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딱 한 개만 더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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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가가 형사의 눈이 번뜩이면, 사건은 해결되지만, 우리의 가슴은 뻥 뚫린다.

그가 파헤치는 사건은 모두 우리 중의 누군가가 한 번쯤은 품었음직한 마음 속의 어둠이 표출된 사건이기 때문에 가가 형사가 정곡을 콕 찌르면 움찔하게 된다.

여기, 이번 책은 5개의 사건 파일이 모인 것이다.

각각의 이야기가 구성을 달리 하면서, 범인을 압박해가는 가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 보여준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가가 형사다.

 

1.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잠자는 숲>의 한 부분이 확대되어 이 이야기가 탄생된 듯 싶다. “발레에 관심이 있다.”는 가가 형사의 말을 그냥 흘려 듣게 되지 않는 것은, <잠자는 숲>에서 있었던 발레리나와의 로맨스 때문이 아닌가 한다.

유게 발레단의 사무국 직원 하야카와 히로코가 맨션에서 떨어져 죽은 사건. 가가는 처음부터 범인을 15년전 <아라비안 나이트>의 댄싱 히로인이었던 데라니시 미츠요로 점을 찍고 그녀를 압박해나간다. 가가가 어디까지 알고 질문하는지 모르는 미츠요는 결정적인 한 마디로 쌓아올린 알리바이를 허물어뜨리게 된다.

“당신의 범행은 완벽했어요. 공연한 말을 지어내지도 않았고, 오히려 최대한 거짓말을 줄이려고 했지요. 당신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거짓말을 딱 한 개만 더 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48

완벽한 추리에 더해서 마지막 한 마디를 유도해 내는 가가의 냉철함.

무릎을 ‘딱’ 하고 안 칠 수가 없는 깔끔한 사건 처리가 아닌가.

 

2. <차가운 작열>

이 사건은 엄마인 내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사건이다.

주부 우울증. 산후 우울증.

남편이 무관심과 육아의 스트레스로 인해 파친코에 빠진 여성의 비참한 이야기다.

거기다, 남편의 직업이 공작기계 회사원이라는 점이 이 사건을 한층 그로테스크하게 만든다.

찌는 듯이 작열하는 여름날. 돌이 채 안 된 아이를 혼자 눕혀 두고, 엄마가 파친코에 다녀 온 사이, 아이는 그만 질식사하고 만다. 망연자실하고 있던 아내를 발견한 남편은 분노하여 목을 조르게 되고, 도둑의 소행으로 가장한 채, 죽은 아이를 숨길 도리를 강구하다, 회사로 가져간다. 열 경화성 수지를 사용하여, 아이의 정수리에서부터 몇 번을 부어 가며 굳힌다.

어떤 정신 상태로 자신의 아이에게, 아내에게...

차가운 작열이라는 제목이 으스스할 정도로 잘 어울리는 사건이다.

 

3. <제 2지망>

자신이 잃어버린 꿈을 아이에게 투사하여, 아이의 스케줄을 철저히 점검하며 아이에 매달려 살던 엄마. 남편과 이혼까지 불사하며 말이다.

“당신한테는 졌다. 하지만 리사를 불행하게 만들면 당신 용서 안 해.”-141

이제 궤도에 올라 올림픽에 대한 기대도 해 볼만할 때. 엄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겨버렸고, 남편 아닌, 다른 남자에게 틈을 허용해 버렸다. 그런데, 그 남자가 그녀의 집에서 목이 졸려 죽은 사건. 여자는 강도의 짓으로 몰다가, 자신에게로 포위망이 좁혀 들어오자, 자신이 한 일이라고 자백한다.

그러나, 진실 앞에 그녀가 할 수 있었던 한 마디 말.

“저애만은..., 꼭 꿈을 이뤄주기를 바랐는데.”

자녀교육에 유달리 집착하는 우리나라 엄마들이 읽었다면 흠칫 했을 내용인 것만 같다.

 

4. <어그러진 계산>

부부란 뭘까?

마음을 완전히 터놓는다고 생각하는데도 다른 한쪽이 마음을 닫으면, 그것은 완전한 일방통행이 되고 만다.

비극적인 사건의 씨앗은 의사소통의 부재가 아닐까.

