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카에겐 사랑하는 여동생 안나가 있다.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을 치르고 부모님의 집을 정리하려고 와있던 중, 에리카는 안나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부모님의 집을 팔아서 그 돈을 반 씩 나누어갖자는 거다. 부모님이 이 집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는 에리카는, 안나도 그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을텐데 이런 제안을 하다니, 그건 안나의 뒤에서 안나를 조정하는 루카스 탓이라고 생각을 한다. 에리카는 루카스가 싫었다. 동생이 왜 그 남자와 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린 두 자식들을 돌보는 것은 다 안나의 몫이었고, 안나는 잠을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빼빼 말라가기만 하는데, 루카스는 전혀 도와주려고 하질 않았고 늘 자기 이익만 생각했으니까. 네 삶의 주인은 네가 되어야 한다고 에리카가 안나에게 몇 번이고 말해보지만, 안나는 그런 언니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잔소리로 여기며 대화를 하고 싶어하질 않는다. 에리카에겐 집을 팔지 않을 권리가 없어, 어쩔수없이 집을 경매에 내놓기로 하는데, 그 집의 가격이 어느정도나 되는지 보려고 부동산 중개업자가 찾아왔을 때, 루카스가 갑자기 방문한다. 에리카는 그런 루카스가 꼴도 보기 싫어 집의 단점들을 하나씩 중개업자에게 말하고, 이 일은 장점만 부각해서 높은 값을 받으려던 루카스의 분노를 산다. 루카스는, 에리카가 짐작했던 것보다 더 '무섭고' '끔찍한' 남자였다.




그녀는 너무 무서워서 꼼짝도 못한 채로 서 있었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마, 알아들었어? 날 바보로 만들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해. 조심하라고!"

루카스가 단어 하나하나를 너무 세게 발음하며 으르렁거린 나머지 그녀의 얼굴에 침이 튀었다. 에리카는 얼굴에 묻은 그의 침을 닦아 내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그녀는 소금기둥처럼 움직이지 않고 선 채로, 그가 집에서 나가 사라져 버리기를 조용히 기도했다. 놀랍게도 루카스는 그렇게 했다. 그는 그러쥐었던 그녀의 목을 놓고 돌아서서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에리카가 안도의 한숨을 깊이 내쉬려던 찰나, 루카스가 한 걸음 만에 돌아와서 다시 그녀 앞에 섰다. 그는 에리카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입술을 눌렀다. 루카스는 그녀의 입술을 강제로 벌려 혀를 집어넣으면서 가슴을 꽉 쥐었다. 에리카는 브래지어의 언더와이어가 피부 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씩 웃으며 돌아서서 문으로 나간 뒤 겨울 추위 속으로 사라졌다. 에리카는 차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맥없이 주저앉아서 넌더리를 내며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루카스의 키스는 목 조르기보다 더 위협적이었다.(pp.142-143)



목조르기를 당하고, 강압적인 성폭행을 당하고나서야 에리카는 안나가 루카스로부터 왜 빠져나오지 못했는지를 알게된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안나가 자기 의지가 별로 없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폭력적인 남편과 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에리카는 운다. 이 무서운 일을 자신은 이번에 처음 당했지만 안나는 매일 당하고 살테니까. 이 무서운 남자를 어쩌다 한 번 만나는 게 아니라 안나는 함께 살고 있으니까. 그 지옥같은 생활이 짐작되어 에리카는 운다. 그동안 보냈을 지옥같은 시간과, 앞으로 보내게 될 지옥같은 순간들이 짐작되어 에리카는 운다. 그 고통속에 동생과 조카들이 있기 때문에 운다.




 에리카는 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두 팔로 다리를 감싸 안고 무릎에 머리를 기댄 채 울었다. 자신이 아닌 안나를 위해. (pp.142-143)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을 완전히 알 수없다. 내가 누군가를 만나 속깊은 이야기를 나눈다한들, 그것이 그 사람을 구성하는 전부일 리는 없다. 게다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 동안엔 상대가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하는지 알 도리가 없다. 우리는 상대가 하는 말만 듣고 판단해야 하고, 상대의 표정을 보고 짐작하는 것, 그게 전부다. 이 사실이 지독하게 끔찍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쁜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돕고 싶어도 '알아야' 도울텐데, 알지 못하면 도울수도 없을텐데. 상대가 내게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알 수가 없을텐데.



