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한계에서 시작하다
우에노 지즈코.스즈키 스즈미 지음, 조승미 옮김 / 문학수첩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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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되고 읽어보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차, 도서관에 갔는데 눈에 띄어 빌려왔다. 그러나 읽지도 못했는데 반납기한이 되었고, 반납하러 들른 도서관에서 아무데나 펼쳤는데, 거기엔 이 편지 대화의 참여자중 한 명인 '스즈키 스즈미'의 일화가 나와 있었다. 본인이 10대 시절 브루세라로 일한 경험에 대한 것이었다. 브루세라는 '여고생이 교복이나 속옷을 팔고 성인 남성이 사는 행위(p.18)'를 말하는데, 그런 일이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걸로 돈을 번 당사자가 바로 이 책에서 말을 하고 있는 거라니. 나는 재대출을 해 기어코 이 책을 다시가져왔다.


이 편지대담의 한 명인 '스즈키 스즈미'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작가인데, 10대에는 브루세라, 20대에는 AV 배우, 30 대에는 유흥업에 종사한 경험이 있다. 대학에서 석사까지 마쳤고 기자로도 활동했다는 작가의 이력을 보고, 아 어렵게 살아 성매매를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도 가고 전문직도 갖게 되었구나, 라고 마음대로 추측했다. 그러나 읽을수록 이 작가의 정체성은 놀라운 것이었다. 우선 그녀는 전혀 가난과는 거리가 먼 집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은 지식인들이었다. 엄마는 아동문학 교수이기도 했는데, 엄마는 성을 판매하는 여성들을 혐오하면서 그러나 누구보다 꾸밈에는 열성적이었다고 한다. 거기에서 오는 엄마의 자부심이 있었는데 -나는 지적이고 이렇게나 남성에게 어필할만큼 매력적이지만 그러나 성을 팔지는 않아- 그런 엄마의 모순을 직면하는 것이 스즈키 스즈미에게는 도대체 이해불가였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인것 같았다. 그러면서 내심 '이래도 계속 나를 사랑할텐가' 하는 마음이 그녀로 하여금 엄마가 가장 경멸하는 여성, 성을 파는 여성이 되게한 것이다.

이런 심리를 가질 수 있고 그게 바로 스즈키 스즈미 라는 것을 알겠지만, 내가 가질 순 없는 사고방식 이었다. 가장 사랑받고 싶은 상대에게 사랑을 확인받고 싶고 또 반항하고 싶은 마음으로 성산업으로 들어간다? 누군가는 어딘가에서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내게는 다소 충격이었다. 사랑을 확인하고 싶거나 반항하고 싶은 마음은 인간의 본능이겠으나 그것이 자기파괴로 이어지는 건, 글쎄 나로서는 선택하지 않을 방법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건, 스즈키 스즈미에게 성산업에 들어가는것이 자기 파괴라는 인식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내가 그것을 굳이 자기파괴라고인식하는 사람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남자들이 성산업에 돈을쓰네? 좋았어, 그 돈 내가 벌어주게쒀! 이런 마인드가 그녀에게 있었던 거다.

그러나 십대에 자신이 벗었던 팬티를 뒤집어쓰고 자위를 하는 아저씨를 본 이상 그녀가 남자에게 어떤 환상이나 로맨틱한 감정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은 뻔한 일이다. 그녀는 그 때 그 아저씨를 목격하고 남자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환멸을 느끼며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것에 절망을 느낀다. 그녀는 경제활동이 가능하다고 하니 성산업으로 돈을 벌었지만, 그러나 그 일들을 해오면서 결코 인간으로 보이지 않아야 할 모습들을 그들로부터 마주치게 됐고, 남자라는 성별에 대해 어떤 기대도 품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우에노 지즈코에게 연신 묻는다.

"어떻게 남자들에게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가?"

저번 편지 첫머리에 우에노 님이 "밤일을 하면서 치러야 할 수업료 중 하나는 남자를 모멸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지적하신 부분이 있는데, 이번 연재에서도 그렇고 여태까지 제가 집필 활동을 해오는 중에도 점점 더 강하게 의식한 문제였습니다. 제 성격이나 밤일의 특성보다는 성장 배경과 관련된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브루세라 가게에서 매직미러 너머로 목격한 한심스러운 남성상이 언제나 제 남성관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제 마음속 어딘가에는 줄곧 ‘저런 동물하고는 서로 이해할 수도 없고 평등해지고 싶지도 않아‘라고 경멸하는 마음이 있습니다.-p.303
저는 지금도 남자, 하면 AV의 섹스 설정이나 여자가 남자의 성기를빨고 남자가 사정하는 장면이 떠오르면서, 과연 남자가 제가 진지하게 마주할 수 있는 존재일지 반쯤 진심을담아서 생각합니다. -p.361

1년동안 우에노 지즈코와 스즈키 스즈미의 오고 가는 편지들을 통해 스즈키 스즈미의 어린 시절과 그리고 지금에 이른 인생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그러면서 그녀 안에 있었던 엄마에 대한 미움과원망 혹은 그리움들을, 또 그녀 안의 약함 혐오를 우에노 지즈코는 지적한다. 스즈키 스즈미도 충분히 오래 생각해오고 나름의 생각의 틀을 잡고 있었다면, 우에노 지즈코는 훨씬 더 오랜 시간 이 세상을 살고 사람을 만나오고 또 공부하며 가졌던 연륜과 경험으로 그녀에게 어떤 것이 잘못된 것인지 그리고 어떤 것이 그녀의 장점인지에 대해 얘기해주는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밑줄 그은 부분들은 대부분 그러므로 우에노 지즈코의 것이었다.

우에노 지즈코의 책을 여러권 읽으면서도 딱히 좋다고 말하게 될 어떤 지점을 찾지는 못했는데, 그런데 그녀의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게 된다. 역시 이렇게나 이름을 알리게 된 여성학자는 괜히 된 게 아니구나 싶은 거다. 일례로 매력 자본에 대해 반박하는 것이라든가.


솔직히 저는 ‘에로스 자본‘ 개념에 비판적입니다. 에로스 자본은 사회학자 캐서린 하킴의 개념인데, 이 개념은 ‘문화 자본‘, ‘사

‘회관계 자본‘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와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학적으로 보면 틀렸어요. 자본이란 건 원래 이익을 만들어 냅니다. 꼭 경제 자본이 아니어도, 가령 문화 자본(학력이나 자격)이나 사회관계 자본(연줄)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자본이더라도 획득하여 축적할 수 있는 데 반해 에로스 자본은 노력으로 획득하는 게아니고, 또 축적할 수 있기는커녕 나이를 먹으면서 줄어들 뿐입니다(노력에 의해 에로스 자본을 획득할 수 있다고 보는 이도 있지만, 이 노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게다가 일방적으로 가치를 평가합니다. 평가 기준이 오직 평가자에게만 달렸죠. 그러니까, 자본의 소유자가 그 자본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재화를 우리는 자본이라 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사적 소유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에로스 자본의 귀속처(즉 여성)가 에로스 자본을 소유하는 소유 주체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그런 걸 자본이라고 이해해 봤자 혼동만 초래할 뿐 비유 이상의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이 개념이 나타내는 바는 젊고 예쁜 여성이 득을 본다고 믿는 통속적인 지식을 그저 학술적 언어로 둔갑시킨 것일 따름이죠. 자본이라고 칩시다. 그럼 젊음과 아름다움은 정말 경제가치를 낳는 것일까요? 외모의 가치가 사회학적 탐구 대상이 되고 나서부터 미인은 경제적으로 유리하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습니다. 미인 대회 우승자는 유리한 취업 기회, 결혼 기회가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에로스 자본'에는 좀 더 노골적인 함의가 있습니다. 대가가 따라오는 성의 시장이란 게 이미 성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의 시장에 참가하게 된 여성이 에로스 자본을 소유한 자본가일까요? 웃기지 좀 말라고 하고 싶군요.

예전에도 지금도 변함없이 성의 시장에는 거대한 경제자본이 움직이고 있고, 여기에서 여성들은 '에로스 상품'일 따름입니다. 알선없자 없이 프리랜서로 독립적으로 일하는 성노동자Sex Worker라면 어떨까요? 자영압자라면, 자신의 에로스 자본을 소유했고 동시에 노동자니까, 자기 결정으로 자본을 처분할 수 있습니까? 예컨대 학력이나 IT 기술과 같은 문화 자본과 마찬가지로 시장에 자신을 유리하게 제시할 수 있을까요? 스즈미 씨가 편지에서 적었듯 "강제로 부여되고 그다음에는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 "의지하고 상관없이 갖고 있는 것"을 자본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p. 32~33



우에노 지즈코는 중요한  언급을 몇 번이나 하는데, 


-언제고 그만둘 수 있는 자리에서 성산업을 선택하는 것이 그 사람의 자유일 수 있지만, 그 사람이성산업에 있는 여성들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

-타인에 의해 결정되는 나의 에로스 자본은 결코 자본이 되지 못한다는 것

-성매매가 여성에게 경제행위인 곳에서는 권력은 남성에게 있다는 것

-성매매 에 대한 지불은 생식에대한 책임을 지지않는 값을 포함한다는것


등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스즈키 스즈미의 논문 <AV 여배우의 사회학> 도 읽어보고 싶은데 국내에 번역되어 나와있진 않은 것 같다. 스즈키 스즈미는 자신의 자유로 그 직업을 선택했다고 하는데, 그 직업을 선택해도 되겠느냐는 다른 사람들의 물음에는 이렇게 답한다고 한다.


"AV 배우를 하다가 은퇴할 수는 있어도 ‘AV 배우 출신‘이란 딱지로부터는 은퇴가 안 된다" -p.79


참 이상한 것은, AV 배우 출신에겐 딱지가 붙는데 그걸 구매하고 관람하는 수많은 남자들에게는 왜 아무런 딱지도 붙지 않는가이다. 

하여간, 이세상이 진짜 똥이다. 특히, 여성들에게.

지난달에는 《겐다이시소代思想》지에 실릴 대담에서 저와 비슷한 세대인 사회학자 기도 리에씨와 우리 세대의 페미니즘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대담에서 저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 내가 강제로 부여받았는데 나중에는 나한테서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느끼는 내 여성으로서의 상품 가치, 즉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갖게 된 상품가치, 이 가치와 더불어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또 여성으로서의 상품 가치가 내게서 떨어져 나간 뒤에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이야기했습니다. 기도씨는 "우리는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의 페미니즘을 사용할 수있다"고 답했고 그러면서 둘이서 한껏 고양됐어요. 상품 가치를 강제하거나 강요하는 사회의 근원적인 부분을 논했다기보다는, 제가 성 상품화 현장에서 느낀 관점에서 이런 사회 현실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상품 가치가 있는 몸을 가졌다가 이제 상품 가치가 있는 몸이 아닐 제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을지그런 이야기도 했고요. (스즈키 스즈미) - P22

솔직히 저는 ‘에로스 자본‘ 개념에 비판적입니다. 에로스 자본은 사회학자 캐서린 하킴의 개념인데, 이 개념은 ‘문화 자본‘, ‘사
‘회관계 자본‘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와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학적으로 보면 틀렸어요. 자본이란 건 원래 이익을 만들어 냅니다. 꼭 경제 자본이 아니어도, 가령 문화 자본(학력이나 자격)이나 사회관계 자본(연줄)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자본이더라도 획득하여 축적할 수 있는 데 반해 에로스 자본은 노력으로 획득하는 게아니고, 또 축적할 수 있기는커녕 나이를 먹으면서 줄어들 뿐입니다(노력에 의해 에로스 자본을 획득할 수 있다고 보는 이도 있지만, 이 노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게다가 일방적으로 가치를 평가합니다. 평가 기준이 오직 평가자에게만 달렸죠. 그러니까, 자본의 소유자가 그 자본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재화를 우리는 자본이라 하지 않습니다. - P32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사적 소유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에로스 자본의 귀속처(즉 여성)가 에로스 자본을 소유하는 소유 주체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그런 걸 자본이라고 이해해 봤자 혼동만 초래할 뿐 비유 이상의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이 개념이 나타내는 바는 젊고 예쁜 여성이 득을 본다고 믿는 통속적인 지식을 그저 학술적 언어로 둔갑시킨 것일 따름이죠. 자본이라고 칩시다. 그럼 젊음과 아름다움은 정말 경제가치를 낳는 것일까요? 외모의 가치가 사회학적 탐구 대상이 되고 나서부터 미인은 경제적으로 유리하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습니다. 미인 대회 우승자는 유리한 취업 기회, 결혼 기회가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에로스 자본‘에는 좀 더 노골적인 함의가 있습니다. 대가가 따라오는 성의 시장이란 게 이미 성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의 시장에 참가하게 된 여성이 에로스 자본을 소유한 자본가일까요? 웃기지 좀 말라고 하고 싶군요. - P32

