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디스트릭트 9' 혹은 구분하려면 좋은 무기가 필요하다

 

괴물스러운 몸 자체는 질병을 유발하지 않는다. 괴물스러운 존재는 인간이라는 범주의 한계를 드러내고, 국민국가가 요청하는 규범적인 인간상을 위협할 뿐이다. 그래서 지배 규범은 약물이나 수술과 같은 의료 실천으로 ‘괴물’을 관리하려 든다. 물론 약물이나 수술로 통제해야 하는지, 통제할 수 있는지는 자명하지 않다. 성폭력 가해자 역시 약물로 ‘치료’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들을 약물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이 옳은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떤 부작용이 발생할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화학적 거세법은 비규범적인 존재를 의학적 실험 대상으로 삼는 행위가 적법하다는 선언일 뿐이다. 1832년 영국에서 ‘해부학법’을 제정하여 사형수와 빈민층을 외과 의학의 해부학 실습 대상으로 삼은 것처럼.

화학적 거세법을 발의한 국회의원의 말처럼, 이 법은 그 자체로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가용한 많은 무기 중 하나다.    

 

   
 

◯ 박●식 위원: 이 법안은 절대로 유일무이한, 또 완전무결한 아동 성폭력 범죄를 근절시킬 수 있는 그런 ‘마스터 키’는 결코 아닙니다. 그렇지만 아동 성폭력 범죄가 횡행하는 우리 현실을 볼 때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무기가 여러 가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여러 가지 좋은 무기 중의 하나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저는 이런 차원에서 이 법안을 발의했고 (……) (법제사법위원회 2009, 32)

 


 
이 ‘실험적인 무기’는 부작용이 발생할 때에야 ‘무기’일 수 있다. 사실 부작용은 과학이나 의학 실험에서 예측하는 결과 중 하나다. 실험 결과가 예측과 다르게 나오면 이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부작용이나 실패는 성공의 다른 판본이다. 만약 화학적 거세 조치를 시행한 성폭력 가해자에게 몸 변형이 발생하여 단박에 파악할 수 있는 몸이 된다면, 즉 부작용이 생긴다면 이는 ‘성공적’인 결과다. 인터넷으로 신상 명세를 조회할 필요도 없다. 프라이버시 침해를 운운할 필요도 없다. 화학적 거세법으로 가해자 몸에 ‘부작용’이 생긴다면, 언론은 이를 보도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 부작용과 언론 보도를 통해, 독자/관객은 가해자를 쉽게 판별할 수 있다. 몸이 모든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럴 때 트랜스젠더는 어떻게 될까? 트랜스젠더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서둘러 호르몬을 투여하고 성전환수술을 해서, ‘모호한’ 젠더 상태에 머물지 않고 가급적 빨리 ‘여성’ 혹은 ‘남성’으로 사라져야 한다. 그럴 자신이 없거나 경제적 여유가 없다면, 의료적 조치에 참여하기를 포기해야 한다. 화학적 거세법은 성폭력 가해자 중 일부를 관리함으로써 의료적 조치를 바라는 mtf/트랜스젠더 여성 다수를 위협하고, ‘타고난 젠더’ 질서를 통제한다.

불행하게도 이 법과 이 법을 지지하는 담론이 아동 성폭력 가해자를 범죄화/병리화 하는 지점은 남성성이나 남성의 성충동/성욕이 아니라, 가해 대상이 아동이라는 점뿐이다. 조두순 사건, 김수철 사건 등이 발생했을 당시, 그리고 지금도, 성인 여성을 향한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 경험자를 비난하는 언설은 여전하다. 여성이 미니스커트를 입었다는 이유로 폭행을 자행하는 사건도 여전하다. 화학적 거세법은 성폭력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는다. 이 법이 문제 삼는 것은 아동은 순수하다는 신화를 훼손했고, 국민국가에서 재생산과 인구 관리라는 지상 과제를 위반했다는 점뿐이다. 그리하여 아동 성폭력 가해자가 위반한 것은 아동을 무성적인 존재로 남겨야 하는 규범, 아동이야말로 순수하다는 신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규범이다. 이 신화와 규범이 아동 성폭력의 원인 중 하나임에도 이 지점은 은폐된다. 이 사회에서 성/폭력을 묵인하는 구조는 문제 삼지 않는다. 지배 규범적인 태도를 개인의 문제로 설명할 뿐이다.

그래서 화학적 거세법을 통해 아동 성폭력 가해자는 또 다른 의미에서 피해자가 된다. 젠더 이분법으로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억압을 얘기하면 이에 대한 반론이랍시고, “남자도 힘들다”, “장남의 부담이 얼마나 큰지 아느냐”라는 대답을 듣곤 한다. 이런 대답이 젠더 질서를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면 좋으련만, 대개는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쓰인다. 마찬가지로 가해자는 과도한 남성성의 피해자가 될 뿐이다. 가해자가 피해자라는 말은 곧 그 자신의 성충동/성욕이 그만큼 강력하다는 과시기도 하다. 가해자가 말한 “내 안의 괴물”은 자기도 주체 못할 정도로 강력한 성충동/강한 남성성을 지시한다. 지배 규범적인 성욕/남성성이 문제가 아니라, 성욕과 남성성이 강해질 때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는지를 폭로했다는 점이 아동 성폭력 가해자가 일으킨 문제인 셈이다. 결국 아동 성폭력 가해자는 남성 성욕 신화의 한계를 폭로하는 동시에 그 ‘성욕’의 범위와 한계를 확장한다.

법안에서 거세라는 용어 사용을 둘러싼 논쟁 역시 마찬가지다. 거세라는 명칭을 고집한 이들은 거세까지 대책으로 가지고 있음을 공포(公布)해 (잠재적) 가해자를 위협하려 한다. 이는 거세와 남근/음경이 남성/남성성에 차지하는 비중을 암시한다. 남성/남성성에서 음경은 전부거나 거의 대부분이다. 화학적 거세로 성폭력을 예방할 수 있다는 주장과 거세라는 용어를 둘러싼 논쟁은 남성의 성욕 신화를 자연 질서/본질로 확인하는 노력이다. 따라서 ‘거세라는 말’이 주는 ‘수치심과 거부감’은 가해자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거세라는 용어 대신 약물 처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거세라는 용어가 남성성에게 가하는 위협과 불안을 완화할 뿐이다.

사실, 아동 성폭력 가해자는 거세의 대상이 아니다. 거세의 대상은 규범적인 남성상에 부합하는 존재에게나 해당하는 형벌이다. 거세는 규범적인 존재를 비규범적인 남성/존재로 만드는 행위다. 하지만 아동 성폭력 가해자는 이미 비규범적인 괴물이기에 ‘남성’ 범주에 들지 않는다. 이럴 때 가해자는 ‘거세’의 대상일 수 없다. 약물치료의 대상일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야지만 지배 규범적이라고 불리는 남성을 보호할 수 있다. 화학적 거세법은 남성의 성욕/남성성이 아무리 강해도 국민국가의 지배 규범을 위협하지 않는 수준에서 실천하는 존재만 남성일 수 있다는 선언이다.  
 

