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다윈의 동행 - 그리스도교와 진화론의 공존을 모색한다
신재식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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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예수와 다윈의 동행>이라는 책제목과 부제인 '그리스도교와 진화론의 공존을 모색한다'에서도 암시되듯이 더이상 과학의 진화론이 성숙한 기독교와는 전혀 충돌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 오히려 종교 신앙에 대한 이해가 현대 자연과학을 통해 월씬 더 깊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고도 차분하게 풀어놓고 있는 그러한 책이다.

 

알다시피 기존 기독교에는 보수 근본주의자들의 창조과학 그룹이 있는데, 이들이 말하는 창조론은 성서문자주의에다 과학을 끼워맞춘 것이라 결코 과학적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결정적 방점을 찍는 본심은 보수 기독교라는 초자연주의적인 종교에 두고 있기에 과학의 탈을 쓴 종교라고 할 만하다. 창조과학 뿐만 아니리 지적설계론 그룹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과학의 진화론을 비판하지만 실은 이미 그 자신들의 이론부터가 너무나 허술하고 지극히 비과학적이라서 오늘날 자연과학에서 통용되는 진화론을 대체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본다.

 

이 책에서도 나와 있듯이 과학의 진화론 역시 진화하고 있으며, 진화론 역시 완벽한 이론이라고는 보질 않지만, 그래도 적어도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론 보다는 훨씬 더 비할바 없는 설득력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이 책을 쓴 저자의 입장도 그렇고 나 역시도 현재로서는 <진화론적 유신론>(혹은 유신론적 진화론)의 입장이다. 저자는 <진화론적 유신론>의 입장이 현재 세계신학계의 거의 대세라고 말할 정도다. "진화론은 곧 무신론이야" 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야말로 단순 유치한 이해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기회가 된다면 나 역시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자연과학의 진화론을 아주 디테일하게 적어도 한 번 이상은 공부해볼 것을 권하는 바다. 왜냐하면 정말로 신비롭고 오묘한 생명의 면면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종교 안에서의 약간 겉핥기 식의 과학 공부가 아니라 보다 구체적이고도 생생한 자료들에 기반하여 대자연의 진화 사건이 얼마나 경이로운 체험인지를 가능한 체감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과학의 진화론에서 느끼는 신비 체험은 참으로 경이로운데 이 느낌은 내 개인적으로 그동안 종교 안에서 느꼈던 그러한 신비 체험과는 질적으로 약간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과학자들이 (심지어 무신론적인 과학자라도) 이 우주와 자연에 대해 신비를 느낀다는 말하는 것에 대해선 공감을 하는 입장이다.

 

물론 과학지상주의자들의 경우는 종교를 비판하고 진화론을 외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들 과학지상주의자들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매한 창조과학 진영이나 지적설계론 같은 그룹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시 말해 <초자연주의>를 믿는 이들은 당연히 과학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데 이들이야말로 되려 과학 진영에 민폐를 끼침으로써 오히려 과학지상주의자들마저도 더욱 돋보이게끔 하는 부대 효과까지 낳고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내가 볼 땐, 이들이 지닌 보수 근본주의적인 종교 신앙이야말로 궁극적으로 보면 종교의 성숙성 자체를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물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아인슈타인의 언급대로 성숙한 종교는 결국 과학과 같이 동행한다고 본다. 다만 과학 그 자체에서 머물러서 "과학만이 전부야" 라는 태도 또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물론적 진화론 혹은 유물론적 환원주의자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이 책에선 그러한 경우를 <과학적 문자주의>라고 비판한다.

 

생각컨대, 성숙한 그리스도교인으로서 과학의 진화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에 대한 입장을 잘 정리해놓은 책을 찾는다면, 내가 볼 땐 거의 이 책 한 권으로도 충분할 것으로 본다. 더 나아가 반지성주의라는 비판을 듣는 한국의 교회가 개신교 교단의 차원에서 진화론을 공식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보다 한 단계 더 성숙한 길로 나아가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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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신 - 신의 부재는 입증되지 않는다
앤터니 플루 지음, 홍종락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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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평생 무신론자였다가 유신론자로 전향한 자의 입장이 담긴 책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앤터니 플루가 주장하는 유신론은 무신론을 넘어서지도 못했던 <이신론>이다. 

