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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 - 길 위에서 배운 말
변종모 지음 / 시공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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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하면 언젠가...[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

 

 

 

 

 

 

어젯밤 귓가를 앵앵거리다가 밤새 작은 아이의 얼굴이며 종아리를 사정없이 물어뜯어 놓았던 모기 녀석을 이 아침에 꼭 잡고야 말겠어. 붉은 실핏줄 드러난 눈으로 레이저를 쏘아대다가 서둘러 아이들을 씻기고 분주히 아침을 차린다. 남편과 큰 아이를 보내고 종종걸음으로 유치원 가는 녀석을 데려다 준다.

드디어 혼자만의 공간을 내주려고 나를 기다리던 집의 품에 안...기려는 찰나,

발치에 채이는 훌훌 벗어던진 옷가지에 무심히 눈길을 주게 되고 널브러진 장난감 조각들을 허리 굽혀 집어 올리게 되고 맨발바닥에 닿는 먼지에 이맛살을 찌푸리게 된다.

에잇, 청소하고 빨래하고 정리하자.

그러다 보니 땀방울이 송송 맺히고, 아직 세수도 안 한 얼굴이 유난히 번들거리며 기름져 보인다.

샤워하자.

욕실에 들어서니 또 가족들이 사용한 흔적이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몇 올부터 뚜껑 안 닫은 치약, 욕조 안에 떠다니는 거품까지 거슬리기 시작한다.

이렇게 하여 눈에 띄고 또 띄는 잡다한 것들을 처리하다 보면 어느 새 11시.

배가 꼬로록 거리기 시작한다. 아침밥도 안 먹고 이러고 있었던 거야, 나.

한 가지를 끝내면 또 한 가지가 맞물려 시작되기 때문에 뭐 하려던 거였지,를 자주 까먹게 되는 주부성 치매가 이래서 생기는 거였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집안일의 무게가 버거울 때, 현실과 완벽하게 단절된 세계로 들어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TV 보기와 독서다.

드라마 시청의 기본인 본방사수를 꼬박꼬박 지키고 있는 나이기에 아침 시간에 TV는 잘 보지 않는다.

그러면, 독서.

특히 추리소설이 빚어내는 환각과도 같은 어찔함과 한 번 빠져들면 쉽게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글맛에 나는 중독되어 있다.

다른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는 긴박한 사건 전개와 대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만 같은 신선한 매력을 가진 각양각색의 탐정들이 너무 매력적이다.

머리가 쿵쿵 울리고 심장이 빨리 달리며 손바닥에 땀이 흥건히 고이게 되는...그렇게 한 두 시간 책 속을 헤매다 보면 일상은 쉬이 잊혀졌다.

개다 만 빨래며, 저녁 거리 장 봐야 할 장보기 목록들은 가서 낮잠이나 자라지. ^^

 

그러나 추리소설의 세계만으로는 완벽한 도피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나의 현실이 아닌 남의 현실을 엿보고 싶어지는 이상한 심리가 내게는 있다. 그럴 때는 에세이를 찾아 읽는다.

번잡한 일상이 사라진, 완벽한 관찰자의 시선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는 여행기들은 추리 소설 못지 않게 내 이성을 마비시키는 마력이 있다.

 

변종모의 [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

 

 

 

흐릿한 낙타를 쳐다보니 매직아이를 쳐다보는 듯, 이상한 나라의 폴이 끌려들어가는 사차원의 세계로 들어서는 듯...

호이호이 호잇~ 이다.

 

어느 곳을 걸어도 그가 걷는 길에서 말과 글을 제대로 건져낼 줄 아는 변종모. 그는 길을 나섰다가 훈자에서 5년 전, 매일 그를 찾아오고 그의 어깨에 목말타고 그에게 구구단을 배웠던 까까머리 꼬마 칸을 보고 고마워했다.

눈시울이 뜨끈해졌고 잠시 눈물도 났다던가.

나는 오히려 그의 글을 보며 행복해하는데...

