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 이야기 (특별판, 양장)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암흑이었을까 빛이었을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암흑일까 빛일까.

애트우드의 모든 작품을 다 읽는 걸 인생 목표중 하나로 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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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19-08-16 0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뒷 이야기가 9월에 나온다고 하니 기대중이에요!!!

다락방 2019-08-16 06:41   좋아요 0 | URL
애트우드 님이 부지런히 더 많은 책을 써주신다면 좋겠습니다! 뒷이야기도 얼른 읽고 싶어요!!(어쩐지 무섭기도 하지만..)

공장쟝 2019-08-19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정도 입니까?!! 저는 오늘 진입합니다!

다락방 2019-08-19 18:59   좋아요 1 | URL
쟝쟝님 진짜 장난 아니에요. 저에겐 올해의 소설입니다!

공장쟝 2019-08-19 19:04   좋아요 0 | URL
아 신나 ❤️
 

















"날 도와주신다고요? 어떻게요?"

내 목소리도 그만큼 나직하다.

그는 뭔가 알고 있는 걸까, 루크를 본 적이 있을까? 실종된 그를 찾은 걸까? 내게 다시 루크를 돌려줄 수 있나?

"어떻게 도와줄 거라 생각해요?"

여전히 숨소리나 다름없는 낮은 목소리. 다리 위로 미끄러져 올라오는 게 그의 손인가? 그는 장갑을 벗어던졌다.

"문은 잠겨 있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아요. 그 사람 아이가 아니라는 건 절대로 발각되지 않을 거요."

그는 장막을 걷는다. 그의 얼굴 아랫부분은 하얀 가제 마스크로 가려져 있다. 한 쌍의 갈색 눈동자, 코 하나, 그리고 머리카락이 갈색인 머리 하나. 그의 손은 내 두 다리 사이에 있다. (p.106)



아이가 없어 대리모를 데리고 사는 대부분의 사령관들은 불임인 경우가 많다. 그것도 모르는 채로 시녀들은 어쩌면 자신에게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고. 시녀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도 나이 제한이 있다. 사령관과 아이를 갖는 행위를 치르는 것도 임신 가능성이 높은 날 하루 이틀이고. 


오브프레드 역시 임신하지 못하고 있고 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녀들은 매달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 몸에 이상은 없는지 검진을 받아야 하는데, 이번에 갔더니 닥터가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말하며, 자신과의 섹스를 제안한다. 명목상 그가 하는 제안은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너희들이 만나는 늙은이들 대부분이 불임인데 너네들이 겪는 고통을 보니 끔찍하다, 는 것. 그러니 자신이 기꺼이(!) 그 일을 함으로써 도와주겠다는 거다. 닥터는 그녀를 검진하면서 어떻게든, 어디든, 어떤 방식으로든 그녀를 만질(?)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에 시녀는 고민해야 한다. 내가 이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나. 



진심 어린, 진심 어린 동정의 목소리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즐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동정이며 이 모든 일들을. 두 눈은 동정으로 촉촉하게 젖어 있지만, 한 손은 초조하고 성급하게 내 몸을 더듬고 있다.

"너무 위험해요. 그럴 수는 없어요."

죄의 대가는 사형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들킬 때의 일이다. 그것도 증인 두 명이 있어야 한다.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진료실에 도청 장치가 되어 있거나 문 뒤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내 몸을 훑던 그의 손이 뚝 움직임을 멈춘다.

"생각해 보세요. 당신 차트를 봤어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더군요. 하지만 당신 인생이니까."

"고맙습니다."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남겨야 한다.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여운을 흘려야 한다. 그는 느릿하게, 아쉽다는 듯이, 손을 치운다. 그의 입장에선 이걸로 끝이 아니다. 검사 결과를 위장할 수도 있고, 내가 암이나 불임이라고 보고해서 나를 '비여성'들과 함께 식민지로 추방시킬 수도 있다. 지금 듣고 본 일은 없었던 일로 쳐야하지만, 어쨌든 내가 맡게 된 이상 지금 우리 사이의 공기 중에는 그가 지닌 힘에 대한 공통된 인식이 떠돌고 있다. 그는 은근슬쩍 내 허벅지를 가볍게 툭툭 두들기더니 장막 뒤로 물러난다. (p.107-108)



닥터에겐 권력이 있다. 그녀의 목숨을 쥐고 흔들 권력, 그녀의 앞으로의 남은 날들을 쥐고 흔들 권력. 그에게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했다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아니라는 말을 하는데 조심해야 하고, 그의 기분을 건드리면 안된다. 그러면서 어쩌면 이것은 자신에 대한 테스트가 아닐까, 하는 것도 동시에 고민해야 한다. 내가 수락했다가 혹여라도 이것이 테스트라면, 그래서 자신이 불법에 관여하게 된거라면 역시 목숨을 잃을 테니까. 그런 선택의 기로 앞에서 이걸 선택해도 저걸 선택해도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 그런 선택 자체가 그녀에게 주어진 것이 얼마나 고통인지. 그리고 그것을 그녀의 '선택'이라고 과연 말할 수 있는걸까. 내가 비록 임신해야 하는 여자이지만, 그 역할을 수행해야 앞으로 살아갈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닥터의 강간의 손쉬운 목표가 된다는 건 또 얼마나 큰 비극인가. 내가 아무리 그래도 너랑 그럴 순 없어, 라고 말할 수 없는 입장인 것은 또 비극 한덩어리를 더하고. 


