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 남자 뷰티풀 시리즈
크리스티나 로런 지음, 정지현 옮김 / 르누아르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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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크리스티나 로런'은 '크리스티나 홉스'와 '로런 빌링스' 두명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필명이다. 이 책, 《노는 남자》를 읽기 전까지 이 작가가 당연히 여자 두명으로 구성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가 이 책을 읽으면서 '한 명은 남자인가보구나!' 했는데, 지금 구글을 검색해보니 여자 두 명이었다. 그래서 정말 많이 놀랐다. 그렇다면 이 여자 두 명의 생각이 들어갔을텐데, 그러니까, 음, 성적 취향이 나랑 너무 달라서! 다른 거야 물론 너무나 당연하고 또 너무나 개인적이지만, 어.. 그러니까,



(여러분 이 리뷰는 19금 입니다. 이 책을 사려고 해도 본인인증 해야 해요.)



이 책의 여자 주인공인 '한나'는, 남자 주인공 '윌'만큼 본인의 '몸'에 정액이 뿌려지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자가 정액을 뿜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아해. 이게.. 음... 예, 섹스는 개인적인 것이니까요. 킁킁.



한나는 스물 네살의 대학원생이다. 기생충을 연구하는데 일이 너무 재미있고 흥미로워서 일에만 빠져 사느라 제대로된 연애도 섹스도 못해보고 친구도 별로 없다. 이에 한나의 친오빠는 한나에게 사람들 좀 만나고 살라며, 마침 뉴욕에 살고 있는 자신의 절친인 '윌'을 만나보라고 한다. 만나서 뭐 연애란 무엇인고 사교활동이란 무엇인지 블라블라 뭐 좀 배우라고... 이것 자체가 좀 말이 안돼. 여하튼 그래서 윌을 만나는데, 윌은 전형적인 로맨스 소설의 남주인공, 바로 그 모습이다. 탄탄한 근육, 큰 키, 좋은 매너, 한 쪽 입꼬리만 올리는 모습, 탄탄한 직장, 많은 섹스 파트너, 그보다 더 많은 섹스 경험, 그래서 뛰어난 섹스 스킬, 그러나 한 번도 진정 사랑을 해보지 못한 서른 한살의 남..


책의 뒷표지에서는 그걸 '연애 고수'와 '연애 하수'의 만남이라고 표현했던데, 으앗, 너무 식상하고 뻔하지 않은가. 그렇게 연애 고수 윌이 연애 하수 한나를 만나는데, 그들이 서로의 매력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거다. 한나는 '이 사람은 나 말고도 여자가 많으니까' 라며 한 발 뒤로 물러서고, 윌은 '얘가 경험을 위해 나를 만나는 거라고 하니까' 하며 한 발 물러서고.. 그러나 서로에게 정신없이 빠져들고 한 번도 이런 섹스는 없었는데.. 이렇게 되어버리는?


한나는 성적 욕망을 아주 강하게 느껴서 윌과 섹스를 나누는 친구 사이가 된다(이게 가능한가요, 섹스하는 친구사이?). 그런데 그 섹스가 지금껏 했던 어떤 섹스보다 좋았다. 뭐, 한나야 그간 별 경험이 없었으니 그렇다 쳐도, 윌은 경험이 너무 많았고 게다가 화요일에 만나는 섹스파트너, 금요일에 만나는 섹스파트너가 있는데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가 된다. 그렇게 연애 고수는 연애 하수에게 빠져 섹스 파트너들과의 만남을 번번이 취소하게 되고 그렇게 그들은 매일 아침 만나서 조깅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그 시간이 너무 즐겁고, 섹스는 우라지게 즐거워서, 서로가 서로의 소유가 되길 원한다는 뻔하디 뻔한 이야기. 아, 너무 뻔해서 '로맨스는 이렇게 뻔하게 쓸 수밖에 없나요?' 부르짖고 싶은데, 그러나, 뭐, 내 연애라고 특별했던가. 연애야말로 바깥에서 보면 다 고만고만하지 않던가. 연애야말로 안으로 들어가면 나름나름의 사정이 있지만, 바깥에서 보면 나도 뻔한 연애를 하는 1인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당신은 나랑 너무 달라서 끌려 혹은

당신은 나랑 너무 공통점이 많아.


그동안 숱한 사람을 만나왔지만 너같은 사람은 처음이야.


나에겐 상처가 있지만 너로 인해 극복했어.


너에게 빠져들지 않으려 했지만 이렇게 빠져들고 말았네.



뭐 기타등등. 우리가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는 전형적인 사랑 이야기들은 뭐, 그냥 우리가 하는 사랑이야기인 거잖아. 하늘 아래 새 것이 없고 하늘 아래 새로운 연애도 없나니. 너도 나도 다 뻔한 연애인 것을...


게다가 한나가 그렇게나 연애도 잘 못해봤고 섹스 경험도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을 홀리는 커다란 가슴을 갖고 있는 것까지 너무 뻔하다. 소설 속에서 윌은 한나의 가슴에 푹 빠져 보고 또 보고 계속 보고 어느틈에 보고 일부러 보고 그러는데, 그런데, 이거 너무 소설적인 거 아닌가. 정말 그렇게 대놓고 가슴 보고 사나, 남자들?



한나 와 윌은 서로 사랑하고 상대의 사랑도 확신하게 되지만, 로맨스 소설이 반드시 그러하듯, 둘 사이에 오해가 생긴다. 이 오해라는 건 사실 서로 탁 까놓고 말하고나면 다 풀리는 것들인데, 상대에게 묻지 않고 자기가 보고 들은것만이 진실인 것처럼 생각되어 상대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상대를 미워하거나 혹은 실망하게 만들었다면, 그것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방금전까지 그 눈빛은 내게 사랑을 말했는데' 라고 생각했다면, 그러면 상대에게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오늘 이러이러한 소식을 들었다(혹은 보았다), 그게 사실이냐, 그렇다면 니가 그렇게 말한(행동한) 이유는 무엇이냐.


이걸 물으면 상대가 자기의 사정을 얘기하겠지. 그러면 오해가 풀릴 수 있고 서로 힘들어하는 과정이 생기지 않을 수 있는데, 그런데 왜 그들은 그걸 안할까? 그러지말자. 상대를 사랑하고 또 상대가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한다면, 내 짐작으로 오해를 쌓아가지 말고 묻자. 묻고 듣자. 오케?



아무리 세상 로맨스가 다 뻔하다고 하지만, 나는 특히나 이런 로맨스는 좀 별로다. 남자가 나이가 더 많으면서 동시에 더 가진 자원도 많고 더 섹스와 연애 경험이 많아서 당연한 듯 연애 고수의 포지션인 거. 여자는 연애 하수라 어떻게 행동할지도 모르고 고수니까 나 말고도 다른 여자들 많겠지 하는 거. 이런 거 딱 진짜 내가 질색팔색 하는 스토리야. 틈틈이 조깅으로 엉덩이 라인이 달라졌다고 하는 것도 너무 싫고 ㅋㅋ 운전하는 중에 오럴섹스 하는 것도 개싫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진짜 딱 싫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운전하는데 오럴을 왜해... 아이고 두야.. 머리가 다 아프다..



그런 이 소설에 내가 별을 세 개나 준 까닭은 하하하하. 이 책은 내 기대에 충분히 부합할만큼 야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첫 섹스를 하면서부터 그 다음 섹스까지 또 그 다음 섹스까지, 야한 장면에 충실했다. 로맨스 소설이라면 당연히 제대로 된 남자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빻은 남자는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없지. 아니나다를까, 윌은 섹스에 있어서만큼은 충분히 여자를 생각해주는 남자여서, 여자의 욕망에 아주 제대로 부응하는데, 이 과정에서 계속 야해서 너무 좋은 거다. (네?) 그리고 이들이 한 번 섹스하고 나서부터는 계속 섹스하고 자주 섹스해서 계속 끝까지 야해. 이 책은 당연히 본인 인증을 거쳐 사야만 하는 것이야. 그러니까 얼마나 야하냐면, ㅋㄷㅋㄷ, 애인과의 통화중에 읽어주고 싶을만큼 야하다.


