽었다. 정확히 두 번 읽었다. 900페이지가 넘는 이 두꺼운 책을 2독 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기독교인에게 신(하나님)은 언제나 갈망의 대상이요 뜨거운 감자일 수밖에 없다. 책 내용도 방대한 신학적, 역사적, 인문학적 디테일을 공유하고 있어 술술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특히 저자가 '디아트리베(diatribe)'라는 고대의 수사법, 즉 친근하고 생동하는 일상용어로 바꾸어 독자나 청중을 대화의 상대로 끌어들이고 그들과 함께 담화를 나누는 방식의 문체를 사용하여 심오한 신학적, 철학적 담론을 어렵지 않게 수용할 수 있었다.

 

철학자 김용규의 『신』은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부제가 알려주듯이 제목에서 말하는 '신(神)'은 바로 기독교의 신, 즉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다. 저자는 「들어가는 글」에서 인간이 신에게 다가가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하나는 신앙을 통해서고 다른 하나는 이성을 통해서다. "전자는 은혜롭지만 자폐적이기 쉽고, 후자는 설득적이지만 자주 은혜롭지 못하다"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신앙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며,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라는 안셀무스의 말을 인용하며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 이 책이 표방하는 관점이라고 얘기한다. 즉 『신』은 인문학적, 신학적, 역사적 맥락을 통해 살피는 기독교 하나님에 관한 서술(설명)이다. 

 

책은 총 5부로 나뉜다. 「1부 - 하나님은 누구인가」는 서구의 문학과 예술에서 표현된 하나님의 외형을 소개한다. 「2부 - 하나님은 존재다」는 존재물이 아닌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신성을 탐구한다. 「3부 - 하나님은 창조주다」는 하나님이 세계 만물을 창조하고 초월적 존재로서 어떻게 세계에 내재하는지를 천착한다. 「4부 - 하나님은 인격적이다」는 하나님이 인간과 어떤 식으로 인격적 관계를 맺는지 은혜롭게 성찰한다. 마지막 「5부 - 하나님을 유일자다」는 기독교의 가장 난해한 교리면서 핵심적인 내용인 '삼위일체( 三位一體, trinitas)'에 대해 설명한다. 저자는 총 5개의 파트로 하나님의 존재성(신성)이 역사적·신학적으로 어떻게 인간에게 정립되어 왔는지를 세밀히 추적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 책은 이해의 신앙을 강조한 안셀무스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라는 강렬한 문구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책 곳곳에 수많은 철학자들의 삶과 사상이 소개된다. 그중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주 언급되는데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성인으로 평가받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각기 신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 압도적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의 잦은 등장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외 암모니우스, 오리게네스, 플로티노스 등의 고대 철학자뿐만 아니라 아리우스, 아타나시우스 등의 중세 신학자, 그리고 마르틴 루터, 요한 칼빈 등의 종교개혁가,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헤겔 등의 근대 철학자, 또한 칼 바르트, 에밀 브루너, 파울 틸리히 등의 현대 신학자들까지 전 시대를 아우르는 철학자, 사상가, 신학자들이 소개되며 저자의 서술을 이끌어간다.

 

