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토벨로의 마녀
파울로 코엘료 지음, 임두빈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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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없음.
※ 다소 기독교적인 시각으로 서평을 썼음. 그 시각의 농도는 심히 옅은 편이지만 읽는 이에게 알레르기 반응이 없기를 기도할 뿐.

 

신을 향한 인간의 천착은 끊임이 없다.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신에 대한 갈증의 농밀함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알고, 경험하며, 믿는 수많은 종교의 이면에는 신을 찾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갈망이 담겨있다.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인간의 종교성은 어쩌면 인류역사의 마지막까지 계속될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신과 인간은 언제나 공존한다는 명제에 동의하게 된다. 이를 풀어서 보다 구체적으로 얘기해보자. 전지전능한 신의 절대성은 시간의 구속을 초월하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언제나 현재의 시간대에서 통합된다. 반면 철저하게 시간에 구속된 인간은 항상 현재로 존재하는 신과는 다른 시간의 성질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즉, 신은 언제나 현재의 시간으로 존재하면서 과거의 인간을 만나고, 현재의 인간을 만나며, 미래의 인간을 만난다. 

  2년 만에 새로운 장편소설을 들고 돌아온 파울로 코엘료는 『포르토벨로의 마녀』를 통해 신의 여성성을 탐구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모성의 근원과 그 본질을 탐구하고 싶었고, 이 사회가 왜 신의 여성성을 속박해왔는지 묻고 싶었다, 라고 말하는 작가 코엘료의 고백에서 신을 향한 인간의 목마름, 그리고 신과 공존하고 있는 현재적 인간을 새삼 목도하게 된다.  

  이러한 코엘료 자신의 의지가 철저하게 반영된 듯, 그의 신작 『포로토벨로의 마녀』는 우리가 흔히 인식해왔던 신의 남성성과 배치된 여성성으로서의 신을 조명하고 있다. 권위적이며 공의적이고 규범적이라는 기존의 신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제시하며, 자애롭고 보듬어주며 희생적인 신의 다른 면을 부각하면서 대조한다. 아테나라는 한 여인의 짧은 삶을 통해 그동안 감추는 것이 미덕이었던 여성성에 대한 강렬한 찬사를 발산하고 있다.  

  역사는 남성적 가치를 지향해왔다. 역사적으로 동서를 막론하고 지구상의 모든 종족과 국가는 여성에 인색했다. 여성의 존재감은 아예 없거나, 또는 있거나 말거나, 또는 보다 발전된 공동체에서 남성을 돕는 존재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던 여성의 존재감은 중세를 넘고, 19세기의 페미니즘 태생의 시기를 넘어, 작금의 21세기에 이르러서는 남녀평등이 당연한 인류 보편의 가치로 인식될 정도로 진보했다. 코엘료는 마치 지난 수 천 년 동안의 여성의 빈곤했던 존재감을 보상해줘야 한다는 강렬한 의지를 피력하듯, 인간 여성에 대한 찬가는 물론, 남성에게 독점된 잃어버린 신의 정체성의 반쪽까지 건드리고 있다.  

  포르토벨로의 마녀인 아테나의 삶은 그로테스크하게 그려진다. 춤을 추고 글을 쓰며 자신의 공백을 확인하면서 그것을 채워가는 그녀의 행동은 기묘하지만 다분히 철학적이다. 소설의 중반부 이후 마녀로서의 본격적인 아테나의 신성이 발휘된다. 아테나의 인성과 아야소피아라는 신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그녀는 비범한 능력을 발휘하며 제자를 만들고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기존 종교(기독교)의 전통과 규범에 얽매이지 말 것을 주장하며 극도의 이단성을 발산하는 아테나의 행동은 사람들로 하여금 환호와 분노를 동시에 불러 일으킨다. 기존의 것,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던 것, 진리라 여겼던 것에 대한 아테나의 도전은 자신의 수제자 앤드리아에게 그 역할을 넘기며 죽음으로 마무리 되는 것으로 소설 안에서 일단락된다. 

