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없는 에세이 -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 함께읽는책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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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다른 분야에 비해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분야가 있다면 바로 철학이다. 어렵기도 하거니와 어떤 경우는 그저 말장난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생각되기도 해서인데, 대중적으로 풀어놓은 철학서를 읽은 경우는 몇번 있지만 철학자들이 쓴 저서를 정독한 경우는 기억에 없다. 버트런드 러셀 또한 영국의 철학자이자 논리학자이다. 특히 집안이 엄청 빵빵한 엄친아이면서도 반전운동이나 평화운동 등 힘든 길을 갔던 인물인데 그런 배경보다는 러셀의 글에 대한 칭찬이 자자해서 그의 저서를 한번 쯤 읽어보자 했던 것. 철학자라는 타이틀에서 잠깐 멈칫했지만 '에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책이니 괜찮지 않을까 해서 선택한 책이다. (책이 출간된지 좀 되어서 품절이라 중고도서로 구입했다.

   

   결론은 읽기 잘했다는 것. 제법 재미있는 책인데다 기존에 존경을 한몸에 받는 철학자들을 까는 글솜씨가 어찌나 시원시원한지 몇번을 깔깔대며 웃느라 철학자가 쓴 책이라는 걸 잊어버릴 정도였다. 물론 기존의 지식을 이렇게 까는 사람은 자신도 까이기 마련.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시도하는 디스는 신뢰가 간다. 특히 개개인의 행복 따위는 안중에 없고 덕이란 전체에 존재하는 것이라며 국가공동체에 개인의 헌신을 강요한 플라톤의 '국가론'이나 알고보면 전체적 권위만이 참된 것임을 설파한 헤겔의 '형이상학' 같은 교조주의를 비판하는 글들은 상당한 동감을 끌어내는 글들이다. 특히 이 책의 부제로도 사용된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장에서는 종교와 국가라는 이름으로 광기를 향해 돌진했던 '지적 쓰레기'들에 대한 적나라한 까발림이 아주 제대로다.

   

   하지만 그 역시 인정했듯이 인간이 세운 가설과 이론은 언젠가 증거를 동반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면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가 이 책을 집필했던 시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과 소련이 냉전 시대에 접어들었을 무렵이라 소련이 세상을 지배할 경우에 대한 극심한 공포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러다보니 소련을 상대할 막강한 정부로는 미국정부 밖에 없다는 생각이나 개별 국가가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세계 정부를 수립해야한다는 등, 지금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논거들도 있다는 점을 알려둔다. 한국인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도 하나 있었는데 바로 관동 대지진 때 재해로 인해 성난 민심을 다른데로 돌리려는 일본 정부의 조직적이고 의도적인 거짓 모략이었던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라는 계략을 일본인들의 '미신' 정도로 치부한 부분이다.

   

   어쨌거나 버트런드 러셀이라는 대단한 논객에 입문하는 즐거움을 알게 해 준 저서이다. 그의 또 다른 저서 <런던통신 1931-1935>라는 책도 구입했는데 그의 칼럼을 모은 책이라고 하니 당시에 칼럼의 주제로 삼을만했던 다양한 소재들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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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가 뭐예요? - 지구 생명체 탄생의 기원과 비밀 초등 자연과학을 탐하다
앤 루니 지음, 냇 휴스 그림, 정미진 옮김 / 빅북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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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딱 봐도 그림책 같고 '진화가 뭐예요'라는 어딘지 천진난만해 보이는 질문이 제목으로 떡하니 있으니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진화에 대해 설명해줄만한 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확신하건데 학교 다닐 때 생물 시간에 잠깐 졸았다거나 아직도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고 알고 있는 어른이라면 이것보다 더 쉬운 책이 필요할만큼 수준 높은 지식과 꽤나 어려운 용어들을 포함하는 책이다. 한가지 팁을 먼저 드리자면 책의 마지막에 (페이지로는 118페이지부터) '진화 연대표'라는 부분이 있는데, 연대별로 존재했던 중요한 생물이나 진화에 있어 중요한 시기들, 그러니까 캄브리아기 같은 대폭발이나 대멸종 같은 시기들을 구별하여 요약 정리해 놓은 자료이니 이 부분을 먼저 본 후 본문을 읽는 것이 좋겠다.


