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과 혀 -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권정현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주의 허허벌판, 꿈결같은 생과 사의 군무[칼과 혀]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겪어보지 않더라도 총탄이 난무하고 폭탄이 펑펑 터지는 살벌함을 간접적으로 경험해볼 순 있다.

기록물이나 그 시대의 참상이 담긴 소설, 영화 등의 매체를 통해 접하는 것인데, 그것들은 뭐랄까, 내내 살풍경하고 건조한 바람 맛이 난다.

간혹 전우애나 울컥하는 충성심, 안타까운 연인들의 이별 등을 통해 눈시울을 붉히는 적은 있으나 오감 모두를 찌릿하게 건드리지는 못한다.

[칼과 혀]는 그러니까, 흑백의 무성영화에 비로소 색과 소리를 입힌 전쟁 이야기라고나 할까.

 

한중일 삼국이 지리멸렬하게 얽혀 돌아가던 동아시아의 어두운 시절, 일본은 만주에 괴뢰국을 세운다.

1945년 일제 패망 직전의 만주, 이제 곧 있으면 스러져 없어져 버릴 그 허망한 나라에서 맞닥뜨린 세 인물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비린내 풍기는 도마 위에서 생애 첫날을 맞이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요리사가 된 광둥요리사 첸

제 19대 관동군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 그는 거대한 제국의 허울 좋은 주인이자 공포와 비명을 감춘 천수각의 성주이자 매끼 맛깔나는 음식에 목말라하는 요리애호가이자 예술비평가라 스스로를 평한다.

죽음의 그림자가 어슬렁거리는 만주에서 요리사와 손님으로 만난 이 둘은 누가 봐도 갑과 을의 관계이지만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전쟁터에서는 갑과 을이지만 요리를 매개로 만났을 때는 '칼과 혀'의 불꽃 튀는 접전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쟁에 있어서는 무능하며 당장 민간인으로 전역시켜야 옳은 이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 다른 이름으로 '모리'는 칼을 차고 있지만 뜻밖에 요리 앞에서는 한없이 연약한 인물로 자신의 껍데기를 벗어놓는다.

황궁 요리사가 되겠다며 어슬렁거리던 첸은 모리 앞에 끌려오고 목숨을 건 미션을 완성시켜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다.1분 안에 불 사용 없이 오로지 칼의 실력만으로 모리의 입맛을 충족시킬 것. 첸은 '송이'를 구해 와서 모리의 혀를 녹인다.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인물은 청진이 고향으로 위안부가 되었다 풀려나 첸의 아내가 된 길순이다.

 

 

'길순'이라는 이름의 여인이 읊조리는 독백이 작고 휑한 회오리바람을 몰고 온다.

 

첸은 광둥을 지키기 위해 조직된 지하 자경단원이었어. (...)전쟁이 나면 멍청한 남자들일수록 으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정의를 짊어지고 불속으로 뛰어들길 주저하지 않잖아? 그건 때가 되면 규칙적으로 여자들에게로 찾아오는 이름 모를 일본 병정들이나, 남부식 권총 하나로 세상의 부조리를 끝낼 수 있다고 믿는 내 오빠나, 도마 하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첸이나 모두 매한가지야. 그래서 난 사내들을 믿지 않아.-92

 

살육의 광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매일 아침마다 오늘 먹을 것을 생각하거나 중국 황제가 회갑연에서 먹었다던 만한취엔시를 재현해 내라거나 하는 모리의 미식 취미는 바람만 불면 흩어져 버릴 봄날의 벚꽃잎처럼 허무하기 그지 없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래도, 요리를 맛보고 기대하고 요리를 논하는 과정에서 칼과 혀의 날카로움이 만나 그 예리함을 중화시키려는 여림이 엿보인다.

요리와 모리 살해가 주요 이슈인 만큼 이 셋이 이루어내는 긴장감과 중간중간 등장하는 요리에 대한 묘사가 이 책의 백미다.

 

아쉽지만 고추탕은 더 매웠어야 한다. 무언가를 입에 넣어 씹는 순간은 인간이 자신의 생 앞에서 가장 진실할 수 있는 시간이다. 매운맛을 견뎌낸 소고기들이 혀에 부드럽게 녹을 때 비로소 고통조차 달콤해진다. 적들이 넘실거리며 국경을 넘어와 온몸이 무거운 사슬갑옷을 입은 것처럼 거북해질 때도 나는 한 끼의 식사 앞에서 여유를 부릴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다리를 베고 누워 먹던 분고규의 평화를 아직도 기억한다.-122

 

첸과 모리와 길순. 그들은 원래 목숨을 거둬야 할 사이지만 칼로 혹은 다른 무엇으로 서로의 혀를 잘라낸다.