 

그가 펼쳐놓은 말을 쳐다보다가 하나씩 하나씩 똑, 똑, 하고 따서 꼬로록거리는 배 속에다 던져 넣었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그렇지?”(...)

아무래도 좋다. 다만 살면서 정말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순간이 오면 이 사막을 기억하리라. 단단히 땅에 박힌 이 소금별의 편린을 떠올리리라. 그렇게 꿈인 듯한 비현실을 불러다가 이 반짝이는 순간들로 나머지 흐린 날들을 위로받을 것이다.

-207

 

나 대신 소금 사막을 건너온 그가 전해 주는 말들로 나는 비현실을 떠올린다. 도망치고 싶은 현실이 쌓인 빨래와 먼지 수북한 바닥과 널브러진 책들 같은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그것이 반복되면 진저리가 난다. 가끔은 소금별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는 착각만으로도 숨쉬기가 조금은 편해진다.

 

 

그 언덕에서 할 말이 없었다. 나의 언어가 아무리 무성하다 하더라도 그곳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

차라리 바위처럼 침묵하자. 남은 것이 있다면 더 버릴 것이 있다면 이 벼랑 아래로 전부 팽개치고 슬며시 돌아서고 나면 다시는 기억나지 않을 높이. 내가 발설하지 않아도 당신이 듣지 않아도 과거로 흩어져 나부낄 일들. 침묵만이 증언할 수 있다. 때로는 묻어두고 쌓아두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누르고 숙성시켜 진실을 이루게 할 것이다. -235

 

어쩜. 지금 내 안에서 굳게 닫힌 이의 단단한 성문과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그 말들에게 꼭 필요한 단 한 마디, “침묵하라.”를 여기서 발견할 수가 있지?

화를 꾹꾹 누르고서 차마 그 사람 면전에서 쏘아주고 싶은 말을 삼키고 대신 어깨를 꾹꾹 짚어주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는데, 잘 하고 있는 거겠지.

나의 고통스런 기다림은 바람에 실려 떠다니는 여행자가 품어 온 지혜를 제대로 실천하고 잇는 것이겠지.

 

카톡.

아아, 카톡.

이놈의 카톡 때문에 왕 진지모드가 헤실헤실 풀어져 버렸다.

심하게 감정이입되어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는데.

‘이봐, 동생아, 사탕 크러쉬는 좀 쉬는 게 어때?’

 

 

붉은 사막 와디럼. 말이 되는가? 붉게 죽어 있다니. 말은 되는가 말이다! 죽은 것이 붉게 타오를 수 있다는 것이. 그 사막이 그랬다. 붉은 사막. -258

(...)

어쩌면 차가운 외면보다 홀로 선 뜨거운 열정이 더 외로울 수도 있겠지만 외로움의 온도마저도 뜨겁게 끌어올릴 수 있다면 이 외로움이야 어떠랴. 자신만 좋아서 자신만 이해되는 일, 이것도 열정이다. -261

 

바람처럼 이곳 저곳을 떠돌지만 굳건히 뿌리내린 말들을 가슴에 품고 사는 작가도 있는데, 일상의 삶에 완벽하게 뿌리박은 나는 왜 흔들리는가.

무엇을 그리워하는가.

열정이 없어서인가,

잼을 만드는 동안 부글 부글 끓어오르는 솥처럼 화악 솟아오르는 화를 참아내기만 하는 것에 진저리가 나서인가.

혼자 남겨진 집 안에서 꼬로록 거리는 배를 안고 참, 혼자 생쑈를 다한다고 하겠다.

그래도 말들을 집어먹고 있으니 괜시리 포만감이 들어서 다시 배시시 웃음을 베어문다.

참 속도 없지. 참 무던하기도 하지.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겠지.

무엇을? 무언가를.

 

아직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두어 시간은 남았다며 기뻐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변종모는 참 글을 잘 쓰네. 나는 언제나 되어야 이렇게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그리고 언제나 되어야 홀로 구름에 달 가듯이 떠날 수 있을까나.