   과학은 가설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가설은 실험이나 발견된 증거들로 신빙성을 얻는다. 약 40억년 전에 지구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그저 화석이라는 녀석이 아량을 베풀어 지구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는 시기에 대해서만 알게 될 뿐, 그렇지 않은 시대에 대한 지식은 여전히 가설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40억년 전에 지구상에 존재했던 것들이 무엇이건 간에 생명이란 끊임없이 적응하고 변화한다는 것은 믿을만한 사실이다. 우리는 이미 네안데르탈인과 사피엔스가 공존했던 시기가 있었고 그들끼리 교배도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너무나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이 멸종하면 지구도 멸종하리라 생각하지만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 코로나19로 인한 환경의 변화를 생각해 보면 그러한 생각은 지구가 들으면 코웃음 칠 일이다.


   내용 중 흥미로운 부분이 몇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유전자 조작 능력을 갖게 된 인간이 생물의 진화 역사에 인위적인 개입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냐는 윤리적 질문이고 (아니면 그 또한 진화의 다른 형태라고 볼 수도 있겠다) 또 하나는 만약 인류가 지구만큼 살만한 우주의 한 행성을 발견해 일부가 그리 이주하게 된다면 새로 이주한 인류는 아마도 세대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행성의 환경에 맞게 새로운 종으로 진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호포 사피엔스와 다른 종류의 인간이 공존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다. 그걸 못본다는 게 좀 아쉽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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렝켄의 비밀 올 에이지 클래식
미하엘 엔데 지음, 유혜자 옮김, 베른하르트 오버디에크 그림 / 보물창고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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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엘 엔데의 대표작은 '모모'이다.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안읽어본 사람 있을까? 그 정도로 유명하다는 뜻이다. 나는 출간된 지 2년 정도 지난 후에 읽었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말로 회자되었었는데,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말 자체가 좀 이상하다. 동화가 어른용 어린이용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암튼 <모모>를 읽은 후, 마음 속에 모모 한명을 키우면서 살았다고 해도 좋을만큼 인상적이었다. 이후 미하엘 엔데의 다른 작품을 읽겠다는 건 책을 구입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지금까지 잘 모셔놓았다.


   출간된지 15년이 지난 <렝켄의 비밀>은 11편의 동화가 실려있는 단편집으로 표제작 '렝켄의 비밀'은 '마법의 설탕 두조각'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는데, 엄마 아빠가 자신의 말을 잘 안들어주고 하고 싶지 않은 일만 시키는 것이 불만이었던 한 꼬마가 요정을 찾아가 엄마 아빠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키가 절반씩 작아지는 마법의 설탕 두조각을 받아 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내용이 어떻게 진행될 지 짐작할 수 있다. 이솝우화만큼 노골적인 교훈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책에 실린 많은 단편들은 우화의 성격을 지닌다. 하지만 '혀 꼬이는 이야기'나 '리룸 라룸 빌리 바룸'처럼 말장난이나 아이들이 많이 하는 말꼬리 잡기를 소재로 순전히 읽는 재미를 위한 작품도 있으니 우화가 썩 내키지 않은 독자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혀 꼬이는 이야기'는 마법의 주문보다 더 어려운 발음 덕에 아이들이 정말 좋아할만한 이야기가 될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모모> 보다는 덜 매력적이었지만 마법이나 판타지 같은 애정하는 소재들로 이루어진 작품들이라 이미 퇴색해가는 상상력을 조금이나마 반짝이게 해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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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하나만 선택하라면, 책 - 책덕후가 책을 사랑하는 법 INFJ 데비 텅 카툰 에세이
데비 텅 지음, 최세희 옮김 / 윌북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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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취향 저격 감성 카툰 에세이를 만났다. 모르겠다, 내가 진정 책 덕후인지는 모르겠으나 책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니 덕후에 가깝다고 해두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앗! 이건 내 이야기 아닌가! 라고 킥킥대며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카툰이다. 책 읽는 기쁨은 언제 알게 된걸까 생각해본다. 어렸을 때는 책을 정말 좋아했다. 세계 명작 전집을 읽고 또 읽고 했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때에도 책을 많이 읽었던 생각이 나고 고등학교 와서부터는 책 읽는 기쁨에서 서서히 멀어졌던 것 같다. 그러다 30대가 되어서야 다시 책 읽는 기쁨을 되찾았다. 책 읽는 즐거움이 없었다면 지금 무슨 재미로 하루하루를 보낼까라는 궁금증이 생긴다.

