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발
반디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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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습한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고발]

 

'반디'라는 필명의 작가가 목숨을 걸고 반출시킨 원고를 마주대하게 되었다.

1950년생이라니 반세기 넘도록 북한의 실상을 생생하게 겪었을 터이다.

[고발] 안에는 7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문학성이 드러나는 짤막한 이야기들을 접하자, 문학적 수사에 대한 감동 이전에 북한이라는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적' 상황들이 넘실대며 밀려들어온다.

바로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미사일로 도발하는 김정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대신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회억들은 확실히 드러나 있다.

거의 신적으로 우상화 되어 있는 그들 때문에 고통받고 억눌려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겪는 생활고와  감정적인 혼란들이 여과없이 적혀 있다.

분단 이후 다른 길을 걸어온 남과 북의 현실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놀랍고, 계급 때문에 여태껏 큰소리 한 번 못내고 모든 것을 감내해야만 하는 인민들-'그들'만의 계급논리에 희생된 사람들이 그저 안쓰럽다.

 

제일 처음 실린 단편 <탈출기>는 계급으로 인해 자신의 아이까지 희생될까 두려워 임산부임에도 마냥 행복해하지 못하는 여인의 처절한 고뇌를 담고 있다.

나레이터는 북한을 탈출하면서 친구에게 편지를 남기는 남편이다. 편지에는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바람 피우는 게 아닌가 의심했던 남편이 아내의 속사정을 알게 되면서 북한을 탈출하는 수밖에 없겠다는 결심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  뜨거웠다 차가워지곤 하는 남편의 감정의 소용돌이에 함께 휘말려 온몸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가도 어깨를 축 늘어뜨리게 되기도 하면서 짧은 이야기 하나에 온전하게 공감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땅에 생명을 낳을 때 그 생명이 복되기를 바라서이지 한뉘를 가시밭을 헤쳐야 할 생명임을 안다면 그런 생명을 낳을 어머니가 이 세상 어디에 있으랴!-40

 

그 어떤 성실과 근면으로써도 삶을 뿌리내릴 수 없는 기만과 허위와 학정과 굴욕의 이 땅에서의 탈출을 말이네. -46

 

<지척만리>는 조롱 속 새처럼 인간에게 길들여진 자신의 모습을 자조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모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여행증을 발급받아 가려했지만 그 지방에 '일 호 행사'가 예견되어 있다는 이유로 여행이 제한되었다고 했다. 불법을 무릅쓰고 기차에 몸을 실어 어찌어찌 고향에 가닿았지만 바로 코앞에서 초소 보안에 걸려 발길을 돌려야 했다. 자신을, 지척도 천리 밖으로 살아야 하는 조롱 속의 짐승이라 말하며 슬픔을 삭여내는 남자의 깊은 슬픔에 가슴이 찌르르한다.

 

'모친 사망'

곡성은 울리지 않았다. 다만 속으로 흐르는, 눈물보다 몇 곱절 더 진하고 독한 그 무엇에 전보장을 맞쥔 두 사람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을 뿐이었다. -145

 

사람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곳일수록 연극이 많아지기 마련이라는 처절한 외침이 [고발] 속 단편들에 속속들이 배어 있다.

배급을 못 타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애도의 눈물을 흘리고, 김일성에 대한 조의를 표하기 위해 꽃을 꺾으려고 해마다 독사에게 물려 죽은 어린아이의 어머니가 애도의 눈물을 흘리는 곳.

 

 

 

백성들을 이렇게 지어낸 눈물까지 흘릴 줄 아는 명배우들로 만들어버린 이 현실이 무섭지도 않은가 말입니다.

백성들이 죽지 못해 흘리는 눈물을 두고 충성이요 일심단결이요 하고 외쳐대는 사람들은요? 그들은 어리석지 않은가요? 연극무대란 막이 꼭 내려지기 마련이라는 걸 아버지는 아셔야 합니다.-209

 

 

 

 

도저히 같은 하늘 아래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일들의 기록을 읽었다.

그저 지금 저 음습한 무대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뭔가?

정도로밖에 인식할 수 없을 만큼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이다.