어떻게든 그의 기분도 거스르지 않으면서 그러나 그녀가 범법을 저지른 것도 아닌 것을 드러내면서 그 시간을 간신히, 무사히 넘겼다고 하면, 그러면 결과적으로 잘됐다고 할 수 있을까?




"다음 달에 봅시다."

나는 장막 뒤에서 다시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는다. 손이 떨린다. 나는 왜 겁에 질린 걸까? 경계를 넘어서는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덥석 사람을 믿어 버린 것도 아니고, 위험을 받아들인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안전한데도. 나를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 건 선택 그 자체다. 탈출구, 구원의 길. (p.108)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자신의 앞날이 무사하지 못할 수 있다는 공포. 이제 비로소 그 순간이 지나갔으니 안도할 수 있을까. 아니, 아니다. 닥터는 다음 달에 봅시다, 라고 말했다. 다음 달에도 어김없이 시녀는 이 병원에 방문해 이 닥터에게 진료를 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 지금 일어난 이 일은 그 때 또다시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제안이 반복되면, 많은 사람들이 경험해봤겠지만, 계속해서 거절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워진다. 본의 아니게 허락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생겨버려. 시녀는 지금은 아니라고 해서 무사히 넘어갔지만, 다음달에는 그리고 그 다음 달에는 어떻게 될까? 다음 달에 다시 병원을 방문해야 한다는 사실, 그걸 알면서 지금 이 병원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계속 공포는 그녀에게 들러붙어 다닐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집에 가서 사령관에게, '그 병원 닥터 이상하니 다른 병원으로 가겠소' 라고 말할 수도 없다. 어디가서 하소연 할 수도 없어. 그저 묵묵히 그 선택 아닌 선택과 강요를, 압박을, 그 무거운 분위기를 혼자 견뎌내야 한다. 게다가 다음에 또 그것이 올 거라는 걸 각오해야 한다. 



그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 그녀에게는 어떤 권력도 없다는 것, 그녀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권력 자체가 그 자신에게 있다는 걸 알면서 '내가 너를 임신시켜서 너를 고통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할 수 있어' 라고 말하는 닥터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력을 성폭행에 이용하려고 하는 남자. 자신이 가진 힘을 알기 때문에 자비로운 척, 자선을 베푸는 척 강간에 다가갈 수 있는 남자. 




한 남자는 그녀의 위기의 순간을 이용해서 성폭행을 하고자 하고,

또 한 남자는 그전에 같은 일로 목숨을 잃은 시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지금 시녀에게 또 시키고 있다. 걸리면 죽는 건 그가 아니라 시녀니까.




선택이 주어졌기 때문에 오히려 더 두렵고 고통스럽다면, 그것은 그녀가 사실은 선택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는 게 아닌가. 

아, 권력을 가진 놈들이 자상한 척 하고 배려하는 척 하는 게 진짜 너무 싫다. 그러면서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려 하는 게 너무 싫어. 

애트우드가 1985년에 쓴 작품이 2019년인 지금에 읽어도 그 간극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몹시 슬프다.  그때나 지금이나 남자들이 아무것도 변한 것 같지 않아 슬프다. 여전히 좆같은 놈들이 권력을 쥐고 앉아있는 게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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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이브 - 코드네임 빌라넬
루크 제닝스 지음, 황금진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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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데 책장 안넘어가고 재미없어서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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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9-08-14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솔직한 리뷰 고마워요. 리뷰가 귀여워요. 얇고 책장 잘 넘어간다는 줄...

다락방 2019-08-15 19:39   좋아요 0 | URL
얇아도 지루해요 ㅎㅎ

psyche 2019-08-16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는 재미있었는데... 책은 별로군요!

다락방 2019-08-16 06:40   좋아요 0 | URL
저도 드라마 재미있다는 말 들어서 책으로 먼저 읽으려고 한건데 너무 재미없었어요 ㅜㅜ

공장쟝 2019-08-19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 연기력 오지고 육진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책보는 사람들에게 드라마란... 너무 길고 힘든 것입니다....ㅜㅜ)

다락방 2019-08-19 18:43   좋아요 0 | URL
제가 그래서 드라마를 못보는 걸까요? 전 왜 드라마를 못볼까요?? 전 드라마 보는 게 너무 힘들어요. ㅜㅜ

공장쟝 2019-08-19 18:52   좋아요 0 | URL
잘은 모르겠지만 ㅋ시간아까워서 아닐까요?ㅋㅋㅋㅋ 전 드라마 보면 왤케 시간이 아까운지 ㅋㅋㅋㅋ 그래서 혼자 밥먹을 때 보거나, 그림그리면서 봅니다 ㅋㅋㅋ

다락방 2019-08-19 18:58   좋아요 1 | URL
비슷한 것 같아요. 전 정말 드라마를 볼 시간이 없어요!!

공장쟝 2019-08-19 19:02   좋아요 0 | URL
컬러링이나 뜨게질을 하면서 보면 좀 덜 자괴감이 들어요 ㅋㅋㅋ ㅋㅋㅋ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자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자기들 마음대로 계급을 나누고 자기들이 원하는대로 여자들을 부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여자들의 경제권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멀쩡히 직장에 다니면서 돈을 벌고 있는 여자들의 계좌를 동결시켜 버리는 일. 여자가 일해서 번 돈이 들어있는 은행 계좌를 이용할 수 있는 건 여자의 남편이나 형제에 의해서 가능해졌다.