처음에 내용이 너무 뻔하고 내가 싫어하는 뻔함이어서 몇 장 읽지도 않고 팔아버릴까 고민했다. 안읽고 팔까 다 읽고 팔까.. 그런데 야한 부분 나오고나서 부터는 책장에 꽂아둬야 겠다고 생각을 바꿨다. 나는 그간 폰섹스에 아무런 관심도 없고 앞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지만, 이 책의 야한 부분을 전화기 너머로 읽어주면, 폰섹스가 가능해질 것 같았다. 자, 들어봐, 하고 읽어주는 거지. 그 생각을 하자 너무 신나는거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물론 이들의 섹스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도를 넘어서, 아니 그것은 도를 넘었다기 보다는 취향의 문제이지만, 아니 이들은 어쩌면 그렇게 오럴섹스를 좋아하지? (절레절레), 위에도 언급했지만, 나는 내 몸에 정액이 뿌려지는 걸, 상황에 따라, '견딜 수는 잇겠지만', 그걸 좋아할 순 없을 것 같다. 사랑은 허용 범위를 넓혀주기 때문에 내가 받아들이거나 견디는 것 까지는 할 수 있다. 정액 바깥으로 쏟아지면 너무 더럽지만.. '괜찮아, 당신이라면' 까지는 내가 할 수 있단 말이지. 그런데 그걸 좋아한다고? 아아, 역시 이것은 개인의 취향인가.


난..난...난...안되겠어. 안돼.

아니, 내가 카섹스까지는 그래, 알겠다고, 그런데 왜 운전중에 오럴을 하는거야? 하아- 스트레스... 갓길에 세워두고 하라고 ㅠㅠ



아무튼 여자와 남자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뜨거운 연인이 되었다. 연애는 역시 뜨거워야 제맛이지.

그나저나 크리스티나 로런 읽는 사람은 정말이지, 대한민국에 나 밖에 없는것 같다.

이 사람 야한 거 잘써.. 내가 좋아하는, '스토리 있는 야한' 거 잘 써. 남자들도 포르노 보는 대신 로맨스 소설을 읽는 게 그들의 앞으로의 삶에 훨씬 나을텐데, 말은 지겹게 안듣겠지. 로맨스 소설이야말로 여자보다 남자가 읽어야 하는 것인데.. 쩝.


좀 전에 알라딘에 크리스티나 로런 검색했더니, 이것 말고도 소설 몇 개 더 있다. 오케이, 내가 잘 알겠다고 한다.




˝공원으로 달리기하러 가는데 혹시 나올 생각 있어?˝
˝조깅을 한다고요? 굳이 달릴 필요가 없는데도 달린다는 말이에요?˝
˝그래.˝ 그는 아예 노골적으로 웃고 있었다. ˝운동 삼아 달리는 거야.˝- P20

그녀는 눈을 떴고 내 입술로 시선을 향했고 잠깐 동안 차분해졌다. 내 목에 팔을 두르고 속삭였다. ˝안녕.˝
그 애정 가득한 눈동자를 보는 순간 나는 내 생애 최초로 벌어진 일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사랑에 빠지고 있었다.- P223

나는 물어볼 필요도 없이 콘돔이 있는 탁자로 손을 뻗었다. 말없이 포장을 뜯어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기대감에 들떠 이미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아, 전희가 필요하지.˝ 나는 목으로 입을 가져가면서 말했다. 그녀는 내 성기에 콘돔을 끼우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선 일요일 아침부터 계속 전희가 이어졌는걸요.˝ 그녀가 속삭였다. ˝준비 운동은 필요없어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P262

그는 내 청소년기 섹스 판타지의 주인공이었다. 그렇다고 10대 시절을 그에게 푹 빠져서 보낸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실제로 가질 수는 없지만 그를 갈망할 수는 있었기에 오히려 간단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그를 만지고 그가 나를 만질 수 있고 그가 좀 더 깊은 관계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진심일 리가 없기에 … 일이 복잡해졌다.-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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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7-03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에 ˝남자를 알아야 어른이 되는 거야˝라고 써 있네요.
어쩐지. 그래서 syo가 어른이 못 되고......

다락방 2019-07-03 17:38   좋아요 0 | URL
표지에 써있는 말씀하신 그 문구는 진짜 빻은 문구 같아요. 이 소설의 내용으로 저 문구가 나오지 않아도 되는데 부러 저렇게 만드는 것 같아요. 뭘 남자를 알아야 어른이 돼, 남자들이 어른이 안되고 있는데... 쯧쯧..

이상, 갑분흥분해버린 다락방이었습니다.. 이만 총총.

단발머리 2019-07-03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충분히 야해서 팔리지 않고, 다락방님 책장에 꽂히게 된 걸, 축하드립니다.
크리스티나 로런님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7-04 07:59   좋아요 0 | URL
미래의 폰섹스를 위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며칠전에 친구에게 노섹스 선언을 해버렸다능...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19-07-04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섹스는 우라지게 즐거워서 <-에서 ㅎ흐흣 웃다가.........
폰섹스를 위해 이 책을 꽂아뒀다는 말에서는 정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다가 갓길에 세워두고 하라는 말에서 아놔 정말 또 혼자 모니터 보면서 광대승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진짜 갓길에서 하라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7-04 11:31   좋아요 0 | URL
제가 태어난 이유가 뭐겠습니까?
바로 잠자냥 님 광대 승천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감은빛 2019-07-06 0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래의 폰섹스를 위해 책을 쟁여두신 다락방님.
그 철저한 준비성을 저도 본받고 싶군요. ㅎㅎㅎㅎ

이 글 제목만 봤을 때는 무슨 뜻이지? 싶었는데,
다 읽고 나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저도 미래의 폰섹스를 위해 이 책을 쟁여놓고 싶어졌습니다.

다락방 2019-07-07 19:17   좋아요 0 | URL
제가 원래 미래에 대한 계획으로 아주 철저한 사람입니다. 언제나 준비하는 자세로 미래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ㅎㅎㅎㅎㅎ
 
동화 쓰는 법 - 이야기의 스텝을 제대로 밟기 위하여 땅콩문고
이현 지음 / 유유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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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독자는 단지 독자의 수신에만 도움이 되는 게 아니다. 작가의 발신, 즉 동화의 기준점이 되어 준다. 작품의 성패와 수준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p.32)


그 한 사람의 어린이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 그 한 사람의 내포독자는 작품의 기준점이 되어 줄 것이다. 작가가 길을 잃지 않도록 북극성처럼 한자리에서 반짝반짝. (p.33)




내포독자가 명확할수록 이야기는 구체화된다. 생명력을 얻는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이야기가 된다. 단 한사람을 위한 이야기니, 단 하나밖에 없는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 (p.36)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나는 글을 쓸 때면 단 한 명을 생각하고 썼다. 그 사람이 읽을 것이다, 그 사람이 읽어줄 것이다, 그 사람이 읽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썼다.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글을 쓰는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언제나 머릿속에 누군가를 생각하고 글을 썼다. 내 생각은 이래, 내 느낌은 이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언제부터 그런식으로 글쓰기가 시작된건지 모르겠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해오고 있다. 그리고 내가 이미 해오던 그 방법이 글쓰기에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글쓰기를 알려주는 책들로부터 알게 됐다. 어? 그렇게 쓰라고 하네? 나는 이미 그러고 있었는데? 역시.. 스스로 깨우치는 천재적인 끼가 보인다... 라고 나는 나를 평가했더랬다.



그러나 소설, 이야기를 쓰는 일에까지 그것을 적용할 생각을 못했다. 언제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고, 그것을 언젠가는 소설로 쓰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언젠가는'은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언젠가는'으로 남아있다.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부지런히 소설을 읽고 읽고 또 읽었는데, 그러다보면 작가들에게 감탄하곤 했다. 이 어려운 걸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해냈을까. 어떻게 캐릭터를 만들고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하는걸까. 어쩌면 내가 할 일은 그저 읽는 것에만 있는지도 몰라, 쓰는 건 다른 사람이 해야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릴적부터 소설 쓰고 싶다는 생각을 자꾸만 '언젠가는'으로 미뤄왔다.



