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팔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조영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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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소설읽기는 하나의 도전임에 틀림없다. 주로 한문장 한문장에 밀도있는 내용이 있는 인문서적을 주로 읽어서 그런지 문학이 주는 장황하고 세밀하고 긴 묘사는 때로는 지루하게 느낄때가 많았다. 그래서 소설을 끝까지 다 읽는 것은 나에게 매우 큰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였다. 문학이 주는 길고 깊은 심연을 부드럽게 건드리는 감동과 여운을 알기에 문학읽기는 나에게 큰 도전임에도 불구하고 익숙해 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을 보고 다시한번 세계문학에 도전해 보려고 마음먹고 잡은 책이 바로 일본 근대문학의 기수이자 근대문학의 형태를 확립한 나쓰메 소세키의 <한눈팔기>이다. 일본문학을 선택한 것은 최근에 일본여행을 다녀와서 일본의 오밀조밀하고 일본인들의 작고 친절한 매력에 빠졌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나라 일본의 문학과 일본성을 알고 싶어서 <한눈팔기>라는 책을 선택해서 완독하게 되었다.

 

일단 책을 읽어나가면서 작가가 가장 중점에 두었던 것은 주인공 겐조와 그와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심리묘사와 감정의 미묘한 변화를 메우 섬세하게 묘사하였다. 이 책의 가장 첫장면을 그의 양부인 시마다와 만나는 장면이다. 인물을 밝히지 않은채 그와 스쳐지나가면서 느끼는 미묘한 감정과 느낌과 인물의 묘사는 분명 이 인물이 소설전체를 이끌고 나갈 뭔가 문제의 인물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그리고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두려움을 주었다. 그리고 아내와의 시시하면서도 마음깊이 일어나는 사소한 감정까지도 분명히 포착하였고 주인공 rps조의 사회적 위치와 금전적 어려움에서 오는 감정의 변화까지도 상세히 포착하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작가 나쓰메 소세키. 일단 이름이 재밌다. 일본식 발음은 우리식으로 무엇가 욕설같은 느낌을 주어서 그런지 이 작가의 이름이 입에 유쾌하게 딱 달라붙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일본의 위대한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 근대문학의 형태를 확립한 대문호이자 지난 천년간 일본인이 가장 사랑한 작가’라는 극찬의 평가가 이 책 뒷표지에 적혀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소세키 이후에 단 한 사람의 소세키도 태어나지 않았다’라는 일본 한작가의 평가가 올려져 있다. 단지 소설가 한사람 이상의 역할을 해낸 것이 분명하였다. 작가는 메이지 시대의 인물이라고 한다. 메이지 시대가 시작될 때 태어나서 메이지 시대가 끝날때쯤 사망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본 근대를 살아간 온전한 인물이며 그 변화의 시기에 영국을 유학한 근대적 지식인으로서의 고민과 근대를 이끌어온 대표적인 인물이였다. 그가 쓴 많은 소설이 있지만 이 책 <한눈팔기>는 작가의 전기적 내용이며 그의 인물됨과 삶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자전적 소설이다. 그래서 이 책을 번역한 조영석 교수는 나쓰메 소세키를 읽기 위해서 <한눈팔기>는 입문서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먼저 <한눈팔기>를 읽으면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가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쓰메 소세키는 많은 일본문학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의 사후에도 뒷표지의 평가와 같이 많은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강상중 교수는 그의 책을 통해서 나쓰메 소세키를 소개하고 그의 소설들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그를 소개하고 있다. 강상중 교수가 이 작가에 대한 매우 좋은 평가를 내린 것이 또한 이 작가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된 계기가 되었다.