  소설의 막장을 덮은 후,  코엘료가 소설의 창작 목적으로 언급했던 '신의 여성성 탐구'라는 외연적 동기는 <사랑>이라는 보다 본질적인 내포적 목적을 수식하기 위한 장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렇다. 『포르토벨로의 마녀』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여성이 갖는 가장 강력한 힘의 표준어인 <어머니>라는 단어는 <여성으로서의 신>과 동의어로 소설속에서 계속해서 등장한다. 어머니의 자비로움과 편안함이라는 모성적 사랑을 신의 성품에 반영하여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난 또다시 생각했다. 어쩌면 파울로 코엘료는 신의 여성성을 탐구한 것이 아닌, 사랑과 자비라는 있는 그대로의 신성 그 자체를 탐구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남성과 여성, 암컷과 수컷의 개념은 그것을 창조하고 구분한 절대자에게는 구속할 수 없는 개념이다. 신의 신성, 즉 신적인 성품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로 구분되거나 특징 지을 수 없다는 얘기다. 방향이 바뀐 것이다. 거꾸로 신의 성품이 남성과 여성으로 존재하는 인간에 녹아든 것이며, 그것은 철저하게 일방통행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신의 의지며 주권이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 신이 전지전능하다는 것, 그리고 신이 선(善)하다는 것까지를 인정하게 되면, 자신의 형상을 인간에게 집어 넣은 당신의 작업에 겸허하게 되는 동시에 신성을 남성성이냐 여성성이냐 하는 등의 기준으로 들이대지 못하게 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신성은 차원을 논할 수 없는 절대적 상위개념이며, 남성과 여성은 신 안에 구속된 종속적 하위개념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된 방향성을 확인하는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파울로 코엘료의 하나님 탐구와 사랑에 대한 천착은 매우 감미롭고, 충분히 아름다우며, 결코 가볍지 않다. 다시각적 인터뷰 형식과 극적 반전이라는 기계장치를 통해 가슴 두근거림과 긴장감을 제공하며, 어렵지 않으면서 충분한 무게를 함의한 문장을 통해 신과 사랑을 탐구한 파울로 코엘료의 기술에 나는 심히 매료되었다. 쏟아지는 아포리즘의 홍수속에서 하나님과 사랑과 여성과 나 자신을 동시에 사유(思惟)할 수 있도록 한 코엘료의 언어 연금술을 상찬하며 별 다섯 개를 흔쾌히 던진다.
 

오늘날의 사회는 "모든 것은 설명 가능하다"는 오해에 사로잡혀 있다. 사회는 우리가 세상에, 또 우리 자신에게 완벽하게 투명할 것을 강요한다. 하지만 그 속엔 커다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손에 잡을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어떤 공백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러한 신비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p. 398,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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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서
나카무라 코우 지음, 현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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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이력서>라는 양식은 전혀 낯설지 않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취직을 준비하면서 대략 백여 통에 가까운 이력서를 작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기본 프로파일은 물론이요, 학력과 경력과 자격 등의 내 자신의 현주소를 최대한 그럴듯하게 수없이 써내려갔던 당시 취업준비자의 마음가짐은 과히 대단한 열정과 비전으로 가득 차 있던 것이었음을 회고한다. 

  나카무라 코우의 '새로운 시작 3부작'의 첫 번째 시리즈 『이력서』는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이력서의 통념과는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소설 속 주인공인 한자와 료는 취직을 하기 위한 통과의례절차에 불과한 이력서와는 전혀 다른,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기록하며 기념하는 새로운 이력서를 창조한다. 누나의 친구를 만나는 것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심야에 체조를 하며 우연찮게 만난 여자와 데이트를 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료는 자신만의 이력서를 채워가고 있다. 