저자는 하나님을 설명하는 소재로 철학과 신학만 사용하지 않는다. 문학, 역사, 과학, 예술 등의 여러 영역에서 탐구되고 천착된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맥락을 소개한다. 칸트의 철학, 미켈란젤로의 그림, 단테의 시, 다윈의 논문, 카잔차키스의 우화, 파스칼의 경구,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등 각기 다른 여러 매체들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입체성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그런 탓인지 책 속에는 여러 삽화들이 수록됐는데 저자의 설명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입체적 설명을 돕는 역할을 한다. 예컨대 미켈란젤로가 그린 성 시스티나 성당의 폭 13.2미터 길이 41.2미터의 희대의 역작 '천지창조'에 숨겨진 역사적, 인문학적, 신학적 의미를 자세히 감상하는 방식이다. 서양문명을 아름답게 수놓은 예술작품을 삽화로써 눈으로 감상하고 찬란한 문학작품의 인문학적 리뷰를 읽어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4부 - 하나님은 인격적이다」라는 장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고난의 아이콘 욥의 삶을 비교 추적하며 하나님의 인격성을 설명한다. 사르트르를 위시한 현대 실존주의자들이 고민했던 '부조리(不條理, absurdity)'의 문제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상세히 소개한다. 요는 이렇다. 하나님 앞에서는 거룩한 침묵이 필요한데 아브라함은 믿을 수 없는 것(부조리)을 믿었기 때문에 침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키르케고르가 역설한 인간 성숙의 3단계 중 가장 높은 '종교적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를 아브라함이 잘 실행했기 때문임을 부언한다. 이러한 저자의 서술은 인격적 하나님을 만난 성경인물의 예를 추적(분석)함으로써 수 천 년이 지난 작금의 현대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감동과 도전을 준다.  

 

마지막 장 「5부 - 하나님을 유일자다」는 '삼위일체론'이라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다루는 장이다. 기독교 신학은 처음부터 성부·성자·성령이 하나라는 것을 주장했고, 325년 열린 니케아 공의회 이후 그것을 교리로 정립한 바 있다.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인격성의 실체이자 정수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을 만나 그의 형상을 눈으로 직접 보고 그의 음성을 귀로 직접 듣지 않아도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더 나은 처지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할 수 있는 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이란 가장 난해한 신성이면서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이며, 은혜롭고 감동적인 교리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초기 기독교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주제였다. 318년 아리우스 논쟁에서 시작되어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마감될 때까지 63년간 삼위일체론은 교회 회의를 통해 신조 형태로 고정되었다. 이쯤에서 내 고백을 보태겠다. 삼위일체의 교리사 중 나는 반아리우스주의자이자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인 아타나시우스의 용기와 기백을 가장 인상적이고 은혜롭게 수렴하고 있다. 과거 청년 시절에 아리우스-아타나시우스 논쟁을 성극으로 꾸밀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의 감동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들은 구세주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들이 곧 하나님이다"라고 외치는 아타나시우스의 강변은 아직까지도 내 가슴에 아로새겨져 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신성의 고차원적 독특성인데 이를 인간의 글로 표현하거나 그림으로 그려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존재방식은 인간의 이성체계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책에서 소개된 시인 단테와 화가 루블료프의 고민도 여기에 닿아 있다. 

 