그들이 동결시킨 거야. 그녀가 말했다. 내 것도 마찬가지야. 여성 단체의 카드도 마찬가지야. M(남성, male-옮긴이)이 아니라 F(여성, Female-옮긴이)라는 글자가 박힌 계좌는 전부 그래. 몇 번 단추만 누르면 되는 일이야. 우리는 철저히 차단당한 거야.

하지만 은행에 2000달러나 입금해 두었는데, 나는 말했다. 세상에 중요한 게 내 계좌밖에 없다는 듯이.

여자들은 더 이상 재산을 가질 수 없게 됐어. 새로 입법된 법이야. 오늘 TV 켜 봤어?

아니.

TV에 나와. 하루 종일 나오고 있어. 모이라는 나처럼 경악하고 있지 않았다. 이상하지만 어떤 면에선 들떠 있었다. 자기는 오래전부터 이런 일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보란 듯이 들어맞았다는 것처럼.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생동감 넘치고 결연해 보였다. 루크가 너 대신 '컴퓨터카운트'를 사용할 수 있어. 적어도 그들 말로는 그래. 남편이나 가장 가까운 친척이. (p.306)




내가 일해서 내가 번 돈이고 그래서 내가 예금해놓은 돈인데 그 돈을 내가 인출할 수 없다. 그 통장과 연결된 카드도 정지가 되어 있다. 그 돈을 쓰는 건 내 남편이나 형제여야 한다. 내 돈인데. 내가 예금한건데. 내가 일한 내 돈인데.


내 돈을 내가 관리할 수 없게 되었는데 직장에서도 짤렸다. 그러니까 여자들을 직장에서 몰아낸 것.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랑 함께 사는 남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가 돈을 써서 나를 먹여 살리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나는 꼼짝할 수 없게 된거다. 내가 무언가를 먹고 싶어도, 무언가를 사고 싶어도 이 모든 걸 나의 가까운 남자의 승인 하에 할 수 있게 되어버리니, 아무리 남자가 '원하는 건 다 하게 해줄게' 라고 한들 그것이 내 자유인가. 이미 '해줄게' 가 되는건데.



더 미치겠는 건, 이 일에 남편은 내 생각만큼 분노하지 않는다는 거다. 사실 별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아.



당신은 내 기분 몰라. 나는 말했다. 누가 내 발을 잘라 버린 기분이었다. 울지 않았다. 하지만 루크를 껴안을 수도 없었다.

일은 일일 뿐이야. 그는 나를 달래려고 했다.

당신이 내 돈을 다 갖는단 말이지. 내가 죽은 것도 아닌데. 농담처럼 말했지만, 막상 내뱉고 보니 소름이 끼쳤다.

쉿. 루크가 말했다. 아직도 마루에 무릎을 꿇은 채로 있었다. 내가 언제까지나 당신을 돌봐줄 텐데 뭘.

난 생각했다. 벌써 이이가 나를 봐주는 척하고 있어. 그러고는 또 생각했다. 벌써 나는 피해망상에 시달리는구나.

알아. 나는 말했다. 사랑해. (p.308)



남편은 그것이 별 문제가 아니라는 듯, '내가 너를 돌봐줄텐데' 라고 말한다. 왜 한 사람의 성인이 다른 성인을 돌봐주어야 하는가. 그리고는 벌써, 봐주는 척하고 있다. 하아-




그이는 마음에 걸리지 않는 거야. 그이는 전혀 마음 쓰지 않아. 어쩌면 오히려 잘됐다고 여길지도 몰라. 우리는 더 이상 서로의 것이 아니야. 이젠, 내가 그의 것이 되어 버린 거야.

무가치하고 부당하고 비현실적이었다. (p.313)




사랑하는 사이인 어른 두 명이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있다고 구속력을 갖게 되는데, 나는 너만 볼게 너만 사랑해 라고 속삭이는데, 그러나 경제권이 어느 한 명에게만 가 있다면 그건 그 사이에 권력이 생김을 뜻한다. 돈을 쥐고 있는 쪽은 권력을 갖고 있고, 상대는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을 가지려 노력해도 이미 돈을 가진 쪽의 밑에 들어가 버려 꼼짝할 수 없게 된다. 아 너무 끔찍하고 너무 징그럽다. 내가 누누이 말했지만, 그레이가 엄청난 재벌이라 아나스타샤의 옷장을 가득 채워줘도, 그것은 아나스타샤의 자유가 아니다. 아나스타샤는 냉장고 바지 한 벌을 사더라도 자신이 번 돈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아나스타샤 스스로의 힘으로 예금 통장에 돈을 넣어야한다. 그레이의 돈이 곧 내 돈이라고 생각하다가는 그레이의 마음이 바뀌는 순간 쫄딱 망해버리는 것이야. 그렇기 때문에 그레이가 '내가 너에게 부족한 거 없이 다 해줄테니 너는 일하지마' 라고 해도 '안돼 이놈아 나는 나가서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버럭대며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녀 이야기》에서는 그렇게 '내가 나가서 일을 할 것이다' 하는 여자들을 법으로 막아버린다. 안돼. 너는 일 못하고 돈 못벌고 돈 못 써. 이게 새로 바뀐 법이야. 그렇게 여자를 남자에게 '속한' 것으로 만들어 버려. 자립할 수 없는 무언가로 만들어 버린다. 남자와 동등할 수 없는 남자의 아래 존재로 만들어 버려. 하아-



결국 이 사회에서 여자들은 사회가 정한 대로의 직업 혹은 신분만을 가질 수 있다. 사령관 씩이나 되는 남자의 아내들은 '아내'로 여성으로서 가장 '높은' 권력을 가지게 되지만, 그 외의 여자들은 실상은 대리모인 '시녀'가 되거나 집안 일을 봐주는 '하녀'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직장에서 쫓겨나고 내 예금을 내가 쓸 수 없게 되어버린 여자는 시녀 라고 불리는 대리모가 된다.