남편은 아내를 하인 부리듯 하고,

“살살 봐주면 기어오르니까 평소에 바짝 조여야 돼. 너희도 마누라 얻으면 절대로 만만하게 대해서는 안 돼. 여자라는 건 어떻게 교육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거라고.”-190

라며 시동생들 앞에서 일장연설을 토하는 남자였다. 점점 잘못한 결혼이라며 후회하는 마음이 들 무렵 알게 된 남자와 불륜에 빠진 여자. 여자는 불륜남과 함께 남편을 살해할 계획을 세우지만, 계산이 어그러져, 남편이 그 계획을 알게 된다. 결국, 그녀의 침대 밑 나무 틀에 얼음과 보냉제와 함께 몇날 며칠 얼려져 있어야 했던 것은, 잠시나마 ‘마음에 감춰둔 사랑’을 꺼내 보여준 불륜남의 시체. 국화와 마거리트로 그의 가는 길을 밝혀주려고 했던 그녀는, 그러니까. 두 남자의 사랑을 같이 받았던 것이겠지. 그녀가 원했던 사랑과, 벗어나고 싶어했으나, 벗어날 수 없었던 사랑.

 

5. <친구의 조언>

가가의 친구네 집 이야기.

대학에서 같은 사회학부였던 하기와라라는 친구.

운전 도중 졸음이 밀려와 교통사고를 낸 친구를 문병 온 가가. 우정이라는 이름을 걸고, 쓴소리를 해야만 했다.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준 것은 하기와라의 아들 다이치의 물고기 그림.

“내가 말했었지. 다이치는 순수한 아이야. 자기가 본 대로 그렸거든.”-253

사회적 편견을 받고 있는 ‘게이’라는 특이한 소재가 나온다. 내 아내가 게이라니...

 

마지막 장까지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추리가 쉴새없이 연결된다.

히가시노 게이고와 동시대를 살고 있어서 나는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본격적인 추리소설부터, 지금의 사회성 짙은 소재를 다룬 사건들까지. 어디까지가 그의 한계인지, 내가 지켜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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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의 지혜 - 한 세기를 살아온 인생 철학자, 알리스 할머니가 들려주는 희망의 선율
캐롤라인 스토신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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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옛날 대가족이 모여 살던 시절에는 멘토링이 따로 필요 없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얻어 듣는 말씀 속에 삶의 지혜가 다 들어 있었으니까.

요즘은 핵가족이니, 솔로니 하면서 점점 규모가 작은 가족의 형태로 진화하고 있어서 고민 하나 살짜기 풀어 놓을 데가 없다.

가는 귀가 먹어도, 꿈꿈한 냄새가 나도 할머니 옆에 슬쩍 기대어 앉아 가만가만 속내를 풀고 싶을 때가 있는데 현실에선 그게 안되니, 책으로 대체할 수 밖에.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재난, 홀로코스트를 겪고 살아남으신 할머니의 삶의 지혜라면 내공이 장난이 아니겠지 싶었다.

겸손한 마음으로 조용히 귀 기울여 들어보고자 <백년의 지혜>를 집어 들었다.

‘내 마음의 고민 적어도 한 가지는 해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란 기대를 품고서.

111세의 알리스 헤르츠좀머 할머니.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것은 앳된 소녀 때의 미소와 나이 들어서의 할머니의 모습.

할머니는 어린 시절의 미소를 여전히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살아온 세월이 얼굴에 그대로 스미게 된다더니, 할머니의 얼굴에 무척 천진난만하고 여유로운 웃음이 녹아있다.

 

“할머니, 어떻게 살아 오셨어요?”

한 세기를 살아온 인생 철학자인 할머니를 앞에 두면 누구나 해보고 싶어 하는 질문.

장수의 비법을 묻고, 건강을 잃지 않는 비법을 묻는 인터뷰는 종종 보아왔다.

소식하기.

걷기.

즐거운 마음으로 생활하기.

조금씩 꾸준히 움직이기.

그렇지만, 그냥 장수하는 노인들과 알리스 할머니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왜냐고? 그녀는 홀로코스트를 겪고 살아남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홀로코스트를 겪었다고 해서, 나는 독일에 살던 유대인이겠거니,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1903년 체코의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그러면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살짝 비켜갔을 수도 있지 않았나?

어이쿠. 나의 무식이 여기서 탄로나는구나.