예전에도 지금도 변함없이 성의 시장에는 거대한 경제자본이 움직이고 있고, 여기에서 여성들은 ‘에로스 상품‘일 따름입니다. 알선없자 없이 프리랜서로 독립적으로 일하는 성노동자Sex Worker라면 어떨까요? 자영압자라면, 자신의 에로스 자본을 소유했고 동시에 노동자니까, 자기 결정으로 자본을 처분할 수 있습니까? 예컨대 학력이나 IT 기술과 같은 문화 자본과 마찬가지로 시장에 자신을 유리하게 제시할 수 있을까요? 스즈미 씨가 편지에서 적었듯 "강제로 부여되고 그다음에는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 "의지하고 상관없이 갖고 있는 것"을 자본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우에노 지즈코) - P33

스즈미 씨가 경험을 돌아보며 단기간 밤일로 파격적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고 쓴 적이 있는데, 아마도 그다음에 평생 따라다닐 대가를 생각하면 저는 이 거래가 딱히 공정하지도 않다고 봅니다. 밤일은 생각 이상으로 오랫동안 여성의 이후 인생에 영향을 미치니까요. - P34

결혼 못 하는 개그맨의 상징인 그(개그맨 오카무라)가 심야 라디오 방송 <올나잇 니폰>에서 입을 잘못 놀렸는데요. "코로나로 인해 유흥업소를못 가서 괴롭다"는 청취자의 고민을 듣고 "코로나가 진정되면 미인들이 단기간에 돈을 벌기 위해 석 달 기간 한정으로 유흥업소에 많이 올 것이다"라고 말해버렸죠. 이에 항의해 그의 퇴출을 요구하는 서명 운동이 벌어진 건 알고 계실 겁니다.
개그맨이 직관적으로 한 말은 종종 핵심을 찌릅니다. 유흥업에 대해 이리 쉽게 이해하도록 해주는 말도 없을 겁니다. 이 발언을 통해 우리는 유흥업이 여성이 단기간에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인 동시에, 여성들에게 다른 선택 사항이 있다면 거기서 빠져나갈 업종이라는 점, 여성이 환영하지 않는 직종이라는 점을 알 수있습니다. 또 고객 남성들이 이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점도 깨달을 수 있죠. 그런데 개그맨이 말했듯 미인이 석 달간 유흥업소에서 일했다고 칩시다. - P35

나중에 그 미인은 이력서에 생긴 공백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실업 중이었다며 침묵할까요? 제가 말하고 싶은 바는 간단합니다. 성노동Sex Work 은 여성에게 경제행위입니다. 대가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여성들은 결코 성노동을 하지 않을 겁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수수께끼가 없습니다. 한편 남성 고객들은 대가를 지불하는 소비자입니다. 그들은 대체 뭘 사고 있는 것인가? 자기들이 사고 있는 것이 돈을 대가로 해서 얻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속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남성들이 그 찝찝함을 상대 여성에게 전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때남자들의 가장 강력한 변명이 되어주는 게 바로 여성의 자기결정 입니다. (우에노 지즈코)
- P36

스즈미 씨는 사회학자니까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의 잠재 능력에 관한 이론을 알겠지요? 한 개인의 잠재 능력은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자원이 얼마나 적고 많은지뿐만 아니라 기회 집합의 크기로 결정된다고 보는 이론입니다. 즉 선택할 수 있는 게 많으냐적으냐 하는 거죠. 선택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유흥업에 종사하는 여성과 그것 말고도 선택할 게 있어서 언제든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여성은 잠재 능력에서 차이가 납니다. 높은 잠재능력을 가진 여성들이 성 산업에 종사하는 자신의 직업을 자기선택이라 하고 자기 일에 자긍심을 갖고 있다면서 전문가주의를 거론하면,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여성들이 성노동자 전체를 대변하지는 않지요. - P38

서른 살이 지나서 스즈미 씨는 "더 젊고 현명한 여성들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며 세대론을 썼지요. 스즈미 씨는 제게 건네는첫 번째 편지에서 "여성들이 강하게 원하는 바는 피해자란 이름을 확실히 부여받는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라고 썼는데요, 피해자란 이름을 부여받는 게 아니라 피해자라고 밝히고 나왔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겁니다. 그리고 자주 오해를 하는데, 피해자라고 밝히는 것은 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강함의 증거입니다. 스즈미 씨도 "피해자임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라고 쓴 바로 그것 말입니다. 미투 운동에서 이토 시오리伊藤詩씨가 "나는 성폭력 피해자다"라고처음 밝혔을 때 얼마나 용기가 필요했을지는 상상만으로도 충분하겠지요. - P39

‘피해자라고 불리고 싶지 않다‘, ‘약자인 걸 참을 수 없다’는그런 마음을 저는 ‘약함 혐오‘ Weakness Phobia ‘라고 부릅니다. 엘리트 여성이 자주 빠지는 사고방식이죠. ‘약함 혐오‘는 약함에 대한 혐오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동성애 혐오자가 자기 내면에 동성애에 대한 자각이 있어서 동성애를 한층 더 검열하고 배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약함에 대한 혐오는 약함에 대한 자각이 있기에 더 격렬하게 약함을 검열하고 배제합니다. 위안부를 지탄하는 일본의 우익여성들도 똑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여자가 피해자인 측면을 용납할 수 없다", "나는 저 사람들과 같지 않다", "나는 약하지 않아"라고 하지요. 이런 여성만큼 남성에게 편리한 존재는 없습니다. (우에노 지즈코) - P40

젊은 시절 저는 몸과 정신을 시궁창에 버리는 것과 같은 섹스를 많이 했습니다. 대가는 발생하지 않지만 자신도 상대도 존중하지 않는 섹스를 했지요. 그런 섹스에 대한 후회 때문에 저런 발언을 한 것입니다. 섹스는 몸에 오는 부담이 높고, 성가시고 귀찮은 일종의 인간 상호 행위입니다. 그리고 생식 행위이기도 하죠. 성노동자한테 지불하는 대가에는 임신시키고 도망갈 요금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 남자도 있습니다. 생식이 맺을 열매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보상금을 이야기한 겁니다. 그렇게 성가시고 귀찮은 것에는 그에 걸맞은 인간관계의 절차라는 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절차를 돈의 힘으로 건너뛰고서 자신의 욕망만 만족시키는 것이 남자들에게는 성 산업이란 겁니다. "그래서 당신들이 시궁창인겁니다"라고 얼마나 말하고 싶은지 몰라요. 아니, 여기서 확실히말해두겠습니다. 돈, 권력, 폭력으로 여자를 자기 뜻대로 하려는 남자는 ‘시궁창‘이라 불려도 별수 없다고 말이죠. (우에노 지즈코) - P39

(이렇게 말하는 게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스즈미 씨 세대는 남녀고용기회균등법이 생긴 이후 신자유주의를 내면화하고, 1990년대성의 상품화가 거세게 밀려오는 가운데 사춘기를 보낸 결과 냉소적이 된 게 아닐까요? 그리고 정치적 냉소주의가 무력하듯, 냉소주의는 결국 아무것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 P41

성 산업을 경험해 보니, 어린 시절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더 많은 면에서 두루 대가를 치르라고 요구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낙인찍힌 과거가 언제까지나 저를 따라다니는 것만 해도 상상한 것 이상이라서, 요새 젊은 여성들이 저한테 "AV에 출연할지말지 망설이고 있다"고 상담해 오면 저는 "AV 배우를 하다가 은퇴할 수는 있어도 ‘AV 배우 출신‘이란 딱지로부터는 은퇴가 안 된다"
고 줄곧 답합니다. 이렇게 답하는 이유는 제가 열아홉살 때 살고싶었던 인생과 그 후 스물다섯 살, 서른살, 서른다섯 살, 그리고 지금까지 각각의 시점에 제가 살고 싶었던 인생이 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전에 리스크로 봤던 것 이상의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 P79

결혼이 당연한 관습으로 남아 있기에, 결혼한 사람한데 ‘왜 결혼했냐?‘고 묻지 않고 결혼 바깥에 있는 사람들한테만
‘왜 결혼 안 해?‘라고 계속 물을 수 있는 겁니다. 제 시각으로 보면,
결혼하는 데는 큰 결단이 필요하니 결혼하지 않는 건 결단을 내리지 못한 상태를 미룬 결과일따름인데, 결혼을 결단한 사람들한테 그걸 선택한 이유를 묻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 P121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이 있습니다. 여성한테 성이 경제행위일 수 있는 사회는 압도적으로 남녀의 권력이 불균등하다는 점, 즉 젠더의 비대칭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회를 ‘가부장제 사회‘라고 합니다. - P152

신체가 관념을 따르도록 하다가 극한에 달하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히라쓰카 라이초의 동반 자살 미수 사건을 떠올립니다.
히라쓰카 라이초는 나쓰메 소세키의 제자 모리타 쇼헤이와 함께 눈 쌓인 시오바라 온천 근처 산을 방황하다가 자살 미수로 그친 스캔들을 일으켰습니다. 이 추문 때문에 히라쓰카 라이초는 일본여자대학 졸업 명부에서 이름이 삭제되기도 했죠(나중에 다시 기재됐습니다만). 나쓰메소세키는 훗날 소설 《산시로四郞)[1908]에서 히라쓰카 라이초를 모델로 삼은 교만하고 천박한 미녀
‘미네코‘를 등장시켰는데, 이는 제자 모리타 쇼헤이가 일방적으로 전한 정보에 기초해 그려낸 것으로 공평하지 않습니다. - P183

이 동반 자살 미수 사건은 사실 연애 때문에 죽으려던 사건도아니었습니다. 히라쓰카 라이초는 스물두 살에 동반 자살을 하러가기 전에 유서를 남겼습니다.
"나는 내 생애의 체계를 관찰한다. 내 이유에 의해 죽는다. 타인이 해를 입혀서가 아니다."
여자가 이런 글을 쓰면 남자는 견딜 수가 없죠. 이 문장에서는 남자에 대한 단 한 줌의 애정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 두 사람,
히라쓰카 라이초, 모리타 쇼헤이는 성관계를 하지 않았을 거란 이야기도 있습니다. 히라쓰카 라이초가 쓴 자서전에 따르면, ‘처녀를 버린‘ 대상은 그 후 그 자신이 먼저 유혹한 선종 승려였다고 하니까요.
아마도 히라쓰카 라이초는 일본 근대 페미니스트 가운데 가장 관념적인(즉 머리가 비대한) 형이상학적 여성이었겠지요. 히라쓰카는 오직 자신의 깨달음이나 천재성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 P184

몸이 내 뜻대로 되지 않고, 또 내가 가장 먼저 만나는 타자가바로 내 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 건 장애인들과 만나고부터였습니다. 남이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존재인데, 장애인은 남을 만나기 이전에 내 뜻대로 되지 않는 타자로서의 내 몸을 만나야 합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누구든 후천적 장애인이 되는 것과 비슷하죠. 저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정신도 몸도 부서지는 것이라 느끼게 됐습니다. 거칠게 함부로 다루면 몸도 마음도 망가집니다. 그런데 부서진 것은 부서진 것으로서 다뤄야 합니다. 돌이켜 보면, 아무리 함부로 대해도 나도 남도 부서질 리 없다고 여기던 시절엔 참 오만했어요. (우에노 지즈코) - P187

젠더gender란 개념은 프랑스어 장르genre에서 유래했습니다. 젠더는 프랑스어에서 여성명사와 남성명사를 분류하는 문법 용어이고 영어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언젠가 제가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했을 때 한 프랑스인 페미니스트가 심포지엄 연단에 있던 세계적인 여성사 연구자 조앤 스콧‘ Joan Wallach Scott 한테 짓궂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젠더‘란 개념은 원래 영어에 없는데, 그게 영어권 페미니스트들과 무슨 관련이 있죠?"
그 자리에 있던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Chakravorty Spivak 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바로 답했습니다.
"누가 만든 개념이든, 쓸 수 있는 건 뭐든 다 쓰면 됩니다." (우에노 지즈코) - P298

스피박은 영어권에서 연구자로 활약하면서도 인도 국적을 버리지 않은 식민지 출신 지식인입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교양 대부분을 영어권의 지식체계로 채웠다 하더라도, 그걸 역으로 이용해 무기로 삼고 적과 싸우겠다고 한 여성입니다. 스피박의 과감한 답변을 듣고 저는 경탄했습니다. 스피박도 페미니스트이고, 스콧도페미니스트이고, 심술 맞은 물음을 던진 프랑스인 여성도 모두 페미니스트입니다.
지금까지 반세기 동안 저는 이렇게 자극을 주는 분야에서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논쟁이 벌어지는 곳에서 스스로 단련하면서
‘나는 여성들한테 빚을 지고 있다…..‘ 이렇게 생각해 왔죠. 이런마음 때문에 앞으로도 죽 ‘나는 페미니스트‘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을 겁니다. (우에노 지즈코) - P299

