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탐정 정약용
김재희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그 도전장, 내가 받아주지.[유랑탐정 정약용]

 

김재희 작가님의 신작이네요.

얼마 전, 경성탐정 이상 시리즈 3권이 나온 걸 알고, 1권부터 정주행 했었는데요~

모던 보이 이상과 바가지 머리 박태원이 거닐던 경성에서 벗어나 이번에는 조선으로 슝~ 시간여행하는 기분입니다.

경성탐정 이상에서는 이상과 박태원이 셜록과 왓슨 콤비에 대응되는 인물이었다면, 이번 유랑탐정 정약용에서는 삼미자 정약용과 훤칠한 꽃미남 스타일의 이가환이 등장하네요.

아직 경성에서 벗어나기 싫었지만 새로운 명탐정 콤비의 등장을 어서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재빨리 찜했답니다.

현대물도 잘 쓰시지만 시대물에 있어서도 치밀한 자료수집, 유연한 인물창조, 박진감 넘치는 플롯 등 어느 한 군데 빠짐 없어 너무 흥미로웠네요.

뭐랄까, 정약용이 내가 알던 정약용인 듯 또 아닌 것 같은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어서

적절한 조화를 이루었답니다.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인물 설정이긴 하지만 정조가 다스렸던 그 시대 조선의 분위기 속에 잘 녹아들어 있으면서도 유니크한 면이 있어 내내 긴장감을 잃지 않았던 것 같아요.

가령, 1장의 에피소드는 정약용이 집필한 [흠흠신서]의 '상형추이' 장에 기록되어 있는 인체 자연발화 사건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이야기로 조선이란 시간 속으로 훅 빠져들 수 있었던 장치로 탁월했다 생각합니다.

뒤편으로 갈수록 잔인한 연쇄살인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면서 의문의 '진'이란 인물과 대치하게 되는데요, 거기서는 오롯이 한 명의 사상가와 실천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시대와 이상의 괴리 속에서 괴로워하는 한 인간의 모습이 나타나서 너무나 입체적으로 떠올랐답니다.

 

원래 정약용과 이가환은 스무 살 차이가 나지만 소설에서는 일곱 살 차이로 설정했다고 해요.

십 대 소년 삼미자 정약용과 꽃다운 나이의 미남자 이가환이 이루어내는 케미 덕분에 첫 장부터 설레었다지요.

 

세월이 흘러 정조로부터 어사 임무를 받은 정약용은 백성들을 살피기 위해 마을을 암행하며 돌아다닙니다.

연천에 이르러 잔혹한 연쇄 살인 사건과 마주하게 된 정약용.

물속에서 부패한 영아, 거중기에 매달린 남자, 배 한가운데에 꿰맨 자국이 있는 남자.

그 시대에 배를 가르고 장기를 꺼낸 '수술' 집도의 흔적이 있다는 점이 공통점이었습니다.

약용은 거중기에 매달린 남자에게서는 의문의 '암호'를 접하고 과거의 오랜 기억을 끄집어냅니다.

갈매기처럼 휘어진 짙은 눈썹, 선연한 눈빛, 길게 뻗은 콧날.

'진'이라는 이름만을 남기고 훗날을 기약한 채 사라졌던 남자가 떠오른 것입니다.

 

'진'은 일부러 약용을 암호로 꾀어 불러내고, 진의 도발에 약용은 호기롭게 도전장을 받아들이죠.

이제부터 흥미진진한 선과 악의 대결이 펼쳐지고 무녀와의 가슴 아릿한 사랑도 한 축을 이루며 끼어듭니다.

하지만 선과 악으로 가르기엔 답답하고 막막한 시대를 밝히려는 이들의 의지가 너무도 굳세어서 이쪽저쪽 왔다갔다 하는 사이에 '악'으로 규정짓고 있던 것이 스르르 무너져내립니다.

 

'진'은 바로 생명의 태동을 말하네. 움직이는 것, 깨어나는 것, 천지개벽하는 것. 그게 바로 진일세. 그리고 우리를 기만한 그 남자는 이 세상을 뒤바꿀 천재이거나, 천하에 둘도 없는 악마일 걸세.-207

 

그들이 바라던 진정한 세상, '대동'이란 것을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 비로소 맞이한 것일까요?