이 책에는 제 2차 세계대전 전후의 동유럽 역사가 소개되어 있다.

그 시절, 지도자들의 그릇된 판단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스실로 보내지고, 희생당했는지, 내가 미처 몰랐던, 아니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동유럽의 실상이 보고 되어 있다.

 

유복한 집안에서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피아노를 접하게 된 알리스는 피아니스트로 성장하게 된다. 1931년 레오폴트 좀머와 결혼해 아들 라파엘을 낳지만, 행복한 생활은 잠시, 1943년 알리스와 남편, 아들 라파엘은 체코에 들이닥친 나치에 의해 테레진 수용소에 보내진다. 테레진은 대규모의 수용소로, 예술가의 피난처로 홍보되었으나, 사실은 아우슈비츠 등 동유럽 전역의 나치 학살장으로 보내지는 환승역 역할을 한 곳이다. 이곳에서 2년을 보낸 알리스와 아들은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되고, 아마도 한 병사의 희생이 있었으리라, 그녀는 짐작한다. 그녀의 피아노 연주에 감동을 받은 한 병사가 음악에 대한 감사와 함께 이런 말을 남겼기 때문이다.

 

“부인이랑 아드님은 퇴출 명단에 오르지 않을 겁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테레진에서 지내실 겁니다. 염려 마세요. 안전하실 겁니다.” -55

 

1946년 아들과 함께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재혼하지 않고 혼자 아들을 키운 그녀. 새 삶을 개척해 나가는 데 그녀와 함께했던 것은 첼로 교수로 훌륭하게 성장한 아들과 음악에 대한 열정. 여든이 넘어서는 런던으로 옮기지만 아들의 돌연사로 큰 충격을 받는다. 그렇지만 최근까지도 런던의 제 3기 대학에서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며, 철학자들(특히 스피노자)의 가르침을 삶에서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바흐, 베토벤, 쇼팽, 슈베르트를 외워서 매일 세 시간씩 연주하며 예술가로서 의미를 찾는다.

 

111년을 살면, 한 권의 책으로 그 삶이 정리가 될까?

이 책에서는 그녀의 에너지를 담아, 많은 이들에게 긍정의 힘을 전달하는 게 목적이지 싶다.

수많은 세월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낙천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알리스는 쌍둥이였다고 했다. 쌍둥이 언니였던 마리안느는 쌍둥이임에도 불구하고, 알리스와 성격이 판이해서 모든 일을 부정적으로 보았다고 했다. 낙천적인 성격으로 홀로코스트를 극복하고,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일어나고 다시 일어나고...

그녀가 남긴 백년의 지혜를 엿보면서 나의 고민도 슬금슬금 물러가는 것을 느낀다.

기나긴 세월을 이겨내고 남긴 그녀의 말은 모두가 명언이다.

감명 받은 몇 구절을 남긴다.

 

“웃음은 근사해요. 나와 다른 모든 이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거든요.”

 

“나는 희망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배웠습니다.”

 

“음악이 내 목숨을 구해 줬어요. 음악은 신입니다.”

 

“누구도 당신의 정신을 훔치지는 못합니다. 내가 유대인들에게 감탄하는 것은 그들의 유별난 교육열 때문이에요. 어린이 교육은 가정의 가치 중 가장 중요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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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가 필요해
정현정.오승희 지음 / 21세기북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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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로맨스란 말은 여고 시절, 하이틴 로맨스를 즐겨보던 때에나 들어본 말이었다.

그러니까, 로맨스라는 말은, 이제 결혼 10년차에 접어드는 나같은 30대 후반의 주부에게는 봄볕에 촉촉한 땅을 밟고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아른아른 거리는,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안타까운 단어인 것이다.

아득한 그 시절. 학업의 스트레스를 피할 목적으로 누군가가 만화방에서 또는 책 대여점에서 하루분량으로, 외국 하이틴 로맨스를 번역한 얄팍하고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책을 10권 정도 빌려온다. 대기자들은 순서를 정해서 죽 돌려보기 시작한다. 속독의 대가였던 나는 항상 1번 타자였다. 빌려온 주인을 제치고 1번으로 읽어보게 되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쉬는 시간 10분, 점심 시간, 그리고 수업 시간 짬짬이, 마음 먹은 날은 야간자율학습 시간을 통째로 할애해 가면서까지 로맨스 소설에 푹 빠져 살았던 적이 있다. 선생님들의 매서운 눈초리와 점점 가까워오는 질질 끄는 슬리퍼 소리의 압박을 이겨내면서 로맨스 소설을 읽어나가던 그 스릴은 지금까지도 여고시절의 추억으로 떠오른다.