저번 편지 첫머리에 우에노 님이 "밤일을 하면서 치러야 할 수업료 중 하나는 남자를 모멸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지적하신 부분이 있는데, 이번 연재에서도 그렇고 여태까지 제가 집필 활동을 해오는 중에도 점점 더 강하게 의식한 문제였습니다. 제 성격이나 밤일의 특성보다는 성장 배경과 관련된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브루세라 가게에서 매직미러 너머로 목격한 한심스러운 남성상이 언제나 제 남성관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제 마음속 어딘가에는 줄곧 ‘저런 동물하고는 서로 이해할 수도 없고 평등해지고 싶지도 않아‘라고 경멸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스즈키 스즈미) - P303

저는 10대 때부터 죽 ‘성매매를 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한답을 찾고자 애써왔는데, 최근에는 이런 생각이 그 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성매매를 혐오하고 그에 대해거부감을 갖거나, 혹은 부모가 딸한테 매춘을 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단지 몸 파는 일이 천박하다거나 위험하다거나 자존심이 더럽혀지기 때문이라기보다, 성매매로 인해 타자를 존중하는 마음이어딘가에서 뒤틀리는 것에 대한 위기감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스즈키 스즈미) - P304

그런데 왜 매번 피해자인 여성 쪽이 성폭력 문제를 해결해야하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남자들 문제는 남자들이 해결해야 하지 않습니까? 왜 남성들은 남자에 대한 여성들의 신뢰를 실추시키는 성추행범에게 화내지 않습니까? 왜 남성들은 성추행범을 박멸하자고 운동을 시작하지 않나요? 그러기는커녕, 성추행을 고발한 여자들이 부당한 짓이라도 했다는 듯, 왜 치한들한테 면죄부를 안겨주는 주장만 늘어놓습니까? 성희롱 가해 남성에 대해 가장 먼저 분노해야 할 사람들은 성희롱 가해를 저지르지 않는 남성들입니다. 그런데도 왜 남성들은 성희롱 가해 남성에 대해 분노하지 않고그런 남성을 감싸주는 겁니까? 유흥업소에 가고 성매매를 하는 남자들은 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습니까? …………정말 남자들은 수수께끼입니다. (우에노 지즈코) - P350

아마도 남자들이 할 말은 정해져 있겠죠. ‘원래 그렇다’고, 정말 그런가요? ‘남자는 원래 그렇다‘는 말 속에는 ‘그런 남자가 나일 수도 있다‘고 공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 공감과 이해를 갖추고 있다면, 남자들 안에 있는 가해성에 부딪혀 봐도 좋을 겁니다. 여자들은 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여성운동을 해왔습니다. 만약 여성운동에 필적할 만한 남성운동이 없다면, 그 이유는 남자들이 자신들의 가해성에 대해 아무런 자각을 못 했든지 아니면 이러한 가해성으로 이득을 얻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에노 지즈코)
- P351

사람은 몇 살이 돼도 새로 발견하는 게 있군요. 스즈미 씨가 50대, 60대에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며 기대합니다. 그때 저는 이미 이 세상에 없을 텐데, 그게 유감이네요. (우에노 지즈코) - P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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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6-26 1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이 책 읽는동안 힘드셨겠네요.ㅠㅜ 엄마의 사랑을 갈구해서든 뭐든 엄마(부모)가 지향하는 것과 반대를 추구하는건 최재천 교수님도 자연스럽다라고 했는데 이건 좀...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나저나 우에노 지즈코의 다른 책들을 읽어보고 싶네요!

다락방 2023-06-26 11:03   좋아요 1 | URL
네 저는 정말 너무 쇼킹했어요. 사랑을 갈구하는 것 만으로 스즈키 스즈미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아닐 것이고 다른 것들도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왜 이런식으로 나아가야 했나 싶고요, 그렇지만 그런 산업이 활성화 된 곳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삶이 아니었나 싶어요. 왜 십대 소녀에게 입었던 팬티를 파는 일이 허락된 곳인걸까요? 왜 돈벌이로 그걸 선택할 수 있게 만들어둔걸까요? 우리 몇 달 전에 [레이디 크레딧] 읽었잖아요. 그 때 성매매 당사자 여성이 그런 말을 했었어요. 아이가 아프거나 해서 돈이 필요해지면 성매매를 다시 할까 생각하게 된다고, 그 일을 해봤으니 선택지에 올리게 된다고. 그 때 ‘선택지에도 없게끔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성을 판매하는 모든 업종이 말입니다.

이 책을 읽은 건 힘들었지만 좋은 경험이었어요. 그런 한편, 스즈키 스즈미의 입장에서 남자에게 절망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는 공감도 되고 말이지요. 후..

유수 2023-06-29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은 스즈키 스즈미에게 했는데 우에노 지즈코의 답장에서 매번 무릎꿇었어요. 냉소를 왜 냉소로 남겨두면 안되는가.. 답을 (힘을) 많이 주는 책이었습니다.

다락방 2023-06-29 09:49   좋아요 0 | URL
저도 우에노 지즈코의 답변들에 무릎 꿇었습니다. 와, 역시 연륜과 경력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우에노 지즈코 답장 읽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게 되더라고요. 그거네, 그거야, 그거구나 하고요. 유수 님 덕분에 읽은 책입니다. 이 책 읽다가 우에노 지즈코의 <전쟁과 성폭력의 비교사>도 장바구니에 넣어뒀어요. 이 사람이 하는 말을 계속 들어보자, 이렇게 되더라고요.

유수 2023-06-29 09:52   좋아요 0 | URL
저도 저도!! 다음책 우에노 지즈코 책이에요. 한권 빌리고 한권 책장에서 발굴하고 ㅋㅋ <전쟁과 성폭력의 비교사>는 다락방님 페이퍼를 기다릴게요. 다락방님 이렇게 진솔한 페이퍼 보니까 나도 뭐라도 쓰고 싶드아…! 다락방님페이퍼의 힘은 진짜 신기합니다!

다락방 2023-06-29 09:53   좋아요 1 | URL
아이참, 별말씀을! ㅋㅋㅋㅋㅋ(마구 좋아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잉글리쉬 티처
크레이그 지스크 감독, 줄리안 무어 외 출연 / 아이브엔터테인먼트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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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세의 싱글 여성 '린다(줄리언 무어)' 는 가끔 외로워서 남자를 만나야 하는거 아닐까 싶어 소개팅을 하지만 하나같이 죄다 마음에 썽에 차질 않아 여전히 싱글로 지내면서 본업인 영어 교사에 충실한다. 게다가 그녀는 교사로서 학생들로부터 존경도 받는다. 퇴근하면 집에 와 혼자서 밥을 해먹고 영화를 보면서 지내는데, 어느날 그녀 앞에 오래전에 자신의 제자였던 '제이슨(마이클 안가라노)'이 나타난다. 뉴욕에서 극작가로 성공한 줄 알았더니, 잘 안돼서 로스쿨에나 다시 들어가야겠다고 고향에 돌아온 것. 아버지가 아들의 재능을 잘 알아봐주지 않아 아버지의 바람대로 로스쿨에 가기로 했다는 거다. 이에 린다는 제이슨이 쓴 작품을 읽어봤는데 오 너무좋아 짱좋아 그렇다면 내가 니 작품이 얼마나 좋은지 세상에 알려줄게! 해가지고 학교의 연극 동아리에게 소개시켜서 그 작품이 연극으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제이슨은 연극 연습할 때 나와서 자신의 작품에 대한 나쁜평을 듣기 싫어하고 그러다가 연극 주연 여성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러기 전에 이미 여차저차 요케저케 돼서 린다와 충동적으로 섹스를 하게된다. 그렇지만 그 충동적인 섹스가 곧 사랑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계속된 관계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라고 제이슨은 당연히 생각하는데, 그게 린다에게는 그렇지가 않아. 제이슨이 다음에도 계속 나랑 섹스하고 나랑 특별한 관계가 될 줄 알았던 린다는, 제이슨과 여배우가 둘이 알콩달콩 질퍽질퍽한 걸 목격하고 충격에 휩싸이며 질투를 하다가 일이 꼬여서 엉망진창이 된다. 흑흑 ㅠㅠ


닥터였던 제이슨의 아버지는 그때까지 린다와 별로 사이가 좋았던 것도 아니었는데 이야기를 거듭하다 호감을 갖게 되고 그리고 이제 만나는 사이가 되는것 같은데, 그런데 제이슨의 아버지는 알고 있다. 린다가 자신의 아들과 섹스했다는 것을. 오, 신이시여! 내 아들과 섹스한 걸 아는데 그 여자랑 나도 앞으로 섹스할 수 있는 것인가. 아무리 그게 충동적이며 실수로 한 번이라 한들, 그거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옆집 젊은 총각이 아니라 내 아들인데!!


무엇보다 나는 린다의 실수가 결코 린다만의 것은 아닐 것 같아서 너무 끔찍하고 무서웠다. 그러니까, 괜히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젊은 남자랑 우연히 섹스 한 번 했다가 내가 질척거리거나 집착하거나 해서 저 젊은 남자 나랑 계속 섹스섹스 하겠지, 이렇게 생각하게 될까봐 너무 무서워. 이 영화 무서운 영화였다. 흑흑. 너무 끔찍하고 너무 무서워. 나는 그런 일 일어나지 않도록 젊은 남자들하고는 아예 아는척도 안해야겠다.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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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6-19 13: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태그 보소 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06-19 14:10   좋아요 3 | URL
모바일에서도 태그 볼 수 있음 좋겠어요 ㅠㅠ

잠자냥 2023-06-19 14:31   좋아요 4 | URL
#궁금하지? #안가르쳐주지

독서괭 2023-06-19 17:46   좋아요 1 | URL
악 얄미워!!ㅋㅋㅋ

다락방 2023-06-19 20:35   좋아요 1 | URL
ㅋㅋㅋ 별 거 아닙니다. 그저 섹스에 있어서 제가 꼰대라는 .. ㅋㅋㅋ

잠자냥 2023-06-19 21:06   좋아요 0 | URL
섹꼰다꼰 ㅋㅋㅋㅋ

햇살과함께 2023-06-19 1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그런 공포가

다락방 2023-06-19 20:36   좋아요 1 | URL
어휴 정신 차리지 않으면 딱 저렇게 되겠어요. 정신줄 놓지말자!! ㅋㅋ

관찰자 2023-06-19 1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이 생각하는 젊은 남자는,
대체 어디까지인지 지금,
너무 궁금한 1인!!

다락방 2023-06-19 20:36   좋아요 1 | URL
음.. 너무 어려운 질문이네요. 음.. 20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쩐지 이렇게 말하고 도망쳐야할 것 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체국 아가씨 페이지터너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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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후의 오스트리아, 아빠도 오빠도 죽고 크리스티네는 병든 엄마를 모시며 우체국에서 일하고 있다. 그야말로 가난에 허덕이며 근근이 먹고 살고 있고 크리스티네의 삶은 어둡기만 하다. 그런 크리스티네에게 스위에서 놀러오라는 이모의 초대장이 날아온다. 젊은 시절 유부남과 불륜관계였다가 그 관계를 정리하며 큰 돈을 받고 미국으로 가 정착했던 크리스티네의 이모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언니가 그립고 한 번도 본 적없던 조카를 보고 싶어 자기가 휴가를 보내고 있는 호텔로 초대한거다. 제대로된 옷한벌 없는 크리스티네는 병든 엄마를 두고 가도 될까 걱정하지만, 크리스티네의 엄마는 적극적으로 크리스티네를 보낸다. 너도 젊음을 즐겨봐, 다른 삶을 가져봐, 엄마에게 시달리는 것에서 벗어나 봐. 그렇게 크리스티네는 기차를 타고 오랜 시간이 걸려 스위스의 화려한 호텔에 도착한다. 입고 있는 옷이 남루해 초라하게 느껴지고 자꾸만 위축되고 그래서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 크리스티네에게 이모는 이곳에 걸맞는 옷을 사주고 속옷을 사주고 맛있는 음식을 사주며 화려한 생활을 보여주고 몸소 경험하게 해준다. 이렇게 크고 깨끗한 방에서 나같은 사람이 자도 될까, 움츠러들었던 크리스티네는 비싼 옷을 입고 미용실에 가 머리도 다듬으니 한결 자신감이 생긴다. 게다가 차림에 자신감이 생기자 호텔에 머무르는 다른 손님들도 다가와 말을 건다. 자신감 뿜뿜한 크리스티네는 한결 밝아지고 밝아진 크리스티네는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그런 크리스티네에게 구애하는 신사도 생긴다. 와, 이런 곳이 있어, 이런 삶이 있어, 난 여기가 너무 좋아, 짱이야!! 크리스티네는 자신이 얼마나 가난하고 볼품없었는지 잊고 싶고 그리고 들키고 싶지도 않아 사람들이 이모부의 성(family name)으로 자기를 착각하는 걸 애써 수정하지 않는다. 가난한 내 성으로 알려지기보다 이곳에서는 부유한 이모부의 성으로 알도록 두자, 뭐 어때.