대리모란 말 그대로 아이를 '대신' 낳아주는 걸 뜻한다. 아내가 낳을 수 없는 아이를 대신 낳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 이 책에서 대리모가 남편과 번식행위를 하기 전까지 나는 당연히 침실에서 별개로 남편과 대리모가 성관계를 가지는 건 줄 알았다. 쉽게 말하면 첩의 역할 같은 걸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나 시녀와 하녀 그리고 아내로 나뉘어진 이 세상에서는 쾌락을 절대 허용할 수 없다. 섹스는 아이를 낳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그것에 쾌락이 끼어들어서도 안되고, 은밀함과 감정이 끼어들어서도 안돼. 너무 충격적이었던 게, 시녀와 남편이 아이를 갖기 위해 행위를 하는 그 순간에 아내가 그 자리에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섹스는 아내와 남편의 것이되, 그러나 자궁만은 대리모의 것 이 되어버리는 거다. 아내도 눕고 그 아내의 배에 머리를 대고 시녀가 눕고, 그리고 남편은 키스 없이 시녀의 자궁에 씨를 뿌리는 것. 이 감정 없는 행위가 끝나면 마치 이 일을 치러낸 것은 아내의 것인듯 아내도 쉬어야 하고, 그렇게 임신하여 시녀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 역시 바로 아내에게로 가 아내의 아이가 된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야. 하아-

세 명 모두가 뻘쭘한 이 짓을,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하고 있는 거다. 시녀는 단지 자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시녀와 남편은 아내 몰래 따로 만나서는 안된다. 그러나 어느날 남편이 몰래 시녀를 자신의 서재로 부른다. 여자들은 책을 읽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남편의 서재에는 아내 역시 들어갈 수 없는 금녀의 구역인데 그 곳으로 몰래 시녀를 불러내는 것. 나는 이것이 혹여나 아내 없이 섹스를 하기 위함인가 했는데, 그는 엉뚱하게도 낱말게임을 같이 하자고 하는 거다. 그렇게 시녀는 아내 몰래 가끔 남편의 서재로 가 남편과 낱말 게임을 한다. 아내와 하지 않는 게임, 아내는 남편을 이해하지 못해 요즘 사실 별 대화도 없다니. 이 시간은 남편의 즐거운 시간이 된다. 물론 시녀도 이 시간으로부터 얻는 것이 있고.


내가 놀란 건 이 상황에서의 시녀가 느낄만한 감정을 마거릿 애트우드가 아주 정확히 표현했기 때문이다. 아플만큼 정확하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여자에 대해 죄책감도 있었다. 마땅히 그녀의 것인 구역을 침범한 침입자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게임 상대가 되어 주고 이야기를 들어줄 뿐이지만, 남몰래 사령관을 만나고 있는 지금에 와서는, 우리의 역할이 더 이상 원칙처럼 깔끔하게 분리된 게 아닌 셈이다. 그녀는 알지 못해도 나는 그 여자에게서 뭔가를 빼앗고 있었다. 좀도둑질을 하고 있었다. 내가 빼앗은 것은 그녀가 전혀 원하지 않았고, 그녀에게는 쓸모도 없으며, 심지어 스스로 거부한 것이라 해도 달라질 건 없다. 여전히 그건 그녀 것이었고,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이 신비스런 '그것'을 내가 빼앗아 버린다면, (사령관이 내게 느기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극단적인 감정이라고 여기는 것을 나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럼 그녀에게 더 이상 뭐가 남는다는 말인가? (p.276)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그의 정부다. 최고위층의 남자들은 언제나 정부가 있었다. 지금이라고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물론 계약의 내용이 약간 다르기는 하다. 옛날에는 정부들이 작은 집이나 아파트를 따로 갖고 있었지만, 요즘은 사정이 뒤죽박죽 되었다. 하지만 들춰보면 속은 다 마찬가지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옜날 어떤 나라에서는 '바깥 여자들'이라고 불렀다지. 나는 바깥 여자다. 안에서 채워줄 수 없는 걸 제공하는 게 나의 일이다. 그게 스크래블 게임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치욕스러울 뿐만 아니라 정말 한심스런 신분이기도 하다. (p.279)




