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거품에서 다시 태어난 인어공주처럼 리셋! [실컷 울어도 되는 밤]

감정 노동을 하기 싫어서 일부러 순수의 세계인 동화 속으로 몰입해 본 기억이 있나요?
귀여운 일러스트들을 한껏 구경하며 마음을 비워내려고 찾은 동화는 그러나 기대한 만큼의 기분전환이 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덕분에 푸른 구릿빛 녹이 앉아 버린 청동거울처럼 우리 마음에도 모르는 사이에 때가 끼어버려서인지 동심의 눈으로 동화를 읽을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지요.
고귀한 사랑만을 남긴 채 자신의 몸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인어공주 이야기만 가슴에 품고 있어도 벅찬데, 거기에 지금 현재 우리의 처지를
이입시켜 새로운 변주를 만들어내니까요.
<물거품에서 다시 태어난 인어공주>라는 일러스트입니다.
다시 태어나면 이번 생에서는 꼭 행복해지리라는 보장을 해 주는 건가요?
물거품에서 다시 태어난 인어공주를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하고 환영해줄 수 없다는 구겨진 마음이 구석에서 조금씩 일어납니다.
인어공주가 다시 태어나서 기쁘다, 왕자와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아라~
라는 마음은 맑고 깨끗한 아이의 마음이겠지요,
하지만 제 마음은 그렇지만은 않네요.
막장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봐서 그 플롯에 길들여진 탓인지, 이미 다른 나라의 공주와 결혼해서 잘 살고 있을 왕자에게 다시 인어공주가
나타난다면 그건 민폐 아냐?에서부터, 불륜녀가 될 참이냐? 아니면 본처를 쫓아낸 희대의 악녀가 될 참이냐? 그렇다면 평온한 가정에 분란 일으킬
테니 왕자 말고 다른 왕자를 고르면 어때? 그건 원작에서 너무 동떨어진 또 다른 얘기가 되는 건가? 까지
안 해도 될 걱정을 하면서 또 다시 감정노동을 하고 있는 나.
[실컷 울어도 되는 밤]이란 아트에세이에 나오는 한 컷 그림을 보고 별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네요.

어둡고 아름답게 뒤틀린 환상을 그린다는 일러스트레이터 HENN KIM의 작품집입니다.
흑과 백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질리지 않게 오랜 시간 들여다 볼 수 있네요.
그림과 짧은 글의 조화도 일품입니다.
순수한 동화가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라면, 이 책은 현실에 낮과 밤을 살면서 많이 지친 어른들을 위한 아트에세이입니다.
감정노동에서 벗어나 있기 위해 동화를 들여다보다 도리어 감정노동에 더 시달리게 된다는 취지의 말을 늘어놓았는데요,
[실컷 울어도 되는 밤]은 폭발하고 싶은 감정들을 다독이는 대신 그저 보따리 풀어놓듯 스르르 감정을 끌러내 놓게 만듭니다.
그러니 쓸데없이 머리 굴리며 이야기를 확장시키지 않아도 되고 현실과 결부시켜 또 다른 걱정거리들을 만들어내게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글과 그림을 보고 공감하면 될 뿐이지요.
저는 사실, 낮에 드라마를 보면서도 쉽게 감정이입해서 울기도 하고
잠에서 덜 깬 아침에도 남편의 꿈 이야기 들어주며 주르륵 눈물 흘리는 눈물 보따리인지라
꼭 밤에만 운다는 법칙 같은 것은 없는 편입니다마는,
밤이라는 시간대가 가지고 있는 특성상, 밤에는 왠지 주르륵, 찔끔 보다는 줄줄줄~ 우는 게 더 어울린다 싶기도 합니다.
[실컷 울어도 되는 밤]에는 다양한 상황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위로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현실을 한 번 비틀어 환상의 세계에 닿아 있는 느낌이 많이 나는 그림들로 사람들과의 공감을 도모하고 있는 듯해요.

누군가를 알아가는 과정을 그 사람의 마음 속 책장에 다가간다는 의미로 해석한 그림이네요.
은유적 표현으로만 보던 것을 그림으로 보니 한 번에 확 다가옵니다.
철벽녀, 철벽남들은 남 앞에서 저렇게 자신의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이겠죠?
그렇다면 나는, 내 마음의 책장을, 내가 간직한 이야기 보따리들을 저렇게 숨겨두지 않고 활짝 열어보여주는 사람인가? 되짚어보게도 되네요.

좀 괴기스러울 수도 있는 그림이네요^^
오싹하지만 보면 볼수록 창의적인 그림.

가까워질수록 더 힘들다는 말이 절실하게 와닿습니다.
가까이 가려 하면 할수록 가시는 더욱 서로를 찔러대겠지요.
은유로는 직관으로든 말로 하면 너무나 많은 낱말과 어절과 문장들이 소비되어야 할 상황을
그림 하나로 깨끗하게 관통하고 있네요.

이 그림 또한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킨 그림입니다.
나쁜 기억을 지우는 방법 중 가장 확실한 방법이 아닐까요?^^
요즘은 건조에 살균까지 기능이 더 추가되었으니 말이죠~~
세상이 좋아질수록 사람들의 정신도 더 맑아지는 건가요?
나를 죽이려는 모든 것들이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101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아무 말도 못하겠어.
-81
가끔 슬픔에 푹 빠져 버리는 것도 좋아.-71
내 이야기의 끝은
해피엔딩일까?-43
짧은 글을 읽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일러스트를 그려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림을 바로 보고 상황을 바로 이해할 수 있기에, 거기에 더해 확실한 공감을 할 수 있기에
감정노동의 정도가 많이 덜해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탁기에 몸을 넣고 깨끗이 씻어낼 수는 없지만
[실컷 울어도 되는 밤] 속에 빠져 있는 동안만은
왠지 홀가분한 기분, 실컷 만끽할 수 있었네요.
괴로운 일들을 다리미로 싹 밀어버리는 그림, 빨래 건조대에 엎드려 눈물을 말려버리는 그림 등.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걸 보면 내 마음이 많이 움직인 것 같아요. 그림 속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많이 바빴을 내 마음. [실컷 울어도
되는 밤]을 쓰담쓰담하면서 나와 또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도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빌어봅니다.
물거품에서 다시 태어난 인어공주처럼 리셋!
#북폴리오#헨킴#헨 킴 개인전#미지에서의 여름(7/29_10/1)#아트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