 

책덕후인 저자의 모든 생활이 어떻게 책을 중심으로 돌아가는지 심플하지만 정곡을 제대로 짚어주는 카툰이 아주 제대로다. 고개를 크게 끄덕끄덕하면서 대박 공감!을 외치기도 하고 아..난 이 정도는 아니네 라면서 아직 책덕후의 수준이 되려면 멀었군 하며 나름의 위로를 해보기도 한다. 왜 책이 좋을까? 저자의 말처럼 책은 '순수한 기쁨'과 재미를 주고 '엄청난 여운'을 남긴다. 내가 가보지 못한 세상을 보여주고 살아보지 못한 삶을 상상하게 해준다.



책 읽는 즐거움을 논하는 것 이외에도 책덕후라면 공감할만한 컷들이 많아 몇 페이지 소개해보자면, 우선 '책덕후가 공포를 느낄 때'는 언제일까라는 부분이다. 나 역시 책을 빌려주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편인데 (차라리 한권 사주는 게 맘 편하다), 유일하게 여동생에게만 빌려준다.



책 덕후는 책을 구입할 때도 비이성적이고 막무가내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 나오면 무턱대고 구입하기도 하고 같은 책을 판본이 다르거나 리커버 한정판이라는 이유로 여러권 구입하는 마케팅의 희생양이 되기 일쑤다.




나는 지금 읽지 않을 책을 구입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미래에 내가 더 이상 책을 살 수 없는 처지가 될 때를 대비하여 살 수 있을 때 사놓아야 한다고. 노후를 대비한 일종의 책연금이라고나 할까. 세상의 책덕후들을 '혼자가 아니다'라고 위로하는 감성 카툰 에세이가 주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어디에도 책만한 세상은 없'고 날이 좋아,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책읽기 좋은 날'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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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미드나이트
릴리 브룩스돌턴 지음, 이수영 옮김 / 시공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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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이유에서인지 인류가 순식간에 멸종된 듯 하다. 북극의 천문 기지에 있던 칠십대의 어거스틴 박사는 대피를 거부하고 홀로 북극에 남기를 선택한다. 디스토피아를 다루었나 싶지만 아니다. 목성을 다녀오는 약 2년간의 긴 여정을 마치고 지구로 귀환하는 에테르호에는 전파 통신을 담당하는 설리를 포함해 여섯명의 대원이 타고있는데 지구로부터의 통신이 끊긴지 오래다. SF 소설인가 싶지만 아니다.


   이 작품은 북극과 우주라는 거대하고 환상적인 배경을 선택하기는 했지만 결국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고 인간사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인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생존하기 위한 수많은 교육과 가르침을 받고 각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목표와 가치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간다. 하지만 세상이 갑자기 종말을 맞이했을 때, 그동안 받아온 가르침과 추구하던 목표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북극 천문 기지를 홀로 지키던 어거스틴은 갑자기 나타난 아이리스라는 어린아이를 통해 세상의 종말 앞에서, 생의 마지막에서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볼 기회를 갖는다. 설리를 비롯 에테르호의 대원들은 위기상황에 대비한 그 어떤 가상 훈련 시나리오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의 종말이라는 위기 속에서 '지구로의 귀환'이라는 목표가 갖는 의미를 상실한 채 흔들린다.


   철학적 메시지가 담겨있는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비극이기도 하고 희망이기도 하다. 나름의 반전과 잘 짜여진 구조를 갖춘 작품이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조지 클루니가 감독하고 출연한 영화 <미드나이트 스카이>를 주말에 볼 예정이다. 북극과 우주라는 생각만해도 빼어난 영상미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책이 지닌 철학적 메시지와 세상의 종말을 마주한 이들의 심리적 동요를 영화가 얼마나 잘 구현했을지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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