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기록
마르티나 도이힐러 지음, 김우영 옮김 / 서울셀렉션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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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이 디지털화되면서 지금은 누구나 사진을 찍는다.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찍어 얼굴도 모르는 이들과 공유하는 세상이다 보니 기록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고 믿을만한 것인지 사실 의문이다. 되려 왜곡되고 변형되고 편집된 사진들은 오해를 일으키고 거짓을 믿게 한다. 한마디로 사진의 순수함이 사라져 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추억의 기록>은 순수함의 기록이라고 보여진다. 스위스에서 태어난 저자는 하버드대에서 한국과 관련된 논문을 쓰라는 지도교수의 권고로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던 중 자신이 찾고 있던 자료가 한 한국인에 의해 대출된 상태라는 걸 알고 그 인연으로 한국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시대는 1960년대. 독재정권의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결국 남편은 별세하고 저자 홀로 연구와 시댁 방문을 위해 1967년에 처음 그리고 70년대에 또 한번 이렇게 한국을 찾게 되는데, <추억의 기록>은 그 때 담았던 3천여장의 사진들을 정리하여 회고 형식으로 발표한 사진을 통해 그녀가 바라본 50년 전의 한국이다.

 

   그녀의 시댁은 경북 어딘가의 양반 가문이었던 듯 하다(아마도 안동의 양반 가문들 중 하나였지 싶다). 그래서 당시 양반가문에서 행하던 각종 의식들 그러니까 제례나 유교적 의식들을 관찰하고 기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며 일반적인 시골의 풍경이나 마을 풍습들과 동제 그리고 만신의 굿에 이르기까지, 지금으로서는 기록조차도 찾아보기 어려운 우리네 예전 의례나 풍습 등을 꾸며내지 않은 본 모습 그대로 담아내었다. 그 중에는 그녀의 기록만이 유일한 사료인 의식들도 있다고 하니 한 사람의 외국인이 그저 호기심으로 찍은 사진들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귀중한 기록들인 것이다. 남편과는 아주 짧은 결혼생활이었지만 남편의 고국과 이렇게 긴 인연을 이어가면서 50여년이 지난 이후에도 그 기억을 소환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것일까. 사진도 사진이지만 그녀가 쓴 영어 원문의 글이 번역문과 함께 담겨 있으니 (번역도 훌륭하지만) 번역이 다 하지 못한 그녀의 이야기를 원문으로 느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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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게네스 변주곡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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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오게네스 변주곡>은 찬호께이가 등단 10주년을 기념하여 지난 10년간 여러 곳에서 기고하거나 발표한 단편소설들과 미발표작을 묶어서 준비한 작품집이다. 예전에 발표했던 작품들을 묶어서 낸다고 하면 그저 단순히 모아서 낸다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찬호께에게는 '그저 단순히'라는 말은 틀린 말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유사한 주제'를 지닌 변주곡들로 생각하고 그 변주곡들을 모아서 하나의 모음곡을 만드는 마음으로 내놓았다고 설명한다. 그에 더해 각 작품마다 어울리는 클래식 음악을 선정하여 부제로 덧붙이기까지 했다(이건 평소 작가의 습관이라고 한다). 실제 작품을 읽으면서 부제로 더해진 클래식 음악을 함께 들으니 작품 속 분위기가 더 잘 전달되는 듯 했다. 왜 이 작품에 이 선곡일까는 책 말미의 작가 후기에 잘 설명되어 있으니 책을 읽은 후 다시 한번 작가의 선곡 이유를 떠올리며 음악을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정이 없는 작가는 없겠지만 이번 작품집을 보니 찬호께이는 자신의 작품들 하나하나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심지어 습작이라는 이라는 제목의 몇페이지 안되는 약간은 뜬금없는 작품들도 몇개가 들어있는데 이 역시 자신의 민낯을 독자들에게 솔직하고 자신있게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철학자 '디오게네스'에 비유한 그 자신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고나 할까.

 