요리를 맛보지 못하지만 말은 할 수 있도록...

맛보는 것과 말하는 것 중 하나를 거두어야 한다면 무엇을 거두게 할 것인가.

요리사임에도 불구하고 첸은 맛보는 것을 포기하겠다고 했다.

말이 닿지 못해서 벌어진 참혹한 전쟁인데도 결국은 말로 복구해내고 상처를 어루만지고 새로운 세상을 구현해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칼과 혀의 강렬한 대비, 혹은 비유 혹은 은유...

그 자리에 무엇을 대신 넣어 해석해야 할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최고의 광동 요리사가 내놓는 음식에도 먹는 사람마다 다른 해석을 내놓을 수 있듯이 이 책의 진가는 한 번, 두 번, 세 번 곱씹으면서 알아내야 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남 오빠에게 - 페미니즘 소설 다산책방 테마소설
조남주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성을 중앙에 놓아보기 [현남 오빠에게]

 

올해 [82년생 김지영]은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았다. 딱히 신선한 이야기를 다룬 것도 아닌데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인 것은, 우리가 흘려넘긴 어떤 것들 중에서 시선을 고정시킬 만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82년생 김지영들의 공감을 사고 울분을 통감하면서 울고 웃겼던 이야기.

그 책을 눈여겨 보았던 사람들이라면 이 책, [현남 오빠에게]에도 당연히 조용한 시선을 던지게 될 것이다.

대놓고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한다.

[82년생 김지영]의 작가 조남주를 비롯, [쇼코의 미소] 작가 최은영, [빨간구두당]의 구병모, [국경시장]의 김성중 등 작가 7명이 각기 페미니즘을 주제로 해서 쓴 단편 7편을 모았다.

표제작인 조남주의 <현남 오빠에게>가 단연 쉽게 읽히면서 가장 인상에 깊게 남는다.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가 '강현남의 여자'로 살았던 경험을 사뭇 단조롭게 늘어놓는다. '단조로운' 이라고 했지만 그 어조 속에서 우리는 많은 감정들을, 미쳐 날뛰고 싶도록 격한 공감을 하게 만드는 바로 그 감정들을 함께 읽어내려갈 수 있다.

현남 오빠의 프로포즈 앞에서 과거 순진한 여학생으로서 순종하고 숨죽이고 살았던 때를 회상하다 점점 고조되는 뉘앙스. 조목조목 따지고 들다 보니 잘못한 건 내가 아니라 현남 오빠였더라는 결론을 내기까지 보이지 않는 롤러코스터를 타듯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결국 고요하던 밤하늘에 화려한 불꽃이 '빵'하고 터지듯 극적인 순간을 맞이한다.

 

오빠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를 돌봐줬던 게 아니라 나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었더라. 사람 하나 바보 만들어서 마음대로 휘두르니까 좋았니? 청혼해줘서 고마워. 덕분에 이제라도 깨달았거든, 강현남, 이 개자식아!-38

 

쌓이고 쌓인 악감정들을 풀어내기엔 좀 약한 폭발이 아니었나 싶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대리만족으로 충분하다, 싶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잘 짚어내기도 힘들 텐데...

일시적인 순간에 느꼈던 억울함들을 차곡차곡 포개고 보니 어느 동화 속 공주가 묵었다던 높다란 침대만큼 되는 것 같더라.

그래, 맞아. 그 때 나도 그런 적 있었어.

당연히 빡치지.

아, 그 자식 앞에서 나는 왜 그렇게 속 시원하게 대꾸를 못해줬던 걸까?..

등등.

당연히 할 말 하고 살아야 하는데도 그러지 못하고 꾹 참아왔던 지난날들, 혹은 어제, 그제의 일들을 한데 포개서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가 현실에서 당하게 되는 수많은 좌절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봐주는 단편들은 <현남 오빠에게>, 당신의 평화>, <경년>들이다.

현실에서 있음직하진 않지만 여성이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색다른 이야기들은 <모든 것을 제자리에>, <이방인>, <하르피아이와 축제의 밤>, <화성의 아이>를 꼽을 수 있겠다.

