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다 읽었다. 정확히 두 번 읽었다. 900페이지가 넘는 이 두꺼운 책을
2독 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기독교인에게 신(하나님)은 언제나 갈망의 대상이요 뜨거운 감자일 수밖에 없다. 책 내용도 방대한
신학적, 역사적, 인문학적 디테일을 공유하고 있어 술술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특히 저자가 '디아트리베(diatribe)'라는 고대의 수사법,
즉 친근하고 생동하는 일상용어로 바꾸어 독자나 청중을 대화의 상대로 끌어들이고 그들과 함께 담화를 나누는 방식의 문체를 사용하여 심오한 신학적,
철학적 담론을 어렵지 않게 수용할 수 있었다.
철학자 김용규의 『신』은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부제가 알려주듯이 제목에서 말하는 '신(神)'은 바로 기독교의 신, 즉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다. 저자는 「들어가는
글」에서 인간이 신에게 다가가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하나는 신앙을 통해서고 다른 하나는 이성을 통해서다. "전자는 은혜롭지만 자폐적이기
쉽고, 후자는 설득적이지만 자주 은혜롭지 못하다"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신앙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며,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라는 안셀무스의 말을 인용하며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 이 책이 표방하는 관점이라고 얘기한다. 즉 『신』은 인문학적, 신학적, 역사적
맥락을 통해 살피는 기독교 하나님에 관한 서술(설명)이다.
책은 총 5부로 나뉜다. 「1부 - 하나님은 누구인가」는
서구의 문학과 예술에서 표현된 하나님의 외형을 소개한다. 「2부 - 하나님은 존재다」는 존재물이 아닌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신성을 탐구한다.
「3부 - 하나님은 창조주다」는 하나님이 세계 만물을 창조하고 초월적 존재로서 어떻게 세계에 내재하는지를 천착한다. 「4부 - 하나님은
인격적이다」는 하나님이 인간과 어떤 식으로 인격적 관계를 맺는지 은혜롭게 성찰한다. 마지막 「5부 - 하나님을 유일자다」는 기독교의 가장 난해한
교리면서 핵심적인 내용인 '삼위일체( 三位一體, trinitas)'에 대해 설명한다. 저자는 총 5개의 파트로 하나님의 존재성(신성)이
역사적·신학적으로 어떻게 인간에게 정립되어 왔는지를 세밀히 추적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 책은 이해의 신앙을
강조한 안셀무스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라는 강렬한 문구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책 곳곳에 수많은
철학자들의 삶과 사상이 소개된다. 그중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주 언급되는데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성인으로 평가받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각기 신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 압도적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의 잦은 등장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외 암모니우스, 오리게네스, 플로티노스 등의 고대 철학자뿐만 아니라 아리우스, 아타나시우스 등의 중세 신학자, 그리고 마르틴 루터, 요한 칼빈
등의 종교개혁가,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헤겔 등의 근대 철학자, 또한 칼 바르트, 에밀 브루너, 파울 틸리히 등의 현대 신학자들까지 전
시대를 아우르는 철학자, 사상가, 신학자들이 소개되며 저자의 서술을 이끌어간다.
저자는 하나님을 설명하는 소재로
철학과 신학만 사용하지 않는다. 문학, 역사, 과학, 예술 등의 여러 영역에서 탐구되고 천착된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맥락을 소개한다. 칸트의
철학, 미켈란젤로의 그림, 단테의 시, 다윈의 논문, 카잔차키스의 우화, 파스칼의 경구,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등 각기 다른 여러 매체들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입체성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그런 탓인지 책 속에는 여러 삽화들이 수록됐는데 저자의 설명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입체적 설명을 돕는 역할을 한다. 예컨대 미켈란젤로가 그린 성 시스티나 성당의 폭 13.2미터 길이 41.2미터의 희대의 역작 '천지창조'에
숨겨진 역사적, 인문학적, 신학적 의미를 자세히 감상하는 방식이다. 서양문명을 아름답게 수놓은 예술작품을 삽화로써 눈으로 감상하고 찬란한
문학작품의 인문학적 리뷰를 읽어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4부 - 하나님은 인격적이다」라는 장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고난의 아이콘 욥의 삶을 비교 추적하며 하나님의 인격성을 설명한다.
사르트르를 위시한 현대 실존주의자들이 고민했던 '부조리(不條理, absurdity)'의 문제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상세히
소개한다. 요는 이렇다. 하나님 앞에서는 거룩한 침묵이 필요한데 아브라함은 믿을 수 없는 것(부조리)을 믿었기 때문에 침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키르케고르가 역설한 인간 성숙의 3단계 중 가장 높은 '종교적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를
아브라함이 잘 실행했기 때문임을 부언한다. 이러한 저자의 서술은 인격적 하나님을 만난 성경인물의 예를 추적(분석)함으로써 수 천 년이 지난
작금의 현대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감동과 도전을 준다.