 언제나 180이 넘는 키에 완벽한 근육, 구릿빛 피부의 그리스 조각상 같은 얼굴의 남자가 주인공이다. 여주인공은 전형적인 미인이 아닌, 좀 개성적인 인물이지만 대개는 키가 자그마하고 귀엽고, 남자로부터 보호받아 마땅한 모습의 캐릭터들이 주를 이룬다.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파워게임, 밀고 당기기, 그러나 결국엔 달달한 결말로 언제나 해피엔딩인 꿈같은 소설들. 그 소설들은 진정, 현실에서 일어나기 불가능한 환상 속의 이야기, 그 자체였던 것이다. 10대의 로맨스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현실이란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가는 나이를 먹어버린 것이었고, 생활에 찌들어 버린 것이었고, 로맨스란 단어를 기억 저편으로 멀리 내던져 버린 지 오래인 것이었다.

그래서, <로맨스가 필요해>라는 소설을 보았을 때, 나의 시선이 번쩍이는 분홍빛으로 휘갈겨 쓴 책 제목에 확 꽂힌 것은, 매일 매일이 똑같은 무료한 삶에 지친 내 머릿속에 여고시절의 반짝임이 스쳐지나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두근두근한 마음을 지그시 억누르면서 첫 장을 열었다.

열매와 석현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전개였다.

그런데, 첫 상황은, 이런, 내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7번의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는 연인이면서, 아직 한 집에 같이 사는 사이.

“너, 가끔 내 방에서 잘래?”

살짝 가벼운 충격이 왔다. 아~ 얘들은 평범한 연인이 아니구나.

소설이라는 것은 현실에서 내가 직접 경험할 수 없는 것을 대신 겪어볼 수 있게 해 주는 장치이므로, 나는 소설 속에 너무 깊이 빠지면 안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열매와 석현 같은 연애는 할 수 없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다. 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열정을 가졌지만, 있는 그대로 내뱉는 솔직함이 무기인 여자라서 가끔은 곤란함을 겪는 음악감독 열매, 속에 무언가를 꼭꼭 감추고 표현하지 않지만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이 사람을 설레게 하는 시나리오 작가 석현.

대낮에 길거리에서 노상에 깔린 과일이 으깨지도록 던지며 심하게 싸우기도 해 보고, 울며불며 매달려도 보고, 다른 남자를 사귀어도 보지만 왜인지 석현은 “결혼하자”는 열매의 말에 대답을 회피한다. 석현의 성질을 긁을 대로 긁고 나서도 거기서 조금 더해 끝까지 밀어붙이고 마는 열매, “너 가” 한마디만 하고서는 잠시의 틈도 없이 , 뒤돌아보는 법도 없이 멀어져 가는 남자 석현.

나의 연애 스타일은 아니어서 적응이 안되지만, 그런 연애를 흘깃 훔쳐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세상에 여자는 두 종류로 분류된다. 헤어지면 뒤돌아보는 여자와 뒤돌아보지 않는 여자.

나는 뒤돌아보지 않는 여자였다. 오랜 시간 알아가고, 서서히 식어가고, 단칼에 베는 것이 내 연애 스타일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겁쟁이였고, 진정한 사랑이 뭔지 몰랐고, 세상의 잣대에 물들어 있었고, 가장 결정적으로, 상처받으면 안 되는 상태의 여자였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남에게 상처 주는 여자였던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 돌아서는 것이 나의 연애 패턴이었다.

그런데, 주열매. 이 여자는 뒤돌아보는 여자였다.

나와 근본적으로 달라도 너무 다른 여자다.

나 같으면, 7번의 이별까지 가지도 않았을 뿐더러, 7번의 이별 끝에 비로소 만나게 된 “나무 같은 남자” 지훈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열매는 지훈과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해 놓고도, 그의 나무 그늘같은 푸근한 사랑 속에서 ‘순둥이’처럼 평화로움을 맛보고서도 뒤돌아보고 만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사랑처럼. 뒤돌아보면 절대로,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아니, 그 말을 들어서 더더욱 그런 것인지도 모르지만. 열매는 석현을 선택했고, 지훈은 아프게 열매를 떠나보낸다.

