앱 제너레이션 - 스마트 세대와 창조 지능
하워드 가드너 & 케이티 데이비스 지음, 이수경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통신기기로 세대를 분류한다면 나는 소위 말하는 ‘삐삐’세대라고 할 수 있다. 삐삐는 허리춤에 차고 상대방이 호출할 때 진동이나 ‘삐~’소리가 나면 호출한 사람의 번호가 뜨고 근처에있는 공중전화로 가서 찍힌 번호로 전화를 하거나 음성이 녹음되어 있으면 그 음성을 확인 할 수 있는 기기였다. 지금처럼 스마트한 기기가 아니고 디지털하지만 아날로그의 감성이 살아있는 나름대로 낭만이 살이있는 통신기기였다. 대학때 몰래 좋아했던 여학생에게 음성이 들어오면 설레임을 가지고 음성을 확인했고 또 그 여학생에서 생일에 축하 음성을 남기기도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들 사이의 인정이나 낭만이 그대로 묻어있는 감성세대의 통신기기이기도 하였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 후로 이동통신 즉 핸드폰이 나왔고 그러면서 개인휴대기기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이 핸드폰도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디지털적인 감성이 있었다. 그후로 스마트폰이 나왔다. 이것은 기존의 핸드폰과는 그 성격자체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신세계였다. 제일 먼저 기억나는 스마트폰의 충격은 지하철을 탔을 때 누가 핸드폰으로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였다. 그때의 충격은 정말 이루 말할수 없는 것이였다. 지하철에서 손안에 티비나 영화를 보는 것은 그야말로 일상적인 생활에 혁명을 주는 새로운 차원의 삶의 방식을 만들어 준것이였다.

 

이제 1천만 스마트폰 시대가 열렸다. 거의 모든 세대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대부분의 일상적인 일들은 이제 스마트폰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스마트폰 안에는 앱이라는 작은 프로그램들이 있어서 이제 어떤 것들도 스마트폰으로 해결할 수 있다. 얼마전에 기타 튜닝을 위해서 튜닝 앱을 깔았는데 정말 놀라웠다. 이렇게 스마트폰은 일상에 편리함을 주기도 하지만 인간의 모든 정신적 역량을 빼앗아가는 중독현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한번은 버스를 타기위해서 정류장에 기다리고 있다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행동을 관찰하게 되었는데 모두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요즘 이러한 광경은 흔한일이다. 지하철을 타서 앉아있는 사람들이 무얼하는지 살펴보면 모두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열풍을 넘어 거의 중독수준이다. 잠을 자기전까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이제 인간관계가 언제나 가상현실속에서 이루어진다.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가 스마트폰이 모든 인간을 장악하고 있는 스마트시대인 것이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앱을 이용해야하는지에 대해서 교육적인 측면에서 진단 평가해주고 안내해주는 책이 하버드의 유명한 교육학자 하워드 가드너의 <앱 제너레이션>이다. 하워드 가드너는 존 듀이 이후 가장 뛰어난 교육학자라로 평가를 받으며 인간을 평가할 때 하나의 지능지수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측면에서 평가가능하다는 다중지능 이론을 창시한 사람이다.

 

교육학자 답게 스마트폰의 사회적 영향력이나 사회적 진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교육적으로 접근한다. 앱의 사용에 대해서 지나친 사용은 주의를 주지만 적절히 활용하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고 어떻게 선용할수 있는지에 대해서 제안하고 있다. 무조건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을 탈피하여서 자유롭고 선별적으로 앱을 사용할 때 그 가능성과 기능성은 무한하다고 말하고 있다. 하워드 가드너는 구성주의의 관점을 기반으로 앱을 활용하라고 조언하는데 이것은 환견에 대한 인간의 적극적인 호기심과 탐험을 통해서 지식이 습득되고 문제 해결 능력이 향상된다는 관점이다. 앱의 활용은 부모와 교사들의 책임있는 지도하에 전문가들과 함께 젊은 세대들에게 앱을 활용하는 방법을 알려줄 때 현 세대의 젊은 이들이 역사상 가장 스마트한 세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낙관은 중독이라는 패해에 대해서도 반드시 관심을 기울여야 될 것이라고 본다.

 

인간관계에서 리스크를 제거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더 편할 수는 있지만, 아무런 위험도 감수하지 않으려고 하면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이 어려워질 것이다. 또 타인과 진실하게 소통하지 못하면 타인 입장에서 공감할 줄도 모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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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그파이트 - 애플과 구글, 전쟁의 내막과 혁명의 청사진
프레드 보겔스타인 지음, 김고명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전쟁은 국가간에 전쟁, 무기를 동원해 인명을 살상하고 한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서 작전을 짜고 군대를 동원하는 전쟁만이 전쟁이 아니다. 비즈니스계에도 엄연히 전쟁이 존재한다. 경쟁 기업의 핵심 정보를 빼내기 위해 산업스파이를 파견하고 상대보다 한발 빠르게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고 때로는 상대 기업의 허위 과장 광고를 공격하기도 한다. 발그대로 총을 쏘지 않을 뿐이지 서로를 쓰러뜨리려는 것은 일반 전쟁과 별반 다를바 없다. 고객을 대상으로 그들의 돈을 좀더 가져오기 위해 자신들도 모르는 엄청난 요금제를 만들어 복잡하게 만드는 것도 비즈니스계의 전쟁의 일면이다.

 

2011년 국제 비즈니스계의 두 거성인 애플과 삼성은 소송에 휘말렸다. 애플이 삼성을 상대로 특허침해 소송을 낸 것이다. 통신기기에 대해서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던 나는 그 당시 그러한 소송에 대해서 한가지 기사거리로 여겼을 뿐이였다. 나 스스로 삼성이 애플의 핵심 기술을 베낀 것일까 하고 의구심을 가졌을 뿐이였다. 결국 삼성은 두 번의 소송을 통해서 1억 2000만 달러의 배상을 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렇게 서로 선한 경쟁을 하며 새로운 기기 계발을 통해서 세상을 좀더 편리하게 만들것이라는 국제 기업들이 서로 경쟁하며 소송까지 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낯설기는 했지만 비즈니스도 결국은 커다란 전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전쟁같은 비즈니스의 현장은 엄청난 금액의 시장이 자리잡고 있고 산업뿐 만 아니라 개인의 삶, 삶의 방식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변화를 줄수 있는 패권이 또한 자리잡고 있다. 일단 자사 제품이 다른 회사의 제품보다 선점할수 있으면 승자독식구조가 형성되어 엄청난 이익과 다른 패권을 얻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비즈니스도 하나의 전쟁일 수 밖에 없다.

 

이 책은 일반인들이 잘 알지못하는 기업들이 엄청난 패권을 놓고 벌이는 전쟁과 같은 비즈니스계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소비자는 언제나 좋은 제품을 사용하는 즐거움을 누리지만 그 이면에는 얼마나 큰 산고 끝에 제품이 출시되는지 그리고 각 기업의 대표들, 애플의 스티븐 잡스와 구글의 애릭 슈미트, 안드로이드의 아버지 앤디 루빈등이 벌이는 암투의 모습이 짐짓 한편의 소설과 같은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제품은 어떻게 기획되고 만들어지며 경쟁사와 어떻게 비교하며 회의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나오는지 매우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잘 묘사되어 있다. 모바일 시대에 IT패권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훌륭한 제품 뿐 아니라 적절한 정치력과 시대를 읽고 경쟁자를 읽는 뛰어난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 책 <도그파이트>는 잘 보여준다.