이신론이란, 신은 우주의 이법을 창조하고서 세상 돌아가는 일들은 이법에 맡겼다고 보는 근대 유신론이다. 갈릴레오, 뉴턴, 가깝게는 아인슈타인의 신 이해도 굳이 말한다면 이신론에 많이 가깝다.

궁극적으로 자연과학자들 중에는 이러한 자연의 이법의 기원과 출처에서만큼은 신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내가 왜 이책을 허접스런 반동의 책으로 보는고 하니 결국 이 책은 창조과학에서 옮겨온 지적설계론으로 안내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교한 자연법칙에 누군가는 창조주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우주과학이나 진화론에서도 언급하듯이 우리의 피조세계가 매우 정교한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빈틈도 많은 불합리한 점 역시 많다는 점이다. 이미 도킨스가 <눈 먼 시계공>에서 상세한 비판을 가한 바 있긴 하지만 개리 마커스 역시 <클루지>Kluge를 통해 우리의 진화가 실수투성이들로 점철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만일 신이 있다면 아마도 술 한 잔쯤 걸치고서 세상을 창조했을 거라는 얘기다.

그런데 앤터니 플루는 마치 근대의 낡은 유신론이기도 한 그러한 이신론을 마치 현대의 무신론을 극복한 새로운 유신론이라도 되는 양 설명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순진스럽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그러한 저서가 기존의 보수 기독교를 여전히 고착화시키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저서는 분명하게 반동적인 유신론 저서라고 할만하다.
이런 책들이 마치 최신의 이론인 양 홍보하는 것은 아마도 출판사가 노리는 마케팅 효과일 것이다.
보는 눈이 있다면 이에 넘어가질 않길 바라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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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선 2024-01-19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받아 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야 이해는 하겠지만 지성의 최고의 정점에서 자신의 대부분의 삶을 무신론을 주장하는데 힘썼던 사람입니다 플루가 설마 댓글에 달린 아마추어 같은 생각을 안해봤을까요
 
살아있는 예수 - 어떻게 우리는 2천 년 전 인물을 지금 만날 수 있는가
루크 티머시 존슨 지음, 손혜숙 옮김 / 청림출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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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청림출판사는 책을 개념 없이 내는 것 같다. 그동안 보수적인 한국교회 사정을 생각해 상업적으로 잘팔릴 것을 고려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이들 자신의 신앙이 보수적이라서 이런 책을 내는 것인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동안 그래도 그나마 학문적이었던 바트 어만의 책을 냈던 점에 비해선 정말이지 이같이 논리적으로도 덜떨어진 보수 진영의 책을 내리라곤 예상 못했기 때문이다(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지만 알고보면 두 책의 내용은 서로 충돌한다).

 

물론 보수 기독교 진영에서 볼 땐 루크 티머시 존슨 같은 이들의 책이 매우 각광받을만큼 인기 있을는지 모르나 내가 보는 평가의 잣대는 존슨 주장에 대한 논리적이고 설득적인 맥락에서 보는 평가인지라 인기와는 또다른 별개의 사항에 속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다(혹자는 신앙은 논리와 다르다는 점을 빌미로 오히려 논리 무시의 근거로 내세우기도 한다). 혹은 보수와 진보 기독교 진영 가리지 않고 인기 있는 책을 낸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 역시 소신 있는 출판보다는 상업적 고려의 맥락이 더 우선적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존슨의 경우는 내가 볼 때 이는 보수 기독교 세력들이 의도한 바에 놀아날 뿐이며 확고한 원칙이나 개념은 탈각되어 있어 보인다. 이미 이 분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잘 알테지만, 애초부터 루크 티머시 존슨이란 인물은 기존 진보 기독교 학계의 역사적 예수 탐구를 공격하기 위해 보수 기독교 진영에서 의도적으로 지원해주며 밀어주었던 인물이다. 따라서 이미 그의 포지션 자체부터가 보수 기독교 전통의 예수 신앙을 변호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때 대표적인 역사적 예수 연구가였던 존 도미닉 크로산에 대한 반대 논객으로 티비에 나와 대립각을 세우며 토론을 벌이기도 했었다. 당연히 존슨은 진보적 학자들의 예수세미나에 대해선 매우 비난하는 입장 서 있다. 그러나 그 논리는 너무나 단순 억지에 가깝다.

