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당신은 환자이니 사회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 사회 의료화, 젠더 규범화

 

3-2. 의료로 구성하는 일상생활: 정신병원과 세균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는 일 년에 한 번, 혹은 몇 년에 한 번 정기 건강 검진을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한 번도 건강 검진을 받아본 적이 없어 구체적인 과정은 잘 모른다. 대신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아기 고양이가 결석이라는 만성병에 걸려 정기적으로 건강 검진을 받아야 한다. 결석이 처음 발생했을 때, 한 달간 처방 사료와 물약을 먹여야 했고, 한 달 후 재검을 받으러 가야 했다. 의사는 검사 후 건강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결석이 언제 재발할지 알 수 없으니 6개월에서 1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나의 아기 고양이에게 비록 결석 증상이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의 건강 상태는 의사의 검진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내가 간 병원은 상당히 괜찮은 병원이고 그 의사도 괜찮은 분이라, 불필요한 진료를 받았다고 여기지는 않는다(동반종과 사는 사람이라면, 일부 동물병원의 부당한 진료비를 겪은 적이 있으리라). 다만 건강을 정기적으로 검진하고 의료적 수치로 확인해야 하는 과정은 꽤나 심란하다. 개인의 몸은 자신이 관리하지 않는다. 개인에게는 자기 몸을 ‘결정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건강 검진이 부모님께 효도하는 한 방법으로도 소비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건강 검진은 의료화라기보다는 보편적 복지로 여겨지는 듯하다. 바로 이것이 의료가 일상에 스며드는 방법이다.

근/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 모두는 의학이 보증하는 건강을 기준으로 삼으며 살고 있다. 위생과 청결은 의무 사항이며, 기본 예의로 재구성되었다. 건강에 강박적인 사회에서 아프다는 것은 큰일이다. ‘우리’는 아플 수는 있지만, ‘우리’에게 아플 권리는 없다. 건강은 자기 관리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강해야 하고 아파서는 안 되며(라디오에서 젊은 것들이 아프고 감기에 걸리는 게 말이 되느냐는 광고를 들은 적이 있는지?) 회사와 경제 성장에 지장이 없는 몸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이것이 이 시대의 건강 규범이다. 푸코는 20세기 후반 들어 “원할 때 필요할 때 아플 권리”, “일을 중단할 권리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고 지적하지만(276), 적어도 한국에서는 아플 권리가 없다. 그렇다면 건강 강박은 개인의 몸을 어떻게 관리할까?  

 

정신병이 없는 사람이 정신병원에서 정신병으로 진단받고, 정신병으로 진단받은 사람이 다른 병원에서 정신병이 없다고 진단받은 이 실험은 상당히 유명하다.

  

정신병원은 많은 사람을 임의로 구금,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공간으로 오랫동안 악명을 떨쳤다. 그 악명은 지금도 유효하다. 앞서 클라이스트가 정신병원을 견학하고 쓴 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 정신병원은 전통적으로 사회에 위협인 존재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의사가 정신병으로 진단한 이들부터 범죄자, 노름을 한 사람, 고아, 빈민, 성노동자 등이 정신병원에 구금되었다. 정신병원은 사실 그 시대의 공공/사설 구금 시설이었다. 그리고 구금된 이들 중 일부는 그 시대의 섹슈얼리티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이들이었다. 자위를 한 사람부터, 퀴어/호모섹슈얼리티, 성노동자 여성, 부도덕하다고 비난받은 여성, 마녀로 지목된 여성 등이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다고 진단받았고, 구금되었다. 혹은 카미유 클로델이나 나혜석처럼 재능이 너무 뛰어나 남성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은, 즉 남성 권력 질서에 위협이 된다고 여겨진 이들이 구금되기도 했다.   

 

이 이미지는 영화 <체인질링>의 한 장면이다.
주인공 크리스틴 콜린스는 아이가 유괴되자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고, 경찰은 극적으로 아이를 찾았다. 하지만 되돌아온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콜린스는 경찰 수사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경찰은 공권력에 대한 도전, 공공에의 위협이란 명목으로 콜린스를 정신병원에 감금한다.
이미지 출처:
http://wolfpack.tistory.com/entry/%EC%B2%B4%EC%9D%B8%EC%A7%88%EB%A7%81 2010.11.01. 접근

 

정신병원에 갇힌 이상 출감하기란 쉽지 않다. 위의 동영상에도 잘 나와 있듯, 강력한 저항은 난폭한 행동이자 사회에 위협과 불안을 줄 수 있는 폭력 성향으로, 사색은 멍한 상태로 취급되었다. 자신이 정신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주장하면 할수록 그저 비웃음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입원을 하는 순간, 퇴원을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물론 퇴원하는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소위 말하는 유순한 몸으로 의료 권력이 주장하는 규범에 따라 적절한 행동을 하면 된다. 19세기 정신병원은 유순한 몸을 만들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쓰기도 했다.
 
베들럼에서 대를 이어 근무했던 먼로(Dr. Monro)라는 의사가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을 발표했는데, 그 방법이란 1년에 한 번, 이른 봄에 행하는 ‘사혈’이었다. 사혈 치료 뒤에는 1주일에 한 번씩 구토나 설사를 유발하는 약을 먹이기도 했는데, 빈혈과 공복으로 환자를 허약하게 만들어 좀 더 쉽게 다루기 위한 방편이었다. (난동을 부리는 환자를 체벌하기 위한 목욕탕도 있었다고 한다.)(나카노, 192)
 
모든 병원에서 이와 같은 처방(!)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많은 병원이 구속복을 입힌다거나, 빛이 들어오지 않는 독방에 구금을 하거나, 물세례, 채찍질 같은 다양한 형태의 고문 방법으로 입원자를 길들였다. 의사가 관리하기 쉬운 몸, 사회를 위협하지 않는 충분히 유순한 몸이 될 때에야 비로소 퇴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클라이스트가 묘사한 것처럼, 유순한 몸이 됐다고 해서 사회생활을 하기에 적합한 몸이 된 것은 아니었다. 정신병원이 만든 유순한 몸은 유순하되 규범적이지 않은 몸이었다. 인간다운 인간을 만드는 과정이 아니었다. 퇴원을 하더라도 특정 코드를 통해 정신병원 경력을 파악할 수 있도록 몸을 만든 것이다. 범죄자가 구속되면 몸에 문신을 새겨 공공시설에서 옷을 벗는 순간 누구나 파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나, 나치가 유태인이나 퀴어에게 낙인을 찍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도록 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유순하되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방식의 유순함을 만드는 것, 이것이 정신병원을 비롯한 구금시설이 만드는 몸이었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소설 『13계단』.
이 소설의 몇몇 등장인물은 손목시계가 수갑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시계를 차지 않는다. 이 습관은 타인의 구금 경력을 파악하는 단서로 쓰인다.
이미지 출처: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2738657

 

물론 이 시대, 병원에서 살아 나간 사람이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적어도 “18세기 중반 이전까지는 병원에서 살아나간 사람들이 없었”으며 “사람들은 병원에 죽으려고 들어갔”다는 점에서 “병원은 사실상 ‘영안실’”이었다(푸코, 282). 의료 기술이 그나마 발달했다는 19세기도 마찬가지다. 마취술과 해부학이 발달했어도 그것은 늘 죽음을 동반했다. 사실 의료 실천은 생명을 살리는 실천을 지향함에도 늘 죽이는 실천이었고, 이것은 의학의 역사에서 익숙한 현상이다. 많은 치료 기술은 그것의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많은 사람의 죽음을 양산했다. 물론 그렇게 죽은 이의 상당수는 빈민층에 속하거나 범죄자였거나 정신병원에 구금된 이들이었다. 1832년 영국은 “해부학 법”을 만들었는데, 빈민층이 이 법에 대한 동의서를 작성했다면 의사는 동의한 이의 시체를 해부학 실습용으로 쓸 수 있도록 했다(Doyle, 24). 물론 당시 빈민층 중에서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은 서류의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서명했다. 그리고 이 법은 외과 의학과 해부학 기술이 발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의학은 언제나 지식의 발달이라는 명목으로 지배 계급을 제외한 이들의 목숨을 실험 대상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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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22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3계단 책 주문했어요. 함 읽어보려고..
 