영화 <디스트릭트 9> 홍보 포스터 중 하나. 영화에서 지구인은 타자, 이방인, 괴물, 외계인 등 비규범적인 존재 “프론”을 특정 구역에 격리하며 이른바 규범적이라고 여기는 존재와 분리한다. 이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인터뷰 장면에서 한 인간/지구인은 “외국인도 아니고 외계인!”이라며 프론에게 이유 없는 분노를 표출한다. 타자를 향한 혐오에도 위계가 있는 걸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위계가 아니라 비규범적인 존재를 끊임없이 창조하고, 분리하고, 격리하려는 규범적인 욕망이다.
이미지 출처: http://www.traileraddict.com/poster/district-9/10 2010.11.21. 접근
 


사회는 언제나 규범이 아니라 비규범을 전시하는 방식으로 제 토대를 형성했다. 프렉쇼가 그러했고, 정신병원이 그러했다. 프렉쇼는 무대 배우와 관객 사이의 구별 짓기를 통해 관객의 규범성을 획득했다. 하지만 관객이 규범적인 몸이라는 것을 어떻게 보증할 수 있을까? 무대의 배우와 ‘다른’ 몸이라고 해서 그것이 규범적이라고 말할 근거는 없다. 정신병원은 앞서 설명했듯, 궁극적으로 유순하지만 여타의 구성원에 섞일 수 없는 몸을 만든다. 사회에 순응하되 다른 구성원과 변별점이 있는 몸이다. 이것은 정신병원을 비롯한 구금 시설이 훈육하는 몸의 기본 규율이다. 비규범적인 존재는 변별할 수 있도록 관리되어야지 사라져서는 안 된다. 규범은 언제나 비규범적인 존재를 통해서만 제 존재를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변별점이 사회의 불안을 자극하고 가중한다. 사회는 비규범성을 전시하여 ‘관객’에게 모종의 불안을 자극해야 한다. 이 자극은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규범성을 지향하도록 하는 데 필수다.
 
자, 트랜스젠더인 나의 몸은 내가 범죄자란 증거다. 내 몸은 그 자체로 내가 정신병자이거나 비규범적인 존재, 괴물스러운 몸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다. 나의 언어는 정신병자의 헛소리다. 괴물스럽기에 불완전하다고 여기는 몸은 피츠가 지적했듯, “불완전함, 통제 불능, 그리고 치료를 받아야 하는 고통스러운 자기를 표현”(295)하는 것으로 소비된다. 이 글은 괴물스러운 나의 울부짖음이다.
 
신체표지형을 비판한다고 해서 구금 시설에 머문 역사를 숨기고, ‘프라이버시’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프라이버시는 기본적으로 지배적인 지위에 있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논의이자 수단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상당하다. 뿐만 아니라, 범죄 가해자의 프라이버시 유지는 가해자의 ‘인권 보호’라고 이해하기 어렵다. 과거 미국의 경우, 트랜스젠더를 진단한 의사들은 트랜스젠더에게 과거를 숨기고 새로운 생애사를 만들 것을 권고했다. mtf라면 남성으로 통했던 역사를 숨기고, 다른 사람을 만날 때면 자신이 태어났을 때부터 여성으로 통했던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의료 규범적 행동이었다. 성전환 수술의 역사를 은폐하도록 하는 ‘조언’은 의학에서 트랜스젠더를 위한다는 명목의 처방이었다. 그렇다면 이 처방은 트랜스젠더에게 긍정적이었을까? 이 처방의 궁극적인/실질적인 효과는 트랜스젠더의 프라이버시 보호가 아니었다. 이 처방은 트랜스젠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엔 트랜스젠더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트랜스젠더라는 존재를 은폐하고 삭제해야만, 사회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젠더 이분법을 자연 질서로 유지할 수 있다. 트랜스젠더의 프라이버시라는 명목으로 사회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한 것이다.

이는 퀴어 관련 기사에 달리는 댓글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퀴어 관련 기사마다 ‘너희끼리 조용히 숨어 살지 언론에 왜 자꾸 나오느냐, 짜증나고 구역질 난다’라는 식의 댓글이 빠지지 않는다. 이런 댓글은 퀴어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한다는 피상적인 표현 속에, 퀴어를 향한 지독한 혐오와 불쾌를 담고 있다. 즉 퀴어를 접하고 싶지 않는 ‘나’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고 보호받으려는 욕망을 반영한다. 사실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퀴어나 프렉의 프라이버시는 보호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애당초 관심 사항이 아니다. ‘알고 싶지 않음’을 적법한 것으로 만들려고 프라이버시를 운운하는 것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범죄력의 프라이버시 보호가 보호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다시 고민해야 한다. 범죄력의 프라이버시 보호는 어떤 의미에서, 세상은 안전하며 문제가 없다는 믿음, 지배 규범에 순응한다면 삶에 문제가 없다는 환상, 범죄자는 매우 특수한 존재라는 망상을 재/생산하려는 것은 아닐는지. 원하지 않는데도 누군가의 과거를 일방적으로 폭로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지만, ‘프라이버시 보호’가 정말 보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당신이, ‘우리’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정보란 무엇일까? 어떤 의미에서 더 많은 것을 직면해야 함에도 이를 서둘러 은폐하고, 보호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괴물스러운 몸의 역사를 통해 화학적 거세법을 읽으며, 내가 묻고 싶은 부분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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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22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이웃의 고등학생이 학교를 그만두고 여장을 하고 다닌다고 동네에서 쑤근거려 그의 가족들이 무척 괴로워하던 일이 있었습니다. 부모는 동네 소문 때문에 문제의 핵심을 놓치고 결국 아이를 집 밖으로 내모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안타깝더군요. 이 문제는 범죄와 정신병과 분명히 구분지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4. "저 괴물에 맞서기 위해 우리에겐 더 많은 무기가 필요하다" : 화학적 거세와 몸 관리

 

4-3. 신체표지형(身體標識刑/Marked Body), 법의 효과
 

   
 

◯ 박●식 위원: 지금 저도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초등학교 1학년인데 850만 명의 부모들이 잠재적인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적이 지금 총칼을 들고 내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데 지금 부작용이 있니 없니, 이것은 제가 볼 때는 이 절박한 상황을 너무 안이하게 보는 것 아닌가? 우리가 무기를 가질 수 있다면 전자 발찌도 좋고 화학적 거세법도 좋고 또 열람 · 공개 제도도 좋고 다 한번 해보는 겁니다. (……) 물론 신중하게 접근해야 되겠습니다마는 너무 또 이렇게 조심조심 하다가는 세월이 다 갈 수 있지 않겠느냐 이런 생각을 말씀드립니다. (법제사법위원회 2009, 14-15)  

◯ 최●국 위원: 이것보다는, 화학적인 거세보다는 차라리 물리적 거세하는 게 어떻습니까? (……) 이렇게 복잡하게 할 게 아니고 물리적 거세를 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 진술인 한●훈: (……) 만약에 원하지 않는데도 그야말로 강제적으로 이렇게 한다는 것은 일종의 신체형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법제사법위원회 2009, 16)

 
   

 
치료라는 명목의 개입은 사회를 보호한다는 명목, 가해자 개인을 보살핀다는 명목으로 사회와 개인 모두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리고 이 변화는 개인에 대한 공격을 유발한다. 질병(disease)이나 병고(illness)에 대한 의료 진단은 그 병을 앓고 있는 개인을 향한 혐오를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화학적 거세의 부작용은 이의 다른 판본이다. 화학적 거세라는 낙인찍기는 신체형, 나의 말로는 신체표지형이다. 신체형이 몸에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으로서 과거의 곤장과 같은 형식이라면, 신체표지형은 누가 봐도 그가 범죄자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도록 하는 형벌이다. 화학적 거세 혹은 성충동 약물치료는 범죄를 병리화하고, 가해자를 치료하여 범죄를 예방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이를 실현하기는 어렵다. 가해자를 더욱 두드러진 존재로 만들 뿐이다. 오히려 이를 통해 혐오 폭력에 취약한 상태로 만든다.

