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데는 해적이 되고 싶어 - 제2회 말라가 어린이 문학상 수상작 스콜라 어린이문고 5
파블로 아란다 글, 에스더 고메스 마드리드 그림, 성초림 옮김 / 스콜라(위즈덤하우스)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빨간 가방에 빨간 신발을 신고, 빨간 앵무새까지 어깨에 척 올린, 그야말로 깔맞춤을 한 우리의 페데. 사뭇 반항적인 눈동자에, 입까지 한쪽으로 모아 오므리고는 ‘훗’하고 코웃음을 날리는 듯한 표정. 얼마나 해적이 되고 싶었으면, 그림자가 해적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래, 페데야, 해적이 되고 싶었

어?우쭈쭈..”.하고 얼러주어야 할 것 같은 7살 꼬마 소년. 그러나, 해적이 되고 싶다는 결심은 부러 하는 우스개는 아닌 것 같다.

해적이 되기 위해 한쪽 다리를 톱으로 쓱싹쓱싹 갈며 실행에 옮기는 용감한 소년이니 말이다.

 

 

페데니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니 하는 라틴계 이름의 아동소설은 낯설지만, 계속 내용을 보니, 예전에 TV에서 방영했던 <천사들의 합창>이 생각난다.

어여쁜 히메나 선생님이 나왔던^^

귀엽고 순진한 천사들 속에도 엉뚱하고 귀여운 아이들이 많았었는데, 페데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일곱살 꼬마다.

 

이제 6살이지만, 내년에 7살이 되는 우리 아들. 요즘 폭풍처럼 몰아닥친 과도기에 들어섰는지, 좌충우돌 말썽이 끊이질 않는다.

우리 아들은 어떤 기상천외한 말로 나를 뒤집어지게 할 지 모르겠지만, 해적이 되고 싶어하는 페데를 읽고 나면 유연하게 대처할 방법이 생각날 것 같아 무척 기대했던 책이다.

오늘은 6살 우리 아들이 유치원에 다녀 와서 그림을 그렸다.

며칠 전만해도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그림 그리라고 해서, “나는 미술을 몰라요. 그림 안 그릴래요.”라고 말했다며 눈물을 글썽이길래, 그림 그리는 게 스트레스였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런 녀석이 다짜고짜 종이를 꺼내고, 색연필을 들더니, 쓰윽 쓱, 자신만만하게 선을 그려나간다. “그게 뭐니? 잘 그리네.?” 일단, 띄워줘 보았다. “응, 똥이야.”

허걱.

조그만 졸라맨에 맨 위에 서 있고, 그 밑으로 길다란 뱀 같은 길이 구불구불 그려져 있다. 그러고는 그 길 위에 동그라미, 동그라미, 똥,똥,똥...

유치원에서 응가를 했는데, 선생님이 “혼자 닦을 수 있겠어?”하고 물으셨단다. 당연히 혼자 못 닦는데, 아직, 선생님도 낯설고, 말할 용기도 부족했던지, 저도 모르게 “네.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한 다음 혼자 닦기에 도전했단다. “그런데, 손가락에 묻었어. 얼른 닦았지만.”

바지를 내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응가 자국이 묻어 있었다. 깨끗이 닦아내기에 실패한 듯. “아이고, 기특하네. 우리, 똥쟁이?” “똥쟁이라고 하지마.”

우흡흡. 웃음을 참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집에 오자마자 그림을 그린 배경이 이해가 되었다. 혼자 용감하게 뒤처리를 했고, 손에 묻었고, 창피하지만 용감한 일을 해낸 듯 하여, 그림으로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아이구, 대견한 것.

어른이었다면,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기라도 했다면, 부끄러워서 차마 하지 못할 일을, 6살짜리 우리 아들은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아이들은 참~ . 그들만의 세계에 산다.

 

 

자, 그렇다면 우리의 페데는 어떠한가.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윗집 아저씨께 인사도 하지 않아서 머쓱해진 엄마로부터 “얘는 정말 구제불능이에요.”라는 말을 듣는다.