시녀의 갈등이 너무 생생하지 않은가. 비록 낱말게임이지만 아내가 아닌 자신이 하고 있다는 데에서 오는 죄책감, 아내 대신 남편에게는 중요한 혹은 놓고 싶지 않은 어떤 순간을 함께 하는 그 상황 때문에 자신을 정부라고 느끼는 갈등. 이 부분을 읽는데 너무 고통스러웠다. 나는 정부였나, 나는 정부였던가. 그러니까 내가 연인이나 애인이었던 그 상황속에서조차 나는 정부의 삶을 살았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밀려와 너무 괴로운 거다. 그러니까 나란 사람이 했던 것, 나란 여자가 상대에게 주었던 것은, 온전한 나로서가 아니라 영혼이나 정신을 채워주는 부분적 역할이었던 게 아닌가... 하는. 온전히 하나로서 기능하는 게 아니라 어딘가 모자란 완전하지 못한, 하나가 되다 만 여자의 역할이었던 건 아닌가. 나는 상대에게 그런 기능이었던걸까. 나는 그렇다면, 이 책의 단어를 빌자면, 정부가 아니었나.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나는 몹시도 괴로웠다. 고통스러웠다. 뇌가 찢어지는 것 같았어. 영혼과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시녀는 알게 된다. 자기의 전임자로 있었던 시녀 역시 이 역할을 했다는 것. 남편의 서재에 들르는 역할. 그리고 아내에게 들켰고, 결국 자살을 했다는 것을. 그러니까, 그런 일이 있었는데, 자신의 서재에 몰래 불러 들켜 자살한 시녀가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그 다음 시녀를 또!! 자신의 서재로 불러낸 거다. 헐... 아니 이 무슨 ......


현실에서 '아내 몰래' 이루어진 관계였다면, 그러다 들켰다면 서로 싸우고 헤어지면 된다. 그런데 이 책속에서 시녀가 존재하는 이 사회에서 시녀에게는 아무런 권력이 없다. 시녀에 대한 권력은 아내가 가진 상황에서, 게다가 사회적으로는 모든 권력이 남편에게 있는 이 상황에서 시녀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아무런 권력도 가진 게 없이 시키는대로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자칫 잘못하면 '비여성'으로 분류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을 서재로 불러내 죽게 만들어놓고, 그런데 낱말게임 하고 싶은 자기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고 다른 시녀를 또 불러내? 그러다 또 들키면? 그러면 누가 죽어나가는데? 누가 죽어야 되는데? 남편은 아닐 거잖아? 자기가 죽을 것도 아니잖아? 어째서 한 쪽에게만 위험한 그런 상황임을 뻔히 알면서 이 짓을 '또' 하지?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분노가 하늘을 찔러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 쓸모없는 남자새끼야.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마거릿 애트우드가 천재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성을 단순히 자궁으로 기능하게 하기 위해 그 전에 경제력을 먼저 뺏어버린 것도 그렇지만, 아니 그러니까 이 책을 써낸 것 자체로도 그렇지만, 이렇게 여자가 죄책감을 느끼고 내적 갈등을 느끼면서, 아 내가 이래도 되는걸까, 나는 뭐였나,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이래도 되는건가, 하고 있는데, 사실 남자는 자신에게 해로울 게 하나도 없는,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여자의 안전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것. 자기의 욕망에만 충실하고 있었다는 것. 아내의 어떤 부분을 내가 뺏어버렸네, 나는 정부야,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남편은 전에 이 일로 자살한 시녀가 있었음에도 또 이 짓을 하고 있었어. 아, 여자란 무엇인가.

나는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자연스럽게, 아 남편은 낱말게임을 놓지 못하는 사람이고 그게 필요한 사람이구나, 그걸 나눌 사람이 없었구나, 그런데 그걸 시녀가 채워주는구나, 외로운 부분이 있는 사람이었어, 우리는 누구나 외롭지...하고 있었는데, 그냥 이기적인 개새끼였어.. 하아- 나의 이 휴머니즘 어쩌면 좋아 ㅠㅠ




일전에 시녀의 어머니는 이런 얘길 한 적이 있다. 이런 사회가 되기 전에.



어쨌든 내가 염색해서 어디다 쓰겠니. 남자들이 줄줄 따라다니는 걸 바라지도 않아. 10초 동안 정자를 제공하는 것 외에 그들이 무슨 쓸모가 있겠니? 남자라는 건 여자들을 더 만들어내기 위한 여자의 도구일 뿐이야. (p.208)




대단한 소설이다. 나는 이래서 소설이 좋다. 이 소설 한 권에 없는 게 없다. 사랑하는 사이지만 여자의 불이익과 부조리에 대해서는 딱히 공감하지 못하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지만, 여자들이 연대하는 부분에서는 얼마나 짜릿하고 신나는지! 아직 다 못읽었지만 읽을수록 감탄하게 된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생각하려고, 말하려고 하는 여자가 이 소설속의 주인공이다. 이렇게 치밀하게 잘 짜여진 소설이, 모든 걸 다 담고 있는 소설이 여기 있다. 작가 천재.. 천재다.

오늘 또 생각했다. 소설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소설을 읽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시녀 이야기 한 번 읽어봐요, 소설이란 게 이렇게 천재적인 거구나 싶을테니. 아, 너무 근사한 소설이다 진짜. 늦게 읽어 죄송합니다.