아동 성폭력 가해자의 몸은 호르몬 투여를 처방 받은 후 ‘여성형 외형’으로 변한다. 그리고 가해자가 출감 후 사회생활을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그의 바뀐 외형을 통해 그가 성폭력 가해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혐오 폭력이 발생한다면 그 폭력은 성폭력 가해자를 향한 폭력일까, mtf/트랜스젠더 여성을 향한 폭력일까? 화학적 거세 조치를 받은 이와 호르몬 투여를 시작한 mtf/트랜스젠더 여성은 피상적으로 어떻게 구분될 수 있을까? 나는 mtf/트랜스젠더 여성이 아동 성폭력 가해자로 오인되어 폭력 피해를 겪을 상황을 우려한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성폭력 가해자인 줄 알았다는 명분으로 트랜스젠더 혐오 범죄가 증가하거나 혐오 폭력을 정당화할까 봐 불안하다. 그렇다고 해도 이 두 범주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싶지는 않다. 이 둘은 다른 것이며, mtf를 비롯한 트랜스젠더는 범죄자가 아니라는 주장도 하고 싶지 않다. 역사가 증명하듯, 둘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결국 기존의 규범성, 소위 ‘정상적인 몸’이라고 불리는 이상(理想)만 강화할 뿐이다. 구분하면 할수록 트랜스젠더는 비규범적인 존재라는 ‘편견’만 강화할 뿐이다. 구분 짓기를 하기보다, 나는 화학적 거세라는 신체표지형이 무의식적으로 욕망하는 것, 정말로 처벌하고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싶다. 즉 트랜스젠더의 호르몬 투여와 성폭력 가해자의 화학적 거세의 다른 맥락을 읽기보다, 나는 신체표지형의 욕망을 읽고 싶다. 

 

이 댓글은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인터뷰 기사에 달린 것의 일부를 직접 캡처한 것이다. 이 인터뷰에는 나도 참가했기에 기사 링크를 걸고 싶지만, 나만 참가한 것은 아니라 생략했다. 이런 댓글은 퀴어 관련 기사에 지금도 여전하다. 혐오 발언과 혐오 폭력을 표현의 자유로 이해하는 한, 이런 댓글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근대의 세균설을 통한 인간 생활의 관리와 통제는 이제 우리 사회의 일상 실천이다. 세균의 가시성 확보는 의료 통제를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화학적 거세는 세균설의 2010년 판이다. 가시성의 확보를 통해 막연한 공포, 누가 범죄자인지 누가 비규범적인 존재인지 알 수 없는 공포가 아닌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공포를 생산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비규범적인 존재는 규범적인 존재와 명백히 다르다. 이들은 결코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고, 규범적인 존재에 섞여서도 안 된다.’ 주지하다시피 이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프렉쇼나 정신병원처럼, 근대국가를 형성하는 초석이 된다.

민족국가/국민국가는 규범적인 형태의 남성-몸을 시대의 이상이자 자연 질서로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비규범적인 몸은 국가와 사회에 위협이라고 비난하며 분명한 구분을 시도했다(Mosse, 75). 지배 규범은 비규범적이라고 불리는 존재가 “그의 훼손된 몸”(Mosse, 79)을 통해 “사적인 악덕을 폭로”(Mosse, 76)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언제나 몸을 통해, 피부 표면에 드러나는 어떤 특징을 통해 인간을 구분해왔다. 화학적 거세와 같은 신체표지형은 이런 구분을 용이하게 한다. 신체표지형은 별도의 검사나 신분 조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냥 상대의 몸을 보면 곧 바로 그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도록 한다.  

  

신분 증명의 역사는 몸을 구분하고, 차이를 발명하는 역사기도 하다.

 

따라서 화학적 거세의 부작용은 이 법을 통해 신체표지형을 집행할 수 있도록 하는 주요 수단이다. 부작용은 그 자체로 화학적 거세법이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는 또 다른 처벌이다. 부작용을 통해 성폭력 가해 남성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한다. 이를 통해 구축하는 또 다른 축은 자명하다. 화학적 거세 처분을 받지 않은 (이성애-비트랜스젠더) 남성은 곧 성폭력 가해를 하지 않는 남성이며, 가해자와는 달리 사회에 위협을 가하지 않는 남성이라는 신화다. 즉 성폭력 가해를 하는 남성-몸과 성폭력 가해를 하지 않는 남성-몸을 구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신체표지형의 효과다. 성폭력은 낯선 사람보다는 가족이나 친인척, 이웃 사람 등 낯익은 사람이 가해자인 경우가 훨씬 많음에도 화학적 거세법은 이 사실을 은폐한다. 법에 따라 ‘성폭력 가해자는 다른 몸이며, 그 몸은 트랜스젠더처럼 이 사회의 젠더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외형을 갖춘 존재가 된다. 아울러 성폭력은 매우 특수한 사건일 뿐 일상에서,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이것이 몸을 “표지하고 표지되도록”(marking and being marked)(Sullivan, 556) 하는 화학적 거세법의 기본 전제다. 이 전제에 따라 지배 권력이라는 폭력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이성애-비트랜스젠더) ‘남성’은 자신의 행동을 폭력이 아니라고 항변할 수 있다. 아니, 항변할 필요가 없다. 문제가 있는 존재는 이미 그 외형을 통해 단박에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형벌로서 화학적 거세는 결국 단순한 성욕 감퇴나 예방을 지향하지 않는다. 규범적인 존재로 분류되던 이에게 화학적 거세 조치를 함으로써 괴물스러운 몸만들기를 지향한다. 원래 비규범적인 존재의 경우, 외형을 통해 즉각 인식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규범적이라 여기는 존재와 구분이 잘 안 되니 시각 경험으로 즉각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누구나 성폭력 가해자일 수 있다는 인식, 성폭력이 발생하는 복잡한 맥락, 규범과 비규범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이해를 차단한다. 대신 두드러진 몇몇을 규범적이지 않는 몸으로 만들어 성폭력 발생의 권력 위계를 소수의 개인적인 문제로 돌린다. 아울러 ‘여성화’를 통해 트랜스젠더 혐오나 비이성애 혐오의 대상이 되도록 하여 규범과의 완전한 단절을 시도한다(트랜스젠더 여성이 성폭력 가해자로 오해받아 혐오 폭력을 겪을 때, 사람들은 폭력 가해자를 비난하겠는가, 트랜스젠더 여성을 혐오하겠는가? 아니, 이 사건이 언론에 등장하기는 할까?). 차이의 규명은 곧 동질성의 확보라는 점에서, 화학적 거세법 제정은 규범적인 남성 범주를 (재)정립하고 이를 보존하려는 노력이다. 이 모든 노력은 ‘비규범적인 몸은 그 자체로 이미 처벌이자 형벌의 대상이며, 불행 그 자체’라는 이해가 사회 전체에 만연하기에 가능하다.

화학적 거세법의 효과성과 실효성은 바로 이것이다. 법을 시행한다고 해서 예방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시행령이 제정되고 적절한 시행 규칙이 생긴다고 해서 성폭력을 줄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화학적 거세법을 시행한 후 아동 성폭력 가해자가 몇 퍼센트 줄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법을 공표함으로써, 비규범적인 존재와 규범적인 존재를 구분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불안을 완화하는 것이 이 법의 실질적인 목적이다. 비규범적인 존재와 규범적인 존재는 분명하게 다르며, 행여나 구분할 수 없다면 화학적 거세법과 같은 형식의 조치를 통해 가시적으로 구분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지 표명을 입법이라는 형식으로 실현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통해 이미 괴물스러운 존재로 불린 이들은 여전히 비규범적인 존재로 살겠지만, 규범적인 존재로 불린 이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안정적인 토대로 만들 수 있다. 화학적 거세 처분을 받지 않은 ‘나’, 화학적 거세 처분을 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확신하는 ‘나’는 위법한/폭력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규범적인 존재라는 차폐막을 칠 수 있다. 그리고 화학적 거세법은 비규범적이라고 여기는 존재의 차이를 지우는 용광로가 된다. 이 법에 투사된 욕망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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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月 2010-12-09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루인님 글 보다가 관련 도서들에 대한 흥미가 새로 일어 두 권의 책을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답니다. <몸으로 떠난 여행> <하느님과 만난 동성애>... 소수이기 때문에 특별하고 그래서 소외당하기 쉬운 어떤 관점들을 알게 된 계기였달까요. 아무튼, 연재 고맙습니다.