 내가 보기엔, 페데의 가족들도 페데 못지 않은 구제불능이지 싶다. 페데로부터 엉뚱한 질문 예를 들어 “배는 그렇게 무거운데 어떻게 물에 뜨느냐고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항상 엄마를 찾는 아빠. 아빠는 ‘바다표범’, 동생 페데는 ‘올챙이’라고 부르며 ‘뉴턴아저씨는 왜 사과나무 아래에서 낮잠을 주무셨답니까? 텔레비전이나 발명했으면 좋았잖아요?’하고 투덜대는 누나 이사벨, 가짜 이빨, 가짜 귀, 가짜 눈을 쓰는 할아버지를 인조인간이라 부르는 페데는 더 말할 나위도 없고.

 

 페데의 어록을 살펴 보자.

 

해적의 필수품 앵무새 대신, 산타할아버지의 선물로 손전등을 받은 페데“근데 손전등은 똥을 싸지 않아서 좋아.”

 

밴드가 붙여진 무릎을 보여주며, “넘어진 거야?”세르히오가 물었습니다. “아니, 다리를 자르려고 그랬어. 근데 엄마 아빠가 내버려 두질 않아서.”

 

코고는 소리는 어쩌면 식인종 물컵이 할아버지를 물지 못하게 하려고 할아버지가 겁을 주는 소리인지도 몰랐습니다.

 

이빨에는 칼슘이 좋습니다. 왜 할아버지는 틀니를 우유에 답가 놓지 않고 물에 담가 놓으시는 걸까요.

 

학교에서 그림 그리는 시간, 해적을 꿈꾸던 페데와 마르가 그리고 세르히오는 모두 배를 그렸다. “페데랑 마르가 그리고 저는 좋은 해적이에요.”세르히오가 선생님께 말했다. 모름지기 꿈을 가진 자, 그림으로 그릴지어다. 엉뚱하고 호기심 많은 페데와 친구들은 자신들의 꿈을 그림으로 실현시켜 보였다. 그 날 오후, 욕조 안, 머리에는 비누 거품을 잔뜩 묻히고, 두 손에는 물에 젖은 앵무새를 들고, 어른 해적 같은 표정을 지으며 아빠를 바라보던 페데는 “진짜 해적”이 되었다.

 

30대 후반의 나는 이제 무슨 그림을 그려 볼까?

꿈이라는 게 있긴 있었던가...

한동안 흰 종이를 앞에 놓고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다.

무슨 색연필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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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 설월화雪月花 살인 게임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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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형사 시리즈’ 그 첫 번째 이야기이다.

가가 형사 시리즈는 <붉은 손가락>으로 먼저 접하게 되었다.

추리의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붉은 손가락>을 읽는 내내, 가가 형사란 인물이 손에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 잡히지 않았었는데, 그 이유를 <졸업>을 읽고서 알았다.

가가 라는 인물에 대한 지식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180의 키와 장대한 기골, 대학 검도부 전국대회 우승자.

이 설명만으로는 다가오는 임팩트가 크지 않았다. 그런데 대학 졸업반일 때의 가가로부터 시작하는 <졸업>에는 가가의 근간이 되는 가족 배경에서부터 친구관계, 사랑했던 연인, 다도 선생님으로 나오는 은사 등이 묘사되어 있다. 이런 중요한 부분을 빼먹고 사건 해결 경찰로서의 가가로만 보았으니, 가가가(^^) 제대로 그려질 리 없다. 날카로운 관찰력과 흔들림 없는 냉철함, 인간에 대한 따스한 마음까지. 이 <졸업>이라는 청춘 미스터리물이 그의 매력이 발산되는 시초였던 것이었다.

뒤늦게 첫번째 시리즈를 읽었지만, 늦게 알아서 더욱 느낌이 새로운 것도 있고, 아~하! 하면서 터져나오는 감탄사의 연발도 꽤 읽는 재미가 있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대학 졸업반 시절, 아직 형사가 되기 전의 가가는 교사를 꿈꾸고 있었다. 아버지는 경찰이었으나,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엄마가 집을 나갔다고 생각한 가가는 ‘경찰이라는 직업은 가족을 힘들게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교사와 경찰 중 진로를 고민하던 가가는 마사코라는 친구를 마음에 두고 결혼하고 싶다고 고백까지 하면서는 ‘가족의 구성원’이 될지도 모를 마사코를 위해서 경찰이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교사가 되기로 결정한다.