 

문득 이승철의 애절한 음색으로 읊조려지는 노래의 이 가사를 흥얼거린다.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결코 입밖에 내지 않았을 , 몹쓸 노래. 훗.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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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4 12: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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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친 그리움

림태주 (지은이) | 예담 | 2014년 5월

 

 

림태주 시인의 에세이. 림태주 시인은 바닷가 우체국에서 처음 그리움을 배웠고 인생학교에서 줄곧 그리움을 전공했다. 그리움은 태곳적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본능적이어서, 퇴화하지도 진화하지도 않는다. 다만 몸 안에 살아 있다 그 몸과 함께 진다.

제목이 아~ 막 나를 끌어당긴다.

이유 없이 슬퍼지려 하지만 한없이 공감되기도 한다.

이런 책은 꼭 읽어줘야 한다!!

 

 

 

 

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10년, 그 시간을 쓰고 말하다

김연수 (지은이), 금정연 | 마음산책 | 2014년 5월

 

 

<청춘의 문장들> 10주년을 맞아 새롭게 선보이는 특별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에서 10년, 청춘, 우연과 재능과 간절함, 직업, 소설 등 10개의 열쇳말을 뽑고, 그 주제로 김연수 작가가 금정연 평론가와 나눈 유쾌하고도 깊이 있는 대담과 함께, 특유의 감수성으로 새로 쓴 산문 10편을 엮었다.

  김연수의 책을 이상하게 잘 안 읽게 되었다.

겨우 그의 소설 하나 읽었을 뿐인데...

시인이라고도 하고, 소설가이기도 하고, 에세이도 가끔 쓰는..

김연수를 알아가는 책으로 이 책을 골랐다.

그의 문장들은 어떠할까? 궁금해진다.  

 

 

 

책등에 베이다 - 당신과 내가 책을 꺼내드는 순간

이로 (지은이), 박진영 (사진) | 이봄 | 2014년 5월

 

 

서교동에서 작은 책방을 운영하는 이로의 에세이. 이 책은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책의 작가나 줄거리 소개는 물론이고 작품의 의미를 찾지 않는다. 심지어 각각의 책에서 엄청난 분량의 문장을 인용해놓았지만, 그 인용문들은 저자의 이야기 속에 스며들어버린다.

  책방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책을 많이 읽겠지.

작품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는 데에서 많은 점수를 주고 싶다. 엄청난 분량의 문장 인용이 이야기 속에 스몄다는 데에서는 호기심을 느낀다.

어떤 내용일까.

제목이 나를 날카롭게 베고 지나간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팻 캐바나 (지은이), 최세희 (옮긴이) | 다산책방 | 2014년 5월

 

맨부커상 수상작가 줄리언 반스의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가 자신과 아내에 관해 쓴 유일무이한 회고록이자 개인적인 내면을 열어 보인 에세이이다. 동시에 가슴 아픈 러브스토리를 담은 소설이자 19세기 기구 개척자들의 모험담을 담은 짧은 역사서이기도 하다.

 

 

표지의 기구가 왠지 의미심장했는데..

소설과 에세이의 중간쯤인 이야기라고 누군가 얘기해서 참 궁금했다.

아내를 잃고 난 후 남아 있는 남편이 쓰는 이야기...가슴 아픈 러브스토리에 또 눈물 한 가득 흘리게 될까...

 

 

마술 라디오 - 오래 걸을 때 나누고 싶은 이야기

 

 

정혜윤 피디가 사람들 가슴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듣고 풀어낸 마술 라디오 이야기. 사람들이 살면서 들은 이야기들, 그런데 잊히지 않는 이야기들, 잘했건 아쉽건 자랑스럽든 후회되든 잊히지 않고 반복적으로 혹은 기습적으로 생각나는 자신 혹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이뤄져 있다.

 

 

라디오를 안 들은 지 꽤 오래 됐다. 눈을 감고 누워 듣는 라디오의 세상 얘기처럼...조근조근...누군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한없이 들어보고 싶다. 마술처럼 빨려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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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박람강기 프로젝트 3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안현주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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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글을 통해 얼굴을 드러내는 남자.[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사실 이 책을 받아들고는 팔짱을 낀 남자의 실루엣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안경을 쓴 모습의 실루엣이라니...지적인 이미지가 물씬 풍기지 않는가.