올해 초에 샤론 볼턴 천재라고 감탄에 감탄을 쏟았는데 마거릿 애트우드도 천재네. 흑흑. 천재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 건 너무 씐나는 일이다 정말 ㅠㅠ




생각이 많으면 끝까지 살아남을 확률이 줄어드는데, 나는 되도록이면 끝까지 버틸 작정이다. (p.16)






다른 장소, 다른 시간, 다른 인생이었다면, 서로 좋아할 만한 여자로 여기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할 리 없고, 그녀 역시 나를 좋아할 리 만무하다는 걸 이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P30

‘아내‘들을 조심해야 해. 어떤 기분인지 미리 상상하고 알아차리도록 부단히 애써야 해. 물론 ‘아내‘들은 너희들을 아주 싫어하겠지.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야. 그쪽 기분도 알아주도록 애써 봐. 리디아 ‘아주머니‘는 자기가 다른 사람의 기분을 아주 잘 알고 배려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여자들을 가능한 한 동정하도록 노력해.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합니다 라는 성경 말씀도 있잖아.
- P81

내 곁에 누워 있는 루크를 느끼고 싶었다. 가끔 이럴 때가 있다. 현기증처럼, 내 머리를 휩쓸고 지나가는 파도처럼, 이렇게 엄습해 오는 과거에 시달릴 때가 있다. 가끔은 도저히 견뎌낼 수 없을 것만 같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생각했다. 어쩔 도리가 없어. - P91

그는 철창을 통해 바라보듯 내가 손과 얼굴에 로션을 바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건 욕실에 같이 들어온 듯한 느낌이어서 사령관에게서 등을 돌리고 싶었지만,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P273

나는 모래밭에 머리를 처박는 방법도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여자들밖에 없는 동굴 속에 처박혀서 유토피아를 건서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정말로 딱한 오해를 하고 있는 거라고 얘기했다.
하루아침에 남자들이 없어져 버리겠니. 나는 말했다. 그냥 무시해 버린다고 되는 게 아냐.
그건 차미 매독 균이 존재하니까 나가서 성병에 걸려야 한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야. 모이라가 말했다.- P295

‘그 빌어먹을 놈들한테 절대 짓밟히지 말라(놀리테 테 바스타르데스 카르보룬도룸(Nolite te bastardes carborundorum.)‘-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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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8-13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거릿 애트우드 정말 천재 같죠? 읽을수록 감탄합니다. 전 최근에 <눈먼 암살자> 읽었는데, 그 책도 후덜덜합니다. 암튼 <시녀 이야기>는 마지막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시녀 이야기의 역사적 주해‘ 도 정말 대단했어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는지... ㅠㅠ 이분의 모든 작품을 빠짐없이 읽어야 할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다락방 2019-08-13 11:21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잠자냥 님 눈먼 암살자 백자평 올리신 거 보고 읽고싶어서 체크해 두었어요. 오래전에 아주 오래전에 애트우드 작품을 읽었었는데요 지금은 내용도 기억이 잘 안나는데, 그 책도 찾아서 다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와, 시녀이야기 정말 대단하네요, 잠자냥 님. 어떻게 이런 작품이 있나요, 어떻게. 천재에요 ㅠㅠ

단발머리 2019-08-13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트우드는 그냥 딱 천재죠. 사진에서도 그 천재끼가... 활활!! 전, 좋은 작품이여서 노벨문학상 받는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우리나라는 노벨문학상 받으면 많이 읽히니까요. 애트우드 얼른 노벨문학상 받으셨음 좋겠어요. 살아있는 작가한테만 준다면서요..ㅠㅠ

잠자냥 2019-08-13 13:46   좋아요 0 | URL
저도 해마다 애트우드 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받기를 기도합니다. 아무리 노벨문학상 의미가 퇴색했다하더라도 상징적 의미가 클 거 같거든요.

다락방 2019-08-13 13:54   좋아요 0 | URL
아 정말 노벨문학상 받으셨으면 좋겠네요. 노벨문학상 받으면 책 일 년에 한 권 읽는 사람들도 관심을 갖고 애트우드 읽게 되지 않을까요? 이렇게 좋은 작품은 널리 읽히게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소설이 이렇게나 좋은 거란걸 애트우드 님이 이렇게 치밀하게 얘기하주고 계시는데 말입니다.

저는 너무 신납니다. 애트우드란 작가를 알게된게요. 물론 오만년전에 [도둑신부] 읽고 무슨 말인지 몰랐던 것 같은 기억은 있지만, 이제 찬찬히 다시 도둑신부도 읽어보고 눈 먼 암살자도 읽어보고, 애트우드 님의 책을 모으겠어요. 아아, 찾아 읽을 작가가 있다는 것은 정말 너무 근사하지 않나요?

블랙겟타 2019-08-13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글만 읽어도 이 책의 전체 내용이 궁금해질 정도로 읽고싶게 만드네요. 또 저한테는 이 책이 어떻게 읽혀질까요? 조만간에 저도 뒤따라 애트우드의 세계로 들어가볼께요. (๑◔‿◔๑)

다락방 2019-08-13 13:56   좋아요 1 | URL
블랙겟타님! 이 책은 매우 천재적인 작품임과 동시에 대단히 재미있습니다! 소설적 재미도 있으면서 메세지도 팍팍 주기 때문에 정말이지 아주 즐거운 시간이 될거라고 봅니다. 블랙겟타님이 어서 애트우드의 세계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컴온!!

잠자냥 2019-08-13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 님 이 포스팅과 댓글에 천재라는 단어 몇 번 썼는지 한 번 세어보고 싶어집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8-13 14:1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천재를 너무 동경한 나머지 천재라는 생각이 들면 마구 천재천재 막 이렇게 되어버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blanca 2019-08-14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책 추천하는 사람 너무 많네요. 다락방님까지.. 읽어봐야 할까요?