 

그리고 또한 이 책은 이러한 IT경쟁을 통해서 앞으로 어떠한 미래가 펼쳐질지 보여주고 있다. 어떤 기기들이 다음 세대의 승자가 될것인지, 노트북이나 핸드폰을 대체한 차세대 기기는 어떠한 것인지, 그러한 기기들이 사람들의 미래와 삶을 어떻게 바뀔것인지 이 책을 통해서 보는 것도 매우 흥미진진했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기기가 발전하고 세상에 편리함을 주겠지만 소비자들을 우롱하는 복잡한 요금제나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저절로 제품의 수명이 다하도록 만드는 기업들의 유치하고 치사한 조작들은 없어졌으면 한다. 기업은 소비자의 소비와 지원을 통해서 유지할 수 있고 성장할 수 있었으면 늘 기억했으면 좋겠다. 자꾸 새상품 주기를 짧게 만들고 요금제 복잡하게 만들어버리면 불매해 버릴꺼니까 ㅎㅎ

 

페이스북, 아마존, 넷플릭스, 마이크로소프트가 아무리 강력한 기업이라고 한들 스마트폰과 태블릿으로 뉴스를 보고 오락 상품을 소비하고 커뮤니케이션하는, 날로 늘어나는 무수한 시청자에게 다가가려면 여전히 애플과 구글이라는 두 회사를 거쳐야만 한다. 즉, 애플과 구글의 싸움에 오직 실리콘밸리의 미래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뉴욕 및 할리우드의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의 미래도 달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수천억 달러의 수익이 걸려 있다. 그래서 앞으로 최소 2년, 아마 5년 동안 이들 기업과 그 협력업체들, 또 거기에 기생하는 업체들은 죽기살기로 싸움을 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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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uish of the Jews (Revised and Updated): Twenty-Three Centuries of Antisemitism (Paperback, Revised)
Edward H. Flannery / Paulist Pr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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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대주의역사에 대해서 일목요연하게 진술되어 있는 책, 번역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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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blog.aladin.co.kr/rororo/7032440

 

2014. 6. 6.

 

계간 <문학동네>(여름호)에 썼던 글. 분량 상 뺐던 부분, 곧 <이사야> 68절과 '역사의 산파'를 겹쳐 읽은 부분을 원래대로 복귀시켜 놓는다. 

 

 

유일하게 유물론적인 것, 파송되는 윤리적인 것

신학자 본회퍼의 질문  

 

 

 

1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신 자신입니까?’ 나치 정권 위에서 그 정권과 싸웠던, 혹은 나치 정권과 싸움으로써 끝내 그 정권 위에 있을 수 있었던 신학자 본회퍼(D. Bonhoeffer, 1906~1945)의 질문. 또는 질문으로 된 테제. 그에게 그 질문, 그 테제란 신을 향한 진정한 믿음에 결부된 것임과 동시에, ‘경악’ 속에서 마비된 이성이 그런 경악을 연출했던 신에게 던진 화염병 같은 것이기도 했다. 묻게 된다. 던져진 화염병 속에 신학이 들어있어도 되는가, 유황 발라 쏜 불화살에 신학이 올라타도 되는가. 신학이 인도하는 화염병은 어떻게 깨지고 불붙으며, 화시로 고안된 신학은 어디에 꽂혀 얼마나 불태우는가. 그렇게 던져지고 쏘아진 신학, 그렇게 깨지고 꽂혀 불타는 신학은 과연 신학인가. 신학이다. 인화성 강한 신학, 촉발하는 신학이므로 신학 아닐 이유가 없다. 내게 그런 신학이란 이른바 ‘이론’이라는 것과 교환 가능한 무엇이다. 신학과 이론의 엄정한 문하 바깥에서 문외한으로 맴돌고 있는 내게 이론이란 앞 문장들에서 사용한 신학이라는 단어를 이론이라는 단어로 바꿔 읽었을 때의 그 이론이며, 그렇게 바꿔 다시 읽었을 때 발효되고 발안되는 특정한 생동(affect)이자 그것의 효과(effect)이다. 이 글은 그런 생동과 효과를 본회퍼의 신학적 의지, 곧 낮추어진 신학 속에서, 다시 말해 ‘윤리적인 것’의 안팎에서 인지하고 구성하기 위해 쓴다. 그렇다는 것은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신 자신입니까’라는 본회퍼의 질문이 경악스런 사태와 마주해 제출된 것이었음을 비평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비평이 비교라면, 비교는 인용에서 거듭 시작한다. 무엇을 인용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테제와 맞물린다. 본회퍼의 저 질문과 긴밀하게 조응시켜야 된다고 생각했던 한 대목, 다시 말해 그 질문의 긴박함을 위해 그 질문을 차이로서 보충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한 대목은 이런 것이다. 본회퍼의 ‘동시대인’ 레비나스(E. Levinas, 1906~1995)의 문장들: “부르주아는 본질적으로 보수주의자이지만 불안한 보수주의로 존재한다. 부르주아는 사업 문제와 학문을 자신들이 예측하지 못한 사태에 대한 방어와 연결시킨다. 부르주아의 소유 본능은 통합에 대한 본능이고, 부르주아의 제국주의는 안전에 대한 탐구다. 부르주아는 세계와 자신을 대립시키는 적대 관계에 대해 ‘내적 평화’라는 백색의 망토를 덮어씌우려 한다.”1) 2014년 5월 2일 현재, 언제나처럼 문제는 ‘부르주아’며 관건은 ‘백색의 망토’다.

 

 

2

 

문제는 부르주아다. 곧 불안한 보수주의자들의 그 불안이 문제다. 그 불안이 부르주아로 하여금 사회의 ‘안전’을 탐구하고 개발하는 행정권력의 체제를 건립케 한다. 불안은 부르주아를 움직이는 동력의 원천이자 그 동력의 결과다. 그래서 부르주아의 불안은 항구적으로 자기 생산적이다. 안전에 대한 탐구가 지속되는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 안전의 보장, 그것은 근저에 있어 그들 부르주아의 제국주의적 폭력이 시행되는 과정이며, 이 과정은 그들의 사업, 곧 그들이 봉행하는 이윤 생산의 공정과 궁극적으로 합성되어 있다. 그런 합성 상태는 넘볼 수 없이 전문화되고 고도화된 지식들, 비할 데 없이 지고한 미와 숭엄을 다루는 학문들로 신성한 진리의 후광을 두른다. 그럴 때에야 이윤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자신의 패션, 자신의 형식을 완성시키며 자신의 내용, 자신의 모든 신진대사를 속속들이 구동시킨다. 이윤의 내용과 형식이 하나로 결합하는 그때 이윤은 비로소 최종목적/끝이 되고 제1원인/시작이 된다. 그렇게 시작과 끝, 알파와 오메가를 통합한 부르주아의 이윤은 부르주아의 소유 본능이 예측 불가능하고 계산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통제적 계열화의 순수한 관철임을 선명히 드러낸다. 그런 통합 속에서 부르주아의 적대는 배제되는 방식으로 관리되며 사회는 부르주아 단독으로 단성 생식한다. 안전이 완성된다. 줄여 말해, 이윤이 ‘세속화된 신’으로 된다. 그 신은 이윤을 위해,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수행하는 모든 레벨에서의 내전(內戰)을 ‘내적 평화’라는 안전장치로 조정하고 조절한다. 눈부신 빛으로 된 거대한 ‘백색의 망토’가, 내적 평화라는 환상적 안전이, 이윤이라는 신의 힘을신이 된 부르주아의 그 힘을둘러치며 수호하고 있다. 후광 두른 그 신, 그 부르주아, 그 힘을 가리켜 본회퍼는 ‘로고스의 지배’라고 말했다. 로고스, 말씀. 다시 말해 발령하는 신의 말, 발포하고 명령하는 신/부르주아의 통치의 말씀. 본회퍼가 말하는 로고스의 지배는 백색 망토, 부르주아의 방법, 부르주아라는 신의 힘을 가리키는 다른 말이며, 그 힘을 봉행함으로써 그 힘을 소유하게 된 인간들이 구축한 신적 질서, 곧 안전의 인간들이 설계한 ‘로고스-질서(Logos-Ordnung)’와 같은 말이다. 그 질서, 그 내적 평화의 로고스는 자신을 향해 불복종을 선언하는 ‘반-로고스(Gegenlogos)’를 자신의 질서 내부로 편입시킴으로써 스스로를 보존한다. 로고스/신은 자신을 부정하는 반-로고스/반-신보다 더 빨리 더 세심히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반-로고스를 흡수하고 흡입한다. 그것이 로고스의 지고한 능력이다. 로고스의 자기 보존력은 수동적 방어가 아니라 적극적 자기부정의 선취로, 그런 선취를 위한 자기에의 통찰력으로 표출된다. 그때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신 자신입니까’라는 신학의 질문, 질문하는 신학이란 무엇인가. 로고스의 궁극적 능력을 향해 곧장 날아가고 있는 탄핵의 테제이며, 신의 지고한 자기 통찰력을 향해 수직으로 떨어지고 있는 심판의 테제이다. 경악 속의 지금, 경악 이후의 이곳, 다시 말해 분노의 정점을 찍으며 비감에 젖고 죄책의 하중을 짊어지며 서약을 다짐하면서도 한층 무뎌진 내면을 마주하고 있는 여기의 지금, 문제는 로고스이며 관건은 반-로고스이다.