 

<한눈팔기>를 읽다보면 전체적으로 흐르는 어떤 소설적 분위기가 있다. 그것은 내성적이고 우울하고 회색적이고 어둡고 소심하고 쫀쫀한 느낌이 든다. 아마도 작가의 내면을 가장 잘 묘사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면서도 인물하나하나가 각각의 상황속에서 그것을 다르게 받아들이며 느끼는 외로움, 고독감, 이해받지 못하는 서글픔 등을 무덤덤하면서도 우울하면서도 매우 섬세하게 표현해가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은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하고 인간의 보편적 감정, 관계속에서 드러나는 섬세한 감정들을 가장 잘 포착한 작가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섬세한 감정의 묘사가 읽는이로 하여금 지겨움과 내성적 감상을 느끼게하는 이유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많은 자식들중 막내로 태어나 어쩔수 없이 짐으로 느껴진 주인공 겐조. 이 소설에서는 이러한 소설적 배경이 구체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물들 사이의 대화를 통해서 살짝 보여질 뿐이다. 그래서 대화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그것을 통해서 겐조의 가정적 배경을 포착해야 한다. 처음에는 이야기의 흐름이 잘 잡히지 않다가 중반을 지나면서 양부 시마다가 겐조를 찾아오고 아내와의 대화를 통해서 겐조의 이러한 가정적 배경이 드러났을때부터 이 소설은 주인공의 내면의 감정적 변화가 좀더 깊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주인공 겐조는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동일화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시마다라는 사람에게 억지로 입양되고 양부 시마다가 그의 부인과 이혼함으로 다시 가난한 자기 집으로 돌아오게되는 참으로 기가막힌 인생을 살게된다. 그런 상황속에서 겐조는 스스로 반듯하게 자라게 되었고 일본 최초로 영국 유학까지 다녀와서 나름대로 지식인로써의 자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수성가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그의 성격은 좀더 고지식하고 배움이 없는 사람들, 특히 아내를 무시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무시도 표면적으로 사람들을 깔보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으로써의 허위의식 속에 철저히 감추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

 

어쩌면 그는 늘 자기는 버려진 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항상 그 안에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이 잠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스스로 남들에게 의지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를 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랑받은 기억이 없고 늘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겐조는 아내에게도 자식에게도 남편과 아버지로써 사랑을 주지 못하는 인물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릴적 억눌린 기억과 억압된 감정으로 인한 상처였던 것이다. 받은 적도 없고 준적도 없는 사랑, 단지 그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을 뿐 겐조라는 인물 자체가 그렇게 나쁜 인물은 아니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지식인이라는 이면에 그러한 차가움과 냉정함을 스스로 감추며 더 외로운 존재로 전락했을 지도 모른다. 소설 전체에서 겐조에게는 지식인의 허울밑에 감추어진 고독과 외로움의 그림자가 깊게 달려붙어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겐조의 주변인물들과 관계중 가장 안타깝고 공감적이면서도 읽는내내 왜 그랬을까하는 심정을 갖게한 것은 그의 아내 오스미와의 관계였다. 서로에게 사랑이 없는 듯 있고, 있는 듯 없는 둘의 관계를 통해서 작가는 정밀한 감정과 의식의 묘사와 미묘한 부부사이의 갈등과 사랑과 애정의 관계를 탁월하게 결합해 놓았다. 부부관계가 다를바 없구나하고 공감을 느끼면서도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아내가 필요하고 말없이 자기를 도와주는 아내를 소중하게 느끼면서도 배움이 없다는 이유로 늘 무시하는 겐조. 그러나 아내가 임신으로 인해 가끔 생명이 위독해 질때면 지식인의 딱딱한 허위의식속에서 죽은 것 같았던 아내에 대한 그의 사랑을 마지못해 비쳐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속에서 지식인이라는 자부심 하나만으로 자신을 세우려고 하는 소심하고 못난 외골수적인 겐조의 모습이 살짝 나의 모습에 투영되어졌다.

 

그의 아내 오스미는 겐조처럼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남편을 귀찮게 하거나 눈치가 없는 무식한 스타일이 아니며 남편을 깊이 사랑하지는 못하지만 옆에서 조용히 남편을 돕는 전형적인 일본인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았을때는 그의 아내 오스미는 함께 살아갈 때 아무런 어려움을 주지 않는 좋은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겐조의 지식인으로써의 자존심과 허위의식을 알기에 말없이 그를 도와주면서도 남편의 무뚝뚝함과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고있지만 그것 또한 마음 깊이 감추며 사는 현명한 여자라고 생각한다. 겐조는 그녀의 배움없음을 무시하지만 그러한 무시하는 마음 역시도 참된 지식인으로써의 눈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겐조의 복잡다단한 어린시절의 아픔과 우울함과 그것을 지식인으로 감추려는 허위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어쨌든 나는 이 소설에서 가장 백미가 겐조와 아내 오스미의 대화의 섬세한 감정의 묘사라고 생각하며 이 소설에서 나오는 인물중에서 겐조의 아내 오스미가 가장 애정이 가는 인물이였다. 안스러움과 사랑의 마음의 공존하는 그런 인물이였다. 이 부부의 관계를 통해서 동양적인 부부관이 서로 비슷함을 느낄수 있었다.