시체를 검험하고 사건의 앞뒤를 하나로 꿰기 위해 추리를 하고 몸을 재빠르게 움직여 사건의 한가운데로 훌쩍 뛰어드는 정약용을 따라가다 보면 오리무중 속을 헤치고 나가는 듯한 두려움과 함께 통쾌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비록 속시원한 결말은 아니지만 지금의 현실을 한편으로 반성하고 새로운 미래도 설계해 볼 수 있는 시간도 가질 수 있고요.

 

아~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향유한 시대 이전의 '조선'이라는 사회에서도 갈등은 존재하고 그 갈등을 파고들어 사회를 송두리째 바꿔보고자 하는 열망은 존재했구나.

사건이 일어나면 어디선가 나타나 척척 교통정리하듯 질서를 세워보려는 '명탐정'도 나타났겠구나.

우리에게 익숙한 이상과 정약용이 아니면 어떻겠습니까.

그런 희망 하나 붙잡으려고 이렇게 추리소설에 탐닉하게 되는 것 아닐까요.^^

정약용 시리즈 다름 편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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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 박헌영
박종성 지음 / 인간사랑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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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한 시대에 혁명을 꿈꾼 자 [평전 박헌영]

 

 

 

 

인상적인 표지다.

저자 방종성이 직접 그린 인물화라고 한다.

혁명가의 전신을 바로 보려 애쓰다 다 그리지 못하고 옆얼굴 아니면 눈가 표정 쯤 그리려다 멀어져갔다는 말로 저자는 겸손을 표한다.

사실 박헌영은 영화에 등장했던 '박열' 만큼이나 생소한 인물이다.

이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우리 역사의 어느 틈에 끼워넣어야 하는 인물인가?

 

중간쯤 읽어가다 보면 박헌영을 연구했던 이들의 평가 중에 

 

"만일 김일성이 아니라 박헌영이 북의 지도자가 되었다면 20세기 후반의 우리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박헌영의 복권을 제기하는 것은 현존하는 평양의 정치체제를 전면 부정하는 것과 곧장 이어지지 않는다. 그 둘은 맥락이 다른 문제이거니와 엄연히 60년 넘게 전개되어 온 역사적 과정을 그 누구도 지워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 평한 손석춘의 말이 나온다.

 

김일성에 견줄 만한 '혁명가'로 박헌영을 꼽는다면, 그는 우리의 근대사에 있어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인물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주의 체제에 경도된 이가 아니었기에 막스나 엥겔스의 이름만 들어도 눈살을 찌푸렸던 나다.

그러나 주의는 주의고 역사는 역사다.

주의와 역사를 하나로 품기에는 배움이 너무도 짧아 외면하려 했던 내 저장고에 박헌영 하나를 더 채운다고  머리가 터지지는 않겠지.

'평전'이라 하여 위인전과 비슷한 전개를 기대하지는 말라.

평전과 위인전은 다르고, 특히나 박종성의 평전은 시대별 종단보다 주제별 횡단에 주력한 것이므로 색다른 읽기를 제공한다.

 

 

 

1900년에 태어나 56년(그의 생몰 연도는 정확치 않음)을 살다간 그의 삶의 여정을 저자는 전기적 방법으로 압축, 재구성하는 작업을 했다.

박헌영을 대중적, 국제적 인물로 인식, 확장하는 사회과학적 노력은 저자가 평전을 서술한 형식으로 드러난다.

사랑-투옥-고문-유학-이별-재건-월북-전쟁-재판-숙청이라는 주제로 주르륵 그의 삶을 꿰어놓았다.

 

시간적 순서, 혹은 시대별 서술에 따르지 않아 뒤죽박죽이지 않을까, 혼란스럽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책을 읽어가면서 차츰 해소된다.

주제별로 한 인물을 파악하는 것도 나름 매력 있고 재미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인문학자임에도 문학적 소양을 드러내는 작가의 글쓰기 방식에 조금은 익숙해져서인지(^^) 가끔씩은 긴 호흡의 글에 중독된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암울한 시대에 혁명을 꿈꾸었지만 끝내 혁명에서 멀어지고 말았다.-32

 

저자는 박헌영 연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맨 앞에 내놓는다.

