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나긴 이별 ㅣ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6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처음에는 그냥 기분으로, 혹은 별거 아닌 변덕으로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를 다시 읽어보려고 했었다. 어떤 건 잘 간직하고 있었고, 어떤 건 찾아보니 버린 것 같았다. 후회하면서 다시 사게 되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빅 슬립’부터 다시 읽기를 시작했고, ‘빅 슬립’의 경우는 아마도 세 번 혹은 네 번째였지만 여전히 아리송한 기분으로 읽었다. 다른 책들은 새롭게를 넘어서 아예 처음 읽는 기분이었고. 가장 편하게 읽은 건 처음에도 그랬던 ‘호수의 여인’이었던 것 같다. 가장 덜 음울하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기나긴 이별’은? 처음과 결말은 분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기억에 새겨져 있었다면, 그 과정의 내용들은 다른 (다시 읽은) 챈들러 / 말로 시리즈처럼 읽을수록 새롭게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아주 각별하고 강렬할 순 없어도 자주 떠올려질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언젠간 이번처럼 다시 읽으려고 할 것 같다. 보르헤스의 소설처럼 코난 도일 / 셜록 홈즈 시리즈처럼 그리고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처럼.
어떤 책은 계속해서 반복해서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혹은 다시 읽진 않더라도 계속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 있다. 그런 책은 그 사람에게 결정적으로 뭔가가 남겨진다. 행동이든 정신이든 뭐든지. 최소한 태도든 뭐든.
챈들러 / 말로 시리즈 또한 그런 기분으로 읽게 된다. 더 말할 게 없다. 걸작이고 누구나 극찬을 아끼지 않는 책이니 뭘 더 말할 게 있나? 이게 싫은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의견에 굳이 신경 쓰고 싶진 않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나랑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하면 그만이니까.
다른 시리즈에 비해서는 꽤 길고, 우울함도 짙다. 독백으로 가득하고, 그 독백은 우울과 환멸을 넘어선 깊은 어둠이 느껴진다. 자포자기의 심정도 있는 것 같고. 마흔 초반의 고독으로 가득한 남성이 보여줄 수 있는 우울함이 이럴 수 있을까?
우연한 우정으로 시작을 하고, 그 우정으로 인해서 사건에 슬며시 스며들게 된다. 괜한 궁금증과 의심으로 경찰부터 온갖 사람들에게 위협과 협박 그리고 곱지 않은 시선을 속에서 점점 진실에 다가가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만나게 된 소설가와 그의 아내 등등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인 것 같다가도 결국 다시금 우정-사건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된다.
끝끝내 의심을 거두지 않고 알게 된 진실이 차라리 모르는 게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챈들러 / 말로는 그 쓰디쓴 진실에 흔들리고 무너질지라도 있는 그대로 알아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누구나 걸작이라고 칭송하는 이유가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하드보일드 소설이 해낼 수 있는 가장 탁월한 성취이기도 할 것이고. 언젠간 다시 읽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