 

그 외의 인물들과의 관계도 인간관과 인간관계의 세세한 점을 볼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아파서 항상 누워있으면서도 눈치없이 말이 많은 겐조의 누이. 그리고 그 누이를 조금도 돌보지 않는 철없는 매형. 시다미와 겐조와 결혼할 뻔 한 오누이. 등 많지 않은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주인공 겐조의 쓸쓸함이 더욱 부각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이 소설의 결말은 아무런 결론을 맺지 못하고 끝난다. 가장 궁금했던 아내 오스미와의 관계를 어떠했는지, 그리고 형과 누이는 어찌되었으며 시다마는 계속 나타났는지..등등 하지만 이 소설을 명확하게 끝맺지 않는다. 책장을 덮었을 때 쓸쓸함과 허전함이 내 마음속에 불고 지나갔다..

 

이 책은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자전적 소설이다. 작가의 삶을 보면 참 많은 삶의 무게를 지니고 살았던 인물이였음을 알수 있다. 작가는 바로 겐조였다. 그러한 삶의 무게를 통해서 그는 더욱 자신의 내면 깊이 들어갔으며 지식인이라는 실존을 가지고 살았으며 그토록 깊이 있게 인간의 내면을 간파하는 내적 통찰력을 가질 수 있었다. 비록 이 책이 이야기거리가 풍성하여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지 못하지만 작가가 주는 삶에 대한 인간에 대한 고민과 깊은 내성적 들여다봄은 읽는이로 하여금 우리네 인생과 삶이란 한바탕 불고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것이라는 쓸쓸한 삶의 교훈적 잔상을 남겨주기에 충분한 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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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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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별로 읽지 않는 나에게 박.민.규. 라는 소설가 이름 석자를 각인하게 된 책이 있다. 그것이 바로 삼미 슈퍼스타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소설이다. 2004년인가 올해의 책 10권을 한꺼번에 샀었는데 그중에 가장 말랑말랑한 책이라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이거 완전 중독증이 있었다. 책을 읽다가 몇번이나 웃었는지 모르겠다. 지하철에서 백화점에서 혼자 키득키득...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와~ 이렇게 경쾌하고 빠르게 흡입되는 문장도 있구나"라고 감탄하면서 정말 재밌게 읽었다. 가벼고 편하게 웃으면서 화장실에서도 읽을 수 있는 경쾌한 책이였다. 몆장을 넘길때 마다 책을 덮고 웃을 수 있도록 해준 유머러스한 친구 같은 책이었다. 가볍고 경쾌하게 읽을 수 있지만 결코 가볍지 않는 이래뵈도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이란다.^^

만연 꼴찌를 면치못해던 삼미 슈퍼스타즈를 통해서 평균이하의 인생의 삶을 말하는, 성공이 아니라 삶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탁월한 인생론이 들어 있는 유쾌한 책이다. 가볍지만 가볍지 않은 책, 오히려 이 소설의 가벼움이 엘리트 중심의 무겁고 진지한 우리사회의 가치관을 전복하고, 가벼움 자체가 문학적 전략인 매우 재밌고 여운이 많이 남는 소설이였다.

 

이 소설 이후 난 박민규 라는 이름 석자를 깊이 기억하게 되었다.
 