 

 

3

 

백색 망토 두른 신성한 힘, 그 힘을 독점한 자들의 말. 곧 합의, 묵계, 공표, 판결, 발령으로 존재하는 그들의 말, 말씀. 그 신성의 말/로고스는 즉각적으로 노모스/법의 대지로 펼쳐진다. 법의 말, 법이 된 말씀의 영토가 쉽사리 흔들리거나 붕괴되지 않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그 로고스/노모스가 자신을 거스르고 거역하는 반-로고스를 자신의 영토 안으로 안착시킴으로써 그 충격과 파동을 흡인·완화·순치하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반-로고스는 로고스의 안전을 위한 단순한 기능 단위로 합성되고 재배치된다. 그렇게 반-노모스는 노모스를 수호함으로써 노모스를 완성한다. 그런데 어떤가 하면, 로고스의 지고함/주권 내부로 흡인되거나 감치되지 않고 언제나처럼 ‘나머지’로 남는 반-로고스의 생동과 발현이 있다. 무슨 말인가. 본회퍼에게 로고스는 힘(Gewalt)이다. 로고스를 게발트로 인지한다는 것은, 군림하는 힘이 집전하는 내적 평화 속으로가 아니라, 군림하는 그 힘으로의 환원을 부결시키며 전개되는 힘의 쟁투 상황 속으로 로고스를 밀어 넣는다는 뜻이다. 그 상황, 그 현장으로 로고스를 거듭 밀어 넣고 있는 본회퍼에게 로고스는 ‘인간적 로고스(곧, 로고스-질서)’와 ‘신적 로고스’로 매번 구분되고 이격됨으로써 매회 적대적 관계로 돌입한다. 본회퍼 그리스도론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반-로고스가 전혀 새로운 형태 속에서, 자신 스스로를 로고스의 지배에 반대하는 어떤 이념이나 말로 이해하지 않고 언젠가 어느 곳에서 역사 속의 인간이면서도 인간적 로고스에 대한 심판으로 자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나는 진리요’, 나는 인간적 로고스의 죽음이며, 나는 신적 로고스의 생명이고,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 (…) 여기서는 육신이 된 말씀을 로고스-질서로 편입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단지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물음만이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경악 속에서 폐위된 이성의 물음이며, 동시에 신앙의 물음이다. ‘당신은 누구(Wer)입니까? 당신은 신(Gott) 자신입니까?’ 그리스도론에서는 오직 이러한 물음만이 중요하다.2) 

 

오직 그러한 물음을 던지는 신학만이 중요하다. 그런 신학 안에서 반-로고스는 로고스-질서, 곧 부르주아의 인간이 정립한 노모스(인간적 로고스)와는 전혀 다르게 존재한다. 반-로고스는 로고스-질서와 서로 공유 가능하거나 통약 가능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곧 로고스-질서에 의해 계산될 수 있거나 예측될 수 있는 어떤 ‘이념’이나 교환 가능한 공약으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인간으로서, 로고스-질서에 대한 ‘심판’의 힘으로서 기립한다. 그때 반-로고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진리요’(「요한복음」, 14: 6),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요한계시록」, 22: 13). 그렇게 ‘말함’으로써 반-로고스는 부르주아라는 신으로부터, 스스로를 제1원인/시작이자 최종목적/끝으로 건립시키고 있는 이윤이라는 신으로부터, 그 신이 탐구했던 안전이라는 신적 레짐으로부터 폭력적으로 성별(聖別)되며 때내어진다. 그때 반-로고스는 로고스-질서로 흡수되거나 재배치될 가능성을 제로로 만드는, 그럼으로써 로고스-질서의 자기 통찰적 보존력을 끝장내는 ‘신적 로고스’로, 심판하는 신의 말로 정초된다. 신적 로고스, 그 신, 그 말은 로고스-질서의 불가역적 말씀에 대한 거역과 역성(逆性)의 법으로, 달리 말해 로고스-질서가 두른 백색 망토를 찢고 부수는 파쇄의 힘으로, ‘대항말씀(Gegenwort)’으로, 반-신(Gegen-Gott)의 게발트로 ‘다르게 존재’하며, 거듭 ‘잔존’한다. 바로 이 잔존의 상황 속에서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신 자신입니까’라는 질문은 가장 첨예해지며, 그 첨예함의 지속과 보존 속에서만 대항말씀의 잔존의 상황은 심판의 힘으로 항존한다. 이 잔존의 항존성을 지지하고 지탱하는 것, 그것이 본회퍼가 말하는 ‘윤리’ 혹은 ‘윤리적인 것’이다.3) 본회퍼의 저 질문 속에서 ‘이웃’은 이른바 ‘초월’의 뜻과 만난다. “‘누구인지를 묻는 물음(Wer-Frage)’은 종교적 물음 그 자체다. 이 물음은 다른 인간, 다른 존재에 대한 물음이다. 이 물음은 이웃 사랑에 대한 물음이다. 초월에 대한 물음과 실존에 대한 물음은 이웃에 대한 물음이[다].”4) 이웃과 초월의 결속, 혹은 ‘이웃으로의 도달 가능성’에 대해선 뒤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자. 아직 ‘백색의 망토’와 ‘로고스-질서’라는 신성한 후광에 대해, 그것을 다시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과 태도에 대해 써야 할 것이 남아 있어서다.

 

 

4

 

백색의 망토, 그것은 이윤이라는 신을 둘러치고 있던 환상적 안전을, 로고스-질서의 유혈적 판타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백색의 망토는 항구적 내전의 시간을, 다시 말해 검붉은 피의 얼굴과 몸들을, 그에 대한 증언의 사건들을 자신의 후광으로 무화시킨다. 그러므로 그 흰 빛, 그 후광이 악이며, 악이므로 적(敵)이다. 악/적의 존재론에 대해 쓰면서 본회퍼는 악이고 적인 독재자 ‘그’를 조준한다. “악이 빛, 선행, 신실, 갱신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악이 역사적 필연성과 사회정의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사실” 속에서 “그는 불안을 책임이라고 칭하고, 욕망을 열심이라고 칭한다. 의존심을 연대성이라고 칭하고, 잔인함을 남성다움이라고 칭한다.”5) 불의를 의(義)라고 칭하고, 살인을 살림이라고 칭하는 그는 선함의 빛 속에서, 바로 그 후광 속에서 스스로를 갱신하고 변혁하는 신실한 성찰적 존재로 자신을 조명한다. 그때 삶의 모든 실제적 관계가 악의 일반화된 후광-기계 속으로, 종교가 된 불가역적 필연성으로, 신성화된 사회정의 속으로 말려들어가 합성되고 재편된다. 이 유혈적 합성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한 대목을 읽게 된다. 마르크스, 본회퍼/레비나스의 동시대인.

 

종교가 만든 흐릿한 환영들(Nebelbildungen)의 세속적 핵심을 분석해 찾아내는 것은, 삶의 실제적 관계들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관계의 신성화된(verhimmelten) 형태들을 [뽑아내] 펼쳐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쉽다. 후자의 길만이 유일하게 유물론적이며, 따라서 유일하게 과학적인 방법이다.6)

 

‘유일하게 유물론적인 것’, 그것은 삶을 관장하고 사목하는 신성화된 힘의 논리를 인지하고 개시하기 위한 방법들의 탐구이며, 삶을 주재하고 집전하는 신성한 힘, 종교가 된 정치적 힘의 그 자기 성찰적 보존과 연장을 앞질러 절단할 수 있는 온갖 경로들로의 인입이다. 내게 유일하게 유물론적인 것은, 백색 망토 두른 로고스-질서의 그 눈부신 빛, 통합과 일치 속에서 이윤을 생산하는 바로 그 부르주아적 안전의 빛을 지목해 그것이 다름 아닌 악이자 적이라고 거듭 결단하게 하는 상황적 개입과 인입의 근거이며, 그런 악/적이 역사적 필연으로, 신실함으로, 선으로, 불가역적 정의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바로 그때야말로 삶의 실재적 관계가 악/적의 내부로 말려들고 가공되는 시간임을 매번 현시하도록 강제하는 인지양식의 기반이다. 줄여 말해, 유일하게 유물론적인 것에게 문제는 신성화된 악/적이 주관하는 칭의(稱義)와 구원의 상태이며, 관건은 그 칭의의 불의함을, 그 구원의 모조성을 개시하는 발생적 힘의 상황이다. 발의되고 발안되는 그 힘의 향배와 절차, 그 힘의 경향과 벡터 속으로 함몰되지 않게 몰두함으로써 그 힘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의 예비, 그것이 유일하게 유물론적인 것의 뜻과 의지이다. 그런 한에서 유물론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놀랄 것은 없습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가장합니다. 그렇다면, 사탄의 일꾼들이 의[義]의 일꾼으로 가장한다고 해서, 조금도 놀랄 것은 없습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그들이 행한 대로 될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1: 14~15) 삶의 실재적 관계를 로고스-질서의 신성 속으로 합성시켜 끝장내는 악/적은 정확히 자기들이 행했던 바로 그대로 자기들의 마지막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이가 유물론자다. 본회퍼는 유물론자다. 이른바 ‘비종교적 그리스도교’ 또는 ‘그리스도교의 차안성/세속성(Diesseitikeit)’으로 표현되는 본회퍼의 신학은 유물론자의 신학, 유물론적 신학이다.