'이현'의 [동화 쓰는 법]은, 제목 그대로 동화를 쓰는 법에 대해 알려주는 책이다. 그런데 와- 이 책이 처음부터 참 좋다. 꼭 동화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야기를 쓰고 싶은 사람에게도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을 몇 장 읽지도 않고서부터 나는 이야기를 써내는 것의 가장 중심축을 알게 됐다. 내가 쓰는 글-소설이 아닌-, 일기 같은 글에서 항상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썼다면, 소설에도 역시 그러하면 된다는 것. 작가는 그렇게 글 쓰는 이가 염두에 두는 사람을 '내포독자'란 용어로 표현한다. 아, 왜 내가 그걸 몰랐지? 왜 소설에도 그걸 적용하면 된다는 것을 몰랐지? 그래, 내포독자! 소설에서도 역시 나는 단 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쓰면 되는 거잖아! 그렇다면 그 사람만 생각하며 방향을 잃지 않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나는 이 책을 얼마 읽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야기를 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그 자신감은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해진다. 이 책의 작가인 이현은 어떻게 하면 동화를 잘 구상하고 진행해나가며 마무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친절하게 잘 알려준다. 그 과정들 속에서 어떤 책들이 좋은 혹은 나쁜 예시가 될 수 있는지 다른 많은 책들을 언급하며 설명하는 통에, 중간중간 북플에 들어가 책들을 검색하고 '읽고싶어요'도 체크해야 했다. 




내포독자로 시작해서 주인공과 인물 그리고 사건과 플롯, 설정과 절정과 결말에 이르기까지 이야기 한 편을 시작하고 끝내며 또 책으로 나오는 과정까지를 순서대로 짚어주는데, 매 꼭지마다 도움이 된다. 어떤 부분들은 이미 알고 있었고(책을 많이 읽어야 글을 잘 쓸 수 있다는 것), 어떤 부분들은 내가 미처 모르고 있었다(절정에서는 잠시 멈춰줘야 한다는 것). 교양을 쌓자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한 책인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책이다. 글쓰기에 관련된 책을 읽고 실질적으로 '으악 크게 도움이 된다'라고 생각한 적은 별로 없었는데, 이 책은 다르다. 동화 쓰는 법 이라고 하지만, 비단 동화뿐만이 아닌, 모든 이야기에 적용할 수 있는 아주 유용한 쓰기의 방법들이 실려있다. 



이야기를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책을 읽어보면 좋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도움이 될테니.

게다가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동화)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한 과정들은 반짝반짞 빛난다. 으스대며 천부적인 재능이라 잘난척 하고 싶지만, 사실은 자기가 많이 노력했다는 말로 마무리를 하는데, 나는 스스로 노력을 하고 또 노력 했다는 걸 인정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좋은 것이다.

왜, 학창 시절에 그런 아이들이 수두룩하지 않은가. '어제 공부 하나도 안했어' 라고 말해놓고 100점 받는 아이들... 너도 놀고 나도 놀았는데 너는 백점이고 나는 칠십오점이면 나는 돌대가리 너는 천재냐. 좀 솔직해지자 우리...


4개국어를 하는 친구에게 언젠가 '너는 어쩌면 그렇게 외국어를 잘해?'물었을 때, 그 친구는 내게 '나는 미친듯이 외웠어, 지금도 사전을 찾아봐' 라고 한 대답이 너무 인상깊었다. 그런데 이현도 이 책에서 얘기한다. 



나는 매번 그렇게 동화를 써 왔다. 단 한 번도 쉬웠던 적이 없다. 헤매지 않은 적도, 힘들지 않은 적도 없다. (p,158)



단 한 번도 동화를 쉽게 써본 적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결국은 동화 쓰는 법에 대한 책까지 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내가 읽어본 글쓰기 책 중 가장 도움이 되는 책이다. 그러나 앞으로 이야기를 쓰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내 몫이다. 이 책은 제 역할을 다 충분히 해냈다.



내 몫만이 남아있어, 내 몫만이...







실제로 누가 동화를 읽든 냄비 받침으로 쓰든 동화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동화는 어린이 독자를 위한 서사 문학이다. 애초부터 ‘어린이‘를 존재해 왔다.
동화는 어린이를 위한, 그러니까 ‘수신‘의 장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다. ‘너에게 전하는‘ 이야기다.
소설은 동화와 다르다. 소설은 수신이 아닌 발신의 장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물론 소설가도 독자를 의식하겠지만 그건 현상일 뿐, 소설의 본질은 전달이 아닌 ‘표현‘이다.-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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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9-06-29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이 쓰실 동화를 기대해봅니다! ㅎㅎ

다락방 2019-06-30 17:26   좋아요 0 | URL
저는 동화를 쓰지는 않을거고요, 쓰게 된다면 소설을 쓰고 싶어요. 쓰게 된다면 말입니다. 하핫.
 
여름
이디스 워턴 지음, 김욱동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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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여름>이라는 책을 써보면 어떨까 싶을 정도로 나는 여름을 좋아한다. 어릴 때는 막연하게 내가 태어난 계절이어서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이날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여름이 아닌 다른 계절을 여름보다 더 좋아한 적이 없다. 나는 땀이 많이 나도 여름이 좋다. 낮이 긴 여름이 좋다. 아침에도 환한 여름이 좋고 퇴근 무렵에도 역시 환한 여름이 좋다. 뜨겁고 밝은 여름이 좋다.


여름이 좋아서일까, 여름에 대해 얘기하는 소설도 좋았다. '에쿠니 가오리'는 자신의 소설에서 여름에 떠난 남자를 그리워하기도 했고, 나는 그래서 그 소설을 읽으며 좋아했더랬다. 얼마전에는 사전정보가 전혀 없이 '여름'이 들어간다는 이유만으로 도서관에서 <카티야의 여름>을 빌려와 읽었다. 당연히 <그해, 여름 손님>도 사두었는데, 영화를 보고는 영화(콜 미 바이 유어 네임)가 싫어서 책을 안 읽고 있다. 종이책이면 팔아버리기라도 하겠는데 전자책이라 어쩔 수가 없네. 낭비되는 디지털.. 그렇다. 여름이 들어간다고 다 좋지는 않아서, 김봉곤의 <여름, 스피드>도 별로였지.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도 내가 너무 이해할 수 없는(이해하기 싫은) 남자들의 정서가 꽉꽉 눌러담긴 책이었고. '윌리엄 트레버'의 <여름의 끝>도 읽었는데, 그러고보니 사람들이 '여름'에 대해 얘기할 때면, 뜨겁게 사랑하다 떠나버리는 사람들에 대해 얘기하는 것 같다. 인생에 다시 못올 강렬한 사랑은 다들 여름에 온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 <우부메의 여름>은 강렬한 사랑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지만.



이런 내가 '이디스 워튼'의 《여름》을 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디스 워튼인데, 무려, 여름이라니. 나는 입원한 병실에서 가장 먼저 여름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읽기 시작한다.




'채리티'는 아직 스무살이 채 되지 않았다. 마을의 명망있는 '로열 변호사'는 채리티가 어릴 적에 산으로부터 그녀를 데려와 같이 살았다. 후견인 정도가 될 수 있을텐데, 이 소설 속에서 '산'이라 함은 가난과 위험, 지저분함과 수치스러움의 상징이었다. 채리티가 그런 곳에서 살지 않도록 마을로 데려와 키워준 사람이니 로열 변호사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사람들은 채리티에게 그렇게 말했다.


로열 변호사의 아내가 죽고, 로열 변호사는 어느날 채리티가 혼자 잠든 방의 문을 열려고 시도한다. 채리티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그녀의 나이 열일곱이었고, 그녀는 로열 변호사가 술을 더 꺼내 마시려고 한다던가 아내가 있다고 착각한 것인줄로만 알았지. 그러나 며칠 후 로열 변호사가 그녀에게 청혼을 하자, 그제야 그 날 밤의 의미를 알게 되는 거다.


교육을 많이 받지 않았던 채리티이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혼자 서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녀는 아버지 같은 로열 변호사가, 노인의 모습을 한 그가 자신에게 청혼하자, 자신을 데려다 키워준 사람이지만, 이렇게 얘기한다.