머리에 바람을 넣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 p 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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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살림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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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다보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잘 잊어버리게 된다. 특히 젊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젊었을 때는 사랑, 우정, 가족, 헌신 이러한 단어보다 성공, 경쟁, 실력, 학벌, 직위, 속도 이런 것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나도 내가 20대였을 때는 오직 꿈과 미래를 위해서 달려왔고 남들처럼 적당히 직장을 잡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별 어려움 없이 평범하게 사는 것은 젊음에 대한 죄라고 여기면서 스스로 평범함을 거부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행복이라는 것도 자아의 좁은 골방에 갇히는 행위이며 원대한 포부를 품으며 사는 것이 멋진 인생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내가 원하던 것을 얻게되고 삶을 뒤돌아보는 여유가 생기면서 진짜 인생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에게 진정한 행복과 내 영혼에 만족을 주는 것은 내가 젊었을때 추구해왔던 높은 이상이나 꿈, 비전, 성공, 성취 이런 것이 아니였다. 오히려 꿈을 위해 달려오면서 무시하거나 소홀히 했던 것들, 나의 성취를 위해 일정기간 내가 담보로 잡아놓았던 것들이 내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쪽으로 끊임없이 달려오면서 소홀히 했던 것들, 친구, 우정, 가족, 사랑, 여유 이런것들에서부터 진정한 만족이 온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렇다면 내가 20대였을 때는 그것을 몰랐을까? 나는 몰랐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20대에 지혜로운 멘토가 있어서 인생의 참된 가치와 영혼의 만족, 그리고 참된 인생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부모처럼 돌아봐주면서 지도해주는 선생이 있었으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변했을까 생각해본다. 아마도 지금보다 덜 바쁘고 진짜 중요한 일에 시간과 열정을 투자했을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나와 같이 자신의 성공과 꿈을 좇다가 과거 대학교때 은사였던 모리 선생님과 다시 재회하면서 그분으로부터 인생에서 진짜로 중요한 것이 무엇이며 참된 만족을 위해서 무엇에 시간을 투자해야 하면 가꾸어야 하는지 배우게 되는 이야기이다. 젊었을때 그렇게 자신에게 자상하게 대하고 인상적인 선생님이였던 모리 교수님을 졸업과 동시에 잊어버리고 스포츠 기자로 부와 명성을 모두 얻었던 미치는 어느날 우연히 방송에서 모리 선생님과 유명한 방송인 테드 코펠과의 인터뷰 장면을 보게 된다. 모리 선생님의 목소리를 듣자 마자 그는 자신이 젊었을때 모리 선생님이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사랑과 편안함을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모리 선생님이 죽어간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된다. 그리고 모리 선생님을 찾아 뵙던 순간 자신이 세속에 찌들려 모리 선생님이 보여주었던 영혼을 살찌우는 인간의 모습에서 멀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모리 선생님과 매주 화요일에 만나 한가지씩 주제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토론하면서 차츰 참된 삶이 무엇이고 진짜로 중요하고 평생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배우게 된다. 미치는 모리 선생님과 만나면서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이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한 것이 인생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였다는 것이다. 모리 선생님은 미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일들-자네가 하는 모든 작업-이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 테니까. 영혼과 관계된 것이 파고들 공간이 더 많이 마련해야 될지도 모르지"

 

모리 선생님의 이 말씀 가운데 미치가 그동안 잃어버렸던 모든 것이 담겨져 있었다. 미치는 성공에 대한 일에는 열심히 투자를 했지만 자신의 영혼과 관계된 일에는 전혀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지 않았다. 영혼에 관한 것이라면 감상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참된 행복을 가져다 주고 삶의 질을 높여주는 것이다. 미치는 모리와의 매주 화요일 열네번의 만남을 통해서 '영혼에 관한 것'이 무엇인지 배우기 시작한다.

 

나는 모리 선생님의 이 말에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성공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혼에 관한 것에 관심을 쏟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젊은 사람들이 듣기에는 지극히 감상적이고 실제적이지 않게 느끼기 때문에 그 만큼 소홀히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영혼이야 말로 가장 깊은 인간존재의 핵심이며, 세상이 주는 성공의 법칙과 부가 주는 만족과는 동떨어진 다른 법칙이 작용하는 실체이다. 따라서 사람은 외적인 성공 법칙을 따라서는 영혼의 만족을 느끼지 못하면 내적인 다른 법칙을 따라야지 참된 영혼의 만족과 행복감을 느낄수 있는 것이다.