정말, 무대 위의 일이었으면, 하고 애원하고 싶은 이야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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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닷컴
소네 케이스케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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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쓰레기장같은 세상에서 쓰레기처럼 살고 있지는 않나요?[ [암살자닷컴]

 

'성공률 100퍼센트, 마감 기한 보장, 맞춤형 살인 제공'

'암살자닷컴'의 캐치프레이즈다.

무슨 상품을 파는 광고 같은 문구에 눈길을 주지만 이내 '살인'이라는 단어에서 멈칫하는 게 일반적인 사람들의 심리일 것이다.

에이, 아무리~

현실에서는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은 일이 그래도 암암리에 일어나고 있는 모양인지, 우리나라에서도 유해진 주연의 코믹물로도 영화화 되었던 적이 있을 만큼 청부암살은 흔한 소재가 되고 말았다.

암살을 청탁하는 사람이 있는 것만도 섬뜩한 일인데 실제로 그 일을 받아 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더 이해 불가다.

하지만, 입장을 바꾸어 청부살인업자의 위치에 서 보면 세상은 한결 달리 보일지도 모르겠다.

누구라도 입찰에 성공하면 살인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곳, '암살자닷컴'

이런 사이트가 존재하는 것을 받아들이며 이 책을 읽는 순간, 이 세상에는 양심의 거리낌 없이 죽음을 사고파는 일이 횡행한다는 것을 시인하며 또 다른 사실을 같이 받아들여야 한다.

이 세상이 쓰레기장이라는 사실을.

 

어른들의 세계일 뿐이라며 다소 안심하고 이 책을 읽으면 안된다 .

열 살 짜리 어린애에게도 얄팍한 어른들의 위장은 곧 들통나고 말며, 히키코모리 고등학생의 경우에는 언제든 살인청부업의 세계로 향하는 길이 열려 있다.

 

모두 네 개의 단편이 실려 있지만 마지막 에필로그에선 네 개의 단편이 하나로 모아지며 충격적인 결말을 선사한다.

아들의 사립학교 등록금 마련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부업으로 '암살자닷컴'에 발을 들인 형사, 더럽고 별볼일 없는 노숙자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살해하는 연쇄살인마, 남편이 실직한 후 그저 행복한 한 끼 외식, 단란한 가정의 웃음을 지켜보려고 청부살인업계의 틈새를 노려 아르바이트하는 주부, 킬러계의 레전드였지만 한 여인 때문에 처음으로 흔들리는 한 남자 등등.

살인자와 희생자의 경계가 모호하게 이들의 관계가 물고 물리는 가운데 소네 게이스케식 화법은 빛을 발한다.

 

아주 얌전해진 남자는 야구방망이를 지팡이 삼아 돌아갔다. 그게 그가 말하던 방망이를 쓰는 또 다른 방법이라면 굳이 배워야 할 만한 사용법은 아니다. -246

 

자칼은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위패가 가메키치의 가슴에 꼭 안겨 있는 걸 확인한 뒤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 별이 가득한 밤이었다. 길가에 보이는 연못으로 개울이 졸졸 흘러들어갔고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렸다. -195

 

쓰레기장 같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잔인하고도 거친 일들이 한 두 마디 문장으로 깔끔하게 정리된다. 게다가 쓸쓸함을 배가시키는 정경묘사까지 이어지면 그걸 읽는 동안의 마음은 한없이 싱숭생숭해진다.

 

그저 재미삼아 읽기 시작하지만 원하는 죽음을 즉시 배송해준다는, 다시 생각해보면 너무나 반인륜적이라 잠시 아득해지기조차 하는 이 이야기가 또다른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이 쓰레기장같은 세상에서 쓰레기처럼 살고 있지는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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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의 철학자들
레이먼드 D. 보이스버트 & 리사 헬트 지음, 마도경 옮김 / 21세기북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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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가 바라본 '먹는다는 것' [식탁 위의 철학자들]

 

인간의 삶에 꼭 필요한 '의식주' 중에서 '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지만, '식'의 중요성만큼은 모두 똑같이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건강을 위한 다이어트에 도전 중이므로 '식'에 관해 생각해 보는 것이 그다지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식'을 좀 더 철학적인 관점에서 보는 특이한 경험을 할 수 있었기에 뜻깊었다.