그러나 그녀에 대한 소문이 호텔에 퍼진다. 사실 그녀의 성은 가짜라는 사실이, 아주 가난하다는 사실이, 그녀의 지금 모습은 일시적이라는 사실이. 물론 거짓을 말한 건 잘못된거지만, 그런 거짓이어야만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문화라는 건 제대로 된 것인가. 크리스티네 너무 좋다고 호들갑 떨면서 그녀와 어울리려던 사람들이, 그녀의 원래 신분을 알게 되자 차갑게 돌아서는 건 도대체 왜 때문인가. 호텔에 떠도는 소문을 알게된 뒤 이모는 그러다 자신의 과거까지 밝혀질까 두려워 얼른 크리스티네를 집으로 보내버린다. 크리스티네는 호텔에 떠도는 소문과 그리고 이모가 자신을 보내려고 애쓰는 모습에 절망하며 이모로부터 받았던 옷들을 다 그대로 둔채, 다시 원래의 초라한 옷을 입고 초라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간 그녀는 행복하지 않다. 돌아와보니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착한 마음으로 어머니를 대신 돌보아주던 이웃집 남자의 옷은 남루하기 짝이 없다. 우체국에서 일해봤자 몇 푼 안되는 돈을 받고 남아 있는 형제 자매들은 뭘 하든 '너무 비싸다'는 말을 하며 엄마의 유품을 가져가려고 애를 쓴다. 이 모든게 지긋지긋하다. 분명 저기 어딘가에 다른 삶이 있다는 걸 아는데, 얼마나 아름답고 깨끗하고 화려한 삶이 있는지를 분명 아는데, 크리스티네가 아는데, 그 세계에 속해 있었는데, 이제는 근근이 먹고 살아야하는게 너무 지긋지긋하다. 그런 그녀에게는 그렇게 풀지 못한 분노가 쌓여있고, 그녀는 분노에 잠식되어 있다. 그런참에 자신처럼 아니 자신보다 더 분노에 잠식되어 있는 남자, 페르디난트를 만나게 된다. 전쟁에서 두 손가락을 잃고 역시 가난에 허덕이는 남자. 일자리 구하기가 너무 힘들고 결국 가까스로 구해도 언제 짤릴지 모를 삶, 일하면서도 언제나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이 사회는 얼마나 엉망진창인가, 분노에 함몰되어 있는 남자. 너무나 가난하고 그 가난이 세상의 부조리함인것도 알겠는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는 그렇게 연인이 된다. 서로의 분노를 가장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 서로의 이야기를 잘 들어줄 수 있는 사람. 그녀와 함께 있길 원하는 페르디난트를 보며 나는 크리스티네에게 애원했다. 안돼, 그 손을 잡지마, 분노에 잠식당한 사람의 손을 잡지마, 안돼, 빠져나와. 그러나 크리스티네는 내가 아니고 나는 크리스티네가 아니다.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는 사실 자신들이 하는게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그러나 서로가 서로밖에 없기 때문에 이 관계를 유지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연인의 데이트란 얼마나 비참한가. 이들은 돈이 없다. 아무리 아끼고 아껴도 돈이 없다. 처음 성관계를 할 때 들어갔던 모텔이 너무나 후져서 크리스티네는 비참했다. 저기 어딘가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호텔이 있다는 걸 아는데, 그리고 그런 호텔에서 자신에게 구애했던 남자들은 또 돈 많은 남자들이었는데, 돈 걱정 하지 않고 아무곳이나 들어가고 아무것이나 먹을 수 있는 그런 남자들이었는데, 지금 여기 이 남자는 누구? 나는 어디? 비참하기 짝이 없지만, 그러나 가난한 우체국 아가씨, 가난한 나라의 소모품 크리스티네를 더이상 화려한 남자들이 쳐다보지 않는다. 그들의 가난은 이어지고 이어지고 그러니 갈 데가 없다. 남자는 자신 혼자 사는 집도 마련하지 못한 처지라 이들이 주말에 데이트를 하면 까페에 처박혀있기 일쑤다. 이 데이트가 어떻게 기쁘고 행복할 수 있을까? 이 생활도 서로도 점점 더 비참할 때쯤, 남자는 심지어 다니던 직장을 잃고 자살을 결심하며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크리스티네를 찾아온다.



부자들의 화려한 휴가와 가난하고 가난한 사람의 매일의 일을 대비시키며 드러나는 빈부의 격차는 너무나 부조리하다. 왜 어떤 사람은 매일 피곤하게 일을 해도 머물 곳이 없는걸까. 왜 어떤 사람들은 돈걱정 없이 어디든 이동하고 또 어디든 머무를까. 이 사회의 부조리함에 대해서 페르디난트의 입을 빌어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이런 사회를 몸소 알고 있는 만큼, 언급했듯이, 그는 분노에 가득 차있다. 나는 그의 분노와 크리스티네의 분노는 합당하고 마땅히 그러할만하며 누구든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렇게 분노에 잠식된 이들을 만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나야말로 자본주의의 부조리를 늘 말해오면서, 그러면서도 가난 때문에 분노에 잠식된 이들을 마주하고 싶진 않은 거다. 분노에 잠식당한 사람들의 옆에 있으면서 그 분노가 내게 전해질 것이 나는 너무도 겁이 난다. 크리스티네에게 안돼 도망가, 너는 지금 너의 분노도 어쩌지 못하면서 왜 또 다른 분노를 옆에 두려는거야!!



그런 한편, 나는 그동안 내가 강하게 믿어왔던 신념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러니까, 경험의 확장은 선인가? 하는 의문.


나는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을 더 알고 싶고,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닌 내 몸으로 체험하고 싶다. 사소하게는 '저 영화 엉망이야' 라는 말을 들어도 '그럼 안봐야지' 하는게 아니라, '얼마나 엉망인지 내가 한 번 봐야겠네'가 되는 것이다. 동시에 '나에게는 좋을 수도 있지 않아?' 하는 생각도 하고. 그러니까 나는, 내 경험을 믿고, 하나의 경험으로부터 또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수많은 사유가 따라온다고 생각하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는 나에게 경험의 확장은 곧 세계의 확장을 의미했고, 이것은 언제나, 부정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참이었단 말이다. 지금까지 평생 그렇게 믿고 살았다고. 그런데 크리스티네를 보자 묻게 되는 거다.


경험의 확장은 과연, 정말로, 선이기만 한가?



크리스티네는 스위스에 휴가를 가게 되며서 경험의 확장을 맞닥뜨린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 그리고 낯선 문화. 내가 와보지 않은 곳이야, 내가 먹어보지 못한 것이지, 내가 놀아보지 못한 놀이야, 나는 한 번도 이런식의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어! 이 모든 일들은 그녀를 들뜨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 이런 세계가 있다니, 너무 짜릿해!! 


다시 우체국으로 돌아와서 와, 그런 세계를 경험했었지, 대단했어, 로 끝나는게 아니라, 그런 세계가 있는데 나는 왜 이모양 이꼴이지? 왜 그게 일시적으로만 허용된거지? 왜 그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나는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지? 왜 내 주변 사람들은 다 가난하지? 왜 비싸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 하며 오히려 분노에 침몰한다. 


새로운 경험으로 내가 확장된 게 아니라 새로운 경험으로 내 자신을 절망속으로 더 밀어넣게 되었다면, 경험의 확장은 반드시 선이라고 볼 순 없는 거 아닌가. 그렇지만, '그렇게 더 비참해질 수도 있으니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아' 라는 전제도 너무 엉망진창이지 않나. 



다른 세계가 저기 있다는 걸 알면서 그러나 그것이 결코 내것이 될 수는 없다는 부조리함 혹은 기이함. 도시 한 복판에 통유리창 고층 아파트에 누군가 살고 있는데, 이십년이상 아무리 일해봤자 그런 집 근처에도 가볼 수 없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하는 갸웃함. 확실히 이건 잘못됐다. 이건 이상해. 이상한 게 맞다. 이상한 거 알면서 분노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분노에 잠식당하진 말자고 꼭 당부하고 싶다. 분노는 힘이 세다. 분노에 잠식 당하면 종국에는 분노가 나를 잡아먹어 버린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크리스티네 보다 형편이 더 낫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애써 눈감는건지도 모르겠다. 이미 신경 쓰는 사람에게 '신경쓰지마' 라는 말은 아무런 힘이 없듯,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 '분노가 널 잡아먹게 두지마'라는 말은 얼마나 효용이 있을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이겠지.



아주 좋은 소설이었다.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꼭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역시 소설 안에 다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이. 소설 안에 다 있다. 역사와 정치와 사회와 문화가. 소설은 가장 좋은 인문학이다.



"아니야! 다른 일자리는 찾지 않을 거야! 지쳤어! ‘일자리‘라는 말만 들어도 지긋지긋해. 지난 11년 동안 용케도 여기저기서 비정규직 일자리를 얻었는데 그때마다 간신히 연명만 했을 뿐, 자리를 잡지는 못했어. 일자리는 항상 있었지만 실제로는 갈 곳이 아무 데도 없었지.

나는 4년 동안이나 ‘전쟁‘이라는 살인 공장에서 일했어.

그 후에는 이런저런 공장과 회사를 전전했지. 나는 항상 다른 사람들을 위해 뼈빠지게 일했어. 돈 많은 사업가,자본가, 소유주 들의 재산을 늘려주는 데 내 인생을 허비했어. 그렇게 죽도록 일하고 나면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어. ‘자, 이제 그만 나가! 너는 써먹을 만큼 써먹었으니, 이제 다른 데로 가봐!‘ 그러면 나는 또 다른 일거리를 찾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어. 이제 정말 더는 못 하겠어. 지쳤어, 더는 안 할 거야!"

크리스티네가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남자가 여자의말을 가로막았다.

"크리스티네, 또다시 직업소개소에 가서 구걸하는 거지처럼 대기표를 받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짓은 못 하겠어. 그러느니 차라리 죽고 싶어. 그동안 나는 일자리를 찾느라고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거절이 예정된 전화를 걸고, 답장 없는 편지를 보내고, 아침이면 청소부가 쓰레기로 가져가는 이력서와 구직 신청서를 수도 없이 썼어. 이제 더는 못 하겠어.

그나마 입사를 지원했던 회사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통지를 받을 때도 있었지. 대기실에서 나와 똑같은처지에 놓인 다른 지원자들과 함께 비참한 기분으로 앉아 기다리다가 한참 만에야 호명되어 비굴하게 굽실거리며 면접실로 들어가면 면접관이라는 자들이 냉랭하고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오만하게 나를 뜯어보며 앉아있었어. 수십, 수백 명의 지원자가 일자리 하나를 놓고 경쟁하고 있는데,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내게 자비를 베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면접관이 내 옷을 하나하나 벗겨내듯이 내 신청서와 이력서를훑어볼 때마다 나는 한편으로 취직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과 다른 한편으로 팔려가기를 기다리는 애완동물 상점 쇼윈도의 강아지가 되어버린 모욕감 사이를 오가며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내부 심사를 거쳐 결과는 수일 내에 개별적으로 통보하겠습니다. 그러나 통보는 대부분 ‘애석하게도………‘ 라는 문구가 달린 불합격 통지였어. 나는 취직될 때까지 그 짓거리를 계속했어. 그리고 설령 취직이 되어도 1년 후에는 어김없이 해고되었지. 나는 지금까지 많이 참았어. 전쟁 때에는 밑창이 떨어진 구두를 신고 러시아의 시골길을 일곱 시간씩 걸어 다녔어. 흙탕물을 마셔가며 어깨에는 기관총을 세 자루나 메고 다녔지.