젊은 시절 삼위일체론에 대한 이성적 이해가 불가능해 수많은 질문이 내 신앙을 짓눌렀던 때가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가장 뜨거웠다고 자부할 수 있는 시기였지만 젊은 치기에 뭐가 그리 궁금하고 의심이 많았던지 하나님의 존재성과 섭리 방식, 교회 교리에 관한 이성적 납득을 예민하게 요구할 때였다. 그러던 터에 아우구스티누스도 나와 같은 고민을 했었다는 걸 알게 됐다. 기독교사에 한 획을 그은 성인조차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다는 걸 알고 나는 '불가해된 은혜'로 삼위일체를 드디어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 우리가 확실히 밝힐 수 없는 이유를 다름 아닌 인간의 이성과 언어의 한계에서 발견했고, 우리가 육체의 한계와 이에 따른 이성의 한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때에야 이 진리를 완전하게 알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성부·성자·성령의 공동체적이고 동등한 사귐이 곧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삼위일체를 피상적이고 기계적으로만 탐구했던 나의 무지를 아우구스티누스는 전회와 같은 놀라운 지혜와 통찰로 경각한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유독 5부에 많은 관심을 갖고 탐독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인문학으로 톺아본다는 건 종교적(신앙적) 관점에서 보자면 굉장히 발칙한 행위일 수 있다. 하나님은 예배 생활을 통해, 성경 묵상을 통해, 기도와 그 응답 과정을 통해 '은혜롭게' 만나야지 학문적으로 탐구한다는 건 현존하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인격성을 고매한 논리의 틀 안에 가둬버리는 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소중하고 성도의 신앙 지침서가 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같은 여러 신조들도 역사적으로 토론과 협의를 통한 학문적 통과의례를 거친 산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신앙을 더욱 단단하게 한다는 면에서 유의미한 일이라 생각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의도치 않은 장에서 많은 은혜와 감동을 받았음을 고백한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결국 '사랑'임을 강조한다. 현재 인류가 직면한 여러 문제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이름으로 언급되던 '최고의 가치들'이 점차 사라져 가는 데 있음을 지적한다. 기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님의 인격성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은혜롭게 논증한다. 저자의 이런 맥락은 책의 「맺음말」까지 이어지는데 기독교는 결코 독단적이거나 배타적인 종교가 아니며 오히려 고차원적·공동체적 사랑, 즉 상호내주적·상호침투적 자유와 평등과 사랑으로 이룩되는 인간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면서 근대 이후 서양문명의 주요한 특징인 하나님과 그의 이름으로 언급되던 최고의 가치들이 점차 사라져 가는 역사를 맞이함을 경고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숭고한 틀 안에서 이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응당 타당한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시대 가장 잘 나가는 인문학자 유발 하라리가 『호모 데우스』에서 통렬히 경고한 대로 인간은 "신이 죽었다"라고 선언하는 것을 넘어 제 스스로 신이 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우리의 모든 인식과 가치는 상대적으로 재구성된다. 객관적 진리와 과학적 지식은 이론적 담론과 사회적 구성물로 전복되며 시대와 기호에 따라 절대적 진리는 반귀납적으로 역조합된다. 신은 이제 죽음을 넘어 인간으로부터 조롱의 대상으로까지 전락했다. 나는 그것을 피부로 느낀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만으로 주변 지인들로부터 심심치 않게 공격과 비아냥을 받곤 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내 주일성수는 시간 낭비이며 십일조는 자선사업으로 조롱당한다. 신을 부정하면 가치가 사라져 버리고 신을 긍정하면 더 이상 세련되지 않다고 핍박받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혼란한 시대를 살면서 명징하게 신의 존재를 믿는 나에게 이 한 권의 책은 엄청난 도전과 감동을 선사했다. 

 

서평을 정리하자. 9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인문학(혹은 신학) 서적임에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로 탐독할 수 있었다. 평소 인문학에 관심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공부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읽을 뿐만 아니라 가끔은 은혜롭기까지 해서 나름 유익한 독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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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도시 기행 1 - 아테네, 로마, 이스탄불, 파리 편 유럽 도시 기행 1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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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서의 유시민의 약진이 반갑다. 이제 여행기까지 외연을 확대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역사, 독서, 여행 등 다양한 글감을 주제로 자기만의 글을 뽑아내는 유시민의 역동을 환영한다. 비록 나와 정치적·사상적 입장은 다르지만 글쟁이로서 수준 있는 역량을 갖춘 그를 나는 결코 멀리하지 않는다. 그의 글은 대중적이되 가볍지 않고 잡학적이되 산만하지 않다. 지식에 품격이 있고 감칠맛도 난다. 무엇보다 쉽고 재미있게 쓰는 건 그의 가장 큰 무기다. 좀 안다고 거들먹거리지도 않는다. 내가 그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다.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중단한다고 선언한 이래 유시민은 '작가' 혹은 '지식인'으로 불려왔다. 최근 노무현 재단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세간으로부터 정치 중단의 진정성을 의심받기도 했다. 그는 정치보다 집필과 강연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다. 내가 아는 한 우리 시대 지식인 중 젊은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다. 수많은 청년들이 그의 책을 읽고 그의 강연을 들으며 그의 유튜브 방송을 시청한다는 게 이를 방증한다. 지식의 외연이 넓고 거대 담론을 대중적 언어로 뽑아내는 내공이 탁월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리고 관심을 가진다. 정치 재개 가능성만으로 지식인 유시민의 존재감이 재단돼서는 곤란하다.

