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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논평전 - Lennon Legend
신현준 지음 / 리더스하우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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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싸이'의 미국 빌보드 챠드 순위 7주째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존 레논이 뉴욕에서 암살된 1980.12월쯤에 대한민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두환 군부가 정권을 잡고 민주세력이 위축된 혹독한 겨울이었다. 암살자의 손에는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가 지은 '호밀밭의 파수꾼'이 있었다. 

 비틀즈(Beatles)는 1960년 영국 잉글랜드 리버플에서 결성된 룩 밴드이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우리의 베이비붐 세대가 태어난 시기로 세계적인 68혁명의 태동기였다. 프랑스의 총파업과 투쟁, 미국의 신좌파와 페미니즘 운동, 체게바라 사망, 국내에서는 김진조 사건이 있었다.

 비틀즈는 처음으로 1964년에 빌보드 1위 곡 'I want a hold your hand' 를 7주 연속 히트시킨 이후로 1965년에는 우리에게 잘 알여진 'Yesterday'가 4주 연속 챠트 1위를 차지했고 '비틀즈'가 해산되는 1970년에는 'Let it be' 등이 2주간 빌보드 1위를 차지했다. 놀라운 것은 10년 동안에 20곡이 빌보드 1위를 석권했다는 사실이다. 이 중심에 '존 레논'이었다. 이 룩 구룹은 새로운 악상이 떠오르면 데모테잎에 기타로 주 선율이나 리프를 일단  녹음 한 뒤에 그걸 바탕으로 연주하며 다듬어 완성했다. 즉 악보에 전혀 의지하지 않았다.

 레논이 태어난 리버풀은 아일랜드계 및 웨일스계의 후손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다. 1840~50년대 아일랜드의 감자대기근으로 인해 10년 동안 약 200만 명의 아일랜드인들이 대거 이주해  있었다. 이중에  일부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데 영화에서 등장하는 아일랜드계들이다. 레논도 그 후손으로 레논의 두번째 아들의 이름을 '존'의 아일랜드식 이름인 '숀'으로 지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레논의 부모인 줄리아와 프레디도 노동계급 가정 출신이었다.

 비틀즈와 존 레논의 음반은 '시대를 초월한 명반'으로 그의 음악을 청취하고 그의 삶을 반추하는 다종다양한 사람들, 다중이 복수의 상상을 만들어 내고 그 상상들이 서로 대화하고 소통하기 때문이다. 그가 창조하고 연주한 음악은 다기한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것과 부단히 접속한다. 상업적 스타덤으로부터 아방가르드 예술, 혁명적 좌파 정치를 거쳐 페미니즘적 일상생활까지 폭넓게 분포하고 있다. 특유의 자기고백적 메시지를 강렬한 비음으로 대중을 사로잡는다. 그것은 1960년대의 시대상황과 연계되어 있다.

 현재 우리의 청소년과 청년들이 도전하는 슈퍼스타 K 등의 현상들은 다양한 매체의 발달과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에 대한 염증으로 인한 경제적 위기가 낳은 일종의 지구적 카타르시스를 우리의 '싸이'라는 동양계 작은 말춤이 휩쓸고 있다.  201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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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 - 윤한봉 회고록
윤한봉 지음 / 한마당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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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선 6기 광주광역시장으로 선출된 윤장현(1949년생) 당선인은 5•18 당시 조선대병원응급실에서 시민(계엄)군을 치료했다. 그 이후 당선인은 5•18기념재단 창립 이사가 되었다. 저자는 2009년에 5•18기념재단 이사장이며 나의 고교 은사 윤광장님의 친동생이다. 또한 전 광주시의원 윤난실(지혜학교이사장)씨가 저자의 조카다. 모두가 광주가 낳은 운동가다.


 저자(합수)는 70년대 이래 대표적 민주화 운동가 중의 한 사람이다. 전남대 재학 중인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된 이래 수차례 옥고를 치르다 '80년 5•18 광주민중항쟁 주모자로 수배. 도피 중 '81년 4월, 동지들의 도움으로 화물선에 숨어 미국으로 밀항, 정치 망명자가 되었다. 해외에서 민족학교를 설립하고 재미한국청년연합, 한겨례운동 재미동포연합, 해외한국청년연합을 결성하여 탁월한 조직가이며 운동가로서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 반전반핵 세계평화운동, 제3세계 연대운동에 헌신했다. 김재규 장군의 박정희 시해가 시작이었다면 저자는 광주민주항쟁의 마지막 수배자였다.

