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살까지 살 각오는 하셨습니까? - 아프지 않고, 외롭지 않은 노년을 위한 100세 인생 지침서
가스가 기스요 지음, 최예은 옮김 / 아고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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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살까지 살 각오는 하셨습니까?

 

이 책은 처음부터 이렇게 강렬한 문제 제기에서 시작된다.

현재 중장년기를 헤쳐가는 것만 해도 벅찬데 백 살까지 살 각오라니 과연 필요한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저 처음에는 막연하게 부모님 봉양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읽다 보니 나에게도 노후의 문제가 아주 먼 미래의 일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오'의 사전적 의미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나 당할 어려움 따위에 대하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는 것을 뜻하니 고령화 사회를 사는 우리 누구나 '노후 대비'에 대한 계획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90세까지의 생존 비율을 비교해보면 1990년에는 여성 26.3 퍼센트, 남성 11.6퍼센트였으나 2017년에는 여성 50.2퍼센트, 남성 25.8퍼센트로 상승했다. 이제 여성 두 명 중 한 명, 남성 네명 중 한 명은 아흔 살까지 사는 시대가 되었다(그림 1 참조).

그리고 가족이 노후를 책임져줬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가족의 형태도 다양해졌다. 의지할 가족이 없는 독거노인 세대, 노인 부부로만 구성된 세대가 증가했으며 자녀와 함께 사는 고령자 세대는 대부분 미혼 자녀와 동거하는 경우다. 결혼한 자녀의 가족과 생활하는 고령자는 이제 소수파가 되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80, 90, 100대의 초고령기를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26

 

일본의 통계여서 우리나라 현황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특별한 사고가 없는 한 우리는 꽤 오래 살 확률이 높은 것이다. 처음에는 진짜 이 부분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아아, 생각보다 꽤 오래 살 수 있는데 그간 아무런 대비가 없었구나.

 

서장에서는 100세 시대를 맞아 노년의 경험을 쓴 작가들의 책이 많이 팔리고 있는 현상에 주목했다. 그리고 책을 쓰고 사회생활을 하는 노인들의 경우 단순히 신체의 '건강'만으로 답할 수 없는 뭔가가 있기에 노년에도 왕성한 활동이 가능하다는 데 주목했다. 노년에 이르면 과거에 어떤 병을 앓았든 간에 자신만이 꼭 해야 할 뭔가를 가능하게 하는 '기력'이 있으면 활기차게 지낼 수 있다는 데 주목했다.

 

1-2장에서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기력' 있는 분들의 일상을 들여다보았다. 이분들은 대개 '습관 나이'에 따라 살아가고 있었다. 나이가 들었으니 이런 일은 이제 할 수 없겠지,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그건 해오던 일을 꾸준히 매일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건강 유지나 사회적 교류, 삶에 위안이 되는 즐거운 활동. 삶의 기력을 북돋워주는 이런 활동들을 일과에 포함시켜 습관 나이로 사는 사람은, 달력 나이를 뛰어넘어 습관 나이로 살게 된다. 그리고 나는 오늘 이 일과를 달성했으니 아직 늙지 않았다라는 형태로 자신의 나이를 느낀다. 93

      

특히 고령 남성의 경우 집안일을 하고 요리를 해서 드시는 분들이 더 기력을 유지하고 계셨다 

'습관 나이'라는 건 중장년에게도 유용한 것 같다. 한동안 이제 틀렸어, 를 달고 살며 운동을 가지 않았는데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매일 조금씩이라도 지속하는 게 기력을 돋울 수 있을 것 같다.

      

3장 이후를 읽으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중장년이 되어 접하게 되는 '봉양', '간병'과 관련한 주제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과거의 기억들이 겹쳐졌다 

과거 노인 세대는 본인들도 부모를 봉양했기에 막연하게나마 자녀들도 자신들처럼 부모를 돌볼 것이라 여기고 노후 대비에 소홀했다.

   

그런데 막상 부모가 운신이 힘들 지경이 되면 모두가 당황해 본인이나 자녀가 우왕좌왕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서로가 상처를 주고 받게 된다 

노후에 자신이 거동이 불편하거나 치매에 걸려 판단이 흐려질 것을 대비하는 쪽은 오랫동안 미혼으로 홀로 살았던 경험이 있는 여성들이었다.

   

책에 나온 고령의 어떤 할머니는 젊은 시절에 오래 일을 해서 연금이 충분히 나오게 대비하였고 노쇠해져서 처리할 일들이 생겼을 때 조카에게 일정 비용을 주고 부탁하는 것으로차분하게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4장 노후를 위해 무엇을 대비하고 있는가, 에서는 자명한 진실이 등장한다. 