비로그인 2011-05-22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규범적인 존재 여성은 비규범적인 존재에 대해 이해가 많이 부족합니다. 보여지는 존재들은 미디어의 이슈 밖에는 없기 때문이지요.
 


4. "저 괴물에 맞서기 위해 우리에겐 더 많은 무기가 필요하다" : 화학적 거세와 몸 관리

 

4-1. “내 안에 괴물이 있다” : 범죄의 의료화
 

   
 

◯ 진술인 김●균: (……) 성범죄자 분류를 당연히 철저하게 해야 됩니다. 총 20% 미만이라고 알려져 있는 호르몬을 주체할 수 없는 성범죄자에 대해서 한정적으로 쓸 때는 저는 이 화학적 거세가 의미가 있다고 보고요. (……) 그래서 가석방이 끝난 뒤 화학적 치료를 받을 때 그 사람은 이제 환자입니다. (……) 정말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하고, 그래서 일정 정도 형기를 산 사람한테 그런 치료를 이용해서, 우리가 이 사람이 성공적으로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잘 도와줘야 되고, 약물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서 노력해야 되고, 치료감호소에만 맡길 게 아니라 우리들이 다 관심을 가지고 치료를 해줘야 됩니다.

◯ 진술인 신●진: (……) 네 번째, 피해자의 저항까지 극복해야지 성폭력이 되기 때문에 아이들을 자꾸 교육을 잘 시킨다든지, 또 교육을 많이 시킨다 이런 것들이 중요한데, 문제는 가해자들이 왜 어린애들을 많이 건드리느냐, 이 네 번째를 알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가장 저항을 못하거든요. 특히 성폭력 피해자 같은 경우에 6세 이하의 어린 아이들이 많습니다. (……) 화학요법과 (……) 다른 심리치료요법이 병용이 되면 분명히 도움이 된다는 연구는 많이 있습니다. (……) 이것을 그러면 누가 할 거냐, 처방과 이런 것들을 할 때 반드시 정신과 의사 선생님들이 하셔야 됩니다. 이게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 진술인 조●경: (……) 단지 약물의 효과로 이 범죄 자체를 컨트롤할 수 있을 것이라는 좀 지나친 기대에 빠질 수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그래서 특히 작년에 발생한 강 모 씨의…… 혜진 ․ 예슬이 사건은, 그 사람은 사실은 사이코패스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안 되지만…… 그래서 특정 범죄자들은 아무리 호르몬과 심리 치료를 시도하더라도 바뀌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법제사법위원회 2009)

 
   


역사적으로 모든 위반 행위가 처음부터 범죄로, 질병으로 다뤄진 것은 아니다. 종교의 시대, 서구 기독교의 시대에 위반 행위는 범죄라기보다는 죄악이었다. 신의 섭리, 신의 율법(더 정확하게는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인간의 율법)을 위반하는 것은 신의 저주와 심판을 받을 죄악이었다. 종교의 시대, 당시 최고의 형벌은 파문이었다. 교황이 일국의 왕에게 파문을 선언하면 거주민 누구라도 왕에게 돌을 던지고 욕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신을 향한 신실함이 인간이기 위한 핵심 조건인 시대에 파문은 곤 인간이기 위한 존재 조건의 박탈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모든 행동은 종교적인 행동이었다. 이러한 것을 19세기, 20세기 초반에 들어 국가의 존립 문제로 다루면서 범죄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정신병원에 일괄 구금되었던 이들을 분류하고, 범죄화하여 교도소와 같은 형태의 시설에 별도로 관리했다.

그렇다면 의료화는 범죄화가 쇠퇴하던 시기에 발생했는가? 그렇지는 않다. 위법 행위를 분석하는 이들은 위법 행위를 다루는 태도가 죄악에서 범죄로, 범죄에서 질병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한다. 이것이 지금은 위법 행위를 범죄나 죄악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는 시대라고 해도, 여전히 종교적 판단은 법을 집행하는 과정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정당한 법이 보수적인 일부 종교계의 격렬한 반대로 폐기되는 일은 드문 경우가 아니다. 문제는 이를 최종 결정하는 주체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으로서는 의료/의학이며, 위반 행위는 곧 질병으로 진단된다는 뜻이다.

어떤 사건의 범죄자가 어떤 종류의 범죄자인지, 정말 범죄자인지, 어떻게 가해 행위를 했는지를 밝히는 모든 과정에 의학/의료가 개입한다. 이는 화학적 거세법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법에 해당하는 범죄자를 판단하는 방법은 제2조 제1항에 나와 있듯, 정신과 전문의의 감정을 필요로 하고, 화학적 거세를 청구할 때에도 역시 “정신과 전문의의 진단 또는 감정 의견”(제9조)이 필요하다. 진단은 그 자체로 병리화 과정(Butler, 275)이라는 점에서 이 법은 범죄를 병리화/의료화하는 전형이다.

위에서 인용한 세 명의 진술인은 2009년 11월 19일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상습적 아동 성폭력범의 예방 및 치료에 관한 법률안에 대한 공청회”(이하, 공청회)에 전문가로 초대받은 이들이다. 총 네 명의 진술인 중 둘은 법학자이며, 한 명은 의사, 다른 한 명은 심리학자였다. 하지만 법학자도 의사도 아동 성폭력 가해를 성인-남성과 아동-여성/남성의 복잡한 권력 위계에서 발생한 폭력이 아니라, 정신 질환에 따른 행위로 설명한다. 그러면서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치료해야 하는 환자로 분류한다. 그렇다면 진단과 처방에 따라 적절히 조치하면 더 좋아질까? 이들은 의료화 맥락에서 적절히 처방하면 결과가 좋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물론 의료화가 유일한 해법은 아니다. 화학적 거세법이 최선이 아니라는 것은 공청회에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초대받은 이들도, 국회의원들도 안다. 이 법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은 공청회 참가자 거의 모두가 공통으로 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의학적 치료를 병행할 때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며 의료화를 정당화한다. 이때 의료화 과정에서 놓치는 부분이 생기는 것은 자명하다. 가해자와 피해 경험자 간의 권력 질서는 사라지고, 모든 것은 개인의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가해자들은 이 권력 위계를 모르는 상태에서 가해했을까? 이들은 정말 ‘이성적’이라고 말하는 사고를 못하는 것일까? 공청회 자리에서 진술인 신●진은 “그렇게 이성적 사고를 하는 분이 별로 없어요. 그 가해자들 중에서”(법제사법위원회 2009, 34)라며 가해자를 비합리적인 존재로 설명한다. 합리성과 비합리성이라는 이분법, 이성과 비이성이라는 이분법 자체가 문제지만, 이런 이분법을 가정한다고 해도 신●진의 진술은 모순이다. 위에도 인용했듯, 신●진은 성폭력 발생 원인을 설명하며, 네 번째 원인으로 성폭력은 “피해자의 저항까지 극복해야” 가능한데, 가해자들은 “아이들이 가장 저항을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법제사법위원회 2009, 6). 힘의 권력관계를 가장 정확하게 아는 것만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 어디 있는가? 신●진의 이 발언은 성폭력 사건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반복,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더 심각하다. 성폭력이 발생하는 것은 목숨을 걸 정도로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저항하지 않은 것은 동의한 것이라는 식의 논리는 이미 지난 몇십 년 동안 비판받아왔다. 신●진의 발언은 성폭력을 정당화하고, 성폭력의 책임을 피해 경험자에게 돌리는 언설의 전형이다. 성폭력 가해는 바로 이런 문화적인 인식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시점에서 더 ‘쉽게’, 더 ‘자주’ 발생하고 은폐된다. 가해자 김수철은 “내 안에 괴물이 살고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언설은 “술에 취해 나도 모르게”라는 조두순 식의 변명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즉 “괴물” 발언은 “술에 취해서”의 다른 판본이다. 이것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아울러 가해자가 알았건 몰랐건, 괴물의 역사적 함의를 떠올린다면, 가해자가 자기 안의 괴물을 언급하는 순간, 그는 권력을 활용한 가해자가 아니라 심약한 병자로, 치료받아야 하는 약자로 지위를 변경할 수 있다. 의료화를 통해 성폭력 가해자는 그 자신이 피해자/약자라는 지위를 점유/전유하고 (재)활용한다. 김현영의 지적처럼, 이를 통해 “약자 혐오의 담론이 생성”된다. 피해 경험자도 가해자도 모두 피해자고 비난받을 대상이 된다. 신●진의 표현 방식에 따르면, 피해 경험자건 가해자건 충분히 저항할 힘을 기르지 않은 것이 문제다. 일제시대와 6·25, 군사 독재 시기를 통해, 힘과 체력을 기르는 것이 한국 근대화와 국민국가 형성의 주요 과제라는 점에서(박노자 2009), 약자 혐오 담론은 한국 사회의 지배 질서를 유지하는 토대다. 약자 혐오는 일상이며, 피해를 겪은 사람만이 잘못이다. 화학적 거세법과 치료 담론은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줄곧 (재)생산된 약자 혐오와 가해자의 폭력(“내 안의 괴물”)을 적법한 것으로 승인할 뿐이다.


