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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평전 - 박정희의 정치사상과 행동에 관한 전기적 연구
전인권 지음 / 이학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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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개인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심의 방향을 달리하여 그의 성장 과정부터 살펴보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다. 이 책은 보통 사회과학적 정치학의 연구 대상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개인사를 탄생부터 죽음까지 시계열적으로 검토하여, 박정희 개인에 대한 포괄적이면서도 심층적이고 누적적 연구를 가능케 하는 연구 체계를 갖추려고 한다."


  "이 책은 박정희(1917~1979)의 정치사상과 행동을 전지적 관점에서 분석, 종합한 박정희 평전이다. 박정희는 한국 현대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정치가였으며, 그가 집권했던 18년 5개월은 박정희 개인의 성격.사상.행동이 한국 정치에 점점 더 구체적으로 관철되는 과정이었다. 유신체제는 박정희 정치적 이상을 현실에 적용한 체제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또한 박정희에 대한 연구는 박정희 개인은 물론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필수불가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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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 평전
김학동 지음 / 새문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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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낙엽은 젖어 블럭에 붙었다. 아침 겸 점심으로 돼고기 김치찌기를 먹었다. 배부른 짐승이되어 20년 전에 읽었던 미당의 시를 찬찬히 읽어본다. 한편으론 시가 뭐겠는가 싶었다. 건강을 잃어버린다면 다 허망한 잡념이 아니겠는가 싶었다. 


   평화시대의 시어들은 개인의 추억이나 세상의 정세를 은유하는 정도지만 동족간의 전장에서 그 참상을 보았던 청마 유치환의 시는 인간의 한 없는 가엾음과 자괴감과 가슴 아픔으로 목놓아 울었으리라. 1915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미당 역시 우리의 근•현대사의 치욕과 혁명과 정변 그리고 동난을 격었던 인물이다. 전후 세대인 나에게 전쟁의 혼란기를 전달한 한편의 시는 통계적 역사 사실보다 다가온다.


  미당의 첫시집은 '화사집'(1941년)으로 일제 강점기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제14집(1993년)으로 1988년부터 1993년까지에 쓴 72편의 신작시들이다. 내 어렸을 적의 시간들 10편, 구만주제국 시 5편, 에짚트의 시 5편, 노처의 병상 옆에서 3편, 1990년의 구공산권 기행시 9편, 해방된 러시아에서의 시 8편, 기타 시들 27편이다. 미당은 고백한다. 


  그의 습작기의 문학소청년 시절이나 다름없는 표현상의 불만과 게으름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한다. 미당이 1940년 9월에서부터 1941년 2월까지 남만주 간도성의 양곡주식회사의 한 사원이 되어 밥벌이를 회고하며 썼던 5편의 시는 인상적이다. 시인에게 가을비는 어떠했을까 !


  - '가을비 소리 -


 단풍에 가을비 내리는 소리

 늙고 병든 가슴에 울리는구나.

 뼉나귀 속까지 울리는구나.

 저승에 계신 아버지 생각하며

 내가 듣고 있는 가을비 소리.

 손톱이 나와 비슷하게 생겼던

 아버지 귀신과 돌이서 듣는

 단풍에 가을비 가을비 소리 !     1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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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평전 - 지울 수 없는 얼굴, 꿈을 남기고 간 대통령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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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서를 쓰던 새벽은 고요했다. 아무도 모른 그의 심중은 결연 했으리라, 이중섭 은박지 크기의 메모지는 잘 씌여지 보고서와 달랐다. 모든 것을 운명임을 자임했다. 자신의 죽음을 확인한 지인들에게 최소의 당부였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이 글이 많은 위안을 준다. 어스무레한 초저녁 길을 걸으면서 미식미식 떠오르는 혈육에 대한 그리움을 눌러준다.


  노무현의 종증조부 노응규(1861~1907)은 구한말 의병장이었다. 한성 진공을 꾀하던 중에 밀정의 밀고로 체포되어 일제가 주는 밥은 먹을 수 없다며 단식하다가 옥중에서 굶어 죽었다.


  노무현과 박정희는 늦둥이었다. 노무현과 박정희의 모친 또한 근대시대의 가난한 촌부였다. 그의 모친은 막내를 애처럽게 생각했다. '돌콩'은 노무현의 어린 시절 별명으로 '노 천재'였다. 당차기가 하늘을 찔렀던 동학혁명의 지도자 전봉준같았다.


 
노무현은 목포상고 출신인 직전 대통령 김대중에 이어 상고 출신 대통령이 것이다.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일까! 노무현이 김구나 링컨을 각별히 좋아하고 존경한 이유 중에는 변변치 못한 학벌에도 불구하고 뜻이 크고 사상이 올발라 위대한 일을 해냈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리 사회의 비주류였다. 12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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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 김대중 평전
김택근 지음 / 사계절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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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아내를 포천 천주교  묘지에 묻었다. 비탈길을 내려오며 아내 없이는 평지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얼마 후 그의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날마다 조금씩 죽어가는 동생의 죽음 앞에 가슴을 첬다. 아내와 여동생보다 더 일찍 그의 첫 딸이 세상을 떠났었다. 아내는 죽어서도 줄곧 그에게 힘이 되었다. 

 

 사실 그는 딱 한 번 박정희를 만난 적이 있었다. 1968년 새해 청와대로 세배를 가서 5분쯤 얘기 나눈 것이 그의 일생에 처음이지 마지막이었다. 그때 그는 박정희에게 줗은 인상을 받았다.

