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생 사용자 사전 - 100년도 못 사는데 1000년의 근심을 안고 사는 인간을 위한
줄리언 바지니.안토니아 마카로 지음, 신봉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평점 :
최근 한 청년의 죽음이 세상을 경악케 했다. 일명 '마포 오피스텔 감금사건'으로, 가해자는 죽은 청년의 오랜 친구들로 드러났다. 고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피해자를 노예 부리듯 착취하고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천인공노할 이 뉴스는 매체에는 호재가 된 모양이다. 헤드라인만 보면 피해자는 '엽기'적으로 '학대'당하며 '영양실조'로 '34kg'의 몸무게인 채 죽었다. 즉, '자극적인 팩트'만 강한 워딩으로 송고해 독자의 이목을 끈 것이다.
사실 이 사건의 핵심은 가해자들의 가스라이팅과 경찰의 허술한 대응이다. 피해자의 가족은 이미 여러 번 가출 신고를 했고, 피해자 명의로 휴대전화가 3회선이나 개통됐으며, 피해자가 가해자들을 상해 혐의로 고소한 바 있기 때문이다.
어느 매체라고 밝히진 않겠지만, 이 핵심을 제대로 짚어낸 곳도 있다. 부디 다른 매체도 이 사건의 '야마'를 잘 잡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죽은 청년과 유족의 억울함도 덜고, 독자들에게 기레기 소리를 듣지 않고 훌륭한 기사를 쓸 수 있지 않겠나.

최근 출간된 줄리언 바지니의 책 <인생 사용자 사전>을 정독하면 야마를 잘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영국의 한 매체는 바지니를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회의 수호자"라고 평했단다. 우리나라에는 <진실사회>, <가짜 논리> 등의 책이 알려졌다.
<인생 사용자 사전>은 사전답게 목차가 색인(index)으로 구성돼 있다. 처음부터 정독하지 않고 필요한 부분만 골라 읽을 수 있는 건 이 책의 장점이다. (할당된 기사를 우라까이하며 쳐내느라 바쁜 기자들에게 제격이지 않나?)
먼저 '악(Evil)' 색인이 눈에 띈다. 우리는 마포 오피스텔 감금사건에서 보듯, 사악한 일이 벌어졌다는 느낌에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다. 악은 별도의 범주가 아니라 ‘나쁘다’의 극단적인 형태라는 공감대가 있다고 바지니는 지적한다.
“일부 사이코패스와 사디스트는 보통 사람과 근본적으로 달라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들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이 없거나 남의 고통을 즐긴다. 그런 악은 오늘날 일종의 정신병으로 여겨지고, 그들은 감옥이 아니라 치료 시설에 가둬진다.”
이어 바지니는 정신질환이 없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사악한 행위는 이해하기가 더 어렵다며, 이들이 평범한 사람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심란한 결론을 내린다. 이를테면 누구든 잘못된 환경에서 악을 행할 능력이 있다는 오싹한 추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바지니의 주장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쓴 한나 아렌트의 견해와 일맥상통한다.
“아이히만의 문제는 그와 같은 사람이 너무 많았고, 그들은 변태나 사디스트가 아니었으며,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무서울 정도로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한나 아렌트
아렌트의 말대로라면 어떻게 아이히만처럼 ‘평범한’ 사람이 수많은 유대인을 죽음으로 내몰았을까? 충격적이게도 아이히만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건 순전히 ‘생각 없음’ 때문이었다. 그는 그냥 생각을 하지 않았고, 따라서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렌트의 말은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다. 어떻게 자신이 하는 일을 모른단 말인가? 바지니는 이렇게 분석한다.
“그가 좀비처럼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 그는 자신이 한 일을 전부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의 진짜 의미와 파장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마포 오피스텔 감금사건의 가해자들이 아렌트와 바지니가 분석한 대로 평범하고, 아무 생각 없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친구를 괴롭히고 죽인 죗값을 달게 받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조회 수에 혈안이 돼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내는 매체도 자성하길 바란다.
바지니는 악의 색인을 이렇게 끝맺는다.
“악의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악을 타인의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악을 행할 능력이 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 타인의 사악한 행위에 동참하거나, 타인의 악행이 나의 악행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쓰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인생 사용자 사전>은 줄리언 바지니가 실존주의 심리치료사이자 철학 상담사인 안토니아 마카로와 함께 썼다. 요즘 내가 강퍅해져 있는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상담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이 책은 저자들이 한국어판 서문에 밝힌 것처럼 ‘하나의 좋은 삶을 위한 뚜렷한 청사진이 아니라 일종의 도구 상자’라서 요즘 같은 비대면 시대에 읽기 좋은 철학적 원천의 모음집이다. 인생에서 길을 잃었을 때 각자에게 맞는 키워드를 먼저 읽고 ‘함께 보면 좋은 주제’나 ‘읽을 거리’로 파생해 나가면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