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그녀가 있네 [범섬 앞바다]
그다지 사랑이 고픈 것도 아니면서 잡다하게 읽는 책 속에 한 권쯤은 '사랑' 이야기가 들어 있기를 희망한다.
그리하여 여러 권 조금식 읽다 만 책들 사이에는 핑크빛, 혹은 옅은 레드라도 사랑의 훈김이 조금 깃들여져 있는 구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무의식중에 그렇게 배열하여 놓은 것이니만큼 내가 구축한 책의 장벽 속에는 '사랑'이야기가 언제나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있어서 커다란
밤식빵 덩어리에서 밤 한 톨 찾아 떼어먹는 재미를 누리듯 여러가지 사랑 이야기를 맛볼 수 있었다.
최근에는 송승헌, 유역비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제3의 사랑]을 읽는 동안 재게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쉬이 진정시킬 수 없는 상태에
빠져들어 살짝 홍조 띤 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거울로 그 모습을 체크해 보지 않아 확실히 장담할 순 없지만 볼에 손을 대었을 때 약간은 평소보다 높은 열기가 감지되었으니 아마도 그럴
것이다.
제 3의 사랑은 짝사랑, 혹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류의 결론이 뻔한 이야기였지만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는 하나하나의 행동과 상황들이
나를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결국엔 소설이 끝남과 동시에 이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랑, 내게는 있을 수 없는 사랑, 여전히 환상 속의 사랑...이라는 강력한
현실을 마주하게 만들었다.
그렇지. 정신 차리자. 송승헌 같은 멋진 남자가 나와 인연이 있을 리 없고, 애초에 나 또한 단 한 번의 인연으로 가정을 버리고 사랑을
좇아갈 사람이 아니지 않나...
[범섬 앞바다]는 [제3의 사랑]을 덮고 나서 바로 시작한 책이었는데, 분명 사랑 이야기이긴 했지만 무언가 현실 이야기 같으면서도 현실
이야기 같지 않은, 말하자면 '이어도'를 찾아 헤매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았다.
오히려 비현실적인 [제3의 사랑]은 읽고 나서 현실을 강력하게 인정하게 만들어 주었지만, '이어도'를 찾아 나서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
같은, 이 환상적인 이야기는 현실에서 이런 사랑, 있을 수도 있겠다 싶은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
소설가이지만 초기단편을 쓸 때 자신이 진짜 작가이구나, 인식할 수 있었고 이후에는 소설가의 나날들에 잠식당해 글을 자유롭게 쓸 수 없게 된
한 남자가 있었다.
자신의 초기단편을 영어로 번역 중인 외국인 마이크의 말 한 마디에 한 여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애수'라는 카페의 여주인으로 마이크의 말에 의하면 그 여인은 어떤 남자라도 접근하지 못할 정도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했다. 비극적인
아름다움.
이렇게 문학적인 표현을 빌어 설명되기 때문에 여인은 더욱 신비한 존재로 각인된다.
영혼을 다 바친 사랑이 파국에 달했을 때만이 보일 수 있는 비극을 겹겹이 두르고 있는 그 여인은 마침내 소설가에게 마음을 허락한다.
여인이 운영하는 카페 '애수'에는 독특한 인테리어가 눈에 띈다.
그곳을 들어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강렬한 인상을 받을 만큼 섬뜩한 느낌을 주는 해저 사진. 10개 정도 되어 보이는 해저 사진은 음울한
색깔의 기암절벽과 여러 종류의 물고기를 담고 있다.
이것이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복선이 된다.
예술이란 인간이 겪어야 하는 모든 것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다는 거예요. 모든 슬픔과 고통과 잔인함까지도...사랑이 바로 그런
거지요.-137
운동권 남자친구가 신문 도중 동료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으려고 난로를 껴안아 얼굴이 화상으로 엉망이 되었다는 사실. 그 일로 여인은 복수를
하겠다고 하는데, 소설가는 그 복수가 아마도 자살의 형태가 될 거라며 그녀를 어떻게든 이 세상에 살아 있게 하려고 애쓰는 도중에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범섬으로 그녀를 초대한 소설가는 잊었던 예술혼이 불타오르기라도 하는 듯, 소설가는 글쓰기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그녀와의 미래를
꿈꾸는데...
여인은 자신이 죽으면 바람이 일지 않는 범섬 앞바다에 화장해서 뿌려달라는 말을 남긴다.
이 말이 앞으로 어떤 형식으로 실현이 될지 책의 결말을 보기 전까지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짧은 분량이니만큼 속도는 휙휙 붙어서 어느새 끝을 향하게 된 [범섬 앞바다] 이야기.
비극이면서도 비극이 아닌, 안타깝고도 아름다운 그들의 사랑이 묵직한 추를 드리운 채 내 가슴 속에 가라앉았다.
이런 사랑이 있을 수 있나.
예술로 승화시킨 사랑이라는 말은 흔하게 들어왔지만 범섬 앞바다에 자신의 재를 뿌려달라던 그 말을 이렇게 아름답게 실현시키다니...
이런 사랑이라면 실현 가능하지 않다고 해도 언제까지고 마음 속에 담아 두고 보고 또 봐도 싫증나지 않을 것만 같다.
그렇기에 더 오래오래 각인되고 비현실적임에도 언젠가는 이런 사랑을 해내리라 , 해보리라 되뇌게 되는지도 모른다.
오래된 혹은 케케묵은 사랑 이야기라고 해도 좋다.
깊고 푸른 범섬 앞바다 속에 펼쳐져 있는 바위는 그 사랑을 암흑 속에서도 가끔씩 반짝반짝 빛나는 빛 속에 드러내 보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