 

  1980년은 안개정국이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지하의 취조실에서 비명소리가 들였다. 그는 이미 내란 음모 사건의 수괴가 되어 있었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표정했다.자신이 사형된 다음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정치적 보복을 행하지 않도록 부탁했다. 그의 '종범'이라는 사람들과 평생 처음 창자로 애국가를 불렀다. 광주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나오고 가슴이 설렜다. 그는 옥중의 밤에는 흔들렸으나 새벽에는 마음을 바로 잡았다. 사람이 신념대로 산다는 것과 어디까지 내놓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밀접한 함수관계임을 자각했다.

 

  군사 정권은 그를 이중 독방에 가두고 감옥의 복도를 콘크리트 벽으로 막아 버렸다. 분통하였지만 분노하지 않았다. 감옥은 그의 대학이 되었다.그곳에서 독서에 몰입했다. 신학, 철학, 정치, 경제, 역사, 문학 등 모든 분야의 책을 읽었다. 수감 중에 600권의 책을 차입하여 정독했다. 그때에 영감과 용기를 주었던 대표적인 책이 '아널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12권)였다. '제3의 물결'이 농경과 산업사회 다음에는 지식정보사회가 도래한다는비전을 갖게 했다. 그는 상대방의 지식과 생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놀라운 흡인력의 소유자였다.

 

  정권이 강요한 3년간의 미국 망명 생활을 마치고 서둘러 위험한 귀국을 했으나 그의 집에 다시 감금되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동교동 교도소'라 불렀다. 1987년 6.29선언으로 사면과 복권이 되기까지 무려 55차례나 가택 연금을 당했다. 부당한 권력은 '민중의 힘' 앞에 무기력 했다. 1997년, 그의 나이 73세에 대통령이 되었다.

 

  2004년 8월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가 기각된 이후로 박정희가 살해당한 지 25년 만에 야당의 대표가 된 독재자의 딸이 찾아와 그의 손을 잡았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싶었다.  1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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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평전 - 조선 중기 최고의 경세가이자 위대한 스승
한영우 지음 / 민음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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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일(월)에 안철수 전 교수가 입국했다. 그는 미국 체류 중에 레미제라블과 링컨에 대한 영화를 봤다. 최장집 명예 교수의 최근 작 '노동없는 민주주의 인간의 상처들(폴리테니아)'도 읽었다. '안철수의 생각(김영사)'에서 그의 정치적 롤모델로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삼고 있다. 링컨이  '어떻게 여야를 잘 설득하고 어떻게 전략적 사고로 일을 완수해내는가'를 봤다고 했다.

 

  시대마다 의인이 있으며 백성을 생각하는 정치인 있다. 율곡은 조선 후기의 정치와 사상가였다.그가 남긴 2가지 교훈이 있다. 하나는 자기 시대의  문제를 외면 않고 개선하려는 치열한 정열과 정신이다. 율곡은 온건한 중도적 개혁자였다. 기성 질서를 큰 테두리에서 그대로 지키면서 시의에 맞지 않는 문제를 과감하게 고쳐 민생을 향상시키고 국가를 강하게 만드는 일을 주도했다. 

 

  다른 하나는 사물을 대립과 갈등으로 보지 않고, 통합과 절충을 존중하는 그의 세계관이다. 인간에 대한 보편적 사랑을 강조하면서 신분 차별에 대한 거부감이 나타냈다. 이런 세계관은 링컨의 노예제 폐지와 상통한 부분이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엇갈려 반대자들이 들고 일어나는 저지가 걱정되는 선조는 율곡이 주장하는 경장을 부담스러워했다. 


  경장을 이끌 만한 인재들의 결집된 세력이 존재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율곡이 말하는 경장이란 조선 초기에 세워진 왕조의 기틀을 유지 계승하면서 연산군 이후 민생 파탄의 제도를 고치자는 것이었다. 백성의 공납과 군역의 폐단과 공노비의 생활을 압박하는 선상의 문제도 개혁의 대상으로 봤으며 서얼에게 청요직을 주지 않는 것도 나쁜 폐단으로 여겼다.

 

  링컨의 청소년기는 모친의 기독교적 집안 영향을 받았으며 스스로 지적 호기심을 독서로 채워가며 현실에 적응했다. 율곡의 그 시기는 가장 가슴 아픈 상처를 남겼다. 유교적 사회기반속에서 불교적 영향을 받은 시기였다. 16세에 아버지를 따라 평안도에 다녀오느라 임종도 지켜보지 못한 가운데 어머니 신사임당을 잃은 율곡은 심한 정신적 허탈감과 갈등에 빠져 19세에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가출하여 1년간 금강산의 승려가 되었다. 


  방황끝에 환속한 율곡은 유학을 공부하면서 과거 시험에 매진했으나 선비 사회에서 왕따를 당했다. 그는 불교의 영성으로 자신의 마음의 때를 씻고, 유교의 이성적 지성으로 현실 세계의 때를 벗기고 이상 사회로 이끌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율곡은 역사의 흐름이 갖는 법칙을 알고 있었다. 삼봉 정도전을 알면 조선 전기를 있고, 율곡을 알면 조선 후기를 있다. 율곡의 3 명저 가운데 하나인 '성학집요' 조선 후기 역대 제왕의 경연 교과서로 정착되고, 그의 군사론은 중흥의 영주인 영조와 정조, 고종의 통치 철학으로 수용되었다. 조선 후기는 율곡이 뿌린 씨앗을 거두는 과정이었다. 13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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