이 <졸업>이라는 작품을 계기로 그가 경찰이 되는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지만, 어쨌든, 경찰 아버지의 영향으로 알게 모르게 배어 있던 그의 습성이, 졸업을 앞둔 7친구 안에서 일어난 2건의 사건으로 발현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뭉쳐 다닌 7명의 대학 졸업반 친구들.

 

“너를 좋아한다. 결혼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졸업>의 첫 구절. 가가마사코에게 고백을 한다.

 

“이건 프로포즈가 아니야. 그냥 내 의사 표시야. 네가 누구를 좋아하건 누구와 결혼을 하건 그건 너의 자유지만 내 마음은 이렇다는 걸 알아줬으면 했어.”

 

캬~ 쿨하고도 깔끔담백하다. 실제 이런 고백을 받는다면 충격, 그리고 싸한 후폭풍이 몰려오겠지만, 뭐, 내가 받은 것도 아니니, 3자의 입장에서 보는 이 고백 장면은 달콤쌉싸름한 연애 드라마의 주요 장면에 다름 아니다.

7명의 친구들 중, 와코와 하나에는 연인 사이. 도도와 쇼코도 연인 사이. 나미카는 검도를 중시하는 집안의 딸로 자유분방한 성격.

 

어느 날, 도도의 연인 쇼코가 백로장, 자신의 방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손목이 그어진 채 피투성이로 발견된 쇼코. 자살인지 타살인지도 분명하지 않은 상태, 그 와중에 같은 숙소(백로장), 쇼코의 방 맞은편에 머물던 나미카는 범인을 찾아내겠다며 동분서주 한다. 7명의 고등학교 시절 은사이던 미나미사와 선생님의 생일을 맞아 ‘설월화 게임’을 하러 모여든 그들에게 또다시 나미코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일어난다. 다도 의식 도중 차를 마시던 나미코가 청산가리 중독으로 죽은 것. 단단한 우정으로 뭉쳐 있을 것 같던 친구들 사이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설월화 게임의 규칙상 가가의 연인인 마사코가 용의자 선상에 오르기도 한다.

쇼코의 죽음에 의문을 품었던 나미코가 살해되자, 가가와 마사코는 힘을 모아 추리를 시작하는데, 중간 중간 긴장감이 느껴지는 둘 사이의 애정전선의 묘사도 자못 흥미롭다.

가가의 추리로 밝혀지는 친구들 사이에 얽힌 진실. 어느 누구의 단독 범행도 아니었으나, 쇼코와 나미코의 죽음에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되었던 친구들은 죄의식을 덜어버리지 못하고 한 명을 죽음을, 그리고 한 연인은 이별을 택하게 된다. 7명의 친구 중 3명은 사망, 2명은 연인 사이에서 이별을 선택. 그리고 남겨진 가가와 마사코.

대학 4학년의 그들은 이렇게 졸업을 하게 된다.

대학 시절의 졸업이기도 하고, 우정에 대한 졸업이기도 하고, 청춘의 한 페이지에 대한 졸업이기도 하다.

그릇이 가득 차면 비우고 나서야 새 것을 채울 수 있다.

졸업.

남은 친구들의 가슴 속에 하나씩 어두운 기억이 들어차겠지만, 그것을 밑바탕으로 해서 또다시 새로운 것을 일구어 나가면 된다.