 

유시민이 새로운 책을 출간했다. 여행을 주제로 한 에세이다. 신간 『유럽 도시 기행 1』은 작가 유시민의 유럽 여행기다. 각기 다른 시기에 유럽 흥망성쇠의 공간적 배경이 되었던 아네테, 로마, 이스탄불, 파리의 이야기를 담았다. 네 도시는 워낙 유명해서 말이 필요 없을 정도의 세계적, 역사적 아이콘들이다. 작가는 특유의 박식한 지식과 정제된 주관, 실제적 경험을 보태 흥미로운 도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책은 단순한 여행 에세이로 읽히지 않는다. 관광 안내서는 더욱 아니며 단순한 인문학 기행에 머물지도 않는다.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객관)과 작가 스스로 체험하며 느낀 감상(주관)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도시의 모든 것은 '텍스트(text)'일 뿐, 도시의 텍스트를 해석하기 위해 '콘텍스트(context)'를 파악해야 한다"라는 작가의 말은 이 책의 성격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건축과 여행, 역사와 예술을 전공하지 않은 작가의 이 책이 가볍지 않고 재미있게 읽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콘텍스트주의', 즉 외연과 현상에 앞서 맥락과 본질을 주목하는 작가 고유의 진지한 감상 덕분이다.

 

작가가 선택한 유럽의 네 도시는 역사적으로 유럽의 각 시대를 전면에서 대표한 곳들이다. 헬레니즘이라는 서구 문명의 한 축을 담당했던 그리스의 아테네를 가장 우선으로 꼽았다. 오래전 모든 길은 이곳으로 통한다 했지만 '이탈리아 최악의 도시'로 소개한 로마는 그 두 번째다. 1453년 동로마를 멸망시킨 오스만튀르크의 영광이 담긴, 하지만 '다양성을 잃어버린 국제도시' 이스탄불이 그다음이다. '인류 문명의 최전선'으로 작가의 긍정이 유독 돋보이는 파리가 마지막이다. 작가는 특유의 달필로 각 도시의 역사성과 그것을 읽어내는 작가적 주관을 잘 풀어낸다.

 

이 책이 힘이 있는 건 네 도시에 대한 객관적 서술과 실제 여행 중 추출한 작가의 현장성이 적절한 비율로 배합되었다는 점이다. 마라톤과 살라미스로 대변되는 고대 아테네의 황금기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아크로폴리스 야경을 즐기는 만찬을 소개한다. 로마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 카이사르의 삶을 얘기하면서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에 대한 솔직한 감상을 얹는다. 이스탄불 곳곳에 있는 궁전과 박물관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서술하면서 '터키 커피'의 정수가 어떤 것인지를 놓치지 않는다. 파리에서는 나폴레옹의 영웅담을 논하는 동시에 루브르에 대해 '들어가도 들어가지 않아도 후회할 박물관'이라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이러한 객관과 주관의 황금률이 독자로 하여금 책 읽는 맛을 배가시킨다.

 

특히 파리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인상적이다. 작가는 "지구촌의 문화수도를 정한다면 망설임 없이 파리를 선택하겠다"라 하고, "호모 사피엔스가 도달한 문명의 최고봉을 보여주는 도시"라 상찬하며 프랑스 파리에 대한 애착을 요란스럽게 뿜어낸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만큼은 나는 작가의 견해에 쉽게 동의하지 못한다. 도시 자체가 이쁘고 고풍스러워서 품격 있는 도시가 되는 건 아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시민의 수준이 도시의 급을 결정한다. 나는 파리 시민들, 엄밀히 말해 프랑스 국민의 우수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파리는 위대한 도시다. 하지만 그 위대함의 이면에 추악함과 경박성, 그리고 오욕의 디테일이 묻어 있다는 걸 부인하기 힘들다. 자국의 월드컵 우승 축하잔치에서 거리 상점에 불을 지르고 약탈하며 국가를 대표하는 숭고한 문화재(에투알 개선문)를 훼손시키는 등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광기 어린 시민이 과연 세계 문화수도의 주인이 될 수 있을지는 토론이 필요한 주제다.