  인간은 꽤 오랜 시간을 산다. 인간의 평균 수명을 기준으로 하면 대략 80년의 인생을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짧은 시간이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면 긴 시간이기도 하다. 80년이라는 거대한 인생의 항해 앞에 불과 하루라는 시간의 길이는 초라해 보일 따름이다. 나무가 모여 숲이 이뤄지듯이, 우리의 하루하루 일상이 모여 우리의 인생을 차지한다. 그렇기에 단지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일 분이라도, 그 시간은 매우 소중하며 낭비할 이유가 없음은 물론이다. 

  우리는 <짧은 시간>에 대한 조악한 생각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더 나아가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일상적이고 소소한 것에 대한 존재감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망각하고 지나쳐 버리는 경우가 많다. 비록 작고, 짧고, 일상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 인생의 편린들로 소중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겸허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의 삶은 더욱 행복하고 리드미컬해 질 것이다. 

  작은 시간의 흐름이나 사건 하나도 내가 이룬 <이력>임을 자각하며 나만의 이력서를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이력서』는 하루가 지나면 또 다른 이력이 발생하고 또 하루가 지나게 되면 새로운 이력이 발생하는, 그런 소소한 이력의 편린들이 우리네 인생을 채우고 있다는 것을 잔잔하게 얘기하고 있는 소설이다. 비록 리듬감이 없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진 않지만, 쉽고 편안하고 잔잔한 문체로 인생의 부분적 시간들에 대한 새로운 시작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굳이 반갑진 않지만 나쁘진 않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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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 가든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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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네이버 독서카페 '책좋사'의 정기모임이 있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이라는 카페이름을 대변하듯 정말 책을 좋아하는 이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임에 참석한 회원들과의 대화를 통해 회원들 모두 가지각색의 취향과 기준으로 책과 작가를 관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토록 다양한 독서철학을 가진 이들의 모임인 '책좋사'에 침투한지 어느덧 몇 개월이 지났고, 내 독서의 성격도 상당히 달라졌음을 느낀다. 본래 인문학도서나 경제&경영서, 자기계발서 등의 비문학도서에 집중되어 있던 독서경향이 문학이라는 깊이있는 우주의 세계를 만나 예전과는 다른 여행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을 목도한 것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홀리 가든』을 읽은 것은 이러한 내 자신의 독서의 현재위치를 명확하게 입증한다. 마지막장을 덮은 후 생각했다. 내가 이런 소설까지 읽을 줄이야, 라고.. 

  굉장히 일상적이다. 두 여인의 연애담을 특별한 에피소드 없이 소소한 일상 안에서 뛰어나게 섬세한 감각으로 그려내고 있다. 여분의 것, 하찮은 것,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그런 것들로만 구성된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말하는 에쿠니 가오리의 고백은 13년 전에 출간된 『홀리 가든』의 존재감을 정갈하게 정의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여분의 것, 하찮은 것, 별 도움이 안 되는 것을 함께 나누며 성장한 가호와 시즈에는 절친한 친구 사이다. 두 여인의 한 남자에 대한 각각의 사랑은 과거와 현재라는 각기 다른 시간대에 구속되어 있다는 상이함이 있으나, 현재적 시간대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박수받을 수 없는 어두운 사랑이라는 점에서 동질성을 갖는다. 가호의 사랑은 5년 전 헤어진 스쿠이라는 존재에 철저히 구속되어 있을 만큼 과거적이다. 이에 비해 시즈에의 사랑은 비록 멀리 떨어져있지만 매일같이 보고 싶을 정도로 강렬하게 현재적인 사랑에 묶여있다. 하지만 가호의 사랑이 이미 종결된 5년 전의 실연의 그리움이라는 면에서, 그리고 시즈에의 사랑이 아내와 아이가 있는 유부남과의 불륜이라는 면에서 위험한 사랑이라는 동질성을 갖는다. 