3. "당신은 환자이니 사회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 사회 의료화, 젠더 규범화

 

   
 

신체에 문제가 있음. 표준 이하. 실업. (P. H. Physically handicapped. Substandard. Unemployed.) (Clare, 87)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대공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개발 사업을 진행하며 국민을 고용할 기회를 창출했다. 장애인들 역시 취업하길 원했다. 하지만 장애인이 노동자로 등록하려고 행정 기관에 갔을 때, 돌아온 것은 위와 같은 글귀의 스탬프가 찍힌 종이였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소소한 연금을 받으며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Clare, 87). 말이 실업이지, ‘정부에서 고용하지 않겠음’ 혹은 ‘고용할 수 없음’이 더 정확한 의미리라. 근대적인 노동자는 백인-비장애-이성애-비트랜스-성인-남성이며, 이 범주에 부합하지 않는 몸은 생산성이 떨어지거나, 노동에 적합하지 않거나, ‘단순 노동’만이 적합하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장애인이 노동하기에 적합한 근대적 인간이 아니라는 인식은 달리 말해 노동을 할 수 없다는 뜻이며 ‘할 수 없다’라는 언설은 ‘해선 안 된다’라는 명령이자 ‘너의 몸은 그 자체로 무능하다’라는 명령이다. 비백인 여성과 남성, 백인 여성, 타국에서 온 이주민 역시 백인 남성과 동일한 노동을 해도 동일한 임금을 받을 수 없었다.

앞 장에서 얘기했듯, 이런 차별을 정당한 것으로 보증하는 데 의학은 상당한 역할을 했다. 근대 국민국가와 근대 의료 체계의 발달은 쌍생아라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우선하지 않는다. 서로 뒤엉킨 상태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서로가 서로의 합리적인 근거로 기능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서로의 윤리적 판단 기준이다. 국민국가에 이로운 행위는 의학이 건강하다고 판단한 것이며, 의학에서 인정한 건강하고 규범적인 몸은 국민국가에 이롭다. 그렇다면 이 둘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는 관계를 형성할까? 의학은 개개인의 일상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
 

3-1. 의료화, 개괄

사회의 의료화와 의료 통제 관련 논의로 유명한 피터 콘래드(Peter Conrad)는 의료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 바 있다.    

 

   
 

의료화는 비의료적인 문제가 병고나 장애 같은 언어를 통해 의료 문제로 정의되고, 다뤄지는 일련의 과정을 기술한다. (209

 
   

 

즉 이전까지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냥 넘어갔던 문제가 의학에서 조사하고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는 것으로 변하는 과정이 의료화다. 관련 예는 상당히 많다. 여성의 임신을 의학에서 관리 통제하면서 임신부터 출산, 그리고 그 이후의 양육 과정은 모두 과학적 양육이라는 명목으로 의학에서 담당하고 있다. 월경 전후 증후군은 이미 너무 유명한 사례다. 콘래드는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질병 진단만을 의료화로 논했지만,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의료화의 전부는 아니다. 한때 나는 머릿결이 너무 상해, 괜찮다는 가게에서 두피 검사를 받은 적이 있다. 직원은 상한 두피를 치료(!)하려면 이런 성분, 저런 성분, 요런 성분 등 나로서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런 약품/성분을 함유한 제품(결국 비싼 샴푸와 린스)을 사용해야 한다며 권했다. 이 직원에게 의료전문가 자격증은 없을 가능성이 컸지만, 그 직원의 말은 과학적/의학적 언어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객이 못 알아들을 용어는 전문성을 보장하는 데 필수다. 의료화는 이렇게 일상용어로, 제품 판매 전략으로 곳곳에 퍼져 있다.

근대적 의료화의 역사는 이미 많은 이들이 자세히 논의하고 있어 여기서는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 짧게 살피고자 한다. 근대 의학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유통되고 있다. 모든 질병은 계량화된/수치화된 ‘정상’ 범주에서 벗어날 때 발생하며, 병 터[病巢]를 파악하여 시각으로 확인할 수 있고, 질병의 진행 상태를 계측하거나 예측할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젠더, 인종, 간치수와 같은 신체 기관의 현재 상태 등이 동일한 사람에겐 동일한 처방을 할 수 있다는 보편적 지식을 적용, 지향한다. 실험 조건이 동일할 경우 실험 결과 역시 동일하며, 따라서 그 지식은 보편적이며 중도적이라는 근대 과학의 주장을 밑절미 삼는다.

의학, 특히 외과 의학이 과학적 방법론을 채용한 것은 자기 분야의 권위와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과 관련이 있다. 18세기 외과 의학은 학문이 아니라 하층 계급의 기술이었다. 외과 치료는 이발사나 목욕탕 주인이 시술했고, 이 능력은 도제 제도의 매뉴얼에 따른 습득이지 지식으로 해석되지 않았다. 하지만 외과 의학을 전공으로 삼은 이들은 자신의 지식과 계급을 귀족층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 방편으로 외과 의사는 근대적 남성성을 전유하며 자신들이 이상적인 남성의 역할 모델이라고 주장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방법이 과학적이라고 주장했다(관련해서는 Doyle; 루인, 2009 참고). 매뉴얼에 따른 습득은 동일한 조건을 갖추면 동일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는 과학적 방법론의 다른 판본으로 해석되었다. 식민지 침략 전쟁 등으로 부상자가 상당한 당시의 상황에서 외과 의학은 생명을 구하는 의술이기도 했다.  

 

 렘브란트의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이 그림의 시대적 맥락을 잘 설명하고 있는
나카노 교코의 책과 같이 읽으면 좋다. 짧은 분량이지만 외과 의술의 발달 과정에서 발생한 시체 도굴, 시체 매매와 살인 사건, 계급 차별 등을 다루고 있다.
이미지 출처: http://kr.blog.yahoo.com/joan5781/1438825 2010.11.12. 접근
 


또한 근대 의학은 전문 지식으로 소비된다. 르네상스 이후의 의학 발달은 사실상 내과 의학의 발달이었다. 1518년 설립된 의과 대학은 내과 의학을 다뤘고, 내과 의학은 전문적인 대학 교육으로서, 왕립학회 회원으로서 상당히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학문이라는 이미지였다. 이에 반해 외과 의학은 전문 지식이 아니라 도제 기술이란 점에서 지식이란 지위를 획득하지 못했고, 전문성을 의심받았다. 그래서 외과 의학을 전공 삼은 이들은 꾸준히 전문대학을 설립하고, 대학 교육을 받아야만 해당 외과 의학 지식을 습득하고, 의과 의술을 시행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꿔나갔다. 지식의 독점은 지식의 권력화로 변했고, 권위 획득으로 이어졌다. 지식의 권력화는 질병을 환자에게서 분리하여 의사만이 개입할 수 있는 것으로 바꿨다. 의학 지식의 전문화는 의사만이 환자의 정확한 증상을 알 수 있고 의사가 보증해야만 질병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했다. 질병을 겪는 사람은 환자지만, 질병을 아는 사람은 의사인 셈이다. 어떤 일의 당사자가 그 일을 가장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의료 지식의 전문화는 병고를 겪는 당사자를 그 병에서 배제했다. 모든 개인은 의사가 보증하는 정도에서 건강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서구의 근대 의학, 특히 근대 외과 의학이 발달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에는 남성성의 변화도 있지만, 근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발달 및 팽창을 빼놓을 수 없다. 프렉쇼를 설명하는 앞의 글에서, 괴물스러운 몸을 가진 존재로 이국에서 온 원시인, 야만인을 소개할 수 있었다는 말은 곧 타국을 침략해서 그곳의 주민을 납치해 데려왔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렇게 납치한 타국의 개인이 서구 유럽의 규범적 남성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의학의 진단과 증명서가 필요했다. 가시적 차이도 중요했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관이 다른지, 즉 두개골 형태가 어떻게 다른지와 같은 ‘전문’적인 정보(혹은 과학이란 이름의 사기)가 함께할 때, 차이는 제 권위를 확보할 수 있다. 