"저하고 결혼하고 싶다고요? 저하고요?" 그녀는 경멸하는 웃음을 지으며 내뱉었다. "전날 밤 그걸 부탁하려고 찾아온 거였군요? 어떻게 되신 거 아니에요? 거울을 들여다본 지 얼마나 되었나요?" 그녀는 오만하게 자신의 젊음과 힘을 의식하며 몸을 꼿꼿이 폈다. "가정부를 두는 것보단 저하고 결혼하는 게 돈이 덜 든다고 생각한 모양이지요. 이글 군에서 아저씨가 가장 인색한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하지만 아저씨는 두 번씩이나 그런 식으로 공짜 살림을 맡길 순 없을 거예요."

로열 씨는 그녀가 말하는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잿빛을 띠었고, 검은 눈썹은 마치 그녀가 내뿜는 경멸의 불길 때문에 눈이 먼 듯 떨렸다. (p.39)



나는 채리티가 그 앞에서 바로 경멸을 드러낸 것은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로열 변호사가 자신과의 결혼을 원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른다고 생각한다. 너무 순진한거지.. 로열 변호사가 딸뻘되는 채리티에게 결혼하자고 한게 과연 공짜 살림을 맡기기 위함이었을까. 에휴.. 그만하자.



채리티는 돈을 벌어 이 마을을 떠나기 위해서 마을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곳에 이 마을의 청년이 아닌, 낯선 청년 '하니'가 찾아온다. 책도 많이 읽었고 공부도 많이 하고 집안도 좋은 청년. 채리티는 이 여름 이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 순간순간 채리티는 자신이 하니에게 부족한 상대라고 생각하지만(그와 책으로 상대할만큼 많은 책을 읽지도 않았다), 그에게 푹 빠져버린다. 그를 사랑한다. 그와의 사랑을 로열 변호사가 질투하며 바라보지만, 그녀는 그 사랑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간혹 마을 처녀들이 결혼 전의 불장난으로 임신을 하고 낙태를 하게 되면 몹쓸 여자가 되어버린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설마.... 숲 속 외진 곳, 아무도 모르는 곳이 그들의 비밀장소. 채리티와 하니는 그곳에서 늘 만나 사랑을 속삭이고 열정을 불태운다. 채리티와 하니가 둘이 다른 마을에 놀러갔다가 로열 변호사에게 들켜 채리티는 '갈보'라는 욕을 들었었는데, 이 외진 곳 역시 로열 변호사에게 들키고 만다. 그러나 로열 변호사는 알고 있었다. 하니가 채리티랑 이렇게 열정을 불태운다고 해서 그녀와 끝까지 함께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여기가 자네 집인가?" 그가 물었다.

하니가 웃었다. "글쎄요 …… 누구 집도 아니죠. 어쩌다 스케치하러 이곳에 옵니다."

"미스 로열의 방문도 받고 말이지?"

"고맙게도 그녀가 제게 ……"

"이곳이 바로 결혼해서 그녀를 데리고 올 집인가?"

숨 막힐 정도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채리티는 분노로 부르르 몸을 떨면서 갑자기 앞으로 다가갔지만 너무 풀이 죽어 말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노인이 뚫어지게 쳐다보자 하니는 두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곧바로 두 눈을 다시 쳐들고 로열 씨를 단호하게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미스 로열은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그녀가 마치 어린아이인 것처럼 말하는 건 좀 우스꽝스럽지 않습니까? 어느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그녀 마음대로 오고 가고 할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덧붙였다. "그녀가 제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다면 뭐든지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로열 씨는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렇다면, 그가 언제 결혼해줄지 한번 물어보거라 ……" 또다시 침묵이 흘렀고, 이번에는 로열 씨가 웃었다- 삐꺽거리는 소리가 나는 단속적인 웃음 말이다. "그렇게 못하잖아!" 그는 갑자기 감정을 폭발하며 소리를 질렀다. 채리티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위협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애처롭게 간곡히 타이르기 위해서 오른팔을 쳐들었다.

"넌 그렇게 못하잖니. 넌 그걸 잘 알고 있지 …… 그리고 왜 못하는지도 말이야." 로열 씨는 다시 젊은이를 향해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넨 왜 저애한테 결혼하자고 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어. 왜 그럴 생각이 없는지 말이지. 그건 자네가 그렇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거든. 어떤 다른 남자도 마찬가지겠지만 말이야." (p.227-228)



그렇다. 채리티는 알고 있었다. 이 여름, 이 청년과 뜨겁게 사랑하지만, 이 청년이 자신의 미래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이 청년은 다른 집안 좋은 여자와 약혼한 사이라는 것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어 알게되었다. 이 외진 숲속 집으로 자신을 만나기 위해 달려오는 남자지만, 자신에게 결혼하자는 말을 하지는 않는 남자다. 그녀는 그의 달콤한 속삭임을 듣고 그의 몸에 자신의 몸을 던지기는 하지만, 혹여라도 마을에 도는 얘기처럼 자기가 임신을 하고 낙태를 하고 몸을 파는 여자로 되는 건 아닐지 두렵고 무섭다.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미래는 그와 결혼하는 그녀가 아니었다.



채리티는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하니에게 주었다-그러나 삶이 그에게 줄 수 있는 다른 선물과 비교한다면 도대체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그녀는 이런 일을 겪은 자신과 같은 다른 젊은 여자들의 경우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던 것을 모두 주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그것 가지고는 짧은 순간밖에 살 수 없었던 것이다 …… (p.217)




여름은 지났고 그는 돌아갔다. 자신의 약혼 문제를 정리하고 돌아오겠노라 했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하니도 알고 채리티도 알고 로열 변호사도 알고 나도 안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을 했다. 낙태를 하러 갔지만 낙태를 할만한 충분한 돈도 없다.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이나 경멸했던, 그러나 자신이 태어났던 산으로 가고자 한다. 내가 갈 곳은 거기 뿐이구나, 거기 뿐이야. 더럽고 수치스럽고 가난한 그곳. 그 곳에 가기는 싫었는데, 나는 그곳으로 가야만 하는 거구나.



그렇게 산으로 찾아든 그녀에게 로열 변호사가 찾아온다. 자신보다 나이가 훌쩍 많은 아버지같은 로열 변호사는 그녀에게 다시 결혼을 청하고, 이 인자하고 책임감있고 위엄있는 변호사와 그녀는 결혼한다. 결혼한 후, 하니에게 편지를 보낸다.




저는 로열 씨와 결혼했습니다. 언제나 당신을 기억할 겁니다.(p.316)



어차피 하니는 채리티에게 오지 않았을 것이다. 채리티 역시 그걸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녀가 로열 변호사와 결혼한 건,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니까. 하니가 돌아올거라 확신했다면 그녀는 로열 변호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이대로 아이를 낳는다면, 자신이 산에서 버려졌던 것처럼, 산에서 아이를 혼자 키우는 여자가 되었을 것이고, 그녀가 낙태를 했다면, 기존에 낙태를 하고 몸을 파는 여자가 되었던 마을 다른 여자처럼 될 것이다. 그녀가 낙태 하기 위해 찾아갔던 의사(?)는 나중에 그 사실을 빌미로 그녀를 협박한다. 그 여름을 뜨겁게 보낸 건 하니와 채리티인데, 비참한 결혼을 하고 낙태로 협박을 당하고 절망에 휩싸이게 된 건 채리티 혼자다. 하니는 약혼을 정리해볼게, 라고 말하고 떠났지만, 과연 그가 그 약혼을 정리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최선을 다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말이 왜이러나 싶을만큼 막판에 채리티는 로열 변호사를 굉장히 훌륭한 어른인듯, 그러니까 기존에 자기가 잘못봤던 것처럼 그를 올려친다. 옮긴이는 그걸 채리티의 성장으로 보고 로열 변호사의 성장으로 보지만, 나는 그것을 성장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채리티의 성장이 아니라 체념이다. 체념. 자신의 젊은 육체를 한껏 뜨겁게 하고 떠나버린 청년, 신분의 차이로 그의 옆에 있을 수 없게 되자 그녀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던 남자. 그런 남자를 계속해서 싫은 남자로 보기 보다는, 내가 잘못 본걸거라는 자기 최면. 어떻게 자기에게 갈보라고 욕한 남자를 훌륭한 남자라고 좋은 아저씨라고 다시 생각하게 될 수 있나.




나는 이래서 여자 소설가의 번역을 여자 번역가가 해주기를 바란다. 이 옮긴이가 어처구니 없는 건, 뒤의 <작품 해설>에서도 드러나는데, 자, 우리 다같이 빡치며 읽어보자.



