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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평점 :
다른 사람들이 하도 보통, 보통 하길래 궁금했었고, 최루성 연애소설은 딱 질색이지만 사랑 이야기를 읽은 지도 좀 되었으니 이쯤에서 한 번 읽어볼까 했었다. [우리는 사랑일까]는 내게 그렇게 슬쩍 왔다.
우리는 사랑일까? 이 질문-또는 독백-은 흥미롭다. 남자와 여자,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이별을 통고할 때 '우린 사랑한 게 아니야. 그러니까 너와 나 사이에 사랑이란 원래 없었어.' 라는 말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않고 이렇게 에둘러 말하는 이유가 상대의 기분을 배려해서라기 보다는 상대가 너무 앞서갔다는, 그래서 이 이별은 자기 탓이 아니라는 투로 들리지 않는가? 보통씨가 내게 들려준 [우리는 사랑일까]는 바로 그런 식의 이야기다.
처음 몇 페이지는 그저 그랬다. 꿈처럼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고 있는 여자, 앨리스를 보며 '이런, 내가 잘못 골랐나? 이거 완전히 최루탄 아닐까?'라고도 걱정했다. 그러다가 앤디 워홀의 깡통이 등장하면서 내 걱정은 기대로 급반전. '오호, 이런 식은 처음이야.'
앨리스는 아마 천상 여자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이 대목에서 페미니스트의 공격이 두렵긴 하지만, 내 표현력의 한계를 용서하시길. 나 또한 여자임을 감안하시고.) 나 또는 내 친구들의 연애사를 돌이켜보면 여자들 중에서도 사랑에 맞닥뜨리면 유난히 그런 특성을 드러내는 여자가 있었고, 그 여자는 앨리스의 남자친구인 에릭같은 '나쁜' 남자를 만나 꼭 그런 식의 마음고생을 겪었다. 하지만 그 때 우리는 그 여자의 심리를, 심경을, 상태를 뭐라 꼭 집어서 설명하기가 어려웠고, 그래서 각자 알아서 感으로 느끼고 이해했다. 그 때 [우리는 사랑일까]처럼 완벽에 가까운 증거-또는 근거-를 들이대며 분석하기란 불가능했다. 정체가 무엇인지도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우리는 사랑일까]의 사랑 이야기는 독특하고, 끌린다. 남녀가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얼마간 사랑을 지속하다가 이별로 끝나는 가장 정형화된 플롯-물론 이 과정의 전개만으로도 얼마든지 흥미롭고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가 가능하지만-을 따르고 있지만, 사랑 이야기라는 한 가지 정의만으로는 부족하다.
책의 중반을 넘어가면서 더 많은 면을 할애하고 있는 다양한 것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분석은 이 책이 연애소설이 아닌, <인간심리학 개론>이라든가 <연인의 대화에 대한 철학적 고찰>, 또는 <사랑의 도식화 정석> 등으로 이름붙일 만하다. 보통씨는 문학, 철학, 영화, 미술,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근거를 바탕으로 엘리스(주로 엘리스의 입장을, 입장에서 서술했다.)의 심리와, 심경과, 상태를 파악하고 분석했는데, 보통씨의 해박한 지식과 그 지식의 광범위함에 놀랄 수 밖에 없고, 그 분석을 도식화하여 보여줌으로서 더욱 분석적으로 보이는 능력을 보여준다. 게다가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보통씨의 분석이 매우 예리하고 정확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여자의 感을 어떻게 이리도 절묘하게 감잡았을까.
늘 그 밥에 그 나물같은 연애소설 뿐이라고 한탄하고 있다면, 사랑 이야기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다면, 아니면 한가한 사랑타령이나 읽고 있느냐고 타박하려 한다면, 보통씨의 [우리는 사랑일까]를 꼭 만나보시라. 분명히 승산있는 독서게임이 될 것이고, 게임에서 승리한 후 다른 사람들처럼 보통, 보통 할 것이다. 지금 나도 보통, 보통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