 

영화 <300>의 한 장면.
고대 그리스 남성 레오니다스의 근육질이면서 이성적인 이미지와 동양에서 온 크세르크세스의 여성적이고 감정적인 이미지 대비는 서구 식민주의/제국주의가 서구와 동양을 바라보는 방식의 전형이다. 이미 많은 이들이 비판했듯,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레오니다스가 죽는 모습을 예수의 죽음과 겹치도록 연출하여 서구의 침략을 미화하고, 인종 혐오와 젠더 혐오를 동시에 드러낸다.
이미지 출처: http://redmonkey.ibbun.com/tt/544 2010.11.16. 접근
 



이러한 서구의 식민지 침략을 침략이 아닌 신의 뜻을 전하는 선교로 포장하기 위해 (물론 그들은 정말 선교라고 믿었겠지만) 언제나 선교사가 동원되었다. 서구 기독교식의, 서구 백인 중심의 문화를 전파한다는 소명 의식은 식민지 침략을 정당화했다. 그것은 ‘이국의 미개한 관습’을 타파하고 ‘수준 높은’ 종교와 문명을 전하는 실천이었다. 이것을 침략 행위라고 믿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식민지 침략에 종교만 동행한 것은 아니었다. 의학 역시 빠질 수 없었다. 의학은 항해하고 탐험하는 자국민을 치료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도착한 곳의 주민들에게 자신의 근대성을 자랑할 수 있는 기회였다. 다른 말로 근대 의료화는 근대 식민화와 동의어다.
  

 

샬롯 브론테의 소설 <제인 에어> 1847년 판(2판)에 실린 삽화.
존은 제인에게 자기와 결혼해서 함께 인도로 선교를 가자고 제안한다. 이들에게 선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성스러운 행동이지 식민지 침략이 아니었다.
이미지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File:P369b.jpg 2010.11.16. 접근 



이것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며 같은 민족이라는 수사를 구사했음에도 일본 영토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한국 영토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달리 대한 것을 보아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역시 조선을 식민화하는 과정에서 의료 기술을 활용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우두법(牛痘法)을 들 수 있다(신동원 2001). 천연두를 치료하기 위한 우두법 시행은 당시 조선의 국가적 사업이었기에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일본은 이때 자신들의 우두법을 조선에 소개했고, 우두법 확산을 적극 도왔다. 이를 통해 일본은 조선에 “‘근대화한’ 일본의 모습을 심어”줄 수 있었고, 경계심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고 한다(신동원 2001, 343). 이것은 일본만의 전략이 아니다. 식민지 지배를 위해 군사력으로 강압하기도 했지만 선교와 의료 기술을 통해 주민들의 호의를 얻는 것도 필요했다. 물론 이후 식민지 지배가 견고해지면서 지배국과 피지배국의 의료 정책을 달리했고, 핵심 기술과 업무는 지배국에서 관장했다.  


 

칠판에는 “colonialism(식민주의)”라고 적혀 있지만, 이것을 “cronyism"(편파, 친구 편들기)”으로 발음하는 것을 비꼰 카툰.
이미지 출처: http://www.cartoonstock.com/directory/c/colonialism.asp 2010.11.16. 접근
 


이처럼 의료화는 단순한 질병 치료로 끝나지 않는다. 의료화는 언제나 정치 경제의 이슈로서 지배질서를 공고히 하고, 국민과 ‘차이’를 관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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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22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줄기세포 연구가 정부에 의해 차별적으로...
 


2. 나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부인하는 오점인가? : 괴물스러운 몸의 역사

 

2-2. 근대적 남성 이상(理想)과 변태(queer)

데카르트의 정신-육체 이분법은 엄밀하게 말해 근대적 남성에게나 해당하는 철학/윤리다. 비규범적인 존재는 “육체와 정신, 그리고 도덕성과 신체 구조의 연관 관계를 반영”(George L. Mosse, 2004b, 47)하며 그들의 부적절함이 몸에 드러난다는 믿음이 지배적이었다. 인간의 육체가 아름다워 보인다면 그것은 도덕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며, 추하다면 도덕성을 결여했기 때문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비이성애 실천을 추함과 죄악으로 여기는 인식이 프렉쇼가 흥행하던 바로 그 시대에 동시에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과 근대 자본주의 발달이 한창이던 19세기의 주요 기획 중 하나는 근대적 남성성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었다. 물론 남성성을 정립하고 그 표본을 만드는 일은 모든 시대에 걸쳐 발생했다. 하지만 19세기에는 기존의 남성성과는 다른 남성성이 필요했다. 이전까지의 남성성이 공손하고 부드러우며 노동하지 않는 몸이었다면, 식민지 개척과 제국주의 확장에 따라 시대에 맞는 ‘새로운’ 남성성을 필요로 한 것이다. 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배를 타고 이국으로 떠나는 용기, 타국을 침략하는 데 필요한 힘, 과감한 결단력 같은 것이 남성성으로 부상했다. 이것이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미의 양식이었고, 규범적 남성성을 실천하는 방식이었다.
 


이 글에서 다루는 시기와는 100년 정도 앞서 출간한 다니엘 디포의 책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 1719년판 표지. 이 책은 식민주의, 인종 차별과 근대적 남성성 형성의 관계를 잘 드러내고 있다. 아울러 크루소는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인간상의 표본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하지만 크루소는 프라이데이를 만나기까지 외로움에 치를 떨었다.
이미지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File:Robinson_Cruose_1719_1st_edition.jpg 2010.11.16. 접근
  

역할 모델은 고대 그리스의 남성이었다. 철학자이자 건강한 신체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항해라는 거친 모험을 경험하며 지혜를 갖춘 존재로 (재)구성된 고대 그리스의 남성은 제국주의 시대가 요구하는 남성의 표본이었다. 아울러 빅토리아 시대 도덕 윤리에서 성적인 것은 그 자체로 죄악이었다는 점에서 섹슈얼리티는 금기였다. 국가와 민족을 인간으로 형상할 수 있는 몸은 고대 그리스 남성의 미를 갖춘 몸이며, “아름다운 몸은 섹슈얼리티를 초월”(George L. Mosse, 76)해야 했다. 이 말은 곧 아름답지 않음은 뭔가 문제가 있는 존재란 뜻이었다. 이런 이항대립은 분명 매우 단순하고 문제가 많은 구도였다. 하지만 근대적, 민족적 남성성을 구축하는 데 있어 규범적 남성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대척점에 놓일 존재가 필요했다. 그것은 아름답지 않은 외모에 성적인 것과 관련 있는 존재였다.
   


몬테크리스토 백작, 에드몽 당테스, 혹은 암굴왕으로 알려진 이 인물(이미지에서 왼쪽)은, 선원의 용기와 힘, 지혜 등 당대의 남성성을 재현한다. 근대 이후 철학사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상당수가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철학을 배웠다는 서사를 사용하고 있다. 이런 서사는 선원 당테스의 것과 겹치면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와 근대적 남성을 동일시하는 효과를 일으킨다.
이미지 출처: http://www.gettyimages.com/detail/2696526/Hulton-Archive 2010.11.16. 접근 


시각 경험을 지배 경험으로 받아들이고, 보이는 것을 믿어야 하는 시대에 막연한 이상은 충분하지 않았다. 구체적인 형상이 필요했다. 그것이 제 민족의 모습을 대표하는 남성이건, 타락한 몸이건 마찬가지다. 문제는 민족을 대표하는 존재는 남성이어야 하지만 타락한 존재는 남성일 필요가 없었다. 규범적 남성의 몸에 부합하지 않는 존재는 모두 타락한 존재였다. 즉 비규범적인 존재는 여성 범주로 설명되었다. “여성적 외형과 병든 몸은 통제할 수 없는 상상과 환상에 바탕을 둔 성적 실천”을 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George L. Mosse, 77). 타락은 피부 표면에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기 마련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프렉을 태생부터 죄악이자 신의 저주로 여기는 것은 그 시대의 규범적 반응이었다. 아름다운 것, 오직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만이 남성의 상징일 수 있었다. 그 시기 유행했던 고대 그리스 남성의 조각상이나 회화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아름다운 형상으로서의 남성성은 그 시대 남성들이 진정 사랑해야 하는 남성 이상이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회화와 조각을 통해 구체적인 모습을 갖춘 남성상은 근대적 남성성의 이상형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당대 유명한 작가들이 비이성애자라는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지 출처: http://blog.aladin.co.kr/hansabook/2791958 2010.11.10. 접근
 