그래서 작가의 사진을 내심 기대하며 책장을 넘겼는데 웬걸...1888-1959라는 생몰연도와 간략한 소개만 실려 있을 뿐, 그의 사진은 나와 있지 않았다.

왜, 이 책에는 작가 사진이 없는가.

 

그 답은 이 책의 내용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바보같은 출판사 사람들은 왜 표지에 작가 사진을 싣는 걸 그만두지 못할까요?

허걱-

순수한 마음에서 작가의 얼굴을 멋대로지만 상상해보고 기대에 부응하는 얼굴일지 궁금해하는 것도 잘못일까요? 하고 소심하게 되묻고 싶을 정도로 직설적이고 강한 문장이다.

 

작가들은 대개 정말로 끔찍한 외모들을 하고 있어서, 그 얼굴을 보면 작가들을 좋아하려고 하는 어떤 마음 같은 게 사라져 버릴 겁니다. -204

 

나는 그만 여린 마음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예에-. 하고 기어드는 소리로 대답할 수 밖에.

 

‘레이먼드 챈들러는 묘하게 위압감을 주고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재주가 있다.’ 고 그만, 결론을 내리고 싶었다. 독선적이고 배려심 없는 사람 같으니...

 

워낙 오래 전 인물이라 챈들러의 탐정 소설이나 영화 시나리오 등은 읽어본 적이 없고, 그의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영화조차 접해 본 적이 없다. 다만 필립 말로라는,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에서 전설적인 인물이라는 탐정의 이름만 어디선가 어렴풋이 들어본 것 같고 귀에 익숙할 뿐.

그의 탐정 필립 말로는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하드보일드 주인공의 전형이라고 한다. 또한 챈들러가 구사한 문체와 의외의 직유는 이후 많은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도 한다.

 

이쯤 되면 책의 목차상으로도 1장에 배치되어 있는 그의 작품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터인데..

그 즈음 이 책의 출판사 <북스피어>에서 진행하고 있던 페이스북 이벤트를 덜컥 보아버린 것이, 순서대로 이 책을 읽어나가리라 했던 나의 다짐을 허물어 뜨렸다.

 

일종의 친구이자, 비서이자, 영감의 원천이라 짐작할 수 있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검은 페르시안 고양이 이름을 맞히는 이벤트였다.

1) 워키 2) 토키 3) 타키 4) 터키 5)켄터키 6)프라이드 7)치킨

 

 

 

무릎 위에 내 비서를 안고 있는 사진이 특히 잘 나왔더군요. -195(아마도 이 사진일 듯<북스피어> 페이스북에서 퍼옴)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고양이 사진, 내 여동생이 집에서 키우고 있는 털 많은 하얀 고양이의 사진을 첨부했고, 이벤트에 당첨되었다!!-아래는 내가 올린 사진-고양이 이름은 호야, 멜랑이 둘 중의 하나. 나도 사실은 잘 구분을 못 하겠다^^)

 

답 댓글을 이렇게 적었었네요.-3번 타키. 우리 고양이 타키는 점점 폭군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200

챈들러의 책 읽고 있는데, 아직 200 페이지까지는 못 읽었어요. 고양이 부분도 흥미롭네요. 가능하다면 전문을 인용하고 싶을 정도^^)

 

 

 

 

비록 힌트는 나와 있었으나, 내게 북스피어의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라는 책이 있는 한, 책을 또 다시 한 번 안 거들떠볼 수 없지...싶어서 그 부분을 찾았더니 챈들러의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에 꽤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었다. (195-202)

갑자기 냉소적이고 거만하다고 느꼈던 그의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타키는 대개 정중하게 거리를 유지하는 편이지만, 가끔 가다 따지기를 좋아하는 마법에 걸려서 한 번에 십 분씩 말대답을 할 때가 있어요. 타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면 좋을 테지만, 결국은 ' 좀 더 잘할 수 있잖아'를 아주 냉소적으로 말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196

