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하는 일은 겪은 이들과 겪지 않은 이들 사이에서, 기억의 연결고리가 깜빡이다 꺼지지 않도록 기능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공적인 애도에 대해 적으려면 이야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야기가 때론 이야기에 불과하고, 지나치게 매끈히 다듬어진 이야기는 오히려 해체가 필요할지도 모르며, 우리가 이야기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다는 위험성을 또렷이 기억하면서.
기억을 듣고, 이야기로 꿰어서, 이해로 마음을 집어넣는 일이 쉬워지면, 슬픔을 나눈 공동체를 상상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니까.
누군가의 애도가 우리의 애도가 되고 결국 우리를 바꿔놓을 수있도록.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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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 존 버거 John Peter Berger가 말했듯이, 타인의 고통을 보고 난 뒤 충격을 개인의  ‘도덕적 무능‘ 으로 연결해 그 감정에 지나치게 매몰될 필요도 없다. 때론 죄책감이라는 통증을 넘어서야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는 길이 열린다는 걸 말하고 싶다.나의 것이 아닌  고통을 보는 일에는 완벽함이 있을 수 없으므로. 우리가 서로의 부족함을, 미욱한 애씀의 흔적을 조금씩 용인하면서라도 움직이기를 바라기에.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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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통을 보는 이유는 다른 이의 아픔에 공감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연대를 통해 느슨한 공동체를 일시적으로나마 가동하여 비슷한 아픔을 막아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이 일이 왜일어났는지 살펴보고, 누가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 알아내고, 구조적인 문제점을 파헤쳐 참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감시하는 게 동료시민의 역할이다.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얼마나, 어느 정도의 섬세함으로 머물러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옮아가야 하는지까지가 이야기되어야 한다. 기자의, 미디어의, 카메라의 윤리가 결정되는 것도 이러한 지점에서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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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이 과연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안병무 선생님의 대답은 민중은 "자기초월체"
라는 말씀이다. 민중은 자기파멸의 곤경 속에서도 스스로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새로운 진로를 개척할 것이라고 했는데, 안병무의시대만 해도 낙관의 희망이 남아있었던 시대 같다. 지금은 민중이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없도록 망가졌고(물리적으로 귀가 사라졌다) 새로운 역사의 진로를 개척하는 것이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도록 자연이 망가지고 있다. 방사능물질이 온 천지를 휘감고 있으니하느님의 소리는 방사능에 의하여 왜곡될 뿐이다. 예레미아도 이런 환경 속에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이 민족의미래에 대한 절망감만 깊어지고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후손들의장래가 걱정스러울 뿐이다.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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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이라는 것은 자기를 개방하고 자기를 끝없이 낮추는 것이다. 변선환은 아상을 철저히 버렸다. 타 종교를 대할 때에 철저히 나를 버렸다. 그의 낮춤과 개방은 바닥이 없었다. 노자가 말하는 ‘무"나 불교가  말하는  "무아Anitman"를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종교다원주의적 삶의 실천 속에서 구현하였다. 그는 그 많은신학자들 속의 민중이었다. 천대받고 이단시되고 그러면서도 철저히 봉사하는 개방된 고도의 지성이었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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