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저나 나는 이 책의 구판을 가지고 있는데 하아... 며칠전에 읽다가 책을 박살내 버렸다. 두 조각으로 쫘악- 갈라져버렸어. 이 책을 밑줄 긋고 책장에 꽂아둘 작정이었는데, 아아..그렇다면 나는 다시 사야하는 것인가. 부숴진 책을 두고두고 볼 수 있겠는가. 사람은 왜 생각지도 못한 쪽에 돈을 쓰게 되는가.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왜 박살난거야, 책아? 내게 대답해주렴. 흙흙 ㅠㅠ
내가 널 함부로 다룬 거라면 미안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실비아 페데리치'는 《캘리번과 마녀》,《혁명의 영점》을 통해 '마르크스'와 '푸코'가 보지 못하고 놓쳤던 것, 무시하고 지나갔던 것들을 언급한다. 왜 이것들에 대해서 그냥 넘긴거지? 하고.
'거다 러너' 역시 기존에 노예학에 대해 연구하고 글을 썼던 올란도 패터슨이 놓치고 지나간 부분에 대해 언급한다.
패터슨은 전형적인 남성중심의 시각에서 여성노예들까지 포함하여 노예를 '그'라고 총칭하고 여성의 노예화가 역사적으로 선행되었음을 무시하며, 그로 인해 남성과 여성에 의해 경험되는 노예제 방식에 중요한 차이가 숨어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 (p.143)
이 책의 4장은 <여성노예>란 타이틀을 달고 있는데, 앞부분의 1-3장보다 더 이해는 잘된다. 다만, 짐작가능하겠지만, 이해가 잘 돼서 너무 힘들다. 자, 보자.
다른 인간존재를 잔인하게 대하고 그/그녀에게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노동을 하도록 강제하는 것보다 한수 높은 중요한 발명은, 지배당하는 집단을 지배하는 집단과 완전히 다른 집단으로 지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물론 그런 차이는 노예가 될 사람들이 타지방 부족구성원, 말 그대로 '타인들'일 때 가장 명백하다. 그러나 그 개념을 확장하고 노예화된 사람들(the enslaved)을 어떤 면에서 인간이 아닌 다른 것,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 남성들은 그런 지정이 실제로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정신적 구성물은 대체로 어떤 현실 속의 모형들에서 나오며, 과거경험을 새롭게 정렬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그 경험은 노예제 가 발명되기 이전에 남성들에게 주어졌던 것인데, 그것을 바로 자기 집단의 여성들을 종속시켰던 경험이다.
여성억압은 노예제보다 먼저 일어나 노예제를 가능하게 만든다. (p.138-139)
아아...타자화 시키고 억압하고 그것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노예제를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흐름을 읽노라니 저 깊은 곳 어딘가에서부터 분노가 타오르지 않는가.
남성이 가구와 혈통에 '속해 있었다면', 여성은 그들에 대한 권리를 취득한 남성에게 '속해 있었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더 쉽사리 주변인이 된다. 죽음, 별거 혹은 더 이상 성적 파트너로 소용이 없어짐으로써 남성의 보호를 잃게 되면, 여성은 주변적이 된다. 국가가 형성되고 위계와 계급이 확립되기 시작한 그 시점에, 남성은 여성집단에 있는 더 큰 취약성에 주목하였고 차이(difference)가 한 집단을 다른 집단과 분리시키고 나누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음이 분명하다. 이런 차이는 성과 나이처럼 '자연스럽고' 생물학적인 것일 수도 있고, 감금과 낙인직기와 같이 사람이 만든 것일 수도 있다. (p.139)
책을 읽다 보면 전쟁시에 전리품, 포로였던 여자들이 너무나 당연하듯 강간의 희생자 혹은 성적 노예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그 전에 읽었던 책들, 《페미사이드》나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에서도 재차 언급되는 부분이다. 이 책에서도 여러 사례들을 보여주면서 '아킬레스'와 '브리세이스'에 대해 언급하는데, 나는 이게 너무 괴로웠다. 일전에 '브래드 피트' 주연의 영화 《트로이》에서 전쟁 포로이자 아킬레스에게 강간 당하는 브리세이스를 보며 낭만적인 생각을 품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영화속에서 브리세이스는 전쟁의 포로가 된 점, 그리고 강간당하는 것에 대해 크게 괴로워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고(내 기억은 잘못됐을 수 있다), 또한 아킬레스가 브리세이스를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그 관계, 아킬레스가 주인이고 브리세이스가 노예인 장면에 대해 환상을 품었던 거다. 그 후에 《그리스 로마 신화사전》에서 브리세이스를 찾아보았던가, 거기에서 아킬레스가 총애한 노예가 브리세이스라고 한 걸 보고, 총애 받는 노예라니 좋잖아? 라고 생각했던 내가 과거에 있었다. 이 책, 《가부장제의 창조》에는 아킬레스의 화를 돋우기 위해 '아가멤논'이 아킬레스 소유의 노예 '브리세이스'를 강간하고, 그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다른 여자포로 오십명을 선물해준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와...내가 대체 어떤 관계에, 무엇에 환상을 갖고 있었던거란 말인가. 너무 아프다. 주인과 노예 관계에 환상을 가졌던 나라니. 실제로 브리세이스는 누군가의 소유가 되어 이 새끼한테 강간당하고 저 새끼한테 강간당했는데. 영화에서 아킬레스가 브래드 피트였기 때문일까, 왜 거기에 환상을 가져, 왜... 아, 너무 괴로웠다.