 

우리는 종교 없이, 즉 형이상학, 내면성 등의 시간적으로 제약된 전제들 없이 어떻게 신에 관해 말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는 ‘세속적으로(weltlich)’ ‘신’에 관해 말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는 ‘비종교적으로-세속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는 자신을 종교적 특권자로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전적으로 세상에 속한 자로서 ‘에클레시아’, 즉 부름 받은 자들이 될 수 있는가?7)

 

본회퍼가 말하는 ‘종교 없이’란, 종교적 환영들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내면적이고 내향적인, 그러므로 흐릿한, 그래서 권위와 자격을 가진 자만이 말할 수 있는 그런 환영들에서 일상의 의미를 찾아내 해석함으로써 ‘종교적 특권’을 나눠 갖는 게 아니라, 곧 백색의 망토를 함께 두르는 것이 아니라, 그 환영들 자체를, 그 백색 망토 자체를 걷어치운다는 뜻으로서 ‘종교 없이’이다. 그렇게 종교 없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다시 말해 ‘비종교적으로-세속적으로’ 신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예컨대 ‘이웃으로의 도달 가능성’ 속에서 타진되는 삶의 실재적 관계가 하나의 힘으로, 곧 로고스-질서의 신성한 후광 속으로 편입되고 있는 현장을 기소하는 반-로고스적 힘의 인간으로 불러일으켜진다는 뜻이다. 그가 ‘전적으로 세상에 속한 자’이다. 본회퍼에겐 세상에서 번연히 사는 이들 모두가 전적으로 세상에 속한 자인 것은 아니다. 본회퍼에겐 세상에서 사는 이들 또한 전적으로 세상에 속해야 한다. 전적으로 세상에 속한다는 것, 그것은 ‘부름 받은 자들’이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에클레시아(ekklesia)’가 된다는 것이다(에클레시아는 ‘교회’라는 말로 통용되지만 그 말은 쓰지 않기로 한다. 지배적 교회, 또는 국가교회에 대해 에클레시아는 무-교회이며 또렷한 무교회주의적 용어이다). 본회퍼에게 유일하게 유물론적인 것은 에클레시아로 관철된다. “형성의 윤리는 오직 에클레시아 안에 현존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에클레시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장소요, 그 모습이 이루어지는 장소다. 그리스도교 윤리는 이러한 선포와 사건을 위해 봉사한다.”8) 이웃 혹은 타인의 부름을 받은 자들로서의 에클레시아. 그 부름․응답․책임의 윤리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형성’되고 기립하는 현장. 신성한 후광 속 안전의 국가와 서로 공조하고 모방하는 종교적 특권 속 구원의 교회가 아니라 종교 없이, 비종교적으로-세속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신의 말을 대신하는 자들의 현장.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의 혀로, 진정한 주-격으로 불러일으켜지는 윤리적 게발트의 현장. 그 ‘현장’이 곧 에클레시아다. 앞서 인용했던, ‘그들의 마지막은 그들이 행한 대로 될 것입니다’라는 유물론자의 말처럼, 바로 그 현장/에클레시아에 의해 세속을 끝장내는 모든 신성의 지배, 모든 진리관리의 체제는 정확히 자기들이 행했던 바로 그대로 자기들의 마지막을, 녹아 공중으로 흩어지는 자기들의 마지막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 마지막, 그 최후적 힘이 거듭 시작되는 곳, 다시 말해 시작의 알파가 최후적 오메가와 하나로 기립하고 있는 현장이 에클레시아다. “부름 받은 자들의 실천적 행동이 에클레시아를 구성한다.”9) 반-로고스적인 것 또는 윤리적인 것이 발현되고 있는 현장/에클레시아는 그렇게 신의 말씀, 신의 소명과 명령으로 지지되고 유통된다. “신의 계명은 윤리적 논의의 유일한 권한이다. (…) 신의 계명은 무시간적으로, 그리고 무공간적으로 발견되고 알려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장소와 시간에 결부된 가운데서 들려진다.10) 어디든 편재하고 있는 지금-여기의 현장에서 신의 소명으로서 들려오고 있는 목소리가 있다. 본회퍼에게, 그리고 레비나스에게 그 목소리는 배제되는 타인의 부름으로서 들려지는 것이었으며 그 부름은 신/타인의 언명이므로 회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회피할 수 없는 현장이 눈앞에 있다.

 

 

5

 