포로가 되어 빵을 구걸하고, 삽으로 시체를 파묻고, 술에 취한 감시병에게 몽둥이로 구타를 당하기도 했어. 한끼 식량을 위해 중대원 전원의 군화를 닦거나, 음란한사진도 팔아봤어. 살아남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어. 그래도 모든 것을 참고 견뎠어. 언젠가는 그 지겨운 신세를 면하고 자리를 잡아 한 단계 두 단계 올라가면서 성공할 수 있으리라 믿었으니까. 그런데 매번 밑으로 떨어지기만 해. 요즘은 누구한테 구걸하느니 차라리 때려죽이거나 총으로 쏴버리고 싶은 심정이야. 이제 더는 직업소개소 대기실을 어슬렁거리거나 곧바로 쓰레기가 되어버릴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를 쓰는 일은 안 할 거야. 나도 이제 나이가 서른이야. 더는 못 하겠어." -p.368


"미안해요. 하지만 이제는 정말 가봐야 해요." 여자가어찌할 바를 모르며 말했다.
"미안하다고요? 정말 미안해요?" 남자가 대뜸 여자에게 물어보면서 버림받는 자의 절박한 갈망을 감추지 못한 채 쳐다보았다. 여자는 남자가 망연한 표정으로 플랫폼에 홀로 서서 자신을 싣고 떠나는 기차를 바라보리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남자는 이 도시에,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질 것이다. 여자는 자신에게 감정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남자의 존재가 느껴졌다. 한 남자가강렬하게 자신을 원하고 있었다. 예전의 그 누구보다 강한 남자의 열망에, 여자는 온몸에 충격을 느꼈다. 자신의 존재와 의미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 대단한 느낌이었다. 이제 드디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서 사랑받게 된것이다. 불현듯 남자의 사랑에 보답하고 싶어졌다. 여자는 섬광처럼 빠르게 결심했다. 충동적으로 마음을 바꾼것이다. 여자는 몸을 돌려 남자를 향해 뛰었다. - P324

그리고곰곰이 생각하듯 말했다(하지만 사실은 이미 마음속으로결정한 것을 말했을 뿐이었다).
"저어…………. 당신과 같이 있어도 될 것 같아요. 내일 아침 5시 30분에 출발하는 새벽 열차를 타고 가면 되거든요. 그러면 형편없는 제 직장으로 늦지 않게 출근할 수있어요."
남자가 여자를 바라보았다. 사람의 눈이 그렇게 순간적으로 빛날 수 있다는 것을 여자는 처음 알았다. 마치어두운 방에서 성냥불이 타오르듯이 남자의 표정이 밝아졌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여자의 진심을 헤아릴 수 있었다. 남자가 돌연 용기를 내어 여자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요. 가지 마세요. 오늘 밤, 나와 함께 있어요." - P325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남자가 여자를 위로하며 말했다. "아무 문제도 없었잖아. 다음번에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내가 신경쓸게. 당신이 아직도그 일로 마음을 닫고 있는 것 같아. 하지만 내 잘못이아니잖아."
"맞아." 여자가 자신에게 말하듯 씁쓸하게 말했다. "나도 알아, 알고 있다고. 당신을 탓하려는 것은 아니야. 그렇다면, 누구 잘못일까? 왜 우리에게는 항상 그런 일이생기는 거지? 우리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누구한테도 나쁜 짓을 한 적이 없잖아. 그런데 우리가 한 걸음만 움직여도 세상이 우리에게 덤벼들고, 우리를 괴롭히지.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에게 아무것도 요구한적이 없었어. 난생처음 휴가를 갔고, 남들처럼 자유롭고가벼운 기분으로 휴가다운 휴가를 즐기고 싶었어.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만이라도……." 남자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여자를 달랬다. - P350

"어쨌든, 아무 일도 없었잖아.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고. 경찰은 범인을 찾고 있었던 거야. 우리가 그 호텔에 있었던 것은 그저 우연일 뿐이야."
"나도 알아, 안다고. 운이 나빴을 뿐이지. 하지만 거기서 일어난 일………… 당신은 이해 못 해, 페르디난트, 당신은 몰라.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처음 밤을 보낼 때 무엇을 꿈꾸는지, 남자를 만나기 전부터 어떤 것을 상상하고 있는지,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 나이 든 여자든 어린 소녀든 마찬가지야. 누구나 그런 꿈을 꾸지.
당신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할 거야.
여자들은 누구나 그 순간을 성대한 축제와 같은 것으로상상하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로 여긴다고. 어쨌든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 기억이 여자로 하여금 세상의 온갖 의미 없는 것들을 극복하게 해주는힘이 되는 거야. 오랫동안 당신도 그런 순간을 꿈꾸고 상상했을 거야. - P350

아니, 당신은 절대로 상상하지 않았을거야.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고, 상상할 수도 없었겠지.
그저 아름다운 어떤 것으로, 막연히 꿈꾸었을 거야. 그런데 그 꿈이 내게는 몹시 끔찍하고, 견디기 힘들고, 무서운 일이 되어버렸어. 당신은 그 꿈이 무너졌을 때 어떤 기분인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 꿈이 무너지거나 더럽혀진다면, 아무도 되돌릴 수 없어."
남자가 여자의 손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여자는 시선도 주지 않고 지저분한 바닥만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해 봐. 결국 돈이 문제야. 구역질나고 더러운 돈. 그 치사한 돈 말이야. 돈만 있었다면, 지폐 두세 장만 있었다면 나도 축복받은 사람이 될 수 있었을거야. 어디든, 언제든 훌쩍 떠나버릴 수 있겠지. 아무도따라올 수 없는 곳에서 혼자 자유롭게 마음껏 여행할수 있을 거야.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멋진 인생일까. 당신도 마찬가지지. 돈만 있다면, 당신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 텐데………. - P351

우리 같은 사람들은정말 개 같은 신세야. 다른 사람들이 쓰던 더러운 방에기어들어 갔다가 내쫓기듯 나왔잖아. 아아, 이렇게 참담한 신세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보면서 여자는 얼른 덧붙였다.
"알아, 당신도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나는 아직도 무서워. 당신은 내가 왜 이렇게 무서워하는지 이해해줘야 해. 시간이 필요해. 시간이 지나야 괜찮아질 거야."
"그런데………… 오늘 돌아갔다가 다시 나를 보러 올 거지?"
남자의 물음에 배어 있는 불안감을 감지하고 여자는기분이 풀렸다. 남자가 처음으로 여자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말을 했던 것이다.
"그래, 다시 올 거야, 믿어도 돼. 다음 주 일요일. 다만, 알지? 제발 그것만 부탁해." - P351

여자가 떠났다. 남자는 역 구내식당으로 들어가 브랜디 몇 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바싹 말라버린 목구멍으로넘어간 브랜디가 뜨거운 흔적을 남기며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뻣뻣하게 굳었던 사지를 이제야 다시 움직일 수있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두 팔을 휘두르며도로를 따라 성큼성큼 빠르게 걸었다. 행인들이 놀란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공사장에서 일하러 갔을 때에도 인부들은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남자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전에는 언제나 얌전하고 조용했던 그가 걸핏하면 화를 내고늘 언짢아 보였기 때문이다. - P353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돈의 위력을 실감했다. 돈은 있을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없을 때에는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따라서 돈은 ‘자유‘라는 거룩한 선물을 주기도 하지만,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단념해야 할 일이 생기면 분노가 솟구치게 한다. 이른 아침 어둠 속에 앉아 뿌옇게 밝아오는 창밖을 바라볼 때나, 황금빛으로 물든 커튼이 돈 많은 사람에게 안식과 자유를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화가 치밀어올랐다. 부유한 남자들은 원하는 여자들과 함께 아름다운 커튼이 쳐진 방 안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갈 곳도 없이 쏟아지는 비를 뚫고 무거운 걸음으로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자연계에서는 오직 바다만이 내포하고 있는 잔인함과 같은 것이었다. 바다는 엄청난 양의물을 가지고도 사람을 갈증으로 죽게 할 수 있다. 세상에는 아늑하게 햇빛이 들어오고 폭신한 침대가 있는 조용하고 안락한 방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 P356

수십만, 수백만 개의 방, 셀 수도 없이 많은 방, 아무도 사용하지않거나 비어 있는 방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에게는 그 방 한 칸이 없었다. 잠시 서로 기대거나 입을맞출 공간이 없었다. 온종일 쏘다니며 느꼈던 미칠 것같은 갈증과 분노를 풀어줄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상황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으리라고 자신을 속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거짓말을 시작했다. 남자는 여자와 함께 카페에 앉아 신문 구인 광고를 읽거나 구직 신청서를 썼고 괜찮은 일자리에 대한 전망을여자에게 들려주었다.
"전쟁 때 만난 친구가 꽤 큰 건설회사의 관리직으로일자리를 구해주기로 했어. 그 회사에 다니면 돈을 많이벌어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야. 그러면 내 꿈이었던 건축사가 될 수 있겠지." - P357

여자도 이야기했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빈으로 자리를 옮겨달라고 본청에 전근신청을 냈어.
그리고 힘을 좀 써달라고 삼촌을 찾아가 부탁도 했으니까 1, 2주 후에는 틀림없이 좋은 소식이 올 거야." - P357

"솔직히 말해봐 우리 만남에 무슨 의미가 있어? 둘이 추레한 행색으로 거리나 카페에 앉아 있는 것이 전부잖아. 서로 도움도 되지 못하고, 서로 거짓말이나 해야 한다면 네 마음도 아프잖아. 우리가 그렇게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우리에게 희망이란 게 있어? 내 나이지금 서른이야. 그런데 원하는 일을 할 기회가 없어. 늘 취직했다가 쫓겨나기를 반복하다 보니, 한 달이 1년처럼 느껴져. 나는 세상을 너무 몰랐어. 사람답게 살아본 적도 없고, 그저 ‘나도 성인이 되었으니 이제 내 인생을 시작하는구나.‘ 하고 막연하게만 생각했지. 하지만 이제 내게는 아무런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
내게 어느 날 갑자기 좋은 일이 생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나는 끝났어. 이제는 일어설 수가 없어. 당신도 앞으로 나 같은 남자는 만나지 말아야 해. 나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해. 당신 언니가 그것을 단박에 알아차리고 내가 프란츠와 가깝게 지내는 것을 원치 않았던 거지. - P371

지금은 내가 당신의 마음마저 혼란스럽게 하고 있을 뿐이야. 아무 의미 없어. 우리 이제 그만 헤어지자."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할 건데?"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여자는 여전히 긴장한 채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가 지팡이 끝으로 땅바닥에 작은 구멍을 냈다. 그리고마치 온몸이 그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이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크리스티네의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그, 그럴 생각은 아니겠지?"
"맞아." 남자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야. 난 지쳤어.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아, 끝내고싶어. 러시아에 있을 때 전우 넷이 그 길을 택했지. 순식간이었어. 나는 마지막 순간에 그 친구들의 행복한 표정을 봤어. 어렵지 않아. 이토록 힘들게 살기보다 훨씬 쉬워!"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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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23-06-01 09: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로 읽었는데 원제가 그대로 제목으로 번역되어 새로 나왔군요. 이 원제가 더 나은 듯.. 와 저 이거 읽을 때 제목과 책의 1부를 읽으며 느꼈던 감정이랑 2부때랑 너무 달라서 괴리감에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같은 책 맞냐며.. 크리스티네 자체도 애정이 가는 캐릭터는 아니었어서 정말 마지막 부분은 괴롭게 읽었었네요..

다락방 2023-06-01 12:16   좋아요 2 | URL
이 책이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인줄 모르고 제가 있는데 또 사지 않았겠습니까? 에휴..
맞아요, 1부에서는 이 아가씨야 그러지마, 변신에 도취하지마! 막 이렇게 되었다가 2부에서 분위기 급반전 분노 팡팡 터지는데 와.. 저도 너무 괴로웠어요. 일하는 것도 괴롭고 버티는 것도 괴롭고 그러나 그들의 결심도 괴롭고 말이지요. 가난한 연인들의 데이트 너무 싫었네요 ㅠㅠ

잠자냥 2023-06-01 10:5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의 원작에 비할 만큼 아주 좋은 리뷰입니다!
경험은 늘 선인가.... 이건 저도 회의적인데요,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크리스티네의 경험 같은 것에서도 분노만 하기보다는 그 분노를 조절할 줄 알거나 분노 외에 다른 것을 이끌어내는 능력도 필요한 것 같아요. 이를테면 부장님이나 저나 계속 월급쟁이로 살면서 다달이 떼가는 세금 이 정부 들어 더 올랐어?! 근데 고소득자들은 오히려 떨어졌다며? 분노 이글이글.........그런데 그 분노에 잠식당하면 답 없어요... 분노는 하지만 분노만 하고 있지 말고 그러니까 투표로....(님들아 제발 제대로 투표해... ㅠㅠ) 아니면 그 분노를 다른 식으로 돌리거나... 뭐 이런 거요.
페르디난트랑 사랑에 빠질 때 저도 아이구 이 아가씨야 도망가, 했답니다.

좋은 소설은 정말이지 가장 좋은 인문학입니다.
부장님 오늘 세 가지 메뉴 드세요~ ㅋㅋ

다락방 2023-06-01 12:15   좋아요 5 | URL
네, 잠자냥 님. 분노 외에 다른 걸 끌어낼 수 있어야 하고 그게 제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도 그렇게 살아주길 바라지만, 그러나 그들은 다른 걸 끌어낼 수 없을만큼 이미 모든 힘을 다 쏟지 않았나, 너무 열악한 환경 아닌가, 그정도도 끌어낼 수 없을만큼 지쳐버린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그래서 분노에 잠식당하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이게 오히려 저의 오만인것 같기도 하고, 참 여러가지로 복잡합니다. 그러다가 또다시 이게 그러니까 다 이 세상 탓이다!! 이렇게 되면서 세상이 미워지고요. ㅠㅠ

저는 소설을 비웃는 사람들은 소설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니, 얼마나 좋습니까, 소설 말이지요. 츠바이크의 이 소설은 정말 좋았어요!

은하수 2023-06-01 11: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저 또 저 문장들에 잠식당해요...
모든 문장을 다 인용하고 싶을 정도로 압도적인 문장들이죠!
분노에 잠식당하지 않아야 하는데 ㅠㅠ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는 그럴수가 없었죠 전 그게 너무 이해되니까 저 두 사람을막을수가 없는거 아닐까 생각하게 됐거든요. 사실 어떤 선택을 하든 다 이해된다는게 너무 슬프죠!