고대 그리스의 남성미와 순수, 도덕과 같은 미적 규범이 모든 남성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상적인 남성상은 부르주아의 생활양식이었다(George L. Mosse, 76). 그리고 “부르주아의 행위 규범을 공격하거나 남성적 행위와 여성적 행위의 구분선을 넘어서려는 모든 사람은 비정상적인 존재–공동체 외부의 이방인–로 간주되어 사회를 위협하는 존재로 선고 받았다”(George L. Mosse, 2004a, 46). 성도착이나 호모섹슈얼리티(현재의 맥락에서 레즈비언, 게이, 바이, 트랜스젠더, 퀴어 등을 포괄하는 용어)는 성적 과잉의 상징이자 남성성과 여성성을 제대로 구분할 줄 모르는 존재였다. 호모섹슈얼리티는 당대의 남성성 규범에 따라 “원시인으로 간주”되었고, “모든 종류의 모반과 연관”되었다(George L. Mosse, 2004a, 46).  

물론 호모섹슈얼리티에 여성이 정확하게 어떤 식으로 포섭되는가는 다소 모호하다. 여성은 다른 프렉처럼 애당초 국민국가를 대표하는 존재일 수 없고, 남성성을 체현할 수 없는 비규범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남성만이 규범이며 남성성을 체현할 수 있었다. 여성이 남성성을 체현/재현하는 것은 남성성 규범과 젠더 이분법의 경계를 위반한다는 점에서 호모섹슈얼리티에 포섭되지만, ‘남성’의 경우와 동일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여성이 남성성을 체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남성이 남성성을 부인하는 것은 모두 남성/남성성 규범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었다. 이럴 때 사회가 대응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기존의 남성/남성성 개념의 한계를 인정하고 새롭게 재구성하는 것이 첫 번째고, 기존의 남성/남성성 개념을 고집하며 기존의 개념에 부합하지 않는 이들을 병리화하는 것이 두 번째다. 근대 남성성 기획이 대응한 방법은 두 번째였다. 당대 규범에서 호모섹슈얼리티에 해당하는 이는 추방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대부분의 의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뮐러의 역할은 법정을 위해 ‘성도착자’를 감식해주는 것이었다. (……) 그는 생물학적 원인을 전제로 동성애의 외형적인 징후들을 묘사했다. 그에 따르면 동성애의 외형적 특질은 은밀한 악덕의 표시다. 그런 징후에는 충혈된 눈, 연약함, 우울증적 발작, 단정하지 못한 외관, 맥없이 머리를 떨구는 경향 등이 포함된다. (George L. Mosse, 2004a, 52).

 
   

 

성도착/호모섹슈얼리티는 이렇게 병든 몸, 그래서 외모만으로도 충분히 지각할 수 있는 몸으로 재현되었다.
  

부그로(William-Adolphe Bouguereau)가 그린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단테는 그의 작품 <신곡>에서 그가 싫어했거나 그 시대의 비규범적인 존재를 지옥으로 추방했는데, 호모섹슈얼리티 역시 폭력 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
이미지 출처: http://goo.gl/ogCKv 2010.11.16. 접근
  

 

물론 이성애자라고 해서 그가 하는 모든 성적 실천이 용납되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무서운 예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악행’을 저질러 정신착란에 빠진 젊은이의 모습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생기 넘치고 아름다운 청년이었던 모양이지만, 아직 앞날이 창창한 열여덟의 그는 지금 너무나 창백하고 야윈 모습을 하고 있다.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는 힘없이 축 늘어뜨린 채 더러운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중략) 구속복이 입혀진 그의 두 손은 등 뒤로 묶여 있다. 뭔가를 말하려 하지만 혀가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듯 숨 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아 보였다. 그의 뇌세포는 미쳐서 기능을 못한다기보다 쇠약해져 허탈 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중략) 자연은 섭리를 거역한 악행에 대해 이렇게도 무서운 벌을 내리는구나!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나카노에서 재인용, 194)

 

 

 

 
1800년대 정신병원 견학은 프렉쇼처럼 일종의 유흥이었고, 병원 입장에서는 주요 수입원이었다. 그리고 위의 글은 클라이스트가 정신병원을 견학하다 보게 된 모습을 그의 애인에게 편지로 보낸 구절 중 일부다. 그렇다면 “자연의 섭리를 거역한 악행”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자위였다. 당시 자위를 금지하게 하려고 사내아이의 손을 이불 밖으로 내놓고 자도록 했을 정도로 ‘남성의 생산성 없는 성적 행위에 대한 금기’는 이 시대의 강박이었다. 자위를 하다 발각되었을 경우 정신병원에 구금되었고, 클라이스트가 본 모습처럼 변해갔다. 정신병원에 구금된 이상 이렇게 변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비규범적인 성적 실천에 따른 병든 외모는 정신병원에 구금되어 겪은 고초로 인한 것이 아니라, 자위행위 자체, 호모섹슈얼리티 실천 자체에 의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쇠약하고 병든 몸은 그 시대 비규범적인 존재의 규범적인 모습이다. 따라서 호모섹슈얼리티/퀴어, 아프리카인, 장애인/프렉 등은 모두 현생 인류의 이전 단계 ‘인간’이자 죄악이었다. 이들은 정신병원에 구금되거나 서커스 무대나 우리에 갇혀 전시될 뿐이었다. 이것은 그 시대 과학의 이름으로, 도덕과 윤리의 이름으로 정당한 실천으로 소비되었다. 그래야만 소위 규범적이라고 여길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를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2-3. 용광로: 규범적인 몸 이미지 구축하기

차이는 언제나 시대 지배 규범의 기획에서 발생한다. 차이는 동질성에 바탕을 두며, 동질성은 차이를 필요로 한다. 정말 ‘다르다’면 굳이 차이를 강조할 필요가 없으며, 정말 ‘같다’면 굳이 이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다른 말로 차이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다른’ 몸은 그 시대가 요구하는 규범적인 몸 이미지에 따른 발명이다. 발명한 ‘다른’ 몸은 신의 저주로 설명되었다. 그렇다면 기독교 세계에서 프렉쇼나 정신병원 관람은 신의 저주를 받지 않은 제 운명을 감사하기 위한 순례였던 걸까? 그래서 무대에 올라간 이들을 그토록 열심히 구경하려고 했던 것일까?

프렉쇼나 정신병원은 차이를 끊임없이 발명하고 유지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문화였다. 프렉이나 퀴어는 사회가 요구하는 지배 규범과 비규범적인 몸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미와 차이를 재현할 때 비로소 인식되었고, 병리적인 존재로만 사회에 출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차이를 통한 출현이 다양한 차이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프렉쇼와 정신병원(정신병원은 나중에 좀 더 설명할 예정임)은 모든 몸의 차이를 동질화했다.  

 

   
 

아마 프렉쇼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효과는 몸의 다양한 차이를 타자로서, 프렉이라는 단일 기호에 그 모든 것을 융합하여 삭제한 점이다. (Thomson in Clare, 72)

 
   

 

즉 “관객의 시선에서 프렉쇼는 차이와 타자성의 커다란 용광로”(Clare, 72)였다. 관객에게 배우 개개인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배우들은 그저 프렉일 뿐이었다. 이성애를 규범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동성애, 양성애, 트랜스젠더, 인터섹스는 그냥 변태일 뿐이듯, 프렉쇼 배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프렉쇼 무대는 프렉 개개인의 ‘차이’를 동질의 것으로 만들었다. 무대의 배우들이 인간인 것도 인간이 아닌 것도 아닌 존재라는 점에서 몸의 ‘다양성’은 중요하지 않았다. 관객과 다르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관객은 자신이 규범적이라고 믿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런 점에서 프렉쇼는 정신병원과 함께 근대적 인간을 (재)생산하는 핵심 장치였다.