고양이를 어루만지는 그의 모습에서 아주 약간 다정하고 섬세한 면이 있나~ 했지만, 역시 타키나 챈들러나 "냉소"와 닿아 있는 면은 꼭 닮았다.^^

 

 

 

챈들러는 젊은 시절에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대체로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가, <빅 슬립>을 발표한 이후 20년간 전부 일곱 편의 장편을 썼다. 연상의 아내 시시의 죽음 이후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실제로 자살 기도까지 했다고 한다. 그의 근황을 가까운 이들에게 쓴 서간문을 모은 이 책에는 이른바 챈들러 스타일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심지어 필립 말로를 언급한 부분에서는 챈들러와 필립 말로가 거의 동격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것은 나만의 느낌적 느낌인가...

 

작품론, 작가들, 할리우드, 필립 말로, 일상.

5개의 챕터 중 어느 부분을 먼저 펼쳐 읽어도 그의 글 속에 진하게 베인 체취를 흠뻑 맡을 수 있다.

작가에게 가장 가치 있는 투자는 스타일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멋진 남자.

그는 영감을 기다리다가 글을 쓰며, 생명력을 지닌 글은 모두 가슴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초고를 마칠 때까지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절대 알 수 없다는 점, 즉 플롯에 관심이 없고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을 절대적인 신조로 삼았다.

 

아무리 말을 아껴도 장기적으로 보자면 글쓰기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스타일이고, 스타일은 작가가 시간을 들여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투자입니다. (...)

내가 생각하는 스타일이란 개성을 반영한 것이고, 개성을 반영하려면 먼저 개성이 있어야만 하니까요. (...)아무리 많이 편집을 하고 퇴고를 해도, 한 인간이 글을 쓰는 방식이 지닌 그 특색에 뚜렷한 영향을 끼칠 수는 없는 겁니다. 글의 특색이란 작가의 감정과 통찰의 본질에 따른 산물이죠.

-36

 

끝내 책의 표지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도 글쓰기에 대한 완고한 자기만의 생각을 가진 한 남자의 고집스런 얼굴이 거기, 있을 것임을 이제는 안다.

자신의 글을 통해 얼굴을 드러내는 남자.

 

<북스피어> 페이스북에서 퍼옴.

 

혼자 살 수 없고 혼자 살아서도 안 될 정도로 아내에게 깊이 애정을 느끼던 그가, 아내 시시를 잃고 나서 다시 한 번 알코올에 빠지게 되었다.

요양원에 갔을 때 그를 진료한 의사가 단 하나 문제되는 것이 바로 외로움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그러자 챈들러가 그 의사를 두고 평한 말.

나는 그 사람이 지독하게 똑똑하다고 생각해요. 그토록 부드럽게 나를 찢어 놓다니. 그렇게까지 꿰뚫어보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말입니다.

-244

 

이 문장을 보았을 때, 슬픈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을 참고 있었는데, 마지막의 감동적인 명대사 한 마디에 참았던 눈물이 툭 터져 나오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거칠면서도 부드럽다는 말은 바로 이런 말이렷다!!

 

나쁜 남자를 꿈꾸는 여성들이 많다. 그녀들의 공통된 환상은 그 나쁜 남자를 나만은 길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나쁜 남자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내 무릎에 누인 후 쓰담쓰담 해주면서 나의 사랑을 듬뿍 얹어주면 그 나쁜 남자는 나만을 바라보는 충성스러운 무사가 되어 줄 것이다~

거칠면서도 고집스럽고 하고 싶은 말은 꼭 하고서야 직성이 풀리는 나쁜 남자.

그러나 아내를 잃고 난 후의 외로움에서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하고 술에 의지해서야 살아갈 수 있었던 남자.

이런 달콤함을 간직한 나쁜 남자라면 나는 그에게 기꺼이 중독되어 줄 수 있다.

물론, 실제 생활에서는 어렵겠지만 그의 글에는 얼마든지 중독되어 줄 수 있다는 말이다.