다락방 2023-06-01 12:12   좋아요 2 | URL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돈의 위력을 실감했다. 돈은 있을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없을 때에는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는 문장을 읽을 때, 와 이건 참이다, 이건 사실이다 했어요. 몇 권 안되지만 츠바이크 책 읽으면서 저는 이 책이 제일 좋지 않나 싶어요. 음 <연민>도 좋았는데.. 아주 재미있게 그렇지만 답답해하고 안타까워 하면서 읽었습니다. 크-

은하수 2023-06-01 13:50   좋아요 2 | URL
네... 정말 쵝오 쵝오입니다~~^^
우리 플친님들 다~~ 읽으셔야 해요!
다 아는 사실인데 왜 뻔하게 느껴지지 않는걸까요?

얄라알라 2023-06-05 01:49   좋아요 0 | URL
은하수님,
서재 플친님들 리뷰를 그토록 기다리셨는데 다락방님께서 드디어^^

한국어판 책 제목이 두가지라는 것도 오늘 알았네요

˝소설 안에 다 있다˝^^

새겨 듣고 갑니다.^^

다락방 2023-06-05 10:09   좋아요 1 | URL
얄라알라 님, 이 책 참 좋아요.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좋은 소설책 안에는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거 같습니다. 후훗.

책먼지 2023-06-02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으아 다락방님 이 책을 읽고 이런 명제를 던져주셔서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좋네요ㅠㅠ 저는 20대 후반에 엄청 돈이 많은 사람과 아주 잠깐 사귄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과 갔던 곳들, 그 사람의 행동양식이나 사고방식, 향유하는 문화, 사용하는 물건들 이런 거에 엄청나게 주눅들었던 한편으로 그 사람 곁에서 내가 느끼는 세계 외의 다른 건 다 너무 시시하고 초라하고 하찮아 보였거든요.. 그 사람과 다니면 걸을 일이 거의 없었고 무언갈 기다리거나 인내할 필요도 없었고 모든 게 다 편리하고 정돈되어 있고 맞춤한 그런 느낌이었는데 데이트 끝나고 돌아오게 되는 제 현실은 그게 아니니까 그 간극이 너무 커서 엄청난 감정의 진폭과 가치관의 혼돈이 왔었어요!! 지금에 와서는 그 사람과 사귀었던 경험을 여행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고 경험하고 나왔으면 됐다고 (나와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게 됐지만 돌이켜보면 당시에 저는 내가 얼마나 초라한 사람인지 들켜서 그 사람 세계에서 금방이라도 쫓겨날까봐 엄청난 스트레스와 불안감에 시달렸었어요ㅜㅜ (사귀는 동안 불면증 엄청 심했고 음식 먹는 게 너무 힘들었어서 인생 최저 몸무게 갱신..) 어우 이 책 저는 교보문고에서 츠바이크 이름만 보고 낼름 집어왔는데 읽어봐야겠습니다!!!

다락방 2023-06-05 10:13   좋아요 2 | URL
저는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소설은 저를 반성하게 하는데요,
경험은 언제나 선이라고 믿고 있던 제 신념에 금이 가버렸어요. 저는 회복가능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데, 그러나 그 회복도 회복가능할만큼의 여건이 있었기에 가능한게 아닌가 싶고요.
제가 몇해전에 한남동에서 콘서트를 보고 당시 애인하고 가볍게 와인 한 잔 하고 주변 레스토랑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가장 저렴한 병와인이 99,000원 이더라고요. 가만있자, 그게 언제인가.. 14년은 아니고 13년도 아니고, 아마도 2012년 쯤이었을텐데요, 와, 제일 저렴한 와인이 99,000원인데 어떻게 마시냐! 이러고 완전 쫄아서 생맥주 두 잔 시키고(그것도 비쌌어요)병아리콩 샐러드 하나 시켜서(그게 제일 거기서 저렴했어요) 먹고 후딱 나가자 했거든요. 그런데 그곳의 모든 테이블에는 다들 병 와인이 놓여있더라고요. 그런데 거기 앉아서 병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이 다 저희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거예요. 심지어 ‘내일 레포트 제출할 수 있어?‘ 하고 오고가는 대화들에서 대학생인거 다 알겠는데, 직원 부르더니 대리 불렀다고 오면 알려달라고 하고 … 그날 대충격이었어요. 나는 구만구천원 와인 못마시는데, 고개를 돌려 내 애인을 보니 내 애인은 나보다 더 가난해 …
그러나 그런 기억이 있었고 나는 이제 한남동 안간다 어휴 할 수 있는건, 내가 빠져나올 수 있을만큼만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고요. 아무튼 경험은 선인가? 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 매우 좋은 책입니다.
책먼지 님이 이 책을 읽고 써주실 감상이 진짜 너무 기대됩니다!!

건수하 2023-06-02 17: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는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을 더 알고 싶고,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닌 내 몸으로 체험하고 싶다. 사소하게는 ‘저 영화 엉망이야‘ 라는 말을 들어도 ‘그럼 안봐야지‘ 하는게 아니라, ‘얼마나 엉망인지 내가 한 번 봐야겠네‘가 되는 것이다. 동시에 ‘나에게는 좋을 수도 있지 않아?‘ 하는 생각도 하고. 그러니까 나는, 내 경험을 믿고, 하나의 경험으로부터 또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수많은 사유가 따라온다고 생각하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는 나에게 경험의 확장은 곧 세계의 확장을 의미했고, 이것은 언제나, 부정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참이었단 말이다.

저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지라 반가웠어요.

저는 요즘 다니엘이 부른 <인어공주> OST를 들으며 (예쁜데 노래도 잘하는 다니엘!) 이 만화 내에서 인어공주는 어떻게 사람에 대해 알게 되었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가 궁금해졌어요. 어릴 때 읽은 동화에는 왕자를 구한 후 왕자를 좋아하게 되어서 사람이 되려고 했으나, 요번 OST가사에는 사람을 궁금해하는 마음이 (아마 왕자 만나기 전인 거 같은데) 느껴져서요.


‘걸어다니는 걸 뭐라고 불러? 아, 다리‘
‘지느러미로는 멀리 못 가 다리가 없으면 춤도 못 춰‘
‘돌아다니는 곳을 뭐라 그러지? 아, 거리‘


다리, 거리, 춤추는 것.. 모두 알고 있는 거니까. 인어공주는 책을 읽었을까요?


그래서 사람이 사는 세계에 관심이 많았으니 왕자도 좋아하게 되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래 들으며 별 생각 다함...)


근데.. 지느러미로는 멀리 못 간다는 건 너무 인간 중심의 생각 같아요. 인어는 바다를 누빌 수 있는데. 지구 표면적만 봐도 바다가 70% 육지가 30% (대략) 인데.. 게다가 바다는 깊은데... 깊은 바다 속을 인간은 보지 못해서 배를 띄우고 뭘 내려보내고 난린데...

그니까, 남의 세계를 애매하게 조금 안다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이 책 읽고 싶네요. (급 마무리)

인어공주 평이 별로 안 좋다던데 엉망인지 한 번 보고 싶기도 하지만... 언제부턴가 영화는 우선순위가 밀려서.. 책만 읽고 있는지라 안 보게 될 것 같네요.

다락방 2023-06-05 10:16   좋아요 0 | URL
수하 님, 차라리 모르면 알고자 노력할 수 있는데 수하님 말씀처럼 남의 세계를 애매하게 조금 아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 맞는 것 같아요. 조금 아는 걸로 안다고 추측하고 함부로 판단하기가 너무 쉬운 것 같아요. 저는 그동안 책을 읽으면서 그건 나쁘다 그러지말자고 결심하고 있지만, 제가 번번이 그것에 성공하진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영화도 좋고 책도 좋은데, 그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아마도 책을 읽는 사람들은 어느정도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게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최근에 <토리와 로키타>를 보고 다시 영화에 대한 사랑에 불붙어서 조만간 또 보러 가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후훗.

수하 님, 여행가셨죠?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습기도 가득 느끼시고 즐겁게 다녀오세요!!

Falstaff 2023-07-07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이 책을 신청하자마자 (정말로 한 시간? 아니, 몇 분 안 지나서) 딱 ˝이달의 당선작˝으로 선정이 됐네요. 아주 기대가 되고 즐겁습니다. 다락방님을 흉내내서..... 그럼 이만... ㅋㅋㅋ

얄라알라 2023-07-07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이책을 빌려왔습니다^^표지가.얇아서 딱.데리고 다니기 좋은 질감^^설렙니다
 
참지 않는 여자들
자일리 아마두 아말 지음, 장한라 옮김 / 율리시즈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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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란 것이 나에게는 결코 주어질 수 없는 것이라면 그 권력의 옆에 어떻게든 가까이 서고 싶어진다.


아프리카에 사는 여성들이 지독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면서도 그 고통을 자꾸만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게 되는 건, 권력이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부다처제가 징그럽고 나 외에 다른 아내의 존재가 영 신경쓰이지만, 그러나 자기 딸에게 또다시 '인내하라, 무조건 참아라'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악순환. 여자에겐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에 원치 않는 남자랑 결혼하게 됏을때도 '인내하라'는 말을 듣고, 사랑하는 남자랑 헤어져도 '인내하라'는 말을 듣는다. '너에게 좋은 건 네가 아니라 우리가 더 잘알아!'

남편이 강간을 해도 폭력을 휘둘러도 그래서 울거나 상처입거나 다쳐도 '인내하라'는 말을 듣게 되고, 어차피 말해봤자 참으라고만 하니까 이곳에서 도망쳐도 다시 잡혀와서는 '도망가서 망신시켰다'고 또 욕을 들어 먹는다. 이래가지고서야 정신이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잖나.


소설속에서 여자가 여자를 미워하고 여자가 여자의 잘못됨을 바란다. 왜냐하면 내가 잘 살기 위해서 저 여자가 없어야 하니까. 내 남편의 사랑이 저 여자에게 더 가면 안되니까, 내 남편의 재산이 저 여자에게 더 가면 안되니까. 그러면 내 몫이 줄어드니까. 애초에 힘도 재산도 그리고 내 몸에 대한 권리도 내 것이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시기, 질투, 경쟁이 피할 수 없이 일어난다. 징글징글하다. 남자들에게만 힘이 있다보니 여자들이 서로를 미워합니다. 그러면 남자들은 더 살기 좋아지겠죠?


소설 속 등장하는 세 명의 여자들은 '참지 않는 여자들' 이라기보다는 '참기 싫은 여자들'이라는 게 맞다. 왜냐하면 결국 그들도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니까. 그래서 이 소설은 고발 소설인데, 그저 고발만 하는 것이 답답하다가도,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가 드러나야 하는 법. 아프리카의 일부다처제와 여성혐오를 드러내는 일이, 여성도 인간이라는 당연한 명제를 각인시키기 위해 가장 우선되어야 할 일일 것이다.


참지 않는 여자들은 책속 여자들보다는 작가를 지칭하는 것일테다. 이 거지같은 세상, 참지 않겠어! 내가 다 까발리겠다!!

우리 여자들은 참지 않긔!!



열일곱살에 오십살 남자의 두번째 아내로 강제로 시집보내졌는데 그의 삼십오세 첫아내에게 미움 당하는 삶 …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핳하하 근데 다들 시집 잘갔대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좆까라 그래.



책 처음부터 끝까지 속시원한 장면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노파심에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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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5-17 08: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2023년 2월에 출간되었는데 어째서 리뷰도 내꺼 하나 딸랑 페이퍼도 내꺼 하나 딸랑 … 왜죠?

DYDADDY 2023-05-17 08:57   좋아요 0 | URL
보통 책을 고를 때 분노의 감정은 배제되기에 그런 것 같아요. 읽을수록 분노하는 소설을 선정할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요. 하지만 현실고발 소설은 르포나 기사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에 저도 읽고 싶은 책에 담아갑니다.

다락방 2023-05-17 09:18   좋아요 1 | URL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책인것 같아요. ‘2020 고등학생 공쿠르상‘ 수상 작이라고 합니다. 그런게 있는줄은 처음 알았네요. 하핫 ;;

건수하 2023-05-17 0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지 않는데... 속시원한 장면은 없는건가요 ㅠㅠ

다락방 2023-05-17 09:17   좋아요 0 | URL
참지 않는 건 작가였지 책 속 주인공들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내내 답답하기만 합니다. 속시원한 장면은 하나도 없습니다.