다음번에 여동생이 집에 오면 여동생에게 이 책 이야기를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에리카가 안나 때문에 울던 장면에서 책장을 덮고, 어떻게 이야기할지를 떠올려 보았다. 에리카가 울었던 장면 까지를 이야기해준 다음에, 동생에게 나는 언제나 네 편이라고 말을 해야할 것이다. 물론 네가 어디에서도 즐겁고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 나의 가장 큰 바람이지만, 혹여라도 누군가가 너를 아프게 하거나 상처를 준다면, 네가 그것 때문에 고통스럽다면, 감추지 말고 바깥으로 드러내라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테니 나에게 얘기하라고. 물론 이런 얘기를 하면 동생은 무슨 소리냐며 콧방귀를 낄지도 모르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파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혼자 고통을 느끼며 몰래 흐느끼며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잔인한 지옥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고 해낼 수 없을 것 같다고 느낄 때, 어떻게든 누군가에게 구조를 요청했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 구조를 요청하는 것 자체가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겠지만, 손을 뻗었으면 좋겠다. 대부분의 시간을 나와 함께 보내지 않는 동생에게도 이렇게 얘기하고, 조카가 좀 더 자라면 조카에게도 말해야겠다.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너를 후려치려고 하면 반드시 나에게 말을 하라고.

 

 

자꾸만 에리카가 우는 장면이 생각난다. 안나 때문에 우는 장면이. 자신이 잠깐 동안 루카스로부터 그 공포를 맛보고, 그걸 매일매일 당하고 있을 동생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자꾸 생각난다. 고통을 당하는 것도 끔찍하지만, 누군가 공포를 당할거란 걸 확실히 알고 있는 건 얼마나 더 끔찍한가. 마음이 너무 아프다. 그 무서운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 안나 때문에, 안나가 그렇게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에리카 때문에.

 

 

 

책 속에서 에리카는 와인의 맛을 음미할 줄 아는 사람이다. 에리카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파트리크는 와인을 사들고 에리카를 방문했던 날, 에리카가 하는대로 입안에서 와인을 굴려보다가 그 맛에 놀라고 기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에서 미칠듯이 와인을 마시고 싶어져, 어제 부랴부랴 마트에 나가 와인을 사가지고 왔다. 집에도 그제 사다 놓은 와인이 있었는데, 반 병 밖에 남질 않아 모자랄 것 같았고, 나는 뭔가 모자란 건 정말이지 딱 질색이라, 나가서 두 병을 사가지고 온 것. 저녁에 친구들을 만날 약속이 있었는데, 다녀온 뒤 집에서 혼자 와인을 마셔야지, 생각했었다. 입 안에서 굴려봐야지. 나는 너무 꿀떡꿀떡 삼키니까, 오늘은 입 안에서 굴려봐야지. 뭔가 다른 게 있나 느껴봐야지, 라고 생각하고 신이 났었는데, 친구들을 만나 소주를 마시고 맥주를 마시고 칵테일을 마시고 집에 돌아왔는데........눈 떠보니 오늘 아침이었다. 하아- 와인을 마시지 못하고 어젯밤이 지나가 버렸........................제대로 기억도 나질 않아 ㅠㅠ 내 토요일 밤은 어디로 간거야? ㅠㅠㅠㅠㅠㅠㅠㅠ

 

 

 

아무튼. 술 마신 다음날은 역시 내가 끓인 신라면이 짱이다. 해장엔 최고!

 

 

 

 

(이십대 중반에 나도 얼음공주 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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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고숨 2013-12-16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요일 밤은 다크사이드로 사라졌지만 포도주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 다행입니다. 둘 다 없어졌다면(저는 종종 그렇습니다) 정말 슬픈 일이지요. 자, 그만 아쉬워하고 월요일 밤의 건배를!

다락방 2013-12-16 18:06   좋아요 0 | URL
오늘은 또 우울 쩌는 월요일이니까 포도주를 제대로 마셔볼 수 있겠죠! 안그래도 얼른 집에 가서 포도주 마실 생각에 들떴답니다. 하하하하, 안주는 김치볶음과 두부입니다. 아하하하하. (치즈도 있긴해요.)