 

모리 선생님을 미치와의 첫 번째 화요일 만남에서 영혼에 관한 것, 즉 영혼에 만족을 주는 첫 번째 법칙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랑을 나눠주는 법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야"

 

우리는 사랑을 주고 받는 것에 대해서 나약한 자들의 행위라고 생각한다. 내가 남들보다 강하고 권력과 지위가 있으면 항상 무엇을 주어야 하지 무엇을 받는 행위는 약자의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을 주고 그것을 잘 받는 것이야 말로 인간영혼의 만족을 위한 가장 큰 대전제인 것이다. 그래서 모리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랑이야 말로 유일하게 이성적인 행동이야"라고.

 

사랑은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랑을 잘 받을때 그 영혼은 건강하게 유지되고 다른 사람을 돌볼 수 있는 능력과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건강한 자아상과 타인과의 원만한 관계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거래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순수한 사랑의 주고 받음에 대해서는 낯설어 하고 어색해 한다. 참된 행복과 영혼의 만족을 위해서는 사랑을 주고 받는 것에 대해서 익숙해져야 한다. 이것이 모리 선생님이 가르쳐준 대전제이다.

 

그리고 모리 선생님은 우리 영혼의 만족과 건강을 위해서 두 번째 법칙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감정을 풀어놓으라는 것이다. 이것을 '감정이 우리를 꿰뚫고 지나가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모리 선생님은 사람들 안에 찾아오는 두려움, 외로움, 분노, 억울함 이러한 감정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감정들에 온전히 자신을 던지면 그래서 스스로 그 안에 빠져들도록 내버려두면, 그래서 온 몸이 쑥 빠져들어가 버리면, 그때는 온전하게 그 감정들을 경험할 수 있네. 고통이 뭔지 알게 되지. 사랑이 뭔지 알게 되네. 슬픔이 뭔지 알게 되네. 그럼 그때서야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좋아. 난 지금껏 그 감정을 충분히 경험했어. 이젠 그 감정을 너무도 잘 알아. 그럼 이젠 잠시 그 감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겠군'이라고 말이야"

 

참된 영혼의 만족을 위한 대전제를 위해서 모리 선생님은 자신안에 찾아오는 부정적인 감정을들 극복하려하거나 벗어나려고 하지 말고 그 감정이 자기를 온전히 꿰뚫고 지나가도록 허락하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그것을 벗어날 여유가 생긴다고 말이다.

 

사람은 이성보다 감성에 더 자극을 받고 더 큰 영향을 받게 되어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감정들에게 더욱 위축되고 소심해 지는 것이다. 상처나 우울, 분노나 억압 같은 감정들을 그대로 인정하고 품는 것을 배운다면 반드시 지나가게 되고 그러한 과정에서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여유가 생긴다는 것이다. 온몸으로 삶이 우리에게 주는 감정의 폭풍들을 껴안을때 역설적으로 그것을 극복할 여유가 생긴다는 것이다.

 

모리 선생님이 가르쳐준 영혼의 만족과 행복을 위한 세 번째 법칙은 죽음을 분명히 의식하라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접근하면 삶에 대해서 더욱 진지하고 적극적으로 살게된다는 것이다. 모리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래, 하지만 죽음에 대해 좀더 긍정적으로 접근해보자구. 죽으리란 걸 안다면, 언제든 죽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둘 수 있네. 그게 더 나아. 그렇게 되면, 사는 동안 자기 삶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살 수 있거든."

 