4-2. “실제 어느 정도 부작용이 있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 화학적 조치의 부작용
 

   
 

◯ 박●식 위원: (……) 부작용…… 그런데 다른 감기약이나 어떤 약품도 완전무결하게 부작용이 없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것 아닙니까, 지금? 실제로 어느 정도 부작용이 있는지 데이터를 저는 사실은 모릅니다. 그렇지만 미국의 10개 주 이상 또 우리가 보통 선진국이라고 하는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상당 기간 시도 · 도입되어서 지금 시행되고 있다고 한다면 그 자체가 상당한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한 번 도입을 해보자는 것이지요. 도입을 해서 이제 직접적으로 우리 스스로 장단점이…… 장점이 뭐고, 단점이 뭐고, 부작용이 뭐고, 효과는 어느 정도 있는지를 직접 검증할 수 있겠다 (……). (법제사법위원회 2009, 14)
 
◯ 손●규 위원: (……) 자꾸 반론을 하고 주저주저하게 만드니까, 그러니까 입법자들한테 신경이 쓰이게 자꾸 반론을 하니까 (……) 그러니까 이것을 제대로 하려면 강제 투입, 말이 ‘강제’라 그렇지 동의를 얻지 않는 투입입니다. 이게 형벌이 아니라서 그렇지, 형벌의 경우에는 징역을 동의 받고 살게 해요? 사형을 동의 받고 해요? (법제사법위원회 2009, 32
)

 
   


이 글의 초기에 인용한 마샤와 다샤의 경우, 자신들이 겪은 온갖 실험을 회고하며 “누구도 우리를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우리는 그저 실험 재료일 뿐이었다”(줄리엣 버틀러, 31)라고 말했다. 이들을 인간으로 태어난 존재로 인식하고 대했다면, 마샤와 다샤에게 행한 실험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마샤와 다샤가 인간이 아니라고 인식할 때, 그저 인간적인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어떤 종(種)이 아닌 다른 종으로 이해할 때, 그들에게 그런 실험을 할 수 있다. 라이머의 경험 역시 마찬가지다. 존 머니가 라이머를 그의 주장을 증명할 사례가 아닌 인간으로 이해했다면, 그런 수술은 쉽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머니는 그 수술을 시행했다. 머니에게(혹은 의학에서) 인간이기 위해서는 외부 성기가 명확해야 했기 때문이다.

공청회에서 박●식의 발언은 성폭력 가해자를 인간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같은 자리에 있었던 최●국 역시 “이런 패륜적이고 소위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어떤 것도 없으면, 스스로 동물이 되기를 원하는”(법제사법위원회 2009, 16) 존재로 취급한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부작용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법을 도입하자고 하거나(박●식), 부작용을 감안하고서라도 법을 도입할 것을 주장(신●진, 법제사법위원회 2009, 28)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해자를 인간으로 만드는 장치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부작용이 있을까? 데포를 비롯한 ‘여성’호르몬 계열 ‘약물’을 투여했을 때, 예상할 수 있는 부작용은 성욕 감퇴, 안면 홍조, 피로감, 식욕 증가, 불면증, 우울증, 골밀도 감소, 고혈압 등이다. 이런 부작용이 “약물을 많이 썼다 하더라도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의 부작용은 아닐 수”(신●진, 법제사법위원회 2009, 6)도 있다. 하지만 이런 부작용은 트랜스젠더가 호르몬 투여를 했을 때 생길 수도 있다는 바로 그 부작용이다. 아울러 부작용을 우려하는 진술인과 의원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바, 해당 호르몬은 여성에게만 실험했기에, 남성에게 안전한지를 예측할 수 없고 관련 연구도 거의 없다고 말한다.

화학적 거세의 안정성 검사가 부재한다는 지적과 이에 따른 우려는 남성에게는 시행한 적이 없다는 데 있다. 하지만 가정하기를 만약 남성에게만 검사해서 특별한 부작용이 없다는 결과가 나왔을 때, 그 약을 여성에게 투여하는 이슈에서 이처럼 진지하게 안정성 논의를 다룰까? 과연 “자연의 섭리를 역행”(이●성, 법제사법위원회 2009, 19)한다는 우려를 표현할까? 이와 관련해서 캐롤 타브리스는 의학의 안정성 검토에서 많은 경우, 백인-남성의 몸이 기준이란 점을 비판했다. 인종에 따라, 몸의 상태에 따라 다른 처방이 필요함에도 백인-남성의 처방 기준을 모든 개인에게 적용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의료 사고는 다소 빈번하다. 한국의 의약품이나 식품의 효능과 안전성을 강조하는 데 미국 FDA를 거론하는 것 역시 이제는 익숙한 일이다. 그래서 다시 질문하기를 만약 여성에게 어떤 약물치료를 처방하는 법을 만들 때도 지금과 같이 모든 의원과 진술인이 부작용을 우려할까?  

그 상황이 되어야 확인할 수 있으니 예단은 하지 말자. 하지만 의구심은 남는다. 화학적 거세의 부작용을 검증한 결과가 없다는 말은 의구심을 키울 뿐만 아니라 곤혹스럽다. 화학적 거세로 거론하는 많은 호르몬은 mtf/트랜스젠더 여성이 종종 사용하는 제품이다. 그리고 mtf건 ftm이건, 트랜스젠더의 호르몬 투여에 따른 효과와 부작용 연구는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부작용에 대한 선행 연구 부재라는 주장은 무엇을 의미할까? 어쩌면 태어났을 때 같은 젠더로 분류되었다고 해도, mtf/트랜스젠더 여성은 이성애-비트랜스젠더 남성과는 다른 존재기에 mtf가 겪는 부작용을 이성애-비트랜스젠더 남성에게 적용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닐는지. 하지만 화학적 거세에 쓰일 호르몬은 출생 시 동일한 젠더를 지정받은 존재들이 이미 사용하고 있고, 그 효과는 일상에서 나타나고 있다.