 

출생과 부친에 대한 존재론적 강박, 여인들과의 이어지는 인연과 '문학'의 힘, 사랑의 굴절과 좌절, 자녀의 출산과 가족구성의 지속적 단절, 정치적 '글스기'와 '말하기'의 편차, 혁명 동지들과의 동행과 이별, 거침없는 저항과 도전의 역정, 월북과 전쟁의 파노라마, 재판과 죽음의 곡절 등 글감의 꼭지들이야 그의 삶의 마디만큼 간단치가 않다. 아울러 그의 삶에 대하여 느끼는 부담 역시 단순한 의지만으론 깨기 어렵다./

첨예한 진영논리에 그를 다시 '가두려 함'은 도그마의 경직성에 물든 혁명가의 만년을 지속적으로 방임하거나 때로 난자하려는 정치적 편의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평소의 미움을 언어와 노선으로 은폐하는 작업도 속절없이 되풀이할 일은 아니다.-114

 

정치적인 길을 가면서도 '문학'에 기대었던 박헌영의 모습은 의외다.

'자조 섞인 한탄' 일 망정, 동시대 민중들의 갈등과 대립을 문학적 상상에 녹여내고 시름을 흘려보낼 요량으로 문학을 도구로 사용했던 것이었다.

 

 

일본에서 사회파 추리의 대명사로 불리던 마쓰모토 세이초는 보편적인 테마로 인간을 묘사하고 역사와 사회의 어둠을 파헤치려 했다. "내용은 시대를 반영하고, 그 사상의 빛을 받아 변모해 간다."라는 신념으로 작품을 써나갔던 그는 픽션, 논픽션, 평전, 고대사, 현대사 등으로 창작 세계를 확장시켰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한때 군인으로 종군했던 경험을 살려 <북의 시인 임화>를 썼다.

 

박헌영을 읽다 마쓰모토 세이초를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의외의 접점이 생겼네~

춘원, 횡보, 임화에서 마쓰모토 세이초로 이어지는 시대의 질곡을 더듬으면 박헌영의 생애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강점기 조선의 폭력통치, 해방공간의 미군정체제, 김일성체제와의 중첩적인 경쟁을 박헌영의 정치활동을 제한한 세 개의 꼭짓점으로 놓는다하니, 대체적인 시대 흐름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시대의 흐름 속 한 인물을 여러 관점에서 파헤치려는 저자의 노력을 높이 산다.

 

 

6차례에 걸친 박헌영의 월북을 한 눈에 보기 쉽게 정리한 도표다.

월북이란 단어를 편협한 시각에서 보지 않는다면, 민중의 자발적 참여로 이루어지는 혁명을 꿈꾸었던 한 이상주의자의 도저하고 '결기'에 찬 시도로 볼 수 있겠다.

외세와의 긴밀한 연계 없이는 뿌리 내리기 힘든 과업, 계쏙 잃어야 얻을 수 있는 파워 폴리틱스 앞에서 깊고 무거운 번뇌를 거듭했던 지도자의 발자취로 읽으라 권한다.

 

 

정녕 사회혁명을 꿈꾸었지만 홀로 서두르기만 하던 조급한 모더니스트

간단없는 역사단절에도 계급전복과 민족해방을 도모하려 한 애끓는 로맨티시스트-469

 

저자는 인간 박헌영의 삶을 하나의 테두리 속에 가두는 것을 무엇보다 꺼리면서도 극찬과 혹평의 사이에서 그를 건져내는 것이 우선이라 하며 진보와 보수의 다툼 속에서 균형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그' 만한 사람이 또 있었는지, 그런 인물이 지금도 있는지.

거친 광야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없는 나라에 '그'처럼 나설 자 있는지를  묻는다.

중국과 미국,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지금의 우리나라의 상황을 지켜보며 답답한 가슴을 하루에도 몇 번씩 치는 우리다.

'초인'을 기대하는 바, 우리의 역사 속에서 어떤 이가 '초인'에 가까웠는지 다시 한 번 되짚어보게 되는 시점이다.