구병모의 <하르피아이와 축제의 밤>은 여장남자 대회에 참가한 '표'의 이야기다.

의아스러운 계기로 참가를 했는데 여장남자 대회가 끝나갈 무렵 난데없이 날아드는 화살이라니. 주변의 사람들이 진짜 휙휙 날아다니는 화살에 맞아 쓰러지고 피를 흘린다. 가발이며 화장이며 뾰족한 스틸레토 힐까지 달아나는 데 거추장스러운 차림은 이제 달아나야 할 때에 제대로 벗겨지지조차 않는다. 살아남으려면 이 여성 분장을 없애버려야 하는데 빨간 원피스는 살갗에서 떼어내지지 않고 구두 뒤축을 뭘로 붙여놨는지 발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어떡하나, 어떡하나...하는 사이 '표'는 죽음의 공포와 살갗이 떨어져나가는 아픔속에서 스스로 아비규환을 겪는다.

 

각 작품마다 작가들의 '작가노트'가 곁들여져 있다.

개성 있는 여성 작가들의 이야기와 함께 읽으며 작가들의 의도를 엿보는 일도 재미있다.

각기 다른 문체 속에 담은 날카로운 현실 풍자와 페미니즘에 대한 진지한 성찰들이 한 작품씩 읽을 때마다 색다른 맛을 선사해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쉬왕의 딸
카렌 디온느 지음, 심연희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버지를 사냥하라[마쉬왕의 딸]

 

 

 

 

[마쉬왕의 딸]은 2015년에 나왔던 책 [룸]의 후속작인가 싶을 정도로 놀랍게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룸]은 한 남자에게 유괴되어 7년간 세상과 단절된 채 살면서 아들을 낳아 키우다 어렵사리 구출된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쉬왕의 딸]은 아마도 자연스레 그 이후를 연상하게 되는 기묘한 스토리텔링으로 이어진다.

물론 여러 가지 세세한 정황은 다르지만 큰 줄기는 비슷하다.

한 남자가 어린 여자아이를 유괴했다. 딸아이를 하나 낳아 키운다. 엄마와 아이가 탈출한다.

아빠는 동화(그림 동화 혹은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마쉬왕'같이 잔혹하다 해서 마쉬왕이라 불린다.

세상의 온갖 관심을 다 받고, 아이의 외조부모는 사연을 팔아 돈벌이를 한다.

외조부모도, 엄마도 죽었다.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자라게 된 아이-주인공은 자라서 결혼을 한다.

딸아이 둘을 낳는다.

그러던 어느날,

"마쉬왕"이 감옥에서 두 교도관을 죽이고 탈옥한다.

"마쉬왕의 딸" 헬레나는 남편과 자신의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아버지를 찾기로 결심한다.

 

 

도심과 떨어진 숲에 살면서 열매로 잼을 만들어 팔던 헬레나는 아버지의 탈옥 소식을 듣고 고민에 빠진다.

아직 남편에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들은 마쉬왕의 행방을 마쉬왕의 딸에게 묻는다.

과거 아버지의 마수에서 벗어나 탈출을 감행하고 외조부모와 함께 산 뒤로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아버지였는데.

총을 챙겨 들고 마쉬왕을 찾으러 떠나는 마쉬왕의 딸은 동화 속 이야기의 주인공과 참 많이도 닮았다.

이집트 공주였던 어머니와 바이킹족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마쉬왕의 딸은 "슈렉"의 피오나처럼 낮과 밤이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낮에는 아름다운 여자아이였다가  밤에는 개구리로 변신한다. 성격도 생긴 것과 같이 극과 극을 달리며 홱홱 바뀌는지라 한 몸에 두 개의 성격이 번갈아 드나든다.

동화 속에서 선과 악의 묘한 공존을 보여주는 마쉬왕의 딸은 현실에서  '아버지'라는 존재 앞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어쩔 줄 몰라하는 헬레나로 분한다.

이야기는 현실과 과거를 자주 왔다갔다 하는데, 총을 들고 사냥꾼이 되어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현실의 헬레나는 매 순간순간 숲속 외딴 오두막에서 함께 살았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억을 떠올린다.

주변 사람들과의 접촉을 끊은 채 반사회적으로 살았던 그 시절의 아버지를 헬레나는 '나르시시스트'로 기억한다. 자기중심적이고 안하무인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미화되어서였는지, 아직 선과 악의 비교대상이 없었기 때문인지, 헬레나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는 손재주 많은 예술인이었고 엄격하지만 이야기로 상상력을 채워주는 존재였다.