 

하지만 극소수의 운 좋은 사람만 예외일 뿐, 누구나 늙고 쇠약해져서 다른 사람의 돌봄을 받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면 늙어서 다른 사람의 돌봄을 받는 것도 인간의 운명이라고 봐야 한다 

고령화 사회인 오늘날에는 '어떻게 나이 들어야 하는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그 답을 모르겠다'며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성공적인 노화를 삶의 목표로 삼은 W씨 부부 같은 노인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149

      

여기에서 W씨 부부 같은 이들이란 돌봄이 필요한 상황을 부정적으로 여기고 그저 좋아하는 활동만으로 노후 일과를 가득 채우는 사람들을 뜻한다. 너무 미래에 대해 비관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홀로 거동하기 힘들고 배변을 혼자 처리할 수 없을 때에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배우자나 자녀들과 공유해야 하는 것이다.

    

요양센터를 견학하는 부분에서는 많이 슬퍼졌다.

           

특별양호노인홈에 견학을 갔을 때예요. 거기 입소해 계시던 분이 내가 이 시설에서 나가는 날은 죽은 후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 말을 들으니 노인 요양시설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고 생각하고 들어가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래서 한동안 시설 찾는 일을 중단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절박한 상황이 되었죠. 건망증이 심해졌거든요. (중략)

 

예전엔 오른쪽 귀로 들어가서 왼쪽 귀로 빠져나가던 설명을 이제는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하며 들을 수 있었습니다. 194

      

이런 말을 한 X씨는 임종 준비도 차분히 해나가고 있었다. 남들이 우울한 주제라 회피하는 것을 어차피 나중에 자신이 다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라 생각하고 피하지 않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가며 처리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부록으로 인생 마무리의 구체적 예시가 목록으로 자세하게 제시된다.

 

부모님이 현재 편찮으시거나 혹은 자신의 노후에 대한 상을 그려가고 싶다면 자세히 정독해도 좋을 것이다.

     

'나가며'에서 저자는 이 책이 단순히 개인의 노후 대비에 그치는 것에 우려를 보이며 고령화와 가족형태의 변화에 대비해 사회적으로 어떤 준비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물음으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 문단에

 

"사람은 몇 살이 되어도 계속 변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밝혔다.

 

 

나 역시 노인들을 그간 평면적으로 바라보았는데 이 책을 통해 고령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생활하는지 엿볼 수 있어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

 

 

그래서 정말 각오는 되었냐고요?

 

 

막연한 두려움이 확실한 두려움으로 다가오게 되었지만

 

그래도 담대한 몇몇 분의 사례를 통해 약간의 용기를 얻었다고나 할까요?

 

 

성찰의 기회를 주신 데에 감사드립니다.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책을 받아보고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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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휴일이라 아이들과 있는 중에 <페인트>를 다 읽었다.

 

"부모를 선택한다면...."이라는 도발적인 물음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어디에선가 본 듯한 설정이면서도 뻔하지만은 않은 결말을 보여주어서 좋았다.

 

<페인트> 초반부를 읽는데 오래 전에 본 <기억 전달자>, 영화로 <더 기버>도 떠올랐다. <더 기버>는 끝까지 보진 못했지만, 그 흑백 화면이 주제를 잘 구현했다고 생각한다. 그 누구도 튀지 않고 색을 가질 수 없는 동질성의 사회라면 구성원들은 행복할까?

 

<기억 전달자>에서는 국가가 재생산을 강력하게 통제하여 혈연에 기반한 가족이 아닌 기능에 집중하여 합리적으로? 사회를 운용한다. 이렇게 자란 아이가 일정 나이에 이르면 능력과 성향에 맞는 직업을 부여받고 누구나 이것에 순응한다.

 

<기억 전달자>에서는 차별과 사회적 병폐, 전쟁과 갈등, 부정적 감정을 피하기 위해 강하게 사회를 통제하고 개인의 감정을 거세하는 것의 위험성을 보여주었다.

 

*

<페인트>에서는 혈연에 기반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과연 온전한 사랑과 이해로 맺어진 것인지에 대하며 묻고 있다.