 

요컨대, 루크 티머시 존슨 주장의 핵심은 이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죽은 예수이며 살아 있는 예수를 만나야 한다는 것인데, 그 골자는 신앙 공동체 곧 교회 전통의 맥락으로 들어와야 만날 수 있는 그런 예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고보면 정작 그의 이론들에는 전혀 새로운 것이 없다. 단지 교회 전통의 예수를 만나는 일이야말로 곧 살아 있는 예수를 만나는 것이라고 줄창 항변할 뿐이다. 이러한 핵심 전제 하에서 그 자신의 논지를 진행해갈 뿐인 것이다.

 

이런 식의 논리는 성령체험을 받아야 성경을 비로소 잘 알 수 있다는 식의 주장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그 어떤 범주 안에 들어와야 너가 예수를 만날 수 있고 깨침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다. 마치 너가 그 어떤 경지에 들어와야 공중부양 체험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이비 교주들의 주장과도 그 주장의 패턴에 있어서만큼은 유사한 논리다. 일종의 양보할 수 없는 확고한 대전제가 밑에 깔려있는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그 부분만큼은 '무조건 믿어라'의 영역에 속한다.

 

게다가 예수에 대한 존슨의 입장은 기존 교회의 보수적인 예수 신앙처럼 그 역시 예수의 초자연적인 육체적 부활을 믿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그동안 역사적 예수 연구 때문에 한동안 골치 아팠던 보수 기독교인들에게는 루크 티머시 존슨의 주장들이 매우 반갑고 고맙게 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동안 자신이 믿어왔던 신앙의 전제들을 루크 티머시 존슨의 주장을 통해 재확인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가 말한 예수는 사실상 근본주의 기독교가 쳐놓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주요 5대 교리의 그물망을 결코 벗어나진 않고 있다.
구원도 교회 전통의 예수의 구원만이 참된 구원의 역사로 주장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고 보면 루크 티머시 존슨의 예수는 살아있는 예수가 아니라
그야말로 이미 교회 전통이라는 미명하에
교회가 죽여놓았던 예수, 교리적 예수, 바로 그 예수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알고보면 매우 골때리는 저서인 것이다. (오마이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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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예수 - 어떻게 우리는 2천 년 전 인물을 지금 만날 수 있는가
루크 티머시 존슨 지음, 손혜숙 옮김 / 청림출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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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는 진보학계의 역사적 예수 탐구를 공격하기위해 보수 기독교 진영의 지원을 듬뿍받고 나선 자다. 그의 요지는 결국 역사적예수도 교회전통에 들어와야 예수를 알수있다는 식이라 결론적으론 매우 식상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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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비평학은 과학인가 조작인가
에타 린네만 지음, 송 다니엘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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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성서의 억사 비평 이전에 기독교 신학 자체가 철학으로부터 연유한다.

기독교 신학 사상은 헬라 문화권의 플라톤 철학과 결코 무관하지 않고 밀착된 채로 전개되었다.

초기 교부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유명한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는

각각 플라톤(+신플라톤주의)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그 젖줄을 대고 있는 신학이다.

 

사실상 학문 자체가 철학에 빚을 지고 있지 않은 학문이란 없다.

철학 이전에는 고대인들의 신화와 문학이 있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좀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이러한 철학 자체도 실은 관찰에서 비롯된 의문에 따른다.