편지 끄트머리에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는 채리티'라고 적는 것을 보면 하니에 대한 애정에는 변함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하니가 자신보다는 애너벨을 먼저 알고 있었고, 또한 결혼하기로 약속했다면 채리티는 그를 기꺼이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다. 의무감에서 자신과 결혼하기보다는 약혼자와 결혼하는 쪽이 '옳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채리티가 이 편지에서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말을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 참으로 놀랍다. 임신한 아이를 볼모로 떠나간 애인을 다시 붙잡으려고 애쓰는 여성을 우리는 현실에서나 소설에서나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작품해설, p.339)




하아-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어.

지금 뭐하는 거야. 저게 말이야 방구야. 두 눈을 비비고 다시 읽어봐도 막말이다. 미쳤나.. 어떻게 '임신한 아이를 볼모로 떠나간 애인을 다시 붙잡으려고 애쓰는 여성' 이라고 여기에 써놓나. 어떻게 이디스 워튼 소설에 .. 지금 무슨 말씀 하시는 거에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임신한 아이를 볼모로? 채리티가 하니 붙잡으려고 억지로 임신했냐? 이 남자랑 결혼해서 팔자 고쳐야지 싶어서 부러 임신한거야? 임신은 혼자 하냐? 임신하고 싶다고 채리티가 울고 매달렸나? 그 숲속으로 매일 찾아온 게 하니인데? 지가 좋다고 그 여름에 와서 뜨겁게 안아놓고 떠난 남자인데, 뭐라고? 임신한 아이를 볼모로.. 어쩌고 어째? 하아- 채리티는 마지막에 그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썼지만, 나는 그 사랑안에 이미 하니가 어떤 남자인지 알고 있다는 채리티의 마음이 담겨있다 본다. 그리고 채리티는 알고 있다. 하니가 싸튀충인 것을. 아니, 생각을 좀 해보세요. 임신한 아이를 볼모로 남자를 협박하는 여자들이 많은지 싸튀충이 많은지. 그리고 임신한 아이를 볼모.. 라니. 임신이 여자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좀 하자. 아니 어떻게 저런 말을 쓰지? 어떻게 저런 말을 이디스 워튼의 소설에 해설이라고 떡하니 써놓을 수가 있지? 노어이... 어이가 노합니다.. 어이 이즈 존재 무...


뜨거운 여름을 안겨줬지만 서늘한 소설이잖아, 결말에 대해 너무 아프다고 생각했는데, 옮긴이의 작품해설이 소설을 망쳐버렸다. 옮긴이의 작품해설이 이디스 워튼의 여름을 망쳐버렸어. 한심한 남자가 둘씩이나 나오는 소설에서 '오, 한심한 여자가 아니라니 놀랍잖아?' 하는 해설이라니...



이디스 워튼의 여름이 아쉽다. 아주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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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6-25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대해 할 말이 많다고 하셔서 무슨 이야기일까 궁금했는데, 김욱동 해설 이야기였군요. 전 이 책 읽을 때 그렇게까지 불쾌했던 기억이 없었는데 ㅋㅋㅋ 다행히 김욱동의 저 해설을 안 읽어서 그랬었나봐요. <여름>보다는 <겨울>이 저는 더 좋았는데, 안타깝게도 그 책도 김욱동이 번역했어요. ㅎㅎㅎ 이디스 워튼 국내 번역작은 그래도 여성 번역가들이 꽤 옮긴 것 같은데, 문학동네 <여름> <겨울>은 왜 하필 ㅋㅋㅋㅋ <겨울>은 <이선 프롬>으로 문예출판사에서도 나와 있으니 (안 읽어보셨다면) 한번 읽어보세요. 특히 겨울에 읽으면 더 좋을 거예요....

잠자냥 2019-06-25 09:56   좋아요 0 | URL
이 댓글 쓰고 나서 문예출판사 <이선 프롬> 찾아보니 다락방 님 글이 여럿 달려 있네요. ㅎㅎ 오래전에 쓰신 글이라 지금 잘 읽어봤습니다...!

다락방 2019-06-25 10:05   좋아요 0 | URL
저 김욱동의 해설 읽다가 너무 빡쳐서 중도에 그만뒀어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지 원... ‘우왕 채리티 개념있어, 애있다고 남자 발목 안붙잡아~‘ 이러고 있잖아요? 너무 싫음 ㅋㅋㅋ 어떻게 이디스 워튼 책에 저런 해설을 써다 붙였는지 원.

안그래도 겨울도 읽어봐야지 했거든요. 또! 김욱동이더라고요. 저 진심 문동에 다른 번역가로 개정판 내달라고 이메일 보낼까.. 생각도 했어요. 이선프롬 읽은지 오래되어서 겨울 로 다시 읽어볼까 했거든요. 그러면 옛날과 다른 감상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아.. 진짜 남자 번역가가 여자 소설 번역하면 뜻을 제대로 파악 못하는 것 같아요. 전 너무 딥빡이 옵니다.. 하아-

syo 2019-06-25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김욱동 검색 때려봄.... 주로 민음사가 밥줄이군요. 저도 몇 개나 읽었구요...

다락방 2019-06-25 15:41   좋아요 0 | URL
이게 2009년의 책인데.. 저때는 저런 해설을 썼어도 지금은 많이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하렵니다. 많이 달라지지 않으면 퇴보하는 거잖아요. 아직까지 저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건, 설마 아니겠죠... 책도 읽고 번역도 하시는 분이.... 저는 너무나 충격적인 해설을 본 것입니다.... 하아-

뒷북소녀 2019-07-07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겨울의 끝>만 알았는데 <여름>도 있다니. 어쨌든 이 책 읽어보고 싶어요. 이디스 워튼 때문에요.

다락방 2019-07-07 21:01   좋아요 0 | URL
네, 이디스 워튼이라 저도 읽었습니다. :)
 
아무튼, 요가 - 흐름에 몸을 맡기며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는 것 아무튼 시리즈 21
박상아 지음 / 위고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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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전 요가를 처음 시작하면서 그것이 단순 스트레칭이 아니라는 사실에 놀라고, 내 몸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뻣뻣함에 놀랐었다. 처음한 프로그램은 '빈야사' 였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에 근육통이 올 수 있다는 걸, 살면서 처음 경험했다. 요가가 이렇게나 힘든 운동이었다니, 팔과 다리와 배가 모두 운동을 하면서 소리지르는 그런 운동이라니. 맙소사.


다음날의 근육통은 그러나 비크람을 맞이하고 별 게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비크람은 핫요가인데 수련실의 온도와 습도를 높여놓고 26가지의 정해진 시퀀스에 따라 움직이는 요가를 말한다. 온도와 슾도가 높으니만큼 지치기도 쉽고 초보자는 속이 울렁거릴 수도 있다. 선생님은 호흡에 대해 중요하다 말씀하시고, 혹여라도 어지러우면 언제든 쉬어가라 하셨다. 나는 요가에서 호흡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완전 초보였고, 억지로 억지로 시키는 동작들을 하기 위해 애를 썼는데, 수업을 마친 후의 나는 바로 기절 직전이었고, 내 몸에 손을 댔던 선생님은 몸이 너무나 뜨겁다며 놀라셨다. 게다가 얼굴도 시뻘개졌었어. 나는 이것이 단순히 요가 동작을 따라하는 데서 오는 힘듦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아, 다음날인 토요일,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를 못했다. 점심무렵까지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지 못했어. 이건 근육을 쓰는 데서 오는 근육통의 수준이 아니었다. 답답하고 불편했다. 몸을 꼼짝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간 운동부족이어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건가 했는데, 다음 비크람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내게 호흡하라고 옆에서 말씀해 주셨다. 숨쉬라고. 그렇게나 얼굴이 빨개지고 온몸이 뜨거워지는 건 내가 숨을 참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동작이 어려우면 따라하기 위해 나도 몰래 숨을 참게 되는데, 선생님이 '숨 쉬세요!' 하면, '아, 내가 숨을 참고 있었구나' 깨닫게 된 것. 숨, 호흡, 그게 그렇게 중요해? 나는 의식적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고에 집중했다. 그래도 어느틈에 참게 되는 순간이 있었지만, 의식적으로 숨을 쉬어야한다고 계속 내가 내게 말했어. 덕분에 두번째 비크람은 첫번빼 보다 나았고, 세번째는 두번째 보다 나았다.