 

서평을 정리하자. 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작가 유시민의 약진이 반갑고 즐겁다. 유시민은 정치라는 외연을 벗었을 때 더 빛나는 지식인이다. 사람마다 자기에 맞는 옷이 있고 어울리지 않는 옷이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유시민에게는 정치보다는 글과 강의가 더 잘 어울린다. 여행이라는 테마까지 외연을 넓히며 작가적 활동을 이어나가는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반대편의 칭찬은 더욱 힘이 있다. 유시민의 신간 『유럽 도시 기행 1』은 이러한 내 칭찬의 최신판이다. 돈이 아깝지 않은 책이다. 이어서 출간될 2권은 빈, 프라하, 부다페스트, 드레스덴을 다룬다고 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정치색을 버리고 캐주얼하게 읽는다면 즐거운 독서가 될 것이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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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바캉스 에디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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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가 쓴 에세이는 다르다. 결이 다르고 관점이 다르다. 수필가가 소설가보다 글발이 못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소설은 허구의 세계를 완전히 새로 창작해야 하는 영역이다. 하지만 에세이는 다르다. 에세이에서 중요한 건 창조나 전개가 아닌 일상의 포착이다. 삶 속에서 촉촉한 글감을 추출해내는 능력이야말로 읽을 만한 에세이가 씌어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김영하라는 이름을 오랜만에 만났다. 김연수와 함께 한국문학을 책임질 투톱의 젊은 작가로 불렸던 그다. '작가론'을 주제로 무명의 평론가와 피곤한 토론을 하다 논쟁이 되자 모든 걸 접고 미국으로 떠나기도 했다. 오랜 침묵이 있었고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 그가 쓴 소설의 원작이 영화로 개봉되고 모 예능에서 온갖 잡지식을 늘어놓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나와는 거리가 있는 얘기였다. 개인적으로 TV를 보지 않을뿐더러 일차적으로 작가는 작품으로 만나고 평가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갑다.

 

『여행의 이유』는 김영하의 최신 에세이다. 직업 소설가로서 그가 경험하고 관조한 여행에 대한 사색을 담았다. 두껍지 않은 책 속에는 소설가 김영하가 여행을 통해 만난 사람과 겪은 체험을 통해 얻은 다양한 사유가 잘 녹아 있다. 소설가답게 짧은 에세이에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는 내공이 탁월하다. 기계적이고 외연적인 의미로서가 아닌 본질 그 자체로서의 여행의 내적 성질을 깊이 탐색한다. 여행을 통해 뽑아낸 다양한 삶적, 작가적, 철학적 고뇌가 웅숭깊게 읽힌다.

 

책은 작가가 중국 여행에서 추방된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후 대학 시절 때 우연찮게 간 중국 여행을 소개하며 계획대로 흘러가는 완벽한 여행보다 매끄럽지 않은 실패한 여행이 본질적으로는 더 성공한 여행이라고 얘기한다. 과연 소설가 다운 글의 시작이요 메시지의 제시다. 여행의 궁극이 결국 현재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완벽한 스케줄에 의해 오차 없이 흘러가는 것보다 끊임없는 변수의 연속선상에서 오직 '지금 여기'에 몰입하는 것을 강조하는 메시지가 아름답다. 작가에게 여행은 존재에 대한 인식이자 응시인 것이다.

 

여행에세이면서도 다른 여러 책들에 관한 인용과 해설이 많이 소개된다. 가끔은 북에세이가 아닐까 할 정도로 작가는 책 소개를 무한히 쏟아낸다. 하지만 과하지 않다. 오히려 '여행의 이유'라는 책 제목과 좋은 궁합을 이룬다. 여행을 통한 경험과 여행에 대한 저자의 주관이 과거 자신이 읽은 여러 고전들의 일면과 자연스럽게 포개어지는 것이다. 특히 책 말미에 여행을 소설과 비교한 대목은 인상적이다. 여행이 일상의 부재라면 소설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다. 현실과 다른 작동 방식의 시간성이 발휘되고, 인간과 세계에 관한 집중력을 고양시키며, 분명한 시작과 끝이 존재하고, 타 관점에서 우주를 천착하게 하며, 언젠가는 반드시 일상으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소설과 여행의 유사성을 탐색하는 작가의 사유가 흥미롭다.