졸업과 새로운 시작은 같은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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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숲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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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숲>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형사 시리즈 2탄’

 

1탄에서 대학생 신분이었던 가가가 어떻게 교사를 포기하고 형사가 되는지, 그 이야기가 실려 있나 했더니만, <잠자는 숲>에서는 30대 신입형사로 등장해서 화려한 발레 무대를 배경으로 사건을 풀어나가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발레리나. 마흔여섯의 현역 최고령. 가장 아름다운 발의 소유자. 20대 여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여성. CEO가 뽑은, 13시간 미국행 비행기 옆자리에 앉히고 싶은 여성...독일 슈투트가르트 수석 발레리나 강수진을 설명하는 짧고 굵은 문장이다. <나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자서전도 냈다고 한다. 이건 어디서 들은 얘기지만, 그녀는 20대로 돌아가기 싫을 정도로 40대인 지금이 좋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 정신력이라는 게 생겨서 그만큼 파워가 커지기 때문이란다. 예전보다 더 짧은 시간에 몰입할 수 있는 건, 경험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얼마나 지독하게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뛰어 왔기에 다시는 그 꽃같은 청춘을 누릴 수 있는 20대로 돌아가기 싫다는 말을 고민 없이 바로 내뱉을 수 있을까. 나무나도 유명한 그녀의 발 사진을 보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게도 되는 부분이다. 발레만을 위해 살아온 그녀. 도대체 어떤 희생을 치러 지금 이 자리에 도달하게 된 걸까.

밖에서 보는 발레의 세계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발레 학원에서 교습 받는 아이들조차 화려한 발레 튜튜의 색깔과 옷 모양에 반해서 시작하는 아이들이 부지기수다. 우아하게 뻗은 팔, 빙그르르 도는 아름다운 자태. 가볍고 높게 뛰어오르는 점프. 파트너의 팔에 의지해 사뿐 올라앉은 한 마리의 백조. 무대 조명 아래에서 화려하고 나풀거리는 의상을 입고 몰입을 해서 연기를 하고 나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되면 우리와 똑같이 먹고, 마시고, 자는 사람이지만, 그들의 세계, 발레계는 아주 폐쇄된 곳이라고 한다. 발레리나 강수진처럼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오로지 연습하고, 공연하고, 자기를 갈고 닦는 곳이기에 몸 관리에서부터 무엇 하나 소홀히 할 수 없고, 연습 외의 시간에는 제대로 만날 사람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로지 정석으로 실력을 닦아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지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빛나는 곳.

 

“드라마 같은 데서 프리마 자리를 노리고 상대를 함정에 빠뜨린다는 촌스러운 스토리가 자주 나오죠? 근데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요. 댄서라는 건 춤에 대해서는 결벽증이 있고, 타인과의 실력 차를 객관적으로 포착하고 있는 법이에요.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밀어내고 자신이 춤을 춘다는 건 본능적으로 못해요. 그 역할을 갖고 싶을 때는 실력으로 겨룬다, 그것밖에 없지. 옆에서 지켜보기에는 우아해 보이지만 생존경쟁이 엄격한 세계라구요.”-201

 

그렇게 발레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 다카야나기 발레단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발레단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는 한 사나이가 밤에 발레단에 침입했다가 발레리나 하루코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물론, 하루코는 놀라서 화병을 내리친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하며, 화병으로 내리친 이후 자신도 기절해서 상황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짜잔~ 이 사건에 우리의 가가 형사가 투입된 것이다. 윤곽이 짙은 얼굴에 역시 눈매가 날카롭고 강직한 듯한 인상의 가가 형사. 발레단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미오라는 발레리나를 인터뷰하던 가가는 옛날 <백조의 호수>에서 흑조 역을 맡았던 무용수가 미오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때 흑조의 연기에 묘하게 빨려들어갔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미오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발레, 재미있어요?”

“예, 재미있어요. ”라고 미오는 대답했다. “내 인생 전부예요.”

“부러운데요?”“그렇게 단언할 수 있다는 게. 그거만으로도 일종의 재산이겠지요?”-24

 

가가가 미오에게 마음을 준 그 순간부터 나는 미오에게 집중하게 되었다. 제발, 그녀가 범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형사들은 직감과 눈썰미가 뛰어나기 때문에 인상만으로도 사람을 잘 판단한다. 그래서 ‘가가가 마음에 둔 그녀가 제발 범인이 아니어서, 가가의 마음이 상처 받을 일이 없기를’ 하며 소설이 끝날 때까지 빌었다.