먹고 배출하는 것만으로 '식'을 정의하는 단순한 인식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우리가 매일 삼시 세끼 마주대하는 식탁이 재미없다.

식탁 위에서 우리는 먹는다는 행위를 하며 배고플 때 배를 채우는 것 뿐만 아니라 요리에 대한 비평을 하기도 하고 음식이 주는 추억에 젖기도 하며 행복한 기분이나 우울한 기분을 동시에 투영시키기도 한다.

 

길고도 단조로운 서술의 대명사로 읽기를 기피해왔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는 예의 그 유명한 '마들렌'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 때때로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킨다.

잊을 만 하면 불쑥 책 속에서 튀어나와 이젠 읽을 때가 되었지, 하는 통에 언젠가는 그 두꺼운 책을 읽을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하게 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에서 주인공은 옛날에 즐겨 먹었던 조개 모양의 마들렌 과자의 맛과 냄새를 경험하는 순간 과거 일들이 생각나고, 그 기억은 잊고 살았던 또 다른 추억들을 불러일으킨다. 이 작품에서 마들렌은 주인공의 과거, 그러니까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주는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169

 

음식과 예술을 구분해야 한다는 한 철학자는 그러니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예술이지만, 마들렌 자체는 예술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 책은 '어떻게 먹어야 하나?' 라는 문제에 대한 탐구가 진지한 철학적 관심을 쏟을 가치가 있는 프로젝트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철학'의 의미와 '음식'의 의미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프로젝트의 틀을 제시하고 음식을 둘러싼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는 데 철학자들을 초대한다.

 

철학은 오래 전부터 합리성의 투사라는 역할을 해왔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이 책은 '도대체 누가 합리성이 제일이라고 했는가?"라고 묻는다. 양자택일식 이분법을 지양하는 것이다.

적어도 식탁에 앉아 있는 철학자들은 세상과 동떨어져 있으면서 인위적이고, 강요받은 합리성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반대로 그들은 적극적으로 상황에 개입하는 참가자들이며, 그들의 상호작용에는 당연히 감사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음식, 먹는다는 것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어려우리라 생각했지만 뒷부분으로 갈수록 현실과 결합되어 있는 경험들이 소개되고 마켓에서, 식탁을 차리면서 우리가 하는 고민들이 툭툭 튀어나오기에 보다 유쾌하게 읽을 수 있었다.

먹는다는 것에 대한 사유를 한 번쯤 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선택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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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했으니까, 오늘도 야식 - 힘든 하루를 끝내고, 내가 나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 영혼을 달래는 혼밥 야식 만화
이시야마 아즈사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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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드러누워 느긋하게 즐겨볼까 [수고했으니까 오늘도 야식]

 

 

 

 

하룻동안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니다 집에 와서 모처럼 맞는 휴식.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푸근하게 자신을 감싸주는 음식일 것이다.

 

하루종일 집에 있으면서 휴식을 취하는 자가 야식까지 즐기는 것은 너무 과한 것일까.

덕분에 건강에 이상 신호가 와서 지금은 급! 다이어트 중인지라

이런 먹는 것과 관련된 책을 보는 것은 금기시되고 있지만

그래도 자꾸 눈길이 가고 땡기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냥  한밤중에 배가 꼬로록 소리를 내더라도 드러누워 눈으로 맛보면서 그 순간을 즐기면 어떨까.

예전에는 기어이 먹고 나서 후회를 할지언정 기쁜 마음으로 야식을 준비하며 먹었건만...

그 때 기분을 되새김질 하기도 하고, 일본 야식의 진수를 새로이 눈으로 즐기면서

이 책을 독파! 해냈다.

끝내 밤중에 일어나 야식을 만들어 먹겠다고 설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다양한 야식 메뉴들이 쫙 깔려 있다.