‘세월호’라는 현장. 왜 그들은 여기에 없는가.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신 자신입니까’라는 질문이 ‘경악’을 연출했던 세력의 신성한 후광을 향한 소송이었음은, 그 질문을 오늘의 경악을 연출하고 있는 세력, 다시 말해 신성한 부르주아들, 로고스-질서의 설계자들이 소유한 신적 힘을 향한 기소로 다시 읽게 한다. 세월호라는 현장의 이면에 있었던 것은 이윤의 축적을 위한 힘의 유착이었으며 힘의 융합이었다. 세월호라는 현장의 이면에 있었던 것은 이윤의 축적을 위한 힘의 유착이었으며 힘의 융합이었다. 스스로를 확대재생산하기 위해 진실의 제작과 설계에 몰두하는 세 개의 독점적 힘, 절대적인 힘들. 사건 초기의 정보와 자료를 독점했던 해경 정보수사국, 인명 구조를 위한 잠수권을 독점했던 언딘, 사건 전반의 수사권을 독점하고 있는 검경합수부. 이들과 유착되고 융합된 다른 힘들. 기업의 의사결정을 독점한 구원파의 종교지도자이자 자본가. 규제 완화를 위한 법제정 및 그 법의 보호를 통해 이른바 ‘종교로서의 자본주의’에 축적의 자유를 선사하고 있는 통합된 3권, 편재하는 여기의 국가. 그 국가의 독점적 수반이자 반인반신(半人半神)의 연장으로서의 종신통령. 이를 중심으로 건립된 광범위한 동의와 안락의 구조. 꽉 짜인 이 연쇄, 이 촘촘한 연락망 속에서 이윤 축적의 공정 내부로 연계되거나 합성되지 않은 것이 있는가. 이렇게 질문하는 한에서, 연쇄적 연락망 안으로 유착되고 융합된 힘이 스스로를 ‘내적 평화’의 유지자이자 보장자로, 다시 말해 고안되고 탐구된 ‘안전’의 장치를 통해 거대한 ‘백색 망토’ 두른 절대적 신성의 정치체로 구축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무릅쓰고 말하건대, 세월호라는 현장은 그런 독점과 신성의 연락망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시간이자 장소이다. 기어이 말하건대 그 현장, 그 상황을 둘러싼 ‘인지양식’의 투쟁에 대한 말과 말들이야말로 어디로도 환원되지 않을 애도의 방법 중 하나이며, 회피 불가능한 ‘타인의 부름’에 대한 응답 및 책임의 일부를 이룬다. 2014년 5월 1일 현재, 현장을 가리키고 있는 숱한 문장들 중에서 여기 인용할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이 두 인지양식 사이의 투쟁에서 지금 대안인지양식의 방향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가족대책위원회에서 나오고 있다. 그것은 슬픔의 정동에서 촉발되었지만 생명의 안전을 도모하고 그것을 가능케 할 장치를 구축해야 한다는 강렬한 열망으로 빠르게 변형되고 있다(4월 30일 가대위 호소문). 청소년들, 청년들, 학생들, 부모들, 노동자들 등이 하나씩 둘씩 거리로 나서서 서로의 마음과 생각을 타진하기 시작하고 있다.”11) 현장의 ‘수습’과 ‘공식 진실’의 제작으로 수렴해가는 진리 독점체로서의 국가의 인지양식 대 그런 공식 진실 이면에서, 그런 백색 망토 이면에서 가동되고 있는 재생산적 자기 독백과 이윤 연쇄를 부결시키는 대안인지의 양식. 그것은 생명을 이윤으로 합성하는 체제, 진리의 제작 속에서 신성을 확보해가는 체제를 거듭 정지시키는 힘으로, ‘생명-진실의 새로운 체제’를 건립하기 위한 공통적 동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나서고 있는, 기립하고 있는 사람들, 거리 위에서 타진되고 있는 그 마음들의 향배와 힘에 인입해야 한다. 타진되고 있는 마음들을 상대로 수습, 질서, 안전의 재구축이라는 이름으로 내전을 준비 중인 법복 입은 사제들의 그 법복을 벗기는 방법과 경로를 찾아야 한다. ‘유언비어(流言蜚語)’라는 말, 흐르고 기며 번지고 퍼지는 중구삭금(衆口鑠金)의 말들을 주시하게 된다. 법복 걸친, 백색 망토 두른 저들 사제들이 기를 쓰고 봉쇄하려는 유언비어의 유통, 그것에 대한 하나의 성찰은 다음과 같다. “유언비어는 공적 거짓말이라는 흰 악마가 불러낸 검은 천사이다. 유언비어는 저주받은 시대의 사적이고 경험적인 판단력이자, 공론 그 자체다.”12) 공적인 새빨간 거짓말, 혹은 공식 진실의 유혈적 허구성. 그것은 정의로, 갱신으로, 선으로, 빛으로 스스로를 분식하는 백색 망토 두른 악, 곧 ‘흰 악마’가 자신을 유지하고 갱신하는 방법들 중 하나이다. 유언비어란 그 흰 악마가 구축한 안전의 최대치가 불러낸 ‘검은 천사’이자 ‘공론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 유언비어는 최고도로 전개된 로고스-질서가 불러일으키고 기립시키는 반-로고스의 게발트이다. 그것은 진리관리의 체제가 제작한 정치공학적 공식진실을 파기하고 진실 및 진리를 재발견하며 재구성해내는 힘이다. 검은 천사로서의 말들, 유언비어라는 ‘대항말씀’은 안전의 영토가 흰 악마의 거주지이자 백색 망토 두른 악의 ‘장소’였음을 현시하고 확증하는 근거이며 힘인 동시에, 저들 악이 걸친 신성한 후광의 망토가 찢어지고 뚫리는 ‘시간’으로 발명되는 대안인지의 한 가지 형식이자 그 표출이다. 바로 그런 장소, 그런 시간으로 거듭 직조되는 상황, 그것이 ‘현장’이다. 그 현장은 타인의 부름을 회피할 수 없는 장소이며, 그런 회피 불가능함 속에서 강제되는 응답의 시간이다. 들려오고 답하게 되는 현장이 바로 윤리적인 것의 시공간이다. 신의 부름에 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들, 그들의 그 응답에서 윤리의 뜻을 새긴 사람들이 있었다. 이에 대해 좀 더 말하기로 하자.  

 

 

6

 

독일교회투쟁에서 활약했었으며, 이후 독재자 암살기획에 가담했었던 본회퍼. 발각되어 형무소의 지하에 감금되었던 그는 옥중에서 구원을 바라며 읽고 썼다. 그가 자신의 사촌 매제이자 대화의 벗이었던 에버하르트 베트게에게 보낸 1944년 2월 23일자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 삶이 단지 단편의 희미한 미광에 불과할지라도, 그 단편이 단시간만이라도 다양한 주제들을 조화시키며, 처음부터 끝까지 거대한 대위법에 의해 유지되고, 최후의 곡이 끝나더라도 거기서 ‘제가 여기 당신 앞에 있습니다’라는 찬송합창을 부를 수만 있는 단편이라면, 우리는 그런 단편적 삶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고 오히려 기뻐할 것이네. 예레미아 45장이 나를 놓아주지 않고 있다네.”13) 이 편지 안에, 신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자의 목소리가 들어있다. 그 목소리는 한계를 가진 삶, 단편과 편린으로 머무는 삶을 기쁨으로 누리고 구가할 수 있게 하는 조건들 중 하나이자, 그 조건들 전부이다. 응답중인 그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이사야, 예언자의 것이다. “그 때에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내가 응답하였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소서.’”(「이사야」, 6: 8) 본회퍼가 인용한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는 ‘저를 보내소서’와 잇닿은 것이었다. ‘여기에 있습니다’라는 응답은 신의 소명(missio)에의 봉헌이며, 이는 즉각적으로 ‘저를 보내소서’라는 신의 파송(missio)에의 봉행과 맞물린다. 파송되는 자는 파송한 자를 전면적으로 ‘위임’받아 파송한 자가 된다. 신의 소명을 따라 파송된 그가 곧 신이다. 이른바, ‘신인(Gott-Mensch)’. 신성화된 로고스-질서를 향한 탄핵의 테제로서, 항구적 불-일치(un-fuge)의 게발트로서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신 자신입니까’라고 질문하는 바로 그 신인에 의해 장소와 시간, 상황과 현장을 가진 ‘구체적 윤리’가 수행된다. 바로 그 구체적 윤리의 수행력이 본회퍼가 말하는 ‘진정한 초월’의 동력이다.

 

그는 로고스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그는 대응말씀(Gegenwort)으로서 존재한다. (…) ‘누구인지를 묻는 물음’은 타자의 타자성을 표현하는 물음이다. ‘누구인지를 묻는 물음’은 동시에 질문하는 사람의 실존물음이기도 하다. ‘누구인지를 묻는 물음’ 속에서 물음을 던지는 사람은 자신을 한정하는 존재에 대해 묻는다. 요약하자면, 실존에 대한 물음은 초월에 대한 물음이다.14)

 

자신을 한정하고 제약하는 규범과 규약들의 레짐, 구체제. ‘당신은 신 자신입니까’라는 질문의 표적이 그것이다. 그 질문은 타자의 타자성, 이른바 ‘타인의 얼굴’을 마주함으로써 수행되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 질문은 그렇게 마주하고 응답하는 이의 실존을 초월의 관점에서 사고하도록 요청하고 강제한다. 그 요청, 그 강제 속에서 질문하는 자는 반-로고스의 게발트로, 대항말씀으로 다르게 존재한다. 그것은 ‘이웃’과의 관계라는 문제로 제기된다. ‘이웃으로의 도달 가능성’이라는 본회퍼의 한 구절은 ‘로고스 그 자체’로서의 초월성을 가리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본회퍼는 옥중에서 전체 3장으로 된 100쪽 안팎의 글을 쓰려고 했으며, 그 중 2장의 주요 내용은 그리스도로의 참여, 그리스도 속에서의 변신이었다. 그 연구의 개요를 따르면, 본회퍼에게 신과 인간의 관계는 이런 것이었다. “[그것은] 예수의 존재에 참여하는 가운데 주어지는 ‘타자를 위한 존재’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삶이다. 초월적인 것은 무한하거나 도달할 수 없는 과제가 아니라 각자에게 주어진 도달 가능한 이웃이다.”15) 윤리적인 것, 다시 말해 초월적인 것으로서의 ‘도달 가능한 이웃’이란 삶의 실재적 관계를곧 궁극적인 것으로서의 이웃과의 관계를침탈하고 합성하는 안전의 로고스-질서 내부로 다음과 같은 것들로 거듭 인입되고 각인되며 유통되는 것이어야 했다. 로고스-질서를 지탱하는 안전행정의 최대치에서 그 질서의 무능과 착종과 한계를 노출시키고 노정시키는 ‘한계 사건’의 현장으로 인입되어야 하는 것, 백색 망토 아래에서는 결코 탐구될 수 없고 관리될 수 없는 항구적 초과의 게발트로 각인되어야 하는 것, 줄여 말해 유일하게 유물론적인 방법의 수행과 관철로 유통되어야 하는 것. 그것이 ‘도달 가능한 이웃’의 뜻이다. 로고스-질서의 신적 주재자들을 향해 본회퍼가 던졌던 질문,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신 자신입니까’라는 소추(訴追)의 테제 속에서 유물론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은 그렇게 하나로 결속되어 있다.