  이러한 두 친구의 사랑의 동질성은 둘 사이의 미묘한 관계의 끈을 형성한다. 아주 작은 것을 서로 공유할 만큼 친한 사이지만, 어떨 때는 부러움을 느끼고, 질투심을 갖기도 하며, 미묘한 긴장과 견제의 심리가 은근하게 발동된다. 하지만 이러한 미묘한 긴장감은 두 여인의 웅숭깊은 우정의 특질을 역설적으로 수식하는 장치에 불과할 뿐, 종국에는 서로의 믿음의 승리로 귀결된다. 

   사랑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한방향을 보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라는 멋진 말이 있다. 사랑을 그저 마주보는 차원에 국한시키는 연인들이 많다. 사랑이 한 인간에 구속된 개념이 아니라 우주를 폭넓게 아우를 수 있는 절대적 선한 가치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둘만 마주보는 것은 둘 이외의 다른 객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이는 수많은 환경의 어려움 가운데 사랑을 포기하게 되는 동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함께 같은 방향을 보며 나아가는 사랑은 사랑의 주체인 둘 이외에도 다른 우주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들 자신이 그 우주 안에 오롯이 속해있음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충분히 안정적이고, 크고, 깊이 있는 사랑이 가능하며, 많은 사랑의 주체들이 후자의 사랑의 정의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 

  가호의 사랑은 지극히 과거에 얽매여있어 자신의 현재를 훼손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며, 시즈에의 사랑은 서로 마주보기만 하는 불륜이라는 점에서 씁쓸하다. 오히려 묵묵히 바라보며 인내하는 가호에 대한 나카노의 사랑의 방향이 인상적이다. 가호의 과거를 알면서도, 더욱이 이뤄지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한방향을 추구하는 나카노의 친절하고 소박한 사랑이 왠지 굵고 깊게 느껴진다. 

  소외된 사랑의 예를 두 친구의 과거와 현재의 삶에 섬세한 필치로 그려넣은 에쿠니 가오리의 『홀리 가든』은 분명 내게 익숙하지 않은 소설이다. 새로운 것을 만나는 것은 충분히 흥분되는 법. 보다 다양한 독서의 세계를 위한 내 자신의 넓이를 넓힐 것인가, 아님 내 머리와 가슴이 원하는 독서만을 찾을 것인가, 에 대한 외로운 토론의 물결은 당분간 내 머리속에서 일렁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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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만큼의 애정
시라이시 가즈후미 지음, 노재명 옮김 / 다산책방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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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연애와 관련된 책이나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눈물을 쥐어짜는 신파극 특유의 기름기가 느끼하고, 톡톡 튀는 상쾌발랄한 로맨틱 코미디의 가벼움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흔히 접하는 대부분의 러브 스토리가 느끼하고, 가볍고, 그저 그런 비슷한 스토리로 귀결되는 것에 지쳐있기에, 더욱이 남자라는 생체학적 감성밀도의 부족함을 극복하지 못한 채, 연애장르는 어느새 내가 피하고픈 부분이 되어있다.  

  시라이시 가즈후미의 『얼마만큼의 애정』은 철저한 연애소설이다. 일본소설의 붐이 한국문단에서 하나의 큰 주류로 존재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시라이시 가즈후미의 존재는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더욱이 무슨 무슨 상을 받았고, 저명한 문학가들로부터 추천사로 도배가 되어 있는 일본소설 특유의 과장된 홍보문구를 감안한다면, 『얼마만큼의 애정』의 표지 비쥬얼은 담백하고 간결하기만 하다. 출간된 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주변의 평이 상당히 좋았던 터라 평소 갖고 있던 연애소설에 대한 얼마만큼의 편견을 묵과한 채 양장본의 첫 하드커버를 넘길 수 있었다. 

  소설의 도입부는 큰 인상을 심어주지 않는다. 여느 연애소설과 마찬가지로 그저 그런 이야기의 흐름이 이어질 뿐이다. 전복적이지도, 가슴이 두근거리지도 않는 서사의 흐름은 소설의 절반의 분량을 넘어가면서 급반전된다. 물론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야기의 반전(?)이 발생하면서 여느 연애소설과는 다른 깊이와 무게감을 건드리고 있다. 