"재클린, 나는 수업을 하다가 15분쯤 지나면 속이 너무 안 좋아서 화장실에 뛰어가야 해. 왜 그런 걸까?"

"아, 내가 보니까 넌 숨을 안 쉬어. 숨을 쉬어, 상아!"

그 말을 듣자마자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1년 동안 얘길 안 해준 거야?' 어쨌든 그 때부터 숨 쉬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숨을 쉬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수련을 하니 그동안 내가 정말 숨을 제대로 안 쉬면서 요가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옆사람보다, 앞사람보다, 뒷사람보다 잘해 보이려고 힘든 자세에서 숨을 참으면서 자세를 억지로 만들다 보니 자꾸 숨을 멈추고, 안 그래도 핫요가라서 요가룸이 뜨거운데 숨을 멈추니 호흡이 곤란해져서 토하러 가는 상황이 자꾸 발생했던 것이다. (p.37-38)



이 책의 저자 역시 비크람 수업 시간에 숨을 쉬는 걸 잊어 토하러 가곤 했단다. 아아, 나의 비크람과 겹쳐져 내가 다 고통스러웠어. 내가 다음날 일어나지 못하고 끙끙 앓고 누웠던 것은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해 나쁜 기운이 바깥으로 나오지를 못하고 내 몸안에 고스란히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게 호흡을 잘하면 순환이 되서 나온다는데, 내가 그걸 못해서 내 안에서 그것들이 그대로 고여있었던 것. 그러니 몸이 아프고 불편하고 답답했던 거다.



아직 나는 요가의 호흡들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들숨과 날숨의 길이가 쉬이 같아지질 않는다. 그래도 계속해서 '호흡해야 한다'는 것만큼은 인지하고 있다. 여전히 놓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의식적으로 호흡, 호흡 하고 있어.


덕분에 비크람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요가가 되었다. 처음엔 끙끙 앓아 눕게 만들었던 요가가 비크람이었는데, 지금은 가장 좋아하는 요가 프로그램이 되어, 매달 나오는 시간표에 비크람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없으면 센터에 건의를 한다. 비크람을 좀 넣어주세요, 하고. 특히나 비크람은 음주 후 다음날에 하면 와- 세상 천국을 보여준다. 몸 안에 고여있던 술이 다음날 온 몸의 땀구멍을 통해 빠져나와, 내 몸은 깨끗해지고 깨끗해지고 깨끗해진다. 만세! 여러분, 어깨에서도 땀이 나는 거 알아요? 어깨와 윗팔에서도 땀이 나는 걸 비크람이 내게 알려줬다. 만세! 내 안의 노폐물이여, 나오너랏!




이 책의 저자는 패션업계에서 일하기 위해 뉴욕을 찾았다. 직장을 얻기 위해서는 영어 점수가 좋아야했는데, 토플 점수가 좀처럼 잘 나오질 않아, 그간 매일 했던 요가 자격증을 좀 따볼까 하는 마음으로 강사 자격증을 딴다. 그러나 언어는 여기에서도 문제라, 처음 시범 수업을 맡게 되었을 때 크게 당황해 예정보다 수업도 일찍 끝내고 그 수업은 실패로 끝난다. 사람들에게 내 말이 잘 전달되지 않는 것 같고 자신 역시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아, 그녀는 요가를 하면서도 공황장애를 앓게 된다. 힘들고 벅찬 가운데에서도 한 번 더 제대로 수업해보고 싶은 마음에 수업을 다시 하게 해달라고 얘기해보지만, 센터에서는 좀처럼 그녀에게 수업을 맡기지 않는다. 그녀의 첫 수업 실패는 너무 혹독했다. 매일 찾아가 센터의 일을 도우면서 어떻게든 기회를 따내보고자 하지만 뜻대로 되질 않는다. 그렇게 힘들면서도 그녀는 여러 프로그램의 강사 자격증을 다 따내게 되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자신이 토플 점수도 예전보다 훨씬 잘 나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이제 패션계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녀는 요가 강사를 자신의 직업으로 택한다.


그녀가 요가를 하는 것은 그저 요가만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다른 문화를 알고 익혀야 했고 다른 언어를 알고 익혀야 했다. 요가에서 되지 않는 동작이 있을 때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하고 넘어지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수련을 했고, 집에서 먼 곳에 있는 곳이라도 수련을 위해서라면 찾아갔다. 그러다보니 어느 틈에 그녀는 자신이 처음 설정한 목표대로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요가를 알려주는 전문적인 요가 강사가 되어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이 사람은 뭘 했어도 성공할 사람'이란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이 선택한 게 요가였지만, 요가가 아니었어도 이 정도의 노력이라면 성공했을 거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하는 말들을 녹음해 집에 와 반복해 적고 외우는 과정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되지 않는 동작들을 넘어져가며 배우는 그 시간들은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가. 먼 데까지 강연을 가는 그 시간들은 또 어떻고. 그녀는 요가를 위해 자신이 가진 시간과 에너지를 모두 쏟아붓는다. 그런 그녀가 목표했던 동작들을 해내고 또 목표했던 삶을 살아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아니, 이런 사람이 성공하지 않으면 누가 성공한단 말인가.



그녀가 낯선 언어들 틈에서 간신히 거울로 다른 사람들의 동작을 따라하며 요가를 시작할 때, 어떻게 이런 큰 스트레스를 견디는가 싶었다. 어떻게든 해보고자 선생님의 구령을 녹음하고 따라 풀어 쓰며 외울 때는, 나였으면 결코 이정도까지 할 마음을 먹지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공황장애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굳이 한걸음 더 나아가는 데에는 말해 뭐해, 나였으면 아마 진작에 포기했을 거다. 게다가 그녀는 더 나은 요가를 위해 채식을 선택한다. 숙련자 과정에서 만난 60대의 여성분이 채식을 한다는 말을 듣고 그녀 역시 채식을 선택하게 되는데, 그러자 그동안보다 더 동작이 깊어지게 된 것. 아아, 역시 내가 따를 수 없는 경지다. 그녀의 최선을 다하는 이 과정들을 보노라니, 그녀의 노력이 여기까지로 그녀를 이끌게 된 건 너무나 당연해 보였고, 그래서 결코 내게는 올 수 없는 일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항상 '2년이나 요가 했는데 여전히 요가를 못해' 라고 해왔던 내가 얼마나 오만한가를 깨달았다. 햇수로 2년이지만, 나는 과연 2년간 어떤 성과를 가질 수 있을만큼의 요가를 했던가? 일주일에 고작 2-3일 나갈 뿐이고, 그마저도 한시간 수업이 전부인데, 그것이 내 요가의 전부인데 내가 2년이나 했는데 여전히 못한다며 징징대는 것은 아아, 얼마나 오만한가. 작가가 오랜 시간 노력해 해온 동작들을 내가 이만큼의 시간과 노력으로 얻는다면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게 아닌가. 나는 노력하지 않았다. 나는 애쓰지 않았다. 그런 내가 요가를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2년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 2년을 온전히 요가에 투자한 것도 아니었어.




크리야(Kriya)란 우리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는 쿤달리니(Kundalini)라 불리는 척추 에너지를 깨우는 수련으로 이 에너지가 깨어나면 전에 없던 지혜와 통찰력, 그리고 창조성 등이 생긴다. (p.121)





결국 이 책의 작가는 쿤달리니를 경험한다. 몸이 떨리고난 후 삶에 있어 자신감이 생기고 두려움이 없어지며 아이디어가 샘솟기 시작한 것. 와. 너무 대단했지만, 내가 결코 이를 수 없는 경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생애 내가 요가를 잘하는 것은 안되겠구나, 나는 바라는 것 조차도 이 경지는 아니었어.