나는 트랜스젠더의 경험이 특수해서 비트랜스젠더 남성에게는 적용할 수 없다고 이해했기에 진술인이 선행 연구가 없다고 말한 것만은 아니라고 추정한다. ‘여성’호르몬을 투여하면, 일단 여성형 가슴이 발달하고 신체 전체가 소위 여성적이라고 여기는 형태로 변한다. 법은 “석방되기 전 2개월 이내에 치료 명령”(법 제14조3)을 하도록 하는데, 2개월이면 몸이 여성형으로 상당히 변하는 시간이다. 치료 명령 가해제 신청 등은 “치료 명령의 집행이 개시된 날부터 6개월이 지난 후”(법 제17조2)에 하도록 규정했는데, 6개월이면 호르몬 투여의 효과가 거의 다 나타나는 시간이다. 6개월 정도 호르몬을 투여하고 나면, 그 이후부터는 이제까지의 변화를 유지하기 위해 호르몬을 투여한다. 물론 호르몬의 종류에 따라 경과 기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여성’호르몬 투여는 신체 변형을 전제한다. 
 

범죄인류학 창시자 격인 동시에 근대 형사법과 범죄학의 토대를 마련한 롬브로조는 범죄자의 특징이 몸에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위의 이미지에서 왼쪽 아래에 있는 얼굴은 롬브로조가 말한 방화범 남성의 특징을 갖춘 형태다. 그에 따르면, 방화범은 여성스러운 외모와 특징을 갖췄으며, 방화범과 남성 동성애자는 외적 특징이 비슷하다고 한다.
이미지 출처: http://images.wellcome.ac.uk/indexplus/image/L0010112.html
2010.11.19. 접근
 


나의 의심은 이 지점에서 싹튼다. 부작용을 감안해서라도 도입하자는 것은, 부작용도 처벌의 일부라는 뜻이다. 부작용을 처벌의 일부로 여길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부작용을 통한 신체 변형을 이 법이 지향하는 지향점으로 보는 것은 아닐는지. 그래서 부작용 선행 연구가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닐는지(이른바 모른 척하기). 나의 이런 추정은 의학의 역사가 살림의 역사라기보다는 죽임의 역사이며, 의학의 오진은 무지가 아닌 정당한 의료적 조치와 의료 지식을 적극 활용하여 발생하는 측면(푸코, 280-281)이 있다는 점 때문이다. 박●식의 의견처럼 부작용 자체를 하나의 처벌로 여긴다면, 예측할 수 있는 부작용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것이 논란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그리고 부작용을 통해 비규범적인 존재를 추방하여 지배 규범의 안전을 꾀할 수 있다면, 법을 제정하려는 입장에서는 이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근대적 남성성 형성 과정에서 비규범적인 존재를 정신병원과 프렉쇼 무대로 추방했듯, 부작용은 비규범적으로 여겨지는 존재를 추방하여 규범적인 존재를 (재)생산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즉 범죄자/가해자를 비규범으로 추방하여 기존의 규범적이라 여기는 존재를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 또한 ‘괴물’은 비규범적인 외형을 갖추는 것이 규범적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런 추측이 단순한 가설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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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22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학적 거세 후 이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단지 성욕 감퇴로 재범을 방지할 수 있는 줄만 알았지...
 


4. "저 괴물에 맞서기 위해 우리에겐 더 많은 무기가 필요하다" : 화학적 거세와 몸 관리

 

화학적 거세법으로 알려진 법의 정식 제명은 “성폭력 범죄자의 성충동 약물치료에 관한 법률”이다. 이것은 지난 2010년 6월 29일 국회에서 통과되었을 때의 제명이며, 발의 당시에는 “상습적 아동 성폭력범의 예방 및 치료에 관한 법률”이었다. 법안을 발의한 2008년 9월 8일의 제명과 법안 중 국회를 통과한 제명 어디에도 화학적 거세라는 표현은 없다.  

이 법이 화학적 거세법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2009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조두순 사건에서 비롯한다. 당시 판사는 음주 상태를 ‘정상 참작’하여 가해자 조두순에게 검사의 구형을 감형해서 선고했다.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여론은 들끓었고, 화학적 거세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견보다는 지지하는 의견이 주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 법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이 법의 ‘제1조(목적)’와 관련이 있다.   

 

   
 

제1조(목적): 이 법은 13세 미만의 아동을 대상으로 한 상습적 성범죄자 중에서 비정상적인 성적 충동이나 욕구를 억제하기 어려운 성도착증 환자로 판명된 자에 대하여 화학적 거세 치료 요법 및 심리 치료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재범을 방지하고 사회 복귀를 촉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법제사법위원회 2010, 41. 법안을 제출했을 당시의 목적) 

 
   


  
첫 법안 발의자인 박●식은 “잠재적인 피해자인 우리 어린이들을 두텁게 보호하기 위하여 아동 성폭력범에게는 ‘처벌보다는 치료’를 해주거나 양자를 병행하는 것이 재범률을 낮추는 데 효과가 있다”라며 이 법을 제안했다(법제사법위원회 2010, 2). 그러면서 화학적 거세의 법제화를 주장했다. 하지만 이 법은 최초 발의 당시인 2008년 9월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2009년 조두순 사건이 발생하면서 화학적 거세 논의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고, 김길태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그 후 김수철 사건이 2010년 6월 초 언론에 보도되면서 그달 말 통과되었다.     


 


여론 조사 전문기관인 리얼미터(http://www.realmeter.net)에서 2010년 6월 17일 19세 이상 성인 남녀 700명을 가구 전화 자동 응답으로 조사한 결과.
이 결과에 따르면 물리적 거세(38.3%)와 화학적 거세(37.3%)를 합쳐 75.6%가 거세에 찬성하고 있다.
이미지 및 자료 출처: http://goo.gl/ZSv7G 2010.11.16. 접근 

 

이 법의 공식 약칭은 “성충동 약물치료법”이다(법무부 블로그 참고). 이유는 최초 발의안과 국회에 통과한 법안 사이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두드러진 차이는 ㄱ. 피해 경험자의 나이를 13세에서 16세로 확장한 것, ㄴ. ‘화학적 거세 치료 요법 및 심리 치료 프로그램’을 ‘성충동 약물치료’로 변경한 것, ㄷ. 가해자의 동의 조항을 삭제하고 정신과 전문의의 진단 또는 감정 의견만으로 화학적 거세를 청구할 수 있도록 한 점이다. 동의 조항은 이 법을 검토했을 당시 중요한 이슈였고, 동의 조항이 있어 법안이 헌법의 한계 내에 있다고 판단했음에도 최종안에서는 빠졌다.

나는 아동 성폭력 가해자에게 화학적 거세를 시행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왔을 때부터 크게 다섯 가지 이유로 반대했다. 첫째, 화학적 거세를 하면 성폭력을 줄이거나 예방할 수 있다는 주장은 남성의 성욕과 성폭력의 원인을 생물학적 필연이라고 가정한다. ‘남성의 성욕은 너무도 강하고 그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따라서 화학적 거세 조치라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남성 성욕 신화의 결정판이자 성폭력 가해자를 옹호하는 논리다.  

둘째, 화학적 거세는 소위 ‘여성’호르몬이라고 불리는 약물을 투여한다. 이는 여성은 무성적이거나 호르몬 비율상 ‘여성’호르몬이 상대적으로 많으면 성욕이 없다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이것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비난하고 금기하는 논리와 동일하다.  

셋째, 성관계의 측면에서, 화학적 거세는 발기불능 상태를 지향하는데 이것은 남성 주도의 삽입 성행위만을 정상적인/규범적인 섹슈얼리티로 가정한다. 남성의 성욕/(이성애적) 성관계만을 규범으로 삼는 논의다. 그렇다면 흡입을 욕망하는 남성은 성폭력 가해를 하지 않을까? 이런 식의 논의는 성폭력의 의미를 매우 협소하게 가정하며, 성기를 매개하지 않는 많은 종류의 성폭력을 은폐한다.  