하지만 사냥꾼의 손에 잡힌 토끼처럼 달아날 생각조차 못하던 어머니가 가여워보인다는 생각이 들 즈음 나타난 스노모빌의 사나이 덕에 세상을 향한 창을 활짝 열게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납치했고 강간했으며 사람을 죽인 적이 있는 무시무시한 존재라는 것을 뒤늦게 알고 마쉬왕의 딸답게 호전적인 의지를 불태우며 적극적으로 탈출한다.

어린 소녀를 납치해 14년 동안 감금한 악명 높은 범죄자, 제이콥 홀브룩, 마쉬왕은 이제 자신만 바라보게 키웠던 마쉬왕의 딸에게 사냥당한다.

 

 

그 괴물은 먹을 때마다 몸집이 커졌고, 그래서 배부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괴물을 죽이지 않았떠라면, 온 마을이 파멸했을 것이다.

나는 방아쇠를 내렸다.

아버지는 웃었다.

"너는 날 쏠 수 없다, 반지이-아가와아테야아.(작은 그림자)"-367

 

결말은 처음부터 나 있는 이야기 구조였기에 이렇게 끝날 줄 알고는 있었지만

아버지와 딸의 대결이라는, 쉽사리 상상이 가지 않는 심리싸움이었기에

그만이 가지는 스릴이 대단했다.

 

사랑하지만 원망할 수밖에 없는, 애증의 대결 앞에 숨죽이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어찌 보면 아주 얇은 종이 한 장의 차이로 선이 이기는 형국이 되고 말았지만

약간만 비껴 갔더라면 결말은 아주 다른 방향으로 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마지막 순간에 어느 쪽을 택하게 될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게 만드는 과정이 좀 더 세밀하게 그려졌더라면 더 심장 쫄깃했을 이야기다.

그림 동화든 안데르센 동화든,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해피엔딩만을 접해왔기에 이렇게 뒤틀리고 음울한 동화에는 적응이 잘 안된다. 오래오래 행복하게~의 과정을 너무 간단한 공식처럼 치부해버렸던 습관이 오히려 새로운 동화에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든 것 같기도 하다.

마쉬왕의 딸 모티브를 차용해서 영리하게 잘 짜낸 이야기인 것 같다.

 

#마쉬왕의딸,#북폴리오,#심리스릴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화 텍스트로 보는 서양사
박유정 지음 / 인간사랑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권으로 끝내는 깊이 있는 서양사 [문화 텍스트로 보는 서양사]

 

 

 

요즘 들어 한국영화에서 역사를 소재로 한 내용이 많이 언급되는 것 같다.

아이들이 크고 있어 애니메이션보다는 좀 더 의미 있는 영화를 보여 주면 좋겠다 싶어 영화 순위를 죽 살펴보면 어김없이 역사 영화가 한 편씩 끼어 있다.

아마 [명량] 이후로 더욱 자주, 색다른 인물 평가를 덧입힌 영화나 역사적 사실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는 영화가 등장하는 듯 싶다.

사도, 덕혜옹주, 암살 이후 최근에는 미스 프레지던트, 박열 같은 영화들이 눈에 띈다.

학창 시절 배웠던 역사만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던 내게 요즘의 역사 영화를 보는 것은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는 일이 되기도 하고 역사를 껍데기만 배워왔구나 하는 반성을 하게도 한다.

특히 어린 아이들과 함께 영화를 보러 가는 때면, 좀 더 열린 의식으로 영화를 접할 수있도록 인도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부담감이 꽤 드는 것도 사실이다.

아이들은 그저 주연 배우의 웃는 얼굴, 우는 얼굴을 보며 저간의 진실을 조금씩 엿볼 뿐이고 커다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런 일이 있었구나 정도를 기억에 남기는 것 뿐일 텐데도...

엄마라는 입장에 있기에 조잘조잘 떠들며 영화평을 이어나가다가도 불쑥 치고 들어오는 아이들의 질문에 흠칫 놀라기 여러 차례.

글로만 배웠던 역사를 영화라는 살아 움직이는 매체로 접하고 나면 그 시절의 상황이 궁금해지고 이제까지 내려왔던 평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과장해 말하자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일지도 모를,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던 것 아닌가.

대학 때의 교양 강의 때를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의 역사 특히 근대사 부분에 있어서는 의식적으로 기피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한국역사 말고 서양사를 택해서 들었었다.