  저자는 뛰어난 '조직가'다. 대한민국을 넘어 미국에서 망명 정부의 투사처럼 처절하게 국내 민주화의 초석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도산 안창호 등과 버금가는 민족운동가였다. 20세기초 이태리계 이민자들이 그랬듯이 저자는 단신으로 밀항 망명한 가난하고 쫒기는 운동가였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요주 인물로 지목했다. 특히 그의 불안한 신분속에서 자신의 투쟁 의지를 심어가는 노력은 물산장려운동처럼 아껴가며 합법화된 운동자금을 모으고 운영했다.

 조국과 달리 혈연, 지연, 학연 등의 연고가 거의 없고 이민 온 시기가 달라 개인적, 사회적, 역사적 경험이나 조국과 민족에 대한 지식의 정도, 사고방식, 언어구사능력, 정서 등이 천차만별인 청년들, 게다가 조국의 청년들에 비해 의식수준이 낮은 청년들을 상대하면서 저자는 당혹감도 많이 느꼈고 애로도 많이 겪는다. 조국과 민족을 위한 해외 동포들의 운동 참여 동기는 지극히 우연적이고 개인적이었다. 사회적 조건의 변화가 없는 한 조국 동포들의 운동은 지속될 수밖에 없는데 반해 동포들은 개인적 충격이나 감동 같은 운동 참여의 동기가 약화되거나 운동 과정에서 긍지와 보람을 못 느끼고 실망하거나 심한 비판을 받거나 갈등, 충돌 등을 겪게 되면 쉽게 운동을 중단하거나 포기해 버렸다. 

 윤한봉 열사는 조국에서 운동할 때 가진 것도 없으면서 재산목록을 작성한 후 꼭 필요한 속옷, 고무신, 등은 포함한 20여 가지의 물건들만 남기고 나머지 것들을 그의 동지들에게 다 주었다. 그의 재산목록 1호는 손목시계였고 2호는 만년필이었다. 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동지들과 함께 빙과도 팔고 월부 책장사도 하고 포장마차를 운영했었다는 이야기 따위를 청년동포들에게 들려준 후 소득증대와 소비절약을 구호처럼 되풀했다. '93년 수배 해제되어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 광주에서 '민족미래연구소'를 설립하고  '5•18 기념사업회'를 출범시키는 등 활동 중, 밀항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여겨지는 지병인 폐기종으로 힘겨워하다 2007년 6월 폐 이식수술 직후 합병증으로 타계 했다.  201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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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 김재규 평전
문영심 지음 / 시사IN북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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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권'과 '민주'와 관련된  두 권의 평전을 읽는 중이다. 4월이 지나면 반드시 5월이 온다. 강물의 발원지를 찾듯, 잊을 수 없는 인물에 대하여 곱씹어 본다.


 칼 마르크스는 말했다.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은 악몽과도 같이 살아있는 세대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 잔인한 4월이 가고 계절의 여왕 5월도 하순에 접어 들었다. 1980년 5월18일 아침 대학교 정문에서 나는 탱크와 공수부대를 만났다. 34년이 지났다. 곧 10•26 의인들 합동추모식(김재규,박흥주,박선호,유성옥, 이기주,김태원)이 열린다.

 1970년대가 끝나고 1980년대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희망의 봄'이 왔다고 생각했다. 1970년대와 함께 박정희의 유신독재를 끝장낸 것은 김재규였다. 그러나 1980년대도 군인이 나라를 계속 지배했다. 국민들은 김재규의 희생 뒤에도 많은 피를 흘려야 했고, 그 덕분에 조금 더 진화된 민주주의의 세상에서 살아 갈 줄 알았다.

  박정희는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반만 년 역사는 한마디로 말해서 퇴영과 조잡과 침체의 연쇄사이다. 이 모든 악의 창고 같은 우리의 역사는 차라리 불살 라버려야 옳은 것이다. 국민성을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것만이 강력한 민족국가 건설을 이 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혁명이 필요할 때 우리는 혁명을 겪지 못했다고 조세희(난장이가 쏘와올린 작은 공 저자)는 말한다. 김재규는 10•26을 민주회복 국민혁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행위는 국민혁명이 될 기반을 갖지 못했다. 10•26이 진정한 민주 회복 국민 혁명으로 승화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까 ?  이 사건을 군사 재판이 아닌 일반 재판으로 하고, 국민들이 김재규의 진의를 충분히 알도록 공개 재판과 언론 보도의 자유를 보장했다면 사태는 달라졌다.