 

'혈연'은 '운명'이라는 말로 필연인 듯 강조되지만 실은 '우연'에 기반한 제비 뽑기일 뿐이고 이 우연한 제비 뽑기로 평생 고통받는 사람도 있다. 부모에게 버림받거나 버려지는 것보다 더 최악인 이용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현실에는 부모나 자녀를 우연한 선물로 여기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더 많겠지만 사회면을 장식하는 사건들을 보면 제발 부모 자격 좀 심사해야겠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

국가는 NC 센터를 운영하여 여러 가지 연유로 친부모와 살 수 없게 된 아이들이 직접 부모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NC 센터 아이들의 부모로 뽑힌 사람은 아이를 양육하는 조건으로 여러 사회 보장 제도를 누릴 수 있는데 이 과정에 국가가 엄격하게 개입하여 꾸준히 감시한다.

 

주인공 제누 301, 출생달과 고유번호가 부여된 아이들, 최, 박이라는 성으로만 불리는 가디(양육자)들이 부모를 면접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다.

 

서로 각자의 속셈이 있어 '면접'은 쉽지 않다.

하지만 아키같이 부모를 선택하기 전부터 새로운 부모에게 최선을 다할 마음을 품고 있는 순한 성정의 아이도 있다.

 

"형, 나는 사랑도 만들어간다고 생각해." 36쪽

 

제누 301은 부모 면접에 대해 냉소를 품고 있고 자신만의 주관이 뚜렷한 아이이다. 성인기까지 부모를 선택하지 못하고 사회에 나가면 NC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평생 따라붙지만, 이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다.

 

NC 출신이라는 꼬리표...어디에서 많이 본듯하다.

현재의 보육원.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인근에 가톨릭 제단의 성 00의 집이라는 보육원이 있다. 이쪽 아이들을 어떤 엄마들은 형제원이라고 부른다. 분명히 이름이 있는데 멋대로 독재정권 시대나 볼 법한 이름인 형제원이라 부르는데 충격을 받았고 대놓고 다른 초등학교도 거리는 비슷한데 왜 우리 애들 학교에만 형제원 애들이 배정되는지 모르겠다며 한탄하는 엄마를 보고 2차 충격.

 

다시 소설로 돌아가 영유아기 양육의 고됨, 시간의 결이 쌓이지 않은 관계는 어떤 것일지 생각해보았다.

 

어떤 끈끈함?이나 상처 없이 서로의 필요에 의해 선택하는 관계라면 더 합리적이고 담백할 수 있을까? 제누 301과 하나 부부의 만남과 같이.

 

그리고 혈연에 기반한 부모는 아니지만 실질적 양육자인 가디 '박'과 제누 301은 단단한 유대감을 형성해간다. 서로의 상태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감정을 헤아리려고 노력하는 관계.

이것이 이상적인 가족 관계와 가깝지 않은가!

 

원칙과 규율을 칼같이 지키는 것보다 힘든 것은 원칙을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유를 허락하는 일이었다. 113

    

가디의 이 고민은 현재 내가 사춘기 아이를 대할 때 하고 있는 고민이기도 하다. 

 

독립이란 성인이 된 자녀가 부모를 떠나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의 말처럼, 어쩌면 부모 역시 자녀로부터 독립할 필요가 있는 건지도 몰랐다. 자녀가 오롯이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걸 부모에 대한 배신이 아닌 기쁨으로 여기는 것, 자녀로부터의 진정한 부모 독립 말이다.  160쪽

    

 

 

내가 선택한 색깔로 칠하는 미래, 라는 소설 말미의 이 구절이 좋다.

 

수저 계급론에도 신물이 나고

공동체의 '돌봄'은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할지에 대해 성찰하고 각종 제도가 보완되면 좋겠다.

 

양육과 노후보장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모두가 짓눌리지 않았으면.

 

*

 

<페인트>도  영화 <기생충>같이 읽다보면

혹은 읽고 나서

오만 생각이 들게 한다.

 

 

 

참, 중간에 도서실 열람실에서 휘리릭

배우 봉태규 님 에세이를 읽었는데

이런 분이 가디를 한다면 참 좋을듯하다.    

 

(하시시 박이 아이가 있어 스케줄이 자유롭지 않을 거라는 가정 하에 못 미더워하는 현실)

 

"... 이런 현실에 분개하는 나와 달리 원지는 의연했다. 세상의 모든 여자 엄마들이 그렇듯이 원지도 내색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을 겨우겨우, 그러나 꿋꿋하게 이겨냈다. 내 눈에 비친 하시시 박은 그랬다. 이런 일은 바다에 넘실대는 파도처럼 당연하게 다가오는 걸 아는 듯. 그 모습은 담대함을 넘어 황당해 보일 정도였다. 바람의 세기에 따라 파도의 높이에만 차이가 있을 뿐 어차피 똑같은 바다잖아, 라는 태도랄까?