챈들러가 말했듯이 글에는 그 사람의 가슴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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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 - 마스다 미리 산문집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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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만 사용하고, 아이는 사양할게요.[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

 

 

30대에서 40대로 갈 때에는 어떤 기분이 들까?

10대에서 20대, 30대까지 나이 먹는다는 것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고 살아오지 않았기에 40을 코앞에 둔 지금, 이 질문을 한다는 것이 조금은 낯간지럽다.

20대가 인생의 꽃이라는 둥, 그래도 30일 때가 아직은 청춘이라든 둥. 나이 드신 분들이 조금이라도 젊은 사람들에게 항상 그 젊음을 부러워하며 아쉬움을 토로할 때가 종종 있다. 먼 훗날의 일이려니 하고 흘려들었던 것을 요즘은 새삼 꼭꼭 씹어삼키게 된다.

40이 될 때의 기분? 꼭 나이 40이 될 때는 어떤 의례라도 치러야 할 것처럼 밀어붙이는 거창한 질문이기도 하지만, 예전엔 하루만 콜록거리면 나았던 감기가 일주일 이상의 몸살로 이어지고 금방 한 말도 까먹고 다시 메모를 들여다보아야 하는 때가 잦아지면서 나이 40이라는 것이 커다란 관문처럼 내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섰다.

나이 40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것인가, 그냥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쿨 하게 넘겨버릴 것인가.

 

 

나이를 지칭하는 말들은 많이 있어 왔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동양의 성인 공자께서 일찍이 나이를 들어 한 말이 격언처럼 전해져 내려오고 나이를 일컫는 다른 이름이 되고 있다.

15세는 지학, 20세는 아예 거론되지 않고 있다. 30은 이립, 40은 불혹, 50은 지천명, 60은 이순, 70은 종심이라 했던가...

30에 나름대로의 뜻을 세워 40에는 더 이상 미혹되지 않는 나이가 되어야 한다는 뜻.

공자의 나이 계산법에 비춰보면 나는 아직도 마음은 여물지 않은 이팔청춘인데 그리고 귀도 얇은 팔랑팔랑 팔랑귀인데, 흔들림 없이 내 자리를 지키고 섰을 만큼 마음자리가 아직 단단하지 않은데...

그래서 40을 앞두고도 마냥 맥없이 가는 세월만 바라보며 시간을 까먹고 있을 뿐이다.

 

마스다 미리는 40대 초반에 이 책을 썼고, 아마 이 책이 발간될 즈음에는 44살이 될 거라고 했다. 독신이라서인지 아직은 일과 자기 자신에 많은 것을 할애한 듯이 보이고, 그러한 집중이 이런 독특하고 감성 넘치는 에세이를 탄생시키는 데 많은 힘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녀의 감성 에세이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똑같은 병뚜껑이라도 재활용을 어떻게 하느냐에 딸라 쓰임새가 달라지듯이 똑같은 나이 40을 재료로 글을 쓰는데도 그녀의 에세이는 뭐랄까, 재기발랄하고 통통 튀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흔한 생수병의 뚜껑은 그냥 닫아서 재활용 할 때 같이 휙 버리면 쓰임새가 거기까지이지만, 손끝 야무지고 독창적인 생각을 한 사람 손에서는 예쁘게 색을 입고 멋지게 빙그르르 도는 팽이가 되어 다시 태어날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빙글빙글 도는 예쁜 병뚜껑 팽이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할 수 있는데...’하고 나라면 이길 수 있다는 듯이조용히 말해보지만, 독창적인 센스를 지닌 사람에게 진 것은 진 것이다.

마스다 미리의 에세이도 물흐르 듯 소소한 일상의 에피소드들을 엮어나가 마치 한 사람의 내밀한 일기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누구나 그런 일기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부럽다면 부럽다고 말하자.

그래, 나는 마스다 미리처럼 그림도 잘 그리고 평범한 문장도 반짝반짝 빛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부럽다!!

 

 

 

 

마스다 미리가 창조한 ‘수짱’의 일상에는 무수한 나의 하루들이 녹아 있었다. 그리고 수짱은 지금 40대를 건너고 있는 중이다. '여자 아이에서 여자만 사용하고 아이는 사양할게요.' 라는 이 문장에 오랫동안 시선이 머물렀다.