넷째, ‘여성’호르몬 투여를 통한 남성의 성욕을 줄이거나 없앨 수 있다면, 그리하여 성범죄를 예방할 수 있다면 mtf/트랜스젠더 여성은 화학적 거세 논의에서 어떤 존재가 되는 걸까? mtf는 성욕이 없다는 것일까? 아울러 호르몬 조치/화학적 거세는 성폭력 가해를 의료 질병으로 이해하는데, 이런 이해는 트랜스젠더를 치료해야 하는 대상으로, 성전환을 질병 치료 과정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mtf/트랜스젠더는 결국 화학적 거세를 당한 남성, 성욕을 잃은 남성, 그리하여 여전히 남성이란 뜻일까?  

다섯째, 이것저것 다 떠나 남성 성욕의 신화가 여전하고 위계 권력이 바뀌지 않은 상황에서 화학적 거세가 ‘해결’하는 것은 사실상 없다(관련해서는 김현영의 글이은심의 글을 참고해도 좋다, 이 글에서 다루지 않고 있는 이슈를 잘 다루고 있다).

나는 이 법과 관련해서 위에서 제시한 다섯 가지 정도의 이유 중, 특히 네 번째에 대해 집중해서 고민했다. 화학적 거세와 트랜스젠더 이슈는 어떤 관계일까? 이 법을 시행하게 되면, 트랜스젠더는 어떻게 되고, 무엇을 보호받을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다가 앞서 길게 논의한 내용이 화학적 거세 논의와 관련 있음을 깨달았다. 앞으로는 이 깨달음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풀어가고자 한다. 덧붙여 법안의 정식 명칭과 공식적인 약칭이 “성충동 약물치료법”임에도 나는 이 법을 화학적 거세법으로 부르고자 한다.  

법안 심사 보고서에 따르면 화학적 거세를 성충동 약물치료로 수정한 이유가 “수치심과 거부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법제사법위원회 2010, 17). 하지만 수치심은 누구에게 주는 수치심일까? 이 법의 대상인 성폭력 가해자에게 수치심을 줄 수 있다는 것인지, 성폭력 가해자와 동일한 외부 성기를 가진 남성에게 수치심을 줄 수 있다는 것인지 명확하지가 않다. 거부감 역시 마찬가지다. ‘성충동 약물치료’라고 용어를 변경했다는 것이 화학적 거세를 하지 않고 다른 방안을 찾겠다는 것 또한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공식적인 약칭과는 별도로, 이 글에서는 이 법을 화학적 거세법으로 부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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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22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폭력범죄자처럼 타인에게 평생 고통스러운 피해를 가하는 자들에게 화학적 거세 찬성하는데..
 


3. "당신은 환자이니 사회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 사회 의료화, 젠더 규범화

 

다른 한편, 현미경의 발명과 세균의 발견은 의학이 인간 생활을 구체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이 되었다. 보이는 것은 곧 사실이며, 사실은 보이는 것이어야 한다는 근대의 시각 경험은 질병을 볼 수 있어야 했다. 즉 질병은 어떤 형태로든 모습을 갖췄을 거라고 가정했다. 현미경의 발명은 질병의 원인이 세균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세균의 구체적인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를 통해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이 바뀌었다. 이전까지 질병에 대한 치료는 이상한 냄새를 제거하자거나 쥐를 없애면 된다는 식의 다소 막연한 언설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세균을 ‘볼’ 수 있게 되면서, “눈에 보이는 세균을 박멸하는 데 화력을 집중”(신동원 2002, 347)하자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질병은 세균으로 생기므로 세균을 관리하면 질병을 관리할 수 있다는 세균설은 생활양식의 변화를 초래했다. 세균설의 영향력은 2009년, 한국 사회를 비롯하여 많은 나라를 휩쓸었던 신종플루만 떠올려도 쉽게 알 수 있다. 신종플루로 몇 명이 죽었다는 식의 기사가 연일 언론에 보도됐을 때 대책으로 나온 것은 예방 접종과 함께 위생 용품 및 항균 제품을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위생 용품과 항균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많은 건물들이 건물 입구마다 이 제품을 비치했다. 어떤 곳은 입구에 항균 제품으로 손을 씻기 전에는 출입할 수 없다는 경고문을 걸어두기도 했다. 이런 행동은 모두 구체적인 형태의 세균을 확인할 수 있고, 그 세균을 죽이면 병을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밑절미 삼는다. 

 

신종플루 바이러스의 이미지.
현미경과 촬영 기술의 발달은 질병을 구체적인 형태를 가진 세균의 모습으로 재현한다.
이미지 출처: http://henseed.co.kr/customer/channel_read.asp?page=3&idx=16 2010.11.08. 접근
 


현미경의 발명과 세균설은 물의 위생, 주거 위생, 화장실의 청결, 도시의 생활 상태 등 모든 부분에 의료가 개입할 수 있도록 했다. 관리되지 않은 지저분함은 전근대의 상징이었고, 청결과 위생은 근대의 상징이었다. 이런 인식은 1800년대 후반의 조선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외국 사람이 (……) 말하기를 ‘조선은 산천이 비록 아름다우나 사람이 적어서 부강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도 사람과 짐승의 똥오줌이 길에 가득하니 이것이 더 두려운 일이다’라고 한다. 이것이 어찌 차마 들을 말인가? (김옥균, 신동원 2006, 102에서 재인용)

 
   

  

사실 이전까지 조선의 거리에서 똥오줌이 가득한 모습은 특별할 것 없었다. 이것은 조선만이 아니라 근대 이전 사회의 일상 풍경이었다. 하지만 세균설이 전 세계(식민지?)로 퍼지고 위생과 청결이 질병을 예방하는 필요조건이 되면서 이전의 관습은 불결과 구습, 전근대의 징표로 재해석되었다. 그것은 타파해야 할 악습이었다. 그래서 공중 화장실을 만들었고 노상방뇨를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보고 계몽했으며, 가가호호 위생 상태를 확인할 수 있도록 위생 경찰 제도를 만들었다(신동원 2002, 351). 더러움은 어떻게든 피해야 하는 낙인이었다. 병에 걸린다는 것은 위생과 청결을 충분히 관리하지 않은 무지와 게으름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 인구 관리 정책과 함께했다. 건강한 몸을 유지해서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여 국민국가를 재생산하는 것이 주요 과제인 사회에서 청결은 인구 정책의 핵심이었다. 아이들이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는 것을 막아야 했다. 따라서 청결과 위생에 국가의 개입은 필연이었다. 유길준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정부가 위생에 관한 법을 정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만약 소홀한 자가 있을 때에는 엄한 법으로 다스려서 도로와 집안을 청결하게 하면, 충분히 전염병의 유행하는 형세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신동원 2006, 112에서 재인용)

 
   

  

위생과 청결은 국가가 직접 관리해야 하는 일이었으며, 위생 경찰은 집집마다 일일이 돌아다니며 위생 상태를 확인했다. 위생 경찰의 업무를 방해하거나 위생 상태가 기준에 부합하지 않을 경우 그것을 국가의 존립에 위해를 가하는 행위로 보았다. 개인의 건강은 곧 국가의 건강이며, 불결한 위생 상태는 곧 국가에 위해를 가하는 반역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런 식의 개입은 주로 여성의 몸을 통해 이루어진다. 집이 너무 습하거나 지나치게 건조하면 세균이 쉽게 번식한다는 말, 화장실 변기, 주방, 욕조 등에서 세균이 많이 산다는 식의 언설은, 성역할을 자연 질서로 삼는 사회에서 여성의 행동을 관리하는 방식이었다. 건강한 국민 재생산 역시, 여성의 출산권을 관리하는 기획이었다. 다른 말로 위생과 청결은 여성의 몸을 관리 통제하는 동시에 성역할을 강화하는 장치기도 했다. 과학적(의학적) 가사 노동이나 ‘과학적’ 출산이란 말은 모두 이런 기획의 다른 판본이다. 즉 가사 노동이 과학적인 노동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위생과 청결을 요구하는 과학적 방법에 따라 가사 노동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국가는 의료화/과학화를 통해 집안 곳곳에 개입했고, 여성을 ‘집안의 천사’로 머물도록 했다.