다카야나기 발레단에서 일어난 두 번째의 살인 사건은 발레단의 마스터이자 안무가, 연출가인 가지타의 돌연한 죽음. 무대 앞 좌석에 앉아 지켜보던 그가 아무 움직임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미오가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공연의 마지막 총연습을 하던 중에 살해됐어요. 자세한 건 아직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지만 십중팔구 독살이야. 독극묵이 묻은 바늘에 찔렸어, 오로라 공주처럼.”-123

 

하루코를 연모하던 남자 발레리나 야기유가, 정당방위를 주장했지만 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하루코의 무죄를 증명하겠다며 4년 전 뉴욕에서 있었던 일을 알아보려 하던 중, 가지타와 마찬가지로 니코틴이 든 음료를 마시려다 맛이 이상해서 뱉어내어 겨우 목숨을 구한 일도 연달아 일어난다. 두 살인 사건의 연관성을 찾아 가가가 추리를 하다 과거 뉴욕에 유학을 갔던 두 발레리나 아키코와 야스코의 존재를 알아내게 되는데, 가지타를 살해한 용의자를 야스코로 지목하고 찾아가 보니, 야스코는 이미 수면제 다량 복용으로 자살한 뒤였다. 이제 남은 것은 하루코가 정당방위를 주장하는 한 사나이의 살인 사건.

 

“가가 씨, 혹시 <사랑의 시간>이라는 영화 아세요?”

“모릅니다.”

“어느 곳에 발레를 잘하는 소녀가 살고 있었어요. 그 소녀에게는 존경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하원의원에 출마하려는 신인 정치가인데, 소녀는 어떻게든 그가 선거에서 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호두까기 인형>총연습 때에 소녀는 놀랍도록 완벽한 춤을 추어서 엄청난 박수를 받아요. 내일이면 드디어 공연 무대에서 춤출 수 있다니 꿈만 같아-. 하지만, 돌아오는 지하철 안헤서 병이 났어요. 엄마 머리가 아파-. 그리고 소녀는 죽죠. 근데 남겨진 소녀의 일기장에는 내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고 적혀 있었어요. 그리고 그 젊은 정치가는 선거에 이기는 거예요.”“슬픈 이야기군요.”

“네,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 소녀의 꿈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해요. 놀랍도록 완벽한 춤을 추었고, 자, 내일도, 하는 때에 죽었으니까요. 너무 어린 나이에 찾아온 죽음이 슬픈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댄서로는 최고의 죽음이 아닐까요?”-209

 

환절기에 빈혈이 잦다는 미오. 어느 비오는 날, 가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앞날을 암시하듯이.

세세한 스토리 묘사나 등장인물의 감정 등이 최대한 절제된 담담한 서술. 오로지 구성과 트릭, 가가의 이성적인 사고로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추리소설이 전개된다.

그리고, 기대하지 못했던 결말.

 

“내가 당신을 지켜 줄 겁니다.” 그는 플로리나 공주의 얼굴인 미오에게 조용히 입술을 맞댔다. 무언가에서 깨어나는 듯한 느낌의 입맞춤이었다. “당신을 사랑하니까” 가가는 미오의 몸을 꼬옥 끌어안았다. -343

 

묵묵히 사건의 진상을 찾아 추리를 하는 가가 이야기에서는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을 찾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이번 <잠자는 숲> 은 한결 어깨에 힘을 빼고 부드러운 표정을 한 가가의 모습이 연상된다. 마치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같은 라스트 신. “당신을 사랑하니까.”

꺄악~

 

무덤덤한 사나이의 사랑한다는 고백처럼 여심을 뒤흔드는 것이 또 있을까.

가가처럼 직업이 경찰인 내 남자, 서도령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무뚝뚝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오리지널 경상도 사나이. 직업 탓인지, 함께 산 세월이 10년이라 이제 열정이 사그라든 탓인지, 무슨 말을 하면, “그래서?”라고 말을 끊듯이, 혹은 피의자 신문하듯이 대꾸하는 탓에, 지금은 대화가 2분 이상을 넘기기 힘든 그런 부부 사이가 됐지만, 마음만은 따뜻하다고 자부하는 내 남자.