   와...첫번째 작품 <파랑을 엿보는 파랑>부터 엄청난 것이 휘몰아쳤다. 이 첫번째 작품의 충격이 너무 커서 시간간격을 두고 두번째 작품으로 넘어갈 정도였다. 이런 작품을 쓰는 작가라면 무조건 믿고 보지 않을 재간이 없다. 작품들은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장편못지 않은 엄청난 반전과 서스펜스를 선사하는 <파랑을 엿보는 파랑>이나 <추리소설가의 등단 살인> 같은 작품들도 있고 코끝이 찡하게 만드는 <시간이 곧 금>이나 <산타클로스 살인 사건> 같은 작품도 있다. 코믹한 SF를 연상시키는 <악마당 괴인 살해사건>이나 어쩐지 옛날 기담집을 연상시키는 <영혼을 보는 눈>도 재미있다. 그리고 마지막 대미를 장식한 <숨어 있는 X>는 추리소설가가 어떻게 사건을 구성하고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는지를 '추리소설의 감상, 창작 그리고 분석'이라는 교양과목을 듣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게임형식으로 실제 독자들을 끌여들여 끝까지 허탈(?)함을 맛보게 해준다. 그의 전작들로 이미 나는 그의 팬이 되어버렸지만 이번 단편집이 다시 한번 역시 찬호께이!를 외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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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엔 카프카를 - 일상이 여행이 되는 패스포트툰
의외의사실 지음 / 민음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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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에 여행이 되는 패스포트툰'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그림 에세이는 저자가 읽으면서 책 속의 시간과 공간이 현실 세계로 들어오고 책 속의 인물들과 말을 하는 듯한 여행과 같은 체험을 한 열세권의 책에 대한 이야기이다. 프롤로그에서도 언급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속독이나 (나는 속독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없지만) 앉은 자리에서 후딱 읽어버리는 그런 독서를 해서는 안된다. 책 한권을 들고 다니며 나의 생활 속에서 느리게 느리게 책 속의 시간과 보조를 맞추며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이 열세권의 책만큼은.

 

   열세권 중에서 내가 진짜로 읽은 책은 <오셀로 - 윌리엄 셰익스피어> <위대한 개츠비 - 스콧 피츠제럴드> <노르웨이의 숲 - 무라카미 하루키> <오이디푸스 왕 - 소포클레스> 이렇게 네권이다. 그리고 <순수의 시대 - 이디스 워튼>과 <나를 보내지 마 - 가즈오 이시구로>는 영화로만. <체호프 단편선 - 안톤 체호프> <등대로 - 버지니아 울프> <죄와 벌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페스트 - 알베르 카뮈> <변신, 시골의사 - 프란츠 카프카> 이렇게 다섯권은 제목만 엄청 잘 아는 책들이고 <픽션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작가는 알지만 작품은 처음 들어보고 <보이지 않는 도시들 - 이탈로 칼비노>는 작가도 작품도 처음 들어본다.

 

   이 책은 단순히 작가가 읽은 책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작가가 책을 마주하기 전부터 받았던 책에 대한 인상을 나누고 책 속 등장인물들을 현실 속으로 끌어들여 오늘날 우리가 왜 이 책들을 읽어야 하는지를 독자가 공감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깊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독자를 자신의 여행에 각자의 방식으로 동참해보도록 하는 동기부여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정보과잉 시대에 들리는 그런 편견이나 막연한 추측으로 거르지 말고 직접 읽어보라고 이야기한다. 샀으나 책장에 꽂아놓고 읽지 않아 먼지만 쌓인 책들의 목록을 떠올려 보라. 다음과 같은 작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면 바로 지금 그 책을 꺼내야 할 때이다.

 

실제 책을 읽기 전부터 이미 이름이 익숙한 작가들이 있다. 언제부턴지도 모르게 너무 많이 들어서 읽지 않았는데도 이미 읽은듯한. 책을 펼치기도 전에 벌써 조금 지겨운 기분이 드는. p20-21

 

영화가 있고 잘라져 나온 구절들이 있고 음악이 있다. 그리고 인용되고 변형되고 그림자를 드리운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러니 이제와 새삼 책을 읽는 것은 어색한 일이다. 이미 다른 형태로 지겹도록 듣고 보아 온 책을 마주 대하는 이 어색함. p76

 

   저자가 열세권의 책들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만화로 보는 재미도 솔솔하다. 어딘지 촌스런듯한 스타일의 주인공이 책 속을 이리저리 헤매면서 자기만의 여행에 빠져있는 모습이 흐뭇하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내리려던 지하철역을 지나친 것을 깨닫는 그런 경험에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자신만 알 수 있는 그런 미소를 흘릴 것이다. 각 장마다 저자가 '이 장면'이라는 제목으로 뽑아낸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들을 같은 책을 읽으면서 나의 '이 장면'과 비교해봐도 재미있을 듯. 책읽기에 정답이 있을리는 없지만 어쩐지 모범답안 사례 같은 그런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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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유성의 인연 1~2 - 전2권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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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그렇듯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에서 중요한 건 사건이나 범인이 아니다. 처음에 사건이 일어났을 때 독자들은 보통 이런..범인이 누구지? 라며 작가가 흘리는 떡밥을 주우며 범인 잡기에 나선다. 이번 작품에서는 사건이 이야기를 읽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일어난다. 고이치, 다이스케, 시즈나, 이렇게 세 남매는 그 날 나타난다는 별똥별을 보기 위해 한밤중에 부모님 몰래 밖으로 나간다. 하지만 날이 흐리고 비가 오는 바람에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잠든 막내여동생 시즈나를 업고 집에 돌아오는데 고이치가 부모님이 누군가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다이스케는 자전거를 두러 갔다가 마침 뒷문으로 황급히 빠져나오던 누군가의 옆모습을 목격한다. 세 남매의 부모님은 요코스카에서 <아리아케>라는 양식당을 운영하고 있었고 대표 메뉴는 하이라이스이다.