에세이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글쓴이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난다는 데 있다. 그말인즉슨, 에세이를 읽으면서 그 글을 쓴 사람에 대해 인간적인 호감이 생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에 대해 호감이나 매력이 생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와, 나는 이렇게 열심히 살지는 못할거야' 라는 생각이 들어 좀 거리감이 느껴졌달까. 그러나 그녀가 어디에서 무얼하든 성공할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에 이토록이나 시간과 노력을 들여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 성공은 따라올 수밖에 없어. 결국 그녀는 자신이 10년후의 목표로 잡았던 것을 더 짧은 시간내에 이뤄낸다. 그녀니까, 그렇게나 최선을 다해 요가에 집중한 그녀니까 가능했다.

또한 그녀는 더 성장했다. 자신만 보던 사람이 타인을 볼 수 있게 되었다면 적절한 표현일까. 요가를 받아들임으로써 더 성장하는 그녀가 이 책 안에 있었다. 어떤 사람은 굳이 실수나 실패 없이 깨닫게 되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반드시 실수나 실패 뒤에야 다음부터 이러지 말자, 하게 되는데, 작가는 후자였다. 그 과정에서 상처받거나 기분 나빠했을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러니 그러지 않고 미리부터 알았다면 좋았겠지만,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잘못을 알고 고치고자 했다는 것은 의미있다.



나는 지금 요가를 쉬고 있다. 병원에서 한 달간은 요가를 쉬는 게 좋을 것 같다해 그렇게 하고 있는데, 요가를 하지 않은 일주일을 보내고나니 너무 요가를 하고 싶어지는 거다. 마침 수업 때 선생님이 '락방씨는 등의 힘을 길러야 해요, 코브라 자세 집에서 연습하세요' 했던 게 떠올라 엊그제 밤에 코브라 자세를 취하는데, 앗, 수술한 부위가 땡기는 거다. 안돼, 아직 안되겠다. 조금 더 있다가 시도하자, 하고 이내 포기했는데,


어제 이 책을 읽으면서 당장 비크람 하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 이 책에는 비크람의 자세들이 소개되는데, 비크람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요가 프로그램이지만 여전히 힘든 동작들이 많은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나도 얼른 비크람 하고 싶다. 나는 강사가 될 수도 없겠지만, 쿤달리니? 와- 그건 감히 꿈도 못꾸겠지만, 그래도 하고 나서의 개운함을 느끼는 정도로 만족하며 건강하게 지내야지. 열심히 요가 하는 사람의 책을 읽고 느끼기엔 적합하지 않은 감상이지만,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지는 말아야지, 생각했다. 그녀가 열심히 해서 성공하는 걸 보는 건 대리만족의 기분도 느껴지지만, 사실 '어휴, 어떻게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지' 하며 내가 대신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너무 열심히 하는 걸 보는 것도 어떤 면에선 스트레스가 와. 나는 이렇게까지 열심히 할 자신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진 말아야지. 다만,



인생에서 요가를 놓지 말자, 는 생각은 하고 있다. 나는 어쩌면 평생 가야 다리 찢기가 안될 지도 모르고, 평생 가도 머리 서기는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계속계속 사지를 쭉쭉 힘주어 뻗는 일만큼은 멈추지 말아야지. 당장 명상도 제대로 못하지만, 더 잘하기 위해 이를 악물거나 하지는 말아야겠다.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하는 건, 이번 생애 요가에 있어서만큼은 난 아니야.. 내 몫이 아니다. 요가를 더 깊이 잘하기 위해 고기를 끊는 것까지는 와- 노노. 나는 그 길로 가지는 못하겠어.



나는 그저 즐겁게 사지를 뻗으며 살겠다. 쭉쭉.





요가에는 잘하고 못하고가 없다. 내가 나의 몸과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또는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도모하기 위해 하는데 왜 잘하고 못하고를 남이 평가하려 드는가? 이것은 마치 내가 건강을 위해 또는 정신수양을 위해 매일 새벽 약수터에 가는데 사람들이 내가 약수터에 잘 가고 못 가고를 참견하는 것과 같다.- P9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미국에 살고 싶다는 꿈이 있었기에 잘 다니던 일본계 패션 회사를 그만두고 2011년 뉴욕으로 유학을 결심했다. 이미 일본에서 유학에 성공한 경험이 있기에(스물네 살에 120만 원을 들고 일본으로 떠났다. 5년간 알바를 병행하면서 혼자 힘으로 공부를 했고, 스물아홉 살에는 일본계 패션 회사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당연히 뉴욕에서도 잘해낼 줄 알았다. 미국에 가면 얼마 안 돼 언어도, 직장도 다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때 난 내가 일상회화 정도는 되는 영어 실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막상 뉴욕에 와보니 나는 일상회화는커녕 스타벅스에서 커피 하나도 제대로 주문하지 못하는 레벨의 영어를 하고 있었고, 미국 소재의 대학이나 대학원을 나오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외국계 패션 회사에 취업하기가 어렵다는 것, 그리고 막상 취업이 된다해도 취업 비자를 받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P13

영어학원에 가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뉴욕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물가가 너무 비싸고 돈이 많이 드는 곳이었다. 시간만 많고 돈이 없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나보다 먼저 뉴욕에 와서 자리를 잡고 살던 친구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더니 친구는 5불만 내면 되는 요가원이 있으니 한번 가보자고 했다. 그렇게 나는 요가원을 찾아가게 되었다. - P13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2분 샤워는 내 인생을 많이 바꾸어놓았다. 그전까지만 해도 운동 후에는 꼭 깨끗하게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고, 머리를 말리고, 화장을 해야 했기 때문에 운동하는 것보다 이후의 과정이 짐스럽게 느껴져 헬스장을 끊어놓고 한 번 가고 안가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런데 요가 자체에 재미를 느끼다 보니 어쩔 수 없이 2분 샤워에 맞추게 되고, 그러다 보니 화장도 하지 않게 되고, 머리는 자연 건조로 마르게 그냥 내버려두거나 묶게 됐는데 그게 매우, 꽤 괜찮은 것이다. 샤워에서부터 화장까지 한 시간이 걸리던 일상이 2분으로 줄어들면서 58분이라는 시간 동안 센트럴 파크를 걷거나 브라이언 파크에 샌드위치를 사들고 가서 사람들을 구경하며 느긋한 점심을 먹거나 또는 그냥 요가 매트를 깔고 공원에 누워 하늘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조급해지던 2분 샤워는 오히려 내게 느긋함을 선물해줬다. - P29

하다 보면 늘겠지란 막연한 기대로 하루에 비크람 요가 수련 한 번, 빈야사 요가 수련 두 번, 그렇게 무식하게 몸이 벌벌 떨릴 정도로 수련을 하면서 대충 빈야사 요가가 무엇인지 감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빈야사 요가 수업도 핫요가 때처럼 여기저기 수업들을 찾아다니면서 녹음을 하고, 내가 알아듣고 따라서 말하기 쉬운 선생님들의 구령을 받아 적고 조합해서 외우기 시작했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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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ssbaum 2019-06-24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를 매일 꾸준히 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 ! 열정에 박수를 매우 많이 보냅니다. ^^

다락방 2019-06-24 17:47   좋아요 0 | URL
제가 꾸준히 할 수 있는 건 딱히 열심히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책 읽는데 요가에 대한 저의 게으름이 느껴지면서, 아 못하는 건 너무 당연하구나 징징대지 말아야지, 생각했어요. ㅎㅎ

댓글 적어주신 걸 보니, 이제 자주 오시는겁니까?

Nussbaum 2019-06-24 19:30   좋아요 0 | URL
문득 생각해보니 여러 알라딘 이웃에게 댓글을 못달고 있었네요.

알라딘 들러 그냥 눈팅만 하지 말고 안부 인사도 잊지 않고 남기고 해야겠습니다.

blanca 2019-06-24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크람 요가는 안 해봤는데 이거 당장 해봐야겠네요. 저는 홈트합니다. 홈트 요가 ㅋㅋ 한때 요가의 모든 동작을 정복해보겠다고 물구나무섰다가 무서워서 다리 못 내려 죽는 줄 알았어요. 어, 근데 다락방님 어디 아프신가요? 우리 다 같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이 책 전자책 다운받아 놓고 읽지 않았는데 님 페이퍼 보니 읽어봐야겠군요! 다락방님 얘기한 그 인문만화고전 있나 싶어 대여점 갔는데 아쉽게도 없더라고요.