 

 

 

 

#평전 박헌영, #인간사랑,#투쟁,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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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카네기 메달 수상작
사라 크로산 지음, 정현선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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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삶 속, 반짝이는 아름다움 [원, 우리가 하나였을 때]

 

 

 

연말이 되면 거리에 짤랑짤랑 울려 퍼지는 구세군의 종소리.

그걸 들으며 저벅저벅 한걸음에 다가가 다만 얼마만큼이라도 모금함에 쑥 집어넣을 수 있는 도량이 생겼으면 좋겠다.

아이들 어렸을 적엔 본보기를 위해서라도 한 두 번 기부는 해봤을지언정,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기부를 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이제는 내 팍팍한 삶에 진심으로 휘청이면서 '저 기부금은 내가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하느님께 벌받을 만한 혼잣말을 되뇌인다.

아프리카 수단 땅처럼 메말라 쩍쩍 갈라진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는 때면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린다.

너무 무미건조해진 거 아닌가, 윤기 있는 보드라운 마음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연말을 맞아 좀 윤택해진 마음으로 새해 준비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원, 우리가 하나였을 때]는 이렇게 열사병에 걸려 죽기 직전에 있는 사람처럼 생활의 열기에 허덕이다 못해 마음이 비쩍 말라버린 내게 촉촉함을 선사해주었다.

강렬한 레드와 블루의 대비로 만나게 된 이 책은 샴 쌍둥이 이야기다.

내게 두 팔과 두 다리, 온전한 장기가 있음을 먼저 감사하게 하는 설정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온전하게 태어난 내 두 아이들에 대해서도 새삼 고마워하게 만든다~

 

그레이스와 티피는 샴 쌍둥이, 다른 말로 결합 쌍둥이 자매다.

그들은 좌골부 결합형, 세 다리 쌍둥이에 속한다.

머리가 둘, 심장도 둘, 폐와 신장도 두 쌍이다.

팔도 넷, 하지만 제대로 움직이는 다리는 둘이고 모양만 그럴듯한 다리가 강아지 꼬리처럼 달려 있다고 한다.

흔히 사람들은 이런 기형의 사람을 매체에서 접했을 때, '참 안 됐다', '불행하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작가가 만나고 조사해 본 그들은 생각보다 행복한 상태였다고 한다.

이 책 속 자매들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작가가 직접 만나 본 결합 쌍둥이의 삶을 적절히 녹여내고 있기에 현실감이 더해진다.

 

이제 16살인 그레이스와 티피의 이야기는 주로 그레이스의 나레이션으로 이야기가 이어져나간다.

보통의 아이들처럼 학교에 나갈 수 없는 그들은 홈스쿨링으로 대체했지만 16살이 되던 해, 아버지와 어머니가 실직한 데다 사람들이 보내준 후원금이 바닥나는 바람에 사립 고등학교에서 공부할 형편에 처하게 된다.

막내 동생인 드래건으로부터 학교는 무시무시한 곳이라는 경고를 들었지만 학교는 생각만큼 나쁘지 않았다.

"늑대들...그러니까 친구들 틈에 바로 던져 넣지는 않아."-58

 

학교에서 존과 야스민이라는 친구를 만나고 점점 다른 친구들과도 상호 소통하게 되면서

16살 여느 학생들처럼 시시콜콜한 고민도 하고 공부도 한다.

 

 

 

형식을 보자면 보통 소설보다는 행간이 넓은 것이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띄엄띄엄 그들의 마음을 음미하게 하는 자유시 형태다.

빽빽한 글자들 속에서 이 쌍둥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보다

이런 간격 속에서 바라보는 것이 생각보다 깊이 마음 속으로 스민다.

 

그레이스는 좀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이라면 티피는 왈가닥에 가깝다.

그들은 한 몸이지만 또 다른 인격체이기도 하다.

미술 시간에 처음 만난 존이라는 친구는 그들에게 각각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두 사람인 것처럼.

하나이면서 둘이기도 한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인정해야 할까 혼란스럽던 차에 존의 인사 방식으로 길을 알게 된 느낌이었다.

그렇지...

그들은 각각 따로 따로인 인격체인 것이야...