죽음은 인생의 종말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주는 참의미의 생산자이다. 죽음을 분명히 의식하면 두려움이나 절망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에 더욱 진지하게 임하는 것이다. 죽음은 삶을 더욱 의미 있게하고 헛된것이 아니라 참된 것에 시간을 투자하게 하는 촉매제인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참된 인생의 행복이란 영혼에 관한 것에 투자하는 것임을 배웠다. 그것은 세가지 인데 첫째는 사랑을 주고 받는 것. 둘째는 감정이 온전히 꿰뚫고 지나가게 하는 것. 그리고 셋째는 순간 순간 죽음을 의식하는 것이다. 이 세가지 교훈을 통해서 참으로 짧은 인생 가운데 진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되고 그것에 시간을 투자하는 지혜가 생긴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서 나는 참으로 지혜로운 멘토의 조언을 얻은 것 같다. 어떻게 무엇을 위해서 나의 시간과 열정을 투자해야 할지 배울 수 있었다. 이후로는 좀더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게 되리라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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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 정진홍의 900킬로미터
정진홍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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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이라는 이름은 어느 블로거의 리뷰를 통해서 처음으로 알았다. <사람공부>라는 책인데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그 책을 보았을 때 특별한 인상을 받을 수 없었다. 그 책을 대충 훑어보니 현시대 사람들에게 감동과 도전을 줄만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서 엮어놓은 것 같았다. 문학동네에서 이 책의 독서 모니터요원으로 선정되어 받아 읽기 시작했다. 첫장부터 문장이 주는 감동과 내공이 만만치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 이런 것을 인문학이고, 인문적이라고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어쩜 산티아고 길을 걷는 과정을 통해서 이다지도 풍부한 문장을 풀어낼 수 있는지 감동과 감탄을 연발하며 읽어내려갔다. 표지 사진의 인물을 보고 인터넷을 찾아서 정진홍 작가의 외모를 보니 탄탄하고 단단한 덩치와 깊은 목소리가 뭔가 울림을 주는듯했다. 새로운 읽어야할 인물 한사람을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내용은 간단하다. 저자가 47일동안 순례자의 길이라고 일컬어지는 산티아고의 길을 900킬로미터는 걸으면서 그가 보고 느꼈던 감상을 적어내려간 기록이다. 그 기록이 단지 자신의 경험을 단순하게 풀어낸 것이 아니라 그의 깊은 인문적 내공이 어울어져 멋진 향기가 되어 깊고도 긴 여운을 마음속 깊이 번지게 하는 인문적 기행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미 중년의 안정을 누리고 있었던 사람이였다. 교수로 유명한 신문의 정기 기고자로 또 알려진 강연자로 그의 인생은 충분히 안정을 누릴 수 있는 기반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의 삶의 모토가 안주는 안락사이다인데 그의 모토를 따라서 그는 결단을 내렸다. 무엇이 그렇게 자신을 그 길을 걷도록 내어 몰았는지 정확하게 모르겠으나 그는 언제나 구도자로서 무엇가 진실을 찾고자 하는 갈증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글을 읽어보면 그는 감성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책에서는 자세히 풀어내지 않지만 자신의 삶의 응어리가 자신을 지금까지 달리게 한 원동력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응어리를 아직 다 풀어내지 못해 몸부림치는 삶의 순례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한걸음 한걸음 걸으면서 그는 그때그때의 감상을 자세히 적어내려간다. 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상과 생각의 흐름을 포착하여 그의 인문적 지식과 어울어져 훌륭한 감동적 문장을 만들어간다. 그는 산티아고를 걷는 길을 어느 누구를 위함도 아닌, 사회의 인정받기 위함도 아닌 오직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사회를 살아가면서 덕지덕지 붙게되는 여러 가지 명함들, 그것들을 다 내려놓고 날것으로써의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기 위해 그는 길을 떠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걸으면서 울기도하고, 웃기도 하고, 사람들을 만나 싸우기도 하면서 그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진짜 날것으로써의 자신을 직면하였다. 그렇다 진짜 잘 살기위해서는 내려놓고 떠나야 한다. 인간은 많이 채워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많이 비워지지 않아서 참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길을 걷는다는 것, 그것도 홀로 오랫동안 걷는다는 것은 분명히 순례요 구도의 행위이며 그 행위를 통해서 삶의 신실을 자신의 진실을 깊이 대면하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은 개인적인 에세이가 아니라 어떤 구도자의 종교적 행위같은 느낌이 들었다. 비를 맞고 홀로 자면서 길에서 홀로 하늘과 별을 벗삼아 걸으면서 자신을 가다듬는 구도자의 행위같은거 말이다. 나도 그냥 걷고 싶어졌다. 저자가 걸었던 산티아고의 길을 걷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현실에 묶어두고 있는 모든 짐을 벗어버리고 홀로 저자와 같은 길을 떠날 때 내안에 꿈틀거리는 참나의 모습과 마주치고 싶은 갈증말이다. 오래전부터 항상 내가 누구인지 궁금했고 그것을 알기 위해 분투해왔다. 왜냐하면 참으로 나를 알 때 참으로 나의 삶을 살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떠나지 않고서는 오히려 참나를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무수히도 많이 나를 엮어놓고 있는 현실의 날줄과 씨줄앞에 나의 모습은 감추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점점더 산티아고의 길을 걷고 싶은 충동이 커져갔다. 물론 당장은 아니더라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나도 꼭 그 길을 걸으리라 다짐했다. 사람이 극한에 내몰릴 때 비본질적인 모든 것들이 벗어지고 가장 기본적이면서 본질적인 부분이 보이듯이 자연으로 나를 몰아낼 때 그 자연은 나를 둘러싼 비본질적인 것들은 걷어내고 가장 본질적인 것들만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저자가 눈물을 쏟으며 자신의 짐들을 내려놓았듯이 나 또한 작가와 함께 무언가의 짐이 내려지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작가가 어머니, 아니 엄마의 퍽퍽했던 삶을 떠올리며 엄마엄마하고 울면서 길을 걸었다는 그 대목에서 나 또한 돌아가신 어머니, 아니 엄마의 삶이 떠올랐고 엄마의 퍽퍽했던 삶, 자식을 위해 희생했던 삶,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버팀목이 되었던 나의 엄마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저자가 혼자서 히죽이죽 웃을 때 나도 히죽이죽 웃으며 혼자말을 하기도 했다. 저자의 문장에 진실의 힘이 있었고 함께 공명할 수 있도록하는 어떤 경건한 힘마저 느꼈다. 책을 읽으면서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나의 모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지속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잠깐동안이라도 떠나는 것 가장 필요한 짐만을 싸고 떠나는 것, 그리고 홀로 구도의 걸음을 내딛으면서 가장 자연스러운 나와 공명하며 참된 진실에 근접하는 것, 이것이 이 책에 나에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길을 걸으면서 그것을 구도적인 행위로 승화시킨 것 같이 저자도 걷는다는 매우 단순하고 평범한 행위를 통해서 인생과 삶과 자아를 밑바닥에서부터 진실을 건져내는 구도의 행위로 승화시킨 것 같았다.