다락방 2019-06-25 07:35   좋아요 0 | URL
저희 센터 같은 경우는 기계로 온도랑 습도를 높이거든요. 한여름에는 기계로 높이지 않고 그저 바깥 온도에 의지합니다. 그래도 충분히 비크람 온도가 되기 때문에요. 5-6월에 홍콩이나 베트남에 가면 비크람 하는 그 온도가 바깥 날씨인 것 같아요. 작년 5월에 여동생과 홍콩에 도착해서 ‘핫요가 날씨다!‘ 하고 둘다 좋아했거든요. 여동생도 핫요가(비크람)를 좋아해서요. 제가 동남아를 좋아하는 건 비크람을 알고 나서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ㅋㅋㅋ

블랑카님, 인문만화 고전은 동네 도서관을 들러보세요! 대여점에는 없을 것 같고요, 도서관이라면 있을 겁니다!!

우리 부지런히 요가 하면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이곳에서 다정하게 지내요!

단발머리 2019-06-24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글에 요가 배울 때의 경험을 읽다보면, 제가 문화센터에서 받았던 요가 수업은 모습은 요가이되 사실은 맨손 체조였던 것 같아요. 저는 힘들지 않았습니다. 결단코.
저랑 같이 했던 언니는 자세마다 최선을 다하느라, 요가만 끝나면 머리가 아프다고 하소연 하셨거든요. 저는, 구령 하나 늦게 시작해서 하나 먼저 끝내버리는 단발머리 신공으로.... 힘들 틈이 없었습니다.
아!! 허리를 구부리지 못 했던 시간이 기억나기는 하네요.

쿤달리니에 대한 이야기 흥미로워요. 오랜 수련 뒤에 외부의 자극 없이 몸이 흔들렸다는 건데, 그게 너무 신기하네요.
내일부터 요가 매트 펴보렵니다!!
아무튼 내일^^

다락방 2019-06-25 07:39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제가 다니는 센터가, 그러니까 제가 가격 비교 해보고 요기죠기 따져본 게 아니라, 걍 집에서 가까워서 들렀다가 등록 안하고 나오기 거시기해서 너무 비싸다...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등록한 센터거든요. 너무 비싸 3개월만 다니고 다음 일은 다음에 생각하자, 했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선생님들 친절하고 한 명 한 명에게 관심 가져주시고 프로그램도 다양하고요. 그래서 걍 2년째 다니고 있어요. 프로그램중에 ‘힐링‘이나 ‘테라피‘라고 그저 스트레칭 위주인 프로그램도 있는데요, 그건 말 그대로 몸을 그냥 기지개 펴듯 뻗어주기만 하는건데, 이것만 해도 너무 힘들더라고요. 빈야사에 비하면 덜힘들지만, 그래도 스트레칭 한시간 만으로도 온 몸이 다 순환되는 기분이에요.

단발머리님이 힘들지 않으셨던 것, 프로그램 자체가 쉽게 구성되어서 였을 수도 있지만, 단발머리 님이 애초에 유연한 몸을 가졌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처음한다고 다들 저처럼 힘들지는 않더라고요. 저는 너무 앉아있는 시간이 길었는지 몸이 썩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지금 쉬고 있으니 다시 썩어들어갈 듯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쿤달리니는 제가 이를 수 없는 경지 같아요. 저 작가의 인스타도 찾아서 들어가봤거든요. 여러가지 이유로 흥미로워서 팔로우도 했어요. 동작 하다가 뭔가 시선이 모이면서.. 저렇게 집중하는건가 싶고...아무튼 이 책은 여러가지로 저에게 인상깊은 책이었어요.


저도 어서빨리 요가 하고 싶네요 ㅠㅠ
 
제가 왜 참아야 하죠? - 참을 만큼 참았으니 이제는 참교육
박신영 지음 / 바틀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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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앞부분 절반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성폭력 사건들에 대해 나온다. 이미 신문기사나 여성학 책들을 통해서 혹은 SNS를 통해서라도 알고 있는 것들이라 새로울 건 없지만, 숱한 성폭력 기록을 읽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다. 제목만 보고 페미니즘 에세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이제 페미니즘 에세이는 좀 건너뛰고 싶은데.. 생각하며 읽었다가 수시로 트리거 눌려서 책장을 덮고 고민했다. 다 읽을까 말까. 묻어두었던 것들을 기어코 꺼내보게 하는 데에서 지쳐버렸달까. 계속 이런 식이라면 내가 이 책을 읽어서 얻는 게 과연 무엇인가.


그러나 2부라도 해도 좋을 뒷부분에서는 저자가 직장내 성폭력을 당하고나서 가해자를 고소한 기록이 나온다. 길고도 힘든 싸움에 지쳤을텐데 끝까지 싸운 기록을 읽노라니, 이 기록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힘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것처럼 가해자는 자신은 성폭력범이 아닌, 피해자와 사랑하는 사이었음을 핑계로 대고 있고, 피해자가 이 재판을 포기하게끔 협박하기 위해 자기랑 친하다는 조폭 형들까지 부른다. 그런데도 끝까지 싸운다니, 정말 대단하다. 그런 저자가 이 모든 과정을 끝내고 싸움꾼이 된 건 너무 당연한 게 아닐까. 그녀는 이제 마트에서 젊은 여자캐셔에게 시비거는 할아버지에게 으르렁 댈 수 있는 싸움꾼이 되었다.


세상의 모든 버텨준 이들에게, 싸워준 모든 이들에게 고맙다.



이 책은 페미니즘 입문서라고 봐도 좋을텐데, 이미 꼴페미라면 건너 뛰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러나 페미니즘에 대해 얘기할 친구도 별로 없고 페미니즘을 알고 나니 좀 외로워졌다면, 싸움꾼이 되고 싶은데 격려가 필요하다면, 그런 사람들에게는 꽤 도움이 될 것 같다. 아, 그리고 혹여라도 성폭행 가해자 고소를 앞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확실히 도움이 될 것이다.






1993년 유엔이 채택한 ‘여성폭력철폐선언‘을 볼까요. 제1조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사적·공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신체적·성적·심리적 해악과 여성에게 고통을 주거나 위협하는 강제와 자유의 일방적 박탈 등 젠더에 기초한 모든 폭력 행위‘로 정의내리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육체에 영향을 미쳐야 성폭력인 것은 아닙니다.
여성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심리적 폭력도 성폭력입니다. 여성을 독립된 인권을 지닌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기에 나오는 온갖 언어폭력들도 다 성폭력입니다. 남성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고 외모를 가꿀 것, 남성 밑에 있을 것, 남성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말을 하거나 표정을 짓지 말 것, 남성을 대할 때는 항상 유순한 표정을 지을 것을 강요하는 것도 성폭력입니다. 사회적 통념에서 비롯된 성폭력입니다.- P45

피해망상 남성들이 성폭력 사건 기사에 마치 전통 민요 메들리마냥 꾸준히 되풀이해서 다는 댓글이 있습니다. 꽃뱀 타령과 무고 타령이죠. ‘여자가 지목만 하면 무조건 처벌받아 무고한 한 남자의 일생이 끝장난다‘는 말들, 다 뻥입니다. 일반 범죄 사건의 기소율은 85%인데 성폭력 범죄는 절반 정도밖에 안 됩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아무리 중한 피해를 입어도 증언에 빈틈이 있으면 그 사건은 기소되지 않습니다. 피해 여성의 지목과 증언만으로 남성이 처벌받아 일생을 망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범죄자가 증거 부족으로 기소되지 않고 무혐의를 받는 사례가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도 주위에 무고하게 성범죄자로 몰린 남성들이 많다면, 그것은 단지 성범죄자 남성이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이 저지를 범죄를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P210

그런데 이런 무고죄 맞고소는 굉장히 한국적인 현상이라고 합니다. 2018년 3월 12일 루스 핼퍼린-카다리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 부의장이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카다리 부의장은 ˝미투 운동 이후 무고나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움직임이 늘어나는 모습은 한국의 독특한 현상˝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례를 본 적이 없고 이게 얼마나 강력한 전략인지 정부가 인식하고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며 한국 정부가 성폭력 실태 개선을 위한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미투 운동이 일어난 후 현재는 형사 조사와 재판이 끝날 때까지 성폭력 사건에 대한 피의자의 무고죄 접수를 안 받아주도록 정부가 조취를 취했습니다.-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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