이런 논리는 정확하게 프렉을 향한 혐오, 퀴어나 자위행위를 향한 혐오와 동일하다. 프렉이나 퀴어는 그 자체로 병든 몸이자 병을 보유하고 있는 몸으로 해석되었다. 퀴어나 프렉은 사회에 위협을 가할 뿐만 아니라 국민국가 재생산에 기여하지 않거나 못한다는 점에서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나치가 독일 아리안 민족의 남성성을 강한 남성으로 형성하는 과정에서 동성애자 남성, 여장남자 혹은 트랜스젠더 여성을 박해한 것은 일종의 수순이었다. 비규범적인 존재, 퀴어가 병든 몸으로 형상되는 상황에서 퀴어는 독일 민족의 구성원일 수 없었다. 따라서 나치의 폭력은 비이성적인 행동이 아니라 국민국가 윤리에 따른 합리적인 행동이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의 보수적인 기독교 단체에서 동성애를 비난하고, 트랜스젠더를 혐오하는 발화를 하며, ‘우리’를/나를 인간의 범주에서 추방하려 한 시도는 결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나치가 독일 민족 범주를 구성하고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것처럼, 서구 근대 제국주의 국가가 호모섹슈얼리티/퀴어를 ‘원시인/나약한 몸’으로 취급하며 정신병원으로 추방한 것처럼, 규범과 비규범이라는 구분은 근대 이래 꾸준히 나타난 현상이다.  

 

3-3. 젠더를 관리하라, 외부 성기를 보호하라
   

   
 

자기의 생명과 몸을 정직한 방법으로 보존하며, 남의 방해를 막아내고 불법 침범을 피해, 건강하고 안락한 상태를 보존해 가지는 것 (……) 신체의 권리는 국법을 범하지 않았을 때 자유롭게 행동하며, 밖으로부터 오는 상해를 방비할 수 있을 따름 (……). (유길준, 신동원 2006, 110에서 재인용)


현대 사회에서 의사는 개인의 질병을 관리 통제하고, 한 개인이 정말 아픈지를 판단하는 문지기 역할을 한다. 의사는 자신을 찾은 고객의 말을 듣고 그 말의 진정성을 따져 묻는다는 점에서 형사/검사 역할을 하고, 그 말을 바탕으로 처방한다는 점에서 재판장 역할을 하며, 고객이 회복을 위해 환자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확인한다는 점에서 감시자 역할을 한다. 의사는 개인의 건강을 판단하는 최종 결정권자로서의 지위와 권위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실천한다. 이것은 근대 의학이 과학적 지식임을 입증하는 데 성공하며 얻은 성과이자, 근대 국가가 자신의 존립 근거를 의료 지식에 두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의학이 결정하는 것은 건강만이 아니다. 현대 의학은 사람들이 의사 역할이라고 여기는 범위 너머로 제 영역을 확장했다. 개인이 일상에서 실천하는 모든 행동을 의학이 관여한다. 당신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혹은 다른 어떤 범주인지를 판단하는 것 역시 의학의 역할이다. 실제로 근대 이후의 의학은 퀴어/호모섹슈얼리티를 병리화한 것처럼, 소위 정체성이라고 불리는 젠더 범주와 섹슈얼리티 범주를 의학의 진단 범주로 포섭했다. 당신이 여성이라면 그것은 의학에서 당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며, 남성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젠더는 타고난 것이지 의학과는 무관하다’고? 그렇다면 (당신이 트랜스젠더가 아니라는 가정하에서, 현재의 몸으로) ‘나는 주민등록번호상의 젠더가 아니라 다른 젠더다’라고 주장하며, 해당 관청에 가서 성별 변경을 요청하면 된다. 결과는? 아마도 정신병원에 구금되거나 트랜스젠더라는 진단서를 요청받게 될 것이다. 젠더는 의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며, 젠더를 증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의료 진단서 제출이다. 그리고 의학의 맥락에서 젠더의 핵심은 외부 성기다.

근대 의료 기술이 프렉이나 퀴어 등을 정신 병리화하며 표준적인 몸을 만들려고 애쓸 때 핵심은 외부 성기였다. 최소한 1800년대 중반부터 개인의 젠더를 결정할 때 의사가 확인한 신체 부위는 외부 성기였다. 물론 시대에 따라 난소가 있으면 여성, 없으면 남성으로 판단하거나, 출산할 수 있으면 여성, 출산할 수 없으면 남성으로 판단하던 시기도 있었다. 지금은 규범적 이성애 남성 성행위(즉 삽입 섹스)를 할 수 있는 음경이면 남성, 그렇지 않으면 여성으로 판단하고 있다. 20세기 중반 이후 의학에서 젠더를 판단하는 기준은 외부 성기, 더 정확하게는 음경이다. 정신과 의사가 트랜스젠더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방법 중 하나는 mtf라면 음경에 대한 감정을, ftm이라면 월경과 가슴에 대한 감정과 음경 선망을 묻는 것이다. 이 테스트에 통과하려면 기존의 ‘성적’ 기관에 대해 강한 혐오를 표현해야 하고, ftm은 음경을 강하게 바라야 한다. 표현 강도가 강할수록 진정성도 강하게 확인된다. 한국의 대법원 역시 공부상의 성별 정정을 허가하는 요건 중 하나로 외부 성기 재구성 수술을 규정하고 있다.
  

 

존 머니(John Money).
그는 데이비드 라이머를 진단한 의사일 뿐만 아니라, 인터섹스의 젠더 결정과 관련한 의료 지침을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그에게서 젠더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외부 성기 형태와 양육 환경이었다. 그는 이성애 남성으로서 성행위를 할 수 있는 외부 성기를 지니면 남성, 그렇지 않으면 여성으로 결정하는 지침을 만들었다.
이미지 출처: http://www2.hu-berlin.de/sexology/GESUND/ARCHIV/GIF/C_MONEY.GIF 2010.11.16. 접근
 


데이비드 라이머가 겪은 사건은 이런 맥락에서 발생했다. 라이머가 여성으로 살아야 했던 이유는 사실상 음경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의사 존 머니는 라이머를 여성으로 살도록 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라이머의 의중은 무시되었다. 아니, 라이머의 의중을 물어야 한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다. 라이머의 주장이 아니라 의사인 머니의 주장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이후 라이머가 다시 남성으로 재성전환 수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의중 때문만은 아니었다. 태어난 직후 남자로 지정받은 라이머였기에 가능했다. 라이머가 머니에 의해 젠더를 재지정받은 경험이 없었다면, 즉 태어났을 때부터 여자로 지정받았다면 그때도 라이머의 성전환 결정이 그렇게 빨리 받아들여졌을까?

라이머의 경우처럼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의 젠더를 인정하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의사다. ‘내’가 트랜스젠더라는 점을 증명하는 가장 간편한 방법은 정신과 의사가 나의 이름 옆에 “성 주체성 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 GID)”라는 정신질환 진단 편람의 항목을 기재한 진단서를 제시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아파서 결석/결근해야 할 때, 아프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진술이 아닌 병원 진단서를 제출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의료 식민화된 삶이며 우리의 몸은 의료화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읽을 수 없는 몸이다.(젠더-외부 성기-의료 기술의 관계와 관련해서는 루인의 근간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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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22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료 식민화가 된 줄 몰랐네요. 그저 전국민이 건강노이로제에 걸린 것만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