앞서 인용한 마샤와 다샤의 경우, 언젠가 동물원 구경을 간 적이 있다고 한다(
줄리엣 버틀러, 114~115). 그들이 동물원에 도착하자 시민들은 동물이 아니라 마샤와 다샤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결국 동물원 구경을 포기해야 했던 마샤와 다샤는 이 경험을 전하며 분노를 표현했다. 마샤와 다샤는 자신의 생애를 구술하며,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신들을 구경하려 해서 불쾌했고, 그래서 종종 구경꾼을 괴롭히거나 복수했다고 말했다. 마샤와 다샤를 구경하려한 사람들의 반응, 그들을 ‘동물’로 만든 사람들의 인식은 도대체 무엇일까?

근대 이후 끊임없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주요 인식 중 하나는, 몸과 정신 사이의 분리를 당연시 한다는 점이다. 기독교식의 몸-영혼 이분법과 데카르트식의 이분법에 바탕을 둔 개인은 개별적이고 분리된 개인이다. 모든 인간은 의존적이고 상호 밀접한 관계를 통해서만 제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음에도 개별적인 몸, 독립된 몸을 인간의 기본값으로 설정한다.
 

르네 데카르트. 근대적 인식론을 주창한 그는 어릴 때부터 병약했다고 한다. 그나저나 데카르트의 외모가 딱히 ‘아름다운’ 것 같지는 않은데…… 이런 외모가 그 시절의 ‘미남’이었나?
이미지 출처: http://goo.gl/WIvhi 2010.11.10. 접근
 


사람들이 마샤와 다샤를 구경하고 기괴하게 여기며 ‘인간’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장애 정도가 아니라…… 결합형 신체의 모호함”(Shildrick, 85)이다. 마샤와 다샤가 태어난 직후 의사들이 시도한 실험은 마샤에게 약물을 주입하거나 고통을 가하면 다샤도 아플까(혹은 다샤가 아프면 마샤도 아플까)였다. 근대 인식론으로는 샴쌍둥이 혹은 결합형 일란성 쌍둥이가 두 개인의 몸이 붙어 있는 것인지, 한 개인이 둘로 나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없었다. 인간의 몸은 매우 명징하게 구분된다는 전제에서, 개인은 그 자신만의 주체성이 있다는 가정에서, 마샤와 다샤의 몸은 그 어느 것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들이 한 명인지 두 명인지 결정할 수 없다”(Shildrick, 85). 그래서 결합형 일란성 쌍둥이가 태어나면 의학은 분리 수술을 시도한다. 결합한 몸을 견딜 수 없고, 그것을 지배 규범에서는 ‘괴물’/‘기형’/‘장애’라는 범주 외엔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없으며, 괴물은 곧 질병이란 점에서 유일한 처방은 분리 수술뿐이다. 그것이 둘 중 한 명의 목숨을, 때때로 둘 다의 목숨을 잃게 할 수 있어도 분리 수술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분리 수술이 최선이라는 것은 누구의 판단일까? 마샤와 다샤는 아니다. 쉴드릭이 지적했듯, 결합한 몸을 참지 못하는 이는 이 쌍둥이가 아니라 사회다(Shildrick, 86). 지배 규범의 불안을 증폭하는 몸은 치료해야 하는 몸이며 사 생활을 할 수 없어 병동에 갇혀야 하는 몸이다. 지배 규범의 한계(‘차이’라고 부르는 것)를 생산하고 폭로하는 몸은 언제나 단지 괴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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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22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연쇄살인범, 아동성폭력범,존속살해범..들을 괴물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부끄러운 것과 안타까운 것의 차이를 표현할 줄 몰라서리..
 


2. 나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부인하는 오점인가? : 괴물스러운 몸의 역사

 

메리 셸리의 유명한 소설 <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피조물은 그를 만든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만난 자리에서 “나는 모든 사람들이 달아나고 부인하는 이 세상의 오점, 괴물인가?”(메리 셸리, 180)라는 말을 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 혹은 창조물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 직접 생명을 창조하겠다는 빅터(혹은 외과의사)의 욕망에서 태어났다. 빅터는 우연하게도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기술을 발견했고, 그래서 묘지와 도살장에서 구한 각종 시체 조각으로 피조물을 만들었다. 시작은 좋았다. 힘들었지만 그럴 듯했다. 신체 비율은 당대 미(美)적 규범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완성한 피조물이 생명을 부여받고 눈을 떴을 때, 빅터는 “음산한 빗줄기”가 내리고 있었다고 회고했다(메리 셸리, 88~89). 그는 자신이 만든 형상을 보고 기절하고 말았다. 그 모습은 너무도 무시무시했다. 봉합사와 칼로 만든 완벽한 신체 비율의 이 피조물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존재였다. 피조물은 빅터를 피해 떠났고, 산에 숨어 지냈다. 한 아이가 위험에 처했을 때 도움을 줬지만, 피조물이 아이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으로 여긴 부모는 서둘러 도망을 갔다. 어떤 이들은 피조물의 외모만 보고서도 돌을 던졌다. 외모만으로 개인의 성격과 존재 자체를 결정하고 규정해도 큰 문제가 없다는 태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1931년, 영화로 제작한 <프랑켄슈타인>의 포스터.
흔히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만 프랑켄슈타인은 괴물/피조물을 만든 이의 이름이다. 괴물/피조물은 이름이 없는 존재다.
출처: http://www.posterart.com/ourposters/frankenstein.html 2010.11.11. 접근 

 

그 피조물이 인간의 손으로 만든 괴물 형상이라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괴물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빅터와 피조물의 관계는 의사와 트랜스젠더의 관계를 암시하고, 괴물 형상은 장애인, 외국인, 이방인, 퀴어 등의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피조물/괴물은 내게 타자일 수 없다. 나는 셸리의 책을 읽으며 피조물을 나의 이야기로 읽는다. 피조물이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기절할 만큼 끔찍한 형상이란 걸 깨달았다는 구절을 읽고 심란했다. 글자도 모르고 세상에 대한 지식도 없는 피조물은 어떻게 제 모습이 끔찍하다는 것을 알았을까?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은 본질이라는 당대 철학적 흐름을 반영했기 때문일까?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기괴한 걸 혐오하는 건 본질적인 지식이지, 학습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인간이 만들었기에, 괴물 형상을 끔찍하게 여기는 감정도 같이 만든 걸까? 나 역시 거울을 볼 때면 종종 피조물이 느끼는 그런 감정을 느끼곤 한다.

인간이 먼저 위해만 가하지 않았다면 누구도 해치지 않았을 이 피조물은, 외모만으로 제 운명이 결정 난 이 괴물은 이 책이 발표되었을 당시(1818년 최초 발표, 1831년 개정판 발표)의 인간 범주를 반영한다. 그 시대는 일종의 기형쇼로 일컫는 프렉쇼(freak show)가 인기를 끌었고, 근대적 남성 이상을 기획하던 시기며, 근대적 식민주의/인종주의의 등장으로 근대 자본주의 발달에 적합한 인간만을 인간 범주로 얘기하던 시기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은 바로 이런 시대의 비인간, 혹은 괴물스러운 타자를 상징한다. 
  

 

2-1. 기형쇼(freak show)와 낯선 몸

앞서 얘기한 마샤와 다샤는 그들이 태어난 1950년대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태어날 당시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신체적, 정신적 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떨어져 외딴 시설에 격리되었다. (……) 시설에 보내진 장애아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생활 예절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식사 때 나이프와 포크를 주지 않는 시설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 당시 소비에트에서 장애가 있다는 것은 동물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다. (……) 그러나 우리는 단지 장애를 갖고 태어난 정도가 아니었다. 우리는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괴물’이었다. (……) 지금도 의학도서관에 가서 결합 상태의 일란성 쌍생아에 관해 조사해보려면 ‘우롯츠이’의 항목을 찾아야 한다. ‘우롯츠이’(чудовище)란 도깨비나 괴물이라는 의미이다. (줄리엣 버틀러, 18~19)

 
   


소비에트 연방에서만 이런 분위기였던 것은 아니다. 서구 사회에서 인터섹스나 프렉처럼 ‘다른’ 몸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관련 의료 기준이 정립되기 전까지 골방에 갇혀 지냈다. 그들은 마을 공동체 구성원일 수 없었다. 가족부터 마을 사람들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들을 방치했다. 그렇게 세상은 소위 규범적이라고 여기는 몸만 존재한다는 환상/신화를 구축하고 있었다. 괴물스러운 몸이 공공에 등장하면 이들은 단지 볼거리일 뿐이었다.