 

히치콕 영화를 사랑했던 부모님 덕에 히치콕 영화의 최고 여배우 두 명의 이름을 얻게 된 그레이스와 티피.

아름다운 여배우들의 이름을 얻은 것을 그들 자신은 잔인하다 느낄지 모르겠지만 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들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일자리를 잃은 부모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자고 제의하지만 이 곳에서, 이 학교에서 떠나기 싫었던 그들은 일상을 촬영한 다큐멘터리를 찍기로 동의하고 돈을 얻는다.

가식 없는 다큐멘터리에 스탭들도 감동하고 모든 것이 순조롭다 생각한 순간, 이들에게 먹구름이 드리운다.

일상적인 감기를 앓은 줄 알았는데 그레이스의 심장에 무리가 왔던 것이다.

하나이자 둘, 둘이면서 하나인 이들의 삶에 일생일대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날이 다가왔다.

바로 분리 수술.

 

지금처럼 함께 잘 해낼 수 있어,

우린 함께 할 운명이야.

서로 떨어지면, 죽게 될 거야.

 

넌 우리가 함께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난 너한테 기생해서 살고 있는 거야.

이런 식으로 네 생명을

갉아먹고 싶진 않아.-338

 

생명을 두고 도박했고 희비가 엇갈린 안타까운 결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친구와 키스하고 싶고 아이도 낳고 싶다고 했던 이 아름다운 영혼들은 결국

  비극 속으로 걸어들어가야만 했다.

 

딸랑딸랑. 구세군의 자선 냄비가, 사람을 모으는 방울 소리가 왜 이리도 머릿속을 맴도는 건지...

얼굴 잔뜩 찌푸린 스크루지가 개과천선해서 자선 냄비 쪽으로 슬금슬금 걸어가는 모습이 겹쳐 드리워진다.

메마른 이 마음에 포근한 첫눈처럼 내려앉는 아름다운 사연이다.

혹은 악마로 보고 혹은 돈벌이 도구로 보지만 이들은 나름대로 생을 열심히 꾸려가고 있는 것 뿐인 것을.

내 삶이 힘겹다 하여 두 눈 막고 귀 닫고 외면해선 안되는 것을.

 

 

#결합쌍둥이 #샴쌍둥이 #자유시형태 #연말연시 #책선물
#감동소설 #카네기메달 #소설원 #북폴리오 #사라크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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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혀 -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권정현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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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의 허허벌판, 꿈결같은 생과 사의 군무[칼과 혀]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겪어보지 않더라도 총탄이 난무하고 폭탄이 펑펑 터지는 살벌함을 간접적으로 경험해볼 순 있다.

기록물이나 그 시대의 참상이 담긴 소설, 영화 등의 매체를 통해 접하는 것인데, 그것들은 뭐랄까, 내내 살풍경하고 건조한 바람 맛이 난다.

간혹 전우애나 울컥하는 충성심, 안타까운 연인들의 이별 등을 통해 눈시울을 붉히는 적은 있으나 오감 모두를 찌릿하게 건드리지는 못한다.

[칼과 혀]는 그러니까, 흑백의 무성영화에 비로소 색과 소리를 입힌 전쟁 이야기라고나 할까.

 

한중일 삼국이 지리멸렬하게 얽혀 돌아가던 동아시아의 어두운 시절, 일본은 만주에 괴뢰국을 세운다.

1945년 일제 패망 직전의 만주, 이제 곧 있으면 스러져 없어져 버릴 그 허망한 나라에서 맞닥뜨린 세 인물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비린내 풍기는 도마 위에서 생애 첫날을 맞이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요리사가 된 광둥요리사 첸

제 19대 관동군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 그는 거대한 제국의 허울 좋은 주인이자 공포와 비명을 감춘 천수각의 성주이자 매끼 맛깔나는 음식에 목말라하는 요리애호가이자 예술비평가라 스스로를 평한다.