키도 180에 못 미치고, 카리스마도 가가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지만, “결혼하자.”이 한마디만은 가가 못지않게 심플하고 대담하게 했던 남자.

10년 전의 프로포즈 장면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잠깐 콩닥였다.

참, 주책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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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딱 한 개만 더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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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 형사의 눈이 번뜩이면, 사건은 해결되지만, 우리의 가슴은 뻥 뚫린다.

그가 파헤치는 사건은 모두 우리 중의 누군가가 한 번쯤은 품었음직한 마음 속의 어둠이 표출된 사건이기 때문에 가가 형사가 정곡을 콕 찌르면 움찔하게 된다.

여기, 이번 책은 5개의 사건 파일이 모인 것이다.

각각의 이야기가 구성을 달리 하면서, 범인을 압박해가는 가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 보여준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가가 형사다.

 

1.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잠자는 숲>의 한 부분이 확대되어 이 이야기가 탄생된 듯 싶다. “발레에 관심이 있다.”는 가가 형사의 말을 그냥 흘려 듣게 되지 않는 것은, <잠자는 숲>에서 있었던 발레리나와의 로맨스 때문이 아닌가 한다.

유게 발레단의 사무국 직원 하야카와 히로코가 맨션에서 떨어져 죽은 사건. 가가는 처음부터 범인을 15년전 <아라비안 나이트>의 댄싱 히로인이었던 데라니시 미츠요로 점을 찍고 그녀를 압박해나간다. 가가가 어디까지 알고 질문하는지 모르는 미츠요는 결정적인 한 마디로 쌓아올린 알리바이를 허물어뜨리게 된다.

“당신의 범행은 완벽했어요. 공연한 말을 지어내지도 않았고, 오히려 최대한 거짓말을 줄이려고 했지요. 당신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거짓말을 딱 한 개만 더 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48

완벽한 추리에 더해서 마지막 한 마디를 유도해 내는 가가의 냉철함.

무릎을 ‘딱’ 하고 안 칠 수가 없는 깔끔한 사건 처리가 아닌가.

 

2. <차가운 작열>

이 사건은 엄마인 내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사건이다.

주부 우울증. 산후 우울증.

남편이 무관심과 육아의 스트레스로 인해 파친코에 빠진 여성의 비참한 이야기다.

거기다, 남편의 직업이 공작기계 회사원이라는 점이 이 사건을 한층 그로테스크하게 만든다.

찌는 듯이 작열하는 여름날. 돌이 채 안 된 아이를 혼자 눕혀 두고, 엄마가 파친코에 다녀 온 사이, 아이는 그만 질식사하고 만다. 망연자실하고 있던 아내를 발견한 남편은 분노하여 목을 조르게 되고, 도둑의 소행으로 가장한 채, 죽은 아이를 숨길 도리를 강구하다, 회사로 가져간다. 열 경화성 수지를 사용하여, 아이의 정수리에서부터 몇 번을 부어 가며 굳힌다.

어떤 정신 상태로 자신의 아이에게, 아내에게...

차가운 작열이라는 제목이 으스스할 정도로 잘 어울리는 사건이다.

 

3. <제 2지망>

자신이 잃어버린 꿈을 아이에게 투사하여, 아이의 스케줄을 철저히 점검하며 아이에 매달려 살던 엄마. 남편과 이혼까지 불사하며 말이다.

“당신한테는 졌다. 하지만 리사를 불행하게 만들면 당신 용서 안 해.”-141

이제 궤도에 올라 올림픽에 대한 기대도 해 볼만할 때. 엄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겨버렸고, 남편 아닌, 다른 남자에게 틈을 허용해 버렸다. 그런데, 그 남자가 그녀의 집에서 목이 졸려 죽은 사건. 여자는 강도의 짓으로 몰다가, 자신에게로 포위망이 좁혀 들어오자, 자신이 한 일이라고 자백한다.

그러나, 진실 앞에 그녀가 할 수 있었던 한 마디 말.