 

분명 받은 감동이 크고 할말이 많은데 자꾸만 안으로 맴돈다. 정리가 되어서 글로 나오지 않는 느낌이다. 가슴으로 읽어서일까, 내면으로 받아서일까, 머리가 움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이 움직여져 깊고 깊은 여운으로 나의 가장 깊은 곳으로 자리잡은 것 같다. 진정한 울림은 말이 아니라 가슴으로 전해지는 법. 비록 이 책에서 받은 깊은 감동을 다 전하지 못했지만 그가 준 감동이 작은 여운으로 퍼져갔으면 좋겠다. 올해 읽을 책중에 가장 감동있고 내면을 충만하게 하는 그리고 깊고 울림있는 문장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책이였던 것 같다. 자신의 내면에 충실히 따라가는 저자의 깊은 인문적 성향, 그리고 깊은 인문적 지식, 그리고 내면의 울림을 깊고 풍부하게 전해주는 문학적 향기가 모두 갖추어진 멋진 책이라고 생각한다. 정진홍이라는 이름을 다시 찾아봐야 겠다.

 

그 길은 진정으로 나 되기 위해 걷는 길이다. 그러니 빨리 걷는 길이기보다 느리게 걷는 길이고 여럿이 더불어 걷는 길이기보다 홀로 고독하게 걷는 길이다. 물론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고독하지만 쓸쓸하지 않게 말이다. 그래서 걸을수록 비워지고 걸을수록 채워지는 묘한 길이다.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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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모노로그 2012-11-29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조건 추천 ~ ^^