 

작가는 여행의 의미를 깊고 넓게 풀이한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으로 여행을 정의한다. 결국 소설가 김영하의 여행론은 "나 자신을 보다 객관적으로 천착할 수 있는 동기가 된다"라는 여행작가 오소희의 견해와 완벽히 일치한다. 곧 여행은 나 자신을 떠나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임을 일깨우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자각 혹은 대비라는 관점에서 결국 여행은 인간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기회와 가능성을 제시한다.

 

최근 여행 에세이가 봇물 터지듯이 출간되고 있다. 1인당 GDP 3만 불에 도달한 대한민국의 현재상은 앞만 보고 달려온 과거의 무시무시한 속도를 소급해서 제어하려는 듯 여기저기서 힐링에 대한 갈망을 표출 중이다. 여행은 그 최전선이다. 서점에 한 섹션을 할당해 산더미처럼 쌓여져 있는 여행 도서의 방대한 양이 이를 방증한다. 이 가운데 옥석을 구분하는 건 쉽지 않다. 바로 여기에 김영하의 신간 『여행의 이유』의 위치가 있다. 간결하고 묵직한 방식으로 '여행의 이유'에 대해 특유의 감성적 달필로 써 내려간 이 작은 에세이를 쉼이 필요한 모든 독자에게 추천한다. 역시 김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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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 김일성이 일으킨
강규형 외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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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파랑 출판사에서 시의적절한 책을 출간했다. 『김일성이 일으킨 6·25 전쟁』은 강규형 명지대 교수를 위시한 총 5인의 공저자가 6·25 전쟁에 대해 강론한 글들을 엮은 책이다. 공저자 5인의 이력만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책 내용은 '자유 대한민국'이라는 기조에서 6·25 전쟁의 성격을 생동감 있게 풀이한다. 많지 않은 분량 가운데 당시의 참혹한 사진과 여러 수치들을 인용하며 6·25 전쟁의 객관적 민낯을 서술한다.

 

   책 제목에 주목하자. 제목의 구조를 살펴보면 '김일성이 일으킨'이라는 형용구가 '6·25 전쟁'을 수식하고 있다. 김일성이 6·25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누가 있을까 마는 사실 이삼십 대 젊은이들로부터 6·25 전쟁은 점차 잊힌 역사가 되어 가고 있다. 6·25 전쟁의 귀책성, 파괴성, 내밀성 에 대해 이해가 결핍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그저 애매하고 말랑하게 '민족상잔의 비극' 정도로만 수렴하고 있는 인상이다. 김대중 정부 때 발병한 북한 정권을 바라보는 사글사글한 증상이 전염병처럼 옮은 것 같다.

 

   6·25 전쟁은 김일성의 발의를 소련의 스탈린이 승인하고 중국의 모택동이 지원한 국제 전쟁이다. 트루먼의 미국은 한반도의 자유를 위해 15개국의 연합군과 함께 이 땅을 지켰다. 자유를 위해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희생됐고 민간인 또한 수백만 명이 사망했다. 6·25 전쟁은 3차 세계대전을 막은 전쟁이자 그것을 대체한 전쟁이었다. 수호해야 할 가치는 '자유'였다. 자유를 지켜낸 자와 지켜내지 못한 자의 차이가 얼마나 대극적인지 6·25 전쟁 이후의 남과 북의 역사, 그리고 현재의 모습을 통해 명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젊은 세대가 6·25 전쟁이 갖는 내·외재적 의미를 깊이 통찰하고, 알아야 할 것을 제대로 알며, 감사해야 할 것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한편 이 책의 한계를 지적하고자 한다. 지나치게 적은 분량과 공저자 5인이 집필했다고 보기 민망한 수준의 기본적인 내용에 아쉬움이 남는다. 완독하는 데 30분이 걸리지 않을 정도로 얇은 두께다. 책 두께와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큰 글씨체와 적잖이 수록된 사진들을 감안하면 본래 100페이지가 채 되지 않을 정도의 분량이다. 또한 5인의 공저자가 무색할 정도로 내용이 단조롭고 일차원적이다. 각 공저자들의 개성과 문체가 하나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책값도 문제다. 도서정가제 이후 나는 출판사가 합리적인 책값을 설정해야 한다고 계속해서 주장해왔다. 6·25 전쟁이 전 세대에 걸쳐 깊이 공부하고 끊임없이 반추해야 할 주제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짤막한 팸플릿 수준의 책으로 11,500원을 받는다는 건 부당하다.