“저애만은..., 꼭 꿈을 이뤄주기를 바랐는데.”

자녀교육에 유달리 집착하는 우리나라 엄마들이 읽었다면 흠칫 했을 내용인 것만 같다.

 

4. <어그러진 계산>

부부란 뭘까?

마음을 완전히 터놓는다고 생각하는데도 다른 한쪽이 마음을 닫으면, 그것은 완전한 일방통행이 되고 만다.

비극적인 사건의 씨앗은 의사소통의 부재가 아닐까.

남편은 아내를 하인 부리듯 하고,

“살살 봐주면 기어오르니까 평소에 바짝 조여야 돼. 너희도 마누라 얻으면 절대로 만만하게 대해서는 안 돼. 여자라는 건 어떻게 교육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거라고.”-190

라며 시동생들 앞에서 일장연설을 토하는 남자였다. 점점 잘못한 결혼이라며 후회하는 마음이 들 무렵 알게 된 남자와 불륜에 빠진 여자. 여자는 불륜남과 함께 남편을 살해할 계획을 세우지만, 계산이 어그러져, 남편이 그 계획을 알게 된다. 결국, 그녀의 침대 밑 나무 틀에 얼음과 보냉제와 함께 몇날 며칠 얼려져 있어야 했던 것은, 잠시나마 ‘마음에 감춰둔 사랑’을 꺼내 보여준 불륜남의 시체. 국화와 마거리트로 그의 가는 길을 밝혀주려고 했던 그녀는, 그러니까. 두 남자의 사랑을 같이 받았던 것이겠지. 그녀가 원했던 사랑과, 벗어나고 싶어했으나, 벗어날 수 없었던 사랑.

 

5. <친구의 조언>

가가의 친구네 집 이야기.

대학에서 같은 사회학부였던 하기와라라는 친구.

운전 도중 졸음이 밀려와 교통사고를 낸 친구를 문병 온 가가. 우정이라는 이름을 걸고, 쓴소리를 해야만 했다.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준 것은 하기와라의 아들 다이치의 물고기 그림.

“내가 말했었지. 다이치는 순수한 아이야. 자기가 본 대로 그렸거든.”-253

사회적 편견을 받고 있는 ‘게이’라는 특이한 소재가 나온다. 내 아내가 게이라니...

 

마지막 장까지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추리가 쉴새없이 연결된다.

히가시노 게이고와 동시대를 살고 있어서 나는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본격적인 추리소설부터, 지금의 사회성 짙은 소재를 다룬 사건들까지. 어디까지가 그의 한계인지, 내가 지켜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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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의 지혜 - 한 세기를 살아온 인생 철학자, 알리스 할머니가 들려주는 희망의 선율
캐롤라인 스토신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인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옛날 대가족이 모여 살던 시절에는 멘토링이 따로 필요 없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얻어 듣는 말씀 속에 삶의 지혜가 다 들어 있었으니까.

요즘은 핵가족이니, 솔로니 하면서 점점 규모가 작은 가족의 형태로 진화하고 있어서 고민 하나 살짜기 풀어 놓을 데가 없다.

가는 귀가 먹어도, 꿈꿈한 냄새가 나도 할머니 옆에 슬쩍 기대어 앉아 가만가만 속내를 풀고 싶을 때가 있는데 현실에선 그게 안되니, 책으로 대체할 수 밖에.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재난, 홀로코스트를 겪고 살아남으신 할머니의 삶의 지혜라면 내공이 장난이 아니겠지 싶었다.

겸손한 마음으로 조용히 귀 기울여 들어보고자 <백년의 지혜>를 집어 들었다.

‘내 마음의 고민 적어도 한 가지는 해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란 기대를 품고서.

111세의 알리스 헤르츠좀머 할머니.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것은 앳된 소녀 때의 미소와 나이 들어서의 할머니의 모습.

할머니는 어린 시절의 미소를 여전히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살아온 세월이 얼굴에 그대로 스미게 된다더니, 할머니의 얼굴에 무척 천진난만하고 여유로운 웃음이 녹아있다.