 

   독자들이 범인을 추리하는 건 딱 여기까지이다. 작가는 범인을 한쪽으로 치워놓고 세 남매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보육원에 보내진 아이들은 일년 뒤 다시 한번 별똥별을 보러 한밤중에 보육원을 나오고 이번에는 아름다운 유성이 밤하늘에 궤적을 남기며 달려가는 모습을 함께 보게 된다.

 

우리...저 별똥별 같다..정처없이 날아갈 수 밖에 없고 어디서 다 타버릴지 몰라. 하지만...우리 세 사람은 이어져 있어. 언제라도 한 인연의 끈으로 이어져 있어. 그러니까 무서울 거 하나도 없어 (p87-88)

 

   독자들이 다시 살인사건으로 시선을 돌리게 되는 건 그로부터 한참 뒤 한 유명한 양식당의 쉐프가 만든 하이라이스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하이라이스와 똑같은 맛이라는 걸 알고나서부터이다. 이미 공소시효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세 남매는 '범인을 알아내서 우리 셋이서 꼭 죽이자'고 했던 어렸을 때의 결심을 떠올리며 범인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움직인다. 이번 작품에서도 진정한 악인이 없다. 물론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할 수는 없으나 작가는 항상 한걸음 더 나아가 그 뒷면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려 노력한다. 자극적인 내용에 익숙해져 있는 이들은 아마도 작가가 만들어 놓은 결말을 좋아하지 않을 지 모르겠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논리는 요즘 세상에선 더 이상 통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도 난, 유성을 바라보며 항상 이어져 있는 인연으로 살자하던 세 아이들의 끈끈함이 받아들여지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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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물리학자 - 명화에서 찾은 물리학의 발견 미술관에 간 지식인
서민아 지음 / 어바웃어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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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관에 간 OOO' 시리즈는 나올때마다 챙겨보고 싶은 책이다. 지금까지 화학자, 수학자, 의학자, 인문학자 시리즈가 나왔는데 수학자와 화학자만 읽었다. 전공과 교양의 경계 사이에서 그림을 좋아하는 독자들을 뿌듯하게 하는 그런 책이다. 이번에는 물리학이다. 과학 중에서 내가 가장 어렵게 생각하는 분야인데, 생각해보면 물리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빛, 입자, 파동, 원자, 양자역학 등의 개념이 미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당연해보인다. 비록 화가들이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미시세계에 대한 지식은 없었다 하더라도 빛과 색을 이해하고 자연현상을 탐구하는 능력은 과학자 못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기대했던 내용은 책의 마지막 부분 '물리학으로 되돌린 그림의 시간'에 담겨있다. 수없이 덧칠해진 그림 아래에는 어떤 그림이 숨어있을까? 현대의 과학은 훼손된 그림을 복원하는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위조된 그림과 진품은 어떻게 구별할까? 수세기 전에 사용된 물감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등등 그림의 일차적 감상이나 작가의 의도가 담긴 이차적 상징을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 그림의 본질에 숨겨진 어떤 비밀을 밝혀내는 듯한 흥미진진함이 돋보이는 파트이다. 책의 앞부분은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는 당시의 기후상황, 그림이 그려진 시대에는 알 수 없었지만 후대의 과학기술이 밝혀낸 빛과 색의 비밀, 그림을 더욱 생동감 있고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원근법과 소실점의 등장, 인상주의 화가들의 자연에 대한 인상의 원리 등 그림을 통해 보는 물리의 법칙?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 하다.

 

   책을 읽으면서 신기했던 부분은 과학분야에서 새로운 이론이 발견되고 검증될 수록 예술 분야도 그에 맞추어 변화한다는 사실이었다. 종교적 내용이 담긴 그림들을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그림이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었다. 인물을 그리고 사물을 그리고 풍경을 재현한다. 그러다가 빛에 의해 자연의 인상이 달라보인다는 것을 인식하고 자연에서 순간에 받은 인상을 그리기도 하고 색의 병치혼합을 그림으로 나타내기도 했다. 더 나아가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표현하는 그림이 등장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리기까지 한다. 책에서 인용한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p310)처럼 기존의 규범과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과학과 미술은 그렇게 나란히 발전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전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역이 존재한다. 무지에 대한 자각을 양분삼아 현대 물리학과 현대 미술이 앞으로 어떤 마법을 보여줄 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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