차마 열매의 사랑을, 열매와 지훈의 사랑을 방해할 수 없었던 석훈은 1년이란 시간, 열매로부터 떠나 있지만, 그토록 ‘희생’에 목말라하던 지훈을 위해 담담히 1년을 희생한 열매를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둘은 다시 만나게 된다.

아이고, 참~

내 이럴 줄 알았지.

이렇게 되어 지고지순한 사랑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었지.

그렇지만, 현실로 내려오면 그 사랑이 찬란한 빛을 발하며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가 될 것인가?

2권이 나왔다니, 기대가 되고, 현실로 내려오는 계단을 타고 하강하는 로맨스가 펼쳐질지, 새로운 로맨스가 꽃피는 환상 속의 이야기가 펼쳐질지는 읽어 보면 알 일이다.

내 자아와 너무나 다른 열매의 자아에 쑥 몰입되어 울고 웃었던 1시간이었다.

아이들이 보면 “엄마, 또 운다”고 할까봐, 소리 죽여 가며 눈물 줄줄 흘리고, 휴지 가지러 갈 동안 추한 모습 보일까봐, 몇발짝 옮겨 휴지 가지러 가지도 못하고 옷소매로 눈물 닦아가며 너무도 쿨하지 못하게 그들의 세상을 읽어 내려갔던 1시간이었다.

이젠, 환상의 세계에서 현실로 내려가실 시간입니다, 손님~

“네, 가라면 가야지요. 2권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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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
이응준 지음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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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전-

내 나이 30대 후반. 나는 청춘을 되돌아 보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앞으로 나아가려면, 100세 시대라는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한 번쯤 과거와 화해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프고 시리지만, 꾹꾹 담아둔 내 아픈 청춘을 다시 헤집고 싶지 않지만, 불편하더라도 용기를 내어 부딪쳐 보련다. 짧은 내 언어 탓에 형상화 되지 못하고 빙빙 돌기만 했던 마음을, 이응준이라는 천재적인 작가가 풀어놓은 청춘 이야기에 얹어 읽고서 흘려보내고 싶다. 마흔이 되기 전에 꼭 해야만 할 일.

 

 

읽은 후-

이렇게 스산한 청춘 소설을 스물여섯의 나이에 썼다니.

나도 묻어버리고 싶고 흘려버리고 싶은 청춘이 있었지만, 지금 되돌아 보니, 그러했구나. 하고 깨달을 뿐. 그 때는 청춘인지도 몰랐던 그 시절.

내 스물여섯은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급급했던 하루살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용서하지 않겠어, 영원히!”

이 말이 주문이 되어 내 과거가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행복했던 날을 그리워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 -단테<신곡>에서

라는 글이 소설 시작하기에 앞서 나타난다.

 

나는 이제 행복했던 날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행복했던 날은 아예 있지도 않았던 듯. 그저 지금과 앞으로의 날들만 생각하며 산다. 그렇지만 그리워하지 않는다고 있었던 과거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과거에 행복했던 날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그저, 기억의 강에 흘려보내고 새로운 행복을 찾아 떠나고 싶다는 것일 뿐.

 

 

형은 나를 사랑했다. 나도 형을 사랑했다.-31

 

충격적인 울림을 주는 문장이다.

배다른 형제로 만난 주인공 서문하와 네 살 터울의 형 서인하. 둘의 관계가 어떻기에 이런 말이 나오지?  갸웃.

살짝 천박한 매력의 엄마 손을 붙잡고 장미정원의 성에 입성한 주인공 서문하. 지적인 외양의 형 서인하와 도무지 무서워 말도 못붙이겠는 근엄한 아버지를 만나 가족이 되었다.

그렇다. 처음부터 가족이었던 것이 아니라, 싹둑 잘린 종이를 풀로 이어 붙이듯이 만들어진 가족.

그것도 반듯하게 붙여진 종이가 아니라 살짝 어긋나게 이어 붙여진 가족이었다.

아버지가 집에 있을 때는 완벽하게 예의바르고 착한 아들이었던 형 인하는 아버지가 안 계실 땐, 엄마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건 엄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커튼이 내려지기 전까진 무대에 충실한 표정 없는 배우들.