 

“할머니, 어떻게 살아 오셨어요?”

한 세기를 살아온 인생 철학자인 할머니를 앞에 두면 누구나 해보고 싶어 하는 질문.

장수의 비법을 묻고, 건강을 잃지 않는 비법을 묻는 인터뷰는 종종 보아왔다.

소식하기.

걷기.

즐거운 마음으로 생활하기.

조금씩 꾸준히 움직이기.

그렇지만, 그냥 장수하는 노인들과 알리스 할머니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왜냐고? 그녀는 홀로코스트를 겪고 살아남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홀로코스트를 겪었다고 해서, 나는 독일에 살던 유대인이겠거니,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1903년 체코의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그러면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살짝 비켜갔을 수도 있지 않았나?

어이쿠. 나의 무식이 여기서 탄로나는구나.

이 책에는 제 2차 세계대전 전후의 동유럽 역사가 소개되어 있다.

그 시절, 지도자들의 그릇된 판단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스실로 보내지고, 희생당했는지, 내가 미처 몰랐던, 아니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동유럽의 실상이 보고 되어 있다.

 

유복한 집안에서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피아노를 접하게 된 알리스는 피아니스트로 성장하게 된다. 1931년 레오폴트 좀머와 결혼해 아들 라파엘을 낳지만, 행복한 생활은 잠시, 1943년 알리스와 남편, 아들 라파엘은 체코에 들이닥친 나치에 의해 테레진 수용소에 보내진다. 테레진은 대규모의 수용소로, 예술가의 피난처로 홍보되었으나, 사실은 아우슈비츠 등 동유럽 전역의 나치 학살장으로 보내지는 환승역 역할을 한 곳이다. 이곳에서 2년을 보낸 알리스와 아들은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되고, 아마도 한 병사의 희생이 있었으리라, 그녀는 짐작한다. 그녀의 피아노 연주에 감동을 받은 한 병사가 음악에 대한 감사와 함께 이런 말을 남겼기 때문이다.

 

“부인이랑 아드님은 퇴출 명단에 오르지 않을 겁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테레진에서 지내실 겁니다. 염려 마세요. 안전하실 겁니다.” -55

 

1946년 아들과 함께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재혼하지 않고 혼자 아들을 키운 그녀. 새 삶을 개척해 나가는 데 그녀와 함께했던 것은 첼로 교수로 훌륭하게 성장한 아들과 음악에 대한 열정. 여든이 넘어서는 런던으로 옮기지만 아들의 돌연사로 큰 충격을 받는다. 그렇지만 최근까지도 런던의 제 3기 대학에서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며, 철학자들(특히 스피노자)의 가르침을 삶에서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바흐, 베토벤, 쇼팽, 슈베르트를 외워서 매일 세 시간씩 연주하며 예술가로서 의미를 찾는다.

 

111년을 살면, 한 권의 책으로 그 삶이 정리가 될까?

이 책에서는 그녀의 에너지를 담아, 많은 이들에게 긍정의 힘을 전달하는 게 목적이지 싶다.

수많은 세월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낙천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알리스는 쌍둥이였다고 했다. 쌍둥이 언니였던 마리안느는 쌍둥이임에도 불구하고, 알리스와 성격이 판이해서 모든 일을 부정적으로 보았다고 했다. 낙천적인 성격으로 홀로코스트를 극복하고,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일어나고 다시 일어나고...

그녀가 남긴 백년의 지혜를 엿보면서 나의 고민도 슬금슬금 물러가는 것을 느낀다.

기나긴 세월을 이겨내고 남긴 그녀의 말은 모두가 명언이다.

감명 받은 몇 구절을 남긴다.

 

“웃음은 근사해요. 나와 다른 모든 이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거든요.”

 

“나는 희망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배웠습니다.”

 

“음악이 내 목숨을 구해 줬어요. 음악은 신입니다.”

 

“누구도 당신의 정신을 훔치지는 못합니다. 내가 유대인들에게 감탄하는 것은 그들의 유별난 교육열 때문이에요. 어린이 교육은 가정의 가치 중 가장 중요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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