 김재규의 묘는 경기도 광주시 삼성공원 묘원에 있다. 그의 비석에는 '의사 김재규 장군 추모비'으로 씌여져 있다. 하지만 '의사'와 '장군' 비문의 글자가 훼손되어 있다. 비석의 뒷면에는 그에 대한 추모시가 새겨져 있다.

 먹구름이 하늘을 덮고
 광풍을 몰아 덮칠 때
 한 줄기 정기를 뿜어
 어두운 천지를 밝혔건만
 눈부신 저 햇살 다시 맞지 못하고
 슬퍼라만 사람 가슴을 찢는구나
 아, 회천의 그 기상 칠색 무지개 되어
 이 땅위에 길이 이어지리 

  김재규가 승리를 자신했던 역사의 제4심은 열리지 않고 있다. 고인이 된 의뢰인(김재규)과 70대 중반에 들어선 변호사(강신옥)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은 애착으로 존재하고 있다.  2014.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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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평전 - 잃어버린 진보의 꿈
이원규 지음 / 한길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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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산 조봉암은 창녕조씨 찬성공파이다. 그는 인천 강화 출생(1899~1959)으로 사람을 설득시키거나 군중 장악력이 뛰어난 혁명가였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지명되어 '농지개혁법'을 입안하였으며, 반대 세력에 의해 정치적 이유 등으로 1959년 7월 31일 법살된 우리 나라의 첫번째 지식인이었다. 그후 죽산의 장녀 조호정여사 등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제정으로 대법원에 재심청구되어 2011년 1월 20일 죽산의 간첩죄는 무죄가 되었다. 사후 53년만이었다.

 

 죽산은 1946년 6월 11일, 미 군정 법령 제72호 제8항 위반 혐의로 인천 CIC (Counter Intelligence Corps)에 연행되었다. 그는 CIC가 임시로 마련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열흘 동안 갇혀 지내다 선택의 여지없이 전향을 선택했다. 그는 진정한 통일 민주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비혁명노선으로 사회주의 이념을 실현하는 것이 최선의 현실적 방안이라 여겼다. 즉 공산주의보다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가 최선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죽산은 6월 22일에 '전향성명서'를 쓰고 CIC를 나와 귀가 했다. 그의 전향의 단초는 CIC에 의해 죽산의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라는 편지(안)이 1946월 5월 7일자 조선•동아•한성일보에 실였기 때문이었다.

 

 좌익 측이 결성한 민주주의민족전선에 맞서기 위한 민주의원(남조선대한민국민 대표민주의원)이 있었다. 이는 이승만, 김구,김규식 등이 주축이었으며 군정사령관 자문기구였으나 세사람이 각기 자기 주장이 강해 구심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미군정은 대안을 1946년 7월에 결정된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찾으려 했다. 즉 민중에게 큰 인기없는 이승만, 지주 자산가 중심의 한민당, 친일파 등 극우 세력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중간세력이 필요했다. 군정은 좌우합작위원회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조선공산당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는데 그 카드가 죽산 조봉암의 전향이었다. 


 죽산은 조직능력이 박헌영을 뛰어넘는 인물이지만 반조운동에 의해 조선공산당 중심의 권력투쟁에서 박헌영에게 밀여나 있었고, 공산주의의 혁명적 투쟁을 지양하는 태도를 보여왔기 때문이다. 죽산은 CIC의 서신공작에 의해 반의도적으로 전향된 샘이었다.

 

 미군정의 CIC는 죽산을 회유한다. '선생의 젊은 날에 선택한 공산주의는 독립운동의 수단이었다. 해방된 지금은 유효하지 않다'고, '대한민국 국민에게 고함 !'(김영구 저, '12.10, 다솜)에서 언급하고 있다. "많은 진지한 우리 독립투사들은 일본 군국주의에 항거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편으로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항일전투에 가담하여 목숨을 내놓고 싸웠다. 