 

 

7

 

본회퍼가 인용했던 이사야, 그 소명에의 응답과 파송의 상황을 다른 강도와 밀도로 표현하고 있는 윤리학을 마주한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가 의미하는 것이 ‘저를 보내소서’이다, 라고 말했던 이는 레비나스였다. 그 또한 부름에 대한 응답이 곧 파송이며 파송이 곧 일자로서의 신으로 불러일으켜지는 것임을 말한다. 레비나스의 다음 문장들이 본회퍼의 이사야 인용에 합치되지 않는 방식으로 융합될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된다. “소환 속에서, 대명사 나(je)는 대격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제가 여기 있습니다(me voici)이다. 이것은 마치 모든 격변화 이전에 격변화된 나, 어떻게든 주격으로 정립되기 이전에 격변화된 내가 타자에 의해 소유된 것으로 깨워지는 것과 같다.”16) ‘누가 대신하여 갈 것인가’라는 신의 물음, 그것은 회피할 수 없는 소명이자 ‘소환’이었다. 신의 그 소환을 따라 주격 ‘나’는 ‘고발당한(accusé)’ 피고인으로서 주격의 자리를 박탈당한다. 곧 나는 나로 정립된 상태 내부에서 이뤄지는 모든 격변화가 자기 동일성의 순환적 축적에 지나지 않는다고 고발당하며, 그럼으로써 나는 정립된 나의 바깥으로, ‘탈정립’된 외-존의 현장으로 내놓이게 된다. 다시 말해 ‘대격(對格, accusatif)’의 자리에 위치하게 된다. 대격이란 타인의 얼굴을 마주 대하게 됨으로써 책임을 지게 되는 구체적 시공간이다. 대격의 자리, 탈정립의 현장에서 나는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며, 그런 한에서 나는 타인의 소유로, 타인의 ‘볼모’로 일깨워진다. “자아의 전-사(前-史)에서, 나는 전적으로 볼모다. (…) 여기에, 전-근원적으로 타인에게 묶인 나의 종교성(re-ligiosité)이 있다.”17) 타인이란 무엇인가. 이미 나의 전-사에서부터, 곧 나의 현존을 이미 앞질러 나를 부르고 붙듦으로써 나를 나로 기립시키고 있는 절대적 ‘힘’, 그것이 타인이다. 그런 타인의 부름에 응답하게 됨으로써, 다시 말해 타인이라는 ‘전-근원적’인 끈으로 매번 다시(re) 묶이고 매회 결속(ligio)됨으로써 불러일으켜지는 나의 종교성. 그 종교성은 레비나스가 구분했던 ‘성스러운 것(le saint)’과 ‘신성한 것(le sacre)’ 중에서 성스러운 것과 함께 한다. 타인의 부름에 응답하게 됨으로써 나는 성스러운 것/유일성으로 꽉 채워지며, 그렇게 그 성스러운 것은 전적으로 세속에 속한 나에게로 내려오는 중이다. 윤리의 실천이란 성스러운 것의 그런 내려옴, 차안으로의 내려옴이자 세속화이고, 그렇게 내려오는/내려치는 성스러운 것이란 올라가는 것/군림하는 것/신성한 것으로서의 로고스-질서를 신의 법정에 세우는 탄핵의 게발트이자 소추의 현장이다. 그 힘, 그 공소 유지의 현장이 곧 로고스-질서의 좌표로 다시 귀속되지 않는 외-존의 힘이며, 근원적․시초적 아르케로 복귀하지 않는 윤리적 탈정립의 현장이다. 그러므로 “얼굴로 나아가는 행위 속에는 분명 신 개념으로 나아가는 행위가 있다.”18) 바로 여기에 저 소환되고 있는 자의 응답,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소서’라는 말의 뜻과 의지가 있다. 신의 부름에 응답하게 됨으로써, 곧 신의 소명으로 파송됨으로써 신의 권능을 위임받은 자가 신의 말/로고스를 대신하는 ‘유일한’ 대언자(代言者)가 되듯, 대격의 현장에서 그는 그 자신을 ‘유일한 것’으로 끌어올리는 양도될 수 없는 책임을 진다.

 

탈정립된 나는 사회의 상부구조에서, 정의에서 법을 다시 발견할 것이며, 이 법을 통해 자율과 평등을 다시 찾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대신함이다. (…) 대신함에 의해 확증되는 것은 나의 개별성이 아니라 유일성이다.19) 

 

‘누가 대신하여 갈 것인가’라는 신의 물음과 마주한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응답은 ‘저를 보내소서’이자 ‘대신 가겠습니다’이다. 마주한다는 것, 대신한다는 것은 주체구성력이며 정치의 구성력이다. 대신함에 의해 나는 유일성으로, 신적 ‘일자’로 확증된다. 일자에 의해 사회의 상부구조는 백색 망토 두른 이윤 생산 공정의 컨트롤 타워로, 정의는 그 탑을 수호하는 유혈적 내전의 무기이자 마취적 이데올로기로 개시되고 고지된다. 응답하고 책임지는 바로 그 일자에 의해 부르주아의 ‘안전의 체제’는 스스로를 빛으로, 선으로, 신실함으로, 갱신으로, 역사적 필연으로 칭의하고 있는 유혈적 후광의 체제로, 악으로서의 로고스-질서로 거듭 개시되고 고지된다. 줄여 말해 일자는 ‘유일하게 유물론적인 방법’을 파지한 자이다. 일자는 로고스-질서의 상부구조와 정의에서 다른 ‘법’을 다시 발견하고 그 법의 기쁨 속에서 ‘자율과 평등’을 다시 탐구하는 반-로고스의 게발트이다. 일자가 응답에서, 책임에서, 곧 윤리에서 시작되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소서’라는 이사야의 말/로고스, 다시 말해 소명과 소환에 대한 응답이자 책임으로서의 윤리, 응답이자 파송으로서의 윤리가 다른 법과 자율의 탐구를 요청하고 강제하는 대격의 현장으로, 탈정립의 시간으로 유통된다. “윤리가 의미하는 것은 경험을 근원적으로 종합하는 통일성의 파열이며, 따라서 그런 경험 자체의 너머다.”20) 일자는 통일성의 파열의 시간으로 유통된다. 일자(un)는 환원할 수 없는 ‘너머’이며 한계-초과이며 불-일치(un-fuge)의 시간으로 유통된다. 그 시간, 그 시간성에 대한 레비나스의 문장들. “이것은 현재를 넘어선 초과다. 이 초과가 영광이다. 이 영광과 더불어 무한은 사건으로 생산된다. 현재를 넘어선 초과는 무한의 삶이다. (…) 이것이 시간성이다. 이 시간성은 관계의 항들의 환원할 수 없는 불-일치에 의해 생겨난다.”21) 로고스-질서가 인도하고 사목하는 시간으로서의 ‘현재’를 넘어가는 시간, 백색 후광 두른 현재의 그 동일자적 단성생식을, ‘고독화된 순간의 단조로움’을 침투하고 침식하는 초과적 힘으로서의 시간. 그것은 대위법적 주조 속에서 보존되는 질적 차이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기계적․반복적 단조(單調)로서의 ‘순간’을 폐절시키는 초과적 ‘무한’을, 무한의 삶을, 무한의 영광/빛 속에서의 삶을 뜻한다. 초과적 사건으로 생산되는 무한은 질적 차이의 그 불일치성을 지속하는 힘이며, 그 환원 불가능성에 대한 보존력이다. 무한은 그러므로 성스러운 것이다. 곧 ‘신을-향함(à-Dieu)’ 그 자체로서 불러일으켜지는 무한은 로고스-질서와의 작별(adieu) 혹은 성별의 힘으로 발의되며, 제헌적 게발트의 시간으로 생산된다. 무한으로서의 시간의 생산성(fécondite), 다시 말해 반-로고스적 게발트로서의 무한의 생산력을 표현하고 있는 문장들은 다음과 같다.