차마 떠나보내기 싫은 내 마음 속의 어린 아이를 이제는 떠나보내고 ‘여자’만을 사용할 때가 되었다는 말.

 

마음으로는 알고 있었으나 직접 깨닫기는 정말 어려운 말이었는데, 이렇게 글로 씌어진 문장을 한 번 읽으니 그 말이 실제로 다가온다.

 

식사 모임을 제안하고 레스토랑을 고르고 코스 요리 가격을 정하고, 최종적으로는 얻어먹고 말았다. 이건 어른으로서라기 보다 인간적으로 어떻게 보일까...돌아오는 길에 너무 창피해서 길바닥에 주저앉고 싶어졌다. 아직 멀었다. 나는 아직 한참 멀었어, 하고 비관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28

  나도 조만간 저런 생각을 하면서 내가 가장 연장자일 식사 모임을 제안하고 훌륭히 치러야 할 때가 분명 올 텐데...그 때 가서 호스트 노릇을 제대로 못 하고 얻어먹는 꼴이 된다면...그 때의 나도 수짱처럼 창피하다고 느낄 것이다. 기모노가 잘 어울릴 수짱의 동그마한 어깨를 감싸안으며 위로해주고 싶어졌지만 나 역시도 비슷한 성격일 것이기 때문에 쿨한 척 “괜찮아~”하고 다독여 줄 수가 없다. 함께 길바닥에 주저앉는 것은 해 줄 수 있으려나.

 

 

아무리 그래도 팔자 주름 같은 건 남 일처럼 생각하고 싶은 ‘여자 마음’이다. -10

어쩜 이렇게 여자 마음을 단 한 줄로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나이를 담담하게 바라보지 않으면 저렇게 팔자 주름을 부처님 손바닥 안에 놓고 여유작작하게 말할 수는 없으리라.

 

실컷 놀았다. 실컷 놀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다음 날에는 마사지 예약을 해둔 용의주도함. 당연하지, 이제 열일곱이 아닌걸. 열일곱 살로는 돌아갈 수 없다. 어른으로 지내는 것도 즐거워서 별로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85

어른으로 지내는 것도 즐겁다, 라...이 부분은 좀 동의하기 어렵지만 열일곱이 아니라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아! 슬프다.

 

 

아, 그렇다. 포장마차 하니 생각나는데 내가 축제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어른들이 군것질하는 모습이다.

누구에게나 이런저런 걱정이 있을 테지만, 그런 것을 잠시 옆에 내려두고 어른들은 야키소바를 후루룹후루룹 먹고 있다. -105

어쩜, 마스다 미리는 축제에서 군것질하는 하나의 에피소드마저도 흘려버리지 않고 글의 소재로 쓴단 말인가.

무언가를 먹을 때의 표정이라니...

나 같으면 먹는 데 있어서는 맛을 느끼는 데 집중을 해서 예전엔 심심했는데, 요즘은 짜게 느껴지네. 건강에 신경쓰고 있을 나이인가...라고 표현했을 텐데 말이다.

 

캐릭터 설정이 달라지지 않도록 작가와 함께 체중관리에 주의해야지 하고 배 둘레를 쓰담쓰담 하는 날들이다. -146

  나이 들어 어쩔 수 없이 고민하게 되는 나잇살. 마스다 미리는 수짱과 함께 하니, 자신이 뚱뚱해지는 것을 수짱에 빗대어 말할 수도 있겠구나~ 하며 잠시 부러워졌다.

배둘레를 쓰담쓰담 하는 것은 또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40대의 일상적인 모습이 되려나...

 

 

[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을 읽으며 적어도 나이 40을 바라보는 일에 그다지 큰 고민을 해야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여자아이에서 ‘아이’ 하나만 떼면 된다는... 그저 그 정도의 일을 해내는 것으로 생각하면 좋겠다.

무작정 천진난만한 “아이”를 떼어낸다는 것이 실은 가장 큰 아픔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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