아무개 2013-12-16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엥? 다락방님이 얼음공주? 엥????엥???????

2.습관적으로 폭력에 계속 노출이 되다보면
절대 거기에서 벗어 날수 없다고 자포자기 하게되죠.
그러면서 나름의 방어기제로 나는 어찌저찌하여 이렇게 살수 밖에 없다.
나름 우리 남편도 괜찮은 면이 있다...이렇게 스스로 세뇌하면서....

3.토일 이틀연속 엄마가 해준 시래기 감자탕과 소주를 마셨더니
꽤 한동안은 감자탕은 못먹을듯....

4.아침에 삼양라면으로 해장하고 왔는데 왜 벌써 배가 고픈걸까요 ㅜ..ㅜ

다락방 2013-12-16 18:08   좋아요 0 | URL
1. 방점은 '얼음' 이 아니라 '공주' 에 찍어주세요. 쿨럭.

2. 참 어려운 문제죠. 본인이 거기에서 나오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말씀하신 대로 습관적으로 폭력에 계속 노출되면 의지 자체가 희미해질거고요. 그런참에 누가 계속 나와 나와 하는게 곧이곧대로 들릴 수 있을지도 의문이에요. 아 속상해요.

3. 시래기 감자탕과 소주라니....아 미치겠네요. 먹고싶어..그치만 오늘밤은 김치볶음과 와인을 먹을텝니다. 후훗

4. 아침은 원래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거 아니던가요. 뭐 점심도 저녁도 다 그렇고요. -0-

단발머리 2013-12-16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다가 새벽 3시에 일어나, 다락방님 글을 읽고는 잠이 확 깨서 무서워하다가, 겨우 다시 잠들었어요.
아침에 다시 이 페이퍼를 읽었어요. 나는 이 책은 못 읽을 거 같아요.
다락방님이 인용해주신 부분만 읽어도 너무 무서워서....

"대부분의 시간을 나와 함께 보내지 않는 동생에게도 이렇게 얘기하고, 조카가 좀 더 자라면 조카에게도 말해야겠다."

이 부분 너무 좋았어요.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을 때에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네 편이다. 너를 지지한다' 이런 메시지를 계속해서 줘야한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거든요.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내가 모르는 어떤 상황속에서 힘들어할 수도 있으니까요.

아, 라면 중에 신라면이 짱인데, 집에는, 라면이.... 없네요, 얼음공주님! ㅋㅎ


다락방 2013-12-16 18:11   좋아요 0 | URL
이 책이 시리즈더라고요. 2권도 있고, 2권에서는 여자주인공과 형사가 결혼해서 사건을 풀어가는가봐요. 궁금해져서 오늘 주문했어요. 사실 읽으면서는 읽고 팔아버려야지 생각했었는데, 다 읽고 나서는 계속 갖고있기로 결정했어요.
우리,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계속 주의깊게 관찰하도록 해요. 도움의 눈빛을 보내고 있을 때 알아챌 수 있도록 말이지요. 아, 정말이지 사람들이 고통없이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폭력은 가장 시급한 문제고요. ㅠㅠ

아니, 신라면이 왜 집에 없나요? 저희집엔 언제나, 늘!! ㅎㅎ

2013-12-16 1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16 1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울 2013-12-16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끓인 신라면!!

부디 이번주에는 그런일이 많이 생기지 않게...해주옵시고.. ...얼음같은 해넘이모임만...가득하게 몸을 보살펴주시옵고...^^

다락방 2013-12-16 18:13   좋아요 0 | URL
오늘은 드디어! 와인을 입에서 굴려볼랍니다. 저도 와인맛을 느낄 수 있을까요? 아하하하.
그나저나 이번주에 그리고 다음주까지 계속 술약속이 있어서 큰일이네요. 하하하하.

왜이렇게 라면이 또 먹고싶을까요? ㅜㅜ

Mephistopheles 2013-12-16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기공주겠지요.

다락방 2013-12-16 18:13   좋아요 0 | URL
여기서도 물론 방점은 '고기' 가 아니라 '공주'에 찍히는거죠?

Mephistopheles 2013-12-17 17:50   좋아요 0 | URL
예.............................................(정녕 그리하길 원하신다면...훗!)