어제 4장을 읽고 잤는데, 읽는 내내 괴로워, 브리세이스 미안해.. 이런 마음이 된것이다 ㅠㅠ
아마도 나같은 그런 환상을 품은 사람들, 그보다 앞서 환상을 품게 하려는 자들이 만든 영화 때문에 지구상에 아직도 강간문화가 존재하는 거겠지. 강간문화가 형성되고 유지되어 오는데 나 역시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가슴을 푹푹 찌른다. 하아-
그래서 책을 더 열심히 읽어야겠다고 또 결심한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모르는 걸 배우기도 하지만, 내 과거의 시간을 반성할 수도 있게 되어서. 나는 어쩌면 지금도 또 잘못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내가 과거에 빻았다는 것을 알만큼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아직 알아야 할 건 무수히 많지만,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아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책을 읽다보면 내가 조금씩 앞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책 읽는 친구들을 주변에 두는 것도 중요하다.
얼마전에 북플에 '읽고싶어요' 한 책을 보고는 한 알라디너는 '그거 내게 있는데 보내줄게' 하면서는 슝- 보내주셨다. 읽고 싶은 책이 있다는 말에 또다른 알라디너는 '이 책 읽은 너의 감상이 궁금해' 라며 또 슝- 책을 보내주었고. 궁금해하는 책이 있고 읽고 싶은 책이 있는데,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갖고 들여다봐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지. 게다가 이렇게 이 공간에 읽은 책에 대해 얘기하노라면, 그 글을 읽고 누군가는 자신의 감상이나 생각을 들려주기도 한다. 얼마전에는 친구가 한 책을 읽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며 '나중에 너 읽으면 같이 얘기하자' 고 했더랬다. 그렇게 읽은 책이 《미투의 정치학》이었는데, 이렇게 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좋은가.
책을 읽는다고 반드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가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내가 앞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주변에 함께 앞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책 읽는 친구들을 곁에 많이, 오래오래 두고 싶다. 우리가 아주 오래오래 읽은 책에 대해 혹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이야기나누고 지낼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오늘은 가부장제의 창조 5장을 읽을 예정인데, 무려 <부인과 첩> 이란다. 아아, 나는 아마도 또!! 나의 과거의 빻음을 들여다보게 될 것 같다. '크리스티앙 자크'의 《람세스》전 5권을 읽으면서, 파라오의 아내 '네페르타리'가 그와 사랑도 하고 정치에도 관여하는 걸 보면서 너무 힘들것 같은 거다. 그래서 '아아, 왕의 부인 보다는 첩이 되는 게 낫다'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킬레스의 노예를 보고 환상을 갖고, 네페르타리를 보고 첩이 낫다고 생각하는 나... 오늘은 또 그때의 빻은 나를 책을 읽다 만나겠지. 대체 나는 얼마나 더 많이 빻은 나를 마주쳐야 할까. 괴롭다..
괴로워..
괴로워...
마치기전에 잠깐 하나 더 언급하자면, 위의 인용된 구절 중에 이런 문장이 있다.
'죽음, 별거 혹은 더 이상 성적 파트너로 소용이 없어짐으로써 남성의 보호를 잃게 되면, 여성은 주변적이 된다.'
애쉬톤 커쳐가 주연한 영화 《s 러버》에는 화려하게 여자를 꼬시는 남자가 나온다. 물론 그가 주인공인데, 영화는 '사랑에 빠지지 않고 즐기기만 하려던' 남자가 제대로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남자는 한참 연상의 여자와 함께 지내는 시간을 보내는데, 남자는 그녀의 돈과 그녀가 제공하는 사치를 즐기면서도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그러다가 서서히 그 여자에게 관심을 잃게 되는 것. 이때 그 여자는 남자의 관심 혹은 흥미가 자신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걸 알고는, 소위 말하는, '예쁜이 수술'을 하고 오는 거다.
아...
내가 얼마나 당황을 했었는지. 그 때 진짜 놀랐었다. 아무리 그 남자가 좋다고 해도, 저 여자는 그렇게까지 해야했나? 그리고 떨어진 흥미를 다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선택한 건 하필이면 왜 성적인 거였지? 이게 너무 충격이었던 거다. 섹스를 할 수 있는 내 신체부위를 새롭게 다짐으로써 돌아오게 하려는 거라면, 내가 가진 자원이 그것 뿐이라는 반증 아닌가. 내가 저 남자를 꼬실 수 있는 건 내 질뿐이다, 라는 거 아니야. 또한 '내 질이 충분히 좁지 못해 저 남자의 맘에 들지 못한다'는 생각이고. 그러니까 여자는, 자신의 질이 충분히 남자를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남자가 자신으로부터 흥미를 잃었다고 생각하는건데, 어제 가부장제의 창조를 읽으면서 '더이상 성적 파트너로 소용이 없어짐으로써 남성의 보호를 잃게 되면, 여성은 주변적이 된다'는 문장에 딱 저 영화의 저 장면이 생각나는 거다. 우리는, 여자들은 성적인 도구로써만 가치있는가. 세상은 대체 우리에게 어떤 메세지를 어떻게 주입해왔는가.
괴롭다.
괴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