건수하 2023-05-17 09:18   좋아요 1 | URL
…. 그렇군요 그만큼 현실이 참담하다는 뜻일까요 …

다락방 2023-05-17 09:19   좋아요 1 | URL
참지 않으려고 소리지르고 울고 애원해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요. 다 참으라고만 해요. 아빠도 엄마도 큰아빠도 시누이도 … 답답 터지는 소설입니다 ㅠㅠ

독서괭 2023-05-17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으 정말 읽으면서 너무 화나셨겠네요 ㅠㅠ 참으라 할 수밖에 없는 건 별 뾰족한 대안이 없다는 걸 알아서겠죠..? 대안 마련이 시급합니다 ㅠ

다락방 2023-05-17 12:19   좋아요 1 | URL
뭔가 속시원한 일들이 펼쳐질 줄 알았건만 그런건 전혀 나오지 않고요, 다만 이런 남자들과 더불어 이런 현실속에 놓여있다는 걸 밝힌 건 의미있다 생각합니다. 그게 고발소설이 하는 일이겠죠. 이 책 아마도 아프리카에서 82년생 김지영 취급받지 않을까 싶어요. 남자들이 ‘이거 읽는 여자들은 걸러라!‘ 할듯합니다. ㅎㅎ
 
수레바퀴 아래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이섭 옮김 / 민음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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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스스로 중년이라 칭하는 지금의 나는, 학창 시절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다. 내 주변 가까운 어른들 중에는 딱히 배움이 깊다거나 넉넉한 재산을 가진 어른이 없었고, 막연하게 대학을 가야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나는 학창시절을 보냈다. 친구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아 학창시절이 괴로웠던 건 아니었지만 공부하기는 싫었던 여느 학생들과 같았고, 그 시절 가장 나를 재미있게 했던 건 영화를 보는 것과 책을 읽는 것, 팝송을 듣는 것이었다. 중학생 때 집에 비디오 플레이어를 들여놓았는데 그 후로 엄청나게 비디오테입을 빌려다 영화를 봐서 하루에 여러편을 본 적도 있고 나중엔 로보캅 1을 빌리면 사장님이 2,3 편은 그냥 빌려주시곤 했더랬다. 시험기간에도 소설책을 읽어서 여동생은 그런 나를 답답해했다. 내게 가장 재미있는 건 영화 보기와 소설 읽기 그리고 팝송 듣고 가사 해석하기 등이 있었다. 공부를 하지 않았던 것, 그래서 성적이 좋지 않았던 것은 지금에 와서 두고두고 후회되는 일이고, 그런 한편 내 배경을 원망하기도 자주였다. 나에게도 나를 이끌어주는 어른이 있었으면, 내 재능을 발견해주고 내 진로를 함께 고민해주는 어른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여자애가 배워 무얼 하냐는 아버지와 치열하게 싸워 가까스로 대학을 보낸 엄마에게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이지만, 그러다가도 불쑥 불쑥 막연하게 '대학을 가고 좋은 직업을 가져야지'가 아니라, '너에겐 이런 재능이 있으니 이런 학교에 가서 이런 과에 가 공부하면 어떻겠니' 라고 잡아줄 수 있는 어른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어지는 거다. 그래서 최근에 본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3> 에서 네가 생각하는 그 대학 말고 이 대학에도 가능성을 열어봐, 라고 언니가 라라 진에게 얘기했을 때, 그게 그렇게나 부러웠다. 내게 주어진 환경은 내가 더 발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걸 돕지 못했다는 생각을 간혹 하곤 한다.



학창 시절 딱히 흥미로운 공부는 없었다. 국어는 그냥 잘했지만 사실 국어를 못한다는 건 나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국어를 '못'할수가 있지? 그렇다고 맨날 국어 백점 받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국어는 내게 어려운 과목이 아니었다. 영어는 좋아해서 열심히 했다. 사실 학교 공부를 열심히 했다기 보다는 팝송을 미친듯이 따라 부르고 해석해보고 외우고 그랬더니 영어 점수는 그냥 따라서 좋아졌다. 문제는 그 외의 다른 과목들이었다. 특히 암기를 해야 하는 과목들은 내게 쥐약이었다. 암기는, 모두가 알겠지만, 시간을 들여 외워야 했다. 시간을 들이는 만큼 외워지는데 나는 달달 외우는 것에는 영 흥미가 없다. 그 때나 지금이나.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친구들도 암기 과목 만큼은 시험 보면 높은 점수를 받곤 했는데, 나는 암기 과목에선 완전 고꾸라졌다. 나는 암기력이 겁나 떨어진다고 늘 생각해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딱히 그랫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전화번호 외우는 건 너무 식은죽 먹기라서, 내가 암기력이 떨어졌던 건 암기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하지 못했으므로 하지 않았기 때문 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그런 내가 어른이 되어, 그러니까 대략 2015-2016년부터 여성학 책을 읽기 시작했다. 몇 번 언급햇지만 '최명희' 의 《혼불》을 읽다가 아니 세상이 왜이렇게 똥같지? 왜이렇게 여자들 살기가 엿같았지? 페미니즘을 공부하면 이걸 알게 되나? 그렇게 페미니즘 책을 읽기 시작했고 읽을수록 더 알고 싶어져서 관련 강의도 찾아다녔다. 회사 업무가 끝나면 지하철을 타고 마포로, 대학로로 그 외 다른 곳으로 이동해가며 강연을 들으러 다녔다. 페미니즘 철학 강의를 들으러 주말에 창원에 가기도 했다. 내가 알고 싶고 재미를 느끼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는 내 스스로 찾아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알면 알수록 내가 얼마나 모르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어진다는 것에 공부의 재미가 있는 것 같았다. 단순히 지식이 부족한 게 문제가 아니었다. 지식이 부족하면 상처 주는 말도 더 하게 되는 거였어. 나는 점점 더 과거의 나보다 나은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페미니즘 책 읽기를 계속했고, 알게될수록 여성학이 그저 여성학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언어학, 사회학, 인문학, 신학, 정신분석학, 심리학 철학등의 학문과 연결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뒤늦게 알고 깨닫게 되니 지식을 습득하는 것도 의욕만큼 잘 되지 않았고 체력적으로도 힘들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과거에 대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아, 내가 어릴 때 공부를 했다면. 암기과목을 열심히 암기했다면. 국사와 세계사 한국지리와 세계지리 정치경제와 사회문화 그리고 윤리까지, 내가 암기과목을 제대로 다 외우는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다면, 이렇게 지금에 와서야 맨땅에 헤딩해가며 책을 읽지 않아도 됐을텐데. 책 읽다가 이게 무슨 말이야 찾아보는 일 없이 내 배경지식을 끌어오면 됐을텐데. 나는 과거에 내가 공부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지만 그러나 내 시간을 과거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만, 지금의 젊은 학생들에게 지금 열심히 공부해두라고, 그것이 앞으로 살아가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해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걸 말하는 순간, 나의 어린 시절에 어른들이 내게 그러했던것처럼, 한낱 잔소리로 들리겠지. 아마 귀에 닿기도 전에 튕겨져 나가는 잔소리겠지.



나는 헤르만 헤세가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만들어낸 인물, 그러나 자기 자신을 반영한 인물 '한스'를 보는데 부러웠다. 작은 마을의 반짝거리는 학생, 집이 부유하지도 않고 대도시도 아니지만, 그러나 자기 스스로 빛이 나는 한스를, 마을 사람 모두가 알아보고 도우려고 하는 것이 부러웠다. 이 작은 마을에서 출세하는 길이라고는 좀 더 큰 곳으로 가 신학 기숙학교에 입학하고 그곳의 규율을 잘 따라 종교인이 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이 마을에서 최고 잘난 학생이긴 하지만 과연 그 시험에 합격을 할 지를 두고 마을 사람 모두가 긴장과 기대를 한다. 시험을 치르고 합격을 하고 입학을 앞둔 짧은 기간에는, 그런데 네가 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를 더 잘 따라가려면 그리스어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수학을 좀 더 예습해야 하지 않을까, 하며 교장선생님과 신부님이 앞다투어 개인 과외를 자처하는데 나는 그것도 부러웠다. 물론 여기에는 한스가 뛰어난 학생임이 전제되긴 했지만, 그래도 어른들이 알아봐주고 예습을 하게 해주다니, 앞으로 쭉쭉 나아가기 위한 조건이 잘 갖추어진 게 아닌가 싶은 거다.


그러나 기숙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따라잡는 일은 쉽지 않았다. 친구를 사귀고 그 친구와 함께 하는 일, 우정을 키워가는 일은 한스에게 바라는 일이었고, 그런데 자신이 사귄 친구와 우정을 이어나가려면 공부하는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공부를 덜하고 성적이 떨어지니 학교에서는 '너 그 친구랑 놀지마!' 라고 윽박지르고, 설상가상으로 기숙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혹은 사고로 친구들이 하나씩 둘씩 사라지자 한스는 우울함을 겪는다.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한스는 그렇게 방황하고 신경쇠약에 걸리고, 결국 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자신보다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아이들과 같은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보다 경력은 뒤쳐진 채로. 한스는 새로운 일을 배우며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지만, 그러나 자신이 아주 아이었을 때 친구들과 노는 일은 얼마나 즐거웠는지, 자연은 또 얼마나 자신에게 주는게 많았었는지를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이 모든 괴로움을 끝내기 위해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할 정도로 그는 고통 속에 놓인다.



한스는 공부를 잘하는 뛰어난 학생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원했던 삶을 살지 못했다. 어른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했고 그걸 충실히 따라가려다보니 어느 순간 에너지가 소진되어져버린 거다. 그러니까 내가 그토록이나 가지고 싶었던 과거가 한스에게 있었는데, 그런데 한스에게 그 현재는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거다. 지금의 중년인 내가 '너 그거 좋은 기회를 가진 거야' 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현재를 사는 한스가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예전처럼 낚시도 하고 친구들하고 놀고 싶어' 라고 말하는데.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동네 아주머니의 옛날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그 행복한 어린 시절이 지나가버렸다. 내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지식을 채우던 어린 시절이 한스에게 있었는데 한스는 그것이 괴롭다. 지식을 갖기 위해 노력하면서 놓친 수많은 것들을 갈망한다. 그리고 한스는, 그 괴로움과 고통을 이겨내기가 벅차다.



아마 한스 또래의 독자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한스의 괴로움과 고통에 더 무게를 둘 것 같다. 그래서 이 소설은 좋은 소설이 될 것이다. 중년의 나는 내 입장으로 보게 돼서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결코 무용한 독서는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 놓지 말아야 할 것, 어린 시절에 강요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이 책을 통해 비로소 다시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책은 한스와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읽어야 하지만, 그러나 나처럼 한스 또래의 자식을 두었을법한 어른들도 이맘때쯤 읽어야 하지 않나 싶어진다. 중년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어른의 눈으로 한스를 보았는데, 도대체 헤르만 헤세는 이 괴로운 어린 한스를 만들어냈을 때 몇 살이었을까. 검색해보니 1906년에 쓴 작품이더라. 헤르만 헤세는 1877년에 태어나 1962년에 죽었다. 그의 나이 서른에 한스를 통하여 자신의 어린 시절이 고통이었음을 드러낸 것이었다. 나이 서른이 되어도 그 때의 괴로운 기억은 그에게 온전히 남아있었던 탓이리라.



일전에 유명한 북튜버가 자신의 뛰어난 영어 실력은 초등학교 때부터의 엄청난 교육과 훈련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래서 따로 유학을 간게 아니어도 영어 실력이 뛰어난 거라고. 그러나, 그 때로 돌아간다면 그걸 또 겪고 싶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 시절이 괴로웠다는 거였다. 한스를 읽는데 그 북튜버의 이야기가 겹쳐졌다. 뛰어난 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어 남들보다 월등한 실력을 갖게 되는 것은, 이렇게나 '괴로웠던 때'를 함께 가져가야 하는 것일까. 좋은 대학을 가고 원하는 직업을 가지면 과거의 그 고통을 보상 받는 게 되는 건 아니라고, 헤르만 헤세가 말해주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그런 어른이 되기도 전에 이미 절망하고 무릎 꿇기도 한다. 



어린 시절에 배경지식을 많이 다져두면 어른이 되어서도 지식을 쌓는 일이 더 유리해질텐데, 그런데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인생의 기쁨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하니, 이 나이가 되어도 역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잘 모르겠다. 한스는 인생이란 수레 바퀴 밑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고 나는 인생이란 수레 바퀴를 가까스로 피해가며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인생이란 것이 수레바퀴라는 건 변함없는 것이라면, 역시나,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건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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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DADDY 2023-05-15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지 못한 길은 후회가 남아도 가지 않은 길은 아쉬움이 남겠죠. 그 후회와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그 길을 대신 가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팔구십년대의 암기 과목 중에 스키마로 남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시험이 끝나면 달려가던 슈퍼에서 과자를 집기 전에 공부한 내용이 망각의 영역으로 넘어간 것을 보면 다락방님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열심히 공부하셨다면 그 시간에 볼 수 있었던 영화나 책을 못봤다고 후회하시고 계실지도 모르죠. ㅋㅋㅋㅋㅋㅋ
잘 사는 것은 각자 생긴 것이 다른 것처럼 사람마다 다르겠죠. 지금 충만하고 행복하다면 그 감정에 소비될 돈을 벌며 가급적 그 감정에 충실한 시간을 늘려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제가 보기에는 다락방님은 지금 충분히 잘 살고 계세요. ^^

다락방 2023-05-16 08:39   좋아요 1 | URL
저도 그래서 열심히 공부해서 더 좋은 대학을 가고 더 좋은 직장에 가고 더 높은 연봉을 받게 됐다면, 내가 놓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곤 하거든요. 그게 만약의 지금처럼 책 읽고 글 쓰는 삶이라면, 저는 지금의 이삶이 더 좋다고 말하고 싶어요. 저는 책 읽고 글 쓰는 삶에 큰 만족을 얻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고 싶어요. 그러니 어쩌면 저는 이렇게 살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하핫.