네퓨타 2013-12-22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최근에 이 다음편인 프리처를 먼저 읽고 얼음 공주 읽어야 겠구나 다짐 했는데, 요기서 이렇게 얼음공주를 만났네요. 빨리 읽어야 겠어요.

다락방 2013-12-23 13:25   좋아요 0 | URL
아, 저도 프리처 구매해놨습니다. 저는 좀 뒀다가 읽으려고요. ㅎㅎ
 
얼음공주
카밀라 레크베리 지음, 임소연 옮김 / 살림 / 2009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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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까지 가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비행기와 기차 혹은 배나 버스를 탈 수도 있고 자전거를 타고 오랜 시간을 들여 갈 수도 있다. 걸어서 도착하는 것도 한 방법일텐데, 이렇듯 다른 여러가지 방법으로 목적지에 도착하면, 나는 누군가에게 '이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 으로 보이겠지만, 실상 내가 누구인지 가장 잘 말해주는 건, 이 목적지에 '어떻게' 왔느냐 일것이다.

 

나는 이 책, <얼음공주>를 읽으면서 목적지와 목적지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 자꾸만 생각해보게 됐다. 이 소설의 배경은 작은 어촌마을이고, 이곳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던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이 책속의 주인공 에리카는 희생자가 자신과 어린시절 각별했던 친구였던지라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녀에게 호감을 가진 형사와 함께 이 사건을 풀어나간다.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아내는 것, 이 이 책의 목적지라고 했을 때, 그러니까 이 책을 단순히 '추리' 라고 봤을 때 이 소설은 그다지 대단할것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작가는 살인사건 하나를 풀어내는 것을 독자에게 보여주려고 했으면서, 실상 더 많은 사소한 일상들을 곳곳에 심어놓았다. 부인에게 질려서 언제고 부인 곁을 떠나고 싶어하는 남자가 그 마을에 있고, 사랑이란 감정만 믿고 남편에게 맞고 사는 여자가 있다. 결국 그 살인사건의 배경과 원인에 대해 얘기하려고 하면서도, 한 여자에게 호감을 품고 설레임을 받아들이는 남자를 보여주고, 와인을 입안에 넣고 굴려 그 맛을 음미할 줄 아는 여자를 보여주고 있다. 이 모든 인물들과 이야기들 사이사이, 나는 이 작가를 점점 더 마음에 들어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든거다. 내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건, 내가 지금 여기 서있다는 자체가 아니라, 여기에 오기까지 어떤 길을 걸었느냐 하는 것이라는.

 

게다가 주인공 에리카는 너무나 나를 닮아서 정이 팍팍 든다.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는 것도 그렇고, 그렇게 즐기다가 몸무게를 재고 절망하는 게 그렇다. 와인을 입안에 넣고 굴리면서 행복해하는 것도 그렇고, 남자를 초대해놓고 어떤 속옷을 입을까 고민하는 것도 그렇다. 호감이 가는 남자와 식사를 하고 대화를 하는 걸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모든 문제들에 직면해서 해결하고자 하는 것도 그렇다. 물론 그녀의 해결이 언제나 올바르고 타당한 건 아니다. 때로는 무례하고 때로는 좀 지나치다는 감이 들지만, 그녀는 문제들과 사건들 앞에서 당당하게 마주하고자 한다.

 

