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로맨스가 필요해
정현정.오승희 지음 / 21세기북스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로맨스란 말은 여고 시절, 하이틴 로맨스를 즐겨보던 때에나 들어본 말이었다.
그러니까, 로맨스라는 말은, 이제 결혼 10년차에 접어드는 나같은 30대 후반의 주부에게는 봄볕에 촉촉한 땅을 밟고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아른아른 거리는,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안타까운 단어인 것이다.
아득한 그 시절. 학업의 스트레스를 피할 목적으로 누군가가 만화방에서 또는 책 대여점에서 하루분량으로, 외국 하이틴 로맨스를 번역한 얄팍하고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책을 10권 정도 빌려온다. 대기자들은 순서를 정해서 죽 돌려보기 시작한다. 속독의 대가였던 나는 항상 1번 타자였다. 빌려온 주인을 제치고 1번으로 읽어보게 되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쉬는 시간 10분, 점심 시간, 그리고 수업 시간 짬짬이, 마음 먹은 날은 야간자율학습 시간을 통째로 할애해 가면서까지 로맨스 소설에 푹 빠져 살았던 적이 있다. 선생님들의 매서운 눈초리와 점점 가까워오는 질질 끄는 슬리퍼 소리의 압박을 이겨내면서 로맨스 소설을 읽어나가던 그 스릴은 지금까지도 여고시절의 추억으로 떠오른다.
언제나 180이 넘는 키에 완벽한 근육, 구릿빛 피부의 그리스 조각상 같은 얼굴의 남자가 주인공이다. 여주인공은 전형적인 미인이 아닌, 좀 개성적인 인물이지만 대개는 키가 자그마하고 귀엽고, 남자로부터 보호받아 마땅한 모습의 캐릭터들이 주를 이룬다.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파워게임, 밀고 당기기, 그러나 결국엔 달달한 결말로 언제나 해피엔딩인 꿈같은 소설들. 그 소설들은 진정, 현실에서 일어나기 불가능한 환상 속의 이야기, 그 자체였던 것이다. 10대의 로맨스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현실이란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가는 나이를 먹어버린 것이었고, 생활에 찌들어 버린 것이었고, 로맨스란 단어를 기억 저편으로 멀리 내던져 버린 지 오래인 것이었다.
그래서, <로맨스가 필요해>라는 소설을 보았을 때, 나의 시선이 번쩍이는 분홍빛으로 휘갈겨 쓴 책 제목에 확 꽂힌 것은, 매일 매일이 똑같은 무료한 삶에 지친 내 머릿속에 여고시절의 반짝임이 스쳐지나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두근두근한 마음을 지그시 억누르면서 첫 장을 열었다.
열매와 석현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전개였다.
그런데, 첫 상황은, 이런, 내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7번의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는 연인이면서, 아직 한 집에 같이 사는 사이.
“너, 가끔 내 방에서 잘래?”
살짝 가벼운 충격이 왔다. 아~ 얘들은 평범한 연인이 아니구나.
소설이라는 것은 현실에서 내가 직접 경험할 수 없는 것을 대신 겪어볼 수 있게 해 주는 장치이므로, 나는 소설 속에 너무 깊이 빠지면 안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열매와 석현 같은 연애는 할 수 없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다. 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열정을 가졌지만, 있는 그대로 내뱉는 솔직함이 무기인 여자라서 가끔은 곤란함을 겪는 음악감독 열매, 속에 무언가를 꼭꼭 감추고 표현하지 않지만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이 사람을 설레게 하는 시나리오 작가 석현.
대낮에 길거리에서 노상에 깔린 과일이 으깨지도록 던지며 심하게 싸우기도 해 보고, 울며불며 매달려도 보고, 다른 남자를 사귀어도 보지만 왜인지 석현은 “결혼하자”는 열매의 말에 대답을 회피한다. 석현의 성질을 긁을 대로 긁고 나서도 거기서 조금 더해 끝까지 밀어붙이고 마는 열매, “너 가” 한마디만 하고서는 잠시의 틈도 없이 , 뒤돌아보는 법도 없이 멀어져 가는 남자 석현.
나의 연애 스타일은 아니어서 적응이 안되지만, 그런 연애를 흘깃 훔쳐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세상에 여자는 두 종류로 분류된다. 헤어지면 뒤돌아보는 여자와 뒤돌아보지 않는 여자.
나는 뒤돌아보지 않는 여자였다. 오랜 시간 알아가고, 서서히 식어가고, 단칼에 베는 것이 내 연애 스타일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겁쟁이였고, 진정한 사랑이 뭔지 몰랐고, 세상의 잣대에 물들어 있었고, 가장 결정적으로, 상처받으면 안 되는 상태의 여자였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남에게 상처 주는 여자였던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 돌아서는 것이 나의 연애 패턴이었다.
그런데, 주열매. 이 여자는 뒤돌아보는 여자였다.
나와 근본적으로 달라도 너무 다른 여자다.
나 같으면, 7번의 이별까지 가지도 않았을 뿐더러, 7번의 이별 끝에 비로소 만나게 된 “나무 같은 남자” 지훈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열매는 지훈과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해 놓고도, 그의 나무 그늘같은 푸근한 사랑 속에서 ‘순둥이’처럼 평화로움을 맛보고서도 뒤돌아보고 만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사랑처럼. 뒤돌아보면 절대로,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아니, 그 말을 들어서 더더욱 그런 것인지도 모르지만. 열매는 석현을 선택했고, 지훈은 아프게 열매를 떠나보낸다.
차마 열매의 사랑을, 열매와 지훈의 사랑을 방해할 수 없었던 석훈은 1년이란 시간, 열매로부터 떠나 있지만, 그토록 ‘희생’에 목말라하던 지훈을 위해 담담히 1년을 희생한 열매를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둘은 다시 만나게 된다.
아이고, 참~
내 이럴 줄 알았지.
이렇게 되어 지고지순한 사랑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었지.
그렇지만, 현실로 내려오면 그 사랑이 찬란한 빛을 발하며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가 될 것인가?
2권이 나왔다니, 기대가 되고, 현실로 내려오는 계단을 타고 하강하는 로맨스가 펼쳐질지, 새로운 로맨스가 꽃피는 환상 속의 이야기가 펼쳐질지는 읽어 보면 알 일이다.
내 자아와 너무나 다른 열매의 자아에 쑥 몰입되어 울고 웃었던 1시간이었다.
아이들이 보면 “엄마, 또 운다”고 할까봐, 소리 죽여 가며 눈물 줄줄 흘리고, 휴지 가지러 갈 동안 추한 모습 보일까봐, 몇발짝 옮겨 휴지 가지러 가지도 못하고 옷소매로 눈물 닦아가며 너무도 쿨하지 못하게 그들의 세상을 읽어 내려갔던 1시간이었다.
이젠, 환상의 세계에서 현실로 내려가실 시간입니다, 손님~
“네, 가라면 가야지요. 2권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