 그들이 공산주의자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20세기 초, 만주와 중국 대륙에서 중국 공산주의자들 속에 들어가 싸우다가 죽어간 우리 독립투사들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휴머니스트'들이었다"

 

  죽산의 사형 집행 당시 법무장관은 홍진기씨었다. 어느 시대나 죽음이 있으면 죽인자가 있다. 그자가 질병이나 노화던 생사람이던간에 갈등의 근저는 개인과 개인에서 출발하여 조직화된다. 2013.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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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평전 (보급판)
송삼현 외 지음 / 지식의숲(넥서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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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키아벨리* '군주론'에는 '특권층의 지지는 서민층의 지지보다 약하다'는 말이 있다. 2013년은 동북아의 새 지도자들의 치열한 외교전쟁이 시작되는 해이기도 하다. 일본의 우경화 집권 세력인 '아베'총리, 진보 대 보수의 극명한 대선 결과인 박근혜 당선인, 중국의 제5세대 지도자 '시진핑', 러시아 '푸틴'의 대통령직 복귀와 미국 '오바마'의 연임 그리고 세습정치의 제3세인 '김정은' 등장이 그것이다.


 유일하게 북한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중국의 황태자인 '시진핑'은 박근혜 당선인과는 한 살차이로 같은 세대이다. 이 두 지도자의 지난 연말 행보는 '가난한 서민'의 곁을 찾는 일이었다. '시진핑'은 영하 10도의 날씨에도 해발 1500m '허베이성(하북성) 바오딩(보정)' 산촌을 찾아 부엌 아궁이 옆 시멘트 침상에 걸터앉아 농민들과 고구마를 나눠 먹으며 빈곤 대책을 얘기했다. '박근혜' 당선인도 서울 신창동의 '쪽방촌' 노인들에게 도시락을 직접 만들어 직접 전달했다. 국민은 새 지도자의 '위민 정치'에 기대를 걸고 있다.


 시진핑*에게 그의 아버지가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그의 아버지 '시중쉰'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팔로(8대 원로)' 중 한 명이다. 그는 문화혁명 당시 고초를 겪었지만 1978년 복권돼 국무원 부총리까지 올랐고, 2002년 사망 때까지 아들 '시진핑'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박 당선인의 부친도 정치인이었다는 점에서 같다. 또한 '시진핑'의 아버지인 '시중쉰'은 1913년생으로 김일성보다 한 살 아래로 '중•북 동맹' 의식을 갖고 있었다. 상당수 중국 문제 전문가는 북한을 보는 '시진핑'의 시각이 자신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한다. 


 중국은 '후진타오' 국가 주석이 이끈 4세대 지도부가 올 3월까지 모두 은퇴한다. 시 총서기가 집권하는 10년은 중국이 미국과 함께 실질적인 G2(주요 2개국) 시대를 열게 된다. 그러나 중국의 성장 과정에서 누적된 빈부•지역 간 격차, 사회적 갈등의 폭발 등 새 난제들이 적잖다. 우리에게도 사회적 통합을 위한 경제민주화와 복지 정책의 실현 그리고 남북 문제와 경제협력 등 숙제가 많다.


 1954년, 시진핑이 만으로 1살이 되던 해에 중화인민공화국 최초의 헌법이 통과되었고, 그의 아버지는 시중쉰은 국무원 비서장을 지냈다. 어렸을  때부터 시진핑은 자신의 아버지가 고위 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아버지의 혁명사에 관하여는 소년기에 비로소 알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13살 때 혁명에 투신하였고, 15살 때는 학생운동에 참가하여 국민당 당국으로부터 감금을 당하였으며, 옥중에서 중국공산당 당원이 되었다. 


 중국공산당은 민주형 또는 경쟁형 정당이 아니기 때문에 후계자 선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치적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에 대한 충성도와 각 파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다. 즉 당내 인화단결을 유지•보호할 수 있는지를 먼저 고려해 선택되어진다. '시진핑'이 베이징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변두리 지역의 기층 에서부터 출발하여 모든 것을 극복하고 중국공산당의 황태자가 되기까지의 드라마틱한 역정속에 중국공산당의 운용방식이 드러나 있다. 


 그가 좋아하는 역사적 인물은 문무를 겸비한 진시황이나 한무제, 당태종과 송태조, 또는 일대 영웅 칭기즈칸이 아니라 유방, 유수, 유비, 송강 등 그 자신은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지략이 없으나 인화단결에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삶에 대한 그의 태도나 정치철학을 였볼 수 있다. 20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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