죽음의 그림자가 어슬렁거리는 만주에서 요리사와 손님으로 만난 이 둘은 누가 봐도 갑과 을의 관계이지만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전쟁터에서는 갑과 을이지만 요리를 매개로 만났을 때는 '칼과 혀'의 불꽃 튀는 접전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쟁에 있어서는 무능하며 당장 민간인으로 전역시켜야 옳은 이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 다른 이름으로 '모리'는 칼을 차고 있지만 뜻밖에 요리 앞에서는 한없이 연약한 인물로 자신의 껍데기를 벗어놓는다.

황궁 요리사가 되겠다며 어슬렁거리던 첸은 모리 앞에 끌려오고 목숨을 건 미션을 완성시켜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다.1분 안에 불 사용 없이 오로지 칼의 실력만으로 모리의 입맛을 충족시킬 것. 첸은 '송이'를 구해 와서 모리의 혀를 녹인다.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인물은 청진이 고향으로 위안부가 되었다 풀려나 첸의 아내가 된 길순이다.

 

 

'길순'이라는 이름의 여인이 읊조리는 독백이 작고 휑한 회오리바람을 몰고 온다.

 

첸은 광둥을 지키기 위해 조직된 지하 자경단원이었어. (...)전쟁이 나면 멍청한 남자들일수록 으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정의를 짊어지고 불속으로 뛰어들길 주저하지 않잖아? 그건 때가 되면 규칙적으로 여자들에게로 찾아오는 이름 모를 일본 병정들이나, 남부식 권총 하나로 세상의 부조리를 끝낼 수 있다고 믿는 내 오빠나, 도마 하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첸이나 모두 매한가지야. 그래서 난 사내들을 믿지 않아.-92

 

살육의 광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매일 아침마다 오늘 먹을 것을 생각하거나 중국 황제가 회갑연에서 먹었다던 만한취엔시를 재현해 내라거나 하는 모리의 미식 취미는 바람만 불면 흩어져 버릴 봄날의 벚꽃잎처럼 허무하기 그지 없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래도, 요리를 맛보고 기대하고 요리를 논하는 과정에서 칼과 혀의 날카로움이 만나 그 예리함을 중화시키려는 여림이 엿보인다.

요리와 모리 살해가 주요 이슈인 만큼 이 셋이 이루어내는 긴장감과 중간중간 등장하는 요리에 대한 묘사가 이 책의 백미다.

 

아쉽지만 고추탕은 더 매웠어야 한다. 무언가를 입에 넣어 씹는 순간은 인간이 자신의 생 앞에서 가장 진실할 수 있는 시간이다. 매운맛을 견뎌낸 소고기들이 혀에 부드럽게 녹을 때 비로소 고통조차 달콤해진다. 적들이 넘실거리며 국경을 넘어와 온몸이 무거운 사슬갑옷을 입은 것처럼 거북해질 때도 나는 한 끼의 식사 앞에서 여유를 부릴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다리를 베고 누워 먹던 분고규의 평화를 아직도 기억한다.-122

 

첸과 모리와 길순. 그들은 원래 목숨을 거둬야 할 사이지만 칼로 혹은 다른 무엇으로 서로의 혀를 잘라낸다.

요리를 맛보지 못하지만 말은 할 수 있도록...

맛보는 것과 말하는 것 중 하나를 거두어야 한다면 무엇을 거두게 할 것인가.

요리사임에도 불구하고 첸은 맛보는 것을 포기하겠다고 했다.

말이 닿지 못해서 벌어진 참혹한 전쟁인데도 결국은 말로 복구해내고 상처를 어루만지고 새로운 세상을 구현해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칼과 혀의 강렬한 대비, 혹은 비유 혹은 은유...

그 자리에 무엇을 대신 넣어 해석해야 할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최고의 광동 요리사가 내놓는 음식에도 먹는 사람마다 다른 해석을 내놓을 수 있듯이 이 책의 진가는 한 번, 두 번, 세 번 곱씹으면서 알아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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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남 오빠에게 - 페미니즘 소설 다산책방 테마소설
조남주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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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중앙에 놓아보기 [현남 오빠에게]

 

올해 [82년생 김지영]은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았다. 딱히 신선한 이야기를 다룬 것도 아닌데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인 것은, 우리가 흘려넘긴 어떤 것들 중에서 시선을 고정시킬 만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82년생 김지영들의 공감을 사고 울분을 통감하면서 울고 웃겼던 이야기.