형 인하는 어쩐 일인지 문하를 동생으로 받아들인 듯했고, 함께 별자리도 보고 정원도 누비며 멋지고 완벽한 형을 연기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은 동생의 얼굴을 할퀴고 만 고양이를 정원의 사과나무에 목매달아 죽인 후 그 나무 밑에 파묻는다. “널 위해서”라고 말하며.

문하는 형의 두 얼굴을 목격한 그날부터 방문을 잠그고 잔다.

“네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면 그 때 말해줄게.”라며 한사코 동물원의 파충류 우리에서 본 것을 말하지 않았던 형의 그 비밀스런 말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될 무렵. 그 때가 바로 인하가 어른이 된 시기이며, 고뇌하고 거부하며 한사코 즐기기를 거부하던 청춘의 시작점인 듯싶다.

“나는 사실은 파충류의 먹이로 키워진 흰쥐였다. 넓은 우리에 놓여 졌지만, 곧 시작될 파충류들의 식사 시간에 투입된 사냥감으로서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 불안과 두려움에 눈만 굴릴 수밖에 없는 불쌍한 흰쥐. 눈은 더 이상 튀어나올 수 없을 만큼 튀어나와 있으며,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듯이 세차게 뛰어대고, 숨은... 가쁜...죽음을 눈앞에 둔 흰 쥐.”라는 고백을 인하는 문하에게 하고 싶었던 것일 게다.

사업의 확장에 정치판 가세까지. 아버지는 승승장구 내달렸고, 그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국립대 법학부 입학 까지 한 형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었고 인하는 백에 가려진 흑의 세계를 지배하는 어둠의 마왕으로도 살아가고 있었다. 문하에게 잠깐 비춘 적이 있는 인하의 친엄마와 앓는 모습이 닮았던 여자친구-하얀 하여-가 죽고,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집안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한 때. 아버지를 미워하게 만들었던 형은, 문하 어머니와의 충격적인 정사씬을 선물로 남기고, 두 팔을 활짝 편채 멀리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로부터 시작된 방황의 나날들. 과거와 쉽사리 화해하지 못하던 문하는 가합동의 카페<하늘밥도둑>에서 산타 페를 만나고 산타 페의 미친 이모를 이야기 속에서 만나고, 수인을 만나고, 물귀신, 미저리 등등 평범함의 언저리를 맴돌던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과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을 무렵에는 이미 1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있었고, 그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문하는 과거의 강을 건너 왔다.

 

하~아.

찌는 듯한 여름내내 태양에서 가장 가깝던 옥탑방에서 스물여섯 작가의 손에 의해 탄생하게 된, <설국과 장미정원>으로부터 시작하는 청춘의 기억.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가족이라는 굴레는 문하의,그리고 우리의 생애에 걸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다시금 행복한 현재와 미래를 설계하려면 그 시커멓고 어두운 과거라는 터널에 억지로라도 걸어 들어갔다 빠져나와야 한다.

청춘, 혹은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하는 데 이 책은 훌륭한 안내자의 역할을 했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 내 과거와 만났고, 인사했고, 잘 돌려보내주었다.

 

시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언어로, 하얗게 뱉어내는 숨이 눈앞에서 입김이 되어 사라질 듯 그 차갑고 청명한 겨울 공기까지 환상적으로 묘사된 설국.

그 설국을 거닐다 빠져나온 곳에서 만나게 된 느릅나무. 그 아래 천국이 숨어 있었다. 한동안 아무 나무라도 나무 그늘 아래 서면, 이 책이 생각날 것 같다.

하얀 목련이 툭툭 잎을 떨구고, 이제 화안한 벚꽃이 꽃망울을 머금고 있는 계절이다.

봄바람이 날리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어느날 후두둑 떨어지고 말 일이다.

청춘도 계절처럼 , 봄날의 벚꽃처럼 왔다 가는 것.

혹독한 청춘을 보냈다고 우울해 할 일도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나도 내 느릅나무를 찾아 그 아래 천국을 숨겨놓아야지.

 

내 아이들의 유년 시절엔 더 이상 어두운 그림자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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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보그가 되는 법 - 인간의 모든 가능성에 답하는 과학의 핵심 개념 35가지 사이언스 씽킹 3
알록 자 지음, 이충호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표지도 재밌고, 저자의 이름-알록 자-마저도 재미있다.