장애-퀴어 이론가 엘라이 클레어(Eli Clare)는 그의 책
<Exile and Pride>에서 볼거리로 존재했던 프렉(freak)의 역사를 개괄한다. 클레어에 따르면 프렉으로 불리는 이들은 총 네 가지 다른 유형으로 프렉쇼의 배우로 활동했다(엘라이 클레어, 71): ㄱ. 백인 장애인과 비백인(non-white) 장애인은 팔 없는 경이, 개구리인간, 거인, 난쟁이, 낙타소녀와 같은 명칭으로 불렸고, ㄴ. 미국으로 납치되었거나 노예로 팔려온 비백인 비장애인은 카니발과 미개인으로 불렸다. ㄷ. 미국의 비백인 비장애인은 야생에서 온 원주민으로 불렸으며, ㄹ. 시각 경험으로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고 여기는 차이가 있는 비장애인―수염 난 여성, 뚱뚱한 여성, 매우 마른 남성, 인터섹스 등―은 불가사의하고 끔찍한 전시물로 불렸다.  

  

수염 난 여성으로 소개된 줄리아 파스트라나.
하지만 수염은 ‘남성의 것’이며 여성의 털은 감춰야 하는 것이란 인식은 여전하다.
사진출처: http://goo.gl/8KYcC 2010.11.06. 접근
 

프렉으로 분류된 이들은 당시 최고의 오락거리였던 프렉쇼 무대에 올랐다. 아프리카 출신의 여성을 우리에 가둬놓고선 원인(原人)으로 소개했던 유명한 인종-젠더 폭력처럼, ‘다른’ 몸을 전시하고 이를 공연으로 기획하는 일은 그 당시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돈을 내고 이들을 구경하며, 무대에 선 프렉에 놀라고 공포를 표현하는 관음증은 그 시절의 윤리적인 행동이었다. 사실 관음증은 금기된 행동도 아니며 금기된 적도 없다. 시선의 권력과 관련한 논의에서 기본 전제는 ‘보는 자-보여지는 자’라는 이분법이다. 이런 이분법에서 ‘보는 자’는 시선 권력을 행사하며 타인을 대상화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관음증은 이런 믿음(혹은 망상)을 실천하는 방식일 뿐이다. 따라서 프렉을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이 프렉이 아님을 확인하는 일이었으며, 자신에게 시선 권력이 있음을 객석의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일이었다. 시각 경험을 중시하던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보르네오에서 온 야만인으로 소개된 히람 데이비스와 바니 데이비스.
하지만 이들은 미국 오하이오에서 살았던 발달장애 백인이었다. 마샤와 다샤에 따르면 소련은 자국에 장애인이 없다고 홍보했는데, 데이비스 형제를 이국의 원주민으로 소개한 미국 문화 역시 소련의 태도와 큰 차이가 없다.
사진출처: http://www.stevenbolin.com/freaks/waino.html 2010.11.06. 접근  

  

앞서 설명했듯, 무대에서 공연을 한 프렉의 면면은 다양했다. 뉴저지 출신의 발달장애인 아프리칸-아메리칸은 “그것은 무엇인가?(What Is It?)”,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로 소개되었다(엘라이 클레어, 73). 위의 사진에 등장한 히람과 바니 데이비스는 백인이었지만 보르네오 원주민으로 소개되었고, 당대 평균보다 키가 작은 사람은 『걸리버 여행기』의 릴리풋에서 온 사람으로 소개되었다. 이들은 모두 무대에서 자신의 ‘차이’를 강조했고 관객들은 놀람을 반복하며 제 몸의 규범성을 확인했다. 이 시기의 저명한 동물학자 바론 조르주 퀴비에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검은 피부색, 곱슬머리 등을 묘사한 다음 “그것(It)은 명백히 원숭이 집단에 가깝다”라고 말했고, 독일 과학자 카를 보그트는 발달장애의 한 유형을 설명하며 “그들은 역사의 진화 과정에서 인간이 지나온 초석의 하나”(엘라이 클레어, 80)라고 말하며, 이런 인식을 과학으로 포장했다.

프렉쇼가 쇠퇴한 이후, 몇몇 이론가들은 프렉쇼가 장애인과 비백인을 착취하고 전시한 행동이며, 이 무대에 선 이들은 순수한 피해자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것은 어느 정도 맞는 지적이지만, 전적으로 동의할 수도 없는 지적이다. 클레어가 자신의 책에서 상세하게 밝히고 있듯(
엘라이 클레어, 67~101), 프렉쇼 무대에 선 이들을 피해자로만 재현하는 것은 그 시대의 정황과 무대에 선 개인의 삶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해석한 것이다.

프렉쇼가 유행하던 시기, 이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보는 사람들의 배타적인 태도는 괴물스러운 몸으로 태어난 이들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을 어렵게 했다. 집이 가난하여 부모가 이들을 제대로 양육할 수 없는 상황일 때면, 집에 머무는 것이 마냥 좋을 수도 없었다. 반면 프렉쇼 무대는 이들이 제 몸으로 노동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프렉쇼 매니저는 이들을 서커스에 데려오기 위해 (간혹 납치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때때로 커다란 냄비 한가득 금과 은을 채워 부모에게 지급하곤 했다. 이것은 가족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방법이자, 프렉이 서커스단에 입단하며 직업을 구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런 정황에서 매매의 윤리를 논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무대에서 배우로 활동하는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관객은 ‘미지의 세계’에서 온 ‘야만인’, ‘괴물’, ‘낯선 몸’을 구경하기 위해 기꺼이 입장료를 지불했다. 그리고 무대에 선 배우는 으르렁거리고 거친 행동을 하며 ‘야만’의 행동 양식을 재현하거나, ‘괴물’스럽고 ‘낯선’ 몸을 과장하며 관객의 요구에 부응했다. 이를 통해 서커스는 엄청난 돈을 벌었고, 프렉 역시 (무대에 선 모든 프렉에게 해당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의 생계를 유지하거나, 부유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이렇게만 설명한다면, 무대에 선 배우는 피사체로만 존재한다.

하지만 이것이 서커스이자 무대라는 점을 상기하자. 매니저와 배우는 무대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관객이 놀라고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다. 다른 말로 관객이 프렉쇼를 찾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매니저와 배우는 무대에서 취할 행동을 계획했고, 늘 행동을 과장했다. 소인국 릴리풋에서 왔다고 소개받은 이들은 마치 그곳의 왕족 출신인 것처럼 행동했다. 동방의 미지에서 왔다고 소개된 이는 ‘야만성’을 강조했고, 원인(原人)으로 소개된 이들은 ‘미개함’을 강조했다. 배우들은 자신의 행동을 세세하게 계산했다. 히람과 바니 데이비스의 사진을 다시 한 번 확인하자. 소위 야만이라고 하기에는 사진 속 이들의 태도가 매우 차분하고 정갈하다. 단순히 키를 비교하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이들의 자세를 살펴보면, 프렉쇼에서의 모습과 다를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럴 때, 굳이 피해자라는 지위를 누군가에게 부여해야 한다면 과연 누가 될까? 무대에서 제 몸을 전시(해야)한 배우인가, 이들의 과장이 사실이라 믿으며 놀람에 놀람을 반복하고 제 몸의 규범성을 확인받으려 한 관객인가? (혹은 이국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인가?)