대단할 것 없는 추리소설이었다고 생각하며 책장을 덮었는데, 덮고나서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자꾸만 생각난다. 결국 이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은 끝에 있었던 거겠지만, 이 작가가 어떤 사고를 하고 어떤 방향을 보고 있는지는 처음부터 끝에 이르기까지에 나와있었던거구나. 주인공 에리카가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아서-물론 다른점도 많다. 이를테면 끼니를 잊을 때가 더러 있다는 것 따위- 정다운 소설이었는데, 마지막, 결국은 아내로부터 몰래 도망치는 데 성공하는 남자를 보는 것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어촌 마을의 한 사람인 조연이 지긋지긋한 아내로부터 도망가는 내용은, 이 소설의 사건과 끝에 이르기까지 연관이 없다. 쓰지 않았어도 내용 전달에는 전혀 무리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적어 주었기 때문에, 나는 이 작가를 조금 더 잘 알 수있게 된거다. 묵묵히 걸어서 혹은 비행기와 기차를 타고서 우리 모두 목적지에 도착할 수는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누구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어떤 일들을 마주치는지는 각자의 몫이다. 그 각자의 몫이 내가 누구인지 말해준다. 한 작가에 대해 궁금해져서 다음 작품을 찾아 읽어보려는 것도 결국은, 결말에서 무엇을 말하는지가 아니라, 결말에 이르기까지 그 작가가 어떤 말을 하느냐에 달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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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할 게 좀 있었다. 지하철역까지 가는 출근길 버스안에서 계속 그 일에 대해 생각하다가, 내가 내릴 정거장이 되어 카드를 찍고 문 앞에 섰다. 버스는 멈췄는데 문이 열리질 않는다. 나는 문 좀 열어주세요, 라고 기사님께 큰 소리로 말했고, 기사님은 문을 열어주시면서 "내리기 전에 벨을 누르세요!" 하셨다. 나는 속히 내리며 당연히 내리기 전에 벨을 누르는건데 왜 저런 말씀을 하시는걸까 고개를 갸웃하다가, 아, 내가 벨을 누르지는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안눌렀구나. 내가 벨을 누르질 않았어. 맙소사. 하도 열심히 생각했더니 벨을 누르는 걸 잊어버렸어. 헐. 아니 이게 무슨일이야. 벨 누르는 것도 잊을 정도로 생각을 하다니...


그렇게 지하철 역에 도착해 지하철을 탔다. 그리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직 생각의 결론이 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그건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고, 지하철 안에서는 책을 읽자, 생각하고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책 속에서 이런 구절을 만났다.



비 때문에 눈이 질퍽해지자, 에리카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제한 속도보다 약간 느리게 운전했다. 실수로 들어간 히싱엔에서 빠져나오느라 거의 30분을 허비한 그녀는 이제 우데발라로 향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자 그제야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에리카는 우데발라 북쪽의 토르프 쇼핑센터에서 E6로 빠진 뒤 맥도날드로 차를 몰았다. 그녀는 주차장에 차를 세운 채 치즈버거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나서 곧 고속도로로 들어섰다.(p.54)

















아니... 이여자, 뭐야? 나는 버스에서 내릴때 벨 누르는 걸 잊긴 하지만, 맙소사, 끼니를 잊은 적은 없다. 아니 어떻게 자신이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꼬르륵 소리가 나야 그 때 비로소 알 수있는 거지? 아니, 그게 가능해? 나로서는 말도 안되는 일이라 생각이 된다. 


나는 매 끼니를 중요하게,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끼니를 거르는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유전적인 요인도 있을텐데, 나는 끼니때를 조금 넘기기라도 하면 신경질이 나고 화가 나고 우울하고 초조해진다. 어떻게든 빨리 늦지 않게 끼니를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그 때는 모든 판단들을 똑똑하게 내릴 수가 없다. 내 실수는 대부분 배고플 때 일어난다. 이건 우리 식구들 중에서 아빠와 나 그리고 여동생이 비슷한데, 우리는 굶어본 적도 없으면서 굶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특히 나는 더한데, 몇 년전에 한의원에 가서 이런 증상을 얘기하며 '이런 저는 저혈당이나 저혈압 뭐 이런걸까요?' 라고 닥터에게 묻자, 나를 진료한 닥터가 '저혈압 같은거 없고요, 락방씨는 신경성인것 같은데요. 굶는거에 대해 신경쓰는거죠' 라고. 헐. 이런것도 있나. 뭔가 부끄럽고 챙피했는데...어쨌든 나는 매끼니가, 한 끼 한 끼가 무척 소중한거다. 사람의 수명을 백년이라고 봤을 때, 그마저도 한 살부터 스무 살까지는 주로 주는대로 먹게되지 않는가. 내가 돈을 버는 것도 아니니. 그렇다면 내가 먹고 싶은걸 선택해서 먹을 수 있는건 고작해야 팔십년 밖에 안되는거다. 그 팔십년의 끼니를, 고작해야 팔십년의 끼니를 나는 놓치고 싶지 않다. 어느 한 순간도. 내가 다이어트를 결심하는 그 수많은 날들 속에서도 '굶기'를 선택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다. 나는 그 팔십년의 끼니동안(그래봤자 벌써 내 나이가 이렇게나 많아 졌으므로 남은 세월이 또 줄었다), 거르고 싶지 않고 맛없는 걸로 먹고 싶지도 않다.