 

모두 35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하는 법’으로 제목이 나열되어 있다.

 

그 중에 3장<영원히 사는 법>이라는 장이 나의 시선을 잡아끈다.

 

 

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를 좋아한다.

예를 들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또는 상실의 시대)을 읽다가, 거기 나왔던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찾아 읽는다. 읽다보니, 소세키에 관심이 생겨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도련님>을 연속해서 읽는 식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완 조금 다른 방식이지만, 이 책의 <영원히 사는 법>이라는 장을 보니,

콜린 톰슨의 <영원히 사는 법>이라는 책이 기억났다. 화려한 그림에 아이들과 푹 빠져 들었었다.

 

***피터는 <영원히 사는 법>이라는 책과 영원히 사는 아이의 존재를 찾다가 드디어 다락방의 컴컴한 책장 위에서 마침내 책을 찾아내지만, '어리면서 늙고, 열 살쯤이며 동시에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영원한 아이'가 '영원히 산다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며 그 책을 읽지 말라고 충고한다. 피터는 오래 생각한 끝에 그 말을 따르기로 결정한다. 영원한 아이는 너는 네 나이 적 나보다 현명하다면서 피터를 다시 '세상'으로 안내한다. ***

 

 

역시, 과학과 문학은 영역이 다른가 보다.

환타지의 세계에서 다시, ‘세상’으로 나와 보니, 과학의 영역에서는 오래 사는 비결을 척척 가르쳐 준다.

 

1. 음식 섭취량을 줄인다.

2. 효모 실험-두 유전자의 작용을 차단함으로써 효모 세포를 정상적인 효모 세포보다 6배나 오래 살 수 있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효모보다 훨씬 복잡한 생물이라는 거--

3. 손상을 복구하는 유전자 치료

4. 사람의 몸에 특별한 세균을 집어넣어 노폐물과 자유 라디칼을 제거하는 방법

5. 몸을 건강하게 만들고 유지하라.(채소섭취, 금연, 젊을 때 운동)

 

 

5번이 제일 쉬울 거라는 거, 설명 안 해도 다 알 것이다.

 

 

진짜 과학이 어떤 건지, 재미를 느끼면서 빠져 든 적은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어렸을 때 이 책을 접했더라면, 과학에 대한 시각을 바꿔서 좀 더 흥미있는 과목임을 일찍 깨닫고 과학자의 길을 걸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생각만(?) 해 본다. 문과 체질임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요즘은 과학자가 꿈이라는 어린이들이 많이 없다. 부모들의 일방적인 꿈 강요에 의사니, 판사 검사니, 교사 등등. 틀에 박힌 직업군이 아이들의 머릿속에 심어져 있고, 창의적인 아이들은 괴짜 취급을 받는 세상인 것이다.

좀 더 과거이긴 하지만,  하다못해 이 시대의 소설 작가, 김영하도 학창 시절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 질문하다가 “너는 그러니까 공부를 못하는 거야. 인마”하는 핀잔 듣고 교무실에 불려가 혼나기 일쑤였다고 한다.

 

학교 과학 시간에 간단한 실험 몇 번 하고, 이쯤 했으니 원리는 알아서 터득해라. 하는 한심한 교사들 때문에 과학에 흥미를 잃은 많은 아이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투명인간이 되는 법, 외계인을 찾는 법, 사이보그가 되는 법, 쌍둥이 형제보다 천천히 늙는 법 등 기상천외하고 재기발랄한 제목들을 보면 일단 흥미가 솟구칠 것이다. 어른인 나도 재미있었으니까.

그리고 찬찬히 글을 읽어 나가면, 우주, 공룡, 기후 변화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과학의 분야에 풍덩 빠져들게 될 것이다.

 

 

어느 학생이 폴로 민트를 깨면 파란색 빛이 희미하게 난다고 말하면, 선생님은 우리를 사진반의 암실로 데려가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실험을 했다. 그날 우리는 폴로 민트의 비밀을 입증하진 못했지만, 그 사건은 기묘한 질문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선생님은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6P.

 

위 글에서처럼 과학의 세계로 친절히 안내하는 과학 선생님을 만난 적이 없다면, 이 책을 만나 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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