 

성서비평은 서로 모순된 진술과 의문들을 발견한 데서 출발하여

정합적 상상력과 합리적 추측을 찾는 것뿐이다. 그래서 학자들이 찾는 것은 <설명력 확보>인 것이다.

 

그런데 이는 성서비평만 그러할까? 기독교 신학 자체가 <신학적 상상력>에 따른 것임을

하버드 신학과 교수로 있던 Gordon D. Kaufmann은 그 자신의 신학방법론에서 예증시킨 바 있다.

 

요점은 에타 린네만은 학문을 구축하는 그 방법론 자체에 대한 무지가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독일 신학의 성격은 학교마다 달리 보수적 성향이 강한 신학대도 꽤 있다.

 

백번 양보해서 에타 린네만의 말대로 성서의 역사비평을 제외시켜보자.

그렇다면 오늘날의 보수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어떻게 읽고 있는가?

이른바 보수 기됵교인들의 머리 속을 지배하고 있는 5대 전제가 있다.


1. 성서의 축자영감설
2.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3.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4.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5. 그리스도의 재림

 

이는 이들이 읽는 성경의 전제이자 결론이다. 이것을 벗어나면 결코 안된다. 우리가 예배시간에 사용하는 <사도신경>이나 혹은 C.C.C 동아리 회원들이 그토록 들고 다니며 전파하는 『사영리』는 바로 위와 같은 기독교 전통 교리들에 대한 축약적 설명문들이다.

 

오늘날 기존 기독교인들의 대부분이 성경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를 알아보자. 우리는 니케아 신조였던 <사도신경>을 지금도 매주 주일마다 예배당에서 암송할 것이다. ‘신앙고백’이랍시며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라.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성경에 대해 해석하고 논의하는 언급들은 거의 대부분이 이 사도신경이나 혹은 '사영리'의 의미 범주들을 벗어나지 않는다. 앞서 말한 보수 근본주의 5대 강령들은 암묵적으로 이미 성경에 내포되어 있다고 보는 실정이다. 기독교 전통이란 사실 저러한 교리들을 오로지 지키고 수호하고자 하는 폐쇄적 전통일 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성경을 읽는다고 해도 실은 성경 그 자체를 투명하게 만났던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고 나서도 내가 미리 전제하고 있었던 저 전통 교리들에 대한 <재확인 작업>밖에 안된다는 충격적 결론이 나올 수 있다. 손오공이 설쳐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었듯이, 한국교인들이 열심히 성경 읽는다고 난리부르스 쳐봐야 결국은 전통 교리들 안에서 맴돌 뿐이다.

솔직히 한국교인들 가운데 이점을 제대로 인지하고서 성경을 읽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것은 이미 우리 가운데 <무의식적 전제>로서도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아무리 골백번 읽어도 의문을 가지지 못한다(혹시 노파심에서 얘기하지만 그렇다고 성경 읽지 말란 얘긴 결코 아님을 말해둠!). 그저 “아멘 주시옵소서”라는 식이 될 뿐이다.

 

성경이 교리(dogma)의 시녀에 불과하다는 얘기는 바로 이 점에서다. 대부분의 한국 교인들이 제아무리 성경을 지지고 볶고 한 대도 보수 근본주의가 쳐놓은 저러한 교리들의 그물망을 벗어나진 않는다. 그 교리의 범주를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저들은 안심인 것이다. 따라서 저들이 그토록 수호하고자 하는 그 전통의 실체란 놀랍게도 <성경>이 아니라 <교리>였던 것이다.

 

소위 복음주의 진영들 역시 적어도 저러한 전통 교리들에 어쨌든 기반한 채로 역사와 사회 정치 경제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겠다는 진영에 가깝다. 언젠가 자세히 말하겠지만, 진정한 우리의 전통은 교리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attitude)여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 어떤 전통도 '오류'와 '비극'에 선행할 순 없다.

 

* 좀더 자세한 이해에 대해선 www.freeview.org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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