다락방 2019-08-14 18:01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꼭 읽으셔야 합니다. 꼭이요, 꼭! 꼭 읽고 감상도 남겨주세요!! 후회하지 않으실거에요. 정말 잘 읽었다 생각하실 거에요. 독서인생은 바로 이래서 좋구나, 하실 거에요!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영화《굿모닝 맨하탄》을 보았다. 오래전에 티비에서 해줄 때 놓쳤던 영화라 언젠가 봐야지 했었는데 마침 비행기 안 상영 영화에 있었다.


인도에 거주하는 인도인 여자 '샤시'는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시어머니를 모시며 살고 있다. 일찍 일어나 커피라도 한 잔 할라치면, 남편이 일어나 부스럭대며 차를 달라, 밥을 차려라 요구를 한다. 밥상에 둘러 앉아서도 남편과 딸아이는 샤시가 영어를 못한다고 무시하기 일쑤다. 여자가 잘 하는일, 취미를 붙여 신나서 하는 일, 돈도 벌어다 주는 일은 간식인 '라두'를 만드는 일인데, 이 일을 가족들은 높이 쳐주질 않는다.


그런 참에 미국에 사는 '샤시'의 조카가 결혼을 한다면서 샤시네 가족을 초대한다. 남편은 샤시에게 좀 더 일찍 가서 결혼 준비를 도우라고 말한다. 샤시는 그렇게 뉴욕에 도착해 언니네 가족들을 만나지만, 혼자서 카페에 가는 것도 두려워질 정도로 영어를 못하는 자신에게 주눅 들어 있다. 그런 그녀가 우연히 '4주만에 영어 완전정복' 이라는 학원을 알게 되고, 언니네 가족들 몰래 그 학원에 등록해 매일 영어를 배우러 다닌다.


학원에는 각 나라별로 각자의 사정으로 영어를 배우기 위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영어를 거의 하지도 못하는 그들이 4주동안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학원에 모여 영어 실력이 점차 나아지는 걸 보게되는데, 역시 누군가 공부하는 걸 보는 건 정말이지 즐거운 일이다. 더불어 내 공부의욕도 마구 샘솟고.


어느날 샤시가 학원에 늦었다. 들어가도 되냐고 묻는 샤시에게 선셍님은 반복해서 "You may not." 이라고 말한다. 들어가도 되냐는 말을 제대로 해보라는 다그침이다. 이에 샤시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선생님에게 묻는다.


"May I come in?"


그제야 선생님은 그녀에게 들어오라고 하고 그렇게 그 수업은 계속 진행된다.




샤시의 영어 실력은 처음과 달리 아주 좋아졌고, 영어로 다른 사람들과 대화도 가능해졌다. 영화는 보수적인 모습을 버리지 못해 가끔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이를테면 아내를 계속해서 무시하고 후려치기 하는 남편에게 아내도, 그리고 다른 친척들 그 누구도 '그래서는 안된다'고 대놓고 말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게다가 그렇게 무시를 당하면서도 '여전히 남편 당신은 내사랑' 이라고 하는 것도, 아이를 낳고 진정 행복해지라는 샤시의 조언도... 아아, 그 와중에 깨우친 것들을 보여주는 영화지만 여전히 보수적인 게 남아있더라. 그러나 열심히 영어공부하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영화를 통해 보는 건 너무 즐거웠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영화를 다보고 내 동행에게 '저런 학원 정말 있을까, 4주만에 영어 정복해주는?' 이라고 물었고,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냥 일단 영어로 무조건 대화하게 하는게 영어 실력을 정말 향상시켜주는걸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런 데가 있으면 나도 기꺼이 갈텐데!




긴 비행을 마치고 JFK 공항에 도착했다. 기존에 미국에 왔던 적이 있는 사람과 이번에 처음인 사람이 다른 줄로 서게 되어있었다. 여권을 스캐너에 읽히고 통과해 입국심사 줄에 섰는데, 내가 선 줄의 내 앞 사람이 막 입국심사를 마치고 나갔다. 이제 내 차례였다. 입국심사를 받기 위해, 나는 심사관에게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묻고 있었다.



"May I come in?"



아아아.. 몇 시간 전에 본 영화에서 나온 대사를 이렇게 바로 써먹게 되다니! 완전 오픈된 곳이 아니어서 가능한 물음이었다. 심사관은 그렇다며 오라고 했다. 아... 역시 영어는 영어 생활권에 들어와야 비로소 향상되는 것인가. 물론 내 늘어난 영어 실력은 고작 May I come in? 이 다였지만, 이 얼마나 뿌듯한 일인가. 사람은 배웠으면 써먹어야 하는 법. 나는 어째 이 문장을 평생 잊지 않고 살 수 있을 것 같다.




4주만에 영어를 완전 정복할 수 있다면, 나도 뉴욕에서 그곳을 찾아 열심히 다녀보리라, 고 비행기 안에서 결심했건만, 뉴욕에서 며칠 지내면서는 '그냥 한국에서 공부하자'로 마음이 바뀌었다. 물가가 너무 비싼 까닭이었다. 기본 팁은 메뉴에 적힌 가격과 별개로 18퍼센트나 되어서, 내가 이렇게 짧게 여행온 사람이라 지불이 가능하지, 이 곳에 산다면 나는 이것들을 먹고 다닐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게다가 시내 중심에 위치한 호텔의 비용도 어마어마했다. 여태 여행하면서 다녔던 호텔들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주고 묵고 있건만 시설은 딱히 좋지 않았다. 객실에 있는 욕실 변기의 수압도 낮고 자꾸 막혀서 직원을 불러야 했다. 내가 여기에 한달간 묵으려면 비행기 값과, 호텔값과, 밥값이 필요할텐데, 아아, 이럴 거면 한국에서 과외를 받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아니야, 노팅힐 대본 사둔 거...그거 보자. 마침 《시녀 이야기》원서도 샀잖아. 필사하자.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여기에서도 공부할 수 있어!!