 

ⅰ) 이때 시간은 잉태(孕胎)의 구체성이 되면서 논리의 부조리로 된다. 같음이 다름을 흡수해버리는 관계이 관계를 대표하는 것이 앎이다를 넘어 타자성의 관계가 우뚝 솟는다. ⅱ) 게발트는 새로운 사회를 잉태(孕胎)하고 있는 모든 낡은 사회에서 산파 역할을 한다. 게발트는 그 자체가 하나의 경제적 힘이다. ⅲ) 시간의 작업은 단순히 창조에 의한 혁신이 아니다. 창조는 현재에 고착되어 있고 (…) 시간은 우리의 영혼 상태, 우리 속성의 혁신 이상이다. 시간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탄생이다.22)

 

로고스-질서가 집전하는 ‘현재’, 곧 대위법이 단조로 흡수되는 통합과 축적의 시간. 그 폭력적 합성의 상태로 환원되지 않는 초과적 나머지의 시간, 곧 무한으로 생산되는 시간이 후광 두른 축적의 로고스/논리를 원래의 부조리로, 통치의 맨얼굴로 개시하고 고지한다. 타인의 소환 및 소명에 응답하게 되고, 그렇게 응답함으로써 파송되는 자의 말/증언, 곧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소서’가 그 일을 행한다. 곳곳의 사회 안에서 발화되고 발포되는 그 말, 그 증언, 다시 말해 저 중구삭금의 ‘유언비어’로서 생산되고 잉태되는 구체적 ‘현장’의 시간. 그것이 ‘잉태의 구체성’으로서의 시간이다. ‘시간의 작업’이란 그렇게 잉태된 그 말들을, ‘창조’와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갱신함으로써 역사적 필연이자 정의가 되는 독재적 로고스의 백색 망토를 찢는 힘으로, 그 신성한 후광을 걷어치우는 반-로고스적 게발트로 출산시키는 노동의 시간이다. 그때 그 시간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탄생’으로, 로고스-질서에 대한 항구적 어긋남의 게발트로,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 생산된다. 그 시간, 그 게발트의 시간과 맞물려 있는 말, 그것이 바로 산파(Geburtshelferin)다. ‘새로운 사회’의 출산을 돕는 산파로서의 게발트, 게발트로서의 산파. 게발트가 그 자체로 하나의 ‘경제적 힘’이라는 마르크스의 말, 곧 마르크스주의적 정치경제학 비판의 하부토대로 인지되는 그 힘은 레비나스가 말하는 사회의 상부구조에서 다른 법을 발견하는 힘으로서의 윤리, 응답 및 파송의 윤리와 맞물리며 합수되는 중이다. 그때 산파로서의 게발트는 로고스-질서라는 후광의 경제를 절단하고 파쇄하는 반-로고스적 힘의 경제로 기립한다. 그 힘은 거듭 최후적이며 종지적(終止的)이다. 레비나스와 더불어 이사야의 혀로 응답했던 옥중의 본회퍼를 끝내 붙잡고 있었던 것은 저 ‘예레미아 45장’의 조종(弔鐘), 그러니까 신에 의한 파열이자 최종이었다.   

 

 

8

 

예레미아, 신의 말씀을 듣고 대신 말하는 예언자. 그가 말한다. “주님께서는 나더러, 그대 바룩에게 전하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나 주가 말한다.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고,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한다. 온 세상을 내가 이렇게 다스리거늘, 네가 이제 큰일을 찾고 있느냐? 그만 두어라. 이제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재앙을 내릴 터인데 너만은 내가 보호하여,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목숨만은 건져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예레미야」, 45: 4~5) 옥중의 본회퍼는 예레미아가 대신하는 심판/폭력의 말 속에, 그 로고스/신 안에 거주한다. 신의 그 말/법에 뿌리박은 본회퍼는 최후적이고 종지적인 힘 속에서 시작과 구성의 현장을 발견하려고 했다. 그는 1944년 7월 21일자 편지, 바라던 히틀러의 암살이 실패한 바로 다음 날의 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자기 자신의 수난이 아니라 신의 세계 내 수난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또한 겟세마네의 그리스도와 함께 깨어 있지. 그것이 신앙이고, ‘메타노이아[회심]’라고 생각하네. 그리고 이렇게 우리는 인간이 되고 그리스도인이 되지. (예레미아 45장을 참조하게.)”23) 예레미아 45장의 참조,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그것은 ‘부름 받은 자’가 된다는 것이므로 윤리의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곧 신의 삶을 ‘이 사람을 보라’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이 된다는 것이며, 의를 참칭하는 로고스-질서의 참람 속에서 진정한 로고스로, 반-로고스로 발의되고 발포되는 ‘현장’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 그것은 예레미아 45장을 참조한다는 것이다. 예언자/대언자 예레미아의 심판의 말 속에서 그 말로 말한다는 것이다. 그 말함은 현장을 증언함이자 현장으로 증언됨이다. 그래서 “취소를 초래하는 말함24)이다. 그 말함/증언이 윤리이다. 심판하는 윤리이며 내리치는 윤리이다. 정상적인 것으로 군림하는 로고스-질서의 규약의 한계, 백색 망토 두른 존재-신-론의 규범의 한계 혹은 임계를 항시적으로 현시하는 레비나스적 ‘예-외’이자 ‘비-상’이 윤리이다. 곧 본회퍼적 ‘한계 사건’, “정상적인 것과 대립되는 ‘한계 사건’”25)이 윤리이다. 이른바 ‘비정상의 정상화’로 진행되는 정상적인 것의 일반화를 거듭 끝내는 힘, 그것이 윤리이다. 그것이 예레미아 45장의 참조이다. 1944년 4월 30일자 편지의 한 대목에서 예레미아의 말은 시편의 문장들과 만난다. “그것[신이 성취하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자에게는 시편 58장 12절과 9장 20절 이하가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일세.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같이 예레미야서 45장 5절을 반복해서 읽지 않으면 안 되네.”26) 예시된 시편의 문장들은 ‘악’에 대한 신의 ‘보복’, ‘땅’과 그 땅 위의 ‘나라’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채워져 있다. 시편 안의 그런 최후적 힘과 관련해, 편지 안에는 들어있지 않지만 본회퍼의 시편 인용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통곡의 골짜기[Jammertal]”(「시편」, 84: 6)라는 한 구절이다.

 

“모든 골짜기는 메워질 것이다.” 눈물의 골짜기 속으로 내던져진 자들, 멸시와 천대받는 자들은 바로 세워질 것이다.27)

 

타인의 일그러지고 뒤틀어진 얼굴이 바로 세워질 것이다. ‘모든 골짜기는 메워질 것이다.’(「누가복음」, 3: 5) 궁극적인 것으로서의 이웃에의 도달 가능성, 곧 삶의 실재적 관계를 남김없이 침탈․합성․재편하는 정상적인 것의 광대한 폭과 깊이가, 로고스-질서의 그 심연이 메워질 것이다. 신성화된 진리관리의 체제가 설계하고 설치한 질곡, 신성한 후광 속에서 제작되고 있는 진리들의 굴착기가 파놓은 고통의 골짜기는 메워질 것이다. 그런 의지와 의도, 그런 뜻과 힘 속에서 본회퍼에 앞서, 본회퍼와 함께 ‘통곡의 골짜기’를 인용했던 이는 마르크스였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인민의 환상적 행복인 종교의 폐기는 바로 인민의 현실적 행복에 대한 요청이다. 인민의 [자기] 상황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라는 요청은, 이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포기하라는 요청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비판은 그 기원에서 본다면, 종교를 자신의 후광으로 삼고 있는 간난의 삶[Jammertales]에 대한 비판이다.”28) 신성한 후광, 종교적 환상은 인민을 고통의 골짜기에서 탈출할 수 없도록, 응답할 수 없도록 재갈물리고 중독시키는 아편이다. 아편의 그 몽롱함 속에서 유지되는 환상적 행복인 종교의 폐지, 즉 백색 망토 두른 로고스-질서의 폐절. 그것은 이웃으로의 도달 가능성 속에서 경험하고 쟁취하는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행복의 요청과 강제에 의해 수반되는 사건이다. 이사야가 듣고 응답하고 있는, 예레미아가 듣고 대신 말하고 있는, 의인(義人)에 의해 목격되고 있는 바로 그 현장에서, 다시 말해 신인의 심판으로서 기립하고 있는 윤리의 현장에서, 마르크스가 말하는 ‘종교에 대한 비판’은 신성한 후광의 체제가 굴착한 곳곳의 여기, 그 ‘간난신고’의 골짜기들로부터 내질러지고 있는 괴성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 된다. ‘비판(kritik)’이 된다. 파송되는 윤리적인 것과 유일하게 유물론적인 것이 그 비판 안에서 하나로 합수하면서 그 비판을 지탱하고 지속하는 힘으로 유통된다.

 


1) 엠마누엘 레비나스, 『탈출에 관해서』, 김동규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23쪽.