한 끼 식사, 간단한 반찬, 달달한 음식, 여러가지 야식 등이 펼쳐지기에

한 장 한 장 넘기는 매 순간이 고비였다고 고백하고 싶다.

 

실제로 만들어 먹으려면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고

냉장고에서 재료를 찾아야 하며 다듬고 손질하기를 몇 십 분.

그 이후에 본격적인 요리를 하며 또 기다린 다음에야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야식이건만

책으로는 책 한 장 넘기는 사이에 뚝딱 완성이다.

 

일러스트레이터인 저자는 신기하게도 요리 과정을 단 몇 개 이내로 압축해서 짧은 시간에 조리해낸다.

심혈을 기울인 맛! 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신속하고 정확하게 뚝딱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한다.

요리가 뚝딱 나올 때마다 우와~ 하는 것은,

바로 그 부분에서다. ^^

 

 

 

오차즈케라 불리는 찻물밥.

그냥 물에 밥 말아 먹는 것뿐인 메뉴 같아 보였는데,

그들은 이사하게도 이 메뉴를 좋아한다.

우리네 누룽지, 혹은 숭늉과도 같은 정서를 첫물밥에 투영하고 있는 것일까.

전통적 메뉴인 낫토, 찻물밥, 매실장아찌 같은 것들은 그들의 음식 이야기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듯 싶다.

'양하' 라는 다소 낯선 음식 재료의 맛이 궁금해진다.

집에서 키워 싹을 잘라내어 바로 음식에 사용하기도 한다는데...

아삭아삭하니 맛있을 것 같다.

 

 

 

무엇을 튀겨도 '튀김'은 맛있다는 사실.

바삭한 식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그림을 보고 있으니 칼로리에 대한 걱정보다는 일차적 반응 속도가 더 빠르다. 입에 가득 고이는 침. 어쩔 것이여~~

 

가족이 모여 운동회 때 점심 나눠 먹는 모습을 보니 예전 기억이 떠오른다.

요즘 운동회는 오전만 하고 학교에서 급식을 먹는다.

정겨운 풍경이 사라진 것 같다.

어쨌든, 야식에서 운동회까지 휘리릭 건너뛰다니.

야식의 메뉴는 시공을 초월한다.

 

 

 

이건 또 처음 보는 요리인데

표고버섯의 즙도 살리고

생소하지만 왠지 잘 어울릴 것 같은 참치마요라~~

꼭 한 번 이 레시피대로 만들어 먹어보고 싶다.

칼로리 걱정 앞에 잠시 멈칫, 하게 될 것 같지만 말이다.

 

색다른 경험이 녹아들어 있는 창의적인 레시피부터 일본 전통 방식의 메뉴들까지

여러 가지 조합의 야식 메뉴들을 잘 구경했다.

수고했으니까 오늘도 야식~

마음이 푸근해지고 웃음이 은근히 피어나는 만화다.

젓가락을 같이 들고 '한 입만~'을 외쳐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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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 온 더 트레인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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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여자, 조각난 기억 [걸 온 더 트레인]

 

 

 

 

걸 온 더 트레인!!

2017년 3월 9일 개봉 예정이네요.

주인공들 캐스팅이 궁금한 분들을 위해~

 

 

 

에밀리 블런트               메건 역                     스캇 역                 애나 역                톰 역

레이철 역

 

 

일단 이 이야기에는 세 명의 여자가 나옵니다.

중요 인물들이죠.

 

책에서는 세 명의 여자들이 번갈아 나레이션을 합니다.

레이철이 가장 먼저 나오는데요,

레이철의 이야기가 가장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톰과의 이혼으로 알코올 의존자가 된 레이첼은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칸 통근 열차에 앉아 창 밖 풍경을 보는 게 낙이죠.

 

 

나는 창에 머리를 기댄 체, 레일 위로 카메라를 움직여 찍은 영화장면처럼 휙휙 지나가는 집들을 구경한다. 나 같은 방식으로 그 집들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집주인들마저도 이런 식으로 자기 집을 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하루에 두 번 아주 잠깐 그들의 삶을 엿본다. -12

 


 레이철은 그렇게 통근 열차에서 완벽한 커플, 메건 부부의 삶을 관찰하게 됩니다. 독자도 레이철을 따라 숨죽여 가며 그들의 삶을 훔쳐보게 되죠.
  
