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시절 마음에 두었지만 배우지 못했다. 지금인가 보다. 이창호의 입문서 페이지가 술술 넘겨진다. 회사의 까페에서 우연히 책 한 권을 만났다. 입에 붙듯 눈에 붙었다. 표지도 마음에 들었다. 실바람같은 잔잔함과 깊은 물속이듯 주변을 물리고 집중한다. 자신에게 집중하면 된다. 다시 백두산을 오를 때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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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에서는 건너 편 사람이 나무가지와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아야 좋다. 그 길을 자주 찾는 이유이다. 일제가 쌀을 공출하여 항구로 가져 갈때야 큰 길이 뚫었다. 신작로였다. 우리의 숲은 사람들의 길이 아니었다. 그 곳은 사람들이 뒤엉켜 백병전을 치루는 죽고 죽이는 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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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작가의 글을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글과 문장으로 질감이 다른 것들을 대비하면 새로운 것들이 느껴지고 보이기 시작한다. 화가는 물감으로 풍경을 그렸지만 작가는 문자와 문장으로 풍경을 그린다.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간다 지나간다.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왼통 풀냄새를 널어놓고 복사꽃을 울려놓고 복사꽃을 울려만 놓고, 
환한 햇빛 속을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 ‘서풍부에서', 김춘수

허리가 굽은 늙은 여자들이나 아이를 업은 젊은 여자들이 

읍내 버스 차부 옆 공터에서 좌판을 펼쳐놓고 나물을 팔았다. 

그 여자들의 먼지 낀 좌판은 영세했다. 

농협의 비료포대나 보온 못자리를 걷어낸 폐비닐 자락 위에 말린 마물과 호박오가리, 

검정콩 및 움큼을 펼쳐놓았다. 그 여자들의 좌판은 삶을 영위하는 상행위라기보다는 

밤에 우는 새들의 울음처럼 그 종족의 핏줄 속에 각인된 무늬처럼 보였다. 

외출나온 군인들의 팔짱을 낀 여자들이 가끔씩 좌판을 기웃거렸다.

 - '내 젊은 날의 숲', 109쪽

어두운 산맥을 건너오는 바람이 시간을 몰아가는 소리를 냈다.

바람소리에는 먼 숲을 훑어온 소리와 가까운 솦을 스치는 소리가 포개져 있었다.

바람의 끝자락이 멀리 지나온 시간의 숲까지 흔들었다.

스피커 구멍으로 흘러나오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그 바람소리 속에서 앵앵거렸다.

스피커 구멍으로 어머니의 몸이 흘러나와서 내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것 같은 환영이 어둠 속에 떠올랐다.

 - '내 젊은 날의 숲', 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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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는 사람들의 넋이 쌓여 이여진다. 그 역사가 우리의 눈앞에 있다. 어김없이 찾아 온 5월의 광주는 어떤 내력을 품고 있는지 알아 볼 일이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전후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는 그냥 얻어지지 않았다. 지켜졌다.  


 서구나 일본 등 선진국들이 그랬듯이 우리나라도 근대 공업도 섬유공업에서 시작됐다. 특히 20세기 이후 전남은 면화와 누에고치의 주산지였던 탓에 섬유산업의 중심지로 각광 받았다. 일제강점기에 목포항에는 면화의 1차 가공시설이 밀집했고 여기서 가공을 마친 면화는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내륙도시인 광주에도 면화, 누에고치 등과 관련된 기관과 영농 및 교육시설이 들어섰고 점차 제사와 방직공장이 등장하면서 전국 굴지의 섬유산업 도시로 변모해갔다.


 광주의 섬유산업은 일제강점기는 물론 광복 후에도 광주.전남 지역의 산업하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종연방직주식회사(종방, 1887년)가 광주에 대규모 면방공장을 짓게 된 배경 중 하나는 화순의 석탄(무연탄)도 큰 몫을 했다. 석탄은 공장 가동의 주요 에너지일 뿐 아니라 기숙사 등 편의시설의 난방을 위해서도 없어서눈 안 될 연료였다. 종방은 1934년에 화순탄광을 인수하여 전남광업을 설립하였다.


 우리나라 전래섬유의 대표적인 것은 명주이다. 하지만 면화는 일제 침략과 함께 큰 변화를 맞았다. 해마다 3월이 되면 농가의 부녀자들이 누에치기를 시작했다. 조선시대에는 식상법을 반포하여 집집마다 의무적으로 뽕나무를 심게 했다. 전남의 경우 1930년대에 생산량이 6만 석이었다. 그중 최대 생산지는 나주로 1만 석이었으며 광주는 5천 석이었다. 전남이 경북에 이어 두 번째 생산규모였고 양잠이 전남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쌀, 면화에 이어 세 번째였다.


 이흑.일청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삼백이라 했다. 이흑은 화순의 무연탄과 완도의 김, 일청이란 담양의 대나무(죽세품)를 가리켰다. 내륙도시 광주는 경방, 평양방적에 비해 매우 잘 나가는 섬유산업을 대표하는 도시였다.   


 1896년 8월에 13도 체제로 지방행정제도가 바뀌면서 전남도청의 소재지가 광주로 정해졌다. 여기에는 세가지의 배경이 있다. 첫째, 광주는 지리적으로 약간 북쪽에 치우쳐 있기는 했으나 거의 전남의 중앙이라 해도 무방할 만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고 둘째, 역사적으로 광주는 과거 무진주 및 무주 중심도시였다. 셋째, 무엇보다도 전남관찰부의 광주 확정은 1896년 초 행정구역 개편 직전의 나주 단발령 항거에 대한 중앙정부의 징벌적 행정조치의 측면이 강했다.  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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