은하수 2023-05-15 1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구해 읽었던 헤르만 헤세네요 오랜만에 만나니 반갑네요. 저도 한스 보면서 사실 이해가 안됐거든요. 젊을 때 읽었으니까... 저렇게 지원해주는데 자꾸 어긋나고 힘들어해서... 저도 지원 없는 대학공부하느라 힘들때였거든요. 전 정신적 고뇌를 겪을 새도 없이 무조건 앞만 보고있을 때라 함... 배가 불렀네 배가 불렀어... 저런 고뇌의 시간도 보낼수 있고... 이랬었죠! 시간이 지나고서는 이해하게 됐지만요. 그래서 제목에 대해 곱씹어보게 되더라구요

다락방 2023-05-16 08:41   좋아요 0 | URL
저 어릴 때 데미안이며 싯다르타며 읽었었는데 기억이 안나서 데미안도 다시 읽어보려고 사뒀어요. 지금 읽으면 데미안도 완전히 또 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어요. 수레바퀴 아래서는 읽다보니 제가 읽은 것 같지 않고요. 그렇지만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헤르만 헤세 잘 쓰네!! 막 이러면서 읽었어요. 후훗. 고전은 괜히 고전이 아닌가 봐요.

한스의 타고난 능력과 주변 어른들의 도움은 부러웠는데, 그것은 또 오지랖과 강압이기도 할것이기에 한스 입장에서는 괴로웠던 거로구나 하면 역시 어른의 역할은 어려운 것 같아요. 놔둘 수도 없고 참견할 수도 없는 적정선은 어디일까요. 좋은 어른이 되는 건 결코 쉬운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잠자냥 2023-05-15 11: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3개 눌렀습니다.
<수레바퀴 밑에서>를 읽고 이런 글을 쓰시는 다락방 님 사......는 아니고, 좋아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지막 인생과 수레바퀴 문장 명문이네요.
십대 시절 <수레바퀴 밑에서>의 한스를 좋아했던 잠자냥이라서 더 이 글이 남다르게 다가왔습니다.

다락방 2023-05-16 08:43   좋아요 2 | URL
좋아요 세개 접수합니다. 보답으로 주기적으로, 자주 땡투 드리고 있습니다. 따로 말씀드리지 않아도 땡투 들어오면 아 다락방이로구나, 하시면 됩니다. ㅎㅎ

그리고 사.... 까지 하고 망설이시다니, 자신감을 가지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님 리뷰나 페이퍼 읽다 보면 잠자냥 님은 학창시절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잠자냥 님은 공부 잘했지만 겸손한 분이시고 저는 공부 못했지만 자뻑 충만한 … 흠흠.

잠자냥 2023-05-16 09:01   좋아요 2 | URL
음… 저 수능 수학 6점 받았습니다만…. *먼산*

다락방 2023-05-16 09:03   좋아요 2 | URL
음… (같이 먼 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DYDADDY 2023-05-16 10:03   좋아요 0 | URL
거기 뭐 재미있는 거 있나요? (같이 먼 산)

새파랑 2023-05-15 1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 이런 리뷰를 남기시는 다락방님은 천재가 맞습니다~!!
그런데 전화번호도 좋아하는(?) 사람것만 외우신거 아닌가요? ㅎㅎ
알아도 어떻게 할 수 없는게 인생인거 같습니다~!!

다락방 2023-05-16 08:45   좋아요 1 | URL
새파랑 님이야말로 천재십니다! 맞습니다, 전화번호도 좋아하는 사람만 외워요. 그래서 전화 걸어본 적 별로 없어도 외우는 번호가 있고 자주 걸어도 못외우는 번호가 있습니다. 구남친들 중 여러명은 외우지도 못했고 지금 기억 안나지만, 열렬히 짝사랑 했던 남자의 번호는 아직도 기억 한답니다. 심지어 구남친 이름도 기억을 못합니다. 얼마전에 이메일이었나 어떤 이름 보고, 이 사람이 누구지????????? 하다가 구남친이라는 걸 늦게 깨달았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란 인간, 이렇게나 감정과 뇌과 분리되지 않는 인간인 것입니다. 이런 정확한 새파랑 님 같으니라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햇살과함께 2023-05-15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나르치스와 수레바퀴의 내용이 비슷한 것 같고 잘 기억나지 않네요~
그나마 데미안은 워낙 다른 책에서 많이 언급되어서 대략 기억나지만^^
10대 키우는 중년으로 다시 읽기 좋네요!
그리고 학창시절 암기과목은 시험용 아닌가요? 시험 끝나면 바로 잊어버리는..

다락방 2023-05-16 08:46   좋아요 1 | URL
나르치스와 수레바퀴 비슷해요, 햇살과 함께 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도 재미있었는데 수레바퀴도 재미있네요. 크- 데미안 재독 들어가야겠어요. 헤르만 헤세 재미있네요, 햇살과 함께 님.
저는 너무 건방지고 저잘난맛에 살아서 시험을 위해 암기하지 않겠어! 이러면서 암기를 안하는 그런 아이였고 그래서 성적이 엉망진창 … 저는 왜 그러고 살았을까요? 대체 왜? (절레절레)

독서괭 2023-05-15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오래전에 이 책 읽었는데 기억이 잘 안나요 ㅋㅋ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어떻게 살았든 안 가 본 길에 대한 미련은 남을 듯요. 요즘 아이들은 어릴 때 너무 소진되어서 나중에 어떻게 자랄지 걱정인데.. 정답 말고, 진짜 나에게 맞춤형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어른이 곁에 있다는 건 행운일 것 같습니다. 한스에게도 그런 어른은 없었던듯요.
학창시절에 공부 열심히 했던 1인으로서 말씀드리자면, 수능 끝나고 모든 걸 잊었기 때문에 역사 지식 세계지리 등등 하나도 남은 게 없습니다 ㅋㅋ 물론 서른 넘어서도 수능공부 하느라 외웠던 시시콜콜한 지식을 그대로 외우고 있는 분들도 있긴 하더라만요;; 제 경우엔 주입식 교육으로 남은 게 없어요.. 휘발....(욕아님..) 지금 자발적으로, 열정적으로 하시는 공부가 남는 공부입니다!

다락방 2023-05-16 08:49   좋아요 1 | URL
저는 데미안이 기억 안나서 이제 데미안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아니 사둔 책이 이렇게나 많은데 읽었던 책 다시 읽어야 하는 이 인생, 뭐죠? 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정말 방향치이기도 하면서 그림을 못외우는 사람이고 그래서 지리 과목이 전혀 흥미도 생기지 않고 기억나지도 않았거든요. 그런데 놀랍게도, 훌쩍 어른이 되어 여행 다니기 시작하면서 지도가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어요. 지구본 사두고 여기에서 여기까지 가는거구나, 하면서 말이지요. 저란 인간은 관심이 생겨야만 비로소 머릿속에 넣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인가봐요. 그러니까 공부를 못하죠. 다 관심이 없어가지고. ㅠㅠㅠㅠㅠㅠㅠㅠ

저는 그나마 주입식 교육이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더 몰랐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나마 주입식이어서 했던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생각해보니 그런건 주입식 아니어도 했을 것 같고 … 어쨌든 다 지난 일이니 지금은 지금에 충실하겠습니다. 필승!!

책읽는나무 2023-05-15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이란 수레바퀴를 가까스로 피해가며 살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다락방 님이 살아오신 인생이 또 살아갈 인생이 정답일지도 모릅니다.
이 책을 다시 읽어 보고, 읽을 시기에 놓인 사랑하는 조카에게 ‘이 책 읽을래?‘라고 포스트 잇을 붙여 놓고 집을 비운 이모의 행동은 수레바퀴를 잘 피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단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저는 중학시절 국어 선생님의 한 달에 한 권 책 읽기의 의무 때문에 중학교 들어가서 사춘기가 시작되어서였는지? 책 읽는 게 너무 싫었었어요. 첫 3월 첫 책이 <백범일지>였었는데 첫 달부터 안 읽었거든요ㅋㅋㅋ 책이 제게 좀 따분하고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런데 백범일지는 제게 늘 양심의 가책으로 다가오는 책이어 읽어야지! 생각은 늘 하고 있는 책이긴 합니다. 그래도 많이 안 읽은 와중에 수레바퀴는 완독했었던 것 같네요. 수이 님처럼 엉엉 울진 않았고 마음이 좀 슬펐던 기억만 어렴풋하게 남았던....근데 제겐 책이 좀 어려웠어요. 그리고 헤세의 작품이 좋아 그 유명한 <데미안>을 읽었었는데 그 후로 제겐 수레바퀴의 주인공이 싱클레어가 될 정도로 혼동을 하고 있었더군요.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안나서 몇 년 전 수레바퀴를 다시 읽었었거든요. 그리고 데미안을 또 읽었더니 아직도 싱클레어로 혼동ㅋㅋㅋ
암튼 수레바퀴를 읽고서 헤세가 더 좋아졌고, 왜 학생들에게 권하는 건지 알 것 같았어요.
전 학창 때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그닥 많이 없었던 건지? 한스에게 막 공감을 하진 않았는데 그래도 슬펐던 느낌은 진하게 남았어서 그게 뭘까? 하고 재독하니까, 부모의 입장에서 읽혀졌어요. 제게도 누구처럼 육아서였어요ㅋㅋ
그래도 슬픔은 남더군요.
저도 이번에 투비 적립금으로 딸들을 위해 수레바퀴 책 사주기로 약속을 했어요.
땡투 미리 예약 걸어놓고 갑니다^^

다락방 2023-05-16 08:52   좋아요 1 | URL
책나무 님, 저는 책 읽는 걸 너무 좋아해서 한글을 알고부터 바로 책읽기및 신문 읽기를 시작했는데, 학교에서 읽으라고 한 책들은 읽기 싫더라고요? 대학에서는 ‘이 책에서 시험 문제 날거니 읽어보세요‘ 라고 소설 한 권을 선택해주었는데, 원래 읽으려던 소설이었지만 그 순간 똭 읽기 싫어져서 안읽고 시험보러 갔어요. 대체 이런 똥베짱은 왜 튀어나오는 걸까요? 절레절레.
저는 책나무 님이 백범일지 언급하시니 <옥중서신> 생각나네요. 오래전에 친구가 선물로 주었는데 오래 안읽혀두고 묵혀두다가 팔았 … 저에겐 그 책이 양심의 가책으로 남아 있어요. 언젠가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아직도 안읽고 있습니다. 누구나 마음 속에 양심의 가책인 책 한 권쯤은 있는 건가 봅니다.

수레바퀴 아래서 참 좋고 재미있더라고요, 책나무 님. 저는 그래서 데미안 재독 들어갈 예정입니다. 데미안 다시읽어봐야지 기억 하나도 안나, 하고 진작에 사두었거든요. 헤르만 헤세 읽기 좋습니다, 책나무 님. 만세!!

물감 2023-05-19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공부랑은 거리가 멀고 먼 학생1이었고, 학교다닐때 공부좀 할걸 후회하는 성인1입니다만 그냥 만족하며 살고 있어요. 시간을 돌리지도 못하는데 계속 후회하면 뭐하나 싶어 자족하는 법을 배우고 살아가고 있습죠. 한스나 북튜버처럼 살아도 후회하고, 저처럼 살아도 후회하는 게 인생이라면 누굴 부러워할 필요는 없겠다 싶고요ㅋㅋㅋ 헤세 작품의 특징이 그거 같아요. 너는 틀린게 아니야 라고 느끼게 해주는거.

다락방 2023-05-19 13:43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물감 님.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는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어쨌든 지금의 내 선택과 그 선택이 가져온 결과에 만족하며 사는 것이 답이겠지요. 헤르만 헤세 너무 재미있어요, 물감 님! 저는 지난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 책 읽으면서 헤세 꿀잼인데? 이러면서 다 뿌숴버리겠다 싶더라고요.

저 한 이십년전쯤에 데미안 읽었었는데 지금 기억이 안나거든요. 이제 다음 차례는 데미안으로 할까 합니다!!

물감 2023-05-19 13:51   좋아요 0 | URL
저는 나르치스 그거 안읽었는데 다음에는 그걸 읽어야겠습니다ㅎㅎㅎ

다락방 2023-05-19 14:01   좋아요 1 | URL
나르치스도 엄청 재미있어요, 물감 님!!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