 

누군가 이런 말을 했었다. 직장에서 엄마의 태도란, 직업 없는 여성처럼 아이를 기르면서 아이가 없는 사람처럼 일해야 한다고. 지금도 원지에게는 파도가 치고 있다. 어떤 크기의 파도가 그녀를 때리고 있을지 짐작만 갈 뿐 나는 알지 못한다. 태풍이 지나갔다 해도 아마 알지 못할 것이다. 엄마 여자인 원지에게는 그냥 바다일 뿐이니까."     130-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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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 며칠 <기생충>을 보고 <마더>와 <옥자>를 찾아보아서 봉준호 감독 작품을 어쩌다 다 보게 되었다.

 

그 여파로 잠을 계속 짧게 끊어서 자고 있다.

 

기억 나지 않는 꿈에 시달리고 자주 멍하니 있다.

 

*

 

<마더> 주요 내용 스포가 포함되어 있으니 안 보신 분들 조심해주세요.

 

2009년 말에 나는 둘째를 낳았고

이틀 차이로 외할머니를 잃었고

그 여파로 엄마는 오래 앓았다.

 

도무지 영화를 볼 여력이 없는 나날들이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고 나서도 <마더>를 봐야지, 봐야지 생각만 하다가 불편해질듯해서(아니 살아야 해서) 일부러 보지 않았다. 

 

주말에 이제서야 <마더>를 보고 나니

애들 한참 어릴 때 안 보길 잘한 것 같다.

 

아이들 미취학 당시의 나 역시 영화 속 도준 엄마만큼은 아니더라도 살짝 미친? 모성이었던듯하다. 내 아이밖에 안 보여서 아이를 갖기 전의 나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했으니.

 

광기까지는 아니어도 저열하기도 했고 위대하기도 한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

<전원일기>의 국민 어머니 김혜자를 보고 봉준호 감독은 어떻게 저런 시나리오를 구상했을지 놀랍기만 하다.

 

 

 

 

여기저기 찾아보다 발견한 자료들 보고 한참 웃었다.

 

전에는 김헤자 선생님 연기에 별 감흥이 없었는데

2015년에 무한도전 팀이 찾아가 연기 지도해달라고 했을 때 보인 반응이 너무나 재미 있고 매력적이어서 좋았다.

 

유명한 쓰레기 같은 고민했구나 짤이 나오게 된 회차

재미있어서 가끔 본다.

 

 

누구를 한심하게 볼 때 쓰는 짤인데

실은 아프리카 가보면 내 고민들이 다 쓰레기 같아 보인다는 뜻

 

 

다시 전원일기를 할 수도 없고

그때라서 그런 연기가 가능했다는 말씀도 좋았다.

 

 

*

 

봉준호 감독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어느 가족>으로 상을 탔지만 <걸어도 걸어도>가 자신에게는 베스트라고 했다.

 

나에게 어떤 작품이 봉감독의 베스트냐고 묻는다면 

<기생충>으로 이번에 큰 상을 탔지만 그래도 <마더>라고 답하겠다.

 

감정적으로 좋다, 싫다를 뛰어넘는 '모성'의 비열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작품이다.

 

볼 때 엄청 마음이 불편하고 힘들었지만

떠오르는 얼굴이 많지만 기어이 몰아내며 다 보았다.

 

수많은 엄마들의 모습이 도준 엄마 안에 다 있다.

다층적으로 해석되는 모성을 '위대함' '숭고함'에만 가둘 수 없다.

 

골프장이 들어서고 있는 쇠락한 시골 마을에서 희생당하는 소녀들, 사회적 약자들을 보며

원초적, 동물적 광기 어린 '모성'이 아닌 '인간성'을 구현할 있는 돌봄으로 나아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도 읽었다.

 

아들 대신 죄를 받은 청년을 마주하고

 

부모님은 계시니?

엄마 없어? 하고 오열하며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짓을 했는가를 다시 한번 자각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렸다.

 

자신의 크나큰 업으로 남게 되었을 뿐.

 

*

영화 시작 부분에서 엄마는 갈대밭에서 신들린 듯이 손등으로 하늘을 가리며 춤을 춘다.

후반부에 기억을 잊게 해준다는 혈자리에 침을 놓고 나서 다른 엄마들과 군무를 출 때 전율이 일었다.

 

대한민국 아니 세계의 모든 엄마들은 자기 새끼를 위해 저렇게나 슬픈 춤을 출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구나. 