길고 지루한 수업 틈틈이 꾸벅꾸벅 졸다가도 귀에 들어온 내용이 있었으니 당시 개봉했던 영화, 리처드 기어 주연의 <써머스비> 에 관련한 것이었다.

남북전쟁에 나간 써머스비가 전쟁이 끝난 후 죽음이 공식화 되었으나 고향을 떠난 지 7년 만에 돌아왔다. 돌아온 써머스비는 새로운 인간으로 변한 써머스비였고 그 때문에 고향사람들을 위시한 그의 아내는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탕자였던 과거와 너무 다른 써머스비. 그는 진짜 7년 전 마을을 떠난 그 써머스비인가?

지루했던 수업은 단번에 '미시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서양사의 한가운데로 나를 이끌었고 그 한 편의 영화로 인해 기억할 만한 수업이 되었다.

 

[문화 텍스트로 보는 서양사]는 "문화-예술로 본 서양사"라는 교양과목을 위해 쓴 강의노트를 바탕으로 지은 책이다. 이 책을 접한 이들은 아마도, 길고도 지루했을 서양사의 바다를 건널 때, 노를 잡고 파도를 잘 헤쳐나갈 길잡이를 만난 기분이 들 것이다.

이 책은 문화와 예술을 통해 서양의 역사를 살펴보는 강의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기에 흥미도, 집중도 배가될 것이다.

내가 그 시절, 영화 한 편의 이야기에 그토록 눈이 번쩍 뜨였듯이...

 

무엇보다도 역사를 안다는 것은 한반도의 역사적 정세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세계를 이해하는 길이요, 인간을 이해하는 길이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일지라도 그것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그러한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를 열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6

 

저자는 서양사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고중세사, 근대사, 현대사가 그것인데 각각의 연대기 분류를 문화와 예술을 매개로 살펴본다.

각각의 시대별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는 서양사 관련 저술이나 사전을 참조하였고, 이를 문화와 예술을 가지고 해석할 때는 역사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철학적 해석으로 나아가고자 했다고 한다.

풍부한 텍스트를 늘어놓아도 그것을 하나로 관통시킬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자료들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커다란 흐름을 한 눈에 이해할 수 있는 풍부한 텍스트들을 보며 서양사를 공부하는 것,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대문명에서는 라스코 동굴벽화를 통한 선사시대에 대한 논의나 함무라비 법전을 통한 고대문명에 대한 논의, 고대 그리스에서는 호메로스와 플라톤의 저술, 헬레니즘에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로마제국에서는 시저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 중세에 대해서는 고딕교회, 스콜라철학, 십자군 원정을 다룬다.

 

 

 

근대사 편에서는 르네상스와 근대국가의 탄생,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시민혁명과 계몽주의, 낭만주의와 종교개혁,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를 다룬다. 르네상스에서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과학혁명에서는 갈릴레이의 <피사의 탑>, 시민혁명에서는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낭만주의에서는 노발리스의 시<밤의 찬가> 등을 다루는 식이다.

 

 

현대사 편에서도 제국주의 시대, 제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공산화, 제2차 세계대전과 전체주의, 냉전과 탈냉전의 현대사회를 다루는데 이 때도 다양한 문화예술을 통해 보여준다.

제국주의 리얼리즘 문학으로서 에밀 졸라의 [나나], 러시아 공산화에서는 러시아 겨울궁전에서의 피의 일요일, 전체주의에서는 오웰의 [동물농장] 등이 등장한다.

 

 

흥미로운 강의가 펼쳐지는 가운데, 역사를 왜 알아야 하나, 역사는 왜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을 한 번쯤 해 보았다면 그에 대한 답도 스스로 찾아내야 할 것 같다.

역사의식은 한 국가와 민족의 정신세계를 형성하고 세계에 대한 종합적 가치판단과 안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므로 역사를 배워야 한다는 저자의 당부에 힘입어 나 스스로도 역사를 알아야 할 필요성을 찾고자 한다.

'위안부'가 뭐예요? 저 할머니는 왜 '아이 캔 스피크'라고 하는 거죠?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보고 당연히 뒤따르는 아이들의 질문들에 잠시 당황했던 마음을 추스리고 답을 찾으면서 '역사의식'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주식회사 히어로즈
기타가와 에미, 추지나 / 놀(다산북스)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간단히 말하면 히어로 제작소 [주식회사 히어로즈]

 

독특한 일본 책의 제목이 얼마간 내 눈을 사로잡았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든지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등등..