'실버스타 스탤론'과 '산드라 블록'이 주연한 영화 <데몰리션 맨>은 미래가 배경인데, 실버스타 스탤론은 과거로부터 잠들어 있다 깨어난 상황이었다. 모든 삶들이 기계로 대체가 가능한데, 섹스조차 실질적인 몸의 접촉 없이 기계로 하던터라, 이에 실버스타 스탤론이 분노하며 산드라 블록에게 실제로 입을 맞추는 장면이 있었다. 그 때 산드라 블록은 그걸 처음 경험해보고 놀라워하고 좋아하는데, 나는 만약 끼니에 충분한 한 알의 알약이 세상에 나와도, 끝까지 음식 먹기를 고수하는 1人이 될 것 같단 생각이 오늘 들었다.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를 후후 불며 먹는 걸, 노릇노릇하고 기름이 좔좔 흐르게 삼겹살을 굽는 걸, 한 손에 나이프를 쥐고 한 손에 포크를 쥐고 스테이크를 써는 걸, 가끔은 포기김치를 손가락에 고춧가루 묻혀가며 좍좍 찢어먹는 걸, 정말이지 포기하고 싶지 않다. 사람들이 점차로 알약으로 끼니를 때우기 시작한다면, 나는 인터넷으로 '음식 먹기 모임' 을 만들어 최대한 버틸 수 있는데까지 버텨가며 내 눈으로 음식을 보고, 내 코로 음식의 냄새를 맡고, 내 입 안에서 혀로 굴려가며, 내 이빨로 씹어서 음식을 삼키고 싶다. 내가 배 부르려면 내가 직접 음식을 씹어 삼켜야 하고, 내가 취하려면 직접 내 입을 통해 알콜이 들어가 혀 곳곳에 흔적을 남겨야 한다. 















음식은 위로다. 아니, 맛있는 음식은 위로다. 애인이 위로가 되는 순간도 분명 있지만, 그건 나를 폭 안아주거나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주거나, 내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눈을 맞출 때, 그 때뿐이다. 음식은 애인보다 더 빈번히 나를 위로한다. 무려 하루에 세 번이나 위로하니까. 그러니 애인하고는 헤어져도 밥하고는 못헤어지는 게 아닌가.


그런 끼니를, 밥 먹는 것을 잊다니! 배가 꼬르륵할 때야 내가 오늘 아직까지 아무것도 안먹었구나, 하는 걸 알다니. 맙소사. 이건 말도 안된다니까, 정말. 물론 나도 인간인지라 밥맛이 없었던 적은 있다. 그러나 그 때조차도 밥 먹는 걸 잊지는 않는다. 나는 밥을 잊을 수가 없다. 어떻게 밥을..........




어제 퇴근 후 백화점에 들를 일이 있었는데, 엄마로부터 문자메세지가 왔다.


<저녁 메뉴는 묵은지닭볶음탕. 어때 땡기지?>


나는 저 문자를 받은 그 시점부터 안절부절, 백화점에 갈 일은 다음으로 미루고 집으로 곧바로 갈테닷. 하고 퇴근후 고고씽, 가면서 동료에게 '나 묵은지 닭볶음탕 먹으러간다' 이러면서 신나게 나섰다. 묵은지 닭볶음탕이 기다리는 홈, 마이 해피 홈, 마이 스윗 홈, 너무 좋아. ㅠㅠ 완전 맛있어서 기절할 뻔했다. 엄마는 내게 너 백화점 들렀다 온다고 하지 않았니? 물으셨고, 나는 엄마에게 이렇게 답했다.



아니, 나 백화점 가게 할 거였으면 묵은지 닭볶음탕 해놨다는 문자를 보내면 안되는거지! 점심엔 된장찌개를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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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12-12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은 아무리봐도 토리코의 세계관과 너무나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궁금하시다면 "토리코"로 검색을 해보아요.)

다락방 2013-12-12 09:53   좋아요 0 | URL
검색해 봤습니다. 무려 토리코는 '미식 헌터' 로군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다크아이즈 2013-12-12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될 수 있으면 안 먹으려고 노력해야 돼요. 부종에다 급격한 살찜 현상ㅠ
하지만 그게 어디 되간디유?