뉴욕에 머무는 동안 가장 좋았던 시간은 <휘트니 뮤지엄>에 갔던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가는 내내. 나는 혼자였고 핸드폰으로 지도를 봐가며 온전히 걸었다. 한시간 가량을 열심히 걸어가며 낯선 장소를 한껏 감상했다. 뉴욕은 이번에 세번째 방문이었는데, 그간 첼시 쪽은 오질 않았었네. 여긴 또 그간 내가 갔던 곳과 다르구나 싶어 몹시 신나고 흥분됐다. 먹구름이 끼어 곧 비가 올 것 같아 중간에 마트에 들렀는데, 3단우산의 가격을 보니 우리돈으로 25,000원 가량 하는거라. 얼라리여.. 내 캐리어에 우산 들어있는데, 이 돈 주고 도무지 우산을 살 수가 없다.. 하고는 그냥 나왔다. 그래, 일단 그냥 걸어보는 거야. 걷다가 비 오면 그건 그 때 생각하자, 하고 나는 열심히 걸었다. 그렇게 휘트니 뮤지엄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 혼자, 이 낯선 거리를, 실컷 걸어 온전히 감상하며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생각에 한껏 신났다. 비가 오지만 알게 뭐람, 그건 이따 다시 생각하자. 나는 그렇게 천천히 그림들을 보았는데, 아아... 6층의 야외 테라스에서 나는 행복 오브 행복을 느껴버리고 만다. 너무 좋으네요 진짜... 테라스의 까페에는 파라솔도 있어서 비를 피할 수도 있었지만, 동시에 비를 맞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는 주변의 전망이라니. 도시와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데 너무 좋아서 ㅠㅠ 울고 싶었습니다 ㅠㅠㅠ 나는 그렇게 의자에 앉아서 한참이나 바깥을 보았다. 그림을 보러 왔다가 테라스에 반해버렸네. 그 모든 시간들이 충만했다. 동행과 따로 떨어져 혼자서 지도를 보고 낯선 거리를 걸었던 시간,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내 기대 이상의 장소를 만나는 짜릿함.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미술관을 나왔을 땐, 비가 멎어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나 '언젠가는 미국에서 살아볼거야' 했는데, 이번에 가서는 '나는 이곳에서 살 수 없을 것이다'를 생각했다. 모든 걸 새로 처음부터 시작하는 일은 쉽지 않을 터. 지금 이곳에서야 내가 차장이란 직함을 달고 있지만, 그곳에 가면 나는 무엇으로 돈을 벌 수 있을까. 가기 전에 영어도 익혀야 할텐데. 그리고 내가 어떤 일자리를 얻든, 그 물가를 감당할만한 월급을 받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기는 할까. 911 메모리얼 뮤지엄을, 휘트니 뮤지엄을, 구겐하임 뮤지엄을, 노이에 갤러리를 가 실컷 감상하고 성 패트릭 성당과 성 토마스 교회에 들러 바라던 것을 기도했고, 크림치즈가 잔뜩 들어간 베이글과 육즙이 흘러 넘치는 스테이크를 먹고 다시 긴 비행을 하고 한국에 도착했더니, 불금도 내 생일도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한국에 없는 동안 모두 그냥 지나가버렸어.



이번 생일엔 케익을 하나도, 한번도 먹지 못했네, 생각한 것도 잠시, 한 달전쯤 친구가 보내준 케익 기프티콘이 내게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오호라! 14일 밤에 먹어야지. 마침 그 날은 나에게 특별한 날이기도 하고 언제나 내가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니까, 그 날 케익을 바꿔서 먹자. 와인을 마시자. 냉장고에 훈제 오리도 있어. 그걸로 근사한 안주도 준비하자. 2007년 그 날 그랬던 것처럼 아주 행복한 기분이 되어야지. 나의 특별한 날들을 자축해야지.




밤을 꼴딱 새고 출근했다.


날이 개고 있고 여름이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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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19-08-16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하탄은 여행으로는 좋지만 살기에 너무 비싼 곳이죠. 대도시들이 다 비싸지만 그중에서도 최고. 중부 남부 시골로 가면 물가도 싸고 동양인이 별로 없어 영어도 많이 늘 거 같기는 한데 거기는 또 너무 볼 것도 할 것도 없고 하니...

다락방 2019-08-16 09:51   좋아요 0 | URL
맞아요, 프시케님. 어릴 때부터 뉴욕에서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지만 지금 다시 가보니 뉴욕에선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휴... 현실감각 제대로 들이닥쳐서..
그렇지만 여행으로는 참 좋은 곳이에요. 물론 비용이 많이 들긴 하지만, 뮤지엄들 많은 것도 너무 좋고 도시 자체가 그냥 어딜 둘러봐도 너무 좋아요! 저는 뉴욕에 또 가고 싶어요. 또 갈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