이 책들은 특이한 제목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서인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는 10월 19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계속되는 야근과 상사가 주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어느날, 지하철에서 쓰러지는데 선로로 떨어질 뻔한 주인공을 누군가 구해준다.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소개한 그 누군가는 그 이후 급속도로 친해지고 우정을 쌓으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런데 그 친구는 이미 3년 전에 죽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

이 기이하면서도 관심 가는 이야기는 바로 [주식회사 히어로즈] 저자의 전작이다.

컨텐츠 하나가 성공하면 애니메이션이든 책이든 영화든 그 분야를 가리지 않고 뻗어나가는 게 일본 문화의 추세이다 보니 책을 읽어도 만화 같고 만화에서 본 것 같은 내용이 바로 영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참 소소한 이야기지만 소소한 일상들이 한 끗 다른 상상력을 만나 새롭게 연결되는 것이 신기하다.

[주식회사 히어로즈]의 내용도, 처음엔 잔잔하게 시작하다가

어느샌가 스펙터클해지고 커다랗게 뻗어나가는가 했는데 다시 인생의 한 굽이를 돌아나가고 있는 주인공에게 집중하게 되는 식이다.

 

다나카 슈지는 사정이 있어 회사를 관두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길거리 전광판에서는 자신이 초등학생이었을 때 만화가로 데뷔한 도조 하야토가 <톤 온 톤> 이라는 작품을 히트시키고 인터뷰를 하고 있는 걸 보고

"완전히 나 혼자 제자리걸음이구나....."하고 중얼거리는 다나카.

엄마의 부탁으로 찾아간 할아버지는 다나카의 뇌리를 떠돌게 되는 말을 남긴다.

'아무런 재미도 없는 인생이었어.'

어린 시절 뜻밖에 깊은 정을 나누었던 할아버지는 위중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에서는 짜증나는 녀석이 한심한 부탁을 하기나 한다. 그런데 그 녀석 대신 하기로 한 아르바이트가 꽤 수상하다.

'히어로 제작'을 돕는 간단한 일이라나...

일주일 간의 아르바이트 대타 후,

성실함 하나만은 누가 봐도 인정하는 다나카. 진정성 하나로 그 자격을 부여받은 다나카는 히어로 제작소의 정직원으로 일하기로 한다.

합격률 3퍼센트의 높은 장벽을 뚫고...^^

 

재미없고 활력 없던 다나카의 인생은 그 날로 달라졌다.

넓기만 한 사무실에 첫 출근한 날은 새로운 세상을 만난 듯 했다.

 

수많은 컴퓨터와 낯선 실험 기구, 신기한 기계들에 둘러싸인 곳에서는 사방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목소리와 전자음이 들렸다.

"HEROES, bonjour."

그 소리를 신호로 사무실 안에 있는 직원들이 다시 일을 시작하는 곳.

이 곳에서 다나카는 어떤 일을 하게 될까?

 

유명 만화가 도조 하야토의 스트레스를 담당하여 도조가 멋진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도록 돕는다. 대개는 그가 말하는 걸 들어주고 스트레스가 심해 발광할 때는 온몸을 붙들어매주기도 한다.

즉, 의뢰인을 히어로로 만드는 것이다.

인기 연예인이 평범한 감각을 얻기 위해 평범한 생활을 경험하고 싶다고 하면 그것도 도와준다.

남의 인생을 의뢰받아 중간에 쓰윽 개입하는 일은 쉬워보이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만은 아니다.

인간관계에 치여 본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당면한 자신의 일-자세히 말하자면 잘나가는 회사에서 승승장구 하던 중 버스에서 가만히 서 있다가 치한으로 몰리고 결국 회사를 그만두게 되어버린 일- 만으로 허우적거리기도 바쁜데 어떻게 남의 일에까지 신경을 쓸 수 있을까?

 

 

몇 달 사이에 일어난 일은 대체 뭐였을까.

현실 같기도 하고, 꿈꾸는 듯도 한 신비한 기분이다.-299

 

명랑한 청춘물이라 치부해 버리기엔 말랑함 속에 단단한 알맹이가 들어 있다.

누군가의 인생을 히어로의 인생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하는 조력자의 일이지만 여전히 이어져 있는 인간관계들로 인해, 나를 포함한 모두가 히어로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덮어놓고 재미있는 남의 인생 응원 스토리!

딱 맞는 문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