그 책을 눈여겨 보았던 사람들이라면 이 책, [현남 오빠에게]에도 당연히 조용한 시선을 던지게 될 것이다.

대놓고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한다.

[82년생 김지영]의 작가 조남주를 비롯, [쇼코의 미소] 작가 최은영, [빨간구두당]의 구병모, [국경시장]의 김성중 등 작가 7명이 각기 페미니즘을 주제로 해서 쓴 단편 7편을 모았다.

표제작인 조남주의 <현남 오빠에게>가 단연 쉽게 읽히면서 가장 인상에 깊게 남는다.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가 '강현남의 여자'로 살았던 경험을 사뭇 단조롭게 늘어놓는다. '단조로운' 이라고 했지만 그 어조 속에서 우리는 많은 감정들을, 미쳐 날뛰고 싶도록 격한 공감을 하게 만드는 바로 그 감정들을 함께 읽어내려갈 수 있다.

현남 오빠의 프로포즈 앞에서 과거 순진한 여학생으로서 순종하고 숨죽이고 살았던 때를 회상하다 점점 고조되는 뉘앙스. 조목조목 따지고 들다 보니 잘못한 건 내가 아니라 현남 오빠였더라는 결론을 내기까지 보이지 않는 롤러코스터를 타듯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결국 고요하던 밤하늘에 화려한 불꽃이 '빵'하고 터지듯 극적인 순간을 맞이한다.

 

오빠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를 돌봐줬던 게 아니라 나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었더라. 사람 하나 바보 만들어서 마음대로 휘두르니까 좋았니? 청혼해줘서 고마워. 덕분에 이제라도 깨달았거든, 강현남, 이 개자식아!-38

 

쌓이고 쌓인 악감정들을 풀어내기엔 좀 약한 폭발이 아니었나 싶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대리만족으로 충분하다, 싶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잘 짚어내기도 힘들 텐데...

일시적인 순간에 느꼈던 억울함들을 차곡차곡 포개고 보니 어느 동화 속 공주가 묵었다던 높다란 침대만큼 되는 것 같더라.

그래, 맞아. 그 때 나도 그런 적 있었어.

당연히 빡치지.

아, 그 자식 앞에서 나는 왜 그렇게 속 시원하게 대꾸를 못해줬던 걸까?..

등등.

당연히 할 말 하고 살아야 하는데도 그러지 못하고 꾹 참아왔던 지난날들, 혹은 어제, 그제의 일들을 한데 포개서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가 현실에서 당하게 되는 수많은 좌절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봐주는 단편들은 <현남 오빠에게>, 당신의 평화>, <경년>들이다.

현실에서 있음직하진 않지만 여성이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색다른 이야기들은 <모든 것을 제자리에>, <이방인>, <하르피아이와 축제의 밤>, <화성의 아이>를 꼽을 수 있겠다.

구병모의 <하르피아이와 축제의 밤>은 여장남자 대회에 참가한 '표'의 이야기다.

의아스러운 계기로 참가를 했는데 여장남자 대회가 끝나갈 무렵 난데없이 날아드는 화살이라니. 주변의 사람들이 진짜 휙휙 날아다니는 화살에 맞아 쓰러지고 피를 흘린다. 가발이며 화장이며 뾰족한 스틸레토 힐까지 달아나는 데 거추장스러운 차림은 이제 달아나야 할 때에 제대로 벗겨지지조차 않는다. 살아남으려면 이 여성 분장을 없애버려야 하는데 빨간 원피스는 살갗에서 떼어내지지 않고 구두 뒤축을 뭘로 붙여놨는지 발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어떡하나, 어떡하나...하는 사이 '표'는 죽음의 공포와 살갗이 떨어져나가는 아픔속에서 스스로 아비규환을 겪는다.

 

각 작품마다 작가들의 '작가노트'가 곁들여져 있다.

개성 있는 여성 작가들의 이야기와 함께 읽으며 작가들의 의도를 엿보는 일도 재미있다.

각기 다른 문체 속에 담은 날카로운 현실 풍자와 페미니즘에 대한 진지한 성찰들이 한 작품씩 읽을 때마다 색다른 맛을 선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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