  인간과 동물이 확연하게 구별되는 것 중에 하나가 실존하는 것과 실존하지 않는 것을 대하는 차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구속력과 그에 따른 상상력의 존재 유무로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동물은 눈에 보이고, 냄새를 맡고, 귀에 들리는 것 이상의 상상추론이 불가하다. 하지만 인간은 특유의 고도로 발달된 두뇌와 이성과 상상력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하는 위대한 존재다.  

  신체적 감각을 초월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능력도 <사랑>이라는 절대적인 가치 앞에서는 감각 안에 종속되는 경우가 많다. 눈에 보여야 하고, 귀에 들려야 하고, 냄새를 맡아야 하며, 만져져야만 사랑을 확인하며 증명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더욱이 이성간의 사랑은 그 경향이 다분하여 수많은 에로스의 사랑의 분쟁 속에서 이를 목도하기도 한다. 영원히 사랑하고 평생 헤어지지 말자며 약속하는 수많은 무리들의 외침이 어쩌면 신께서 보시기에는 소음수준의 가벼움으로 비춰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랑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동일한 기준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하는 방법이 최선이다. 사랑을 이루는 가장 큰 자원으로 <믿음>이 존재한다. 가장 큰 믿음이 가장 큰 사랑을 추동한다. 소설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사랑한 마사히라에 대한 아키라의 마음, 그리고 뜨겁게 사랑했지만 믿음이 결락되어 5년의 시간을 원망과 그리움으로 보낸 마사히라의 모습은 사랑에 있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 그리고 믿음이라는 절대적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하겠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소설에서 중요한 주제적 소재로 사용되는 <실명>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시력을 잃어 앞을 못 보게 된다는 의미이다. 우주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존하는 것이 많이 있다. 그런 차원에서 실명의 의미를 보다 넓고, 고차원적으로 받아들이면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 않지만, 반드시 실존하는 것을 보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할 수도 있을게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3차원의 세상. X축과 Y축과 Z축만이 존재하는 3차원의 우주가 인간의 오감으로 감지할 수 있는 한계다. 하지만 보다 높은 차원의 것을 보고자 하며, 볼 수 있을 때에 인간을 창조하신 신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사유가 밀려온다. 

   제목 『얼마만큼의 애정』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사랑에 있어서 얼마만큼 보이는 것과 얼마만큼 사랑한다는 것이 절대 동의어로 성립될 수 없다는 깊은 인식을 확인한 채, 그로테스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책의 앞표지의 여자를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미소를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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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실의 바다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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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와의 첫 만남은 충분히 즐거운 것이었다. 소위 <위기>로 대변되는 작금의 한국문단의 현주소에서 일본문학은 쓰나미처럼 한국 도서계를 강타하고 있다. 특히 <온다 리쿠>라는 아줌마 작가의 존재감은 쓰나미의 선봉장격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 관심 밖이었던 일본소설에 눈을 뜬 이후 가장 강렬하게 내 눈과 귀와 마음을 사로잡은 작가가 온다 리쿠다. 『유지니아』라는 추리소설을 통해 만난 첫인상은 지극히 강렬했고, 심히 흥미로웠으며, 다분히 만족스러웠다. 블로그에 [온다 리쿠] 메뉴를 따로 만들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발산할 만큼 그녀는 뜨거운 감자다.

  그녀의 첫 단편집이 출간된 것을 알자마자 그 어떤 머리속 활동을 하지 않은 채 바로 구독했다. 더욱이 아직 한 권 밖에 읽지 않은 그녀의 작품세계에 대한 <입문서>라고 한 홍보문구는 내 전두엽에서 엔도르핀과 다이도르핀을 동시에 분출하는 지극히 흥분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흥분과 기대감이 점철되어 주말을 맞이하여 한달음에 달릴 수 있었다. 