불꽃나무 2012-11-29 18:37   좋아요 0 | URL
무조건 땡큐 ㅋㅋ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소설을 잘 읽지 않는 편이다. 소설을 읽다가 중간에 덮어버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기 때문이다. 기억나는 몇권은...<책도둑>이라는 책이였다. 내용이나 형식이 모두 내가 흥미를 가질만한 것이였고 평가도 매우 좋길래 1,2권을 사서 읽었다. 읽다가 중간에 덮어버렸다. 결국 이 소설이 유명한 것은 마케팅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ㅂ’ 작가의 신간도 한권읽으려고 구매했다. 결국 읽다가 중간에 덮어버렸다. 이렇게 소설은 그다지 나에게 흥미있는 장르는 아닌것 같다. 문학이라는 것에 대해 너무나 무지해서 그럴것 같아서 문학에 관한 책을 읽으려고 시도한 적도 여러번 있었다. 결국 읽다가 보면 단 한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을 이렇게 시시콜콜하게 써내려가다니...하고 생각하다가 덮어버리기 일쑤였다. 이번에 이 소설 <눈먼자들의 도시>는 정말 흥미가 가는 책이였다. 영화로도 나왔고 또 평가가 좋았고 일단 흥미진진한 내용일것 같아서 이 책을 구매하고 몇 개월뒤, 즉 2틀전부터 보기 시작했다. 소재가 독창적이고 깔끔한 구성으로 인해 전체적인 내용은 한가지 틀로 나에게 입력되었다. 이 책도 읽다가 그래도 거의 다 읽어서 결국은 덮어버렸다. 이 책이 별로라기 보다는 하나의 가공의 이야기에 시간을 투자한다는 것이 아까웠다. 결말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긴 했으나 끝까지 읽고 싶은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읽은 소설중에는 흥미있는 것이였다.

 

한남자가 차를 타고가다가 갑자기 눈이 멀어버리는 것으로부터 이 소설을 시작된다. 그 사람을 집에까지 바래다준 사람도 눈이 멀고 그의 아내도 눈이 멀고 그를 치료해준 안과의사도 눈이 먼다. 결국 전염성이 강한 이 병은 삽시간에 모든 도시의 사람들의 눈을 멀게할 가공할 병원균이라고 판단한 당국은 급기야 눈먼 사람들과 이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접촉한 사람들을 보균자로 여기고 격리수용한다. 이곳에 격리 수용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책의 내용의 대부분이다. 안과의사와 그의 아내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눈먼 사람들의 사회를 보여준다. 이곳에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권에 대한 투쟁이 벌어지고 식량을 무기고 여자들을 원하는 악이 존재하기도 한다. 살인과 약탈, 강간과 욕정이 뒤섞여 인간집단의 가장 원시적인 모습을 눈먼 자들의 사회를 통해서 보여준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몇몇의 캐릭터와 이야기 구조, 그리고 플롯을 전개하기 위한 소설적 장치들의 분명하게 보였다. 한눈에 이 소설의 구조가 들어왔다. 그 만큼 작가의 치밀한 계획아래 이 소설이 구성되었다고 보여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너무나 분명한 소설의 구조 때문에 오히려 이야기의 힘이 약화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책의 마지막에 이 소설에 대한 해설이 실려있다. 해설자는 이 소설을 가르켜 80년대 드어 역사와 환상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환상역사소설’이라는 새로운 문학장르를 개척했다고 추켜세운다. 그리고 눈먼자들의 사회를 인간의 절박함을 극단적으로 밀여붙인 소설이라 말하면서 포르투갈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되살려내었다고 말한다. 솔직히 말해서 문학에 문회한인 나는 이러한 찬사들이 이상하게 전부 하나의 상징으로 과도하게 해석한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을 소설일 뿐이고 하나의 스토리로써의 역할을 하지 이것이 그렇게 한 사회의 역사성과 정체성 회복을 위한 노력이라고 까지 말하기에는 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끝까지 읽지도 않고 이 소설에 대한 리뷰를 쓰는 것은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딱 여기까지가 내가 정직하게 느낀바이다. 나중에 다시 이 소설을 끝까지 읽어보겠지만 소설에 대한 나의 생각은 별로 바뀌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이 소설을 읽을때 마다 상상력이 자극된다는 것이다. 문자를 통해서 분명하게 하나의 상(想)이 생긴다는 것이다. 보일듯 말듯한 상(想)이 머리에 생기고 이것을 통해서 영화에서는 어떻게 보여지는 궁금해 진다는 것이다. 소설의 기능중에 내가 경험한 것은 상상력을 자극시킨다는 것이다. 아마 소설을 통해서 우리안에 경험한 것들이 모여서 하나의 파노라마를 만들고 그것에 대한 인상이 길게 남아있기 때문에 소설을 읽고 가장 길게 여운이 남지 않는가 한다.

 

<눈먼자들의 도시>는 나에게 음침하고 우울한 상(想)을 길게 남겨준, 상상력을 자극한 소설로 기억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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