물론 프렉쇼 무대가 괴물스러운 몸, 낯선 몸으로 태어난 이들에게 노동 공간이었고, 매니저 역시 “프렉을 장애 차별과 인종 차별로 대하지 않았다”(
엘라이 클레어, 76)라고 했어도 당대 지배적인 몸 규범으로 인해 수익이 발생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무대에서 (재)생산한 것은 장애와 인종에 바탕을 둔 차이였고, 이를 낯설어하는, 이를 낯선 것으로 반응하는 관객의 믿음이었다. 만약 이 배우들이 각자 태어난 마을에만 계속 머물렀다면, “장애인은 죄악”이자 “도덕을 결여”한 몸(엘라이 클레어, 82)이라 여기는 당대의 기독교 세계관에 따라 생존이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무대를 통한 생존은 복잡한 이슈를 생산한다.

여러 복잡한 이슈 중 이 글의 주제로 제한해서 주목하는 이슈는 그 시절의 인간관이다. 관객은 배우의 외모를 통해 그들의 정신세계, 성품 등을 결정했다. 몸은 곧 정신이었다.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처럼, 괴물스러운 몸으로 태어난 것은 곧 죄악이었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이 시기는 데카르트식의 근대 철학이 주류였다. 몸과 정신은 별개였고, 정신은 육체를 초월한다는 논의가 지배 담론이었다. 인간은 몸 없는 존재/기관이며, 생각하는 존재라서 몸에 구속되지 않는다고 얘기했다. 그러면서도 프렉쇼에 등장한 인물을 괴물로 대하며, 그의 정신과 내면도 ‘괴물’스러울 거라고 가정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다. 근대적 인간이 가정하는 인간 범주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는 태도일 뿐이다.  

생각하는 존재와 다른 형태의 몸은 인간이 아니었다. 다른 말로 데카르트처럼 백인-(아마도 당대 의미에서) 비장애-(확인할 수는 없지만) 비트랜스-(역시나 확인할 수 없지만) 이성애- 남성만이 인간 범주에 속했다. 프렉쇼 무대의 배우를 “이것은 무엇인가?”라고 소개하는 것은 그런 인식에서 문제될 게 없었다. 관음증을 윤리적으로 문제 삼는 사회라 해도 관음의 대상이 인간 범주에 들지 않을 때, 관음(증)을 문제 삼는 이는 드물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인간 범주의 협소함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그 시절 중산층 백인 비장애 여성은 투표권과 재산권이 없었으며, 모든 것이 남성에게 귀속되어 있었다. 아내를 가르친다는 명목이라면 남편은 죽지 않을 만큼, 혹은 적절한 수준(누가 그 적절함을 잴 수 있을까?)에서 폭력을 행사해도 죄가 되지 않는 시대였다. 인간은 곧 남성이며, 괴물스럽지 않은, 혹은 혐오스럽지 않은 외모를 갖춘 남성이어야 했다. 하지만 괴물스럽지 않은 외모라고 해서 모든 남성이 규범적 남성이자, 인간인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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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2010-11-12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관련 자료들이 인상적이네요~ 글이 몹시 흥미롭습니다!

비로그인 2011-05-22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서양 모두 이전부터 임금이나 왕비, 귀족들 중에도 규범적이지 않은 남성들이 분명 있었구만...
 


1. 운명적인 탄생?

    

 

   
 

그날 모스크바에는 눈보라가 매섭게 휘몰아쳤다. 한밤중에 서른두 살의 에카테리나 크리보시랴포봐는 배가 너무 아파 눈을 떴다. 진통이었다. 초산이었으나 에카테리나는 차분했다.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갈아입었다. (줄리엣 버틀러, 13)

 
   

 

   
 

“자세한 내막은 밝히지 않고 무작정 병원으로 오라고만 하더군요. 걱정할 것 없다면서.” 

하지만 상대방의 말투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황급히 옷을 갈아입고 달려 나갔다. 그런데 현관문을 여는 순간 그들을 맞이한 것은 몇 주 동안 이어지던 따뜻한 봄볕이 아니라 폭설이었다. 눈 때문에 몇 미터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였고, 자동차는 범퍼까지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회색 하늘은 여전히 눈발을 퍼붓고 있었다. (
콜라핀토, 26)

 
   

 
소설을 비롯한 문학 작품이나 자서전 유의 작품에서 불길한 미래를 암시하는 진부한 방법 중 하나는 험상궂은 날씨나 자연재해다. 화창하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거나 무더운 여름날 갑자기 눈이나 우박이 내리는 식이다. 자연 풍경을 어둡고 또 불안하게 연출하여 앞으로 발생할 ‘무서운 재앙’을 암시한다. 물론 이 사건을 기다리는 이들은 늘 여유롭다. 혹은 별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그들은 그저 갑작스레 변한 날씨에 조금 놀랄 뿐, 여유로운 기분을 바꾸지 않는다. 이런 대비는 매우 진부하지만 극적 효과를 위해 지금도 자주 쓰이는 수사다. 그리고 독자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사건을 기다린다. 그렇다면 위에서 인용한 각각의 글이 앞으로 제시할 사건은 무엇인가? 독자는 어떤 사건과 조우하게 될까?

우선 줄리엣 버틀러의 글을 확인하자. 1950년 1월 3일, 출산을 앞둔 크리보시랴포봐는 차분하다. 그는 여성이라면 출산 경험쯤은 당연하다고 여기며 침착하게 대처한다. 그러나 바깥은 눈보라가 매섭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더욱이 남편은 야근이라 집엔 크리보시랴포봐 혼자다. 이 대비가 암시하는 것은 크리보시랴포봐의 죽음이나 난산이 아니다. 출산에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죽음의 입구에서 되돌아오는 난산은 아니었다. 태어난 아이가 조금 낯설었을 뿐이다. 쌍둥이로 태어난 두 아이는 흔히 샴쌍둥이라고 부르는 결합형 일란성 쌍둥이였다.
 



마샤와 다샤
사진출처: http://criterioncollection.blogspot.com/2009/01/89-sisters.html 2010.11.01. 접근 

 


마샤와 다샤, 십대 시절의 모습
사진출처: http://www.phreeque.com/masha_dasha.html 2010.11.01. 접근
  

마샤와 다샤(Masha and Dasha Krivoshlyapova)라 불린 이 쌍둥이 자매는 태어난 직후 의사의 판단으로 부모와 헤어졌다. 의사는 부모에게 아이의 출산을 함구할 것을 강요했다. 의료진은 이 두 자매를 괴물스러운 존재로 여기며 곧 죽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실험 병동으로 두 자매를 이송한 후, 마샤와 다샤의 부모에게 두 딸이 한 달도 안 되어 죽었다는 거짓 보고를 했다. 의료진은 쌍둥이에게 각종 생체 실험을 자행했다. 마샤에게 침을 찌르면 다샤가 아픈지 알아보는 실험부터 방사능 실험까지 의료 지식의 증가와 의학 발전을 명목으로 실험을 정당화했다. 이 실험을 진행하는 데 마샤와 다샤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의사는 결합형 일란성 쌍둥이 자매가 몇 주 안에, 한 달 안에, 다시 일 년 안에 죽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둘은 50년 이상을 살다 2003년 4월 17일 고인이 되었다.(자세한 내용은 줄리엣 버틀러 책 참조)

다음 콜라핀토의 인용구를 확인하자. 두 사람, 라이머 부부는 집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태어난 지 몇 달 안 된 쌍둥이가 병원에서 포경 수술을 받을 예정이었지만, 워낙 유명한 전문 병원이라 부부는 걱정하지 않았다. 수술이 잘 끝났으니 데려가라는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여유롭게 집에 머물렀다. 하지만 전화를 받고 나서 황급히 병원으로 가려고 했을 때, 바깥은 이미 봄날의 날씨가 아니었다. 몇십 년이 지난 뒤에도 그 동네 주민들이 생생히 기억할 정도의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부부는 서둘러 병원으로 갔다. 그들을 기다리던 소식은 “걱정할 것 없”는 사건이 아니었다. 포경 수술을 하다 쌍둥이 첫째가 음경에 화상을 입은 것이다. 회복 불능의 사고였고, 평생 음경 없는 남자로 살아야 할 상황이었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존/조안 사례(John/Joan Case)로도 알려진 데이비드 라이머(David Reimer)다. 널리 알려져 있듯, 데이비드 라이머는 존 머니(John Money)란 의사를 만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여자 아이로 살아야 했다. 그리고 머니는 데이비드가 여자로서 잘 살고 있음을 의학계에 발표하며 젠더 정체성에 양육 환경이 중요하다는 그의 평소 지론을 재차 주장했다.  