  그녀의 첫 소설집 『도서실의 바다』는 10개의 독립된 세계를 보여준다. 온다 리쿠를 만나는 <입문서>라고는 하지만 그녀가 그간 출간했던 작품의 예고편격인 단편이 적잖다. 「피크닉 준비」의 경우 『밤의 피크닉』의 프롤로그라 할 수 있는 단편이다. 또한 강한 인상을 남긴 단편, 「이사오 오설리번을 찾아서」는 그녀의 미래를 장식하게 될 SF장편소설 『그린 슬라브스』의 예고편격이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대부분의 단편들이 그녀의 다른 작품들의 연장선상에 있어 <입문서>라는 성격보다 <참고서>라는 색채가 더 자연스러울 듯 싶다. 아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입문서이기도 하고 참고서이기도 한, 그녀의 색채를 명확하게 정리한 <컬렉션>이라고 하는게 정답일 것이다. 

  온다 리쿠는 소설가로서 꽤 훌륭한 <기술력>을 가진 작가다. 극작술 기초의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과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그녀는 매우 능수능란하게 다룬다. 플롯 이론이 <시간>을, 무의식 개념이 <기억>을 극대화하면서 작품 속에서 독자에게 강렬한 카타르시스와 페이소스를 제공하는 동기가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노련한 감각으로 <시간>과 <기억>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온다 리쿠의 능력은 심히 압도될 만하다. 

  이번 단편집도 이러한 <온다 리쿠 브랜드>의 특질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겠다. 미스테리, SF, 호러,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고 있다. 전면에 배치한 「봄이여 오라」는 주인공과 친구와 엄마의 시간이 꼬이며 반복되는 서사적 캐논변주곡의 구조를 갖고 있는 인상적인 단편이다. 「오디세이아」는 더욱 훌륭한 단편이다. 놀라운 상상력으로 거대한 대서사시를 몇 장으로 압축하여 묘사한 듯한 느낌이 압권이다. 「수련」과 표제작인 「도서실의 바다」는 다른 작품에 종속된 단편이지만 독립적으로 읽어도 무방한 완전한 단편이기도 하다. 그 외의 단편들 모두 비슷한 수준의 완성도와 몰입감으로 온다표 브랜드를 오롯이 보여주고 있다. 

  현실과 환상의 교차,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드는 시간적 역동성, 퍼즐을 맞추는 듯한 스토리 라인, 서사의 흐름에 따라 좁혀지지만 종국엔 함구로 정리되는 해석의 다양성 등.. 그녀 특유의 색깔이 충분히 드러나고 있는 소설집이다. 온다 리쿠 세계에 대한 <시작>으로, 또는 <중간>으로, 또는 <말미>로, 그 어떤 위치에 놓아도 부자연스럽지 않은 작품, 『도서실의 바다』는 작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교과서다. 

  매번 일본소설을 접하면서 느끼는 것은 그저 <활자> 자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영상>까지 아우를 수 있는 폭과 넓이에 대한 부러움이다. 온다 리쿠를 위시한 대부분의 일본작가들은 마치 드라마나 영화의 제작을 염두하고 집필한 것인양 소설 그대로를 극본이나 시나리오로 전환해도 무방할 정도로 경쟁력있는 작품을 생산한다. 더욱이 일본소설 특유의 대중성과 소재적 다양성은 더더욱 부러운 부분이기도 하다. 한국 문단의 위기라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무게감 있게 들리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일본문학이 차지하고 있는 존재감은 그들의 문학적 현주소의 나침반의 방향을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벤트로 동봉된 『밤의 피크닉』을 비롯하여 적지 않은 온다 리쿠의 세계들이 책장에서 읽힐 순서를 대기하고 있다. 나는 조심스럽게 예언한다. 온다 리쿠. 그녀의 세계가 주는 만족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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