 

*

 

아직 <눈이 부시게>를 보지 못해서

행운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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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 시 바라보며 수정

글을 다 쓰고 또다른 인터뷰를 찾아보다가 많이 실망하게 되었다.

 

특히 김혜자 선생님 동의 없이 찍은 장면들....

 

고양이 발언도 그렇고

 

앞으로의 행보를 눈여겨보는 수밖에.

 

며칠 전에 법륜 스님 관련해 페이퍼 쓰고 나서도 뒤늦게 오잉 하는 부분 발견

(뉴라이트 관련 부분)

 

 

 

동시대의 사람들을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기는 진짜 어려운 일이라는 걸

다시 절감한다.

 

어디에도 기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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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에 나온 곡.

 

가사를 찾아보니 더 마음이 미어진다.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생뚱맞은 가사라니.

 

 

 

 

  [ In Ginocchio Da Te ]

 

 

그대의 애무가 필요해요. 그렇소. 나는 목숨보다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거요. 나는 무릎 꿇고 그대의 곁으로 돌아가리다. 다른 여자 따위는 나에겐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제 비로소 그것을 알게 되었소. 나는 그대를 오해하고 있었어요. 무릎을 꿇고 그대 곁으로 가겠어요. 사랑하는 이여, 그리고 그대의 손에 키스하겠어요. 나를 위해 눈물 흘리는 그대의 눈동자 속에서 나는 그대의 관용을 찾고 있어요. 그리고 그대의 손에 키스하겠어요. 나를 위한 그대의 애무가

 

   

이탈리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실시하는 콩쿠르 「칸타지로」의 1964년 입상곡으로 작사는 <볼라레>, <아디오 아디오> 등의 작사자 프랑코 밀리아치, 작곡은 B. 잠브리니, 박력있는 노래를 들려 주는 청춘 스타 잔니 모란디가 불러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주연 영화 「당신에게 무릎 꿇고」 속에서도 물론 모란디가 불렀다.

잔니 모란디의 노래가 뛰어나다.

[네이버 지식백과] 당신 앞에 무릎 꿇고 [In Ginocchio Da Te] (이야기 팝송 여행 & 이야기 샹송칸초네 여행, 1995. 5. 1., 삼호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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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은 김기택 시인을 아시는지

 

<기생충> 가장의 이름은 기택이다.

 

 

기생충 이미지를 내려고

기택

기우

기정

 

엄마는 충숙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 시가 생각이 나서

옮겨본다.

 

가사도우미 이름은 국문광

건축가는 남궁현자

 

이름들이 다 재미있다.

 

영화에 나오는 대사

선택하는 단어 하나하나가

의미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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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는 진화 중 - 김기택(金基澤)

믿을 수 없다. 저것들도 먼지와 수분으로 된 사람 같은 생물이란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시멘트과 살충제 속에서만 살면서도 저렇게 비대해질 수 있단 말인가. 살덩이를 녹이는 살충제를 어떻게 가는 혈관으로 흘러보내며 딱딱하고 거친 시멘트를 똥으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입을 벌릴 수밖에 없다. 쇳덩이의 근육에서나 보이는 저 고감도의 민첩성과 기동력 앞에서는.

사람들이 최초로 시멘트를 만들어 집을 짓고 살기 전, 많은 벌레들을 씨까지 일시에 죽이는 독약을 만들어 뿌리기 전, 저것들은 어디에 살고 있었을까. 흙과 나무, 내와 강, 그 어디에 숨어서 흙이 시멘트가 되고 다시 집이 되기를, 물이 살충제가 되고 다시 먹이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빙하기, 그 세월의 두꺼운 얼음 속 어디 수만 년 썩지 않을 금속의 씨를 감추어 가지고 있었을까.

로봇처럼, 정말로 철판을 온몸에 두른 벌레들이 나올지 몰라, 금속과 금속 사이를 뚫고 들어가 살면서 철판을 왕성하게 소화시키고 수억 톤의 중금속 폐기물을 배설하면서 불쑥불쑥 자라는 잘 진화된 신형 바퀴벌레가 나올지 몰라. 보이지 않는 빙하기, 그 두껍고 차가운 강철의 살결 속에 씨를 감추어 둔 채 째가 이르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아직은 암회색 스모그가 그래도 맑고 희고, 폐수가 너무 깨끗한 까닭에 숨을 쉴 수가 없어 움직이지 못하고 눈만 뜬 채 잠들어 있는지 몰라.

<태아의 잠,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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