마지막 장
「5부 - 하나님을 유일자다」는 '삼위일체론'이라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다루는 장이다. 기독교 신학은 처음부터 성부·성자·성령이 하나라는 것을
주장했고, 325년 열린 니케아 공의회 이후 그것을 교리로 정립한 바 있다.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인격성의 실체이자 정수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을 만나 그의 형상을 눈으로 직접 보고 그의 음성을 귀로 직접 듣지 않아도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더 나은 처지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할 수 있는 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이란 가장 난해한 신성이면서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이며, 은혜롭고 감동적인
교리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초기 기독교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주제였다. 318년 아리우스 논쟁에서 시작되어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마감될 때까지 63년간
삼위일체론은 교회 회의를 통해 신조 형태로 고정되었다. 이쯤에서 내 고백을 보태겠다. 삼위일체의 교리사 중 나는 반아리우스주의자이자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인 아타나시우스의 용기와 기백을 가장 인상적이고 은혜롭게 수렴하고 있다. 과거 청년 시절에 아리우스-아타나시우스 논쟁을
성극으로 꾸밀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의 감동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들은 구세주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들이
곧 하나님이다"라고 외치는 아타나시우스의 강변은 아직까지도 내 가슴에 아로새겨져 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신성의 고차원적 독특성인데 이를
인간의 글로 표현하거나 그림으로 그려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존재방식은 인간의 이성체계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책에서
소개된 시인 단테와 화가 루블료프의 고민도 여기에 닿아 있다.
젊은
시절 삼위일체론에 대한 이성적 이해가 불가능해 수많은 질문이 내 신앙을 짓눌렀던 때가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가장 뜨거웠다고 자부할 수
있는 시기였지만 젊은 치기에 뭐가 그리 궁금하고 의심이 많았던지 하나님의 존재성과 섭리 방식, 교회 교리에 관한 이성적 납득을 예민하게 요구할
때였다. 그러던 터에 아우구스티누스도 나와 같은 고민을 했었다는 걸 알게 됐다. 기독교사에 한 획을 그은 성인조차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다는 걸
알고 나는 '불가해된 은혜'로 삼위일체를 드디어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 우리가 확실히 밝힐 수 없는
이유를 다름 아닌 인간의 이성과 언어의 한계에서 발견했고, 우리가 육체의 한계와 이에 따른 이성의 한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때에야 이 진리를
완전하게 알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성부·성자·성령의 공동체적이고 동등한 사귐이 곧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삼위일체를 피상적이고 기계적으로만 탐구했던 나의 무지를 아우구스티누스는 전회와 같은 놀라운 지혜와 통찰로 경각한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유독 5부에 많은 관심을 갖고 탐독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인문학으로 톺아본다는 건 종교적(신앙적) 관점에서 보자면 굉장히 발칙한 행위일 수 있다. 하나님은 예배 생활을 통해, 성경 묵상을 통해, 기도와
그 응답 과정을 통해 '은혜롭게' 만나야지 학문적으로 탐구한다는 건 현존하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인격성을 고매한 논리의 틀 안에 가둬버리는 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소중하고 성도의 신앙 지침서가 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같은 여러 신조들도 역사적으로
토론과 협의를 통한 학문적 통과의례를 거친 산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신앙을 더욱 단단하게 한다는 면에서 유의미한 일이라 생각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의도치 않은 장에서 많은 은혜와 감동을 받았음을
고백한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결국 '사랑'임을 강조한다. 현재 인류가 직면한 여러 문제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이름으로 언급되던 '최고의
가치들'이 점차 사라져 가는 데 있음을 지적한다. 기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님의 인격성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은혜롭게 논증한다. 저자의 이런 맥락은 책의 「맺음말」까지 이어지는데 기독교는 결코 독단적이거나 배타적인 종교가 아니며 오히려
고차원적·공동체적 사랑, 즉 상호내주적·상호침투적 자유와 평등과 사랑으로 이룩되는 인간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면서 근대 이후
서양문명의 주요한 특징인 하나님과 그의 이름으로 언급되던 최고의 가치들이 점차 사라져 가는 역사를 맞이함을 경고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숭고한 틀 안에서 이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응당 타당한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시대 가장 잘 나가는 인문학자 유발 하라리가 『호모 데우스』에서 통렬히 경고한 대로 인간은 "신이 죽었다"라고 선언하는 것을 넘어 제 스스로
신이 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우리의 모든 인식과 가치는 상대적으로 재구성된다. 객관적 진리와 과학적 지식은
이론적 담론과 사회적 구성물로 전복되며 시대와 기호에 따라 절대적 진리는 반귀납적으로 역조합된다. 신은 이제 죽음을 넘어 인간으로부터 조롱의
대상으로까지 전락했다. 나는 그것을 피부로 느낀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만으로 주변 지인들로부터 심심치 않게 공격과 비아냥을
받곤 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내 주일성수는 시간 낭비이며 십일조는 자선사업으로 조롱당한다. 신을 부정하면 가치가 사라져 버리고 신을 긍정하면
더 이상 세련되지 않다고 핍박받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혼란한 시대를 살면서 명징하게 신의 존재를 믿는 나에게 이 한 권의 책은
엄청난 도전과 감동을
선사했다.
서평을
정리하자. 9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인문학(혹은 신학) 서적임에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로 탐독할 수 있었다. 평소 인문학에 관심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공부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읽을 뿐만 아니라 가끔은 은혜롭기까지 해서 나름 유익한 독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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