 어느 날 메건이 실종되고, 그녀의 남편 스콧이 용의선상에 오르지만
 톰의 새로운 부인 애나는 사건의 용의자로 레이첼을 지목합니다.
  
 메건이 실종되던 날 레이철이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기 때문이죠.
 알콜 때문에 부분부분 조각난 기억.

억울하게 살인자의 누명을 쓰지 않으려면 레이철은그날의 진실을 기억해 내야 합니다.

 

 
(레이철)겁이 나는데 뭐가 무서운 건지 확실히 알 수가 없고, 그래서 더 무섭다.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기나 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 -64

 

레이철의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는 공포가 대신 자리잡게 되지만 레이철은 그 공포를 이겨내야만 합니다.

은연 중에 레이철을 응원하게 되는군요.

 

(메건)이 집은 언제 이렇게 어이없이 작아졌지? 내 인생은 언제 이렇게 따분해졌지?  이게 정말 내가 원했던 건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몇 달 전만 해도 기분이 괜찮았는데 지금은 생각할 수 없고 잠도 잘 수 없고 그림도 그릴 수 없고 그저 달아나고 싶은 충동만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을 뿐이다. '그냥 사라져 버려.'

내가 미쳐가고 있는 것 같다. -235 ,

 

(애나)길 건너편에 서서 우리 집을 바라보고 있는 레이철이 보였다. 그녀는 그렇게 잠깐 있다가 기차역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침대에 앉아 분노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손톱으로 손바닥을 깊숙이 찔러댄다.나는 복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언뜻 본다. 내 얼굴은 창백하고, 입술은 포도주 때문에 짙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다. -344

 

[걸 온 더 트레인]이란 제목에서 '걸'은 좀 적절하지 않은 선택이 아니었나 합니다. 알코올 중독자에 이혼녀이며 게다가 실업자이기도 한 레이첼이 '걸'이라 표현된 것에 의아했지만, 과거의 상처 때문에 스스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술이 주는 망각에 기대어 살아가는 그녀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데는 적절한 표현인 것 같아요.

메건의 실종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레이첼의 기억 속에서 뭔가 떠오르기는 하는데, 레이첼은 그것을 확실히 붙잡지 못하고 있죠.

하지만 15호 집과 23호 집의 멀지 않은 거리만큼이나, 이 책의 주요 나레이터인 레이첼, 메건, 그리고 전남편 톰의 현재 부인 애나는 알고 보면 비슷한 처지임이 드러납니다.

레이첼이 매일 아침 저녁 몸을 실은 기차는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딘가로 그녀를 태우고 갑니다.

레이첼이 좀 더 강한 정신력을 지녔더라면...

아버지로부터의 상처와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만으로 많은 것을 포기하지 않고 남자에게 기대는 여자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텐데.

어쩌나...

이 책에 나오는 세 여인은 모두 어둡고 우울한 모습이네요.

희극보다는 비극에 재능이 있다는 작가의 말대로, 작가가 창조한 소설 속 이야기는 폭력적이고 거칠어요.

피가 튀고 싸움이 난무하는 폭력과는 거리가 있지만 여성들이 좀 더 힘있고 강력한 존재인 남성에 의해 다루어지는 스토리 자체가 폭력적이라는 말이죠.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아름답고 평화로워보이는 가정일지라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보이는 만큼의 평화가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기억나지 않는다...블랙홀처럼 뻥 뚫려 있다. 뭔가 죄책감이 든다.

레이첼의 불안감의 근원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차처럼 빠른 속도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알게 됩니다.

늪에 빠지는 듯한 기분으로 읽게 되고 어떤 결말이 날지 점점 궁금해 미칠 때쯤, 레이첼은 다시 아침 일찍 일어나 기차를 타러 가야 한다는 마지막 문장과 맞닥뜨리게 돼요.

이번에는 제발~ 자신의 의지를 한 움큼 꽉 움켜쥐고 기차에 오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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