 

   서평을 정리하자. 6·25 전쟁은 소련, 중국(당시 중국공산당), 북한의 철저한 사전 모의와 은밀한 계획에 의해 발발한 침략전쟁이다. 1995년에 공개된 옐친 문서(스탈린 문서)는 6·25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공산 3국이 얼마나 내밀하고 악랄하게 준비했는지를 적나라하게 알려주었다. 6·25 전쟁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밑줄이다. 공산권의 침공에 맞서 이 땅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희생을 치른 선배 세대들과 연합군 참전용사들의 용기에 깊은 경외를 표한다. 자유는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 이 책은 이에 대한 짧은 팸플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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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셀의 서양철학사. 이 어마무시한 책을 다시 집어 들기로 했다. 철학사에 대한 개인적인 지적 열정이 이 수고로움의 본질이겠지만 과히 오랜만에 새로운 번역으로 개정판이 출간되었다는 점이 내 선택을 부추겼다. 금번 개정판은 작아졌으나 두꺼워졌다. 직관적으로 참 이쁘게 생겼다. 철학 책 같지 않게 디자인한 을유문화사의 미적 감각에 박수를 보낸다. 또한 손때가 타지 않게 깔끔한 비닐로 포장해 서점에 진열해놓은 교보문고의 센스도 흐뭇하다.

 

   러셀과 나는 애증의 관계다. 사실 러셀만큼 많은 저작을 남긴 지식인은 드물다. 일평생 78권의 책을 남겼을 정도로 그의 지적 열정은 대단했다. 특히 나는 과거 2008년 네이버후드 어워드 시상식에서 그의 말을 인용해 수상소감을 밝힌 바 있다. 당시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는 고백과 러셀의 명언을 인용한 것 사이에 큰 정신적 오류가 발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몹시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후일 반추해보건대 멋진 수상소감이었다. 요컨대 그 유명한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연민'은 러셀의 말이자 나 다윗의 것이었다.

 

   평생 기독교를 조롱하고 무정부주의자로 살아온 그의 삶이 내게 올곧게 보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를 인정하는 건, 그의 케임브리지 대학 동년배들의 지적 허영, 즉 리턴 스트레이치, 존 메이너드 케인스, 레너드 울프 등이 뒤섞여 온갖 불필요한 담론을 쌓았던 '블룸즈버리 그룹'의 핵심이 되기를 거부했다는 점이다. 또한 기독교를 비판하는 논증의 수준이 과거의 철학자들, 즉 포이어바흐나 니체에 비해 보다 세련되고 정갈했다는 점이다. 관념과 이성의 세계에 함몰되지 않고 실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주목한 그의 지성을 나는 일견 높이 평가한다.

 

   『러셀의 서양철학사』는 호불호가 완전히 갈리는 책이다. 하지만 재미 하나만큼은 끝내주는 책이다. 사람마다 평가는 다르겠지만 그 유명한 힐쉬베르거나 램프레히트의 것도 재미와 박력 면에서는 러셀의 것에 못 미친다. 물론 바로 이 지점에 세간의 호불호가 존재한다. "철학사가 주관과 흥미의 영역이냐"라는 무거운 문제에 부딪히는 것이다. 이에 모든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러셀의 서양철학사』에 빠져 보겠다. 자세한 것은 후일 서평으로 갈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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