요리에 관심 없는 저, 오쿠 찜기 사서 편하게 요리 비슷한 거 하는데, 맹탕에겐 딱이네요.
특히 장아찌 종류요. 다락방님은 요리해주시는 엄마가 옆에 계시니.^^*

다락방 2013-12-12 13:22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ㅠㅠ 저야말로 이렇게 매 끼니를 미친듯이 먹어대면 안되는 그런 육체의 소유자입니다. ㅠㅠ 그런데도 역시나 끼니때마다 유혹에 굴복당하고 말아요. 흑흑.

제 여동생도 오쿠 장만하고 엄청 이것저것 해보며 좋아하던데, 오쿠는 신의 기계인가봐요. ㅎㅎ
저는 요리도 못하는데 엄마랑 같이 살아서 입이 호강입니다. 전 계속 엄마랑 함께 살고 싶어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자작나무 2013-12-12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래서 다락방의 음식공감이 출간되어야 하는 겁니다.

다락방 2013-12-12 14:42   좋아요 0 | URL
그건 독서공감이 12쇄를 찍으면 그 때....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ㅎㅎ

프레이야 2013-12-12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흑 ᆢ 묵은지닭볶음탕! 진짜진짜 먹음직스러워요.

다락방 2013-12-13 08:53   좋아요 0 | URL
아흙 행복했습니다 프레이야님 ㅠㅠ
 
어바웃 타임 O.S.T.
론 섹스스미스 (Ron Sexsmith) 외 노래 / 유니버설(Universal) / 2013년 11월
평점 :
품절


출근 준비를 하며 들었다. 바깥은 몹시 추울거란 친구의 문자메세지가 하나도 겁나지 않았다. 따뜻해질거라고, 견디지 못할 게 없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포근한 겨울이 될 것 같았고 정말이지 다 괜찮을 것 같다. 그리고 버스타러 가는 길, 별로 안춥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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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12-12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을 고기로 든든하게 드셨군요.

다락방 2013-12-12 09:06   좋아요 0 | URL
헉! 아니 어떻게 아셨어요? 저 묵은지 닭볶음탕 한 양쟁이 먹고 왔어요. 완전 맛있어서 밥만 먹으면서 밤을 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지 뭡니까!!

Mephistopheles 2013-12-12 09:12   좋아요 0 | URL
꼭 음악만으론 추위가 가시긴 힘들잖아요.....ㅋㅋㅋ
(밥만 먹으면서 밤을 샐 수도 있겠단 생각....."트왈라잇 존(환상특급) -포츈쿠키-"에피소드가 생각나네요..ㅎㅎ)

다락방 2013-12-12 13:22   좋아요 0 | URL
흐음. 역시 예술의 힘이 아니라 고기의 힘...이었던걸까요.....

자작나무 2013-12-12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기를 먹은 날과 먹지 않은 날의 체감 추위는 매우 다른 것 같아요.

다락방 2013-12-12 13:22   좋아요 0 | URL
네, 확실히 든든한게 덜 추운듯.
크- 스테이크에 와인을 먹고 싶어지네요.
방금 점심으로 콩나물국밥을 먹고왔는데 ㅠㅠ

루쉰P 2013-12-16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주인공 여 배우 정말 맘에 들어요...남자 주인공이 너무 안 어울린다는 개인적인 생각 -.-;;;

다락방 2013-12-16 18:13   좋아요 0 | URL
오, 저는 남자주인공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ㅎㅎ
그나저나 루쉰피님도 보셨군요! >.<
 
콜레라 시대의 사랑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8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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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다시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종속된 생활을 하면서 양보해야 했던 모든 것을 되찾고 싶었다. 물론 남편은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었지만 그가 죽자 그녀는 누구인지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하루아침에 고독하게 변해버린 거대한 타인의 집에서 이리저리 배회하는 유령이 되어, 죽은 남편과 살아남은 자기 중에서 누가 더 죽은 것인지 자문하면서 고뇌하곤 했다. -209-210쪽

그는 이미 그녀가 대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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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2013-12-12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낭독이 뜸하네요. 책읽어주는 여자 다락방 CD 출시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락방 2013-12-12 13:23   좋아요 0 | URL
제 낭독은...그다지 매력이 없는것 같아서.. ㅎㅎ
이쪽은 내 갈길이 아닌가보구나, 하고 포기했습니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