2) 디트리히 본회퍼, 『그리스도론』, 유석성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0, 13~14쪽.

3) 다르게 존재하는 반-로고스, 잔존하는 반-신의 게발트는 대의제의 매개력 속에서는 끝내 평가절하되고 마는 힘이었다. 그러나 그 힘은 ‘비판’적 힘 일반을 일괄 환수하고 몰수하는 대의제의 통합적 논변과 회집하는 매개력을 신성한 후광 속에 안착되고 연착륙된 것으로 문제시하는 동력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잔존/항존하는 반-로고스는 숙의와 갱신과 변혁이라는 하나의 목표로 수렴해가는 대의제의 단성 생식을 백색 망토 두른 로고스-질서 속으로 흡수되고 합성된 것으로 소송거는 힘이다. ‘유일하게 유물론적인 것’(마르크스)의 신학적․정치적 비판력에 대한 비평으로는 졸저, 『파루시아의 유물론 1』(자음과모음, 근간)에 실린 「마르크스의 그리스도」 및 「임재하는 유물론」을 참조.

4) 디트리히 본회퍼, 『그리스도론』, 15쪽.

5) 디트리히 본회퍼, 「형성의 윤리」, 『윤리학』, 손규태·이신건·오성현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0, 77쪽, 87쪽.

6) 칼 마르크스, 『자본론』 1권(下),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01, 501쪽, 각주 4번.

7) 디트리히 본회퍼, 『저항과 복종』, 519쪽.

8) 디트리히 본회퍼, 「형성의 윤리」, 109쪽.

9) 디트리히 본회퍼, 『본회퍼 전집』 14권, 430쪽(『저항과 복종』, 715쪽에서 재인용).

10) 디트리히 본회퍼, 「주제로서 “윤리적인 것”과 “그리스도교적인 것”」, 『윤리학』, 456쪽.

11) 조정환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joe.amelano, 2014. 5. 1.

12) 황호덕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hoduk.hwang, 2013. 12. 30

13) 디트리히 본회퍼, 『저항과 복종』, 손규태․정지련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0, 434쪽.

14) 디트리히 본회퍼, 『그리스도론』, 14쪽.

15) 디트리히 본회퍼, 『저항과 복종』, 710쪽.

16) 엠마누엘 레비나스, 「신과 존재-신-론」[1975~1976], 『신, 죽음 그리고 시간』, 김도형·문성원·손영창 옮김, 그린비, 2013, 284쪽.

17) 엠마누엘 레비나스, 「신과 존재-신-론」, 265쪽.

18) 엠마누엘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1981], 양명수 옮김, 다산글방, 2000, 119쪽.

19) 엠마누엘 레비나스, 「신과 존재-신-론」, 275쪽.

20) 엠마누엘 레비나스, 「신과 존재-신-론」, 302쪽.

21) 엠마누엘 레비나스, 「신과 존재-신-론」, 294쪽. 

22) 각각의 출처. ⅰ) 엠마누엘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 77~8쪽, ⅱ) 칼 마르크스, 『자본』(Ⅰ-2), 강신준 옮김, 길, 2008, 1007쪽. 김수행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폭력(暴力)은 낡은 사회가 새로운 사회를 잉태하고 있을 때에는 언제나 그 조산사(助産師: midwife)가 된다. 폭력 자체가 하나의 경제적 잠재력이다.”(『자본론』 Ⅰ-하, 1033쪽), ⅲ) 엠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97쪽.  

23) 디트리히 본회퍼, 『저항과 복종』, 690쪽.

24) 엠마누엘 레비나스, 「신과 존재-신-론」, 191쪽.

25) 디트리히 본회퍼, 「주제로서 “윤리적인 것”과 “그리스도교적인 것”」, 441쪽.

26) 디트리히 본회퍼, 『저항과 복종』, 515쪽.

27) 디트리히 본회퍼, 「궁극적인 것과 궁극 이전의 것」, 『윤리학』, 184쪽.

28) 칼 마르크스,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헤겔 법철학 비판』, 강유원 옮김, 이론과실천, 201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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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플 패키지 - 성공의 세 가지 유전자
에이미 추아.제드 러벤펠드 지음, 이영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공하길 원할 것이다. 한번뿐인 인생에서 남들보다 더 뛰어난 재능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거기서부터 오는 부와 명예로 남들보다 편안하게 사는것이 보통 사람들이 꿈꾸는 삶일 것이다. 여기에 대한 욕망이 성공에 대한 자기계발서를 수도 없이 많이 양산시켰다. 모든 자기계발서들이 나름대로 배울 점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성공을 위한 자기계발서들은 거의가 문화적 배경보다는 개인적인 배경에 초점을 맞춘다. 즉 개인의 목표의식과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강한 의지와 열망,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과정들을 강조하며 그러한 성공의 길을 갈 때 누구나가 보편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에 비하면 이 책 <트리플 팩키지>는 좀 엉뚱하다. 엉뚱하다라는 것은 기존의 성공에 대한 패러다임과 확연히 차별되며 개인적인 배경보다는 문화적인 배경에 대해서 강조하며 좀더 큰 시각으로 성공에 대한 것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저자들이 말하는 성공의 트리플 팩키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보다는 오히려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큼 특이하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는 중국계 미국인인 에이미 추와 그의 남편인 제드 러벤펠드이다. 특히 에이미 추는 이미 제국에 대해 분석한 책으로 알려진 작가이고 그의 남편 제드 러벤펠드 또한 <살인의 추억>으로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작가가 되었다. 이 책에서 분석하고 있는 성공의 트리플 팩키지는 다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에이미 추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저자들을 미국문화를 분석하여 미국에서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룹들이 미국의 마이너 그룹들임을 주목하여 그 성공요인이 부모들의 경제력이나 교육수준, 재능이나 제도등이 아니라 다른 요인이 있음을 제시하고 그것을 성공의 세가지 유전자 즉 트리플 팩키지라고 명명하였다. 그들이 말하는 미국에서 성공하는 마이너 그룹들이란 몰몬교도들, 쿠바계 망명자, 나이지리아계 미국인, 중국계, 유대계, 한국계들을 말한다.

 

저자들이 말하는 성공의 세가지 요인, 트리플 팩키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우월 콤플렉스로 우수한 집단과 전통과 문화에 속해 있다는 자부심을 말하고 둘째는 불안감이다. 주류 문화계에 들어가지 못한 아웃사이더로써 불안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종류의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결핍을 느끼게하여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의지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이 두 번째것은 성공을 위한 조건으로 저자들이 말하는 독특한 부분이다. 세 번째는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조절할수 있는 충동조절을 말한다. 이 세가지는 각각 떨어져 있을 때 성공의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가지가 모두 함께 있어서 작용할 때 특별한 성공에 대한 동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이 책 <트리플 팩키지>에서 말하는 저자들의 핵심 주장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공요인은 개인적으로 과도하게 성공에 대한 욕망의 차원에서만 분석한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성공이라는 정의도 이 세상이 말하는 바로 부와 명예에 대한 성공을 암묵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들이 말하는 성공 요인, 트리플 팩키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이다. 만약 정말 성공하고 싶다면 이 책은 도움이 될수 있으나 각자의 삶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정의하는 성공을 삶을 살기위해서는 오히려 이 책은 피해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국문화에서 미국적으로 분석한 방식이 진정한 성공의 요인인지는 각자의 깊게 숙고해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은 많은 이들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자존감을 키운다고 해서 성적이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만족감 때문에 덜 노력하게 되고, 그래서 성적이 나빠지는 경향이 있다. 아시아계 미국인 학생들은 미국의 모든 인종 집단 가운데 자존감이 가장 낮지만, 성적은 가장 좋다. 흑인 학생들은 자존감이 가장 높지만, 성적은 항상 좋지 않다. 미국 학생들의 전반적인 자존감은 세계적으로 높은 편이고, 성적은 세계적으로 낮은 편에 속한다. 한 연구에서, 똑똑하다는 말을 들은 학생들은 표준화된 검사에서 더 낮은 점수를 받았고, 몇 문제를 맞혔느냐는 질문에 거짓말을 했다. 반사회적 행동이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된다는 주장 역시 거짓으로 증명되었다. 연구자 니컬러스 에믈러는 인종차별주의자들과 범죄자들이 “내심으로는 자신에 대한 불만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한편, 심리학자들은 높은 자존감을 주입받으며 자란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우울증과 불안감, 자기애성 인격 장애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고 보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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