 



데이비드 라이머, 어린 시절
사진출처: http://www.intersexualite.org/David.html 2010.11.01. 접근

 

데이비드 라이머, 십대 시절. 왼쪽은 쌍둥이 동생, 오른쪽이 데이비드 라이머.
사진출처: http://www.findagrave.com/cgi-bin/fg.cgi?page=gr&GRid=20309661 2010.11.01. 접근
 

그러나 머니의 주장과 달리, 데이비드는 여성 젠더 범주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못했다. 가끔 여성으로 살고자 노력했지만, 여성 젠더 범주를 강요하는 주변의 모든 사람과 불화했다. 그리고 결국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후 다시 남성으로 재성전환 수술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콜라핀토, 주디스 버틀러 참조. 개략 내용은 A, B 참조) 

  

  

재성전환 후 다시 남성으로 살기 시작한 데이비드 라이머의 모습
사진출처: http://goo.gl/lPOcL 2010.11.09. 접근
 


마그릿 쉴드릭(Margrit Shildrick)이나 빅토리아 피츠(Victoria Pitts)를 비롯하여 몸 변형을 주제로 삼는 몸 이론가들은 괴물스러운 몸이 전통적으로 신의 저주, 불길함의 전조로 다루어졌음을 지적한다. 지배적인 몸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몸으로 태어난 이들은 늘 사회적인 관심의 대상이자 관리/통제의 대상이었으며, 의학 실험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등장할 때면, 인간은 미처 사실을 모르고 있다 해도 자연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갑작스런 일기 변화가 찾아온다. 마치 이들의 등장과 날씨가 밀접한 관련이라도 있다는 듯. 마치 괴물스럽거나 낯선 사고를 겪는 존재는 태어나기 전부터 혹은 갓난아기 때부터 그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듯. 예부터 전통적으로 쌍둥이는 신의 말을 전하는 존재이자 불길한 출생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마샤와 다샤, 데이비드 라이머가 쌍둥이로 태어난 것을 각각의 저자가 언급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다.

이런 우연이 사회적 불안과 불길한 미래의 암시라면, 내가 일요일에 태어난 것도 신의 저주였을까? 나는 일요일에 태어났는데, 그 시절 대부분의 병원이 문을 열지 않아 문을 연 병원을 찾느라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길에서 태어날 수도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별 볼 일 없지만 그럼에도 나의 생애에 대해 쓴다면, 그때의 경험은 내 일생을 암시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쓰일까? 콜라핀토가 책 곳곳에서 사건이 있던 날 갑작스럽게 폭우가 내렸다고 말하는 것처럼, 내가 일요일에 태어난 것 역시 그런 이정표가 될까? 그렇다면 문을 연 산부인과가 거의 없는 일요일에 태어난 나의 출생은 역시나 신의 계시 혹은 어떤 ‘불운’의 전조일까? 트랜스젠더이면서 레즈비언이기도 한 나의 삶은 내가 일요일에 태어났다는 것과 상관이 있는 걸까? 불길한 날 혹은 조금은 다른 날 태어난 이들은 모두 괴물스러운 존재로 예정되는 것일까? 나는 나와 같은 날, 그저 시간만 조금 다른 때 태어난 이들을 몇 명 알고 있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자신을 이성애 남성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소위 말하는 ‘엄친아’로 잘살고 있다. 나와 같은 날 태어난 이들의 삶은 나와 어째서 다른 것일까? 다른 말로, 마샤와 다샤가 태어난 날 다른 병원에서 태어난 분리형 일란성 쌍둥이 혹은 외둥이 아이들, 데이비드 라이머가 수술을 받던 날 같은 병원에 있던 다른 이들은 어째서 이들과 다른 삶을 살았던 걸까?

날씨와 날짜, 혹은 특정 시기로 개인의 운명을 연출하는 서사는 괴물스러운 몸을 가진 존재가 불길함과 불안을 품고 있는 존재이자 신의 저주를 받은 존재라는 전통적인 인식을 답습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불길한 존재로 만들어 그 사회의 문화적 불안을 그들에게 온통 쏟아 붓고선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자 개인의 문제라며 사회에서 추방한다. 날씨 등의 묘사는 이를 정당한 일로 (재)생산한다. 이들이 불길한 것도, 불행한 삶을 사는 것도 모두 자연 질서이자 개인의 문제라는 듯. 몇 달 전, 부산에서 발생한 살해 사건의 용의자 김길태 씨의 이름을 두고, ‘길에서 태어났다’는 뜻임을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규범적 이성애 가족 내에서의 출생만을 정상화/규범화했던 것처럼. (지배) 규범적이지 않은 가족과 출생은 마치 그 자체로 불행이자 사회적 악의 원흉이라도 되는 것처럼.

화학적 거세(법 용어로는 ‘성충동 약물치료’)를 주요 주제로 잡은 이 글이, 괴물스러운 몸의 출생과 이를 둘러싼 반응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괴물스러운 몸과 화학적 거세 이슈가 무슨 상관인 걸까? 피상적으로 접근할 때 이 둘은 별개의 사건이다. 경우에 따라 이 둘이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한다면, ‘괴물스러운 몸’으로 불리는 이들의 분노를 자아낼 수도 있는 접근이다. 화학적 거세 대상자이자 아동 성폭력 가해자를 괴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괴물’이라는, 뉘앙스는 동일하지 않지만 표기법은 동일한 공통점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 외에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나 역시 조두순 사건을 비롯한 일련의 가해 사건 소식을 접하며, 트랜스젠더 이슈와의 접점을 떠올리지 않았다. 하지만 화학적 거세를 강하게 주장하는 여론과 이를 정말로 법제화하는 정치권의 움직임을 접하며, 나의 무지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학적 거세는 트랜스젠더의 핵심 이슈 중 하나다. 그리고 화학적 거세 논의를 계기로 이 사건에 접근하며, 조두순과 같은 이들을 대하는 이 사회의 지배 규범적 태도가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괴물스러운 몸/존재를 대하는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나는 이 글에서 지배 규범이 그 자신을 순수하고 안정된 장치이자 제도라는 신화를 유지하기 위해 낯선 몸, 위반하는 몸, 그리고 법을 어기는 몸을 괴물로 만드는 역사와 그 인식을 살피고자 한다. 이 몸들은 언제나 동일하거나 유사한 제도를 통해 감금되고 통제되었다. 그렇다면 이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구분할 수는 있을까? 구분할 수 있다면 어째서일까? 구분할 수 없다면 어째서일까? 괴물을 창조함으로써 지배 규범, 혹은 주류 사회가 욕망하는 것은 무엇일까? 화학적 거세를 통해 한 개인을 괴물로 추방할 때, 이 추방이 실제 이루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 글을 통해 이런 일련의 ‘진부한’ 질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

Thanks to
이 글을 쓰는 데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다. 국회 회의록을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유아(다음에 꼭 같이 글 써요!), 흥미로운 책과 논문을 알려준 당고와 진홍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장애-퀴어 세미나 모임과 나의 나태함을 인내하며 간신히 꾸려가고 있는 TQueer 웹진 구성원들, 그리고 구금시설 관련 공부와 토론을 함께한 진홍과 유섹인이 아니었다면 이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특히 고맙다. 아울러 이번 기획을 함께한 분들, 이번 기획의 시발점인 KSCRC(및 아카데미) 활동가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KSCRC 사무실 보증금 마련 프로젝트(http://rcdream.egloos.com/ 참고)가 꼭 성공해서 이사하지 않아도 되길!! 그나저나…… 책에 관심 없는 리카는 그렇다고 해도, 책과 논문에 과도한 관심을 보이며 이빨 자국을 잔뜩 남기면서도 정작 글은 안 쓰는 바람은 왜 그러는 것이냐! 고양이면 다냐!! 우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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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22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이 규범적인 가족들의 이해를 얻을 수 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